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송문 시창작

제3부 시의 표현

SM사계 2012. 7. 30. 10:24

 

 

제3부 시의 표현

1. 의도와 표현

요즈음은 시를 쓴다고 하지만, 과거에는 시를 읊는다거나 시를 짓는다고 하였다. 시를 읊는다는 말은, 시가(詩歌)라는 말이 성행하던 시절에 시와 노래가 따로 구분되지 않고 같은 뜻으로 통용되던 그 시음(詩吟)을 가리켜 이르는 말이다.

그 다음으로 시와 노래가 구분되면서 시로 독립되어 나왔는데, 이 때부터는 시를 짓는다고 하였다. 이 ‘짓는다’는 말에는 창작의 의미가 다분히 들어있는데, 여기에는 ‘농사를 짓는다’거나 ‘옷을 짓는다’고 할 때의 그 ‘경작(耕作)’에 있어서의 지을 작(作)을 의미한다.

농부가 논밭을 경작하는 경우처럼, 시를 짓기 위해서는 우선 마음의 밭을 제대로 경작할 줄 알아야 한다. 농부가 농사를 효과적으로 짓기 위해서는 우선 경지정리(耕地整理)가 요구된다. 경지정리란 토지의 이용가치를 높이기 위하여, 경지의 구획정리나 배수시설, 관개시설, 객토작업, 농로개설 등을 시행하는 일을 말하는데, 문학에 있어서도 역시 언어의 질서라든지, 시어의 품격을 높이기 위해서 필요불가결의 요소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가령 언어 또는 시어를 마치 의복을 짓는 천으로 비유한다면, 질이 좋지 않은 하품(下品)의 질로써 품위있는 옷을 지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글을 쓰기 전에 우선 질좋은 언어의 실(특히 시어)을 뽑아 낼 수 있는 사람됨이 요구된다 하겠다.

이와 관련된 내용이 되겠지만, 그 다음으로 강조하고 싶은 말은 ‘언어의 깊이갈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의 ‘깊이갈이’라는 말은 땅을 깊이 간다는 뜻으로, 농부가 많은 소출을 위하여 쟁기를 세워서 깊이 가는 행위를 말한다.

생땅이 파여져서 뒤집혀 올라올 정도로 깊이갈이를 하는 농부처럼, 좋은 시를 지으려는 문학 지망생이나 시인은 사고(思考)의 심화(深化)를 꾀하게 된다. 사고의 심화 없이는 내용있는 시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차원 높은 종교적 상상력이라든지, 심오한 철학적 인식, 윤리의식이나 사회의식, 또는 역사의식이나 작가적 양식 등등 양질의 사고 영역의 심화와 확대가 요구되는 그 사고 영역의 범위, 또는 심도에 따라서 시 작품의 질량에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학생들과 함께 조국을 순례한다거나 선조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문학 현장을 답사하는 경우에 역사의식이 없는 학생은 차창에 전개되는 만산평야를 보면서도, 별다른 생각을 갖지 못하기 마련이다. 그저 새롭고도 아름다운 풍경에 대해 감탄하는 정도가 고작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기가 지닌 만큼만 볼 수 밖에 없다고 하는 인식의 이치를 터득하게 된다.

사물을 바라보는 작자의 눈을 카메라의 렌즈로 가정하고 생각한다면, 어떤 종류의, 또는 어떤 성능의 렌즈냐에 따라서 그 만큼 밖에 볼 수 없게 되고, 촬영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따라서 사물을 보는 인식의 눈을 역사를 통찰하는 거시적인 망원경적 눈과 사회 구석구석, 아니 그 이면까지도 꿰뚫어 보는 미시적인 현미경적 눈을 동시에 지녀야 한다.

나무를 애지중지 길러온 가정집 주인과 그 집 주인이 필요로 하는 아름다운 정원을 꾸미기 위해서 불러온 정원사가 있다고 가정하게 될 때, 그 집 주인과 정원사 사이에는 견해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 집 주인은 정원수를 기르는 동안에 애정을 가지고 가꾸어 온 나무들에 대해서 애착이 있을 수 있겠고, 정원사의 처지로는 그보다 앞으로 아름답게 꾸며야 할 정원의 성공적인 형태에 더 많은 관심이 있을 수 있겠기 때문이다.

물론, 집 주인이라고 해서 앞으로 꾸며지게 될 정원에 대해서 정원사보다 관심이 못하지 않을 수 있다. 아니, 오히려 그는 직접적인 소유주이기 때문에 애착이나 관심은 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름다운 정원을 꾸미는 그 면에 있어서의 전문 지식은 정원사를 따를 수 없다.

시를 쓰는 데 있어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작자의 의도가 아무리 의욕적이라 할지라도 시적인 표현이 이를 뒷받침하여 따라주지 않는다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된다. 여기에서 시적 표현을 위한 기술이 요구된다.

1) 표현을 위한 기교

시를 쓰는 사람들에게는 대부분 나름대로의 어떠한 고정관념이 있다. 자기 나름대로 지니고 있는 어떠한 종류의 표현만을 고집하는 경향이 바로 그것이다. 나무를 보면서 숲을 볼 줄 모른다는 말이 여기에 해당된다.

가령, 돼지우리나 닭장을 짓는 목수가 기와집이나 양옥 또는 빌딩을 지으려고 하는 경우에는, 자기가 그 돼지우리나 닭장을 짓던 방식으로 지을 수 없듯이, 시도 역시 자기의 고정관념만으로 시를 쓸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고정관념에서는 과감히 탈피하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에 시 세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세 편의 시를 읽고 어느 작품이 가장 마음에 든다거나 시답다고 느껴지는지, 한번 골라보기 바란다. 그러면 자기가 어떠한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지 짐작하게 될 것이다.

박넝쿨이 에헤이요 벋을적만 같아선

온세상을 얼사쿠나 다 뒤덮는것 같더니

하드니만 에헤이요 에헤이요 에헤야

초가집 삼간을 못 덮었네.

복숭아꽃이 에헤이요 피일적만 같아선

봄동산을 얼사쿠나 도맡아 놀것 같더니

하드니만 에헤이요 에헤이요 에헤야

나비 한 마리도 못 붙잡데.

박넝쿨이 에헤이요 벋을적만 같아선

가을 올줄 얼사쿠나 아는 이가 적드니

얼사쿠나 에헤이요 하룻밤 서리에 에헤요

잎도 줄기도 노그라붙고 둥근 박만 달렸네.

―김소월의 시 「박넝쿨타령」―

여울에 몰린 銀漁 떼.

삐비꽃 손들이 둘레를 짜면

달무리가 비잉 빙 돈다.

가아응 가아응 수우워얼 래애

목을 빼면 설움이 솟고……

白薔薇 밭에

孔雀이 취했다.

뛰자 뛰자 뛰어나 보자

강강술래.

뇌누리에 테프가 감긴다.

열두발 상모가 마구 돈다.

달빛이 배이면 술보다 독한 것.

기폭이 찢어진다.

갈대가 쓰러진다.

강강술래.

강강술래.

―이동주의 시 「강강수월래」―

얼굴 곁으로

찌그러진 얼굴 한 개가

다가온다.

귀 먹고

눈 먼

두 개의

얼굴이 딱 붙어 있다가

서서히 떨어진다.

그 사이에

끼어들어 가로막는 얼굴,

닿을 듯 그냥 지나가 버리는 얼굴,

눈도 코도 입도 없는

돌처럼 굴러가거나

나무토막처럼 떠 다니는 얼굴들,

어떤건 서로 마주보고

어떤건 서로 노려보고

어떤건 서로 부벼대지만

모두 헛일이다.

어디서

외눈박이 얼굴 한 개가

다가온다.

얼굴은

얼굴을 찾아

에워싸기도 하고

피하기도 한다.

―문덕수의 시 「얼굴의 現象學」―

이 세 편의 시 작품은 모두 설명을 지나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그 표현 기법이나 성격은 각기 다르다. 김소월의 시 「박넝쿨타령」은 인생을 달관한 듯한 내면의식이 우리의 전통적인 4ㆍ4조 율조를 활용하여 효과음을 내고 있다면, 이동주의 시 「강강수월래」는 민속 전래의 율동적 형태를 신선한 사물들을 동원하여 선명한 이미지로 부각시키고 있다. 문덕수의 시 「얼굴의 현상학」은 감정을 배제한 상태에서 ‘얼굴’이라고 하는 사람의 대칭적 사물의 부분적 움직임을 통해서 인생의 다양한 양태를 유추하게 하는 어떤 기하학적 구도를 시도하고 있다.

이는 러시아 영화 예술의 기법에서도 볼 수 있는 몽타즈 효과를 연상케 하기도 한다. 부분과 부분의 움직임과 변화하는 양태를 구조화하여 전체를 암시하는 몽타즈 효과를 말한다. 이러한 시의 기법은 낭만주의에 반기를 든 모더니즘 시에서 볼 수 있는 성향인데, 이 세 편의 시 가운데 자기의 취향에 맞는 시를 선택하여, 그 시가 왜 마음에 드는가 하고 자기 확인의 기회로 삼는 동시에 다른 두 편의 시에 대하여 자기의 태도는 어떠했는가 하는 자성의 기회도 가져볼 필요가 있다.

2) 고정관념과 인식의 전환

고정된 관념이 시 창작에 방해가 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마치 잘못 세워진 집에 새로운 건물을 세우려고 하는 경우, 그 부실한 건물이 방해가 되는 경우와도 흡사하다. 부실한 건물 일부를 뜯어내고 그 공간을 수리할 것인가, 아니면 부실한 기존의 건물을 철거하고 아예 새로운 건물을 지을 것인가 하는 등등으로 고심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대책이 서지 않아서 포기하는 경우도 발생된다.

이러한 경우, 시를 쓰고자 하는 사람은 일체의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을 아낌없이 버릴 필요가 있다. 자기의 그릇된 사고방식이 시 창작에 있어서 저해 요인이 될 수도 있지만, 본인은 그러한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채 쉽사리 버리지 못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자기의 그릇된 시작 태도를 수정하지 않은 채 고집을 세우는 경우는 문제가 된다.

잘못 세워진 건축물이 크면 클수록 그 자리에 새 건축물을 세우기가 쉽지 않듯이, 자존심을 내세울 만큼 시작 태도가 굳어있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좋은 시를 쓰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경우에는 자기 마음을 비울 필요가 있다. 자기가 그동안 길들어 있던 습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과거의 잘못된 고정관념이라는 그릇된 집을 헐어버리고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고정관념을 깨기 위한 인식의 전환을 위해서는 우선 마음을 넓힐 필요가 있다. 자기에게 맞지 않는 것일지라도 수용할 수 있는 포용력이 있어야 한다.

가령 기독교 신앙을 지닌 시인이라 할지라도 불교나 유도, 또는 다른 여타의 종교나 그 종교에서 파생된 문화재를 대하게 될 때는 그것을 이해하려는 수용적 자세가 필요하다. 나는 기독교인이니까, 또는 불교인이니까 하고 다른 여러 문화재에 대해서 몰이해하는 것을 당연시한다면, 사물을 제대로 정관(靜觀)할 수 없기 때문에 정각정행(正覺正行), 즉 올바른 깨달음으로 올바른 창작을 할 수 없게 된다.

영혼의 눈에 끼었던

無明의 백태가 벗겨지며

나를 에워싼 萬有一切가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노상 무심히 보아오던

손가락이 열 개인 것도

異蹟이나 접하듯

새삼 놀라웁고

창밖 울타리 한 구석

새로 피는 개나리꽃도

復活의 示範을 보듯

사뭇 황홀합니다.

蒼蒼한 宇宙, 虛漠의 바다에

모래알보다도 작은 내가

말씀의 신령한 그 은혜로

이렇게 오물거리고 있음을

상상도 아니요, 象徵도 아닌

實相으로 깨닫습니다.

―구 상의 시 「말씀의 實相」―

山이 흐른다. 천 갈래 만 갈래로 물결 일으키며, 산이 너울너울 흐르고 있다. 소나무 참나무 떡갈나무와 철쭉꽃과 산새와 아지랑이도 山을 따라 아득히 흘러가고 있다. 山이 발밑까지 밀려든 都市, 都市의 문명과 영화가 흐르고, 羊새끼 치듯 몇송이 구름이나 가꾸며 사는 하늘이 흐르고, 寶樹와 樓臺와 보살로 들어찬 恒河沙數의 佛國土가 흐르고, 八熱地獄, 八寒地獄, 어둠에 떠밀려서 지옥이 흐르고, 모든 생존의 分子의 原子의 電子가 흐른다. 一切가 흐른다. 내가 흐른다.

滔滔한 물결은 視野를 메운 끝에, 내 손으로 흘러 들어온다. 내 마음의 밑바닥, 千萬年 由旬을 내려가야 하는 그 밑바닥, 位置만 있고 크기라곤 없는 한 點으로 흘러 들어온다. 그리고는 다시 그 點으로부터 滔滔한 물결되어 흘러 나가고 있다. 山이 흐른다. 星座가 흐르고, 달나라 姮娥가 흐르고, 佛陀가 흐르고, 畢竟空이 흐른다. 一切가 흐른다. 내가 흐른다.

―이원섭의 시 「山上에서」―

천주교에 깊은 구상 시인의 시 「말씀의 실상」과 유도와 불교에 깊은 이원섭 시인의 시 「山上에서」를 감상하였다. 이 두 편의 시는 모두 인생과 우주에 관한 존재론과 인식론을 생각케 하는 비범성을 보여주고 있다. 「말씀의 실상」은 존재의 전 영역, 그러니까 ‘말씀’으로 표현되는 절대적인 원존재자와 자아와의 관계에 있어서 특별한 깨달음이 주어지고 있다면, 「山上에서」는 동양적 인간형에 주어지는 호연지기(浩然之氣)라든지, 대장부의 툭 터진 기개가 엿보인다.

이 두 시인이 종교적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았다면 이러한 시는 탄생되지 않았을 것이다. 현실 이상의 어떤 높은 차원의 경지를 나타내는 시의 생산을 위해서는 이러한 예와 같이 종교적 상상의 세계에서 생산적 상상을 통하여 형상화하지 않으면 안된다.

3) 피상적 언어와 입체적 시어

시는 그림(특히 서양화)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좁은 공간의 언어에 많은 의미를 담기 위한 복합적 이미지를 거느리기 마련이다. 그저 눈에 띄는 대로, 생각 나는 대로 적어 나가기만 하면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시가 언어의 유희라고 하는 그 말놀이, 말장난에 불과하여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이제 중국 조선족 동포시인 중의 한 사람인 리상각(李相珏) 시인의 시 「겨레의 성산」을 살펴보고자 한다.

