黃松文 長詩集
메시아의 손
메시아의 손
1
하얀 손이 오른다.
神의 호명(呼名)을 따라
만고풍상(萬古風霜) 다 겪어온
겨레의 이마 위에
막(幕)이 서서히 오른다.
고난(苦難)으로 빨래한 머리
의식(意識)의 머리카락 뻗쳐 가는 곳마다
천진(天眞)한 빛살을 타고
세련된 지휘봉이 내려온다.
태초(太初)에 말씀이 있었느니라.
동해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빛의 왕래가 시작되던
송화강(松花江),
백두산(白頭山) 아래
천례(天禮) 신시(神市)의 때로부터
음악은 눈을 트고 있었느니라.
동방 해 돋는 아침의 나라
고요한 반도에
최초로 내려오는 빛.
빛이 쏟아져 내려오는
충신의 산맥을 따라
메시아의 손이 오르다가
열녀의 강물을 따라
율동의 손 마주잡으며
만국의 빛살로 빛살로
얽혀 돌아 내려온
천하 제일의 명당 자리―.
태고(太古)에 단군(檀君) 신인(神人)이 있어
천황봉은 솟아오르고
하늘 땅이 상봉하는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
산세(山勢) 명당(明堂)을 이루니
오오, 아버지 계룡(鷄龍)
어머니 지리(智異)
할아버지 금강산 일만이천봉
오묘한 반도(半島)는
꿈꾸는 성지(聖地)
배달 겨레는
하늘의 선민(選民)이었다.
흰 구름 뚫고 솟은
인류의 지붕으로부터
밝음을 찾아온 화음(和音)이
뿌리에서 가지로, 가지에서 꽃으로
손을 들어 피어오른다.
비둘기 나는
아침의 제단(祭壇).
지붕과 지붕의
용마루를 타고 내려와
이뤄놓은 신시(神市).
하늘 보고 해를 보며
장백산맥(長白山脈)을 타고
강남산맥(江南山脈)을 타고
적유산맥(狄踰山脈)을 타고
낭림산맥(狼林山脈)을 타고
묘향산맥(妙香山脈)을 타고
태백산맥(太白山脈)을 타고
차령산맥(車嶺山脈)을 타고
소백산맥(小白山脈)을 타고
노령산맥(蘆嶺山脈)을 타고
남해(南海) 건너
한라(漢拏)까지
신단(神壇)을 쌓아올리고
하늘을 우러렀다.
음률(音律) 속을 빠져나온 피라미 떼
폭포를 타고 솟아오른다.
반짝이는 비늘을 날리며
만세무궁 영원토록
복된 땅이 되라고
자자손손 널리널리
퍼져지라고
신(神)의 종자가 내려와
춤이 되고 노래가 되어
지국총 지국총
마제석기 두드리며
아침 해 솟는 곳으로
조랑 조랑 이어온 흐름이었다.
2
화음(和音)이 나뭇가지에서 눈을 뜬다.
햇살이 쏟아져내려
만국기 날리는
피라미 떼의 폭포.
하늘을 사모하는 눈
바라보면 동서남북
발톱에 할퀸 강산.
이빨과 이빨과
아우성과 아우성과
짜깁기해 돌아온 얼굴 언저리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랜 탄식에 지쳐
백발 성성한 백두산
눈물 고인 천지연(天池淵)
눈물은,
두만(豆滿)과 압록(鴨綠)으로 흘러
동해와 서해를 이루었다.
금강산 보석을 등에 지고
허리를 펴지 못한 채
긴 밤 꿇어앉아
기도 올리기 반만년.
도(道)의 나라는 눈물의 나라
눈물로 강을 이루는 민족이었다.
하늘에 걸린 지휘봉이 내려온다.
빛을 더듬어나가는
신비의 나뭇가지 끝에
음악이 테이프를 날린다.
꿈속 퉁기는 선율을 타고
피라미 비늘로 미끄러지는
시냇물 속의 새소리.
고요의 아침나라
안개가 걷히기도 전에
명당을 노리는
이방민족의 간계 어떠했던가.
물려 뜯기면서도
물어뜯을 줄 모르는 민족.
압박과 설음 속에서도
하늘만 우러르던 민족.
밀려다니고 쫓겨다니고
피난보따리 보따리마다
눈물 젖은 겨레에
음악이 마중을 나온다.
오오, 그러나
애타도록 가슴을 물어뜯으며
하늘을 찾던 눈동자만 남고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화전(火田) 같은 목덜미에
다리는 잘려나갔다.
음악이 눈시울을 적신다.
고난의 이마에서도
머리카락 위에서도
눈잎이 펄펄 날린다.
깃발은 펄럭이고 싶었는데,
혈관에 펄럭이고 싶었는데,
찢겨진 하늘을 짜깁기해 들고
아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위만(衛滿)과 한(漢)에게 고조선이 당했다.
말갈(靺鞨)에게는 백제와 신라가 당했다.
고구려는 위(魏)에게 당하고
숙신(肅愼)에게 당하고
선비(鮮卑)에게 당하고
연(燕)에게 당하고
수당(隋唐)에게 당했다.
고려는 또 다시 몽고(蒙古)에게 당하고
원(元)에게 당하고
조선의 마지막에는 왜놈들이
쑥밭을 만들어버렸다.
오오, 원통했던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
정겨운 이야기가 왕래하던
개나리 울타리는 날아가고
박꽃이 하얗게 웃던
초가(草家)는 불탔다.
가족은 학살당하고
조석으로
청명한 물 한 가슴
찰랑찰랑 넘치도록
하늘을 머리에 이고 살던
꽃 같은 꽃
조선의 꽃들은 겁탈 당했다.
