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시의 원리
1.시란 무엇인가
1) 정의
시를 정의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한다. 인생이란 무엇이냐 하는 물음에 답을 구하려고 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시를 정의한 동서양의 예를 살펴보면, 우리가 시도하려는 시의 정의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국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드(Wordsworth, William:1770~1850)는 “훌륭한 시는 강한 감정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라 했고, 미국의 시인 에드가 알란 포우(Poe, Edgar Allan:1809~1849)는 “아름다움의 음악적인 창조”, 또는 “아름다움을 율동적으로 창조한 것이 시”라고 하였다. 이는 시가 담아야 할 내용을 중심으로 시를 정의한 것이다.
중국 최초의 시집인 ?시경(詩經)?을 편찬한 공자(孔子:B.C. 551~479)는 ‘시란 사무사(思無邪)’라 했다. 이 말은 ‘시를 감상하는 마음도 사악한 감정이 없어야 하는데, 하물며 시의 본질이야 어떠하겠는가’하는 뜻으로 해석된다. 직역하면 “시 3백편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생각에 사악함이 없는 것이다(詩三百一言以蔽之曰思無邪)”라는 뜻이다. 시에 국민을 교화할 수 있는 기능이 있는 것으로 보고 정의한 것이다. 즉 교훈주의적 관점이다. “시 3백편”은 ?시경?의 시를 가리킨다.
?시경?의 서문을 쓴 주희(朱熹:1130~1200)는 ?시경집주서(詩經集註序)?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고요한 상태로 있는 모습은 천성적인 성품이다. 이 성품이 사물에 감응되어 발동하는 것을 가리켜 성(性:本性)의 욕망이라 한다. 인간에 있어서 본성이 발동하게 되면 사고(思考)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또 사고하게 되면 언어가 있지 않을 수 없다. 언어가 있어도 언어로써 능히 다 표현하지 못하게 된다. 슬픔이나 기쁨의 감탄사를 써서 표현하는 그 이상의 어떤 깊은 감동의 극치에 이르고도 뭔가 모를 부족한 듯한 여운(餘韻)이 남게 마련이다. 또 자연계의 음향이라든지 서로 어우러지는 화음(和音)에 있어서도 그것을 다 표현하지 못하는 것으로 이것이 시(詩)가 이루어지는 까닭이다.”
그는 또 “시란 사람의 마음이 사물에 감동되어 언어의 여운이 자연스럽게 형용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그 ‘여운’이나 ‘자연스러움’ 그리고 ‘형용’이라는 말은 워즈워드가 말한 ‘자연스러움’이라든지, 포우가 말한 ‘율동적인 창조’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한자의 시(詩)는 ‘言+寺’ 또는 ‘言+志’의 합자인데, ‘언(言)’은 모호한 소리나 주고 받는 말이 아니라 ‘음조가 분명하고 고른 말’이라는 뜻이며, ‘지(寺)’는 ‘지(持)’의 원래 글자로서 손을 움직여 어떤 일을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지(寺)는 ‘작업, 제작’ 등과 연결될 수 있는 말이다. 또 시(詩)를 ‘言+志’로 본다면, 지(志)란 마음이 무엇인가를 향해서 나아간다는 뜻이므로 심정이나 마음이 움직여 나아가는 그대로를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를 의미하는 포에트리(poetry), 시인을 의미하는 포에트(poet)는 각각 창작이나 제작, 무엇인가를 만드는 사람(maker)이라는 뜻이다. 동양에서는 옛부터 “시는 뜻을 말로 나타낸 것이며, 노래는 말을 길게 한 것이다(詩言志, 歌永言)”라는 정의가 있다. 동양의 시(詩)나 영어의 포에트리(poetry)는 모두 제작, 창작의 뜻이 있거나 그러한 뜻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고, 그런 점에서 매우 흥미있는 일이기도 하다.
동양에 있어서 최초의 시집은 ?시경(詩經)?이다. 다시 말하면 시다운 시, 시의 형식을 갖춘 최초의 모습이므로, 동양에 있어서는 시의 원형(原型)이라고 할 수 있다. ?시경?의 시는 풍(風), 아(雅), 송(頌)의 3부로 나누어 수록하고 있다. ‘풍’이란 민간 생활의 풍속(風俗)이나 풍화(風化)의 뜻으로, 말하자면 지은이를 알 수 없는 민간의 풍속이나 세태를 읊은 시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연애, 정역(征役), 풍자, 생활고, 여성의 탄식 등을 읊은 것이다. ‘풍’(또는 국풍)이 민간의 노래임에 반하여, ‘아(雅)’는 궁중의 노래이고, 지은이도 대부분 사대부들이며, 그 내용은 모두 정치에 관한 것이다. ‘아’는 원래 바른 음악 즉 정악(正樂)이라는 뜻으로서 우리 나라의 아악(雅樂)과 비슷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송(頌)’은 주로 선왕의 공덕을 찬미하는 노래를 말하며, 제사 때에 연주되는 제가(祭歌)다.
이렇게 보면, ?시경?은 백성(국민)의 일상사에서부터 나라의 정치, 그리고 제례(祭禮)에 이르기까지 망라하고 있다. ?시경?이 지닌 이러한 내용은, 결국 시가 원시인의 생활과 노동(수렵, 농경), 정치와 같은 국가적 사회적 활동, 조상 숭배나 경천(敬天)과 관련된 종교적 의식 등에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는 이와 같이 일상성, 집단성(또는 사회성), 신성성(神聖性) 등을 가지고 있어야 함도 알 수 있다.
좋은 시를 쓰는 사람을 우수한 시인 또는 뛰어난 시인(excellent poet)이라고 말한다. 역사상 영원히 남을 만한 가치있는 시를 쓴 사람을 위대한 시인(great poet)이라고 말한다. 동양에서는 ‘위대한 시인’이라는 말 대신에 ‘시성’(詩聖)이라고도 한다. 베토벤을 흔히 악성(樂聖)이라고 하듯이, 인도의 타골(Tagore, Sir Rabindranath:1861~1941)이나 중국의 두보(杜甫, 727~770)를 흔히 시성이라고 하여 성인으로 추앙하는 것은 그들이 모두 위대한 시인이기 때문이다.
2) 순간의 형이상학
러시아의 작가 투르게네프(Turgenev Ivan Sergeevich:1818~1883)는 “시는 신(神)의 말이다.”라고 했는가 하면, 프랑스의 볼테르(Voltaire:1694~1778)는 “시란 영혼의 음악이다.”라고 하였다. ‘신의 말’이라든지, ‘영혼의 음악’이라는 말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시는 영감에 의하여 쓰여지는 성질을 지닌다. 영감(inspiration)이란 신불(神佛)로부터 받은 것 같은 영묘(靈妙)한 신의 계시를 받는 것 같이 인간 영혼의 신묘(神妙)한 작용을 말한다. “모래알 한 알에 우주를 생각하고, 손바닥을 젖히면서 영원을 생각한다.”고 노래한 윌리엄 블레이크(Blake, William:1757~1828) 의 시구를 보자. 모래알이라는 공간적 무한소를 보는 순간에 우주라고 하는 공간적 무한대를 떠올리고, 손바닥을 젖히는 시간적 무한소에서 영원이라고 하는 시간적 무한대를 연상하는 것은 영감의 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극미(極微)가 극대(極大)로 반전하는 영감의 섬광을 보게 된다.
G. 바쉴라르(Bachelard, Gaston:1884~1962)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하였다. 그는 “시는 순간의 형이상학이다. 하나의 짤막한 시편 속에서 시는 우주의 비전과 영혼의 비밀과 존재와 사물을 동시에 제시해야 한다.”고 하였다. ‘순간의 형이상학’이라는 말은 시에 있어서의 영감이나 계시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시인은 계시적인 영감, 즉 순간의 형이상학을 위해서 뮤즈(Muse)의 신(神)을 끌어들이고자 한다. 인간이 그 개성의 꽃으로 표현하는 시, 그것은 영감을 통해서 구성되는 인생의 새로운 해석과 발견이다. 신의 발견과 깨달음과 교류, 즉 형이상성의 인식을 통해서 비로소 인간은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의 존재로서 그 빛을 발하게 된다. 그러나 시는 신성성(神聖性)이나 형이상성(形而上性)의 인식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현대 사회는 나날이 급변하고, 우리의 생활은 복잡다단하다.
맹자(孟子, 372~289, B.C.)는 기쁨(喜), 노여움(怒), 슬픔(哀), 즐거움(樂), 사랑(愛), 미움(惡), 욕심(欲)의 일곱 가지 정서를 말한 바 있지만, 이러한 칠정(七情) 외에도 근심, 외로움, 놀람, 두려움, 무서움, 쓸쓸함, 불안 등의 정서가 있다. 이러한 여러 감정이나 정서가 생활, 사상에서 일어날 때,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일상성, 또는 일상적 비속성(卑俗性)이라고 말할 수 있고, 이러한 다양한 일상적 정서도 시의 중요한 내용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일상적 비속성이 타락하거나 부패하지 않고 시로서의 품격을 가지기 위해서는 신성성이나 형이상적 인식과 어울려 참되고 아름다운 예술적 가치를 지닌 형태로 조직되어야 한다.
이상은 시의 내용, 또는 시의 자료라고 할 만한 것을 개략적으로 말한 것이다. 그러나, 시는 이러한 내용 또는 자료가 형태를 갖추지 않으면 안된다. 내용이나 자료가 조직되어 예술적 형태를 지닐 때 비로소 우리는 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시를 내용과 형식(form)으로 양분하는 것은 여러가지 모순이 있으나, 시를 분석하고 논의하기 위해서는 편의상 이러한 구별도 필요하다.
?논어?에는 “실질(實質)이 문식(文飾)보다 앞서면 야만스러워지고, 문식이 실질보다 앞서면 관료(官僚)적이다. 실질과 문식이 조화를 이루어야만 군자라고 할 것이다”(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 然後 君子.)라는 글이 있다. ‘질’은 실질, ‘문’은 문식(文飾)을 의미하지만, 현대적 의미로 바꾸어 말하면 ‘내용’과 ‘형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결국 내용이 형식을 압도하면 야해지고, 형식이 내용을 압도하면 관료적이 되니, 형식과 내용이 균형을 지니고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자의 이 말은 교양이나 문화 일반에 대한 언급이지만, 문학의 한 장르인 시도 여기에 해당됨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즉 시는 형식과 내용이 균형을 잡아 조화를 이루어야 좋은 시가 될 수 있다.
