분류 전체보기 222

능선

능선稜線 황송문 오르기 위해서 내려가는 나그네의 은밀한 탄력의 주막거리다. 옷깃을 스치는 바람결에도 살아나는 세포마다 등불이 켜지는 건널목이다, 날개옷이다. 음지(陰地)에 물드는 단풍같이 부끄럼을 타면서도 산뜻하게 웃을 적마다 볼이 파이는 베일 저쪽 신비로운 보조개…… 주기적으로 수시로 물이 오르는 뿌리에서 줄기 가지 이파리 끝까지 화끈거리면서 서늘하기도 한 알다가도 모를 숲 그늘이다. 불타는 단풍을 담요처럼 깔고 덮고 포도주에 얼근한 노을을 올려보는 女人의 무릎과 유방 사이의 어쩐지 아리송한 등산광이다. 개살구를 씹어 삼킬 때의 실눈이 감길 듯이 시큰거리는 봉우리에서 봉우리로 이어지는 산등성이의 곡선(曲線)…… 쑤시는 인생의 마디마디 오르기 위해서 쉬어 가는 주막거리의 재충전이다. 창백한 형광등 불빛 ..

황송문 대표시 2020.12.28

선풍

선풍禪風 황송문 노을이 물드는 산사에서 스님과 나는 법담(法談)을 한다. 꽃잎을 걸러 마신 승방에서 법주(法酒)는 나를 꽃피운다. 스님의 모시옷은 구름으로 떠 있고 나의 넥타이는 번뇌로 꼬여 있다. “자녀(子女)는 몇이나 두셨습니까?” “사리(舍利)는 몇이나 두셨습니까?” “더운데 넥타이를 풀으시죠.” “더워도 풀어서는 안 됩니다.” 목을 감아 맨 십자가 책임을 풀어 던질 수는 없다. 내 가정과 국가와 세계 가슴앓이 꽃들을 버릴 수는 없다. ●평설(評說) - 한 사람은 속세 인간이고 한 사람은 도를 닦는 스님인데, 각기 자기의 내공(內攻)으로 선문답(禪問答)을 주고 받는다. 그런데 스님의 선문(禪問)을 받아내는 속세 인간의 내 공이 만만치 않다. 대덕(大德)의 고승(高僧) 앞에 흐트러지지 않 은 자세로 ..

황송문 대표시 2020.12.21

가야산에서

가야산에서 황송문 말하지 말아라. 세속의 쓰레기를 버리지 말아라. 도시의 문명을 지껄이지 말아라. 돌을 다듬으며 부드러운 물의 손길로 돌을 다듬으며 천년을 흐르는 물소리 가슴으로 들으며 구름 속 웃음 짓는 반월(半月)같이 눈으로만 말하라. 밤새도록 흐르는 물은 음악가였다. 바위틈에 푸른 소리로 연주하는 자연은 위대한 악성(樂聖), 풀잎으로, 바람으로, 별떨기로 오오, 은하수로 악보를 그리며 和音으로 말하는 음악가였다. 말하지 말아라. 암유(暗喩)를 눈치 채지 못한 말의 쓰레기는 꺼내지도 말아라. 여름, 해맑은 가슴 풀어 흐르는 저 물소리 밤새도록 번뇌(煩惱)를 씻어 내리는 저 물소리 오오, 내 말의 부끄러움, 허튼소리의 부끄러움이여! 손조차 담글 수 없는 그대 맑고 찬 말씀, 눈이 시려 볼 수 없는 눈이..

황송문 시전집 2020.12.16

섣달

섣달 황송문 소복(素服)의 달 아래 다듬이질 소리 한창이다 . 고부(姑婦)의 방망이 딱뚝 똑딱 학울음도 한밤에 천리를 난다. 참기름 불은 죽창(竹窓) 가에 졸고 오동꽃 그늘엔 봉황(鳳凰)이 난다. 다듬잇돌 명주 올에 선을 그리며 설움을 두들기는 오롯한 그림자 떼 지어 날아가는 철새 울음 은대야 하늘에 산월(産月)이 떴다. ● 시작노트 - 시는 명료성과 모호성이 섞여있기 때문에 상징과 은유로 은폐되어 있는 詩語를 눈치채야겠습니다. 이 시는 흰옷 입은 고부간에 다듬이질을 하는데 그 소리가 딱뚝딱뚝이 아니라 딱뚝 똑딱으로 다르게 되어있습니다. 소리가 다른 까닭은 고부간의 처지가 다르기 때문이겠습 니다. 자식 잃은 설음과 남편 잃은 설음이겠지요. 産月이라는 말로 봐서 며느리는 산모가 되겠습니다. 6.25 전쟁 ..

황송문 대표시 2020.12.14

시-선운사 단풍 (황송문)

선운사 단풍 황송문 바람난 仙女들의 귓속말이다 발그레한 입시울 눈웃음이다. 열이 먹다 죽어도 모를 선악과의 사랑궁이다. 환장하게 타오르는 정념의 불꽃 합궁 속 상기된 사랑꽃이다 . 요염한 불꽃 요염한 불꽃 꽃속에서 꿀을 빠는 연인끼리 꽃물 짜 흩뿌리며 열꽃으로 내지르는 설측음이다 파열음이다 절정음이다. 빛깔과 소리가 바꿔치기 하는 첫날밤 터지는 아픔의 희열이다. 꽃핀 끝에 아기 배었다는 모나리자의 수수께끼다.