밤바람을 피하여 언 발등을 녹이던 아궁이 속에서 기어 나온 봉사각시가 오빠꾸를 찾아가다가 되놈들에게 윤간 당해 눈 가린 언덕엔 지금도 풀이 자란다. 봉사각시의 무덤 가에서 해가 저물도록 울어대던 오빠꾸는 들꽃처럼 헤픈 웃음을 뜯어 뿌리면서, 조무래기들이 바지 가랑이 속을 보이라고 하면 히히, 바지가랑이도 헤쳐 보여주고, 대동아 전쟁 이야기를 하라 하면, 밤하늘 비행기불 이야기도 들려주고, 봉사각시 얘기를 하라 하면, 개풀을 뜯어 날리면서 봉사각시 흉내도 내어 보이던 오빠꾸. 넝마주이들의 다리 밑에서도 조기랑 올려놓고, 조사들의 제사는 잘 찾아주던 오빠꾸, 어째서 이름이 오빠꾸냐고, 풀씨를 입에 물리면서 눈감아라 하면 눈을 감고, 별이 일곱 개 보이느냐 하면, 별이 일곱 개 보인다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입안 가득히 퍼진 풀씨를 퉤퉤 뱉으며 히히, 눈흘기던 오빠꾸. 아이들이 오빠꾸의 목으로 허리로 기어오르면서 기어가보라고 하면 기어간다. 숨을 헐떡이면서 자꾸만 자꾸만 기어간다. 아이들이 궁둥이를 차기도 하고 꼬집으며 흙을 뿌리며, 오빠꾸야 오빠꾸야 강아지 부르듯 오빠꾸를 부르면, 활동사진에 집어넣으려고 몽둥이로 반병신 만들면서 왜놈들이 붙여준 이름자가 서러워 멀거니 하늘을 올려보며 꺼익꺼익 울고 있었다.
흘러간 이름들을 부르며
충무로(忠武路)에서
을지로(乙支路)를 걷다가
하늘을 우러르면
우리들을 내려보는
이름 없는 별들.
소년은 자다가도 젖가슴을 찾는다.
화려한 꿈 속
깡통 속의 무지개.
미군부대에서 평화시장으로
가슴을 물어뜯으며
어미를 찾고 있었다.
3
빨래를 좋아하는
하얀 습성의 겨레.
신단(神壇)을 쌓던
목화(木花)의 정신
붓대에서 튀어나온
씨알의 뜻을 아는가.
자식이 돌아온다고
아버지는 신바람이 났다.
심장이 고동칠 때마다
하늘이 휘날리고 있었다.
부러진 좌익(左翼)의 팔
옷소매를 주머니에 넣은 채
우익(右翼)의 팔만 흔들면서 달렸다.
징용에 끌려나가 잃어버린 팔
잘려나간 몸을
하늘 아래 내어놓을 수 없어
옷소매로 해를 가리며 뛰었다.
대동의 지도를 펴면
한반도의 손금은 복잡하다.
풀 우거진 언덕바지
조상들의 백골이 묻힌 상하
빼앗겼던 땅
더럽혔던 땅
다시 찾을 때마다
짜깁기해 돌아온 얼굴들.
아버지!
이놈아!
내 팔도 원통한데
네가 이게 웬 일이냐!
하늘 한번 올려보고
땅으로 눈감은 아버지.
아버지가 앞장을 서서 간다.
땅 한번 눈감고
하늘로 눈뜬 아들
아들이 뒤를 따른다.
모가지야, 모가지야
왼 팔 잃은 모가지야
왼 발 잃은 모가지야
반만년의 모가지야
오천만의 모가지야
찌르르 타는 모가지를 껴안고
동해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우리 서로 비난하지 말자고.
4
임진년(壬辰年) 춘삼월(春三月)
무궁화 삼천리 화려한 강산을
왜적들이 밀어닥치니
고각함성(鼓角喊聲)은 천지를 진동하고
기치창검(旗幟槍劍)은 하늘을 비웃었다.
강원감사와 평안감사를 죽인
왜장 소섭이
절색의 월천(月川)
꽃을 따먹으며 희희낙락하다가
흑 한 줌 섞어주고,
조국의 오지랖에 내려와
정겹게 숨진 꽃이여.
육신은 왜적에게 짓밟혔어도
영혼은 조국에 바치었어라.
왜장 평수길(平秀吉)이
왜군 3만 명을 거느리고
진주에 웅거할 때
목단(牧丹)의 슬기 어떠했던가.
촉석루(矗石樓)의 칼춤
머리카락 끝 뻗쳐 가는 곳마다
눈물 속 번득이는 조국.
왜장을 끌어내어
꽃잎처럼 떨어져간
모란의 분노여.
충무로에도
을지로에도
밀리는 종아리의 행렬 속에
모란의 분노가 흐르느냐.
신(神)의 호명을 따라
어쩌다가 한 번 씩
하늘을 올려보면
말갛게 정신이 갠다.
5
아나보라의 약효가 번지는
비닐봉지 속에서
독사의 새끼들이 꿈틀거린다.
이 독사의 새끼들아!
어찌하여 하늘에 침을 뱉느냐.
아침 눈 트이기 전에
복중에서부터 싸우는 녀석들아!
빛을 찾아 한데 모여라
같은 피를 이어받고서
왜 미워하느냐, 이 녀석들아!
큰놈아, 작은놈아 지도를 펴라
너희들 핏줄이 당기는 대로
서슴없이 짚어보아라
한반도는 누구의 땅이며
만주벌판은 누구의 땅이었더냐.
만주 참나무 숲에 묻힌
조상들의 피리소리를 듣느냐.
이렇게 밝은 날 다시 만나
어깨랑 껴안고 목을 늘이면
하늘도 시원스레 트이겠구나.
잊을 수 있을까, 조상의 핏줄을.
끊을 수 있을까, 겨레의 혈관을.
통곡이 부서진 뒤
열리는 하늘을 보느냐
땅으로 눈감은 아비를 보느냐
목발을 짚고 가는 자식을 보느냐
절뚝이며 내려온 역사를 보느냐.
아들은 나뭇가지에
목발을 세워놓았다
허전한 무덤을 통과한 바람이
저만치 돌아보고 있었다.
한 손으로는 생활을 붙들고
한 손으로는 핏줄을 붙들고 있었다.
바람아,
대지에 떨어지는
핏줄의 소리를 듣느냐.
바람아,
핏줄의 소리 저쪽에서
탈곡하는 총소리를 듣느냐.
메시아의 손이 오른다.
통일이여, 통일이여!
메시아의 손이 오른다.
어서 오라, 어서 오라!
메시아의 손이 오른다.
조국이여, 조국이여!
메시아의 손이 오른다.
일어나라, 일어나라!
메시아의 손 가는 곳으로
하늘 끝 머리 두른 나무들이
손을 들어올린다.
6
어머니가 아침저녁으로
맑은 물을 길어 나르듯,
우리들의 깊은 가슴속에
빛살을 내리시는 하늘이여.
