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시의 구성
1. 주제의 설정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라든지, 사진 작가가 사진을 찍으려고 할 때 우선 ‘무엇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라든지 ‘무엇을 어떻게 찍을 것인가’ 하고 구도(構圖)를 잡을 것이다.
시의 경우에도 이와 마찬가지로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 하고 궁리하게 되는데, 이것을 가리켜 주제를 설정한다고 할 수 있다.
주제의 설정이란 생활설계도와도 같은 것이다. 가령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고 궁리하다가 농부가 되어 농사를 짓고 싶다고 막연하게 생각한 것으로는 주제가 설정되었다고 할 수 없다. 초가집을 짓고 살되 박을 심어서 박꽃이 피게 하고 박이 열리게 하여서 잃어버린 생활문화재를 복원하면서 살고 싶다면 보다 구체적으로 설정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며 살아라 한다
밭이나 갈며 살아라 한다
어느 짧은 산자락에 집을 모아
아들 낳고 딸을 낳고
흙담 안팎에 호박 심고
들찔레처럼 살아라 한다
쑥대밭처럼 살아라 한다
산이 날 에워싸고
그믐달처럼 사위어지는 목숨
그믐달처럼 살아라 한다
그믐달처럼 살아라 한다
―박목월의 시 「산이 날 에워싸고」―
여기에서 우리는 보다 구체적으로 주제가 설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시인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다. 이 시작 의도는 주제와 연결되어야 하고, 이 주제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소재(제재)가 취사 선택되어야 한다. 자료라 할 수 있는 소재가 선택되면 그것을 요리할 수 있는 기교가 요구된다.
이는 마치 집을 지어야겠다는 구상과 함께 그 재료가 모아짐과 동시에 그 재료로 집을 짓는 기술의 활용이 뒤따르는 이치와도 흡사하다. 여기에 시인의 독특한 문체라든지, 묘사 등등의 표현 기법이 요구된다.
1) 사물을 보는 눈
우리가 어떠한 사물을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은 그 대상적 사물이 지니고 있는 바의 소성이 사물을 바라보는 주체적 시인에게도 이미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물이 지닌 바의 소성(素性)이 나의 관념의 렌즈에 내재되어 있기에 인식이 가능하다는 논리다. 이러한 동질 요소로서의 관념의 렌즈는 유사안식(類似眼識)으로 부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주체자로서의 관조자와 대상으로서의 사물 사이의 교감에서 가능해진다. 이러한 교감은 서로 같은 요소가 존재하기 때문에 일어나게 된다. 이것을 상사성(相似性)이라 한다.
서양인들이 청국장이나 김치찌개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반응과 한국인들이 이 말을 들었을 경우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게 되는데, 이는 경험의 유무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이해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이것도 일종의 상사성의 법칙에서 파생된 경우에 해당된다.
2) 구상構想과 구성構成
구상이란 예술 작품을 창작할 때에 내용이나 표현 형식 등에 대하여 생각을 정리하는 일을 말하는데, 구성이란 구상에 비하면 보다 구체적인 방법을 조성하는 성격의 것이다. 그것은 작품을 이루는 여러 요소를 결합하여 전체적인 통일을 꾀하는 통일원리라 할 수 있다.
가령, 콩으로 두부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구상이라 한다면, 이 구상은 발생하는 주제와 연결되어 더욱 구체화되어야 하고, 물에 불린 콩을 맷돌에 갈면서 열을 가하는 등 구체적으로 발전하게 되고, 미열(微熱)은 치열(熾熱)로 점진적인 변화와 발전을 보이면서 콩비지라고 하는 찌꺼기를 제거하듯이 취사 선택하여 산만성을 제거하고 통일성을 이루는 방향으로 구체화하게 된다.
이와같이 시를 창작할 때는 내용을 머리 속에 그리는 일에서 시작하여 구체적인 작품으로 형상화하는 데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구상과 구성은 뗄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콩비지라고 하는 찌꺼기를 제거하듯, 구체적 형상화에 방해가 되는 요인들, 가령 주제의식이 빈곤하다거나 불필요한 글이 혼용되어 있는 등의 불순물을 제거한 후에는 헝겊에 가둔 콩물을 냉각시키듯이 글의 내용을 객관화하게 되는데, 이때 구성이란 간수를 질러서 굳어져 어리게 하듯 내용의 구체적 형상화를 꾀하는 성질을 지닌다.
3) 상상력과 유추능력
상상력이란 눈 앞에 없는 사물의 이미지(image)를 만드는 정신 능력을 말한다. 상상력은 예술 또는 시를 창조하는 근원적 능력을 말한다. 애머슨은 이것을 시의 생명이라고 처음 말했고, 낭만파 시인들은 “시는 과학적 진실과 다른 미(美)이며, 그 미는 사물이 아니라 상상된 것 속에 있다.”고 규정하였다.