3) 최초의 언어
조지훈(1920~1968)은 “시란 지(知) 정(情) 의(意)가 합일된 그 무엇을 통하여 최초의 생명의 진실한 아름다움을 영원한 순간에 직관적으로 포착하여 이를 형상화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부분은 ① “지(知) 정(情) 의(意)가 합일된 그 무엇을 통하여”, ② “최초의 생명”, ③ “형상화한 것”이라는 대목이다. 시의 내용 또는 자료인 ①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말하였으므로 여기서는 ②와 ③에 관해서만 살펴보기로 한다. ②의 “최초의 생명”이란 여러가지로 해석할 수 있으나 ‘원초적 생명이 깃든 사물의 참된 모습’이라고 볼 수 있고, ③의 “형상화한 것”이란 상상력에 의하여 언어 이미지로 표현한 것을 의미한다. 상상력에 의하여 언어 이미지로 표현한 것은 다름 아닌 ‘원초적 생명이 깃든 사물의 참된 모습’이다.
언어는 어떤 대상, 어떤 사물을 나타내어 그 의미를 전달한다. ‘구름’이라는 말은 공기 중의 수분이 엉긴 자잘한 물방울 상태로 공중에 떠도는 뭉텅이를 가리키고, ‘꽃’이라는 말은 종자 식물이 암꽃술 숫꽃술 꽃부리 꽃받침의 4부분으로 이루어진 번식 기관을 가리킨다. 요컨대 구름은 공중에 떠돌면서 비나 눈을 뿌리는 실제의 구름을, 꽃은 진달래꽃, 국화꽃, 무궁화꽃 등 실제의 꽃 종류를 모두 가리킨다. 그리고, 모든 언어는 가리키는 실제의 언어와 그 의미를 소리로 발음하는 음성으로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원시시대의 언어에서는 대상인 사물과 그 사물을 나타내는 언어는 한 덩어리로 이루어져 분리되지 않았다. 사슴이나 멧돼지라고 하면 바로 눈 앞에 있는 실제의 사슴이나 멧돼지와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시시대의 언어 즉 원시 언어(최초의 언어)는 ‘언어=사물’, ‘언어 즉 사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인지가 발달하고, 문명이 진보함에 따라 언어와 그 언어가 가리키는 사물 사이에 틈이 생기고, 언어와 사물은 따로따로 분리되고 말았다. 언어는 사물과는 관계없이, 사물에서 떨어져 나와 그 자체의 세계, 의미의 세계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것을 언어의 가동성(可動性, mobility)이라고도 한다.
‘태양’이라는 말은 우주에 있는 실제의 태양과는 관계없이 태양이라는 독립된 언어로서 존재하게 되었다. 말(馬), 돼지, 비둘기, 논밭, 숲, 구름, 바람, 바다, 집, 산, 이러한 모든 언어는 그 언어들이 가리키는 대상과 관계없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그 언어의 바깥에 있는 대상, 외적 사물을 가리키며 전달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즉 언어가 의사 전달의 도구로 전락하고 있다. 신문 기사, 학술 저서, 모든 실용문도 다 언어를 전달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언어는 대상이나 사물에 종속된 수단에 지나지 않다. 이것이 산문(散文, prose)의 언어다.
그러나 시의 언어는 반대로, 의사 전달의 수단이 아니며 대상인 사물에도 종속되지 않고, 오히려 대상인 사물 자체를 형상하는 것이다. 시의 매재(媒材)는 언어이므로 시를 언어 예술이라고 말한다. 시의 언어는 사건이나 사물과 독자 사이의 전달 수단으로서의 중개자가 아니라, 언어 그 자체의 이미지(image), 언어 그 자체의 존재에 의하여 참된 시적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시의 언어는 사물과 언어가 일치되어 생명감이 넘치는 원시 언어를 회복하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고, 언어 그 자체의 순수성, 자율성, 언어 그 자체의 존재성 확립 운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언어는 사물과 떨어져서 그 자체 자율적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표현하고자 하는 사물, 새로 발견되거나 느끼게 되는 감정과 사상은 엄청나게 많은데, 언어의 양은 한계가 있다. 우리가 시를 창작한다는 것은 자기의 내면 세계의 혼돈을 밝히고, 잠자고 있던 여러 가지 정서에 불을 질러 상상의 연소 작용을 하는 것이다. 이 때 직면하는 것은 언어다. 그러나 언어는 모자라고 제약이 있기 때문에, 여기서 은유나 상징이나 역설(paradox) 같은 장치가 발생하는 것이다.
언어는 사물과 떨어져서 움직이는 기동성(mobility)을 지니고 있으면서 그 자체의 여러가지 기능을 다한다. 이를테면 이미지 환기, 의미 작용, 리듬 만들기 등이 그러한 것들이다. 언어 자체의 존재성이라는 것은 바로 언어 그 자체의 자율적 기능이 만들어 내는 이러한 이미지, 의미 작용, 리듬 등을 의미한다.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서정주의 시 「문둥이」―
“꽃처럼 붉은 울음”. 이러한 이미지는 외적 세계,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문제가 아니라, 비현실적 상상 세계의 진실성 문제다. “꽃처럼 붉은 울음”은 꽃과 울음이 어울려 현실 세계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새로운 이미지의 세계, 처절하기 이를 데 없는 극한적 비극을 상징하고 있다. 독자에게 상상적으로 작용하는 강력한 에너지를 이 상징이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시는 ‘언어의 예술’이라는 일차적 의미가 여기에 있다.
4) 뜨는 연습
시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의 대답은 언제나 한 마디의 정답이 있을 수 없겠고, 그 언저리에 접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란 ‘순간의 형이상학’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거리를 두고 관조할 때 살아나고 붙들려고 할 때 사라지는 무지개 같은 성질의 것으로서 진리를 계시하고 암유한다.
피천득은 수필을 가리켜 ‘청자연적’으로 비유했지만, 나는 시를 가리켜 ‘구름 저쪽의 학(鶴)’이라 말하고 싶다. 그리고 시작과정을 가리켜 ‘뜨는 연습’이라 말하고 싶다. 시를 감상하는 것을 구름 저쪽을 날으는 학의 몸짓을 관조하는 것에 비긴다면, 시를 창작하는 경우에는 엄청난 무게의 점보 여객기의 엔진을 맹렬하게 가동시키듯, 그렇게 가동시켜 마침내 이륙 활동을 반복함으로써 구름 저쪽의 현실 이상의 현실을 창조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시쓰기의 과정은 점보 여객기의 활주로 이륙과 같은 행동의 반복과 유사한 것이다. 용광로와 같은 상상력의 연소, 현실의 초월을 통한 새 세계의 발견, 외적 사실을 그대로 반영하지는 않으나 사실 이상의 리얼리티를 창조하는 것이 시쓰기의 과정이다. 언어의 부단한 선택, 폐기, 생략, 절단, 교체 등, 한 편의 시적 구조가 짜여지는 성분으로서의 언어의 긴축정책, 또는 첨단 고성능 언어의 배열, 구성 등이 요구된다.
물 아래 그림자 지니 다리 위에 중이 간다
저 중아 게 있거라 너 가는데 물어 보자
막대로 흰구름 가리키고 돌아 아니보고 가노매라
이 시조가 보여 주는 맥락(context)은 ‘왜’와 ‘때문에’ 같은 논리적 연결이 아니라, ‘글쎄’나 ‘아마도’와 같이 불확실성과 추측과 여운으로 연결되어 시적 기능을 북돋우고 있다. 보통 사람은 다리 위를 먼저 보겠지만, 물속에 비친 그림자를 먼저 보고 다리 위의 행인을 추측한 것도 재미있다. “저 중아 게 있거라”는 실제 대화의 한 토막이지만, 이러한 명령어 때문에 현장감을 더해 준다. 더욱이 중은 묻는 말에 말로서는 다 표현하기 어려우므로 막대기로 먼 구름을 가리키면서 속세 저쪽의 세계, 현실을 초월한 세계, 현실 보다는 더 높고 더 진실한 세계를 넌짓이 암시하고 있다. 그림자, 중, 막대, 흰구름 등의 시어는 선미(禪味)를 풍기고 있다.
5) 시와 상상력
시는 인간의 어떠한 능력이 만들어내는 것일까. 시인이 시라는 언어 예술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맨 먼저 외계의 사물을 감각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장미꽃을 보면 그 꽃의 자극에 의하여 빛깔, 향기, 모양 등을 깨닫게 된다. 빛깔은 시각, 향기는 후각, 감촉은 촉각에 의하여 깨닫게 된다. 빨갛다, 향기롭다, 보드랍다 등의 감각은 한 순간에 직관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이러한 여러가지 감각적 요소의 종합에서 아름답다든지, 슬프다든지, 쓸쓸하다든지, 정열적이라든지, 이러한 감흥이 일어난다. 이러한 감흥을 감정 또는 정서라고 한다. 이것은 감각이나 감수성의 작용에 의해 일어난다고 할 수 있다.
외계의 사물을 감각과 감수성이 받아들인 다음에는 지성이나 이성이 작용하게 된다. 장미꽃이나 구름이나 바다와 같은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이 그것이다. 빨간 장미꽃에서 사랑의 정열을 느낀다든지, 허공에 떠도는 구름에서 인생의 무상, 정처없는 유랑, 허무를 깨닫는 것이 지성이나 이성의 활동이다. 시를 흔히 감정과 사상의 표현이라고 한다. 감정은 감각과 감수성에 의한 감흥의 단계이고, 사상은 그러한 단계 다음에 의미나 관념을 부여하는 단계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시를 생산하는 인간의 능력을 이렇게 본다면, 감각 감수성 지성 이성 등이 모두 시 창작에 관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외계의 사물(자연의 어떤 한 부분, 경치, 광경, 사건, 사태 등)을 보는 그 순간에 시가 한 편의 작품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 순간에 시가 되는 ‘즉흥시’라는 것도 있다. 즉흥시든 즉흥시가 아니든, 우리가 경험한 외계의 사물은 상상력에 의하여 언어로 형상화되지 않으면 시가 이루어질 수 없다. 앞에 든 감각, 감수성, 지성 등도 모두 상상력이라고 하는 종합적 통합적 형상력 속에서 그 작용이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상상력이야말로 시 생산의 모태(母胎)임을 깨닫게 된다.
일반적으로 상상력(imagination)은 사물의 이미지(image)를 만들어내는 정신적인 에너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상상력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설명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 첫째, 잔상(殘像, after image)이라는 것이 있다. 외계의 어떤 사물로부터 자극을 받아 우리에게 감흥이 일어나고, 그 자극이 물러간 뒤에도 원래의 자극과 같은 감각적 경험이 남아 있게 된다. 구름을 본 뒤에 구름이 사라져 버려도 그 구름에 대한 잔상은 계속 남는다.
