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송문 시전집 18

봄이 오는 소리

봄이 오는 소리 황송문 물을 사랑하는 봄이 물소리를 내지르네 불을 사랑하는 봄이 불지르며 다니네 물과 불을 중매서는 바람은 박하사탕 먹고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아질아질 신명 도지네 봄햇살이 물을 길어 올리네 느릅나무 속잎 피는 굽이굽이마다 뿌리에서 줄기로 가지로 잎으로 박하사탕 화안하게 얼사쿠 일어나네 봄물결이 불을 안고 피어오르네 능선과 계곡과 계곡과 어깨와 어깨와 허리와 허리와 능선과 계곡끼리 능선과 계곡끼리 청실홍실 어울어져 꽃을 피우네 봉오리 봉오리 젖꼭지 같은 꽃봉오리 달거리보다도 더 진한 꽃봉오리 능선에 오른 꽃은 해와 입맞추고 해는 눈 녹은 골짜기에 내려 사랑의 궁전에 뿌리를 내리고 뿌리는 깽맥깽맥 물을 길어 올리네 물과 불을 중매서는 봄바람이 살랑살랑 산마루는 골짜기에서 얼사쿠나 아롱아롱 열..

황송문 시전집 2021.02.17

마이애미 소라

마이애미 소라 황송문 하늘 가득히 마음을 비우고 있어요. 바다 가득히 마음을 넓히고 있어요. 모든 것 아낌없이 다 빼주고 빈 껍질로 돌아앉은 별을 담는 소라의 아픔…… 하루, 이틀, 사흘…… 빈 가슴에 바람이 들어 귓속 윙윙 울고 있어요. ●1987년 미국 여행 중 마이애미에서 쓴 시입니다. 하늘을 보거나 바다를 보거나 사막을 달리면 마 음이 넓어져서 용서하기가 쉬워지게 되는가 봅니다. 그래서 시인이 되기 전에 사람이 되어야 한다 는 말이 천사만려(千思萬慮)해도 옳은 것 같습니다.

황송문 시전집 2021.02.01

산에서는

산에서는 황송문 산에서는 세속의 잡담을 지껄이지 말아라. 맑은 공기와 맑은 물 웃음 짓는 햇빛을 보아라. 나뭇잎 풀잎들은 손짓을 하고 꽃들이 반기거늘 먼지와 기름때를 왜 게워내느냐. 침묵하는 산이 입이 없어서 조용한 줄 아느냐. 바위처럼 묵언(黙言)으로 말하고 흙처럼 지평으로 참으며 청명한 하늘에 구름이 떠돌 듯 말 없는 가운데 산 높고 골 깊은 말, 우리도 그 말 없는 말로 고요함이 장을 서게 해야 하느니라. ●진리는 단순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복잡한 세상사도 문예 작품으로 거듭나게 되면 단순해지게 됩니다. 이것은 평범을 가장한 비범함이라 하겠습니다. 이 시에도 평범을 가장한 비범함이 스며있겠는데, 독자는 모호하게 은폐된 시어(詩語)를 눈치채야 합니다. 시어는 설명이 아니고 표현되어있기 때문입니다.

황송문 시전집 2021.01.29

연애는

연애는 황송문 연애는 눈 오는 밤에 화롯가에서 해야 하느니라. 아무도 찾아올 이 없는 강설(降雪)의 산골 눈 쌓여 교교한 밤에 단둘이 화롯가에서 밤새도록 이야기꽃을 피워야 하느니라. 눈이 내리고 눈이 쌓여서 돌아갈 수 없는 밤 이야기도 조곤조곤 밤이랑 구워 먹으며 (아라비안 나이트처럼) 꿈같은 이야기를 늘여야 하느니라. 이야기를 끝없이 밤새도록 늘이고 늘이고 순백의 눈길 추억의 발자국을 남기며 밤새도록 늘여가야 하느니라. 연애는 눈 오는 밤에 화롯가에서 해야 하느니라. ●밤이란 정서(情緖)의 영양이 풍부합니다. 그래서 “문학의 밤”은 있어도 “문학의 낮”은 없습니다. 햇빛만 필요한 게 아니고 달빛도 필요하듯이, 역사만 필요한 게 아니라 신화도 필요하다 하겠습니다. “연애는 눈 오는 밤에 화롯가에서 해야”..

황송문 시전집 2021.01.18

가야산에서

가야산에서 황송문 말하지 말아라. 세속의 쓰레기를 버리지 말아라. 도시의 문명을 지껄이지 말아라. 돌을 다듬으며 부드러운 물의 손길로 돌을 다듬으며 천년을 흐르는 물소리 가슴으로 들으며 구름 속 웃음 짓는 반월(半月)같이 눈으로만 말하라. 밤새도록 흐르는 물은 음악가였다. 바위틈에 푸른 소리로 연주하는 자연은 위대한 악성(樂聖), 풀잎으로, 바람으로, 별떨기로 오오, 은하수로 악보를 그리며 和音으로 말하는 음악가였다. 말하지 말아라. 암유(暗喩)를 눈치 채지 못한 말의 쓰레기는 꺼내지도 말아라. 여름, 해맑은 가슴 풀어 흐르는 저 물소리 밤새도록 번뇌(煩惱)를 씻어 내리는 저 물소리 오오, 내 말의 부끄러움, 허튼소리의 부끄러움이여! 손조차 담글 수 없는 그대 맑고 찬 말씀, 눈이 시려 볼 수 없는 눈이..

황송문 시전집 2020.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