또한 키츠는 말하기를 상상력이야말로 진실을 창조한다고 했는데, 한편 시 창작에 있어서 정밀한 사색의 결과 영원 불변의 것을 유한한 인간 정신 속에서 창조하는 것이 상상력이라고 주장한 시인은 콜리지였다.
유추(類推)란 수사학에서는 비유로 이해되는데, 이것은 이질적인 두 의미의 유사점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거니와 문학에서는 어떤 점에 있어서 미지(未知)한 것을 암시해 내기 위하여 기지(旣知)한 것을 묘사하는 법을 말한다.
문학 뿐 아니라 모든 예술은 상상력의 산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창작 과정에서 유추 또한 간과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4) 시어의 조립능력
시를 잘 쓰는 길은 적합한 언어를 찾아내어 적합한 자리에 끼워 넣는 길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말은 쉬워도 실제로 쓰려고 하면 그렇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현실이다.
먼저 적합한 언어를 찾는 길인데, 어느 것이 적합한지 취사 선택하기 위해서는 언어에 대해 민감한 감식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적합한 자리에 끼워 넣기 위해서는 문장의 조립능력이 요구된다.
이는 마치 온갖 사물, 가령 여러 가지 빛깔의 돌이나 유리라든지, 조가비, 콩, 조, 수수, 수수깡, 지푸라기 따위를 박거나 붙여서 모자이크를 형성하듯이, 새로운 형태를 이루는 것과도 같다.
꿩이건 닭이건 부분과 부분은 전체적으로 통일성을 유지해야 하듯이, 시 역시 행과 행, 연과 연은 전체적인 시 작품으로 통일되어야 한다.
시 문장이 통일되지 않고 산만하게 되는 경우에는 그럴 수 밖에 없는 원인이 있는데,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우선은 주제가 명확치 않을 때라든지, 문장이 너무 길게 늘어질 때, 또는 의식이 과잉되어 있는 경우를 들 수 있다. 그러니까 시가 통일되어 있지 않고 산만하게 되는 경우에는 이러한 세 가지 요인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2. 기교의 활용
1) 은유의 효과
은유란 암유(暗喩)라고도 하는데, 수사법상 비유법의 한 가지로서 원관념(元觀念)은 숨기고 보조관념(補助觀念)만 드러내어, 표현하려는 대상을 설명하거나 그 특질을 묘사하는 표현 방법을 말한다. ‘내 마음은 호수’라고 하거나, ‘내 마음은 고요한 물결’이라고 표현하는 따위가 그것이다. 여기에서의 ‘호수’나 ‘물결’이라는 보조관념은 ‘내 마음’이라는 원관념을 나타내기 위해서 동원된 언어라 하겠다.
이와같이 은유란 언어 작용의 한 특이한 조합(組合)으로서 이에 의하여 한 사물의 양상이 다른 하나의 사물로 넘겨지거나 옮겨져서 두 번째의 사물이 마치 첫 번째의 사물처럼 서술되는 것을 가리킨다.
은유는 전통적으로 비유언어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라 할 수 있다. 전이(轉移)의 여러 가지 형식을 비유나 형용이라 부른다. 직유는 은유의 빈약한 친척이라는 말이 있는데, 시 창작의 경우, 그것은 은유에 비하여 시적 묘미의 차원이나 효과면에서 떨어질 수 있다.
제유(提喩)는 부분으로 전체를 나타내려고 하는데, 가령 “도리우찌가 선그라스에게 귓속말로 속삭이더니 한쪽 눈을 찡긋하고는 골목으로 쏜살같이 사라졌다”고 표현하는 예가 그것이다.
환유(換喩)는 ‘도둑’을 ‘밤손님’이라 하거나, ‘바다’를 ‘고래의 길’로 나타내는 예가 그것이다.
시인이 시인인 것은 오직 은유의 영역에서 뿐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시는 모방의 작용에 관련되어 있으며, 표현의 특이성을 특징적으로 추구하기 때문에 은유에 크게 의지한다.
은유란 어떤 한 명칭의 사물을 다른 사물에 적용시키는 것이라는 일반적인 정의 안에서 그것을 네 가지 종류로 구분하고 있다. 그것은 ① 유(類)에서 종(種)으로 ② 종(種)에서 유(類)로 ③ 한 종(種)에서 다른 종(種)으로, 그리고 ④ 유추의 사례를 들 수 있겠는데, 이는 가령 강신재의 소설 제목인 「임진강의 민들레」의 경우, 임진강 가에 떨어진 훈장이 민들레로 보였다는 것으로부터, 민들레가 평화에 관련된 것으로 훈장은 전쟁에 관련된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적절히 사용된 은유의 효과는 친근한 사물과 생소한 사물들을 결합시킴으로써 매력과 특이성을 통해 사물을 명료하게 해준다. 이 매력과 특이성은 지적인 쾌감과 경이로운 속성에서 온다. 매력은 은유 속에 드러난 새로운 유사성들에 의하여 제공된 지적인 쾌감으로부터, 그리고 특이성은 식별된 유사성들의 경이로운 속성에서 온다.