남이장군 칼을 갈던 백두산석에

백의겨레 하얀 얼이 서리었구나

전마가 내달리던 천리 수림은

선렬의 넋으로 사철 푸르다.

창공을 비껴담은 백두천지는

불로주 큰잔인가 감로수런가

압록강 두만강 줄기찬 물이

선구자의 노랫소리 싣고 흐른다.

아, 백두산 천지물 한 모금 마시니

온 몸에 피끓는다 겨레의 성산이여

백두산 련봉에 손을 얹으니

내 가슴 높뛰여라 겨레의 자랑이여

―리상각의 시 「겨레의 성산」―

중국 조선족 동포 시인들의 시는 대체적으로 직설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정신 세계에서는 우리 민족 고유의 순수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는 장점을 지니면서도 시의 문학성, 예술성을 위한 기교면에서, 즉 시를 위한 구체적 형상화의 면에서는 아쉬움이 남는 것은 사실이다.

여기에 비하여 박남수의 시 「神의 쓰레기」는 구체적 형상화를 시도하면서 그 내밀한 입체성을 띄고 있다는 점에서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天上의 갈매기에서

부어내리는

純金의 별은

다시 하늘로 回收하지 않는

神의 쓰레기.

아침이면

비둘기가 하늘에

굴리면서

記憶의 모이를

쫓고 있다.

다사한 神의 몸김을

몸에 녹히면서.

神의 몸김을

몸에 녹히면서

하루만큼씩 밀려서 버려지는

무엇인가 所重한 것을

詩人들도 종이 위에 버리면서

오늘도 다시

하늘로 歸巢하는 비둘기.

―박남수의 시 「神의 쓰레기」―

박남수 시인의 이 「신의 쓰레기」는 설명되기 보다는 표현되어 있고, 피상적인 언어가 아니라 입체적인 언어 구조를 이루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天上의 갈매기’와 ‘하늘로 귀소(歸巢)하는 비둘기’, 그리고 ‘소중한 것을 종이 위에 버리는 시인’, 이 세 가지의 인격체는 신(神)에게서 비롯된 존재(쓰레기) 중에서는 그래도 가치있는 존재라고 하는 ‘존재’와 ‘인식’과 ‘가치’가 부여되는 입체성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

4) 과잉된 의식의 절제

문장(작품)이 산만하게 되는 경우는 물론 주제가 잡혀있지 않다거나 센텐스가 길 때 생기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의식이 과잉되어 있을 경우에도 중요한 요인이 된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과잉된 의식을 절제하지 못하고 언어를 쏟아내는 경우에 그 문장(작품)은 통일성을 잃고 산만해지게 된다.

여기에서 심사숙고해야 할 일은, 쓰고자 하는 글을 쓰려고 하기보다는 써서는 안될 글을 쓰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쓰고 싶은 글을 쓰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보다는 써서는 안될 글을 써넣지 않는 일이 더욱 중요할 뿐 아니라 어려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과잉된 의식이란 마치 넘치려는 댐이나 저수지의 수문과도 같은 성질의 것이다. 수문을 제대로 조절하지 않을 경우에는 댐이 무너져서 물이 범람하여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과도 같이, 과잉된 의식을 적절히 조절하지 않을 경우에는 질서있는 문장이 이루어질 수 없다. 따라서 글을 쓰려는 사람은 언어의 질서나 주제의 통일을 위해서 과잉된 의식을 적절히 조절할 수 있는 조절 기능을 살려내야 한다.

시를 왜 쓰느냐고 묻는다면, 아름다운 말을 하기 위해서 쓴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며, 시를 왜 읽느냐고 묻는다면 아름다운 말을 배우기 위해서 읽는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시는 사람의 마음을 아름답게 하고 편안하게 한다. 시를 쓰거나 읽게 되면 우선 언어가 순화되고, 아름다운 정서를 갖게 되며, 정돈된 사상을 갖게 된다. 그렇다면 그 아름다운 시, 아름다운 말에는 어떠한 뜻이 담겨져 있는가?

거기에는 품위있고 세련된 언어, 새로 창조된 언어, 때묻지 않은 언어, 순화된 높은 차원의 언어의 뜻이 내포되어 있다. 그런데, 언어는 행동성을 동반하기 때문에 인격과 직결된다. 말이 아름다우면 행동이 아름답고, 말이 거칠면 행동 또한 거칠기 마련이다. 마음이 맑으면 말이 맑고, 말이 맑으면 글이 맑지만, 마음이 흐리면 말이 흐리고, 말이 흐리면 글이 흐릴 수 밖에 없다.

우리들에게 아름다운 정서가 없다면, 우리들의 마음은 사막처럼 메마르게 될 것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시를 많이 읽고 씀으로써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따라서 아름다운 시어를 창조하여 우리 말을 푸지게 해야 한다. 품위가 있으면서도 세련된 말을 창조하여 풍성하게 가꾸어야 한다.

가령,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만 보아도 이를 용이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寧邊에 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

여기에서는 이 시인의 순후한 마음 세계가 품위있고 세련된 말씨로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서의 ‘역겨워서’는 ‘싫어서’라든지, ‘미워서’ ‘기분나빠서’ 등등의 성격의 거친 말을 아름답게 정화하여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영랑의 시 「내음」에서도 이와같이 정화된 표현을 볼 수 있다. 「가늘한 내음」이 바로 그것이다.

내가슴 속에 가늘한 내음

애끈히 떠도는 내음

저녁해 고요히 지는 때

먼산 허리에 슬리는 보랏빛

―김영랑의 시 「내음」 첫연―

여기에서의 ‘내음’은 ‘냄새’를 정서적으로 품위있게 바꾼 말이다. ‘냄새’라는 말보다는 ‘내음’이 한결 품위있으면서도 아름답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시는 잡다한 일상어 가운데에서 주옥같이 가려내는 듯한 묘미가 있다.

박목월의 시 「청노루」를 보면 ‘청노루’가 나오는데, 새끼 노루는 있어도 ‘청노루’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시는 이 시인이 창조해 낸 아름다운 말임을 알 수 있다.

머언 산 靑雲寺

낡은 기와집

山은 紫霞山

봄눈 녹으면

느름나무

속잎 피어가는 열 두 구비를

靑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박목월의 시 「청노루」―

우리는 이와같은 시 창작을 통해서나 독서를 통해서 아름다운 정서를 익히고, 정돈된 사상으로 마음을 가즈런히 다듬어 가야 할 것이다.

2. 심상과 시적 묘사

시에 있어서 이미지(心象)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언어가 그리는 그림, 또는 영상이라 할 수 있다. 이미지를 심상이라고도 하고, 영상(映像)이라고도 하며, 형상(形象)이라고도 한다. 간단히 말하면 언어가 그리는 꼴(형태)을 말한다.

언어에는 인간의 감성을 나타내는 정서적인 기능이 있는가 하면, 인간의 생각이나 관념 등을 나타내는 사상의 기능도 있다.

심상(心象)에는 고착심상과 자유심상이 있는데, 보통 언어가 가지고 있는 심상은 자유심상이다. 가령, 장미꽃을 보더라도 그 꽃을 보는 사람에 따라서 각자 다르게 생각하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첨성대는 경주에 하나 있는 그것뿐이므로 고착심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장을 가 본 사람에게는 고착심상이 될 수 있지만, 가보지 않은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자유심상이라 할 수 있다.

이미지는 언어가 그려내는 그림이라 하더라도, 거기에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시각적 색채의식이나 형태의식이라든지, 바람이 산들산들 불고 있다거나 새가 지줄지줄 뱃쫑뱃쫑 울고 있다고 하는 청각적 음향의식도 있으며, 달디 단 아침 공기라고 할 때의 미각의식이나 후각의식 내지는 촉각의식도 있다.

또한 이미지라 하더라도 단순히 감각적 기능만 하는 게 아니고 사랑이라든지, 기쁨이나 공포 등의 정서적 기능도 있고, 인간이 지닌 바의 어떤 사상이나 인생관 같은 관념도 있다. 이러한 요소들은 현대시를 이루는 데에 있어서 중요하게 그 기능을 발휘한다.

이미지 운동의 핵심적인 시인 중의 한 사람인 파운드는 “방대한 저작을 남기는 것보다 한 평생에 한 번이라도 훌륭한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났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김기림 시인은 “시의 발전의 대세는 항상 회화성(繪畵性)을 동경해 왔다”고 하면서 시각적 이미지의 참신성 속에서 현대시의 주지적 경향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루이스는 “이미지는 말로 만들어진 그림”이라고 정의하면서, 직유나 은유는 물론 형용사나 묘사적 어구나 구절로 이미지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하였다.

물에서 갓 나온 女人이

옷 입기 전 한 때를 잠깐

돌아선 모습

달빛에 젖은 塔이여!

온 몸에 흐르는 윤기는

상긋한 풀내음이라

검푸른 숲 그림자가 흔들릴 때마다

머리채는 부드러운 어깨 위에 출렁인다.

―조지훈의 시 「여운(餘韻)」 중 일부―

여기에서 조지훈 시인은 탑의 전체적인 모습을 ‘물에서 갓나온 여인’에, 탑에 흐르는 윤기는 ‘상긋한 풀내음새’에 비유하고 있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머언 곳에 女人의 옷벗는 소리

―김광균의 시 「설야(雪夜)」 중 일부―

청각적 이미지를 시각화한 시라 할 수 있다. 김기림 시인은 “그가 전하는 의미의 비밀은 임화씨도 지적한 것처럼 그의 회화성에 있는데, 사실 그는 소리조차 모양으로 번역하는 기이한 재조를 가졌다.”라고 말했다.

감각적 이미지는 널리 사용되지만 약점도 있다. 감각적 이미지에 독자들이 쉽게 반응한다는 장점도 있긴 하지만, 감각적 이미지가 상투적으로 화할 때에 시는 그 내적 깊이를 상실하고 피상적으로 흐를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지에는 지각적(知覺的) 이미지(명암, 색채, 동작, 선명도 등), 청각ㆍ후각적 이미지 (향기, 악취 등), 신체조직기능(심장박동, 혈압, 호흡 등의 인식), 근육운동(근육의 긴장과 이완 등)으로 세분해 볼 수 있으나 시를 창작하는 경우에는 이를 의식하지도 않거니와 이렇게 까지 세분하여 의식할 필요도 없다.

비유적 이미지의 일반적인 유형들은 제유, 환유, 직유, 은유, 풍유, 의인화 등 여섯 가지로 대별되며, 이와 관련되지만 좀 다른 성질의 것으로 상징이 있다.

제유와 환유의 경우에는 말해지는 것과 의미하는 것 사이의 관계가 상위구분과 하위구분, 원인과 결과 등으로 간주되는 몇 가지의 인접성에 기초하거니와 이와는 달리, 나머지 비유들은 차별성 안의 유사성에 근거한다.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가장 보편적인 유형의 비유는 직유와 은유이다. 여기에서 말한 ‘차별성 안의 유사성’이란, 서로 다른 것처럼 느껴지는 사물들 사이에서 유사성이 발견되는 경우, 여기에서부터 시인의 남다른 통찰력이 발휘되기 시작한다.

‘신선한 충격’이라는 말이 가능해지도록 하는 이미지의 참신성이란 서로간에 전혀 다른 것처럼 느껴지는 사물들 가운데에서 유사성을 발견하는 데에서부터 가능하게 된다.

이미지가 참신하지 못하고 진부하다는 것은, 이미 되풀이되어 사용되고 있는 이미지, 그 낡은 이미지를 사용하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다.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페

포화에 이즈러진 가을 하늘을 생각케 한다. ①

여름엔 무성하던 것이

가을에 떨어진 게 슬프다. ②

여기에서의 ①과 ②는 이제까지 얘기한 참신성과 진부함의 대조를 보인다. 참신성은 서로 다른 두 요소 가운데, 동질의 요소를 발견하여 조화시키는 일이라면, 진부성은 앞서 말한대로 이미 되풀이하여 사용되고 있는 낡은 이미지에 머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상징적 이미지에 있어서 그 개념의 차원이 비유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비유는 그 함축성이 아무리 강한 경우에도 그 상상력의 뿌리는 유추가 가능하다. 그러나 상징은 대체로 그 실체가 잡히지 않는다.

상징에 있어서는 그 영역 자체가 광막하기 때문이다. 시인들은 다양한 이미지를 차용하여 이를 재창조하려고 한다.

별이 총총 난

여름 밤……

돈 천원만 누가 준다면

눈알 두개를 빼주겠다는 늙은 農夫가 있었다.

―장영창의 시 「고향」―

농부로다 농부로다 천하지대부가 농부로다

이 농사 지었다가 부모공경하려는가

천하지대부는 하늘도 못 막는다

이 농사를 지었다가 세상 관리 보호하리.

―「제주지방 이앙요(移秧謠)」―

이 두 글 가운데에 나타난 농부의 상반된 이미지는 대조를 이룬다. 이와 같이 작자에 따라서, 또는 보는 관점에 따라서 이미지의 성질은 달라진다. 장영창 시인이 일제 말기에 바라본 고향이나 농부의 이미지는 비참하고 처절하기 그지없었다.

일제의 침탈에 시달릴 대로 시달리고 피폐할 대로 피폐해진 농촌의 현실이 단적으로 반영되고 있다. 이 「고향」이라는 시에서는 일제하(日帝下)의 우리 겨레의 특히 농촌의 경제적인 빈곤상이 표상(表象)되어 있다. 실제로 이러한 일이 있었고, 그 당시 한 시인은 이 시를 읽고 수없이 울었다고 한다. 짧은 시로 압축된 심각성과 비장미(悲壯美)가 그 당시 농부 특유의 독특한 이미지를 창출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여기에 비하여 제주지방 이앙요의 경우는 평범하기 그지없다. 평범 속의 비범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마음 속에 몰래 바위를 키우나보다

그 바위 속에

꽃씨나 잠들었는지

정치나 문단을 열심히 이야기할 때

어쩌다 그 바위의 한 모서리가 비늘처럼

슬쩍 비치곤 한다.

(물론 그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보인다)

이 가뭄 속에

꽃을 보고 며칠만 더 일찍 피라고 한들

좀더 오므리거나 닫아 그대로 있으라고 한들

산을 보고 방향을 동쪽으로 조금 틀고

한쪽 산줄기를 남쪽으로 더 열어

맑은 계곡의 근원을 흘러보내라고 한들

소용 없는 일이지.

남들은 고집이나 편견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만 보지 않는다.

그는 몰래 바위 하나 무양무양 가꾸나 보다.