둘째로 기억(記憶, memory)이라는 것이 있다. 하루건 한 달이건 1년이건 간에, 원래의 사물 모습 거의 그대로 재생된다. 앞서 일어났던 감각적 경험이 다소간 확실성을 가지고 재생되는 것을 ‘기억’이라고 하고, 심리학에서는 이 기억을 재생적 상상력(再生的 想像力, reproductive imagination)이라고 말한다. 기억, 즉 재생적 상상력은 상상력의 제1단계라고 할 수 있다. 재생적 상상력은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James, William, 1824~1010)의 용어다.
셋째로, 이전에 경험했던 원물(原物)의 재생 단계이기는 하나, 조금 더 복잡하고 폭넓은 상상력의 두번째 과정이 있다. 이전에 경험한 원물이 각 요소로 분리되었거나, 이전에 경험한 여러 가지 복수의 원물들이 어울려 그대로 재생되는 경우를 상상할 수 있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연합적 상상력(聯合的 想像力, associative imagination)이라고 한다. 연합적 상상력은 재생적 상상력보다는 좀 더 복잡하고 폭 넓은 것이라고 할 수 있으나, 사물의 요소들의 연합이 있을 뿐, 창조적인 요소는 없다고 하겠다.
넷째로, 시작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단계인 생산적 또는 창조적 과정을 생각할 수 있다. 이미 경험했던 사물이 각 요소로 해체되었거나 분리되었을 때, 그것을 다시 연합할 뿐만 아니라 여기에 다른 경험의 사물을 덧붙여서 새로운, 혹은 실재하지 않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것을 창조적 상상력(creative imagination), 또는 생산적 상상력(生産的 想像力, productive imagination)이라고 한다. 시 창작의 참된 에너지는 바로 이 단계의 상상력이라고 할 수 있다. 생산적 상상력이라는 말도 윌리엄 제임스의 용어다.
아무튼, 상상력은 예술 또는 시를 창조하는 근원적인 능력을 지닌다. 다음 시를 통해, 위에서 말한 재생적, 연합적, 생산적 상상력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용하여 나타나고 있는가, 그 과정을 살펴 보고자 한다.
강물이 풀리다니
강물은 무엇하러 또 풀리는가
우리들의 무슨 서름 무슨 기쁨 때문에
강물은 또 풀리는가
기러기같이
서리 묻은 섣달의 기러기같이
하늘의 얼음짱 가슴으로 깨치며
내 한평생을 울고 가려했더니
무어라 강물은 다시 풀리어
이 햇빛 이 물결을 내게 주는가
저 민들레나 쑥니풀 같은 것들
또 한번 고개숙여 보라함인가
황토언덕
꽃상여
떼과부의 무리들
여기서서 또한번 더 바라보라 함인가
강물이 풀리다니
강물은 무엇하러 또 풀리는가
우리들의 무슨 서름 무슨 기쁨 때문에
강물은 또 풀리는가.
서정주의 시 「풀리는 한강가에서」 전문이다. 이미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이 시의 역사적 배경은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후의 비극적 상황이다. 꽁꽁 얼어 붙었던 강물이 다시 풀리는 해빙 장면과 전쟁이라는 참혹한 상황이 어울려 그 비극성을 한층 더 강조하고 있다.
“강물이 풀리다니”는 직접 보고 체험한 해빙 장면의 재생이다. 즉 재생적 상상력의 이미지다. 그리고 “기러기”(기러기 같이/서리 묻은 섣달의 기러기같이)의 이미지와, ‘전쟁의 참혹상’(황토 언덕/꽃상여/떼과부의 무리)도 그 앞뒤의 맥락을 잘라 버리고 각각 단독으로 본다면, 해빙 이미지와 마찬가지로 재생적 상상력의 이미지다.
그러나, “얼어 붙은 강물의 풀림”과 “서리 묻은 섣달의 기러기”와 “황토 언덕, 꽃상여, 떼과부의 무리들”은 한 편의 작품이라는 조직 속에 서로 연결 연합하여 통일된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고 있다. 겉으로 보면 별개인 개개의 이미지들을 연결 연합하는 것은 상상력의 연합적 통합적 기능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해빙은 봄이 온다는 징조요, 봄이 옴은 죽음의 소생이나 부활을 의미하지만, 그러나 민들레나 쑥니풀을 다시 고개 숙여 보게 하고, 남아있는 전쟁의 참상(황토언덕, 꽃상여, 떼과부의 무리)을 한번 더 보게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래서 “강물은 무엇하러 또 풀리는가”하고 의문을 제기하면서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여기서 해빙, 기러기, 전쟁의 참상 등이 어울려 통일된 새로운 의미의 주제를 창출하는 것이다.
영국의 시인 비평가인 콜리지(Coleridge, Samuel Taylor:1772~1834)는 상상력에 대하여 더욱 적극적이며 적절한 개념을 보여 준다. 즉 그는 상상력을 종합적 마술적 정신 능력이라고 말한다.
“시인이란 우리가 단지 상상력이라는 이름을 붙인 종합적 마술적인 힘에 의하여 하나하나의 정신 능력을 서로 혼합하여 그것들을 용해시켜 버리는 조화적 통일의 정신을 방산(放散)한다. 처음에는 의지와 오성(悟性)에 의하여 활동하기 시작하여, 그리고 조용히 눈에 잘 뜨이지 않으나, 결코 경감(輕減)되지 않는 통제하에서 항상 보존되고 있는 이 힘은, 상반적인 것과 부조화적인 것, 즉 동일과 차이, 일반과 구상(具象), 관념과 심상, 개체와 전형(典型), 신기 참신(新奇斬新)과 일상의 진부한 것, 감정의 이상(異常) 상태와 이상한 질서, 명확한 판단력과 사물에 움직이지 않는 안정, 깊고도 격렬한 열정과 감정 사이의 균형 또는 조화로 나타난다”고 정의하고 있다. 상상력의 진정한 기능은 콜리지가 말하는, 이와 같은 종합적 마술적인 힘이 아닌가 생각된다.
6) 시와 비시
시를 제대로 쓰기 위해서는 시적인 글과 비시적인 글의 차이점에 대한 이해가 요구된다. 일반적으로 문학이라 할 때에는 정서와 사상을 상상의 힘을 빌려 문자로 나타내는 창작물을 말한다.
문학을 가리켜 인생 탐구니 인간 탐구니 하는 말은 삶의 방향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문학이 인생의 표현인 이상 인간 삶의 방향성과 무관할 수 없다. 따라서 시문학도 인생과 마찬가지로 방향성과 목적성이 주어진다.
가령, 비시적(非詩的)인 글의 경우에 있어서는 언어가 외부 세계를 지향하는 데에 반하여 시적인 글의 경우에는 언어가 언어 자체의 자율적인 세계를 지향한다. 이를 객관세계와 주관세계로 가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기호로서의 언어는, 언어학자 소쉬르가 지적했듯이, 소리심상과 개념으로 이루어진다. ‘호수’라는 언어의 경우, 소리심상은 발음할 때 나는 [hosu]이며, 개념은 우리 머리속에 그림으로 떠오르는 ‘물이 고여있는 큰 못’이다. 지시하고 의미하는 이러한 양면의 요소는 모든 사물이 내포하고 있는 성상적(性相的)인 면과 형상적(形象的)인 면으로 성격지어진다.
또한 비시적인 글의 목적이 전달기능을 발휘한다거나 논증하는 데에 있다면, 시적인 글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함에 있다. 가령 신문기사가 노리는 것은 객관적인 정보전달이며, 학술논문이 노리는 것은 객관적 사실에 대한 합리적 판단과 실증적 증명이다. 문학적인 글, 특히 시에서 노리는 것은 합리적 판단이나 실증적 논증이 아니라 예술적 감흥이다.
멧새가 해를 따 먹어서
정원마다 노래가 터져 나옵니다.
멧새가 가슴마다 집을 지어서
가슴은 모두가 정원이 되어
다시 다시 꽃이 핍니다.
땅덩이에 커다란 나래가 돋히고
새로 나는 깃마다 꿈을 가져왔습니다.
세상은 모두 새가 되어
하늘에 집을 짓습니다.
나무는 푸른 군중 속에서 이야기하고
태양을 향하여 노래 부르고,
태양은 모든 영혼 속에서 목욕하고
물이란 물은 불꽃같이 피어 옵니다.
봄이 물과 불을 좋아하여
한꺼번에 가져왔습니다.
―막스 다우텐다이의 시 「멧새」―
이 시에서는 객관적 사실에 대한 논리적 또는 실증적 증명이 불가능하다. 황진이의 시조도 마찬가지다. 객관적 사실에 대한 어떠한 합리성도 실증성도 기대할 수 없다.
동짓(冬至)달 기나긴 밤을 한허리를 둘헤 내어
춘풍(春風) 니블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신 날 바미여드란 구비구비 펴리라.
문학적인 글, 창조의 개념 또는 예술의 개념이 제대로 자리를 잡으면서 정리된 시ㆍ소설ㆍ희곡ㆍ수필 등은 확실한 장르의식에 의해 형성된 문학 유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문학의 장르의식은 신문기사나 과학논문 같은 비문학적인 글과 확연히 구분되기 마련이다.
비시적인 글의 가치가 유용성 명백성 실증성에 있다면, 시적인 글의 가치는 통일성ㆍ다의성ㆍ심미성에 있다. 비시적인 글의 가치는 그 글이 우리들의 현실 생활에 얼마나 유용하고, 그 의미가 명백히 드러나는가 하는 데 있다면, 시적인 글은 그 글의 평가 기준부터가 비시적인 글과는 전혀 다를 수 밖에 없다.
가령, ‘자운영(紫雲英)’꽃을 예로 든다면, 식물학자와 시인의 관심사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식물학자 또는 사전 편찬자가 이 ‘자운영’에 대해 사실적으로 기록하기 위해서는 “자운영은 콩과의 이년초. 중국 원산의 녹비 작물(綠肥作物). 줄기는 지면을 따라 뻗으며, 꽃잎은 깃 모양의 겹잎임. 홍자색 꽃이 피고 4~5월에 꼬투리는 검게 익음. 밭에 심었다가 자란 뒤에 갈아엎어 녹비로 쓰며, 꽃에서는 꿀을 얻음.”이라고 이렇게 명백하게 써야 한다.