음악이 손을 잡아 흔든다.
바리톤이 테너를 잡아 흔든다.
테너는 바리톤을 따라나선다.
대숲을 기어오른 칡넝쿨
칡넝쿨을 감고 오른 플루트 소리가
비비새 소리를 따라 가다가
알토를 만나고, 소프라노를 만나
시냇물 속으로 흘러내린다.
맑은 시냇물에서
피라미 떼 뛰어 노는 것처럼
아이들의 가슴에는
언제나 조국이 샘솟는다.
줄넘기를 하면서도
통일의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의 가슴에는
언제나 하늘이 고여있다.
아이가 부러운 어른들은
곰팡이 슨 역사책을 꺼내어
햇볕에 말리며
온갖 어지러움을 털어 낸다.
악장(樂長)의 손끝에서
백조의 합창이 쏟아져 나온다.
찬란한 빛의 선율을 타고
사랑의 노래가 울려온다.
불꽃은 혈관마다 타오르고
깃발은 깃발끼리 펄럭이고 있었다.
7
아비와 아들이 걷고 있었다.
조상이 걷던 논둑 길을
동학민병의 징 소리
짚신 소리 밟으며
논둑 길을 걷고 있었다.
소련군이 뛰어가고
중공군이 뛰어가고
일본군이 뛰어가고
미군들이 뛰어가고
흰둥이 뛰어가던 논둑 길,
검은 둥이 뛰어가던 논둑 길에서
명주치마 찢겨지는 소리를 들었다.
왜란의 여인이 당하는 소리
호란의 여인이 당하는 소리
동란의 여인이 당하는 소리
소리가 소리를 물고 다려와도
처용(處容)은 춤을 추고 있었지.
철천지원수가 피를 섞고 나자빠지는
썩은 문화의 식민지.
테라마이신의 약효가 번지듯
죄가 번지고
군 참새 대가리처럼
홀랑 홀랑 벗겨져 나가는
임질 매독 균이 있었지.
아침부터 초만원을 이루는
북한강변의 러브호텔,
처용(處容)의 처를 잡아라.
네 개의 다리.
탕! 탕! 탕!
총을 쏘면
시원스러운 피 속에
마귀가 웃으며 나오느니
풀잎은 뜯길수록 길어나고
새를 사격하는
포수의 귓속으로
새소리는 살아나는 것.
우리들 영혼을 투망질하는
정도령, 메시아여!
죄의 뿌리를 알려주십시오.
귀 있는 자여 들어라.
너희들의 몸 속에
검은 마음을 꼬여내어
혀끝에 번득이는
죄의 뿌리를 뽑아라.
한 쪽 눈 범죄하면
그 눈을 빼어버리고
한 눈만 가지고
바른 길 찾아가라.
8
하얀 손이 오른다.
하늘에 걸린 지휘봉이
태초처럼 내려온다.
아가, 니 우야다가 이리 뎃노!
싸우다가 이리 안 됐십니껴!
어떤 놈이 이랬노?
되놈들이 개미처럼 밀고 오등만요.
어쩌다가 이리 됐노?
되놈의 수류탄 쪼가리가 이랬심더.
어째서 잘랐버렸노?
자르지 않으면 썩어 갑니데이!
이놈아!
아버지!
9
조국의 통일에 미친 사나이가
금강산, 백두산으로 간다고
등산복으로 나와서
불같은 말씀을 토하고 있었다.
하루에도 열 두 번씩
손바닥 뒤집듯 엎었다 뒤집었다
하늘도 오므렸다 폈다 하는
골목을 누비고 있었다.
「이 독사의 새끼들아
동해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으흐흐, 으흐흐흐, 알았느냐?
자아, 여러분!
허리를 잘렸던 반세기의
헌 빨래를 거두십시오!
찢겨진 흰옷을 꿰매어 입고
어서 눈물을 거두십시오!
자아, 여러분!
케이블카에 오르십시오!
몇 분만 오르시면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이 한 눈에 보입니다요!
고요한 아침의 나라 비경(秘境)을 보세요.
저 자욱한 기암신봉(奇巖神峰)을 보세요.
자, 여러분!
통일강산을 보세요, 통일강산을!
으흐흐, 으흐흐흐, 알았습니까?」
당의정 같은 해가 걸린 종로,
서른 세 번 우는 인경에
파고다공원도 따라 울더니,
골목을 지나던 주정뱅이가
발을 멈추고 머리를 떨군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 시기에
빛나던 코리아
코리아의 춘삼월
춘삼월 호시절
꽃을 피우던 아침의 나라
찬란했던 한반도문화는
여름으로 서서히 옮겨갔다.
하천문화로, 대륙문화로 물결처럼 너울거렸다. 메소포타미아의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이집트의 나일강, 인더스강 유역과 황하유역으로 문화는 흘러내렸다.
문화는 다시 회전하여
반도로 옮겨갔다.
지중해 반도로, 이태리 반도로
이베리아 반도로.
또 다시 영국의 대서양문화로
아메리카 대륙문화로
태평양문화로
일본을 지나고
소비에트 엄동을 지나
봄은 다시 온다고
애타도록 가슴을 물어뜯으며
우리들은 한결같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온대문명에서, 열대문명으로
아열대문명으로, 한 대문명으로
오오, 마침내 낙엽은 지고
삭풍(朔風)이 불어
나뭇가지마다 의리는 꺾이고
뿌리마저 얼어붙은
엄동이 지나면
여기에도 새봄이 와서
집집마다 입춘(立春)을 맞이하게 된다고
양지로 양지로 입을 모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꽃씨 한 보따리씩 챙겨들고
그 날이 온다고
하늘 우러러 발돋움을 하고 있었다.
여보세요, 타고르 선생.
내가 할 말 사돈이 해줘서
속이라도 후련합디다.
여보세요, 타고르 선셍.
선생의 철학으로는
코리아의 신수가 훤하게 트입디까.
명금은 긴 줄 알지만
너무도 시련이 많아서
믿어지지가 않습디다 그려.
동방의 밝은 빛이 되겠지요.
마음엔 두려움이 없고
머리는 높이 쳐들린 곳.
진실의 깊음 속에 말씀이 샘솟고
완성을 향하여 팔을 벌리는 곳.
오오, 그러한 자유의 천당으로
나의 조국이여 인도하소서.