―문덕수의 시 「황송문 시인」―

네 행복을 바위에게 말하라

더욱 순수한 곡조는 울리지 않나니

즐거이 진실하게 네 감정도 이 곡조처럼 도로 숨는다.

―F.우징거의 시 「바위」―

꽃은 무슨 일로 피면서 수이 지고

풀은 어이하여 푸르는 듯 누르나니

아마도 변치 아닐손 바위 뿐인가 하노라.

―윤선도의 시조 「五友歌」―

‘바위’에 대한 이미지가 각기 다르다. 문덕수 시인의 시 「황송문 시인」의 경우는 그 이미지가 복합적으로 되어 있어서 모호성이 짙은 데 비하여 그 다음의 시 「바위」와 「오우가(五友歌)」의 경우는 보다 단순하고 명료하다.

현대시에서는 이미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미지즘 운동은 영국에서 1909~17년 사이에 T.E.흄의 이론과 시의 암시를 받고, E.파운드가 주창, 프랑스의 상징주의의 반동 또는 수정과 빅토리아 조(朝)의 낭만주의에 반대하여, 일으킨 문학사상 최초의 영미 양국 시인의 신시운동을 말한다.

올링턴이 쓰고, A.L.로얼이 수정한 이미지스트 선언에 의하면, ①일상어를 쓸 것, ②자유시를 쓰되 음의 효과나 억양을 무시하지 말고 새로운 리듬을 창조할 것, ③제재를 자유롭게 선택할 것, ④명확한 이미지를 중시하되 이미지 자체의 표현을 존중할 것, ⑤견고하고도 명확한 스타일의 시를 쓸 것, ⑥ 집중이 시의 정수라는 것 등을 주장하고 있다.

1913년에는 파운드의 유명한 선언이 발표되는데, 1913~17년까지를 이미지즘 운동의 후기로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1934년부터 김기림, 최재서 등에 의하여 영미 이미지즘 이론이 소개되고, 김기림, 정지용, 김광균 등이 이 경향의 시를 썼다.

파운드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김기림은 종래의 한국시의 감상적 격정과 영탄적 낭만적 시를 자연발생적이라 규정하고(?신동아?, 1933. 4), 앞으로의 시는 주지적이며 회화적이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백조(白潮)? ?폐허(廢墟)? 등의 낭만적 경향에 대한 반동으로 볼 수 있으며, 그의 이러한 이론은 ?시의 회화성?(시원, 1934), ?모더니즘의 역사적 위치?(인문평론, 1939) 등의 수많은 논문에서 볼 수 있다.

이미지즘 운동의 이론적 지도자였던 파운드가 중국 한시(漢詩)에 깊이 심취한 바 있고, 그의 주장 또한 여기에 근거한 바 적지 않다. 한시의 이론이 서구를 거쳐서 이미지즘이라는 말로 역류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우리나라에 있어서 이미지즘의 대표적 시인으로 거론되는 정지용이 후기에 이르러 ?시경(詩經)?이나 한시에 깊이 심취한 것도 이를 입증하는 사례가 될 것이다.

시를 쓰는 사람이 만일 묘사의 중요성을 모른다면, 그것은 마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데생이 미술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모르는 것과 유사하다. 한 이론가는 수사학에서 언술 형식을 설명, 논증, 묘사, 서사(敍事) 이렇게 네 가지로 나누고 있다. 이것들은 독자적인 성질을 가지면서도 서로 관련된다.

이해가 목표인 설명이 비교ㆍ대조ㆍ실례ㆍ분류ㆍ정의ㆍ분석 등을 통하여 주제를 밝히는 형식이라면, 논증은 논리적인 호소로서 어떤 주장이나 진리를 자신의 의도대로 현실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데 있어서 증거에 의한 객관적 논리로 확인시키는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설명과 논증 사이에 설득이 있는데, 이는 우리의 태도ㆍ감정ㆍ정서의 공통적인 바탕에 호소하여 발화자의 의도를 현실화하는 형식이다. 우리들의 일상적인 언술은 대체로 설명적이고, 신문, 논설은 설득이며, 어떤 명제를 논리적으로 실증하고자 하는 모든 종류의 언술이 논증에 속하는 셈이다.

묘사란 사물이나 현상이 지닌 성질, 인상을 감각적으로 표현하는 언술형식이라면, 서사는 사건의 의미있는 시간적 과정을 제시하는 형식이다.

설명과 설득과 논증이 이론적 성향의 언술인데 비하여, 묘사와 서사는 감각적 암시적 성향이다. 시가 묘사를, 소설이 서사를 그 주된 표현 형식으로 차용하는 것도 이들 언술과 문학 양식의 특성이 깊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란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느낌을 직접 제시하는 언술 양식이고, 소설이란 느낌을 이야기 줄거리로 제시하는 양식이라 할 수 있다. 어떠한 느낌을 직접 제시하는 시는 지배적인 인상을 표현하는 데 적절한 묘사를 적극 수용하게 된다면, 이야기 줄거리를 전개해야 하는 소설의 경우는 인물과 행위와 시간적 과정을 구성적으로 제시하는 서사와 만난다.

시가 힘을 가지는 근원을 추상적인 상상이 아닌 구체적으로 그려지는 형상화의 본질에 있다고 한다면, 그 구체적으로 그려지는 형상화의 본질은 묘사에 의해서 획득된다.

Y.원터즈는 시의 구성 방법을 구별하여 일곱 종류로 나누고 있는데, 그중 제2의 타입이 논리적 방법이다. “논리적 방법이란 하나의 세부(細部)에서 또 다른 하나의 세부로 나아가는, 명백히 합리적인 진행 방법이다. 이 경우, 시가 명료한 설명적 구성을 가지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이 방법에서는, 세부에서 세부로 나아가는 진행의 순서가 중요시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언어의 명료성과 질서화를 찾게 된다. 자기가 써놓은 시를 설명해 보라고 하면 말하지 못하는 무책임한 이를 보는 경우가 있는데, 이러한 경우에는 이러한 논리적 방법이 요구된다 하겠다.

특히 현대에 있어서 난해시의 경우에는 시인 자신도 풀이하지 못하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이럴 때는 이러한 논리적 방법의 차용이 요구된다.

다음으로, 시에 있어서 논리적 모순이라 할까 초월적 이론을 든다면, J.C.랜섬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랜섬에 있어서, 시의 조직은 논리적 구조와 모순되는 견해를 볼 수 있다. 시는 논리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산문과 다름이 없지만, 또 다른 한 편으로는 논리적 구조와 어긋나는 모순된 조직을 가지고 있다. 이 어긋나는 모순이야말로 시의 특징이며, 시가 산문과 구별되는 요소이기도 하다.

시의 창작 과정에 있어서 랜섬은 이 모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처음은 모순이 강요된 것처럼 느껴질른지 모른다. 그것은 확정적이어야 할 것 속에 이질적 요소를 도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윽고 시인은 거기서 발견되는 모순을 바람직한 것으로 생각하고, 자진하여 그 모순을 의미에 새로 부가된 적극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진중(珍重)히 생각하게 된다.”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은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박인환의 시 「세월이 가면」―

이 시에서는 논리적인 모순이 없다. 또 논리적인 모순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만큼 이 시는 기교적이 아닌 것처럼 순박하게 보인다. 실은 기교적이 아닌 것처럼 보일 뿐이지 기교적이 아니라고 단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그러면서도 이 시는 기교 이상으로 매력이 넘친다.

논리적인 언어로 질서 정연하게 잡혀 있으면서도 이 시가 논리 이상의 매력을 주는 것은 이 시인의 시풍과 현대적 낭만성에 있다. 논리적 언어로 되어 있으면서도 그 논리 이상으로 시적 묘미를 살려 내는 까닭은 미적 기능이라든지, 표현 기능을 살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서정주의 시 「동천(冬天)」―

여기에서 주목되는 시어, 즉 눈썹을 꿈으로 씻는다거나, 그것을 하늘에다 심는다는 것은 현실성이 없을 뿐 아니라, 논리적 질서로도 용인하기 어려운 모순성을 안고 있다. 이는 어디까지나 비현실적인 형이상시를 추구하는 데에서 기인하는 것으로서, 논리성을 초월하고자 하는 형이상학적 차원의 인식에서 가능하게 된다. 현실적으로는 논리적 모순을 내포하고 있지만, 시적 방법에 있어서는 이러한 모순이 오히려 형이상의 세계로 초탈하려는 창조정신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여기에 교훈으로 삼아야 할 점은 시에 있어서의 논리성과 비논리의 논리성, 즉 논리와 비논리적 모순의 양면성의 창조적 조화에서 현대시의 매력이 살아난다는 점이다. 이는 마치 먹을 수 없는 극약이 오히려 죽을 사람을 살려내는 경우도 있는 것처럼, 논리의 모순에서 논리를 뛰어 넘는 초탈의 경지를 보게 된다.

시에 있어서 논리적 방법과 비논리의 논리적 방법, 가령 모순되는 초월적 표현은 서로 상치되는 듯한 성격의 것이면서도 보다 나은 시를 위해서 불가피하기 때문에 차용해야 하는 성격의 것이다. 서정주의 시 「冬天」은 이러한 형이상학적 내지는 초현실적인 세계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門을 암만 잡아다녀도 안 열리는 것은 안에 生活이 모자라는 까닭이다 밤이 사나운 꾸지람으로 나를 졸른다 나는 우리집 내 門牌 앞에서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나는 방속에 들어서서 제움처럼 자꾸만 減해간다 食口야 封한 窓戶 어디라도 한구석 터놓아다고 내가 收入되어 들어가야 하지 않나 지붕에 서리가 내리고 뾰족한데는 鍼처럼 月光이 묻었다 우리집이 앓나보다 그리고 누가 힘에 겨운 도장을 찍나보다 壽命을 헐어서 典當 잡히나보다 나는 그냥 門고리에 쇠사슬 늘어지듯 매어달렸다 門을 열려고 안 열리는 門을 열려고

―이 상의 시 「家庭」―

地上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玄關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詩人의 家庭에는

알電燈이 켜질 무렵을

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十九文半,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六文半의 코가 납작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壁을 짜올린

여기는

地上, 憐憫한 삶의 길이어.

내 신발은 十九文半.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屈辱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十九文半의 신발이 왔다.

아니, 地上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存在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박목월의 시 「家庭」―

이 같은 제목의 두 편의 시는 각기 다른 방법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상의 시 「가정」의 경우는 상징과 은유적 언어가 암유에 가리워져 모호성을 짙게 드리우고 있는 데에 비하여 박목월의 시 「가정」의 경우에는 이 시인의 의도하는 바가 독자로 하여금 이해하기 수월하도록 명료하게 드러나 있다.

이미지란, 어떠한 대상을 인식하는 하나의 양식(style)이라든지, 의식의 하나의 틀(frame)이긴 하지만, 대상의 부재성으로 말하면, “어떤 대상의 이미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에 의해 대상을 본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는 말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시적 이미지는 J.P.사르트르 류로 말한다면, 대상의 공무화(空無化)를 겪은 심미적인 관상의 세계를 형성하고 현실적인 차원을 넘어 심미적인 차원을 구성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대상의 공무화란 그 대상 자체보다는 사물을 바라보는 자의 주체적 인식을 중요시하는 데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실제적인 사물이 있건 없건 간에 이미지는 떠올릴 수 있다. 여기에서의 대상적 이미지는 먼저 바라보는 관조자로서의 시인의 관심이나 의식이 선행된다.

그 시적 동기는 대상적 사물 자체에서 비롯될 수 있지만, 주체적인 시인의 자아 내부에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충일되어 있었다가 그 의식이 어느 동기에 나타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바다는 뿔뿔이

달어 날랴고 했다.

푸른 도마뱀떼 같이

재재발럿다.

꼬리가 이루

잡히지 않었다.

흰 발톱에 찢긴

산호보다 붉고 슬픈 생채기!

가까스루 몰아다 부치고

변즉을 들러 손질하여 물기를 시쳤다.

이 앨쓴 海圖에

손을 싯고 떼었다.

찰찰 넘치도록

돌돌 굴르도록

희동그란히 바쳐 들었다!

地球는 蓮닢인양 옴으라들고……펴고……

―정지용의 시 「바다 2」―

모더니즘 시인다운 주지적 감각이 번득이는 시다. 모더니즘은 기성 도덕과 권위를 반대하고 자유와 평등, 도시의 시민 생활과 기계 문명을 구가하는 사상적 예술적 사조로서 한국의 시단에 큰 영향을 끼쳤다.

20세기에 크게 유행한 상징주의, 인상주의, 야수주의, 입체파, 미래파, 다다이즘, 쉬르리얼리즘 등이 그것인데, 이러한 예술적 철학적 사상의 근저에는 허무주의라든지, 불연속적(단절의) 세계관, 개인주의 등이 자리하고 있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30년대에 영ㆍ미 주지주의의 영향을 받고 일어난 문학 사조이기 때문에 모더니즘은 이 주지주의와 동의어로 통한다. 영ㆍ미 주지주의는 반낭만주의적 태도로서 지성을 중시한다거나 시각적 이미지를 중시할 뿐 이니라 어떤 대상에 대하여 감정을 억제하는 시인의 태도를 중시하는데, 이 정지용의 시 「바다 2」에도 그것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시어의 선택과 조립

왜 시를 쓰고자 하는가. 한 마디로 말하기는 힘들지만, 마음 속 어딘가에 말하고자 하는 욕구, 표현하고 싶어하는 그 무엇인가가 있어서 자기도 모르게 끄적여 보는 것이 아닌가. 모든 문학 예술은 이러한 순수한 사상 감정에서 비롯된다고 여겨진다. 여기에 문학의 순수성이 있기 때문에 문학이 문학으로서 문학다워야 할 본연의 가치라든지 그 본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으로, 독자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해야 하는 표현으로서의 기술이 요구된다는 점이다. 애초에 말하고자 하는 그 의도에 따르는 주제의 설정과 그 주제를 위하여 동원되는 소재(제재)의 선택이라든지, 균형이 잡힌 상태에서의 조화로운 구성, 또는 표현 기교를 위한 각종의 다양한 묘사, 강조와 변화의 기법 등등 관심을 가져야 할 요건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 다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요소로서 문학의 사회적 기능을 들 수 있다. 문학이 개인과 사회에 어떤 영향력을 끼치는가 하는 점이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자본주의 산업사회에 있어서 상업주의가 팽배하여 돈이 빈번하게 오고 가는 시대에 그 순기능과 역기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문학의 사명이라든지 문학인의 양식이 그 어느 때 보다도 요구된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이와 같은 몇 가지의 관심사를 전제로 생각하게 될 때 어느 정도의 방향성을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의 관심사로서, 순수한 자아의 표현 욕구라든지 기쁨을 위한 미의식의 발로는 문학 본령의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문학이 문학답지 못한 채 어떠한 허영이나 사치, 명예나 축재의 수단으로 삼을 때 그가 도달하는 곳은 허무한 무덤일 것이다.