이와같이 객관적인 사실을 기록함으로써 우리의 삶에 현실적으로 도움을 주고, 또 합리적으로 이용하게 한다. 그러나 시의 경우에는 객관적 정보나 어떤 실증성도 드러나지 않고, 그 사물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도 명백하지 않으며,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실용적인 가치를 주는 것도 아니다. 시는 어디까지나 어떤 실용적 가치보다는 독특한 미적 효과를 주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나는 그녀에게 꽃시계를 채워 주었고
그녀는 나에게 꽃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꿀벌들은 환상의 소리 잉잉거리며
우리들의 부끄러움을 축복해 주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만남은 이별,
보자기로 구름 잡는 꿈길이었다.
세월이 가고
늙음이 왔다.
어느 저승에서라도 만나고 싶어도
동그라미밖에 더 그릴 수가 없다.
이제는 자운영을 볼 수 없는 것처럼
그녀의 풍문조차 들을 수가 없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나의 추억 속에 살아 있는
그녀의 미소
눈빛과 입술이다.
나는 그녀에게 사랑을 바쳤고
그녀는 나에게 시를 잉태해 주었다.
―「자운영(紫雲英)」―
같은 사물인 ‘자운영’에 관한 글이지만, 비문학적인 앞의 산문과 뒤의 시 사이에는 확연한 구분이 있다. 앞의 비문학적인 글은 사고의 단위가 문장인데 비하여, 뒤의 시 작품은 사고의 단위가 시행(詩行)으로 되어 있다. 소리와 의미의 효과를 위한 행갈이로 인하여 시의 경우에는 소리 효과로서의 리듬, 의미 효과로서의 사고(思考)가 작용된다. 소리 효과로서의 리듬과 의미 효과로서의 사고를 좀더 실감있게 이해하기 위해서 김소월의 시 「엄마야 누나야」를 살펴 보고자 한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시의 경우 이 외에도 사고의 단위를 연상(聯想)에 의해 연결한다거나 압축적인 방식으로 시를 씀으로써 언어를 경제적으로 사용하는 은유와 상징 기법도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2. 시를 왜 쓰는가
1)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
시를 쓰고자 하는 문학 지망생이나 시를 업으로 삼는 시인에게 “시를 왜 쓰느냐?”고 묻는다면 그저 “쓰고 싶어서 쓴다.”고 대답할 것이다. 시를 “왜 쓰고 싶을까?”하고 다시 묻는다면 그 때는 한 마디로 대답할 수가 없어서 말문이 막힐 것이다. 왜 말문이 막힐까? 시인이기 이전에 시를 쓰고 싶어하는 인간의 마음, 그 정서라든지 욕구에 대한 근원을 캐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를 왜 쓰고 싶어하는 것일까?” 또는 “시를 쓰고 싶은 마음은 어디로부터 기인되는 것일까?” 하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인간 자신에 대한 물음이라 할만한 어떤 자각이 요구된다. 따라서 인간은 어떠한 존재인가 하는 존재론(存在論)이나 본성론(本性論)에 입각해서 시 창작의 욕구 충동 문제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시를 쓰고자 하는 욕구 충동이란 아름다움의 창조 내지는 기쁨의 창조를 의미한다. L.비투겐슈타인은 말하기를 “어느 예술가도 다른 사람들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그 영향의 자국은 그들의 작품 속에 나타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술가의 개성이다. 남에게서 이어받은 영향은 알의 껍질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는가 하면 H.반 다이크는 “개인주의는 치명적인 독극물이다. 그러나 개성은 일반 생활의 소금이다. 사람은 군중 속에서 살아야 할지 모르나 군중이 사는 것처럼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고, 그들이 먹는 것을 먹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자기 개인의 과수원을 가질 수도 있고, 남이 모르는 샘물에서 물을 마실 수도 있다. 남에게 도움이 되려면 자기 자신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했는데, 이러한 주장은 모두 개성의 확립을 강조한 말이라 하겠다.
여기에서 중요시되는 말은 ‘本性’과 ‘言語’이다. 인간의 창조 본성은 개성진리체로 되어 있다. 정신과 육체라는 이중구조로 되어 있는 인간은 주체적 자아와 대상적 사물에 있어서, 무형(無形)이거나 실체(實體)이거나 자기의 모양대로 전개된 대상이 있어서 그것으로부터 오는 자극으로 말미암아 자체의 성상과 형상을 상대적으로, 또는 타각적으로 느낄 때 비로소 기쁨이 생긴다는 원리가 전제된다.
존재론에서 말해지고 있는 바의 인간은 우주를 총합(總合)한 실체상(實體相)이므로 그 몸 속에는 우주의 모든 모습을 잠재적으로 지닌다. 가령 산천초목의 경우, 그 산천초목의 색(色)과 형(形), 양(陽)과 음(陰), 강직성과 유연성 등등의 원형이 몸속(內界)에 있는 바, 그 원형과 현실의 사물이 주고 받는 작용을 통하여 합치되는 체험이 바로 인식이며, 그 일치에서 기쁨의 감정이 솟아나게 된다. 따라서 그 대상의 아름다움을 감지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원형이 마음 속에서 떠오르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존재론 내지는 본성론적인 연유로 하여 인간은 개성진리체의 성격을 띠기 때문에 시의 창작에 있어서도 인간과 우주의 상관관계를 도외시할 수가 없다.
인간에 있어서의 시적 자아는 어떠한가. 시를 쓰는 동기로는 의식적 동기와 무의식적 동기를 들 수 있다. 시인으로서의 삶과 일상인으로서의 삶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성격은 판이하다. 현실적인 삶을 영위하면서 이상적인 삶을 꿈꾸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성격의 자아를 소유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인은 특히 일상적 삶을 영위하면서도 시적 공간을 창조해 간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창조물에는 自然(神)에 의한 창조물과 인간에 의한 창조물이 있다. 그런데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물건 가운데에도 인공적인 생산물이 있고 예술적인 창조물이 있다.
가령, 홍도(紅島) 해변의 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조약돌은 수 십억년 동안 갈고 다듬은 자연(신)의 창조물이기 때문에 인간 세계에서는 그저 자연 사물이라고 할 뿐 창작품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쇠붙이로 식기를 대량으로 생산하여 판매한다면 이는 인공적 생산물에 해당된다. 그러나 같은 쇠붙이(동이나 은 등)라도 조각품들이 세상에 둘도 없는 유일무이(唯一無二)로 창작되었다면, 이는 마땅히 예술적 창조물이라 할 수 있다.
2) 일상적 언어와 예술적 시어
시에 있어서의 재료는 언어이다. 언어는 일상적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시의 창작의 경우에는 일상적 어법이 변형되거나 파괴된다. 우리가 시를 쓰는 것은 현실(사실) 이상의 것(세계)을 추구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자연발생적인 일상적 언어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표현을 위해 낯설게하기로 싱싱한 지각을 회복하기 위해서다.
일상적 언어예술적 시어
자연 발생적낯설게 하기
설명적(인과율)표현론(목적론)
재료기법
이야기구성
인간은 천부적으로 부여받은 창조성을 타고 났는 바, 이 창조성을 계발하여 언어를 자유자재로 표현함으로써 미적인 기쁨을 누리고자 한다. 여기에 일상적 언어를 지나 예술적 시어로서의 가치가 주어진다.
이
창가에서
들어요
둘이서만 만난 오붓한 자리
빵에는 쨈을 바르지요
오 아니예요
우리가 둘이서 빵에 바르는
이 쨈은 쨈이 아니라 과수원이예요
우리는 과수원 하나씩을
빵에 얹어 먹어요.
이
불빛 아래서
들어요
둘이서만 만난 고요한 자리
잔에는 포도주를 따르지요
오 아니예요
우리가 둘이서 잔에 따르는
이 포도주는 포도주가 아니라 꿈의 즙
우리는 진한 꿈의 즙을 가득히
잔에 따라 마셔요.
나는
당신 앞에 당신은
내 앞에
둘이서만 만난 둘만의 자리
사실은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오 배가 불러요
보세요 우리가 정결한 저를 들어
생선의 꼬리만 건들여도
당신과 내 안에 들어와서 출렁이는
이렇게 커다란 바다 하나를.
전봉건의 시 「과수원과 꿈과 바다 이야기」 전문이다. 이 시에는 설명되는 일상적 언어와 표현되는 예술적 시어가 공존하고 있다. 설명되는 일상적 언어는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거니와 표현되고 있는 시어, 가령 첫연 뒷부분 4행(우리가 둘이서 빵에 바르는/이 쨈은 쨈이 아니라 과수원이예요/우리는 과수원 하나씩을/빵에 얹어서 먹어요.”라든지, 2연의 뒷부분 4행(우리가 둘이서 잔에 따르는/이 포도주는 포도주가 아니라 꿈의 즙/우리는 진한 꿈을 가득히/잔에 따라 마셔요.)은 일상적 상식의 범주 내에 있는 사고가 아니라 비일상적이며 비상식적인 비인과율로서의 사고로서, 시창작이라는 미적 목적을 위한 ‘낯설게하기’로서 예술적 시어를 도모하고 있다.
이 시는 종래의 고정관념을 깨뜨린 새로운 사고와 기법으로서 구성되어 있다. 이 시에서는 “빵에 바르는 쨈은 쨈이 아니라 과수원이예요”하고 낯설게 할 뿐 아니라, “과수원 하나씩을 빵에 얹어 먹어요.” 하고 일상적 상식선의 공간관념을 파괴하는 동시에 새로운 낯설게하기를 도모함으로써 새로운 싱싱한 시어로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이 시에서 핵심이 되는 시정신은 ‘우리가 둘이서’다. 사랑에 젖는 심상에서는 이러한 비일상적인 공간관념이 시어로 통한다. 둘이서 도모하는 사랑에는 되지 않을 게 없다고 하는 시정신이 결말에 가서 해명되고 정리된다.
둘이서만 만난 둘만의 자리
사실은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오 배가 불러요.
보세요 우리가 정결한 저를 들어
생선의 꼬리만 건들여도
당신과 내 안에 들어와서 출렁이는
이렇게 커다란 바다 하나를.
이 결말 부분은, 둘이서만 만난 둘만의 자리에서는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고 하는 심정적인 치열성이 내비치고 있다.
3) 시창작의 동기와 유형
앞에서도 진술한 바와 같이, 시 창작의 동기는 시인이 지닌 바의 자극적인 감성이 어떤 대상과의 관계에서 상대적으로 느낌으로써 기쁨을 얻게 된다. 인간은 누구나를 막론하고 절대행복 절대사랑을 추구하지만, 일상적 현실 사회에서는 그것을 성취하기가 불가능하기 마련이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그러한 바램을 시인이나 독자는 시의 세계에서 대신 이루어내고자 한다. 여기에 허구를 차용한 시의 구체적 형상화 작업이 요구된다.
작은 애를 업고
큰 애 손을 잡으면
天方地方 어디로든
날아가고 싶어라
하늘 아래
하늘 위에
달나라 별나라로
꿈에도 본 적 없는
날개옷이 그리워
철딱서니 없이
서성대는 나의 中年.