은유는 문체의 최고의 장식이라는 말처럼 그것은 변화무상하다. 그것은 파블로 네루다의 「여자의 몸」이라는 시에서의 “하얀 골짜기 하얀 유방”에서처럼 무생물에서 생물로 은유되기도 하고, 생물에서 무생물(잠자리 날개같은 모시옷)으로 직유되기도 한다.
무생물에서 무생물로 표현하는 경우는 “불도저가 판자집을 밀어 붙인다”고 할 수 있다면, 생물에서 생물로는 국회의사당에서 사람이 개를 무는 광경으로 표현될 수 있다.
은유는 한 사물에 적용된 낱말이 다른 사물로 전이될 때 생긴다. 유사성이 그 전이를 정당화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은유에 대한 몇 가지 용법을 든다면 다음과 같은 경우, 가령 선명함과 간단함과 모호함, 과장, 축소, 수식 등을 들 수 있다.
비유의 성립에는 둘 이상의 서로 다른 관점이라든지, 심상(心象), 상징의 긴밀한 연결이 필요하다. 사물 사이의 관계 또는 교감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시된 이래 은유는 현대시론의 중심과제가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비유를 가리켜 “한 사물에다 다른 사물에 속하는 이름을 옮겨다 붙이는 것”이라고 정의한 것처럼, 그것은 어떤 특수한 목적을 위하여 낱말을 옮겨놓기한 것이다.
가령 ‘키 큰 사람’을 가리켜 →키다리→전봇대로 옮겨놓기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특수한 효과를 위해서 유사성이 있는 어떠한 두 사물 사이에서 특수한 목적을 도출해 내는 것을 알 수 있다.
얇은 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조지훈의 시 「승무(僧舞)」 중 앞부분―
조지훈의 이 시는 analogy를 잘 활용한 작품이다. 이 유사성은 ‘고깔’이라는 취의(趣意) 즉 취지(趣旨)를 ‘나비’를 매개어(媒介語)로 해서 드러내고 있다. 이 시인은 ‘고깔’을 선택한 그 근본 목적이나 의도를 ‘나비’를 매개어로 특수한 효과로 표현하고 있다.
‘고깔’과 ‘나비’는 전혀 다른 것이지만 이 시인은 서로 비슷한 점, 서로 닮아있는 상사성(相似性)에서 공통점을 발견해 낸 것이다. 여기에서의 ‘파르라니 깎은 머리’와 ‘고깔’의 내력을 알게 되면, ‘고깔’과 ‘나비’의 관계는 더욱 슬픈 아이러니를 암시하게 된다.
어매여, 시골 울엄매여!
어매 솜씨에 장맛이 달아
시래기국 잘도 끌여 주던 어매여!
어매 청춘 품앗이로 보낸 들녘
가르마 트인 논두렁 길을
내 늘그막엔 밟아 볼라요.
자작시 「망향가(望鄕歌)」 중 앞부분이다. 여기에서의 ‘가르마’는 ‘논두렁길’의 매개어이지만, ‘논두렁길’을 묘사하기 위해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의 ‘가르마’는 들녘에서 청춘을 품앗이로 보낸 어머니의 머리 모양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가르마’는 매개어 이상의 효과를 내고 있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필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서정주의 시 「국화옆에서」 중 후반부―
여기에서 형식상으로는 ‘국화’가 취의趣意(意圖)요 ‘누님’은 매개어로 되어 있지만, 누님같이 생긴 꽃이 국화인 동시에 국화같은 사람이 누님이라는 비유관계의 교감(交感) 즉 주고 받는 작용이 가능하다.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흰그림자를 안고 玉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다.
―김동명의 시 「내마음」 중 첫 연―
여기에서의 내 마음은 호수를 가리키고 있는데,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는 호수는 넓고, 깨끗하고, 고요하고, 서늘하고, 푸르고, 깊다고 하는 다양한 성격으로 나타나 있다.
호수와 마음의 공통점은 이런 상식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마음의 호수에 님이 탄 배가 저어오면 뱃전에 부서지는 물결이 되고자 하는 이유에서 발견된다. 독자들은 이러한 공통점을 찾기 이전에 말로 간단히 설명할 수 없는 타당성을 이유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여기에서의 ‘내 마음’은 추상적인 불가시(不可視), 또는 비가시(非可視)의 존재다. 그것은 눈으로 볼 수 없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 볼 수 없는 불가시 비가시의 추상개념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기 위해서는 ‘호수’라고 하는 객관적인 상관물(相關物)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 ‘호수’는 기억을 불러 일으키는 환기력(喚起力)을 통해 ‘마음’으로부터 유추하게 되는데, 이런 경우를 ‘마음’과 ‘호수’ 사이의 연결고리라 할까 상상작용에 의해서 치환(置換)하는 치환은유(置換隱喩)라고 한다.