훌륭한 농부, 농부다운 농부란 거부가 되는 게 목표가 아니다. 그저 농사가 좋아서, 자작 농산물을 애지중지 가꾸는 게 재미있고 좋아서 농사짓는 것처럼, 그저 시를 쓰는 게 좋아서 열심히 쓰다 보면 좋은 시를 쓰게 되어 표현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게 될 것이다.

이러한 소박한 희망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 가는 동시에 문예 창작의 기법도 익혀야 한다. 시를 쓰게 될 때는 의식 무의식간에 주제를 설정하고 제목도 정할 필요가 있다. 적합한 제목이 생각나지 않을 경우에는 가제(假題)라도 정해 둘 필요가 있다. 주제도 제목도 없이 무턱대고 써나가게 되면 글의 촛점이 흐려서 산만해지기가 쉽기 때문이다.

주제와 제목은 물론 관련성이 있으나 표현에 있어서는 그 관련성이 직접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간접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으며, 전혀 알 수 없이 상징적으로, 또는 은유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주제나 제목은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이거나 또는 상징적이거나 은유적이거나 간에 그 작품의 내용과 무관할 수 없고, 또 무관해서도 안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것은 주제나 제목이 그 내용과 유기적인 상관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 세상에서 시를 잘 쓰는 일이란, 적합한 언어를 찾아내어 적합한 자리에 끼워 넣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언어의 취사 선택 능력과 조립 능력이 요구된다. 적합한 언어의 취사 선택을 위해서는 우선 사물에 대한 인식 능력이 요구된다. 사물의 정확한 인식과 통찰을 위해서는 사고의 심화와 확대가 요구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마음을 넓히고 깊게 하여야 한다. 종교적 상상력이라든지, 철학적 인식능력, 역사의식, 사회의식 등등 인간으로서 사고 가능한 모든 영역을 탐색하고 탐구하는 데에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시를 창작하는 데 있어서의 기본 자세는 광맥을 찾는 광산업자의 자세와도 같다. 광산업자가 광석을 추출하여 제련을 하는 것과도 같이, 잡다한 언어 가운데 시어를 찾아내어 생산적 상상을 통한 제련작업으로 시어를 추출하여 조탁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시를 창작하는 한 방법으로서, 표현하고자 하는 어떤 정서나 사상을 그대로 나타낼 수 없으므로, 그것을 나타내어 줄 수 있는 어떤 사물, 정황, 사건을 객관적 상관물이라고 한다.

이는 T.S.엘리어트가 사용한 용어로서, 정서를 예술 형식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객관적 상관물을 발견하는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본다. 다시 말하면, 표현하고자 하는 정서를 나타내는 방법이 될 한 쌍의 사물, 혹은 정황, 또는 일련의 사건을 발견하는 이외에는 없다고 본다.

가령, 하나의 ‘계란’을 놓고 보더라도, ①계란을 계란 그대로 보는 경우와 ② 계란의 종류를 보는 경우, ③계란이 숨쉬고 있다거나 부화되어 병아리로 깨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 ④계란이 병아리 되는 그 부화과정을 세밀하게 관찰하거나 연상할 수 있는 경우, ⑤계란이 병아리 되어 나오는 그 생명력이나 생명 창조를 실감하는 경우, ⑥그 부화과정에 있어서 명주실 같이 가느다란 핏줄을 확대시키면 천만 줄기의 강물이 흐르고, 깃털이 확실해져 가는 날개를 확대시키면 천 만 줄기의 산맥이 휘돌아 뻗쳐 나간다는 생명체의 확대라든지 그 사상을 보는 경우, ⑦계란을 병아리 되게 하는 에너지의 요소라든지 본체, 즉 햇빛이나 공기, 또는 일정한 온도 등을 보는 경우, ⑧계란을 매체로 하여 그와 관련된 병아리나 닭 저쪽에 배경으로 있는 세계를 보기도 하고 우주의 원형을 보는 경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진적인 사고의 확대라든지 심화를 통해서 현실 저쪽의 초월적인 세계를 추구할 수 있게 되는데, 엘리어트가 말한 객관적 상관물이라든지, 말라르메가 말한 ‘서서히 대상을 환기하는 것’을 보려는 방법은 현대시의 중요한 기법 중의 하나라 하겠다.

여기에서 다시 유추하게 되면, 계란을 우주의 축소체로 볼 수도 있고, 생명창조의 원형으로 볼 수도 있겠는데, 여기에서 가장 관심되는 것은 ⑦과 ⑧에서 얘기되고 있는 바와 같이 현실 저쪽의 초월적인 세계, 즉 어떠한 사실이나 현실 이상의 본질적인 세계에의 접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4. 창작적 요소와 비평적 요소

시를 창작함에 있어서 그 작법이 요구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지나친 이론은 시창작에 있어서 오히려 저해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먼저 말해 두고자 한다. 창작적 요소와 비평적 요소는 서로 상반되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창작적 요소와 비평적 요소를 함께 지니고 있다. 창작적 요소란 무엇인가를 최초로 만들어 내는 뜻으로서 예술적 감흥을 독창적으로 표현하는 일이라 한다면, 비평적 요소란 사물의 선악이라든지, 시비(是非) 미추(美醜) 등을 평가하여 논하는 일을 말하는데, 특히 문학 예술적인 면에 있어서는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예술 작품에 대한 비평을 말한다.

창작의 대상은 인간이 감지할 수 있는 피조물로서 인생 또는 인간과 전 우주가 되거니와 비평의 대상은 작품이 된다.

인간의 마음 가운데에는 지적(知的)인 욕망과 정적(情的)인 욕망과 의적(意的)인 욕망이 있는 바 이 내적인 지(知)ㆍ정(情)ㆍ의(意)가 외적으로 표출되어 나타나는 게 진(眞)ㆍ미(美)ㆍ선(善)이다. 사람이면 누구를 막론하고 지ㆍ정ㆍ의의 욕구 충족을 위해 보다 높은 가치의 진리와 아름다움과 선을 추구하게 마련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무엇인가를 독창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창조성이 있어서, 항상 새로운 세계를 추구하며 또 표현되는 작품을 감상하고 이해하여 보다 높은 가치의 것을 소유하기를 바란다.

비교적 창작하는 쪽이 주관성을 띤다면 비평하는 쪽은 객관성을 띤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주관도 어디까지나 타인에게 수긍될 수 있는 보편 타당성을 띤 진리를 전제로 한 바탕 위에서의 주관성을 말한다.

비평의 경우, 객관성을 띠면서도 그것이 개성이라든지 독창성을 무시한 객관성이 아니다. 비평은 객관적 평가를 중요시하면서도 그 대상이 예술 작품인 까닭에 개개인의 독특한 개성이라든지, 독창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시나 소설 등의 장르가 다른 장르에 비하여 더 많은 상상을 필요로 하는 것은 그것이 사회의 반영에 만족치 아니하고, 사실 이상의 것, 현실 이상의 것을 추구하는 데에 있어서 상상의 언어로 문학 작품이라는 ‘언어의 집’을 짓기 때문이다.

문학에 있어서 창작품을 가리켜 상상의 언어로 지은 집이라고 한다면, 비평은 논리적 언어로서 그 작품이라는 언어의 집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과도 같다고 비유할 수 있다.

그래서 문학을 가리켜 하이덱거는 ‘언어의 집짓기’라고 하였다. 시인이나 작가는 상상의 힘을 빌려서 이 세상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허구적인 언어의 집을 실감나게 사실적(寫實的)으로 그리려고 한다.

그것은 이 세상에 이미 있어온 것이 아니라 있지 않은 언어의 집, 그러면서도 모든 사람들이 갖기를 원하는 집, 있을 수 있다고 믿고 싶어하는 집, 그래서 있을 법한 집을 창조하기도 하고 비평하기도 한다.

일상에서는 맛볼 수 없는 행복을 이 상상의 집, 언어의 집을 통해서 감지하고자 한다. 인간들의 세상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종교나 예술을 통해서 절대적인 가치를 추구한다.

사랑도 보다 높은 가치의 영원한 사랑을, 삶도 보다 높은 가치의 영원한 삶을 추구하게 된다. 문학은 창작적 요소이건 비평적 요소이건 이러한 인간의 욕구와 그 궤를 같이 하는 방향성을 지닌다.

시 작품의 깊은 이해를 위해서는 충분한 감상이 요구된다. 충분한 감상을 거치지 않은 형해적(形骸的) 분석도, 분석과 평가의 정당한 판단 능력을 갖추지 않은 편벽(偏僻)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문학을 비롯하여 모든 예술 작품은 수용자에 따라서 여러 가지 해석을 가능케 하는 여지를 지닌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도록 여지와 여운을 남겨 두는 편이 보다 많은 상상을 도출시킨다.

와리바시가 짜장면을 삼킨다.

짜장면이 와리바시를 물들인다.

와리바시와 짜장면 싸움에 사발(沙鉢)이 금간다.

짜장면을 감아 올리던

와리바시가 부러져 나가고

금 간 사발에 개풀어진 짜장면

되놈들 대가리에 黃沙가 인다.

짜장면은 식품이지만,

와리바시는 소모품이지만,

사발에는 품을 붙일 수 없는

경천의 우러름이다.

속까지 입을 벌리고

하늘 우러러 두 손 비는

백의민족의 몸짓이다.

눈물어림이다.

하얀 순백의 사발에서는

「福」자 「囍」자 원추리 글씨가

햇살을 모셔 들이지만,

黃河를 건너온 짜장면에서는

紅衛兵의 깃발이 꿈틀거리고,

고꾸라진 와리바시에서는

사무라이 칼날이 번쩍거린다.

―자작시 「삼국지(三國志)」―

이 시에서 독자들은 “와리바시가 짜장면을 삼킨다”는 구절에서 일본이 중국을 삼킨 역사적 사실을 떠올린다거나 눈치를 채어야 할 것이다. 다음의 “와리바시와 짜장면 싸움에 사발이 금간다”에서 일제의 침략으로 인한 청일전쟁의 역사적 피침성(被侵性)을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러한 상징적 언어가 역사적 의미로서 공감되기 위해서는 극동아시아의 근대사를 알 필요가 있고, 그럴 경우 이 시는 상징적 특수성을 띠면서도 보편성으로 공명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창작과 비평 사이에는 상상의 무한한 확대와 상징성의 이해가 요구된다. 시인이 모두 다 철인이나 철학자가 될 수는 없다. 물론 철인, 철학자를 겸하면 좋겠지만 그렇게 될 것까지는 없다. 그러나 좋은 작품 생산을 위해서는 철학적인 사고는 요구된다.

또한 비평가는 고급 독자로서 작품에 대한 남다른 감상과 이해, 예리한 분석력과 사물을 투시할 수 있는 통찰력을 지녀야 한다.

이야기를 다시 제자리로 돌려서, 시 창작에 있어서 비평적 요소는 도움이 되기도 하고 방해가 되기도 한다는 점을 다시 강조하고자 한다. 창작이 ‘어쩐지’라는 그 느낌을 중요시한다면, 비평은 ‘왜’에 대한 토의적 해답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데에는 논리적 방법이 요구되지만, 작품의 진수를 맛보는 데에는 ‘어쩐지’(느낌)가 암유하는 예술성에 따른 깊은 이해와 감식능력이 요구된다.

시인이 자연스럽게 꽃을 피우는 사람이라면, 비평가는 그 꽃은 어느 종류에 해당되고, 암술 수술은 어떠한가 하는 등등을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가름하는 자로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비평가는 작품의 원인을 찾아 분석하고, 미적 가치를 판단하는 행위를 통해서 인생을 탐구하는 데에서 보다 높은 가치를 추구하게 된다.

그것은 인생을 풍부히 하는 표현의 해석이라는 점에서 내용과 형식의 공정한 탐구라 할 수도 있다. 그것은 가치 평가의 기술을 요하기 때문에 존재와 인식의 철학적 안목도 요하게 되는 성질의 것이라 할 수 있다.

5. 사상성과 예술성

문학에 있어서 사상이란 그 주제의식을 포함한 내용성을 말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내용성이란, 인생과 우주 즉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내릴 수 있는 정신적인 자양을 의미한다. 문학에 있어서 그 내용이 되는 정신적 자양을 마련하려면 인식되는 존재계의 모든 사물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새로운 해석을 내릴 수 있는 철학적 안목이 갖춰져야 한다.

철학이 빈곤할 때 정신적인 양질의 영양이 될 수 있는 존재론적 가치의 인식이 빈곤할 수 밖에 없고, 이렇게 되면 결국 사상이 빈곤하여 내용없는 작품에 그치게 된다. 따라서 문학에 있어서 사상다운 사상을 지니기 위해서는 모든 사물에 대한 인식, 보편 타당한 진리를 파악하는 인식이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

다음으로 요구되는 것은 예술성이다. 아무리 깊은 사상, 아무리 심오한 종교적 철학적 사상성을 내포한다 할지라도 그 사상을 표현 기교를 통한 예술성으로 승화하여 표현해 내지 않으면 안된다.

사상성은 작품의 내용을 중시한다면, 예술성은 그 형식을 중요시한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다. 어떠한 사상이든지 그게 일단 시인의 내부 세계에 들어가게 되면 미적 경로를 통하여 새로운 개성적인 옷을 입고 나타나게 된다.

시에 있어서 사상이 배제된 작품은 감상의 나열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그에 반하여 사상을 너무 지나치게 내세우게 되는 경우에는 관념의 나열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시에 있어서 사상의 수용은 인간의 그 형식과 내용이 균형있게 조화되지 않으면 안된다.

시란 사물 인식을 통한 상상력의 소산이므로, 사물 속에서도 그 사물이 지닌 바의 성격(사상)을 인식과 사유의 과정을 거쳐서 걸러내게 된다. 사물의 인식과정에 있어서 새로운 상상의 날개를 달아 주고, 정서의 옷을 입혀서 새로운 차원으로 탄생시키게 된다.

감정이 사상을 앞지르게 되면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작품이 되기 쉽고, 사상이 감정을 밀어내게 되면 설교적이고 계몽적인 작품이 되기 쉽다. 그러므로 문학 작품 뿐 아니라 모든 예술 작품에 있어서는 사상과 감정이, 또는 사상성과 예술성이 조화되지 않으면 안된다.