유안진의 시 「날개옷」이다. 구전으로 전승되어 내려온 「선녀와 나무꾼」 설화에서 착상을 얻어, 두 아이를 둔 중년 여인으로서의 내면의식을 표현한 작품이다. 두 아이의 어머니인 중년 부인으로서 이와같은 시상(詩想)을 떠올린 그 동기는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에서처럼, 현실을 초탈하고자 하는 이상의 꿈꾸기에 있다. 이상의 꿈꾸기, 그것은 아이 셋을 낳기 전에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하늘로 날아 오르고자 하는 ‘날개옷’의 소유자(선녀)로서의 ‘꿈꾸기’를 의미한다. 이러한 꿈꾸기는 허망한 공상이 아니라 구체적 형상화를 통해서 시작품이라는 새로운 가상적 현실 속에서 추구하는 시적 이상이 된다.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이상을 추구한다. 현실 사회에서 흔히 체험하게 되는 일시적인 가변적 행복이나 사랑이 아닌, 영원 불변의 절대행복, 절대사랑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인간이 갖게 되는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이러한 희망, 이러한 꿈이 있기에 인간은 정신 세계에서 상상의 감주(甘酒)를 즐기게 되는지도 모른다.
사람의 마음 가운데 자리잡은 지(知)와 정(情)과 의(意)라고 하는 내적인 욕망은 외적인 진(眞)과 미(美)와 선(善)으로 나타나게 된다. 여기 「날개옷」에서는 일상적 현실에서 초탈하고자 하는, 즉 ‘하늘’이라는 지극히 높은 공간의식이 상징하는 이상 추구의 상승의식(上昇意識)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이 시의 결구(結句)에 “철딱서니 없이 서성대는 나의 중년”이라 표현한 것은 현실의식으로 돌아온 자각을 의미한다. 선녀의 날개옷을 입고 하늘나라(이상세계)로 날아보고 싶어하다가 겸연쩍어하는 중년 여성의 심리가 여실히 드러나는 작품이다. 이 시가 공감을 주는 까닭은, 모든 사람이 갖게 되는 보편적인 진리가 여기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 창작에 있어서 동기(motive)가 의식되거나 의식되지 않거나간에 모든 시의 동기는 의도하는 방향성을 지닌다. 실제적인 목적이건 심미적인 목적이건 그것은 궁극적으로 시의 구체적인 형상화에 있다.
시에 있어서의 동기는, 시인이 어떤 사물을 지각하고 그 사물에 대한 느낌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싶다는 외적 사물 인식과 어떤 관념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싶다는 욕구 충족을 위해 사물을 끌어들이는 내적 사물 인식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옷장 밑 빼닫이에서
당신의 신발 한 짝을 내 봅니다.
이것은 당신이 끌려가던 날 새벽
뜰악에 벗어진 당신의 신발입니다.
―황금찬의 시 「9월의 편지」 중 첫 연―
신부님,
세례받고 반 년 만입니다.
천주님,
세례받고 반 년 만입니다.
천주님을 알고부터 유난히 낙엽소리 우수수 뼈속을 울리는 이 가을에
감히 두렵게도 저는
천주십계 중 여섯 번째인
‘간음하지 말라’는 그 계율만은
영 지킬 수가 없습니다.
―김여정의 시 「고백성사(告白聖事)」 중 앞부분―
이 두 편의 시 중에서 앞의 시는 외적 사물에서 느껴지는 지각을 동기로 하여 그 사물에 얽힌 사연을 끌어내었다면, 그 다음 뒤의 시는 시인 자신의 내면의식을 토로할 수 있는 직정적인 동기에서 기인되고 있다. 즉 앞의 시(9월의 편지)는 외적 사물에 얽힌 사연과 회상이 동기가 된다면, 뒤의 시(고백성사)는 시인 자신의 열정적인 내면의식의 표출이 동기가 된다.
외적 사물에 기인하건 내적 자아의식의 분출에서 기인하건간에, 어느 쪽을 막론하고 시의 무의식적 동기에 관하여 프로이드의 원망(願望) 충족의 이론이나 융의 집단무의식의 이론으로 비춰보게 될 때 억압된 무의식의 폭로라든지 유아기의 성적 경험, 공격적 또는 본능적 에너지 등을 생각할 수 있으나 지나친 이론적 분석은 창작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생략하고자 한다.
시 창작의 욕망이 일어나는 것은 사물을 지각할 때라든지 과거를 회상할 때, 또는 명상하거나 미묘한 심리적 분위기에 빠질 때 등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끊은 듯이 그렇게 따로 따로일 수는 없고, 동기의 선후의 차이는 있겠으며 복합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도 많다.
가령 사물의 지각, 즉 목욕하는 여인을 그림에서 보다가 과거 회상으로 이어진다거나 명상 또는 심리의 동요 속에서 시의 동기가 주어지는 경우는 「샘도랑집 바우」라는 시에서도 보기를 세울 만하다.
가까이 가지도 않았습니다.
탐욕의 불을 켜고
바라본 일도 없습니다.
전설 속의 나무꾼처럼
옷을 숨기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그저
달님도 부끄러워
구름 속으로 숨는 밤
물 소리를 들었을 뿐입니다.
죄가 있다면
그 소리 훔쳐들은 죄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그 소리는 꽃잎이 되고 향기가 되었습니다.
껍질 벗는
수밀도의 향기……
밤하늘엔 여인의 비눗물이 흘러갑니다.
아씨가 선녀로 목욕하는 밤이면
샘도랑은 온통 별밭이 되어
가슴은 은하로 출렁이었습니다.
손목 한 번 잡은 일도 없습니다.
얘기 한 번 나눈 적도 없습니다.
다만 아슴프레한 어둠 저편에서
떨어지는 물소리에
정신을 빼앗겼던 탓이올시다.
始原의 乳頭 같은
물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머리카락으로 목덜미로 유방으로 허리로
그리고 또……
곡선의 시야 굼틀굼틀
어루만져 보고 껴안아 보던
그 달콤한 상상의 감주(甘酒),
죄가 있다면 이것이 죄올시다.
전설 속의 나무꾼처럼
옷 하나 감추지도 못한 주제에
죄가 있다면
물소리에 끌려간 죄밖에 없습니다.
-자작시 「샘도랑집 바우」―
이 「샘도랑집 바우」에서는 목욕하는 여인을 떠올리는 동기에서 시발하여 구체적인 시로 형상화하려는 목적을 지향하고 있다. 이러한 동기는 의식적으로 진행될 수도 있고, 무의식적으로 떠올릴 수도 있다. 무의식적 동기라 할지라도 심층심리 내면에 저장되어 있는 내면의식의 분출이므로 인과적 관련성을 부인할 수 없다.
시를 쓰고 싶은 바램에서 동기화로 일어나는 시작 과정은 시 창작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마치 난자와 정자가 만남으로써 하나의 생명체가 시작되는 성격의 것이라 할 수 있다.
4) 희열의 원리적 근거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스스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어떠한 다른 존재에 의해서 생겨나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이 엄연한 사실을 인정한다면, 종교에서 말하는 신(하나님)이라든지, 과학에서 말하는 조물주, 철학에서 말하는 근본이라는 용어의 그 창조주를 부정할 수도 없다.
인간과 만물을 왜 창조했는가 하는 창조의 목적과 시인이 시를 왜 쓰는가 하는 창작 의도를 함께 생각해 본다면 절대자와 인간의 존재 목적이라든지, 시작품의 존재가치도 확연히 드러날 것이다.
인간은 홀로 있을 때 기쁠 수 없다. 기쁨이란 독자적으로는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기쁨이란 어떠한 대상과의 교감을 통해서만이 가능한 성격의 것이다.
가령 시인의 기쁨은 그가 지니고 있는 구상 자체가 대상이 되든가, 또는 그 구상이 시작품으로 나타났을 때, 그 대상으로부터 오는 자극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기쁨을 상대적으로, 또는 타각적으로 느끼게 된다.
시인이 상상을 통한 어떠한 구상만으로 기쁨의 대상을 삼을 때에는 그로부터 오는 자극이 실체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로 인한 기쁨도 실체적인 것이 될 수는 없다. 이러한 인간의 심성은 절대자인 창조주에게서 나왔다고 보기 때문에 신이나 인간이나 모두 동질의 소성(素性)의 소유자로서 희열도 역시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따라서 예술론이 성립되는 희열의 원리적 근거는 인간과 만물 등 모든 존재세계가 기쁨의 대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점이다. 그 다음으로 추론할 수 있는 점으로서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은 신의 기쁨의 대상이므로 그 절대존재의 섭리에 역행해서는 안된다는 점과 자기가 처한 사회라든지, 민족 국가 인류 등 보다 전체적인 목적을 위한 가치실현욕을 지닌다는 점이다.
인간을 가리켜 소위 소우주라고 한다. 이 말은 우주의 축소체라는 말도 되거니와 우주를 총합한 실체상(實體相)이라는 말도 된다. 이와 같이 만물은 인간의 기쁨의 대상으로 창조되었으므로 인간은 그 만물을 보고 희열을 느끼게 되어 있다. 따라서 인간은 만물을 통하여 기쁨을 얻으려는 가치추구욕을 지닌다. 여기에서부터 예술활동은 시작되고 천태만상의 조화의 미가 전개된다.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선물 가운데 가장 값진 선물은 가치추구 내지는 가치실현을 위한 창조성(창조력)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존재와 인식에 대한 특별한 사고(思考)가 요구된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은 우주를 총합한 실체상이므로, 가령 시인(인간)에게는 우주의 모든 소성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에 한 송이의 꽃을 바라보는 데 있어서도 그 꽃이 지닌 바의 형태나 색깔이나 향기나 부드러움 등의 원형이 관조자 자신에게도 내재되어 있는 바, 그 원형과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꽃이 상호 교감을 통하여 합치되는 체험의 인식, 그 주체자(시인)와 대상(꽃) 사이의 교감되는 일치점에서 비로소 희열이 솟구쳐 오르게 된다.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같이
풀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내마음 고요히 고흔봄 길우에
오날하로 하날을 우러르고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詩의 가슴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얄게 흐르는
실비단 하날을 바라보고 싶다
―김영랑의 시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
김영랑의 이 시를 앞에서 전개한 원리적 예술 이론에 비추어 보게 되면, 이 작품에 나타난 ‘돌담’, ‘햇발’, ‘풀’, ‘샘물’, ‘고흔봄’, ‘하날’, ‘새악시’, ‘볼’, ‘부끄럼’, ‘시의가슴’, ‘물결’, ‘에메랄드’, ‘실비단’ 등의 사물의 소성은 이미 이 시인의 의식세계에 내재해 있었던 요소들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우리가 어떠한 사물을 보게 되어 그것이 무엇인지 인식이 가능해지는 것은 그 대상(사물)을 바라보는 주체(시인)에게도 그 대상과 같은 동질요소가 있어서 서로 닮은 두 요소가 합치되는 경우라고 할 때 그러한 인식의 논리가 여기에도 적용될 수 있다.