시에 있어서의 은유는 전쟁에 있어서의 로켓트 포처럼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는 성격의 것이다. 시 뿐 아니라 산문에 있어서도 그 효과는 인정되어 왔다. 가령 ‘그 남자의 성질은 날카롭다’고 하는 경우에는 설명에 그치지만, 그 남자의 성질은 ‘칼날이다’거나 ‘불칼이다’고 하는 경우에는 은유적 표현이 된다.
플로베르는 제자 모파상에게 일사일어주의(一事一語主義)를 가르쳤다. 이는 표현의 극한적인 엄밀성을 강조한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사전을 뒤져도 일사일어주의는 구현되지 않는다.
이와같은 언어의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불완전한 언어로 사물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 언어의 불완전성에도 우리는 삶을 영위하는 데에 있어서 별다른 불편을 겪지 않는다.
시인의 괴팍성은 언어의 그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그 불완전성을 무릅쓰고 그 언어로써 모든 사물의 그 가장 정확한 이름, 단 하나밖에 없는 그 이름을 불러주는 데에 있다고 한다.
과일 망신을 시키는 모과 덩어리
모과 덩어리 같은 머리통
머리통 딱딱한 거지의
그 독특한 이미지를 사랑했단다.
자작시 「퐁네프의 연인들」 중 첫 연이다. 여기에서의 이미지란 마음 속에 그려지는 사물의 감각적 영상(映像)이라든지, 머리 속에 떠오르는 사물의 모습으로서 “모과덩어리 같은 머리통”을 그려내고 있는데, 이도 역시 원관념을 나타내기 위한 보조관념의 기민한 동원령에 의해 나타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이와같이 시인은 하나밖에 없는 이름을 불러 주려고 한다. 언어 자체가 불완전한 이상 그 언어에 의한 사물의 호명이 완전을 기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시인은 불가능에 도전한다. 그래서 시인을 가리켜 언어의 창조자니 무관의 제왕이니 하고 명명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사물의 정확한 이름을 불러 주려는 시인의 기도는 바로 그 언어의 창조를 통해서 성취된다.
시인의 언어 창조는 기존의 언어를 대상으로 해서 진행될 수 밖에 없다. 시인의 언어 창조는 시인이 자신의 창조적 능력으로 기존의 언어를 거듭나게 하는 일이다.
베이컨은 말하기를 상상력이란 “자연이 결합시켜놓은 것을 분리하고, 자연이 분리해 놓은 것을 결합시키는 인간의 힘이다.”라고 했다. 이는 상상력이야 말로 창조력의 원동력이 된다는 점을 단적으로 피력한 말이다.
우리가 은유로써 사물에 대해 정확히 이름을 붙여 준다는 그 일이 곧 창조행위가 된다. 그 창조의 결과는 바로 기존의 세계에 맞서는 새로운 세계를 펼치게 된다.
요리사는 식료품의 차이에 따라 칼을 바꾼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은유라든지 상징 기법을 다루는 데 있어서 상기해야 할 적절한 비유이다. 시에서의 다양한 비유 구사는, 사과는 과도(果刀)로 깎아야 하고, 생선은 회칼을 써야 하며, 김치는 무쇠칼을 써야 하는 것과도 흡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유치환의 「깃발」 중 첫 연―
여기에서는 ‘깃발’이 ‘아우성’과 ‘손수건’으로 은유되어 있다. ‘아우성’ 앞에 ‘소리 없는’이 들어감으로써 일반적인 아우성과 다른 특별한 효과를 가져오고, 손수건도 보통의 손수건이 아니라 ‘영원한 노스탈쟈’가 차용됨으로써 특별한 효과를 살려내고 있다.
시에는 이와 같이 신기성(神奇性)과 모호성(模糊性), 그리고 어떠한 대상을 지향하는 의식 내용으로서의 표상성(表象性)이 있어야 한다.
초보자가 시를 처음으로 써보는 경우에는 “①봄이 와서 꽃이 피었다. ②노란 개나리가 언덕에 피었다.”고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 좀더 질서화하자면, 다음과 같은 정리가 가능하다.
개나리→노란 저고리 입은 우리 누나가
봄언덕→봄 언덕에서 웃고 있네.
이를 다시 「개나리」라는 제목을 걸고 시로 다듬어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은 시의 형태가 가능해지게 된다.
개나리꽃 그늘엔 병아리가 있었네
개나리 꽃잎 물던 첫사랑이 있었네.
첫사랑 꽃그늘엔 눈망울이 있었네
눈망울엔 오롯한 웃음꽃이 있었네.
이는 자작시 「개나리」 중 앞부분이다. 이 글은 보다 구체적으로 형상화된 상태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구체적 형상화 작업이야말로 시 창작의 기본 과제라 할 수 있다.