내 노래에 날개가 있다면

여름과 같이 아름다운 나의 노래를

그대 꽃밭에 보내줄 것을

하늘로 날아가는 새들처럼

내 노래에 날개가 있다면

내 노래에 날개가 있다면

공중에서 번득이는 번갯불처럼

그대 웃음짓는 화롯가를 찾아갈 것을

저 하늘의 천사들처럼

내 노래에 날개가 있다면

내 노래에 날개가 있다면

그대 집 등넝쿨 아래에 가서

밤이 새도록 기다릴 것을

길을 재촉하는 사랑의 날개가 있다면.

―빅톨 위고의 시 「내 노래에 날개가 있다면」―

이 시는 능숙한 시적 표현 기교를 발휘하여 예술성을 살려내면서도 치열한 사랑의 내용으로서의 의식을 담뿍 담고 있는 작품이다. 여기에서는 사상성과 예술성이 균형있게 조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6. 각종의 묘사

묘사(描寫)란 문장에 있어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감각적으로 그리는 서술 양식의 일종을 말한다. 대상을 묘사한다는 것은 세부(細部)의 전부를 열거한다는 뜻이 아니라, 전체와 부분, 그리고 부분과 부분의 관련을 가지고 유기적 통일체로 표현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묘사는 체제(體制)와 조성(組成)을 고려해야 하는데, 체제는 세부를 질서화하여 전체적 통일을 이루는 것이요, 조성은 세부 상호간의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하는 것이다.

묘사의 특징은 구체성과 감각성이며, 묘사의 종류에는 ‘설명적 묘사’와 ‘암시적 묘사’가 있다. 묘사에 있어서 그 체제를 패턴(pattern)으로도 말하는데, 그것은 모범이라든지, 견본, 모형 등의 뜻으로, 사고하거나 행동하거나 글로 나타내는 데 있어서 모범적인 유형이나 양식을 말한다.

1) 설명적 묘사

설명하는 글은, 사물의 이치를 설명하여 읽는 이의 지식과 이성에 호소하는 글을 가리키는데, 산문시에 있어서는 이성뿐 아니라 감성에 호소하는 경우를 흔히 보게 된다. 특히 시에 있어서는 설명보다는 표현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나열식 설명을 지양하지만, 독자의 이해를 위하여 이를 적극 활용하는 경우도 있다.

외할머니네 집 뒤안에는 장판지 두 장만큼한 먹오딧빛 툇마루가 깔려있습니다. 이 툇마루는 할머니의 손때와 그네 딸들의 손때로 날이날마닥 칠해져 온 것이라 하니 내 어머니의 처녀 때의 손때도 꽤나 많이 묻어 있을 것입니다마는, 그러나 그것은 하도나 많이 문질러서 인제는 이미 때가 아니라, 한 개의 거울로 번질번질 닦이어져 어린 내 얼굴을 들이비칩니다.

그래, 나는 어머니한테 꾸지람을 되게 들어 따로 어디 갈 곳이 없이 된 날은, 이 외할머니네 때거울 툇마루를 찾아와, 외할머니가 장독대 옆 뽕나무에서 따다 주는 오디 열매를 약으로 먹어 숨을 바로 합니다. 외할머니의 얼굴과 내 얼굴이 나란히 비치어 있는 이 툇마루에까지는 어머니도 그네 꾸지람을 가지고 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서정주의 시 「외할머니의 뒤안 툇마루」―

설명되어 있는 미당(未堂)의 산문시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설명적으로 묘사되어 있으면서도 시적 요소를 다분히 지니고 있는 게 특색이다. 여기에서는 외할머니의 손때와 어머니를 포함한 외할머니의 딸들의 손때가 묻은 툇마루가 나오고, 또 이 사물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외할머니와 나의 얼굴을 비치는 때거울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하나의 사물이 설명되고 있으면서도 관념의 나열로 처리되기보다는 ‘먹오딧빛 툇마루’라든지, ‘때거울’ ‘장독대’ ‘뽕나무’ ‘외할머니의 얼굴과 내 얼굴’ 등등의 사물이 구체적이면서도 선명하게 드러나 보이고 있다.

사회환경과 자연환경이 자연스럽게 어울리면서도 마지막에는 때거울에 비치는 두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고장난 시계를 고치려고 시계점엘 들렸더니 잃어버린 시간들이 그곳에 다 있었다. 그 집 주인은 낡은 내 시계를 열어 보더니 건전지를 갈아 끼워야 한다고 했다. 내 시계의 건전지를 갈아 끼우는 동안 그 집의 뻐꾸기 시계가 뻐꾹, 뻐꾹 크게 울었다. 아슴푸레 뻐꾸기 소리를 따라가다가 나는 그만 길을 잃고 만다. 뻐꾸기 소리의 길은 고장난 시계 속의 길, 그 길은 小路다. 나는 몸을 구부려 그 길로 들어섰다. 긴긴 회랑 끝에서 한 아이가 걸어 나왔다. 산 밭으로 가는 길에는 우유빛 안개가 끼어있고 아직은 찔레순이 여리다. 찔레순을 잡는 아이의 손등에 투명한 이슬이 맺혔다. 주인은 웃으며 야구르트를 권한다. 야구르트의 빨대 속으로 찔레꽃 향기가 빨려나왔다. 주인은 가느다란 핀셋으로 낡은 내 시계 속에서 찔레꽃 한 잎을 들어냈다. 내 시계의 건전지를 갈아끼우는 동안 내가 만난 아이의 몸에는 찔레꽃이 피고 있었다. 꽃피는 시간 속으로, 시간을 맞추어 드릴까요? 건전지를 교환한 내 시계를 그 집 주인이 건네줄 때 뻐꾸기 소리의 밖으로 문을 열고 나오지만 나는 다시 길을 잃는다.

―권운지의 시 「고장난 시계」―

역시 설명문처럼 쓴 산문시이지만, 여기에서는 단순히 설명에 그치지 않고 무엇인가를 암시하고 있다. ‘고장난 시계’와 ‘잃어버린 시간’이라는 현실적인 상태는 ‘길을 잃어버린 나’와 ‘고장난 시계 속의 길’로 들어섰다가 ‘다시 길을 잃는다’로 결말짓는 입체적 암유로 가리워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소개한 서정주의 시에서는 때거울이 된 외할머니의 툇마루에서 클로즈업되는 두 얼굴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사실이나 현실 이상의 극미(極美)의 세계로서 미당 특유의 생산적 상상력을 통해서 가능하게 된 것이었다.

다음의 권운지의 시에서는 그러한 극미의 세계는 보이지 않으나 생산적 상상력을 종횡무진으로 굴려서 어떤 입체적 의미를 나타내려는 의도가 내비치는 시라 할 수 있다. 이 두 시는 설명문이면서도 단순히 설명하는 게 아니라 하나는 극미의 세계를, 또 다른 하나는 의미의 세계를 천착하는 묘미를 보여주고 있다.

2) 암시적 묘사

암시적 묘사는 문장 표현에 있어서 어떤 내용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말한다. 바로 대어서 밝히지 않고 은유나 상징으로 돌려서 넌지시 알리는 요법을 뜻한다.

할머니 꽃씨를 받으신다.

방공호(防空壕) 위에

어쩌다 핀

채송화 꽃씨를 받으신다.

호(壕) 안에는

아예 들어오시덜 않고

말이 숫제 적어지신

할머니는 그저 노여우시다.

진작 죽었더라면

이런 꼴

저런 꼴

다 보지 않았으련만……

글쎄 할머니,

그걸 어쩌란 말씀이셔요.

숫제 말이 적어지신

할머니의 노여움을

풀 수는 없다.

할머니 꽃씨를 받으신다.

인제 지구(地球)가 깨어져 없어진대도

할머니는 역시 살아 계시는 동안은

그 작은 꽃씨를 털으시리라.

―박남수의 시 「할머니 꽃씨를 받으신다」―

이 시의 환경 설정은 전시(戰時) 중의 방공호로 되어 있다. 시간 개념은 6ㆍ25 전쟁이요, 공간 개념은 살아남기 위해서 마련한 방공호에서 할머니가 채송화 꽃씨를 받는 행위로 되어 있다. 꽃씨를 받는 행위 외에 할머니가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말은 별로 없지만, 그 뒤에 숨겨져 있는 뜻은 이 지구가 존재하는 한 인간은 영원히 꽃을 심고 가꾸며 산다고 하는 무언의 의지 같은 것이다. 즉 할머니가 꽃씨를 받는 행위를 통해서, 전쟁의 와중에서도 영원한 평화를 염원하는 의지가 암시되고 있다는 얘기다.

第1景

행길 위에 머슴애들이 우 몰려가 수상한 차림의 여인 하나를 에워싼다. 돌팔매를 하는 놈, 쇠똥, 말똥을 꿰매달아 막대질을 하는 놈.

“양갈보” “양갈― 보” “양가― ㄹ보”

더럽혀진 母性을 향하여 이들은 저희의 律法으로 다스리는 것이다.

“내가 늬들 에미란 말이냐. 양갈보면 어때? 어때?”

거품까지 물어 발악하는 여인을 지나치던 미군 짚이 싣고 바람같이 흘러간다. 아우성만 남고.

第2景

짙게 양장한 여인이 지나간다. 꼬마들은 눈을 꿈벅꿈벅한다.

한 녀석이 살살 뒤를 밟아 여인의 뒷잔등에다

“一金 三千圓也”라는 꼬리표를 재치있게 달아 붙인다.

“와하” “와하하” “와하하하”

자신들의 抗拒로서는 어쩔 수 없음을 깨달은 꼬마들이 自虐을 겹친 모멸의 哄笑를 터뜨린다.

여인은 신 뒤축을 살펴보기도 하고 걸음새를 고쳐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가 사라지기까지

“와하” “와하하” “와하하하”는 그치지 않는다.

―구 상의 시 「焦土의 詩 6」―

이 시인이 의도하는 본의는 따로 있다. 여기에 나타난 「초토의 시 6」중의 1,2경은 소년들이 미군에게 몸을 파는 소위 양공주를 괴롭히는 연출 장면으로 되어 있다. 구상 시인은 무엇 때문에 소년들이 가련한 여인을 괴롭히는 장면을 포착하여 시화하였을까.

소년들에게 가장 슬픈 것은 어머니를 다른 남자에게 빼앗기는 모성상실(母性喪失)일 것이다. 6ㆍ25 당시 남편 잃은 떼과부들, 그 수많은 전쟁미망인들이 살아남기 위한 생존수단으로 미군부대 주변에서 처절하게 삶을 유지하던 치욕의 군상들을 이 시인은 모성상실의 차원에서 조명한 것으로 보인다.

소년들의 처지에서는 자기를 버리고 다른 남자를 상대한 여인을 향한 분노가 치열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더욱 확대시켜 해석한다면, 잃어버린 어머니나 더럽혀진 어머니는 상실된 모국을 의미하기도 한다. 외세로부터 물려 뜯겨온 침탈사가 그것이다.

이러한 시인의 의도나 내면의식이 여기에는 나타나 있지 않고, 간접적으로 암시되어 있을 뿐이다. 독자는 나타난 형태의 시를 통하여 그 이면에 암시하고 있는 본의를 이해하기 위하여 접근할 필요가 있다.

서정주의 시 「외할머니의 뒤안 툇마루」의 경우, 외할머니의 손때와 어머니를 포함한 딸들의 손때로 번질번질 닦여서 윤이 나서 외할머니와 자기의 얼굴이 비친다고 되어 있는데, 실제로 거울처럼 그렇게 얼굴이 비칠까를 생각하면 이를 객관적인 사실로 인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는 서정주 시인이 기억의 잔상을 재생적 상상으로 살려내고 다시 그것을 생산적 상상으로 바꾸는 과정, 즉 상상을 통한 언어의 집을 짓게 됨으로써 하나의 형상화를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서정주 시인의 외할머니와 어머니와 이모들이 너무도 반질반질 닦아서 툇마루가 거울처럼 윤이 나서 얼굴이 비쳤다는 얘기는 순전히 그의 생산적 상상력을 통한 재창조 또는 재구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7. 시의 가치 평가

1) 사물을 정관하는 인식의 눈

우리가 어떠한 사물을 보게 될 때 ‘무엇’을 보느냐도 중요하겠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보느냐라 할 수 있다. 무엇을 보느냐 보다도 어떻게 보느냐가 더욱 중요하다는 얘기는 이미 상식에 속한다. ‘무엇’을 보느냐에 관심하는 것은 소재에 그치는 얘기지만, ‘어떻게’ 보느냐는 그 주제와 표현 방법까지를 포함하는 범주의 관점이기 때문이다.

훌륭한 사진 작품의 생산을 위해서는, 피사체의 선택 이전에 성능이 좋은 카메라의 좋은 렌즈와 훌륭한 촬영 기술이 요구되듯이, 좋은 시를 위해서는 형상화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우선 사물 인식의 눈이라고 하는 그 통찰력이 요구된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사물을 환히 꿰뚫어 보는 인식의 능력이란 고려시(高麗詩)에 있어서 작시론(作詩論)에서 말해진 천(天)→기(氣)→의(意)→시(詩)의 논리와도 일맥 상통한다. 사물을 통찰하는 능력이란 천부적으로 타고 나는 면도 있겠거니와 그 기(氣)에서 의(意), 또는 시(詩)로 전개하는 과정에 있어서 시어의 조탁이 요구되기도 한다.

우리가 어떠한 사물을 보고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은, 그 대상적 사물이 지닌 바의 소성과 주체적인 자아에 내재되어 있는 소성에 동질의 요소가 있기 때문에 그 상사성(相似性)에 의해서 인식이 가능하다는 인식논리가 성립되기 때문에 ‘어떻게’ 보느냐고 하는 그 인식이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견해에 입각해서 보게 될 때 박진환의 「花蓮紀行」, 「5월」, 김지하의 「一山詩帖」, 허영자의 「석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산은

아랫배가 절개된 채

꼬불꼬불한 내장을 드러내놓고 있었다.

꼬인 허리의 굽돌이로

전신을 동여맨 신작로는 구절양장

또아리에서 풀려나간 밧줄 끈을

천길 벼랑에 매달아 놓고 있었다.

… 생략 …

천상에 가까워질수록

문명은 아득히 산 저쪽에 쪼그리고 있었다.

―박진환의 시 「화련기행(花蓮紀行)」 일부―

5월은

계절의 성형외과

메스 끝엔 피가 묻어났다.