징을 치고, 피리를 불며
삭풍(朔風)이 불던 날
아기를 오버로 감싼 채
아미는 얼어죽고 있었다.
총소리가 탈곡하고 지나간 뒤
하늘로 향한 눈을 감지 못한 채
대지는 식어가고 있었다.
밤하늘 철새들 흘러가고
먼동이 틀 무렵
어미의 시신(屍身)에서
어린것이 울고 있었다.
껍질을 뚫고 나오는
뭉개진 손톱, 묻어온 흙에
햇살이 고여있었다.
이유 없는 미움이 들끓는 마을과 산하에서 탕― 탕― 탕― 울려오는 총소리에 뒤따르는 어린것의 목소리, 목소리는 깃발, 깃발은 폭풍이었고, 폭풍은 화염이었고, 화염은 어버이의 분노였고, 아들딸은 강물이었다. 아아, 여기, 화염이 불타는 조국의 산아에 눈물로 번지는 메아리―, 메아리는 하늘땅을 진동하던 폭풍이었고, 불길이었고, 진군의 나팔이었다.
11
메시아의 손이 오른다.
하늘에 걸린 지휘봉이 내려온다.
태초처럼 서서히 내려온다.
인간의 본심을 흔들어 깨우는
지휘봉을 향하여
만물은 생명의 팔을 벌린다.
사랑은
기교가 아니라 생명이라고,
생명은
기교가 아니라 사랑이라고.
어지러운 감정의 뿌리를 씻어 내리고
양심을 부르며 음악을 따라간다.
모든 골짜기, 모든 골짜기
만물도 머릴 들고일어나
영광 영광 할렐루야
환희의 팔을 들어 올린다.
나뭇가지에서 지저귀던 새
율동의 날개 휘감으며
창공의 물살을 헤집는다.
소프라노에서 떨어진 비비새들이
햇살 쏘아 내리는
대숲을 누비며
하나님 우리를 위해
오셨다.
우리를 위해
오셨다.
우리를 위해
하나님 우리를 위해
하나님 우리를 위해
오셨다.
오셨다.
오셨다.
하나님 우리를 위해 오셨다.
약탕론(藥湯論)
1
구공탄 속에서 귀뚜라미가 울더라.
끓는 물 속에서 메추리알이 죽더라.
차창에 부딪쳐 침몰한 나비가 바퀴 밑에 깔리더라.
다리 부러진 지게와 몽당 싸리비가 전신주에 고꾸라져 죽더라.
모래가 산이 되어 올라가고 빌딩이 폐수에 침몰하더라.
콘크리트가 갈라지고, 가로수는 폐렴을 앓아 눕더라.
황달 든 시멘트 절벽 아래 박쥐들의 그림자가 어스러져 내리더라.
욕망의 풍선들이 터지고 해골들 뼈다귀가 꿈틀거리더라.
사람들로 가득 찬 다방은 어지러운 잡담을 새끼치더라.
잡담이 많으면 많을수록 자꾸만 시드는 여자의 꽃, 다방 속에 갇힌 풀이 플라스틱으로 굳어죽더라.
링거 주사를 맞는 것처럼 산소를 빨아먹는 금붕어들, 어항 속에 갇힌 채 플라스틱 해초에 질식하더라.
설탕으로 커피의 쓴맛을 속이는 여인들이 암호의 천 속에 갇혀 죽더라.
주정꾼들로 가득 찬 술집은 언제나 비틀거리더라.
술집이 많으면 많을수록 도시는 더욱 어지러워지더라.
술 냄새를 풍기면서 비틀거리는 술집들, 팔척장신이 부러져 나가더라.
꽃을 꺾는 사내의 목 울대로 우주가 비틀거리고 별들이 곡선으로 기울어지더라.
사람들로 가득 찬 여관은 거짓 사랑의 곰팡이가 무성하더라.
여관이 많으면 많을수록 거짓 연애만 피둥피둥 쌀이 찐다.
외로운 고슴도치들이 만날 때마다 피를 흘리며 나동그라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밤 불이 들어오면, 위선으로 꽃피는 도시가 아프다.
무섭다,
무섭다,
무섭다,
해골바가지 앙상한 갈비뼈 삭정이에서 일어나는 도깨비불이 무섭다.
꽃잎을 꿰어차고 기어드는 동굴, 회칠한 무덤들이 무섭다.
두 개의 혓바닥과 네 개의 다리, 의식의 속살을 칭칭 감는 꽃뱀의 유혹이 무섭다.
2
죄인들로 가득 찬 법정은 언제나 찬물을 끼얹고 있었다.
법의 그물에 걸려든 죄인과 법의 그물에 걸리지 않은 죄인들, 죄의 살이 오른 죄들이 새끼 배어 들어온다.
하늘에서 내려보면 모두가 죄인이다.
수갑에 묶인 죄인보다도 묶이지 않은 죄인이 더 많다.
문명인들로 가득 찬 약국은 기침을 콜록이고 있었다.
약국으로 몰려든 사람들이 창백한 형광등 불빛아래서 기침을 콜록이면 콜록일수록 도시는 더욱 창백해질 뿐이다.
병든 도시는 흙의 정신이 약이다.
흙으로 늙은 약탕관 속에서 끓어오르는 한약은 산의 숨결이다.
숲의 정신, 그것은 관(冠)이 향기로운 사슴뿔의 사상으로 징 치고 피리 부는 짚신의 바람이다.
칼춤에 떨어지는 의인의 상투, 머리 풀어헤치고 쏘아보는 눈초리, 퍼런 하늘로 피 뿜는 꽃잎의 정신이다.
풀씨를 뜯어 흩뿌리며 해를 보내던 할머니의 지렁이 울음을 삼키던 안쓰러운 계절, 탄알 목걸이를 자랑처럼 흔들던 그 날, 나는 보았지.
탄피 줍다 뭉개진 손으로 머리 풀고 와서 울던 누님의 찢겨진 치맛자락과 귀먹은 땅의 파편들을!
마니산 참성단에 손을 모으던 부루(扶婁)부소(扶蘇) 부우(扶虞)의 민주주의가 뱀에 물려 앓고 있다.
한밝산에 내려온 밝달 임금, 한울님 보호하사 목숨을 이어온 배달의 회생을 부채질하며 한약을 끓이고 있다.