2) 상징의 효과
어번(W.M.Urban)은 언어 발달의 과정을 사실적 단계와 유추적 단계, 그리고 상징적 단계로 분류했다. 원시인이나 아이들의 언어처럼 대상을 흉내내고 묘사하는 언어를 사실적 단계라고 한다면, 비유적 언어의 용법을 유추적 단계, 그리고 언어의 가장 높은 차원의 형태를 상징적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상징이란 불가시적(不可視的)인 것을 암시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경우, 불가시적인 것이 원관념(元觀念)이고, 가시적인 것은 보조관념(補助觀念)이다. 상징이란 비유에서 원관념을 떼어버리고 보조관념만 남아있는 형태를 말한다.
비유에서 원관념과 보조관념은 서로 이질적이면서도 유사성을 근거로 하여 결합된다. 원관념이 숨고 보조관념만 작품의 표면에 나타나 있다는 상징의 존재양식도 양자의 완전한 결합을 의미하고 있다.
상징은 감춤의 성질만도 아니고 드러냄의 성질만도 아니다. 상징은 감춤과 드러남의 이중적인 성격 때문에 신비로운 여운이 항상 남아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상징의 성공은 드러냄과 감춤의 조화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떠한 사상(事象)이나 개념을 상기시키거나 연상시키는 구체적인 사물이나 감각적인 말로 바꾸어 나타내는 일을 상징이라 한다면, 은유는 원관념은 숨기고 보조관념만 드러내어 묘사하는 표현 방법을 말한다.
진달래 꽃물이 번지는
진달래 능선에서의 점심 한 때
도시락을 진설하는 여류시인과
여류시인 도마 위에 놓인 남류시인이
봉우리같은 소리와 골짜기같은 소리로
노닥이고 있었다.
“제 고추도 잡숴보셔유.”
“고추는 웬 고춥니까?”
“크지는 않아도 맵거든요.”
“매운 고추 좋아하십니까?”
“그러믄요. 통째로 먹거든요.”
“다음 산행땐 제가 가져올까요?”
“약이 오른 고추는 너무 매워유.”
“비닐하우스 고추는 암시랑토 않아요.”
“그게 무슨 이야기대유?”
“풋고추 이야기지요.”
고추 이야기가 무르익어 갈수록 진달래 능선은 발그레하게 상기되고 숫기 진한 바람이 살랑댈수록 출렁이던 능선이 몸서리를 치더라.
뻐꾸기는 뻑뻑꾹 쑤꾸기는 쑥쑥꾹
산바람은…………
골바람은…………
자작시 「산중문답(山中問答)」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고추’의 상징성과 그 뒤를 이어 전개되는 은유의 입체성을 감지하게 된다. 여기에는 관심을 갖고 주의깊게 사펴보면서 눈치챌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능선’ ‘봉우리’ ‘골짜기’ ‘고추’ ‘매운 고추’ ‘약이 오른 고추’ ‘비닐하우스 고추’ ‘산바람’ ‘골바람’ 등등 상징과 은유의 입체적인 효과를 눈치채기에 어렵지 않을 것이다.
3) 이미지의 효용
이미지(image)란 마음 속에 그려지는 사물의 감각적 영상(映像)을 말하는데, 이를 심상(心象)이라고도 한다. 그것은 꼴(모양)을 지닌 어떠한 영상으로서의 모습, 즉 형태를 나타낸다. 그것은 마음 속에 떠오르는 상(像)이라는 뜻으로, 과거에 경험한 바 있는 경험의 잔상들(이에 관련된 시각, 청각, 촉각, 그 밖의 인상을 포함하여)을 기억에 의해서 마음 속에 재생시키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회화적 표현을 통해서 이미지를 선명히 드러내는 시에는 김광균의 시 「추일서정(秋日抒情)」을 들 수 있다.
落葉은 폴란드 亡命政府의 紙幣
砲火에 이즈러진 도룬市의 가을 하늘을 생각케 한다
길은 한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어뿜으며
새벽 두시의 急行車가 들을 달린다
포푸라나무의 筋骨 사이로
工場의 지붕은 흰이빨을 드러내인채
한가닥 꾸부러진 鐵柵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위에 세로판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소리 발길로 차며
홀로 荒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風景의 帳幕 저쪽에
고독한 半圓을 긋고 잠기어 간다
―김광균의 시 「추일서정(秋日抒情)」―
여기에서 우리는 ‘낙엽→ ‘지폐’ ‘길’→ ‘구겨진 넥타이’ ‘구름’→ ‘세로판지’ 등을 통해서 이미지의 효용을 이해하게 된다.
4) 은유와 전이轉移
은유는 어떠한 원형이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것으로부터 새로운 현실을 창조해 낸다. 중세기의 기독교 사회에 있어 기본적인 은유는, 세상은 신(神)이 저술한 책이라는 것이다. 실로 이 세상은 신이 뜻을 전달하기 위해 만든 상징과 은유들로 가득 차 있다. 언어, 즉 낱말들은 사물들을 뜻하지만 사물 자체들은 다른 높은 수준의 의미를 갖는다.
