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222

선풍禪風

선풍禪風 황송문 노을이 물드는 산사에서 / 스님과 나는 법담(法談)을 한다. 꽃잎을 걸러마신 승방에서 / 법주(法酒)는 나를 꽃피운다. 스님의 모시옷은 구름으로 떠있고, 나의 넥타이는 번뇌로 꼬여있다. "자녀는 몇이나 두셨습니까?" "사리(舍利)는 몇이나 두셨습 니까". "더운데 넥타이를 풀으시죠." "더워도 풀어서는 안 됩 니다." 목을 감아 맨 십자가 / 책임을 풀어 던질 수는 없다. 내 가정과 국가와 세계 / 앓고 있는 꽃들을 벌리 수는 없다. ************************************ *시작 노트 - 질 높은 해학의 정조(情調)가 웃음을 머금게 한다. 한 사람은 속중(俗衆)이고 또 한 사람은 도를 닦는 스님인데, 각기 내공으로 선문답을 주고받는다. 스님의 선문(禪問)을 받아..

황송문 시창작 2023.04.24

아름다운 것

아름다운 것 황송문 보내놓고 돌아와 / 틀어박는 쐐기는 아름답다. // 쐐기의 미학으로 / 눈물을 감추면서 / 피어나는 웃음꽃은 아름답다. // 기다림에 주름 잡힌 얼굴로 / 쏟아져 내리는 / 햇살의 만남은 아름답다. 태양의 미소와 / 바람의 애무 / 눈짓하는 나무는 아름답고 / 지저귀는 새는 아름답다. 아름다운 것은 / 눈짓하는 나무와 / 지저귀는 새 / 떠난 이의 뒤에서 헛웃음치는 아픔이다. 보내놓고 돌아와 / 짜깁는 신경의 잔을 기울이며 / 하루를 천년 같이 기다리는 노을이다. 노을 담긴 그리움이 / 한으로 괴이어 / 떠낸 시의 잔에 넘치는 술의 입술이다.// 아름다운 것은 / 산불로 타오르던 나무 / 뚫린 가슴에 / 울며 울며 쐐기를 지르는 / 망각의 술 기다림의 잔이다. *************..

황송문 시창작 2023.04.17

자운영紫雲英

자운영紫雲英 나는 그녀에게 꽃시계를 채워주었고,/ 그녀는 나에게 꽃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꿀벌들은 환상의 소리 잉잉거리며 / 우리들의 부끄러움을 축복해 주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만남은 이별 / 보자기로 구름 잡는 꿈길이었다. 세월이 가고 늙음이 왔다 / 어느 저승에서라도 만나고 싶어도 / 동그라미밖에 그릴 수가 없다. 이제는 자운영을 볼 수 없는 것처럼 / 그녀의 풍문조차 들을 수가 없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 나의 추억 속에 살아았는 / 그녀의 미소 / 눈빛과 입술이다. 나는 그녀에게 사랑을 바쳤고 / 그녀는 나에게 시를 잉태해 주었다. *시작 노트 - 우리는 게집이 이들과 자운영 밭에서 서로 꽃반지나 꽃시계, 꽃목걸이를 만들어주기도 하면서 해찰하고 놀았지요. 초등학교 시절에 무슨 사랑입나까...

황송문 시창작 2023.04.10

시래깃국

시래깃국 황송문 고향 생각이 나면 / 시래깃국 집을 찾는다. // 해묵은 뚝배기에 듬성듬성 떠 있는 / 붉은 고추 푸른 고추 / 보기만 해도 눈시울이 뜨겁다. 노을같이 얼근한 / 시래깃국 물 훌훌 마시면 뚝배기에 서린 김은 한이 되어 / 향수 젖은 눈에 방울방울 맺힌다. 시래깃국을 잘 끓여주시던 / 할머니는 저승에서도 / 시래깃국을 잘 끓이고 계실까. 새가 되어 날아간 / 내 딸아이는 / 할머니의 시래깃국 맛을 보고 있을까. 고향 생각을 하다가 / 할머니와 딸아이가 보고 싶으면 / 시래깃국 집을 찾는다. 내가 마시는 시래깃국 물은 / 실향의 눈물인가. / 내 얼근한 눈물이 되어 한 서린 가슴 빙벽을 타고 / 뚝배기 언저리에 방울방울 맺힌다. *시작 노트 - 죽은 딸아이를 앞산에 묻었었다. 그 산이 사라지..