풀잎을 깔아뭉개는 철제의 이빨, 개기름이 흐르는 불도저의 욕망의 뿌리를 알리라.
헝클어진 머리를 질러가는 신경의 강을 알리라.
혼돈한 세포를 걸러내기 위하여 청명한 하늘을 이고 사는 나무와 풀잎과 바람, 사슴뿔을 빚어 넣어 오탁(汚濁)의 시궁창을 용해한다.
눅눅한 어둠의 기침 소리를 살균하는 창백한 도시를 신선한 약물로 쓸어 내린다.
쓰레기통에서 처박혀 죽은 구공탄 재여!
넝마주이에 업혀간 신문지여!
신경 안정을 찾아주는 대나무 껍질을 다려 먹어라!
죽피(竹皮)는 바람을 잡는다.
지랄병을 때려잡는 대나무 껍질이 물구나무로 재주를 넘는다.
약탕관 속에서 고아지는 대나무 껍질은 불안과 공포를 쓸어내고 우울증과 초조감을 몰아낸다.
미친개에게 물린 독기를 풀어내기 위하여 약탕 속에서 유영하는 한 움큼의 죽피가 시냇물의 정신으로 한 사발의 공기를 걸러내고 있다.
3
약탕이 숨쉰다.
하늘이 숨쉰다.
우주가 숨쉰다.
온갖 어지러움에 진액이 단결한다.
생명과 사랑을 얼싸안기 위하여 진액이 단결한다.
진액은 예술을 단결시키고
진액은 과학을 단결시키고
진액은 철학을 단결시키고
진액은 윤리를 단결시키고
진액은 종교를 단결시킨다.
청명한 하늘 우러러 약사발을 들면 속이 환히 트이어온다.
미친놈 머리카락도 빗겨 넘기고,
날궂이하는 눈망울도 씻어 내리고,
해장에 쓰린 속도 풀어 내린다.
도시의 오물에 불을 지른다.
잠 못잔 노름꾼의 눈을 맑히기 우l하여
썩은 지폐를 다림질한다.
밤새도록 잡질 하고 돌아온 사내새끼들의 뿌리를
수녀의 머리털로 씻어 내린다.
대낮에 알몸들이 질주하는 골 빈 머리와 붉은 팬츠, 도시의 창이 혀를 빼문다.
붉은 팬티가 히히 웃는다.
홍위병의 깃발이 히히 웃는다.
알몸끼리 비벼대는 만화경 속의 꽃뱀 허리 꼬는 소리.
종이 울던 날, 까치의 두개골이 깨어졌다.
한약이 끓어오른다.
무릎 꿇고 하늘 우러러 두 손 비는 약탕.
古紀云東方初無君長神人降干太白山檀木下國人爲君是謂檀君
신시(神市)의 아침,
옥양목 자태로 꿇어앉아 기도하는 소리―,
천리 학 울음 되어 산삼이 고아져 오른다.
심장으로 끓는 약탕관에서 의병들의 짚신발소리 고함소리 들려온다.
조상들의 뼛속에서 아우성으로 자란 삼이 고난으로 빨래한 겨레의 약탕 속에 끓고 있다.
산약과 당귀가 부등켜 안는다.
눈은 눈끼리 비벼대고, 볼은 볼끼리 비비면서 풀잎의 몸짓으로 신기를 다스린다.
산맥은 산맥끼리,
강물은 강물끼리,
식물의 정신으로 신기를 다스린다.
할머니 손때 묻은 약탕관에서 할아버지의 기침소리를 듣는다.
하늘을 뛰어넘는 바지 가랑이 사이로 울려오는 징소리, 짚신 소리 들려온다.
퍼런 하늘 속을 영기(令旗) 들고일어나 땅을 구르는 짚신발 소리, 물밀 듯이 밀려온다.
어둠을 털고 일어서는 닭울음소리같이, 끓는 피 뿌려 때묻은 평화를 닦는다.
영기,
영기,
하늘을 치오르며
녹슨 평화를 반질반질 닦는다.
영기,
영기,
황토 흙 딛고 일어나
조상들의 피묻은 비석을 닦는다.
그대의 끓어오르던 약탕관 속에서 폭포 소리를 듣는다.
그대는 하늘을 숨쉬는 독수리의 숲이다.
숲은, 녹용의 사상으로 태양을 얼싸안은 심장의 박동이다.
4
그 날,
그 피범벅 치던 그 날,
그 억센 팔의 그 피,
어린것들의 피로 물든 두 주먹이,
아아, 저 무서운 함성이,
늙은 흙에서 끓어오른다.
구기자가 끓고 있다.
하수오가 끓고 있다.
적신호에 서고, 청신호에 움직이는 건널목에서 빨강 불에 움직이는 충혈의 눈들이 침몰한다.
거대한 빌딩의 숲 사이를 어깨 없는 인형들이 물거품으로 꺼져간다.
검은 흙 속에서 하얀 약재가 끓고 있다.
창호지 위로 증발하는 안개 속에 산의 향기가 젖어있다.
느릅나무 그늘아래서 구름을 보던 사슴뿔이 들어와 녹아 내리는 숲 속의 향기.
하늘을 머리에 이고 살던 녹용이 신허냉(腎虛冷)을 치료한다.
잡담으로 가득 찬 도시여
썩어 문드러지는 니코틴이여
할 일 없는 비계덩어리여
충혈의 술집, 거짓 사랑이여
어지러운 밤거리에서
비틀거리는 도시, 흔들 도시여
도시가 흥분제를 먹었을 때,
도시가 쥐약을 먹었을 때,
전등이 켜졌다가 꺼지고
명멸하던 보석이 잠들고
기침이 심한 휴지가 죽을 때
불평이 터지자 찔리고 피흘리고
도시는 창백한 형광등 불빛 아래서 당의정과 캡슐을 털어 넣고 물을 마시고 목을 흔들면서 콜록이는 소리를 억압할 때 플라스틱 꽃들은 거짓 사랑으로 웃음을 팔고 있었다.
아아, 도처에서 형식으로 내용을 포박하는 무덤에 회칠이 벗겨지고 있었다.
요염한 입술들과 과장된 간판들과 엄살과 가식의 이마빡의 수표!
도시의 전등이 눈을 감는다.
내용 없는 껍질들이 널려 다닌다.