시인은 마치 그의 기술이 자연을 돕는 정원사와도 갔다고 했다. 정원사의 손을 거치게 되면 무질서하게 제 멋대로 서있는 수목들이 질서를 찾아 정리되듯 시인의 의식을 통한 언어, 그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던 언어들은 질서화된다.
모든 女人은 調音되지 않은 絃과 같아서
오래도록 손을 대지 않으면 거슬리는 소리를 낸다
자주 만져진 놋그릇은 찬연히 빛난다
나의 가장 값진 주물과 친한 주물 사이에
쓰는 일 외에 무슨 차이가 있으랴.
이 옛글에서는 여인에 대하여 얘기하고 있다. 여인은 악기의 현과 놋그릇과 친한 주물이 되고, 이 모든 것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무가치한 특성에 관련된다는 말이다.
여기에서는 여인→현(絃)→놋그릇→주물 이렇게 전이(轉移)된 은유의 유추를 보여 주고 있다. 이 글은 천천히 음미할만한 글이다. 시에 있어서 모호성은 명료성과 함께 동반해야 한다. 시에 있어서의 모호함이란 사려깊게 읽으면 뚜렷하게 명료해질 수 있는 그런 모호함이다. 이러한 것들은 형이상학적인 이미지의 정상적인 특성들이다.
5) 체험과 표현
글(시)은 생각을 체계적으로 하도록 만들며, 사고(思考)의 질을 높인다. 인간의 감정 양식에 질서를 주고, 문화 창조에 지속적이면서도 체계적으로 이바지한다. 시를 쓰게 되면 정서가 맑고 곱게 가다듬어지고, 사색과 사유에 있어서 그 폭과 높이와 깊이를 추구하게 된다.
글이란 주관적인 정감으로 체험의 표현에 치중하는 면과 객관적 이지로서 사실의 전달에 치중하는 면이 있다. 전자의 경우, 질서 없는 실제 체험을 질서 있는 체험의 세계로 변용시키는 창조행위를 가져오는 체험+상상→문학작품이라는 일면과 경험+주장→진실한 체험은 글의 생명력을 가져온다고 하는 등식이 성립되는 데에 비하여, 후자의 경우는 존재의 차이점을 비교ㆍ대조하고, 추상ㆍ개괄하여 두 가지의 속성을 본질적으로 구분하는 곳에 ‘판단’이라는 오성적(悟性的) 사유(思惟), 즉 사물에 대하여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작용하게 된다.
시의 경우, 시인이 체험에서 얻은 그 기억의 잔상들을 어떻게 형상화하여 표현하느냐에 의미가 있다. 체험을 표현으로 이끌어내지 못하게 되면 일반 독자와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글(시)이 원숙한 경지에 이르게 되면, 논리가 글을 구속하기보다 초논리적인 수준에까지 도달하게 된다. 논리를 초월하려고 하는 그 자유로움은 예술의 속성인 동시에 시의 본질적 요소이기도 하다.
3. 시적 묘사
1) 의도와 표현
시를 이루고자 하는 생각대로 시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그 의도한 만큼 표현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를 위해서는 시적 동기를 유발할 필요가 있다. 시적 동기를 통해서 중심사상을 유발하여 구체적인 형상화로 진입해 가야 한다.
미국의 강철왕 카네기는 성공의 비결을 ‘찬스’라 하였다. 자기에게 주어지는 ‘기회’를 포착하면서부터 성공의 첫걸음은 옮겨진다고 했다. 기회는 시간성을 띄기 때문에 이것이 기회라고 느껴지는 순간, 주저없이 포착해야지 우물쭈물하게 되면 그 기회는 지나가버린다고 했다.
시적 모티프(motif)도 이와 같은 성질의 것이어서 시적 착상이 떠올랐을 때 곧 포착해야지 그 순간을 놓치게 되면 시 창작의 기회를 잃게 된다.
전통적인 시에 있어서 모티프는 풍류(風流)에서 기인되는 경우가 많았다. 풍월을 읊는다는 말은 청풍(淸風)과 명월(明月), 즉 자연의 아름다움을 읊는다는 뜻으로, 시의 동기가 대부분 자연에 있었다. 자연을 통해서 향수라든지, 이별, 사랑 등을 노래하는 경우가 흔했다
그러나 현대로 오면서는 자연과 접할 기회가 줄어들고 도시 문명 속에서 살아야 하는 환경의 변화에 따라 시적 동기도 복잡한 양상을 띄게 되었다. 한국적 서정의 흐름은 김소월ㆍ정지용ㆍ조지훈ㆍ박목월ㆍ김영랑ㆍ신석정ㆍ서정주 등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다른 시운동이 파생되기도 하였다.
