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록담 백록담 황송문 저승에 가게 될 때에는 눈꽃 숲을 거쳐서 그대를 찾으리. 하얀 잠옷 풀어내리며 나신을 보여주던 그 기막힌 신비의 베일 속에서 법주로 종명을 꽃피우리. 눈꽃 숲 속에서 내가 꽃필 때 꽃가지에 내린 눈잎 같이 바래진 영혼이 햇살에 날으리. 황송문 시창작 2023.11.20
산길 산길 황송문 우정이란, 사랑이란, 또는 인연이란 산길 같다고 산들이 넌지시 말해 주었다. 자주 다니면 길이 나지만 다니지 않으면 길이 사라진다고 바람처럼 말해 주었었다. 다니지 않으면 수풀이 우거져 길은 사라지고 우정도, 사랑도, 인연도, 묵정밭처럼 쓸모없게 된다고. 황송문 시창작 2023.11.13
몽블랑 스페어 잉크 몽블랑 스페어 잉크 황송문 할아버지는 붓으로 상소문을 쓰시고 아버지는 연필로 서한문을 쓰시고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연필로 한글과 한문을 쓰다가 중학교 다닐 때부터는 펜으로 잉크를 찍어서 쓰다가 펌프 만년필과 튜브 만년필 조강지처 같은 만년필을 애지중지하다가 첩실 같은 볼펜과 떨어져 살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한 눈 똥그란 볼펜은 나를 노려보다가 생활의 기름이 다 떨어지면 쓰레기통 아무데나 버림을 받았다. 세월은 바야흐로 컴퓨터가 들어와 워드프로세서로 글을 쓰게 되었다. 그러나, 그러나 세상은 아무리 변해도 조강지처를 버릴 수는 없다. 전당포 먼지처럼 해묵은 만년필을 찾아내고 남대문 수입품 상가를 찾았다. 몽블랑 스페어 잉크를 찾았으나 하늘색 잉크가 보이지 않았다. 어두운 세상 같은 검은 잉크를 사서 들.. 황송문 시창작 2023.11.06
향수 향수 황송문 고추잠자리가 몰려오네 하늘에 빨간 수를 놓으며 한데 어울려 날아오네. 어느 고향에서 보내오기에 저리도 빻갛게 상기되어 오는가. 저렇게 찾아왔던 그 해는 참으로 건강한 여름이었지. 그대 꽃불 같은 우리들의 강냉이 밭에는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지. 잔모래로 이를 닦으시던 할아버지의 상투 끝에 맴돌던 잠자리같이 강냉이 이빨을 흉내내며 단물을 빨던 나의 눈앞에 떼지어 오는 고추잠자리는 누가 보낸 전령인가. 어디서 오는 전령이기에 노스탤지어의 손을 흔들며 저리도 붉게, 가슴 이리저리 맴돌며 오는가. 황송문 시창작 2023.10.30
돈황의 미소 돈황의 미소 황송문 햇빛도 들지 않는 / 밀폐된 막고굴 속에서 / 천년 먼지 속에 꽃핀 미소를 바라본다. // 배시시 웃는 영산홍은 아니고 / 미소 살짝 스치는 살구꽃 언저리 / 뭐라 말할 수 없는 침묵의 꽃 / 세상 번뇌가 먼지를 먹고 거듭난 끝에 / 바위의 기지개가 미소꽃을 피웠네. // 아무리 어두운 흑암지옥에서도 / 아무리 숨막히는 무간지옥에서도 / 빙그레 미소하는 대자대비의 꽃 / 노을 한 자락 스치는 미소의 극락 // 접시의 참기름불 / 가물가물 스치는 극락 한나절 / 천 년 전 고승의 꽃노을을 보았네. 황송문 시창작 2023.10.23