3.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 할 때의 그 ‘어떻게’는 단순히 방법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주제에도 관계되고 기교에도 관련된다. 무엇을 쓸까 또는 무슨 시를 쓸까 할 때의 그 ‘무엇’이란 단순한 소재에 불과하지만, ‘어떻게’ 쓸까 하고 궁리한다면, 생각의 폭이 훨씬 넓어지고 깊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무엇’을 쓸 것인가에 관심이 쏠리게 되면 소재주의에 빠지기 쉽다. 소재란 넓은 뜻으로는 예술 작품이 아니라, 그 작품으로 형상화할 모든 재료를 가리킨다. 어떤 가치 원리에 의해서 통일된 미적 형상 그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형상에 이르기 이전의 정신적, 감각적 모든 재료를 의미한다.
문학적 또는 시적 표현이란 소재를 모사(模寫)하는 것이 아니라 주제에 의하여 어떠한 사상이나 가치를 발견하여 형식적 의의를 획득하는 형태를 말한다.
소재주의에 빠진다는 얘기는 주제를 등한히 할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음을 암시한다. 소재는 어디까지나 문학 작품의 내용이 되기 이전의 일상적 경험에서 주어지는 것에 지나지 않음으로 그것이 문학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주제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정리되어 미적으로 형상화된 뒤라야 한다.
따라서 문장의 소재는 풍부하고 다양하며 확실할 뿐 아니라 주제를 밑받침하여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소재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소재를 찾아 헤매기만 할 것이 아니라 주제에 도움이 되는 제재로 활용 될 수 있는 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문학을 문학 밖의 어떤 목적을 위하여 도구나 방편으로 이용하려는 처지에 서서도 안된다. 가령 어떠한 이데올로기를 신봉하고 절대시하는 처지에 서게 되면, 그 이데올로기를 위하여 글을 쓰는 일은 하나의 도구나 방편이 될 수 밖에 없다. 돈을 벌기 위한 상업주의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경우에는 소재가 우선하고 그 뒤에 주제 설정이나 방법 및 기교의 문제가 따르게 된다. 문학이 예술이라 한다면, 주제와 함께 그 방법 및 기교가 큰 비중을 차지할 수 밖에 없다.
시의 정도(正道), 문학의 정도, 예술의 정도는 소재에 있지 않다. 민중시니 도시시(都市詩)니 하는 편협된 소재주의가 문학의 정도인 것처럼 가장해서도 안된다.
1) 설명과 표현
시를 쓰고자 하는 문학 지망생들의 시는 흔히 설명의 차원에서 그치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시를 쓰기 위해서는 이 점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설명이란 시인이 아닌 일반인들도 어렵지 않게 구사할 수 있다. 또 설명되어 있는 글이란 두고두고 읽을 만한 가치도 없다. 다 아는 사실을 구태여 다시 읽을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선 시는 설명하는 게 아니고 표현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확실히 가질 필요가 있다.
벽돌 한 장을 쌓아 올리는 데에도 법칙이 있다. 2층 양옥을 올리건 12층 빌딩을 올리건 벽돌은 벽돌 특유의 기능을 발휘토록 하기 위해서 적재적소에 놓여져야 한다. 늘여놓은 줄대로 한장 한장 정확히 쌓아 올려가는 기술자라야 높은 건축물을 올릴 수 있듯이, 언어를 정확히 조립할 수 있는 작자라야 작품을 제대로 완성할 수 있다.
시창작, 또는 문예창작을 가리켜 ‘언어의 집짓기’, 즉 언어의 집을 짓는다고 한다. 마치 뽕잎을 먹은(독서를 한) 누에가 잠을 자고(사색을 하고) 투명해진(마음을 비운) 상태에서 명주실(언어)을 늘여 고치(집)를 만들듯이 시작 과정도 이와 흡사하다.
뽕을 많이 먹지 못한 누에는 책을 많이 읽지 못한 사람에 비유되어 부실할 수 밖에 없고, 다섯잠까지 충분히 잠을 자지 못한 누에는 사색을 할줄 모르는 사람에 비유되는데, 이러한 부류의 사람에게는 지혜가 있을 수 없다.
윤오영의 수필 「양잠설」에는 창작의 과정이 양잠에 비유되어 있는데, 이는 설명을 지나서 표현의 기교를 살려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그 끝 부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우수한 문학가는 생활의 농도와 정력의 신비가 일반을 초월한다. 그 까닭에 이 연령은 천차만별로 단축된다. 우리는 남의 글을 읽으며 다음과 같이 논평하는 수가 가끔 있다.
“그 사람 재주는 비상한데, 밑천이 없어서.”
뽕을 덜 먹었다는 말이다. 독서의 부족을 말함이다.
“그 사람 아는 것은 많은데, 재주가 모자라.”
잠을 덜 잤다는 말이다. 사색의 부족과 비판 정리가 안된 것을 말한다.
“그 사람 읽기는 많이 읽었는데, 어딘가 부족해.”
뽕을 한 번만 먹었다는 말이다. 독서기가 일회에 그쳤다는 이야기다.
“학식과 재질이 다 충분한데 그릇이 작아.”
사령(四齡)까지 가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그 사람 아직 글 때를 못 벗은 것 같애.”
오령기(五齡期)를 못 채웠다는 말이다. 자기를 세우지 못한 것이다.
“그 사람 참 꾸준한 노력이야, 대원로지. 그런데 별 수 없을 것 같아.”
병든 누에다. 집 못 짓는 쭈구렁 밤송이다.
“그 사람이야 대가(大家)지, 훌륭한 문장인데, 경지가 높지 못해.”
고치를 못 지었다는 말이다. 일가(一家)를 완성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양잠가에게서 문장론을 배웠다.
―윤오영의 「양잠설(養蠶說)」에서―
독자들은 이 글에 감탄할 것이다. 문장론을 논리적인 언어 또는 학술적인 언어로 설명하지 않고 수필의 형식을 빌어서 교묘히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시가 아닌 다른 장르의 글에서도 이처럼 놀라운 표현을 해내는데 시에서는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내 가난한 마음을 가지소서
그리하여 영원토록
당신만을 향하여 열려있게 하옵소서
내 가슴에 당신의 도장을 찍으소서
그리하여 영원토록
사랑의 맹세만 아로새기게 하옵소서.
―존 웨슬리의 「기도」―
이 글은 설명되어 있는 기도문이다. 그런데, “내 가슴에 당신의 도장을 찍으소서”와 “사랑의 맹세만 아로새기게 하옵소서”로 표현되어 있어서 시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매력을 주고 있다. 표현은 이처럼 기도답게 하고 시답게 한다.
2) 주체와 대상간의 상사성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꽃」―
꽃을 바라보는 주체적 시인과 대상적 꽃 사이의 교감은 상사성, 즉 닮은 데에서 비롯된다. 주체와 대상, 시인과 꽃 사이에 동질의 요소가 없이는 이처럼 교감될 수가 없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이 천주(天宙)를 총합한 실체상으로서 우주의 축소체인 소우주이기에 가능하다.
꽃이라는 존재에 대한 본질을 추구하고 이름짓는 행위는 마치 창세기에 에덴동산에서 모든 사물에 명명(命名)하는 아담의 행위와도 흡사하다. 이와같이 시는 어디까지나 개인적 독창적인 인식의 원리에 지배된다. 이와는 달리, 개념적이거나 보편적 인식으로서는 성공할 수가 없다.
객관적으로 보게 될 경우에는 꽃은 그대로 꽃일 뿐이다. 그러나 관조하는 시인의 주관에 의해서 교감되고 새로운 의미가 부여될 때 비로소 숨을 쉬는 시로서 탄생하게 된다.
G.무리에는 “얼굴에 마주치는 바람이 인간을 지혜롭게 만든다.”고 했는데, 바람은 그저 바람일 뿐인데, 무리에가 그렇게 사고함으로써 그런 말을 탄생시킨 것이다.
서정주 시인은 “스물 세해 동안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다.”라고 했는가 하면,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에는 “꽃향기에 거슬려 부는 바람은 모든 탐욕과 고통과 죄악을 뜻한다. 그러므로 빠른 바람은 번뇌를 일으킨다.”는 구절도 있다.
이 무거운 글에 비하여 “솔밭에 불어오는 바람 소리가 우리에게 쾌감을 맛보게 하는 것은 그 바람이 가시가 없고 모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한 H.미쇼의 말은 그렇게 가볍고 경쾌할 수가 없다.
지금까지 열거한 바람의 정체란 공기의 이동에서 파생된 자연현상에 불과하다. 이것을 가지고 자기의 축적된 경험에 따라서 다양하게 의미를 부여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바깥의 사물과 인생에 대한 마음의 자세에서 기초한다. 그리하여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예술성이 짙은 글에는 직관이, 그리고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글에는 오성(悟性)이 작용하게 된다.
여기에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바람에 관한 관심이다. 그것이 성애(性愛)로, 지혜로, 탐욕으로, 번뇌로, 죄악으로 상징되고 은유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인간 내부에 내재되어 있는 동질의 요소라는 점이다.
이와 같이 시에 있어서는 아무리 천태만상의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바라보는 주체자와 바라보이는 대상(사물) 사이에 동질의 요소가 내재되어 있어서 상호 교호작용이 전개된다고 하는 상사성의 법칙에 의해서 가능하게 된다. 우리는 이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인식이란 서로 닮은 요소에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3) 원관념과 보조관념
원관념이란 비유법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사물을 이르는 말이다. 가령 샛별같은 눈동자라고 했을 경우, ‘샛별’은 보조관념이고, ‘눈동자’는 원관념이다. 이와는 달리, 보조관념은 수사(修辭)에서, 나타내고자 하는 내용이 잘 드러나도록 돕는 관념을 말하는데, 가령 ‘내 마음은 호수’라고 했을 때 원관념인 ‘내 마음’을 잘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호수’라고 하는 보조관념이 차용된다.
이를 위해서는 적합한 언어를 적절히 끌어 쓸 수 있는 유사안식(類似眼識)이 요구된다. 유사안식이란 유사성을 찾아내는 눈을 말한다.