그 옛날 이백(李白)의 달이 시적이라면 현재 지구의 위성으로서의 달은 산문적이라 할 수 있다. 현대시는 시적인 요소와 산문적인 요소가 혼용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모더니즘 시인들은 도시 문명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고 새로운 시도를 하여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시는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형식이라고 주장한 것은 말라르메 이후의 상징주의다. 달이 아름다운 게 아니라 물속에 비친 황금 술잔일 때 시적인 아름다움을 회복한다는 이론이다.
시에 있어서의 모티프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표현되고 있느냐에 따라 시적일 수도 있고 시적이 아닐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시적 동기도 물론 중요하다. 문제는 포착한 착상을 어떻게 시작품으로 형상화해 내느냐에 있다.
차운산 바위 위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七百里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익은 강마을 저녁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양하여
달빛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청록파 중의 한 사람인 조지훈 시인의 이 시는 「완화삼(玩花衫)」이라는 제목에 ‘木月에게’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는 지훈이 목월에게 선사한 시라는 뜻이다. 조지훈의 이 「완화삼」이라는 시를 받아 읽은 박목월 시인은 이 시가 동기가 되어 한 편의 시를 지어 조지훈 시인에게 선사했으니, 그 시가 유명한 「나그네」다.
江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南道 三百里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조지훈 시인의 시 「완화삼(玩花衫)」에 비하면 박목월의 시 「나그네」는 간결하게 축약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두 시인의 스타일은 다 개성적 특색을 지닌다. 박목월 시인의 경우, 동요 동시에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이 「나그네」 역시 간결체로써 동요적인 리듬을 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구체적 형상화
기쁨, 또는 즐거움이란 막연한 추상개념만으로는 부족하다. 화가가 화폭에 그림을 그리지 않은 채 그저 그림을 그려보겠다는 막연한 생각만으로는 제대로 기쁨을 누릴 수 없듯이, 시인 역시 막연한 관념만으로는 기쁨을 누릴 수가 없다.
직접 지각하거나 경험할 수 없는 사물의 개념을 표현하고자 할 때 추상적 개념이나 그러한 관념만으로는 구체성을 띨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시에 있어서의 형상화란 추상적인 본질 따위가 구상화하여 뚜렷한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성취동기를 이루는 기쁨의 출발점이다.
기쁨이란 독자적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고, 어디까지나 주체와 대상이라는 상대적 관계가 설정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성질의 것으로서 자기가 지닌 바의 그 자체에 대한 자극적인 감성을 상대적으로 또는 타각적으로 느낄 때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이는 미술가의 내적 세계가 그림으로 나타나거나 음악가의 마음 세계가 음악(작곡)으로 나타나듯이 시인에 있어서의 시정신이 시작품으로 구체화하게 되는 그 과정을 구체적 형상화라 한다.
시 창작에 있어서 이 구체적 형상화란 필요 불가결의 것이다. 좋은 글이 되지 못하고 표현의 미숙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구체적 형상화가 제대로 되어 있지 못한 상태를 말한다.
가령, 표현 대상을 정확하고 정밀하게 파악하지 못하였을 경우라든지, 표현하는 어휘가 부족하거나 선택이 적절하지 못하였을 경우, 또는 효과적인 배열을 하지 못하였을 경우를 들 수 있다. 이 외에도 적합한 비유라든지, 미숙한 문장의 조직, 깊이있고 명료한 암시성을 갖지 못하는 경우에도 구체적 형상화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3) 암시성과 입체성
우리가 존재하는 이 세계는 가시(可視)의 세계와 불가시(不可視)의 세계로 이루어져 있다. 우주를 가리켜 온 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공간, 또는 천체를 비롯한 만물을 포용하는 물리학적 공간이라고 한다면, 천주(天宙)는 영계와 육계를 포함한 존재계를 가리킨다.
인간은 이러한 천주의 총합한 실체상이기 때문에 우주를 닮은 소우주로 명명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러한 존재계에 의하여 시도 역시 암시성과 입체성을 지닌다. 그것은 인간이나 우주 자체가 암유(暗喩)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언어에는 좁은 개념으로서의 협의(狹義)의 언어와 넓은 개념으로서의 광의(廣義)의 언어가 있다. 협의의 개념으로서의 언어란 인간 사회에서 통용되는 음성언어와 문자언어를 가리킨다. 그러나 광의의 언어란 종교인이라든지 예술인 등 특수한 사람만이 감지할 수 있는 언어를 가리킨다. 이러한 언어를 가리켜 영감적인 언어니 계시적인 언어, 또는 신비적인 언어 등으로 말하는데, 이는 초현실적 성격의 것이다. 상징적 언어나 은유적 언어도 여기에 관련된다.