담장에 널어 놓은

하얀 시트 위엔

꽃 문양을 새긴 한나절이

마사지를 하고 있었다.

목하 장미는

성형 수술 중이다.

―박진환의 시 「5월」―

재생적 상상을 통한 형태의식이 시의 재구성을 위한 생산적 상상력으로 선명하게 부각되어 있다. 이 두 편의 시는 물론 상태를 나타내는 데에 그치고 있지만, 선명하게 부각되는 형태의식이나 색채의식이 작품 창작 의도에 통일적으로 기여하고 있어서 효과를 거두고 있는 셈이다.

일산 새집 들어

빈 방에

흰 빛 난다.

진종일 눈부시고

매미소리 뼈만 남고

어둠 속 붉었던

자취없다.

먼 강물

핏속에 흐르나

나 이제 벌판에서 죽으리

흩어져

한줌

흙으로 붉은 빛.

내 몸에

살 떠나고

뼈만 남았구나

흰 햇살 눈부신

뼛속에서

무지개 꿈꾸고

뼛속에서 풀잎 자라고

해와 달 뜨고

밤낮

굿치는 소리 들린다.

도시의 뼈

거리의 숱한 하얀 뼈

뼈만 남은

내 삶

새 천지 키우는 자리.

―김지하의 시 「일산시첩(一山詩帖)」 중 1,5―

내 어릴적

간곡히 간곡히 이루고 싶었던 꿈

그대로 꽝꽝

땅 속에 묻었던 꿈

오래 오래 불타는

새까만 보석의 꿈.

―허영자의 시 「석탄」―

김지하의 시 「일산시첩」의 경우, 치열한 내면의식이 유로된 시라면, 허영자의 시 「석탄」은 유추된 이미지의 세계라 할 수 있다. 김지하가 흰 햇살 눈부신 뼛속에서 무지개를 꿈꾼다면, 허영자는 땅속에 묻었던 새까만 보석의 꿈에 관심을 보인다. 하얀 뼈속의 무지개 꿈이나 검은 석탄 속의 새까만 보석의 꿈이나 다 함께 ‘바램’을 나타내고 있으나 그 발성은 전혀 다른 이질감을 보인다.

‘어둠속 붉었던 살 자취 없다’는 이 치열한 시 가운데 ‘뼈’가 7회나 나오는 김지하의 시에 비하여 허영자의 그것은 메마르지 않는 유년의 꿈을 장식한다. ‘꿈’이라는 용어가 4회나 나오는 허영자의 천진한 기억의 꿈, 그 천진성의 재생은 석탄에서 보석을 꿈꾸는 열렬한 사랑에의 가능성의 꿈이다.

김지하 시인이 살을 잃은 뼈속의 무지개로서 죽음을 초극한 현실 이상의 어떤 의지적 비장미를 보여주고 있다면, 허영자 시인의 경우는 마치 밤하늘의 별나라 같은 연상작용으로 석탄 속의 사랑의 꿈나라를 유추케 한다. 이러한 대조를 보이면서도 결국은 그 행선지가 굴광성식물처럼 꿈에 관심두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아껴 먹듯이 산길을 간다.

나는 오르고 산골물은 내려간다.

능선에 걸린 해는 황혼을 재촉하지만

내 발걸음은 늙은 나무처럼 점잖다.

……생략……

다 알면서 침묵하는 나무와

모르는 걸 아는 체하는 사람을

용납하는 산.

늙었지만 더 젊게 사는 법을 나무에게 배운다.

―엄한정의 시 「면산담화(面山談話)」―

엄한정 시인의 시 「면산담화」는 제목 그대로 허물없이 야금거리는 듯하는 이야기투로 평범을 가장하고 있다. 그 가장 속에는 평범한 이야기투로 비범을 노리는 의도가 옅보인다. “아껴먹듯이 산길을 간다.”는 첫 구부터가 음미하고 누리는 듯이 야금거리는 자세다.

평범 속에서 어떤 비범함이 느껴지는 것은, 사물을 관조하는 이 시인의 시적 안목이 산과 어울리는 상사적(相似的) 자세라 할까 그런 성격에 있다. 그것은 유유자적한 처사풍(處士風)에서 기인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이 시는 평범 속의 비범의 정상에는 있지 않고, 시의 등산을 시도하는 과정의 길목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역시 문제가 되는 것은 사물을 정관하는 인식의 눈이다. ‘어떻게 보느냐’ 하는 그 주제의식과 표현을 위한 기술이 문제된다. 은유와 상징과 이미지 등 고도한 방법의 종합적이며, 균형있는 조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될 때 시의 예술성은 살아나기 때문이다.

2) 평면적 언어와 입체적 시어

시인은 모름지기 작품으로 말해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그럴듯하게 윤색을 좋아하는 입으로가 아닌 작품으로 보여줌으로써 시의 존재의의나 존재가치를 독자들로 하여금 인식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괜찮아요

다른 거 다 괜찮아요

고장난

수도꼭지도 고치고

지루한 장마도

그쳤어요.

지상의 풀 이파리는

밑뿌리의 아픔을

모르고도

잘 살아요.

깊은 밤

의식의 끄나풀이

끊기고 끊기고

가물가물 당신의 손목을

놓칠 때까지

다른건 다 괜찮아요.

―박정희의 시 「地上에서」―

우리들은 여기에서 절실하면서도 은근 슬쩍 내비치고 있는 그 ‘당신’이라는 주체에의 그리움을 눈치채게 된다. 결국은 “당신의 손목을 놓칠 때까지 다른건 다 괜찮아요.”하는 그 치열한 여성적 정조(情操)를 아이러니로 역류시킴으로써 승화를 꾀하는 입체적 시어와 만나게 된다.

지상에 남아있는 시인이 천상으로 타계한 주체(여기에서는 ‘당신’으로 대칭되는 반려자를 뜻함)에 향하여 그 심회를 반어적으로 표로하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아이러니가 아니라 스스로를 달래기도 하고, 다스리기 위해 선택한 시어라는 데에서 그 매력이 살아나게 된다.

‘당신’이라고 부르던 그 주체가 하던 일을 손수 처리해야 하는 고달픈 삶을 살면서도 이 시인은 괜찮다고 한다. 그러나 괜찮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치열성이 보인다. ‘다른건 다’라는 단서를 붙이면서 괜찮다고 하는 데에 묘미도 있고 문제성도 있다.

이 시인에 있어서의 최대 관심사는 지상과 천상 사이에서 갈라진 영이별에서 오는 절대고독이다. 그 고독이 문제다. 고장난 수도꼭지나 지루한 장마같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상의 풀 이파리’로 은유되는, 즉 이 시인의 뿌리 깊은 아픔을 모르는 아이들은 잘 산다고 내비치는 심회가 눈물겹다.

나는 왜 석유냄새를 좋아할까.

아주 어린 시절부터 휘발유에 휘감겼는데

오늘은 아내의 석유냄새가 그렇게 좋다.

석유이기에 그렇다.

바다를 뚫고 다시 바위의 등뼈를 뚫고 나온

기름이기에 그렇다.

그 골수가 조금씩 몸에 든 걸까.

자동차 뒷바퀴이거나 주유소 근처에서

깊이 들이키던 냄새, 그것이 다 혈액이 된다지.

비록 바람으로 마시긴 했지만

그래도 불붙이면 타오를 거야.

―마종하의 시 「석유로서」 중 앞부분―

독자들은 약간씩 어리둥절해 할 것이다. 그만큼 이 시에는 건너뛰는 요소들이 있다. “아내의 석유 냄새”라든지, “바다를 뚫고 다시 바위의 등뼈를 뚫고 나온 기름”을 액면 그대로 단순하게 볼 것인가, 아니면 자연 석유와 인간 석유(에너지원)라고 하는 그 골수로서의 입체적인 의미로 볼 것인가에 따라서 시의 평가도 달라지게 될 것이다.

우리들이 이 시에서 어리둥절해지는 근거는 이 시가 입체적 은유성이 엿보이면서도, 그 연결 고리로 물고 넘어가지 못한 채 싱겁게 처리되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연이 이를 입증한다.

알맞게 정신의 불을 붙이듯

오늘도 아내는 난로에 기름을 넣고

나는 다시 환하게 웃음을 머금는다.

그렇다. 모든 걸 움직여놓고

나도 하늘로 소리없이 움직여 날 것이다.

뜨거움을 남겨놓고 차갑게 기쁘게.

―마종하의 시 「석유로서」 중 끝부분―

3) 생각하는 시와 노래하는 시

현대시의 변모과정 가운데 두드러진 것 중의 하나는 ‘노래하는 시’에서 ‘생각하는 시’로서의 전환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노래하는 시의 그 음악성이 생각하는 시에서 단절되거나 무시된다는 뜻은 아니다. 시에서 음악성은 배제될 수 없는 필요 불가결의 것이라는 점은 상식이기 때문에 재론할 여지가 없다. 이러한 전제하에, 대체적인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는 ‘생각하는 시’를 살펴보는 것은 현대시의 주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생각하게 하는 시도 종교적 차원이나 철학적 차원, 또는 역사의식 사회의식을 막론하고 은유나 상징을 차용한 이미저리의 효과적 조립으로 표상될 때 바람직한 형상화를 보이게 된다.

그날 겨울 하늘에

불이 났다.

갈가마귀 떼가 일으킨 반란이었다.

……생략……

불이 쓰러지고 나서야

떠나간 세월 속

떠나간 새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높다란 농집에 맡겨

길을 잃어버린 새가 이제야

뚫린 길을 찾아 돌아오고 있다.

쭈욱 뻗어 하늘에 닿은 하얀 길을 타고

새들이 귀환하고 있다.

나를 안내할

눈부신 새 한 마리 팔랑 팔랑 오고 있다.

―김지향의 시 「돌아오는 새」 중 일부―

이 시는 생각하게 하고 끌어당기는 힘을 지닌 시라 할 수 있다. 인간에게는 육체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스스로 치유하여 건강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항상 일어나게 된다. 여기에서는 투명한 정신으로 안전을 꾀하고자 하는 구원의식이 내비치고 있다.

4) 익은 시와 싱싱한 시

정신춘궁기(精神春窮期)에 처해 있는 오늘의 시인에게 현실 여과를 위한 종교적 상상력이라든지, 철학적 인식, 또는 작가적 양식 등이 요구된다는 주문은 새삼스런 얘기가 아니다. 그만큼 우리 시단(詩壇)은 철학의 빈곤이라든지 앙식의 황폐화 현상이 있어 온 게 사실이다. 이는 시대 풍조와도 무관하지 않은 현상으로, 양적 팽창에 반비례하여 질적 저하를 가져올 게 빤한 사실이다.

이는 대체적인 시작품의 경향을 두고 하는 얘기거니와 시의 대량생산과 박리다매(薄利多賣) 현상은 시를 싸구려 돗떼기시장에서 천대받게 하기 마련이다. 시가 천대받는 사회는 문화에 눈이 멀고 예술에 귀가 먹은 반거들충이를 양산하게 된다.

그러나, 흘러가는 물에 떠내려가는 죽은 물고기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폭포를 타고 거슬러 올라가는 그런 피라미 같은 생명력에 의해서 탄생되는 시도 간혹 눈에 뜨인다. 가뭄에 콩나듯이 어쩌다가 사금처럼 반짝이는 시어가 눈에 뜨일 때, 우리는 절망하다가도 새로운 소망으로 자세를 가다듬게 된다.

군계일학이라 할까, 시 비슷한 시 가운데에서 시다운 시를 맛보는 즐거움은 부정을 통한 긍정으로서의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백옥같이 환히 빛나던

돌배꽃 이파리마다

은하수로 날아갈 즈음

사랑하는 내 영혼아

우린 달밤을 울자

누더기진 榮辱 보따리

불더미에 던져두고

그 진한 사랑의 毒酒

실컷 퍼마시다가

사랑하는 내 영혼아

우린 달밤을 울자

죽어서도 환히 빛나는

달빛처럼 울자.

― 김창직의 시 「달과 영혼과의 사랑노래」 ―

이 시는 농축된 사랑의 치열성의 극치점을 넘어선 차원에서 얻어낸 달관의 세계를 엿보게 한다.

어느 날

북한산에서 굽어 본

서울은

작은 바둑판

어느 밤

비행기에서 만난

서울은

출렁이는 불바다.

언젠가

우주선에 찍힌

조선 반도는

바람처럼 뛰어가는

토끼 한 마리

꿈속에 잡힌

지구와 달이

머얼리 굴러가는

작은 호도 두 알

손바닥

장심에 쥐고

뽀드득뽀드득

놀고 싶다.

―허세욱의 시 「호도 두 알」―

이 시는 절제된 언어의 간결미와 함께 시각적 형태의식에의 점진적 확대를 꾀하다가 달마의 미소처럼 단순하면서도 입체적인 해학적 선풍(禪風)을 보인다. 허세욱 시인은 북한산에서 굽어본 서울, 비행기에서 본 서울, 우주선에서 찍힌 조선반도, 꿈속에서 잡힌 지구와 달로, 현미경적 눈에서 망원경적 눈으로 확대하다가 결국에는 지구와 달을 두 개의 호도알로 축소 유추하여 ‘놀고 싶다’는 마무리로 단순화하면서 동양적 달관을 내비친다. 이는 부처님 손바닥 위의 손오공이 연상되는 동양적 호연지기(浩然之氣)와 통하는 일면을 암유(暗喩)한다 하겠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어느 봄날

고래실 논둑 밑의 풀로 오나 꽃으로 오나

영영 오지 않나 영영 오지 않고 저 하늘

아득히 먼 저쪽 하늘 별로 나타나 깜박거리나’

상여는 간다

무지개에 덮여

산모롱이를 돌아간다

‘인제 가면 무엇이 되어 오나

앞산 기슭 밭뙈기 메밀꽃이 돼 오나

영영 땅엔 오지 않고 해거름에

무지개로 뜨나’

상여는 간다

아지랑이

글썽거림 속으로 멀어져 간다.

―이병훈의 시 「상여길」 중 일부―

이 시는 서정적 잠세어(潛勢語)가 풍부한 작품이다. 꽃상여가 산모롱이를 돌아가는 창연(愴然)한 풍경 묘사와 함께 풀과 꽃과 무지개 등, 가변적인 피조물들을 동원시켜 애틋함을 더욱 짙게 드리우고 있다.

이제까지 살펴본 시들은 주로 익은 시라 할 수 있다. 의식(意識)의 항아리에 고여 있는 언어를 발효시키고 여과시키고 시어로 정화시켜서 곰삭힌 뒤에 떠낸 진곡주라 할까, 산열매술이라 할까, 마치 간장처럼 오랜 동안 삭히고 익혀서 맛들게 하여 우려낸 시라 할 수 있다.