나의 마음은 고요한 물결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고
구름이 지나도 그림자 지는 곳
돌을 던지는 사람
고기를 낚는 사람
노래를 부르는 사람
이 물가 외로운 밤이면
별은 고요히 물위에 내리고
숲은 말없이 잠드나니
幸여 白鳥가 오는 날
이 물가 어지러울까
나는 밤마다 꿈을 덮노라
―김광섭의 시 「마음」―
여기에 나오는 ‘고요한 물결’은 원관념인 ‘내 마음’을 나타내기 위해 차용된 보조관념이다. 이 보조관념에 의해서 이 시인의 마음의 상태가 구체적이면서도 효과적으로 나타내어지므로 표현을 위해서는 이 보조관념은 필요 불가결의 것이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좋은 사상 감정이 있다 할지라도 그 마음 세계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그 원관념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보조관념을 차용할 줄 아는 유추능력(類推能力)이 요구된다.
유추란 어떠한 사실을 근거로 하여, 그것과 같은 조건 아래에 있는 다른 사실을 미루어 헤아리는 일을 가리킨다. 이는 유비(類比)라고도 하는데, 서로 다른 사물이 상호간에 대응적으로 존재하는 유사성 또는 동일성을 가리키기도 한다. 유사성이나 동일성이란 사물을 바라보고 인식하는 주체적 시인이나 그 대응관계에 있는 대상적 사물 사이에 내재하는 상사성(相似性)을 전제로 한다.
현대시에는 이미지(image)라든지, 隱喩(metaphor) 象徵(symbol) 類似 또는 類推(analogy)가 유기적으로 공존한다. 이러한 요소들은 현대시 작법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방법들이다. 이러한 요소들을 제대로 부려 쓰는 게 중요하다.
시인은 자기만이 가진 바의 체험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도출해야 한다. 자기만이 가지는 개성적 특수성을 중요시하면서도 보편성을 망각해서도 안된다. 특수성과 보편성의 균형있는 조화가 요구된다. 시인은 표현의 자유를 누리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할 뿐 아니라 전달기능도 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시어(詩語)는 일정한 원칙이나 법칙에 따름이 없이 제멋대로 되거나 이루어지는 자의성(恣意性)과 복합기호성(複合記號性)을 지닌다. 이러한 기반에 의해서 시어는 감동을 주는 심미적인 차원의 언어로 부활한다. 일상적인 언어가 전달기능을 강조하는 지시기능에 그치는 동안 시어는 이를 초월한다. 우리는 이러한 시어의 성질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4) 존재와 인식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디로 가는가? 사람이라면 자기 스스로 이러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은 영원히 존재할 수 없는 유한한 생명을 유지하는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저승은 과연 있는가? 있다면 어떻게 있는 것인가. 이승에서의 삶이란 어떻게 사는 삶이 가치있는 삶인가? 내가 인식하는 그 인식이 올바른 인식일 수 있는가? 올바른 인식의 척도는 무엇인가? 하는 등등 미지수로 남겨진 수수께끼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확연히 풀리지 않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영원히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인지도 모른다. 인생이란 특별한 공식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에 따라서 해석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학자는 진리를 가리켜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설파했다. 그는 진리란, 알았다가도 다시 몰라지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인생은 영원한 과정이라고 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진리에의 도달이라기보다는 진리에의 접근이나 방향성의 제시라 할 수 있다. 이는 가능하다. 무지개를 잡을 수는 없지만 그 곳으로의 접근이나 방향성 제시는 가능한 것처럼.
이러한 존재론이나 인식론의 차원에서 보게 될 때 시인이 좋은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고심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는 종교적 발상이나 철학적 발상, 또는 윤리적 발상이나 역사적 발상에서 찾지 않을 수 없다.
가령 시인을 닭으로 가정한다면, 계란(시)을 낳고 싶다는 주제의식이 선행될 것이다. 이 생각의 알맹이는 생산을 위해서 모이(소재)를 찾아 나선다. 닭이 찾는 먹이가 계란일 수 없듯이, 주제를 위해 차용하는 소재가 작품일 수는 없다.
시인은 시작(詩作)을 위한 주제에 맞는 소재를 선택하고 기교를 활용하여 자연스러움과 균형있는 조화를 위한 시어의 조탁에 힘써야 한다. 시어는 명료성과 모호성 즉 신비성을 동시에 거느려야 한다. 시에서 특히 요구되는 모호성(신비성)은 이론과 인식을 초월하여 불가사의(不可思議)하고 영묘(靈妙)한 비밀을 머금고 있는 예술성의 본질적 요소를 의미한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한용운의 시 「님의 침묵」 중 전반부―
한용운 시인에 있어서의 ‘님’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절대존재다. 그런데, 그의 현실은 떠나간 님, 상실한 님이다. 여기에서 그의 극복의지, 초월의지는 있어야 하는 당위론적 존재의 님을 앞서 내다보는, 즉 보이지 않는 세계를 감지하는 종교적 차원의 상상력의 안테나를 드리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러는
沃土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는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니인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듬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김현승의 시 「눈물」―
기독교 정신을 기조로 인간 내면의 진실성에 관심을 쏟은 김현승 시인의 작품이다. 종교적 차원은 이처럼 겸허하면서도 지고지선의 진실성을 바탕으로 절대가치에의 치열성을 보인다. 이 시는, 1960년대 이후부터 타계할 때까지 기독교적인 바탕 위에 선 인간으로서의 고독의 세계를 추구하는 작업을 계속한 그의 종교적 차원의 시세계가 응축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당신이 하늘이라면
나는 그 속에 떠도는 구름
당신이 바다라면
나는 그 속에 출렁이는 물결
당신이 땅이라면
나는 하나의 작은 모래알
당신의 손바닥 위에
숨쉬는 나는
당신의 영원 속의 순간을
풀잎에 맺혀 사는 이슬
한나절 맺혔다가
사위어가는
목숨……
자작시 「존재」다. 종교적 발상과 철학적 발상이 맞물려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시공간적(時空間的)으로 무한한 어떠한 절대존재에 비하면 미미하기 그지없는 인간의 한계상황이 그려져 있다. 이러한 인생과 우주, 나아가서는 우주를 창조한 절대존재에게 향하는 종교적 내지는 철학적 상상력이나 인식은 시의 영역을 확장하거나 심화하는 문제에 있어서 긴요한 요소가 아닐 수 없다.
윤리적 발상은 신라의 「처용가」라든지 또 다른 작품을 거론하면서 다음 기회에 다루기로 하고, 우선은 역사적 발상을 더듬어 보고자 한다.
모래알 같은 이야기를 만들고
이스락처럼 농부들은 연달아 죽어갔다.
그러나 땅 속에서
令旗들은 東學亂兵의 눈초리―
징 소리 들려온다.
풀 욱은 밭두렁을 파 헐으면
우렁껍질처럼 이름 없이
오래된 늙은 농부의 백골이 나오나니
네 피리를
어서 흙속에 묻고
땅에 귀를 대라!
東學亂兵의 짚신―
숨 가쁜 발소리 들려온다.
―장영창의 시 「호남평야(湖南平野)」―
“시를 쓰기 전에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우선 사람다운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인격적인 내용을 주문하는 의미가 있겠지만, 그에 못지 않게 사물 인식에 대한 내용을 갖추라는 뜻도 포함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좋은 사진을 찍으려면 그 카메라 렌즈부터 우수한 성능을 지녀야 하듯이, 시를 쓰는 데에도 사물에 대한 인식능력이 요구된다. 그릇만큼 담을 수 있다는 말은 이를 두고 이르는 말인 듯하다.
가령 호남평야를 여행하는 시인에게 역사의식이 없다면, 이 장영창 시인처럼 백년전의 농부나 동학민병들이 울려대던 징소리, 땅속에 묻혀 있을 농부들의 백골, 짚신, 숨가쁜 발소리 등이 연상될 리 없다. 고작해야 들녘이 넓다거나 아름답다는 식으로 서경시나 상태시에 머물게 될 것이다.
따라서 좋은 시를 쓰려면 주제나 구상, 기교 등등 연마해야 할 수련을 게을리 해서도 안되거니와 종교적 상상력이라든지 철학적 상상력, 또는 윤리적 상상력을 도출해 낼 수 있는 사물 인식의 눈(렌즈)을 길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만경강이 흐르는 호남평야, 그 드넓은 김제 들녘을 바라보는 똑같은 환경에서 어떤 사람은 역사의식으로 깊이 인식하여 영기(令旗)를 들고 함성을 지르며 내달리는 동학민병의 눈초리를 연상하여 의미 심장한 시를 써내는 이가 있을 수 있는가 하면, 역사의식이 없이 경박한 표현을 하는 이도 있겠는데, 이는 시의 본질과 거리가 멀 수밖에 없다.
이 외에도 사회적 발상이라든지, 숭고미, 우아미, 골계미, 비장미 등을 나타내는 미학적 발상 등이 있지만 다음 기회에 다루고자 한다.
4. 좋은 시를 쓰려면
훌륭한 시란, 강한 감정이 자연스럽게 흘러 나오는 것이라 한 워즈워드의 말과 아름다움을 율동적으로 창조한 것이라고 한 에드가 알란 포우의 말은 앞에서도 이미 얘기한 바 있거니와 이를 다음과 같이 다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말한 ‘강한 감정’ 그것은 언어의 핵(核)(씨, 씨앗, 알맹이)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자연스러움’은 어떠한 꾸밈이나 억지, 또는 어떠한 거짓이 없어서 어색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거짓이 없다는 것은 공자(孔子)가 말한 사무사(思無邪)와도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그것은 진실성을 의미한다. 진실한 언어가 아니면 감동을 줄 수가 없다.
다음으로 ‘아름다움’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예술의 본질적 요소로서 균형있는 조화를 의미한다. 균형이 깨어지면 제대로 어울릴 수가 없다. 균형이 깨어진 상태에서는 어떠한 조화도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부자연스런 부조화를 거부한다.
갈등을 전제로 한 소설과는 달리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시에 있어서는 균형잡힌 조화를 위해서 어떠한 대립이나 어긋남이 없이 서로 잘 어울리기를 희구한다. 여기에서 또한 율동적으로 창조한다고 할 때의 그 ‘율동적’이라는 말은 음률의 곡조, 즉 리듬을 의미한다.
이미지를 중시하는 현대시는 종종 산문시가 나타나는 경향이 있지만 율동적 리듬성을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시의 중요 요소로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요소들은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서 필요 불가결의 요건이므로 간과해서는 안된다.