황송문 시창작 2023.04.03

사막을 거쳐왔더니

사막을 거쳐왔더니 황송문 사막을 거쳐왔더니 / 쓰레기 같은 잡념이 타버렸어요. 사막을 거쳐왔더니 / 갈증 심한 욕심이 타버렸어요. 사막을 거쳐왔더니 / 번뇌의 박테리아 / 번식하던 미움이 타버렸어요. 사막을 거쳐왔더니 / 타버린 생각의 잿더미에서 / 살아나는 그리움--- 사막을 거쳐왔더니 / 그리움이 모래처럼 / 산이 되었어요. *시작 노트 - 용서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종교를 가지는 것도, 신을 숭상하는 것도, 멀고 험하고 넓은 곳을 여행하는 것도, 마음을 넓히기 위함이다. 드넓은 사막도 여행하면 마음이 넓어져서 용서하게 된다. 용서하게 되면 우선 자기 마음부터 편해지게 된다. 그리고 범사에 감사하게 된다. 하나님, 부처님, 해님, 달님, 별님, 물 공기 나무 수풀 풀잎 성황당 이웃 사람들 할 ..

황송문 시창작 2023.03.27

돌 황송문 불속에서 한 천년 달구어지다가 / 산적이 되어 한 천년 숨어 살다가 칼날 같은 소슬바람에 염주를 집어 들고 물속에서 한 천년 원 없이 구르다가 / 영겁의 돌이 되어 돌돌돌 구르다가 매출한 목소리 가다듬고 일어나 / 신선봉 화담 선생 바둑알이 되어서 한 천년 운무 속에 잠겨 살다가 / 잡놈들 들끓는 속계에 내려와 좋은 시 한 편만 남기고 죽으리. *시작 노트 - 한수영 교수는 이 시를 가리켜 여유 있는 시관관을 보여준다고 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단위로 되어온 불교의 겁(劫)을 말하면 서, "이 시간의 유장함이야말로 '속도전' 시대에 대한 얼마나 유쾌한 반동인가" 라고 썼다. 온 세상이 '찰라의 미학'에 눈멀어 찧고 까불 때, "나는 시 한 편을 위해 일 겁의 시간을 기다리노라"는..

황송문 시창작 2023.03.20

봄이 오는 소리

봄이 오는 소리 황송문 물을 사랑하는 봄이 물소리를 내지르네 불을 사랑하는 봄이 불을 지르며 다니네. 물과 불을 중매 서는 바람은 / 박하사탕 먹고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아질아질 신명 도지네. 봄햇살이 물을 길어 올리네. / 느릅나무 속잎 피는구비구비마다 뿌리에서 줄기로 가지로 잎으로 / 박하사탕 화안하게 얼사쿠 일어나네. 봄물결이 물을 안고 피어오르네. / 능선과 능선과 계곡과 계곡과 어깨와 어깨와 허리와 허리와/ 능선과 계곡끼리 능선과 계곡끼리 청실홍실 어우러져 꽃을 피우네. 봉오리 봉오리 젖꼭지 같은 꽃봉오리 / 달거리보다도 더 진한 꽃봉오리 능선에 오른 꽃은 해와 입을 맞추고 / 해는 눈녹은 골짜기에 내려 사랑의 궁전에 뿌리를 낳고 / 뿌리는 깽맥깽맥 물을 길어 올리네. 물과 불을 중매서는 봄바람이..

황송문 시창작 2023.03.13

청보리

청보리 황송문 청보리의 / 푸른 정신으로 살고 싶다. 가난한 나라에 태어나 살아도 / 가난한 줄 모르게 수 천 톤의 햇살을 받아들이는 / 양지바른 토양에서 보란 듯이 살고 싶다. 국어보다 영어를 더 잘 가르치는 / 그런 사대의 사내새끼가 아니라 자가용 열쇠를 빙글빙글 돌리면서 / 어깨를 으쓱거린다거나 면사포 쓰고 / 불독 같은 놈에 들리어가면서도 하이힐 코빼기를 까딱거리는 / 정신 티미한 계집의 헤픈 웃음은 말고, 짓밟히면서도 일어서는 / 청보리의 사상, 농부의 뚝심으로 살아나는 / 그 푸른 정신으로 살고 싶다.

황송문 시창작 2023.03.06

봄의 메시지

봄의 메시지 황송문 정신결핍증을 앓는 이는 오세요. 몰인정의 아픔을 참는 이는 오세요. 진실이 사랑받는 꽃시장에서는 버들강아지의 봄이 한창입니다. 머리 내두르던 이는 겸허하게 오세요. 핏대를 세우던 이는 온유하게 오세요. 문명에 찌든 속사람을 데리고 도시의 숨구멍으로 나들이를 오세요. 봄햇살 가득한 웃음꽃을 보세요. 맹물에도 잘 사는 생명들을 보세요. 세상을 모른 채 기쁘게만 사는 봄 사상의 털복숭이를 바라보세요. *****

황송문 시창작 2023.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