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송문 시창작 91

달 황송문 가시내야, 가시내야, 시골 가시내야. 루즈의 동그라미로 빌딩을 오르는 가시내야. 날 짝사랑했다는 가시내야. 달뜨는 밤이면 남몰래 고개 하나 넘어와서는 불켜진 죽창문 건너보며 한숨 쉬던 가시내야. 날 어쩌라고 요염한 입술로 살아 와서는 도시의 석벽을 올라와 보느냐. 저만치 혼자서 창연한 눈빛으로 승천하는 가시내야. 너의 깊은 속 샘물 줄기 돌돌거리는 잠샛별 회포 쌓인 이야기를 일찌감치 들려주지 못하고 어찌하여 멀리 떠서 눈짓만 하느냐. 어느 이승 골짜기에 우연히 마주칠 때 날라온 찻잔에 넌지시 떨구고 간 사연 갖고 날 어쩌란 말이냐. 가시내야, 가시내야. 시골 가시내야. 저 달을 물동이에 이고 와서는 정화수 남실남실 달빛 가득 뒤란의 장독대 바람소리 축수축수 치성을 드리던 어미 죽은 줄도 모르고..

황송문 시창작 2023.09.04

간장

간장 황송문 우리 조용히 살기로 해요. / 우리 기꺼이 죽기로 해요. // 토속(土俗)의 항아리 가득히고여 / 삭아 내린 뒤에 / 맛으로 살아나는 삶 / 우리 익어서 살기로 해요. // 안으로 달여지는 삶 / 뿌리 깊은 맛으로 / 은근한 사랑을 맛들게 해요. // 정겹게 익어가자면 / 꽃답게 썩어가자면 / 속 맛이 울어 날 때까지는 / 속 삭는 아픔도 크겠지요. // 잦아드는 짠맛이ㅣ일어나는 단맛으로 / 울어날 때까지 / 우리 곱게 곱게 썩기로 해요. / 우리 깊이깊이 익기로 해요. // 죽음보다 깊이 잠들었다가 / 다시 깨어나는 / 부활의 윤회(輪廻), // 사랑 위해 기꺼이 죽는 인생이게 해요. / 사랑 위해다시 사는 / 재생(再生)이게 해요. 시작 노트 - 간장이 모든 음식에 들어가 맛을 내듯이, ..

황송문 시창작 2023.08.28

망향가 2

망향가 2 황송문 어매여, 시골 울엄매여! / 어매 솜씨에 장맛이 달아 / 시래깃국 잘도 끓여주던 어매여! 어매 청춘 품앗이로 보낸 들녘 / 가르마 트인 논두렁길을 / 내 늘그막엔 밟아 볼라요! 동짓날 팥죽을 먹다가 / 문득, 걸리던 어매여! // 새알심이 걸려 넘기지를 못하고 / 그리 버 그리버, 울엄매 그리버서 / 빌딩 달 하염없이 바라보며 / 속울음 꺼이꺼익 울었지러 앵두나무 우물가로 시집오던 울엄매! / 새벽마다 맑은 물 길어와서는 / 정화수 축수축수 치성을 드리더니 / 동백기름에 윤기 자르르한 머리카락은 / 뜬구름 세월에 파뿌리 되었 지러. // 아들이 유학을 간다고 / 송편을 쪄가지고 달려오던 어매여! // 구만리장천에 월매나 시정 허꼬 / 비행기 속에서 먹어라, 잉! // 점드락 갈라면 월매..

황송문 시창작 2023.08.21

가을 연주

가을 연주 황송문 달빛이 풀잎을 연주한다. / 달빛이 활을 쥐고 / 바이올린을 켜는 / 풀 푸른 소. // 은하(銀河) 이슬이 흐른다. / 강물은 비늘을 털고 / 악보의 눈들이 반짝인다. // 풀꽃에 자지러지는 바람 / 천연(天然)의 머리카락이 흩날린다. // 풀잎은 풀잎끼리 / 별빛은 별빛끼리 / 볼을 비 벼대는 / 애무의 밤 / 지칠 줄 모르는 연주 / 나도 하나의 활이 된다.