1) 내용과 형식
시의 경우만이 아니라 문학 전반의 경우, 더 나아가서는 예술에 이르기까지 그 구조는 내용과 형식이라는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 시인이 시를 쓰고자 할 때는 주제의식이라든지 중심사상, 생각하는 언어의 알맹이가 요구되는데, 시 에스프리(esprit) 즉 시정신까지도 이 내용에 포함된다.
시의 형식이란 시의 형상화 과정에 있어서 나타내지 않으면 안되는 표현 기교 등을 말한다. 은유나 상징기법 등의 기교라든지, 시어 조립(詩語組立)을 위한 구체적 방법을 말한다.
시를 쓸 때 이러한 내용과 형식의 균형있는 조화가 요구된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시를 쓰고자 하는 의욕이 생긴다거나 착상이 되어서 주제를 설정했다면, 시작품을 이루는 여러 요소를 결합하여 전체적인 통일을 꾀하는 구성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시의 내용과 형식의 균형있는 조화를 이루어 보다 완벽한 창작을 위해서는 스스로 시란 무엇인가, 또는 인생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던지게 되는데, 이는 인식의 문제다.
뿐만 아니라 나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 것일까 하는, 이미 던져진 삶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이라든지, 어떻게 사는 삶이 보다 보람있게 사는 삶인가 하는 높은 가치의 추구는 시의 내용을 견실하게 하는 요소인 동시에 형식에도 영향을 주기 마련이다.
예술 내지는 문학, 시의 경우 역시 인간이 지닌 바의 마음과 몸, 정신과 육체처럼 이중구조로 되어 있는데, “아름다운 얼굴이 추천장이라면, 아름다운 마음은 신용장이다.”라는 말은 시에 있어서의 이중구조와 흡사하다 하겠다.
에머슨은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구하여 전세계를 여행한다 하더라도 자신이 스스로 아름다움을 지니고 가지 않으면 결코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피력한 바 있는데, 이는 자기가 지닌 만큼 얻을 수 밖에 없다는 인식의 성격을 단적으로 한 말이다.
이는 마치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이 눈앞에 전개된다 할지라도 자기가 지닌 렌즈가 빈약한 저성능의 것이거나 필름이 흑백필름일 경우에는 고급한 칼라 작품사진을 빼어낼 수 없는 현상과 같다는 얘기가 될 것이다.
또한 게오르규는 “미(美)와 성(聖)은 하나이며 동질의 것이다. 성스러운 것은 아름답고, 아름다운 것은 성스럽기 때문이다. 탁월한 미는 발가벗더라도 음란해 보이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는 내용과 형식을 두루 갖춘 경지의 작품에서 맛볼 수 있는 차원의 것을 말한다.
2) 시어詩語의 직조織造
꽃이 필 때 자연스럽게 피어나듯이, 시를 쓸 때에도 자연스럽게 쓰게 된다. 꽃이 필 때 컴파스로 돌리거나 분도기로 재면서 계산해서 피어나는 게 아니듯이, 시인이 시를 쓰게 될 때에는 일일이 그 구조를 따져 계산하면서 조립하는 게 아니다.
다만 시 뿐만이 아니라 모든 문학은 무질서한 관념을 구체적으로 질서화시키는 작업이기 때문에 그 질서화와 조화를 위한 사전 지식이나 안목이 요구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비평가가 가타부타한다거나 시시비비로 따따부따하는 것처럼, 그렇게 따져가면서 시를 쓰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그러면서도 시인은 시의 構造(structure)와 組織(texture)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시의 구조란 시의 논리적인 의미, 즉 산문으로도 고쳐 쓸 수 있는 합리적인 내용을 가리킨다.
시의 조직은, 시에 있어서 산문적인 의미와 모순되는 이질적인 것으로서의 조직이며, 이는 운율과 비유를 포함한다.
미국의 시인이면서 비평가인 J.C.랜섬은 말하기를 “시인은 두 가지 말을 동시에 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하나는 논리적 구조를 만드는 일이며, 다른 하나는 운율을 만드는 일이다. 논리적 구조란 보통 시인이 처음 착상한 일이며, 그것에 적합한 구조를 가진다.”고 했다.
구조라는 말의 뜻은 내용을 포함하여 외피(外皮)라는 의미로서 보통 사용되는 폼(form)이 아니다. 구조는 항상 시가 가지는 재료의 성질에 의하여 지배된다. 구조의 문제를 해결하게 하는 것은 시의 재료의 성질이다.
랜섬은 또한 확정적 의미와 불확정적 의미, 확정적 음(音)의 구조와 불확정적 음의 구조를 말하는 자리에서 “확정적 의미란 논리구조이며, 확정적 음의 구조란 운율이다.”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좋은 시를 쓰기 위한 시어의 직조(織造)에 있어서 확정적 의미와 불확정적 의미 내지는 시의 논리와 비논리의 논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3) 농심과 시창작
시창작에 임하는 마음의 자세를 농심에 비추어 농작 과정(農作過程)을 얘기하는 경우가 있다. 마음밭을 경작하는 데 있어서 그 심전정리(心田整理) 즉 마음밭을 넓히고 바르게 하기 위한 배수(排水)라든지, 관개(灌漑), 객토(客土), 농로개설(農路改設) 등을 우선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배수는 물이 쪽쪽 빠지도록 하는 시설로서, 불필요한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사무사(思無邪)의 뜻을 지닌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관개는 농사일에 필요한 물을 끌어들이는 시설이므로, 작품 창작을 위해 차용한 언어를 취사 선택하여 쓸 것과 버릴 것을 가려 쓰게 된다.
객토는 토질을 개량하기 위하여 논이나 밭에 새로운 흙을 넣는 작업이므로 시를 쓸 때, 이는 마음을 풍부히 한다거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하여, 또는 작품을 풍부히 하기 위하여 새것을 받아들이는 성질에 비길 수 있다.
농로개설은 글자 그대로 농삿길을 수리하거나 새로 내는 일을 말하는데, 이는 상상력의 개발이라든지, 유추능력(類推能力), 은유기능(隱喩機能) 상징기능(象徵機能) 등을 말한다.
토지의 이용가치를 높이기 위하여 경지정리(耕地整理)를 하게 되는데, 이러한 경지의 구획정리나 배수나 관개시설, 또는 농로개설을 할 뿐 아니라 객토작업을 하는 것과 같이, 언어의 질서, 언어의 품격을 높이기 위하여 심전정리 뿐 아니라 언어의 깊이갈이를 시도한다. 언어의 깊이갈이, 그것은 사고의 심화나 확대를 위해서 필요 불가결의 것이다.
쟁기질을 하는 농부가 논이나 밭을 갈게 될 때 쟁기 날을 세워서 생땅까지 깊게 파헤치지 않는다면 많은 소출을 기대할 수 없듯이, 문학에 있어서 양질의 영양이 될 수 있는 종교적 상상력이라든지, 철학적 인식, 또는 역사의식이라든지 사회의식, 작가적 양식 등등 다양한 차원으로 깊이갈이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가령, 맑고(淸) 깨끗하며(淨), 고요한(靜) 차원이라든지, 인생과 우주의 근본 원리를 터득하는 등등의 경지에까지 관심을 넓혀야 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마음 자세가 잡혀지게 되면, 창작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일년지계재어춘(一年之計在於春)이라는 말도 있듯이, 농사 계획을 세워서 종자 고르기에 들어가는 데, 그 씨앗이 딴 계통에 섞이지 않은 순수한 종자인지, 여러 가지가 잡다하게 섞인 잡종인지, 또는 벌레 먹거나 부패한 종자인지 가려내는 종자 고르기를 하듯 쓰고자 하는 의도나 주제에 대해서 엄격하게 확인할 필요가 있다.
씨앗을 고른 농부가 파종(播種), 즉 씨앗을 땅에 뿌려 심듯이 창작을 위한 집필에 들어간다. 농부가 제초(除草) 즉 잡초를 뽑아내는 김매기 작업을 하듯이 퇴고의 과정을 거친다.
농부가 해충을 제거하기 위하여 농약을 뿌려 소독을 하듯이 잡념을 제거하고 깨끗하게 수정을 가하여야 한다.
아무 욕심도 없는 농부가 농심으로 애지중지 가꾼 농작물을 마지막에는 타작(打作)하여 탈곡(脫穀)을 하듯이 시인은 알곡같은 작품을 완성하게 된다.
언젠가 보리고개라는 그 춘궁기에 본 일로서, 먹을 것이 없는 농부가 풋보리 등등 아직 미처 익지도 않은 것을 베어 먹는 경우도 있거니와 추수 때 게으름을 피우는 경우도 있으며, 농한기(農閑期)에는 도박판에서 일확천금을 꿈꾸다가 가산을 탕진하고 패가망신하는 경우도 보았는데, 시창작의 경우도 이와 흡사한 예가 적지 않다.
이제까지 농심을 중심으로 시창작을 얘기했는데, 우선 좋은 시를 쓰겠다는 모티프(motif) 즉 동기로서, 표현이나 창작의 동기가 되는 중심사상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소금물같이 썩지 않는 양심에 비추어 보아서 생각의 쭉정이를 버리고 알맹이만 가지고 파종을 하는 농부처럼, 조각가도 바위의 부실한 부분을 제거하고 조각에 필요한 돌의 알맹이만을 가지고 조각에 착수한다. 석굴암 대불상이 그랬다고 전한다.
조각가는 바위를 보고 그 속에 들어있는 상(像)을 마음에 그린 다음 불필요한 부분을 떼어내는 작업을 하게 된다. 좋은 시를 쓰려면 이처럼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는 언어의 조탁도 게을리 해서는 안될 것이다.
온 겨울을 어둠과 추위를 다 이겨내고 봄의 아지랭이와 따뜻한 햇볕과 무르익은 장미의 그윽한 향기를 온 몸에 지니면서, 너 보리는 이제 모든 고초(苦楚)와 비명(悲鳴)을 다 마친 듯이 고요히 머리를 숙이고 성자(聖者)인 양 기도를 드린다.
이마 위에는 땀방울을 흘리면서 농부는 기쁜 얼굴로 너를 한아름 덥석 안아서 낫으로 스르릉 스르릉 너를 거둔다.
너 보리는 그 순박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농부들과 함께 자라나고, 또한 농부들은 너를 심고 너를 키우고 너를 사랑하면서 살아간다.
보리 너는 항상 순박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농부들과 함께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한흑구의 수필 「보리」 결말 부분―
이러한 농심은 시창작에 있어서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는 수필 형식을 빌어서 자연을 통한 인생과 우주 내지는 모국을 얘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자연 속에 은거한 선풍도골(禪風道骨)의 도인이면서 풍류의 멋을 지닌 선비요, 항일운동에 투신한 애국자인 한흑구의 이 글은 농심 시심(農心詩心)을 일으키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