도마질 소리 도마질 소리 황송문 새벽잠에서 깨어날 때 / 무의식의 늪에서 의식의 호수로 찰랑찰랑 남살남실 깨어날 때 일출처럼 환하게 솟아오르면서 / 다독거리면서 어루만지는 심장소리가 식물성으로 들려요. 아내가 식칼로 무를 써는 소리 / 당근과 오이를 써는 소리 / 양파와 풋고추 써는 소리가 들려요 행주치마가 검어질수록 김치찌개 얼큰한 맛이 살고 / 도마에 상처가 나듯 주름살이 깊어질수록 /들깨 갈아부은 토란국은 은은한 조선 여인의 손맛이 살아요. 황송문 시창작 2023.10.16
강의실 정경 강의실 정경 황송문 일본인 여교수 / 사미센의 목소리 / 화사하게 날리는 / 시쿠라 꽃잎 / 흑판엔 춤추는 히라가나. 중국인 여학생의 / 빨간 미소 / 매화 겨드랑에 이는 / 사춘의 바람 / 사성으로 오르내리는 / 물새소리. 미국인 여학생 / 웃음소리는 / 조선 닭 알 낳고 / 홰치는 소리 / 참깨밭에 쳐드는 / 햇살의 이빨. 호주인 학생 / 수염에서 떨어지는/ 계곡의 물소리 / 바람 소리. / 나는 말없는 / 石窟庵大佛--- 1975년 일본 남산대학에서 황송문 시창작 2023.10.09
기원에서 기원에서 황송문 바둑이란 무엇입니까? - 인생을 살펴 가는 것이다. 인생이란 무엇입니까? - 정석을 놓아 가는 것이다. 절석이란 무엇입니까? - 인지당행지도니라. / 도란 무엇입니까? - 시와 같은 것이다. 시란 무엇입니까? - 죽은 수를 찾는 것이다. - 바둑을 어떻게 두어야 합니까? - 잘못 둔 인연은 단념해야 한다. 왜 단념해야 합니까? - 인정에 이끌리면 갇혀 죽는다. 죽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 무다. / 무는 무엇이니까? - 유다. 유와 무는 무엇입니까? - 있다가도 없는 바둑판이다. 바둑판은 무엇입니까? - 인생이다. / 인생이란 무엇입니까? - 정석이다. 황송문 시창작 2023.10.02
칡차 칡차 황송문 오늘은 내 나라 칡차를 들자. / 조상의 뼈가 묻힌 산 / 조상의 피가 흐른 산 // 조상 대대로 자자손손 /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 묻힌 산 // 그 산 진액을 빨아올려 사시장철 뿌리로 간직했다가 / 주리 틀어 짜낸 칡차를 받아마 시고 / 내가 누구인가를 생각하자. // 칡뿌리같이 목숨 질긴 우리의 역사 / 칡뿌리같이 잘려 나간 우리의 강토 / 내 흉한 손금 같은 산협(山峽)에 / 죽지 않고 살아 남은 뿌리의 정신, / 흙의 향기를 받아 마시자. // 어제는 커피에 길들여 왔지만 / 어제는 정신없이 살아왔지만 / 오늘은 내 나라 칡차를 들자. 황송문 시창작 2023.09.25
아파트 항아리 아파트 항아리 황송문 계백장군의 발성. / 욕되게 사느니 / 차라리 내 손에 죽어라고 / 쳐들었던 망치를내려치자 / 대물림 받은 항아리가 비명을질렀다.// 봄부터 가을까지 / 햇볕애 거풍시키고 / 흰구름도 놀다 가게 뚜껑을 열며 / 풍신한 몸매 물걸레질하던 / 할매와 어매도 비명을질렀다.// 조상 대대로 대물려 내려온 / 흙의 파편들을 / 경비 아저씨는 종량 봉투에 버리란다. / 김치는 냉장고에 두고 / 간장을 한 병씩 사먹 으면 되는 / 편리한 세상에 계백이 죽는다. 황송문 시창작 2023.0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