어제 저녁은

기다림으로 먹고

오늘 아침은

그리움으로 먹었습니다.

이별이라는 반찬에

입맛이 써서

마시는 숭늉은

눈물이었습니다.

바람 잰 손님도

잠이 든 저녁

달콤한 추억으로

밤참을 먹고

그대 생각

베고 누우면

더 깊은 밤

꿈으로 와서

촛불 몰래

웃는 당신

―신영자의 시 「그사람 92」―

갖고 싶었네

보길도 같은 익명의 섬 하나쯤

나대지(裸垈地)로 누워있는 빈 터

묵밭 일궈낼 내연의 섬 하나쯤

찬바람만 들이치는

내 생애의 깎아지른 해안

그 끝없는 기다림을 붙들어 맬

심지 푸른 사내 하나쯤

숨어서도 곧은 孤山竹 한 그루

가꾸고 싶었네.

―권천학의 시 「초록비타민의 서러움 혹은」―

이 두 편의 시는 싱싱한 시, 풋풋한 시에 해당된다. 앞에 소개한 신영자의 시 「그사람 92」에는 ‘기다림으로’ ‘그리움으로’ ‘추억으로’ 먹는다는 행위로 주조를 이루고 있는데, 이는 영혼(사랑)의 배고픔에서 오는 갈구가 절실함을 의미한다. 주제를 위해 동원시키는 시어의 취사 선택도 예사롭지 않거니와 그 시어의 연결고리도 물고 넘어가는 재치가 비범하다.

권천학의 시 「초록비타민의 서러움 혹은」이라는 연작시는 흔히 범하기 쉬운 말솜씨나 말장난에 그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쳤으나 이 대목에서는 그러한 기우가 가셔졌다. 그만큼 이 시는 치열한 시 에스프리의 바탕 위에 치밀하게 직조되어 있다.

이 시는 싱싱한 시에서 익은 시로 가는 중간 단계라 할까, 언어의 선택에도 대담성을 보이고 있다. “심지 푸른 사내 하나쯤”도 이를 증명한다.

5) 신선한 충격을 주는 시

시에서, 문학에서 뿐 아니라 예술 전반에 걸쳐서 ‘신선한 충격’이라는 말을 들을 때가 있다. 이는 작품 세계가 어떤 변화나 진보 발전이 없이 종래의 모습 그대로의 답습이나 구태의연함과는 달리 소위 ‘낯설게하기’라는 말로 표현되듯이, 어떤 충격적인 새로움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새로움’이 ‘시’에는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는가. 시라는 말에는 본래 무엇인가를 최초로 창조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성경에도 헬라어 원전에는 시를 가리켜 ‘포이에마’라고 하는데, 이도 역시 무엇인가를 최초로 창조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아무튼 이 새로움을 위한 충격요법은 시를 낯설게 할 뿐 아니라,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는 데 있어서 주요 역할을 하게 된다.

시에 있어서의 상징이나 은유는 언어의 환치나 유추를 가능케 할 뿐 아니라, 시어를 확장하는 데 있어서 전위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시를 낯설게 하는 데 있어서 공헌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이브의 죄를 씻은

몸뚱아리가

꽃처럼 붉어

가을 날

붉은 소문이

하늘을 타고 오른다.

그 날

능금나무 아래

불칼을 맞고 쓰러진

땅이 붉어

속살이 뜨거운 나무 위에

천둥소리 번져와

붉은 신들이 춤을 추고 있다.

―송상욱의 시 「단풍」―

여기에서는 “죄를 씻은 몸뚱아리가 꽃처럼 붉다”는 전제 아래 그 붉은 소문이 하늘을 타오른다는 현재진행상태를 시각적으로 나타내면서, 그 색채 심리적 요소로 사랑하는 죄에 대한 심판의 이미지를 재구성하고 있다. “천둥소리 번져와 붉은 신들이 춤을 추고 있다”고 할 때의 ‘붉은 신들’은 ‘단풍’에서 유추하는 유사안식(類似眼識)에 의한 은유효과를 거둔 셈이다.

6) 언외의言外意와 경중정景中情

고려시대의 시론에 ‘언외의(言外意)’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문자언어를 넘어선 작자의 생각이요, 작품이 풍기는 향기라 할 것이다. 이로 인하여 작품은 여운으로 감동이라는 울림을 주기도 한다. ‘言外意’는 헤아릴 수 없는 경치를 눈앞에 있는 것처럼 표현하면서도 그 말 밖의 감흥, 그 언어 자체만이 아니라 언어 이외의 감흥을 내포함으로써 시에 있어서의 끝없는 여운(餘韻)을 나타내게 된다.

매성유(梅聖兪)는 이를 “작자득어심 람자회이의(作者得於心 覽者會以意)”라고 집약하였다. 즉 시인은 마음으로 알거니와 독자는 뜻으로 만난다는 의미를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에 잠세어(潛勢語)를 생각할 수 있다. 잠세어, 즉 언어 그 자체만이 아니라 그 언어가 내포하거나 거느리고 있는 언어, 이것을 언어가 지닌 바의 언어 이외의 언어라고도 말할 수 있겠는데, 그러한 차원에서 言外意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현(李齊賢)도 ‘言外意’의 시관(詩觀)을 보이고 있는데, 그의 주장 가운데 “옛사람의 시는 눈앞의 경치를 묘사하였지만, 뜻은 言外에 있다. 말은 다 할 수 있으나 의미는 다 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이러한 견해에 입각해서 보게 될 때 소설가로 알려진 한승원의 시 「촛불 연가」가 돋보인다.

혼자서

허공을 향해

두 손의 엄지와 검지 끝을 맞붙이면 그것은

그냥 손가락들의 만남일 뿐이더니

너를 향해 앉아 눈을 감고

엄지와 검지 끝을 맞붙여 동그라미를 그리면

모든 세상이 그것 안에 다 들어와 담긴다

그것을 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간다

의도 속에 담는 것보다는

풀어서 제자리로 돌려보내는 것이 얼마나 마음 편한 일인지를 또한

너에게서 배운 다음부터 나는

이것저것 조급해하며

짓기(業)를 삼가기 시작했다.

―한승원의 시 「촛불 연가(戀歌) 1」―

우리 집 앞 골목 비좁아서 대문 앞까지 장의차 못 들어올 터인데

얼마나 고생들을 할까 내 관을 멘 사람들

내 무덤 고향 바다 내려다보이는 산언덕에 만들어달라고 하고 싶은데

나와 인연했던 사람들

그 인연의 빚 갚겠다고

한 시간 반 시내버스에서 시달리고

8시간 고속버스에서 흔들리고

가파른 그 고향 산언덕까지 내 무덤 찾아가느라고 얼마나 고달플까

에라

나하고 불행하게도 인연했던 사람들아

그 뼈다귀 무얼 하게 거기까지 끌고 갈 것이냐

벽제 화장장에서 태워 날리고 뼛가루는

너희들이 뿌리고 싶은 데다 뿌려라

구름되고 눈비되고 안개비 몇알 되어

산과 들의 나무에

들풀 위에

논밭의 곡식과 바다와 강에 내려

소나 돼지나 닭이나 말이나 뱀이나 풍덩이나 새들의 피와 살 되고

사람들의 영혼 속으로 스며들어 너울거리고 뛰어다니고 출렁거리게

나와 인연한 만큼의 빚졌다고 생각할 사람들아

나 보고 싶고 그 빚 갚고 싶거든 그냥

구름 강 바다 산천초목에

들꽃 한 포기한테 절하고

눈길 맞추고 입맞추고 말아라.

―한승원의 시 「촛불 연가(戀歌) 2」―

‘불바퀴(光輪)’라는 부제(副題)가 붙은 「촛불 연가 1」의 경우, 손가락을 사용하여 동그라미를 그리면 모든 세상이 그것 안에 다 들어와 담긴다고 하는, 경(景)에서 정(情)으로 유도(誘導)하고 유추하는 묘미를 보이고 있다. 그가 꾀어서 이끌어낸 시어의 형상화는 하나의 형태를 경(景) 그 자체에 머무르지 않고 그리고자 하는, 또는 말하고자 하는 내면의식(情ㆍ知ㆍ意)으로 표출한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내 무덤’이라는 부제가 붙은 「촛불 연가 2」의 경우, 불교의 무사상(無思想)이라든지, 윤회전생의식(輪廻轉生意識)이 녹아들어 어떤 종교의 카테고리에 매이지 않은 초탈한 상태에서의 달관의 멋스러움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달관의 경지는 불교적 요소라든지, 노장사상(老莊思想)에서 얘기되고 있는 허무의식, 즉 허무를 우주의 근원으로 보고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도(道)를 중히 여기는 자세 뿐 아니라, 한국인의 심층 저변에 깔려 있는 정한(情恨)의 요소가 합세하여 초탈(超脫)의 멋스러움을 가미하고 있다.

서양의 사랑

활활 불타서 재를 남기고

동양의 사랑은

두 얼음으로 스치고 녹아

물이 되어 하나에 이른다고

누군가

이 비슷이 말했었다.

남, 북극 萬年雪은

깜짝 놀라는 선연한 靑玉빛이며

조금 부스러 팔기도 하는데

이를 수입하는 나라들에선

작게 썰어 칵테일잔에 띄운다 한다

보통 얼음보다

네 배를 더디 녹으면서

수정주사위 같고 신기하여

사람들은 술도 잊은 채

지켜본다던가

鑛石이면서

본성은 역시 물이라

차갑고 투명한 물의 昆蟲들이

빽빽이 붐비며 꿈틀대고

실오리만한 균열이라도 생기면

몸을 푸는 물의 粒子들이

작은 運河처럼 운집하리라

소리없이 움직이는 工場 같으리

두 얼음 세 얼음이

스치고 녹아 물이 되어

끝내 하나에 이르듯

우리도 그리 된다면 좋을 것을

……사랑아

―김남조의 시 「얼음 이야기」―

한승원의 시(「촛불 연가」)가 탄탄한 시정신에 입각하여 치열한 시어의 분출을 보여 주었다면, 김남조의 시(「얼음 이야기」)는 어떤 입체적인 고차원을 보이고 있다.

도시에 무인도가 뜬다.

바람 부는 거리에

노을이 느린 필름으로

자막을 흘러내리면

저만치 무인도가 뜬다.

산소호흡기를 꽂은 가로수는

잿빛 하늘에 절망하다가

맥박을 헤아리고 헤아리고

잘게 빻아진 죽음들이

널려있는 도시에

뿌려진 나는 누구인가.

―위상진의 시 「무인도」 중 전반부―

여기에서는 추상적 관념이 구체화되고, 경(景)이라고 하는 구체적 사물어(事物語)가 다시 심상(心象) 저변에 흐르는 내면화를 보이고 있다.

전통의 계승 발전과 세계화는 균형있게 조화되어야 한다. 내 나라, 나의 쓸개까지 빼어 던져버리는 세계화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나의 것을 살려서 그것을 세계화하는 주체적인 자세가 요구된다. 일풍(日風) 미풍(美風) 양풍(洋風)에 제정신을 차릴 줄 모르는 채 끌려다니며 사는 듯한 요즈음 더욱 더 그리워지는 것은 우리 선조들의 시정신이다.

고려시대의 시론 가운데는 ‘언외의(言外意)’나 ‘경중정(景中情)’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문자로 기록되어 있지 않은 상상의 세계를 문학의 연상작용에 의하여 표출하는 기법을 말한다. 이는 독자로 하여금 문자 밖에 함축되어 있는 깊고 넓은 내용을 느끼게 하는 시적 여운을 가능케 한다.

이러한 견해에 어느 정도 접근된 것으로 보이는 작품으로 박명자의 시 「풀」도 있다.

부엌 구석에 눈치밥 얻어 먹으며

옆구리 쥐어박히면서

수채구멍에 코 박으면서

모질게 모질게 생의 고개를 넘던 옥남이

헌옷가지 줏어입고 누룽지 훑어 먹으며

열 발가락 열 손가락 무좀에 떠밀리면서

재취자리 전실 자식 다섯 뒷바라지 한다더니

어느 해 남편 잃고 머리 풀고 울고 울다가

아침 논둑 끝에 와서

맨발로 서 있구나.

―박명자의 시 「풀」―

여기에서는 ‘풀’이라는 사물을 보면서, 슬프고도 가련한 여인을 연상하게 되는데, ‘풀(景)’이 여인의 ‘슬픔(情)’이나 가련하게 느껴지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의 내면의식으로 확대 심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슬픈 여인을 증명하는 여러 형태의 처절한 비극적 요소들의 치열성에서 농축된 시어의 울림이 살아난다.

앞으로 시문학의 발전을 위해서 한승원의 시 「촛불 연가」는 자극제가 되었으면 좋겠고, 시인들은 소의 사골뼈 국물같은 우리의 고전시학도 찾아 읽었으면 좋겠다.

바슐라르의 ‘촛불의 미학’을 떠올리게 하는 한승원의 「촛불 연가」는 생각이 깊지 못하고 정서가 메마르기 쉬운 요즘 세상에 부끄러움으로 화끈거리게 하는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8. 문학과 인생

―나의 시론―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생리적인 면과 인격적인 면을 떠나서는 살 수 없게 되어 있다. 누구든지 먹지 않거나 잠자지 않으면 굶어 죽거나 시들어 죽고 마는데, 이러한 의식주 문제가 해결된다 할지라도 인격적인 면이 충족되지 않을 경우에는 존재의의나 그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떻게 사는 삶이 아름답고 보람되며 가치있는 삶인가 하는 인생의 의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하는 말도 문학의 본질에 접근된 말이라 할 수 있다. 톨스토이 등이 주장한 ‘인생을 위한 예술’도 역시 예술도 인생에 도움이 되어야 그 존재의 가치가 주어진다고 하는 예술관이라 할 수 있다.

문학에 있어서 인생이라든지, 인생에 있어서 문학이란 인생의 참다운 의의와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새로운 해석이어야 한다.

김소운의 수필 「특급품(特級品)」에는 ‘과실(過失)’에 대한 말이 나온다. 과실은 장려할 것이 못되지만, ‘인생의 올 마이너스는 아니다’라는 주장이다. 과실로 인해서 오히려 여물어지는 면도 있다는 논리다. 결말 부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과실은 예찬할 것이 아니요, 장려할 노릇도 못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과실이 인생의 ‘올 마이너스’일 까닭도 없다. 과실로 해서 더 커가고 깊어가는 인격이 있다. 과실로 해서 더 정화되고 굳세어지는 사랑이 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어느 과실에도 적용된다는 것은 아니다. 제 과실의 상처를 제 힘으로 다스릴 수 있는 ‘가야’반(盤)의 탄력…… 그 탄력만이 ‘과실’을 효용한다. 인생이 바둑판만도 못하다고 해서야 될 말인가?