우리들이 존재하는 이 우주는 상징적인 언어로 차있다. 이러한 상징적 언어를 종교에서는 사람의 지혜로서는 알 수 없는 진리를 신(神)이 영감으로 알려준다 하여, 영감적 언어나 계시적 언어라 하거니와 예술에 있어서는 신비적 언어라고도 하는데, 이는 어떠한 이론이나 인식을 초월하여 불가사의하고 영묘(靈妙)한 비밀을 내포한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이 짤막한 언어에는 인생의 깊은 지혜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상에 살되 오탁(汚濁)에 물들지 않고 고고하게 안심입명(安心立命)의 경지에서 자유자재로 살겠다는 의지가 내비치고 있다. 여기에는 많은 암시성과 입체성이 있다. 영감적이고 계시적인 이 언어에는 상징적 언어가 은유되어 있다. 그리하여 초현실적인 선풍(禪風)을 느끼게 한다.
4) 언어의 질서와 절제
문학이란, 또는 시 창작이란 무질서한 사물을 질서화시키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시에 있어서 행(行)이 있고, 연(聯)이 모여서 한 편의 시 작품을 이루는 형식도 그 질서화를 위한 방편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시에 있어서 질서화는 절제를 요한다. 그것은 감성적 욕구를 이성으로써 제어(制御)하는 일을 말한다. 인간의 마음에는 지적인 욕구와 정적인 욕구, 그리고 의지적인 욕구가 혼용되어 있다.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는 지적인 욕구는 진리를 추구하고, 정적인 욕구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의지적인 욕구는 선을 추구하는 방향성을 지닌다.
이러한 지(知)ㆍ정(情)ㆍ의(意)의 욕구는 진(眞)ㆍ미(美)ㆍ선(善)으로 나타난다. 지ㆍ정ㆍ의가 내적이라면, 진ㆍ미ㆍ선은 외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심리는 서로 보완하기도 하고 견제하기도 한다. 인격자란 이러한 마음을 절제하여 제대로 부려쓰는 사람을 가리킨다.
시 창작에도 이러한 논리가 그대로 적용된다. 균형있는 조화와 자연스러움, 그리고 신선한 충격을 주고자 시도하는 ‘낯설게하기’라는 말 그대로 새로운 실험정신으로서의 모색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문예사조(文藝思潮)도 사람의 마음과 같아서 의(意)ㆍ정(情)ㆍ지(知)의 순서대로 변모과정을 보여왔다. 아버지를 죽이고 왕좌를 차지한 그리이스 신화처럼, 예술의 변천사는 고전주의라는 아버지를 죽인 낭만주의라는 아들이, 예술의 자리를 차지하였고, 이 낭만주의는 다시금 자연주의나 사실주의라는 아들에게 자리를 빼앗겼다.
17~18세기에 유럽에서 일어난 예술사조인 고전주의는 의지적인 면이 강하다면,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걸쳐 유럽에서 일어난 낭만주의는 정적인 면이 두드러지며, 19세기 후반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자연주의는 지적인 면이 두드러진다. 사실주의도 자연주의와 궤도를 같이 하는데, 이도 객관적 사물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그려내려고 하는 문학 예술상의 성격을 갖는다.
이러한 성격의 문예사조는 모더니즘 사조를 거쳐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로 진입했는데, 모더니즘의 성격은 낭만주의적 성격인 정을 지성으로 억제하고 절제를 꾀함으로써 균형잡힌 조화를 꾀하고자 함에 있다.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의 특징 중의 하나는 전파 미디어가 발달하여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이동전화 등 생동감 넘치는 역동성을 띰으로써 문자언어보다는 음성언어가 우세한 시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의 조류에도, 문자언어는 여전히 생각을 체계적으로 하도록 만들며, 사고의 질을 높이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인간의 감정양식에 질서를 주고, 신중한 의사소통과 문화의 창조에 있어서 음성언어보다는 더욱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바지하고 있다.
글을 쓰게 되면 정서가 맑아지고, 품위있게 다듬어지며, 사색과 사유는 폭과 높이와 깊이를 추구하게 된다. 문자언어는 시간을 두고 고치며 다듬을 수 있어서 그 무게와 폭과 깊이에 높은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시에 있어서 논리와 비논리의 논리라는 말이 있다. 처음의 ‘논리’라는 말은 가령 모든 사람의 얼굴의 구조가 같다는 보편성의 진리를 말한다면, ‘비논리’는 얼굴의 생김새가 모두 다르다는 특수성을 가리킬 수 있다. 비논리 다음으로 이어지는 그 ‘논리’라는 말은 그러면서도 동일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는 귀결점을 말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내적으로 보이지 않는 성상적(性相的)인 면과 보이는 형상적(形狀的)인 요소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두 요소를 합쳐서 ‘형상’이라 한다.
모든 예술에도 문학에도 시에도 이와같이 내적인 무형의 내용적인 면과 외적인 유형의 형식적인 면이 있기 마련이다. 이 유무형의 내외 두 요소를 균형있게 조화시켜 가야 하는 게 시 창작의 선결 과제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