황송문 시창작 2023.08.14

바다 운동회

바다 운동회 황송문 잔잔할 때는 / 푸른 유니폼, 파란 유니폼을 입은 / 여고생 들의 체조시간 / 부드러운 파도타기 매스게임이 한창이다. 풍랑이 일 때는 / 백마 떼의 경마장 / 우렁찬 함성과 함께 / 소금 먼지를 일으키면서 / 물비늘 찬란히 무섭게 질주한다. 도마뱀 떼 지그재그 / 끝없는 되플이로 살아나는 바다는 / 죽었다 깨어나는 성애의 시원(始原) / 방파제를 물어뜯으며 / 대자연의 도서들을 집이삼킨다. // 바다는 광의(廣義)의 도서관 / 산적한 채석강의 책무더기들 / 죽고 살고 읽겠다고 / 온몸 부딪쳐 통독(通讀)하는가 / 신(神)의 창조를 몸짓하는 / 청소년들의 운동회가 한창이다.

황송문 시창작 2023.08.07

시를 쓰는 일은

시를 쓰는 일은 황송문 시를 쓰는 일은 인생을 등기하는 일이다. 시를 쓰는 시간은 순간을 영원에 등기하는 시간이다. 눈 깜짝할 사이의 시간과 공간--- 순간을 영원히 티끌은 우주에 공손히 등기하는 일이다. 등기권리증이 소용없는 형이상학적 등기 촛불처럼 피었다 사라지면서 밝히고 사라진 빛과 그림자 이승에서 저승까지 등기하는 일이다. - 제121호(2023년 여름)에서-

황송문 시창작 2023.07.31

열병熱病

열병熱病 황송문 나는 오늘 장작을 팬다. / 위선이 양복을 벗어던지고, / 가식의 넥타이도 풀어 던지고, 구릿빛 등살을 드러낸 채 / 손바닥이 부르트고 팔목이 시도록 / 온종일 땀 흘리며 장작을 팬다. 결이 고운 것은 제쳐두고, 결이 나쁜 놈들만 골라잡아서 / 혼신으로 내려찍어 장작을 팬다. "얘, 야야, 몸조심해라! /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힐라!" 근심으로 주름 잡힌 할아버지는 / 걱정이 되시는 모양이지만, / 열병 앓는 젊은 놈 눈에는 뵈는 게 없기 때문에 / 할아버지의 무서움도 내려 찍는다. 어둠 속 배알이 뒤틀린 놈들 / 어둠 속 혓바닥이 배배 꼬인 놈들 / 오기의 모가지 뒤틀린 놈들 어둠 속 고집의 관솔이 박힌 놈들 / 어둠 속 끈끈한 송진으로 / 도끼날을 붙들어 매면서 독버섯과 동거한 놈들을 ..

황송문 시창작 2023.07.24

웃기는 시와 울리는 시

웃기는 시와 울리는 시 황송문 노교수가 학생들에게 물었다. / "6.25가 몇 년도에 일어났느냐"라고. / 그러나 모두들 꿀 먹은 병어리였다. // 절망하기 싫은 명예교수가 /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 다시 물었다. "올해가 단기 몇 년이냐"고. / 역시 모두들 꿀 먹은 벙어리였다. // 분단의 원인도 모르고 / 제 나라 생년도 모르는 반거들충이들 / 지구가 반칙을 일삼고 / 병이 깊어지니까 하늘도 노하여 / 빈 하늘에 헛수고를 한다.// 별들이 쏜살 같이 사정하며 떨어지는 / 하느님의 혼불 / 신(神)은 돌아가셨는가. // 달콤한 연인들 휴대폰 속에서 / 영어 컴퓨터 필수과목에 밀려 / 문사철(文史哲)이 종명(終命)을 고하자 / 마지막 씨있는 말을 하겠다고 / 노교수가 교탁에서 분신 자살했다. // 머리..

황송문 시창작 2023.0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