우는지 웃는지 알 수 없는 악어의 무표정들이 흘러간다.
악의 가죽 핸드백을 자랑하는 여인이 밀폐된 공간에서 무덤 속의 지폐와 함께 피임을 선언했다.
회칠한 무덤들로 가득 찬 콘크리트의 창백한 손이 떨린다.
랑콤 환데숀을 바르다 죽은 껍질의 손, 죽음의 그림자 흐늘흐늘 굳어있는 웃음이 무섭다지만, 손목시계는 무서움을 타지 않았다. 시계는 순간과 영원, 워드프로세서에서 볼펜으로 만년필로 붓으로 타임캡슐을 음모하고 까닭이다.
5
늦기 전에,
간이 더 나빠지기 전에,
폐와 위가,
심장과 콩팥이 더 나빠지기 전에,
약사발을 들어야 한다.
약사발을 들고 일어나야 한다.
꽃으로 솟는 비방으로 인삼도 썰어 넣고, 녹용도 썰어 넣고, 한약을 달여 마셔야 한다.
山藥 當歸 龜板 蓮子
黃茋 黃精 白求 海蔘
社沖 乾栗 阿膠 石斛
芡實 丹蔘 甘草 桂皮
紫河車 枸杞子 何首烏
栢子仁 乾地黃 熟地黃
龍眼肉 麥門冬 五味子
海松子 三七草 長生草
오랜 탄식의 약탕관 속에서
補心藥類가 다려지고
補脾藥類가 다려지고
補肝藥類가 다려지고
補肺藥類가 다려지고
補腎藥類가다려지고
온갖 어지러움의 해독과 해열이 인체 천리만리 줄달음칠 때 쯤, 의식의 세포 끝 뻗쳐 가는 나뭇가지마다 여명이 환히 트이어 오는 식물성 겨레 얼굴에 핏기 감돌고, 천진한 아마 하늘에 살면서 가슴을 열어제치고 한약을 끓여 마신다.
맑은 정신으로 인삼 녹용이 몰려온다.
숲의 사상으로 산약 당귀가 몰려오다.
약초의 소용돌이로 생피가 몰려온다.
한 방울의 약물에서 온 우주가 살아난다.
도처에 숨은 박테리아를
습격한다, 사로잡는다.
마황 갈근 계피가 달려나가고
독활 천궁 후박이 달려나간다.
원지 전호 창포가 깔려나가고
연호색 향부자가 분산한다.
물거품이 꺼지고 아우성이 침몰한다.
플라스틱 꽃이 타죽고 아나보라의 캡슐이 떠내려간다.
여자의 혓바닥에 끌려 다니던 죄의 뿌리가 절단 난다.
따먹고 죽어 자빠진 욕만은 재의 숙명이라고
홍수에 떠내려가면서 뱀이 혀를 낼름거린다.
비가 그치고, 강이 흐른다.
숲의 향기를 날리며,
달빛 쳐드는 사슴뿔의 정신으로 새벽 강물이 흐른다.
흙탕물은 침잠하고 맑은 물이 하얀 비늘을 나리며 여명을 부른다.
인체 세포 속속들이 점령해 들어가는 약탕관의 보약들이 분대전투대형으로 밀물같이 썰물같이 퍼져나간다.
콩팥의 흑색신호와
폐장의 백색신호와
심장의 적색신호와
간장의 청색신호와
위장의 황색신호와
온갖 위험신호가 눈을 감는다.
새치기를 거듭하고, 영합을 거듭하며, 빨강 신호등 앞을 건너가는 무리가 빨강 신호등에 멈춘다. 불법과 합법이 동거하던 건널목의 신호등이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아침 공복에 약사발을 들면, 맑게 깨어나는 서울의 정신이 빌딩 위에 해바라기를 심는다. 시의 등불을 켜들고 해바라기 하는 해바라기에 사랑과 생명의 진액의 영험함을 깨달은 도시가 새로운 정신으로 가다듬는다.
回文山
1
산이 잠옷을 벗는다.
산이
안개로 허릴 휘감은 산이
잠옷을 벗어 내리면서
알몸으로 일어선다.
산이
초록의 윤기 자르르한 산이
靑天으로 내달아 기지개를 켠다.
기지개를 켜는
산의 팔뚝에
퍼런 힘줄이 일어선다.
힘줄은 산맥
산맥은 근육
근육으로 굽이치듯
청산 훠얼 훨 날아가고,
靑馬 두둥실 내리신 님
산은 골짜기 소피를 본다.
산이 소피를 본다.
山이山이山이山이
근육으로 꼬여 일어서는
상상봉의 바위 덩어리
허연 속살을 에워싼
비단 안개
아침 소피 소리가
始原의 溪谷을 떨어져 내린다.
이슬이 맺히는
산의 젖꼭지
영롱한 풀잎의 젖꼭지에
꿈이 맺힌다.
산의 유방에서
어둠을 빨아먹던
바람의 골짜기.
검은 이불을 들치고
야전침대에 내려오는
흥분 덩어리가
女神의 잠옷으로 풀어져 내린다.
꽃잎이 훠얼 훠얼
하얀 속살로
애교 떠는 이빨
끝
하늘이 어스러져 내린다.
어둠이 배배 틀어져 내린다.
능금 껍질로
틀어져 내리는
천연의 물소리가
神의 자궁을 빠져나온다.
산이
산이
푸른 산이
푸른 물소리에
푸른 머리를 감아 헹군다.
어둠을 흔들어대는
푸른 물이
푸른 소리를 낸다.
밤새도록 물소리로
머리카락 헹구어내던 어둠이
세밀한 빛살에 쫓긴다.
밤의 수풀을 들치고
허옇게 일어서는
흑인의 이빨과 이빨에서
떨어지는 풀꽃,
입 큰 깜둥이가 웃는다.
이빨을 드러내는
하얀 웃음,
하얀 풀꽃을
나긋 나긋 흔들어대며
곁눈질로 지나치던 바람이
윙크를 던진다.
풋풋한 나뭇잎 사이로
칼싸움하다 부러진 빛살들이
톡톡 털고 일어서는
골짜기 위로
여신이 속살을 드러낸다.
2
대지의 배꼽 위로
목화 꽃이 피어난다.
우주의 자궁에 떨어지는
나의 젊은 햇살.