인생이란 이와 같이 정답이 있을 수 없다. 이와 같이 문학이 인생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주어질 수 있을 때 그 가치는 살아나게 된다. 독일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가을날」을 보기로 하자. 그가 얼마나 인생에 대해서 자연에 대해서 그리고 절대자의 섭리에 대해서 겸허한 자세로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감지할 필요가 있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십시오.

들에다 많은 바람을 놓으십시오.

마지막 과실들을 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南國의 햇볕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시켜,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을 스미게 하십시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이 후도 오래 고독하게 살아

잠자지 않고 읽고 그리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바람에 불려 나뭇잎이 날릴 때, 불안스러이

이리 저리 가로수 길을 헤맬 것입니다.

신의 소성이 내재되어 있는 대자연에의 축복과 신의 은총이 충만한 시다. 구구절절 신에게 향하는 간절한 소망과 구원의 이미지가 번득이는 작품이다. 소박한 바램과 겸허한 심성이 시어로 승화되어 있다. 그의 종교적 상상력이 이러한 신앙시를 가능케 했다.

자작시 가운데에 지순한 향토정서와 따끔한 문명비판과 불변의 절대사랑, 그리고 강직한 선비정신을 바탕으로 선풍(禪風) 또는 선풍(仙風)의 세계를 추구한 시가 있다.

아침을 들다가도 문득, 올려보는 하늘

저 하늘 아래 보이는 땅이

내 고향이다.

대밭엔 비비새 울고

하얀 연기 얕게 깔리는 꿈속의 마을

부르면 부를수록 청국장 냄새가 난다.

청국장을 잘 끓여 주시던 어머니,

시골 어머니는 가슴에 활활

솔가리불을 지피신다.

―「저 하늘 아래」―

1976년에 일본 나고야에서 쓴 시다. 한국일보에 게재된 바 있는 이 시는 향토정서가 물씬 풍기는 시로서 애향의 그리움을 일깨운다. 나는 초기에 왜 향토색 짙은 토속의 시를 썼는가. 농촌 출신으로서 그러한 시골 분위기가 체질화되어 있을 뿐 아니라 가장 한국적인 시가 세계적일 수 있다는 신념이 자리한 것 같기도 하다.

오늘은 내 나라 칡차를 들자.

조상의 뼈가 묻힌 산

조상의 피가 흐른 산

조상 대대로 자자손손

뼈중의 뼈, 살중의 살이 묻힌 산

그 산 진액을 빨아올려

사시장철 뿌리로 간직했다가

주리 틀어 짜낸 칡차를 받아 마시고

내가 누구인가를 생각하자.

칡뿌리같이 목숨 질긴 우리의 역사

칡뿌리같이 잘려 나간 우리의 강토

내 흉한 손금 같은 산협에

죽지 않고 살아 남은 뿌리의 정신,

흙의 향기를 받아 마시자.

어제는 커피에 길들어 왔지만

어제는 정신없이 살아 왔지만

오늘은 내 나라 칡차를 들자.

―「칡차」―

민족적 자성을 따끔하게 일깨우는 문명비판의 시 작품이다. 커피로 상징되는 외래사조에 휩쓸려 살아온 우리들에게는 망각된 제자리 찾기라고 할까 민족 고유의 뿌리 찾기에 관심을 갖게 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불 속에서 한 천년 달구어지다가

산적이 되어 한 천년 숨어 살다가

칼날같은 소슬바람에 念珠를 집어 들고

물 속에서 한 천년 원 없이 구르다가

영겁의 돌이 되어 돌돌돌 구르다가

매촐한 목소리 가다듬고 일어나

神仙峰 花潭先生 바둑알이 되어서

한 천년 雲霧 속에 잠겨 살다가

잡놈들 들끓는 俗界에 내려와

좋은 詩 한 편만 남기고 죽으리.

―「돌」―

이 시는 절대적인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 우리들의 현실은 절대적일 수가 없고 상대적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은 보다 완전하고 완벽한 절대적인 세계를 부단히 추구한다. 시라고 하는 것, 문학이라고 하는 것, 예술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적이거나 일상적인 상식을 초월하여 비일상적인 현실이나 상식 이상의 것을 자유롭게 추구하고자 하는 성질을 지닌다.

그것은 어떤 문제에 대하여 성급하게 메스를 가하는 성질의 것도 아니다. 그것은 가령 어떤 환자가 있다고 가정할 때 성급하게 메스를 가하기보다는 병실에 커튼을 드리운다거나 화병을 장식하고 음악이 흐르게 하는 등 편안한 분위기를 조성하여 마음의 평화로써 치유를 기다리는 성질을 지닌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게 될 때 시는 세탁비누나 하이타이와도 같은 성격의 것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언어를 통하여 마음을 빨래한다. 승화된 시어로써 더럽혀진 마음을 빨래하고 곱게 펴나가는 작용을 전개한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영혼을 빨래하고 곱게 다림질하여 반듯이 펴나가게 된다.

그것은 잘 익은 술이나 간장과도 같은 성질의 것이다. 술이나 간장이 완성되는 과정은 한 편의 시가 완성되는 과정과도 흡사하다. 간장이 모든 음식에 맛을 내듯, 우리가 이 세상을 맛들게 하기 위해서는 잘 썩어야 하는 메주와 부패를 막는 소금의 정신으로 조화롭게 융합되어야 한다.

시를 쓰기 전에 인생을 정서하라.

가슴에 괸 술을 곱게 떠 내어라.

성급하게 쥐어짜는 惡酒일랑

아예 꿈도 꾸지 말라.

시는 썩는 의식의 항아리에

용수를 질러놓고 기다리는 사상.

인생이 익을 때까지 기다리며 참는

꽃술의 아픔이다.

떫은 언어가 익느라고 썩는 동안엔

남 모르는 눈물도 흘려야 하느니라.

속을 썩혀서 단맛으로 우려내는

內密의 結晶.

꽃답게 익은 술, 정겹게 괸 술을

곱게 떠 내어라.

―「시론(詩論) 1」―

‘용수에서 떠낸 술’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시는 시론을 시로 쓴 셈이다. 글을 쓰기 전에 먼저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 논리와 그 궤도를 같이 하는 말이다. 공자(孔子)가 자신이 엮은 시 305편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사무사(思無邪)라 하였다. ‘생각함에 사특함이 없다(詩三百一言以廠之曰思無邪)’라고 한 이 말은 곧 시를 보는 자신 속에 간사한 마음이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자연스러움’이라든지 ‘편안함’이라는 예술의 본질적 요소와도 맥이 통하는 내용이 암시되어 있다. “쥐어 짜는 악주(惡酒)일랑 꿈도 꾸지 말라”는 주문은 그 단적인 싯구라 하겠다.

높은 산의

경험의 나무숲과

깊은 골의

인식의 물소리 찾아 헤매며

주워온 도토리 옹배기에 붓고

바위 틈의 맑은 물 남실남실

잠재우는 日月로

떫은 언어를 우려 낸다.

우려내면 우려낼수록

맑아지는 정신,

渾身의 熱을 가한다.

창조의 질서를 찾아

열을 가하고, 열을 식히면

오롯하게 어리는 山香의 묵,

詩語를 퍼 담은 心象의 옹배기에

도토리묵만 오롯하게 어린다.

―「시론(詩論) 2」―

‘도토리묵’이라는 부제가 붙은 시다. 시작과정(詩作過程)은 이 시에서처럼 여과작용(濾過作用)을 의미한다. 마치 떫은 도토리를 물옹배기에서 우려낸 다음 열을 가하여 도토리묵을 만드는 과정처럼 시 역시 여과와 승화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우리 조용히 썩기로 해요

우리 기꺼이 죽기로 해요

토속의 항아리 가득히 고여

삭아내린 뒤에

맛으로 살아나는 삶,

우리 익어서 살기로 해요.

안으로 달여지는 삶,

뿌리 깊은 맛으로

은근한 사랑을 맛들게 해요

정겹게 익어 가자면

꽃답게 썩어 가자면

속맛이 우러날 때까지는

속 삭는 아픔도 크겠지요.

잦아드는 짠 맛이

일어나는 단맛으로 우러날 때까지,

우리 곱게 곱게 썩기로 해요

우리 깊이 깊이 익기로 해요

죽음보다 깊이 잠들었다가

다시 깨어나는 부활의 윤회,

사랑 위해 기꺼이 죽는 人生이게 해요

사랑 위해 다시 사는 再生이게 해요.

―「간장」―

간장이 모든 음식에 들어가 맛을 내듯이, 우리들이 이 세상을 맛들게 하기 위해서는 잘 썩어야 하는 메주와 부패를 막는 소금의 정신으로 조화롭게 융합되어야 한다는 내용이 형상화되어 있는 작품이다. 여기에서는 간장이 지닌 그 이미지를 통해서 사상으로까지 심화시키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제까지 여러 작품을 소개하면서 거기에 해당되는 얘기를 덧붙였는데, 이러한 내용을 우선 감상하고 이해하며, 분석 비평한 다음에 창작적 기능을 살리는 방향으로 전개하는 게 바람직하겠다.

하이덱거는 말하기를, ‘언어란 존재의 집’이라고 하면서, ‘우리는 신(神)의 언어의 집에서 살아야 한다’고 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이나 글을 쓰는 행위는 바로 이 ‘언어의 집짓기’가 된다. 좋은 집은 좋은 벽돌로 이루어지듯이, 훌륭한 글은 아름다운 마음씨와 거기서 비롯되는 승화된 언어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문학과 인생’은 불가분의 상관관계를 지닌다. 젊은 시절에는 싱싱한 시를 쓰다가 늙어지게 되면 까치밥(홍시)처럼 익은 시를 쓰게 되는 것도 그 성숙도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우리 죽어 살아요.

떨어지진 말고 죽은 듯이 살아요.

꽃샘바람에도 떨어지지 않는 꽃잎처럼

어지러운 세상에서 떨어지지 말아요.

우리 곱게 곱게 익기로 해요.

여름날의 모진 비바람을 견디어내고

금싸라기 가을볕에 단맛이 스미는

그런 성숙의 연륜대로 익기로 해요.

우리 죽은 듯이 죽어 살아요.

메주가 썩어서 장맛이 들고

떫은 감도 서리맞은 뒤에 맛들듯이

우리 고난받은 뒤에 단맛을 익혀요.

정겹고 꽃답게 인생을 익혀요.

목이 시린 하늘 드높이

홍시(紅柿)로 익어 지내다가

새소식 가지고 오시는 까치에게

쭈구렁바가지로 쪼아 먹히고

이듬해 새 봄에 속잎이 필 때

흙속에 묻혔다가 싹이 나는 섭리

그렇게 물 흐르듯 순애(殉愛)하며 살아요.

―「까치밥」―

이 시는 절대사랑을 내비치는 작품으로서, 고난을 선량하게 극복하지 않고는 인격의 완성으로 거듭날 수 없다고 하는 성숙의 각성이 종교적, 철학적 차원으로 승화된 작품이다. 인생이 재생이나 부활로 거듭나게 될 때, 순애(殉愛)하는 삶 속에서 그 성숙된 인격의 완성으로 인하여 참된 삶의 존재가치를 찾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문학의 예술성과 영원성을 고양하고 있다.

이 「까치밥」의 갈래는 자유시이면서 서정시이고, 구성은 기승전결(起承轉結)의 4연시로 짜여져 있으며, 서정적인 향토정서를 바탕으로 은유와 상징 기법을 활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상의 전개 과정을 보면, 제1연의 기(起)는, 아무리 세상이 어지러워도 실족하거나 좌절하지 말라는 내용을 감나무의 감꽃을 끌어들여 ‘떨어져서는 안된다’고 강변하고 있으며, 2연의 승(承)에서는, 인생의 성숙을 가을볕에 단맛이 스미는 감나무의 열매에 비유하여 인내를 통한 아름다움의 승화를 노래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시적 자아와 제재의 일체화를 통하여 선량한 마음으로의 고난 극복을 표로하고 있는데, ‘모진 바람’은 현실적인 고난을, ‘단맛’은 고난 극복 후에 나타나는 성숙의 진수를 상징한다.

그리고 3연의 전(轉)에서는, 정겹고 꽃다운 아름다움으로 인생을 익히기 위해서는 온갖 인고를 슬기롭게 겪어 내야 한다고 겸허한 마음으로 토로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자기 희생’과 시련 극복 후의 성숙을 형상화하고 있다.

마지막 4연 결(結)의 경우, 늦가을 서리맞은 뒤에 맛드는 홍시(紅柿)처럼, 절대사랑의 순애를 통한 부활, 다시 거듭나는 재생이야말로 절대가치의 진수임을 예시하고 있다. 여기에서의 ‘까치’는 고난 극복 후의 성숙한 인간에게 희망을 가져다 주는 전령사를 상징하며, ‘순애(殉愛)’는 절대사랑을 추구하는 자기희생의 극치를 표상한다.

이 시는 감나무의 감꽃이 감열매가 되고, 마침내 홍시의 상태로 완숙하게 되는 그 성숙과정을 통하여, 고난과 시련을 극복하고 절대가치를 향유하게 되는 인생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1연의 1~2행은 겸손한 삶을, 3~4행은 고난의 세계에 실족하지 않기 위한 인내를 역설하고 있으며, 2연은 떫은 맛은 다 빠지고 단맛이 드는 감열매처럼 성숙의 연륜을 따라 인격이 완성되어 가는 인생을 ‘모진 비바람’과 ‘금싸라기 가을볕’이라는 두 대립적 갈등 구조로서 형상화하여 인내와 조화를 통한 완성을 노래하고 있다.

3연은 잘 썩음으로써 장맛이 드는 메주처럼, 서리맞은 뒤에 맛이 드는 까치밥같은 인생은 ‘고난’의 극복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교훈을 제시하고 있다.

4연에서의 ‘까치’는 희망의 새소식을 가지고 오시는 ‘님’을 상징한다. 희망의 새소식을 염원하는 상징물의 표상인 ‘까치밥’은 희망의 상징인 ‘까치’를 불러들이고, 까치밥은 까치에게 희생, 봉사하고 순애함으로써 절대사랑으로 다시 사는 부활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 시는 현실의 고난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새희망을 염원하는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정서를 까치밥과 까치라는 토속적 소재를 통하여 명징한 언어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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