황송문 대표시 2020.12.06

전도현상

전도현상 황송문 부친의 방에서 짐을 끌어내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묻습니다. "내 방의 짐은 왜 옮기느냐?" "아버지 방에 뉴트리아를 키우려고요." "그럼 나는 어디서 자느냐?" "아버지는 저희 방에서 자면 됩니다." "그럼, 너희들은?" "저희들은 거실에서 자고요." "불편할텐데------" "사람이 불편해도 뉴트리아를 모셔야 합니다." "?" "우리 가족의 명줄이니까요." "애비 방에 모셨으니 하등동물이 상전이구먼." "돈을 벌면 호강시켜드릴테니 조금만 참으쇼." "돈이 된다면야 따라야지." "돈 없으면 죽는다니까요." ※ 이 시는 허련순의 소설 에서 패러디한 작품임을 밝힌다.

황송문 근작시 2020.12.01

시론詩論

시론詩論 -志操論 황송문 시인은 만년 야당어야 하느니라. 정권에 빌붙어 던져주는 모이를 주워 먹으면 치킨 센터라든지 삼계탕집으로 팔려가느니라. 그러니, 구구우- 던져주는 모이 주워 먹기에 길들지 말아야 하느니라. 시인은 목이 잘릴 수는 있어도 혼까지 잘릴 수는 없느니라. 그러니 아무 말 말고 한자리 하려고 청와대 기웃거리는 못난이는 되지 말아야 하느니라. 黃松文 - 저서 (20권) 등 104권. 선문대 명예교수, 인문대학장 역임. '문학사계' 편집인 겸 주간. 한국현대시인상, 홍익문학상, 전주문학상 등 5개 문학상 수상. 10(2020년 7월 1일)에서 옮김.

황송문 근작시 2020.11.23

촐촐한 밤이면

촐촐한 밤이면 황송문 촐촐한 밤이면 석정(夕汀) 선생님을 떠올린다. 감 껍질이라도 지근거리면서 흰 물새 나는 호수를 꿈꾸는 선생님께 감 껍질은 없어도 포장마차 막걸리로 모실 수 있다면 반가워하시던 선생님. 기분좋게 얼근하시면 송문아, 시론(詩論)보다 더 중한 게 뭔지 아니? 그때는 대답을 못했지만 세월이 흘러 夕汀 선생님 '서정가'를 노래로 듣다가 강물처럼 강물처럼 정겹게 흘러 가면서 남기는 인상(印象)은 훈김인지, 영원히 찍힌 인상도장인지··· ● 황송문黃松文 선문대학교 명예교수, 인문대학장 역임. 발행인 역임. 현 편집인 겸 주간. 저서 (20권) 등 104권. 한국현대시인상 등 5개 문학상 수상. 이 시는 제33호(2020년 10월 13일 발행) 156쪽에서 옮겨 실었음.

황송문 근작시 2020.11.19

문학사계에서 유튜브를 시작합니다.

문학사계에서 유튜브를 시작합니다. 문학사계에서 출간된 시를 힐링명상이라는 주제로 영상을 만들어 올리고 있습니다. 좋은 시들이 계속 올라올 예정이니, 유튜브 구독부탁드립니다. www.youtube.com/channel/UC6zDCklxzobhGc5QRcS4-Xg 힐링명상Healing & Meditation ✍저는 시치료전문 심리치료사 그레이시 GRACY 라고 합니다. 이곳 힐링명상에 업로드되어 있는 모든 영상은 제가 심리치료했던 경험을 살려 만든 것입니다. 이 채널을 방문하시는 분들이 마음의 www.youtube.com

샘도랑집 바우

샘도랑집 바우 황송문 가까이 가지도 않았습니다. 탐욕의 불을 켜고 바라본 일도 없습니다. 전설 속의 나무꾼처럼 옷을 숨기지도 않았습니다. 그저그저 달님도 부끄러워 구름 속으로 숨는 밤 물소리를 들었을 뿐입니다. 죄가 있다면 그 소리 훔쳐들은 죄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그 소리는 꽃잎이 되고 향기가 되었습니다. 꺼질 벗는 수밀도의 향기------ 밤하늘엔 여인의 비눗물이 흘러갑니다. 아씨가 선녀로 목욕하는 밤이면 샘도랑은 온통 별밭이 되어 가슴은 은하(銀河)로 출렁이었습니다. 손목 한 번 잡은 일도 없습니다. 얘기 한 번 나눈 적도 없습니다. 다만 아슴푸레한 어둠 저편에서 떨어지는 물소리에 정신을 빼앗겼던 탓이올시다. 시원(始原)의 유두(乳頭) 같은 물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머리카락으로 목덜미로 유..

황송문 대표시 2020.1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