햇살을 찾아
동녘 동으로
햇살의 고향
동녘
동
으
로
붓대 속에 튀어나온
겨레의 목화 위에
마지막 산고의
구슬땀이 맺힌다.
동학민병의 짚신소리
땅을 구르는
그대 심장의 장작난로.
불의 혓바닥으로 까투리가 내린다.
고추밭
목화밭
수수밭
메밀밭
감자밭 이랑을 지나
목화로 피는 여인의 배꼽,
아름드리 타오르는 누리마다
요염한 불꽃이 태어나는
천지의 아픔을 본다.
유방이 풍부한 여인
산천이 문고리를 쥐고
혼신을 뒤튼다.
태초의 힘을 끌어 모아
빠개지는 목질에
산소가 튄다.
3
무명지 깨물어서
붉은 피를 흘려서
하늘이 뚝뚝 혈서를 쓴다.
카인이 남가고 간
피의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는
밤하늘의 메아리―.
메아리는 눈물이었고
눈물은 한숨이었고
한숨은 땅이 꺼지는
엄동의 바람이었다.
목에 힘줄이 돋아난다.
어깨와 어깨와
허리와 허리와
팔과 팔
뛰는 심장이
불꽃으로 타오른다.
청명한 하늘이
산의 이마를 짚는다.
산은 언제나 헝클어진 머리
으스스한 바람에 열이 오른다.
하늘을 머리에 이고 사는
겨레의 이마 위에
햇살이 내려와 지저귄다.
산의 겨드랑이에 자라난
풀잎이 일어나 손뼉을 친다.
손뼉치는 아이들의 손바닥엔
언제나 목화가 웃는다.
문익점의 하얀 이로
무명옷이 웃는다.
초가지붕마다
박꽃이 웃는다.
하얗게 떠오르는
겨레 웃음이
白衣의 햇살로 쏟아져 내린다.
4
주름진 겨레의 이마 위로
햇살이 날아와 꽂힌다.
잠옷을 벗는
여인의 속살로
뛰어드는 해살.
골짜기의 물소리 마시며
가슴을 헹구어내던
여인의 태양이 솟는다.
목화 핀 배꼽에서 손톱을 본다.
어린것의 손톱
두 주먹의 아우성을 본다.
구들 목의 숭늉 냄새
코리아의 굴뚝 연기
뿌연 안개
하얗게 밀려오는 만세소리.
무명 옷소매 끄트머리마다
하늘이 걸린다.
하늘에 걸리는
무명 옷소매 끝이
더 높은 하늘로 치오른다.
5
나의 아장을
너의 불도저가 밀어 뭉갠다.
오오, 불쌍한 나의 아장살이여.
내 아기가 잠든
내 아기의 무덤
내 뼈 중의 뼈
내 살 중의 살
내 피 중의 피가
반원을 이루고 있다.
자연으로 내려가는
꽃다운 무덤을
불도저가 밀어 뭉갠다.
썩은 물웅덩이 속에 아기가 묻힌다. 새알이 묻힌다. 새가 묻힌다. 숲이 묻힌다. 세상을 통째로 삼키려는 유물의 깡통이 묻힌다. 라면 상자와 통조림 껍질과 구공탄 재와 담배꽁초와 플라스틱 꽃과 아기의 장난감 권총과 인형이 묻힌다. 아아, 나의 진액, 나의 사랑, 나의 모든 노른자가 침몰한다.
6
열차 바퀴에 물려온 바지저고리가 간이역에서 풀려났다.
오오, 바지저고리
포승에 묶여가던
삼천만의 바지저고리
삼천리의 바지저고리
삼일절의 바지저고리
삼십삼인 바지저고리
찢겨진 바지저고리를 붙들고
여인이 울고 있다.
반만년의 바지저고리를 붙들고
여인이 울고 있다.
열차바퀴에 물린 헝겊을 끌어당기며
자기 가슴 탕탕 쳤다가
흩어진 살점을 고무신에 담으며
侍天主를 게워낸다.
고난은 세탁비누와 같은 것
치대면 치댈수록
깨끗해지는 것
할퀸 상처를 아파하거나
슬퍼하지 말라.
고난을 빨래해 온
열차는 가고
노을이 타는 산자락에서
춘향이가 울고 있다.
슬픈 새는
하늘을 올려보고
땅으로 눈을 감는다.
풀꽃을 뜯으며
뼈 속으로 울려오는
피울음을 게워내고 있었다.
7
회문산 골짜기에
한 자루의 따발총이
나자빠져 있었다.
부러져나간 지게의
목다리와 동무하여
녹 슨 총이
죽은 듯이 나자빠져 있었다.
개머리는 썩어 있었다.
시베리아의 바람이
데리고 온
소비에트의 쇠붙이가
국방색 전투복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골짜기가 흐느끼고 있었다.
산이
산이
섬진강 상류에 내려와
산을 업은 산이 울고 있었다.
산이
산이
산이 산을 껴안은 채 울고 있었다.
너는
자신의 품속에 잠든
온갖 상처를 어루만지며
달빛에 눈물을 헹구어야 했다.
너는
자신의 품속에 잠든 목숨들의
온갖 상처를 어루만지며
달빛에 눈물을 헹구어야 했다.
너는
깊은 밤의 광맥을 쥐고
새끼들을 쓰다듬는
어미의 심장을 지녀야 했다.
심정의 뿌리로 만나기 위하여
뿌리는 뿌리끼리
뿌리를 눈물에 헹구어야 했다.
뼈다귀는 뼈다귀끼리
뼈다귀의 뿌리로 만나서
조상들의 휘파람을 흉내내야 했다.
8
몇 개의 해골바가지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것은 모든 뼈다귀의 중심이 되어 있었다.
그것은,
어두운 골짜기를 파헤치고
허연 이빨을 드러내는
빛의 순교를 말하고 있었다.
끝없는 어둠의 광맥을 타고
흑암을 찍어내는 곡괭이의
금속성 빛살 끝에
꿈틀거리고 있었다.
산이 포복을 계속하고 있었다.
몸살난 뼈가 꿈틀대는
골짜기에 서면
어디선가 들려오는
빨치산의 기침소리
식기 소리가 부서진다.
동무, 동무, 동무를 부르던 바람, 구렁이의 붉은 혓바닥이 부러져나가고, 말라버린 샘도랑에 침을 뱉고 껄축 껄축 사라지는 따꿍총, 방한모, 방한화, 탄대, 허리뼈가 모조리 부러져나간다.
9
곰 같은 바위에 붙들려죽은
썩은 물웅덩이 속에
수통과 대검이 누워있었다.
녹슨 쇠사슬에
마개는 붙들려 죽었다.
회색 빛깔의 쇠가
잿빛 돌에 휘어져 있었다.
부러진 대검 두 쪽이
아득한 시간에 누워있었다.
썩은 물 속에 기어오른
곤충의 더듬이 끝에
걸려든 골짜기의 피멍든 바람.
바람이 불고 있었다.
어린것을 잃은 바람은
산의 머리카락을
뒤흔들고 있었다.
퍼어런 하늘에
시린 모가지를 느리고 있었다.
산노을이 내리고 있었다.
하얀 머리 풀어 헹구는
갈대를 부여잡고
피울음을 게워내고 있었다.
바람이 실어 나르는
눈물 속의 심장이
시리게 떨려오고 있었다.
골짜기로 파고드는
도솔천의 물소리
바람 소리에
밤마다 피리를 불어야 했다.
메마른 잡초들이
화상 입은 나뭇가지를 붙들고
빨치산의 휘파람을 흉내내고 있었다.
10
숨가쁜 글씨가
바위의 심장에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마지막 숨결로
빛과 어둠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백골의 야광(夜光)이 기어오르고 있었다.
순간의 필름 속에
진실이 새겨진
여기, 돌의 주변으로
달려온 바람이
너의 입을 열게 할 것이다.
밤이 가면
어둠을 들쳐업고
도주하는 바람에
불타는 초가(草家)
휘파람 불며 가는
고령(孤靈)이여, 일어나라.
회문산 골짜기에
안개가 걷힌다.
잠옷을 벗는
산의 무릎에
한 나절을 앉아있으면
입 안 가득 해골이 보인다.
낙엽의 잔들이 햇살을 채운다.
눈물로 햇살을 받아 마시는
골짜기의 풀잎들은
산노을을 환장하는
버릇이 생겼다.
잉태한 배를 뒤틀며
바위가 태어나던 날의
진한 아픔을 받아 마시는
아무도 속모를 버릇이 생겼다.
11
이끼 퍼어런 물 속에
하늘이 고여있었다.
해맑은 하늘에
대검이 박혀있었다.
흐물 흐물 무너지는
구름 속의 칼날은
녹이 슬어있었다.
혈육을 자르던 칼날이
하늘의 심장을 찌른 채
물 속에 고꾸라져 있었다.
청청 하늘에
녹물이 번지고 있었다.
눈시울마다 회한(悔恨)이 여물고
솔잎에 긁힌 바람 소리에
돌아앉은 산의 겨드랑에서
산짐승도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돌아보지 말자던
어머니의 눈물
조국은 땅 속에
밑거름이 되는 것을.
다시는 돌아보지 말자던
깊어진 상처를
어루만지며 씻어 내리는 물소리
병든 귀를 씻어 내리고
다시는 돌아보지 말자던
회문산 골짜기에
귀를 대어보라.
빨치산의 발소리 가까워오는
검은 땅에 귀를 대어보라.
거대한 발소리 가까워온다. 산의 발소리 뒤에서 울부짖는 바람 저 건너 찢겨진 헝겊이 나부낀다. 회문산 밤바람이 빨치산의 목소리를 물어 나른다. 목소리는 동강난 바람의 단도, 피묻은 탄대. 아아, 차라리 부르지 말자던, 빨치산은 이름이 없는 것을. 양친도 가족도 조국도 없는 것을. 겨레도 없는, 아아, 빨치산은 눈물이 있을 수 없는 것을. 부르지 말자던, 차라리 부르지를 말자던, 어머니의 가슴팍에 대못을 쾅쾅 때려 박고 돌아서는 시베리아의 매서운 바람을, 다시는 부르지 말자던, 서산마루에 머리 숙인 잔월(殘月)을 밟으며 산길을 오르던 포승줄 매운 바람을 다시는 부르지를 말자던…….
12
기우는 잔월(殘月)이 석벽(石壁)에 걸린다.
사립을 빠져나온 국방색 바람이
골짜기 이리저리 으스스 흩어진다.
삽살개가 석경(石鏡)을 짖는다.
노송(노송)에 걸린 치맛자락을
시퍼런 달빛을 컹컹 짖어댄다.
산지기 집 개나리 울타리를 뚫고 나와
콩밭 밀밭 수수밭을
야광으로 나와서 짖어댄다.
빨치산에 놀란 개가 짖어댄다.
빨치산에 미친개가 짖어댄다.
핫바지 바람에 끌려나와
개처럼 질질 끌려가다가
빨치산의 이름으로 죽어 자빠진
죽은 아비 옷자락을 짖어댄다.
달빛 속의 눈으로 쌍칼을 갈고
솔바람 소리에 귀를 세우고
빨치산이 숨어든 굴을 향하여
왕대 숲에 으스스 짖어댄다.
13
화문산 암굴(岩窟) 속엔
숯더미가 젖어 있었다.
식기들은 그을어 있었다.
허연 이를 앙다문
구멍 뚫린 해골바가지가
텅 빈 공간을 쏘아보고 있었다.
너는,
어머니의 가슴에 못 박은 손으로
자신의 심장을 도려내야 했다.
찢겨진 인정에 꺽쇠를 지르고
왕못을 쾅쾅 틀어박아야 했다.
몇 개의 파편이 석벽 아래 떨어져 있었다.
그것은 날카로운 최후를 말하고 있었다.
붉은 혓바닥에 날아온 파편이
너의 어지러운 시간을
말하고 있었다.
너는,
어머니의 부르는 소리에
최후의 안전핀을 뽑아야 했다.
수류탄의 핀을 뽑아야 했던
손가락 뼈마디여, 떠나가라.
터진 피 뒤범벅 치다
파편으로 굳어버린
여기,
햇살의 노래가
풀꽃의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14
햇살이 내려오는 한낮.
적막의 석굴에는
빨치산의 뼈가 널려있었다.
하늘도 부끄러워
바로 보지 못하는
뼈다귀 사이
모로 누운
이 빠진 대검(帶劍)이
찢겨진 인민군 복장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개풀어진 햇살이
거들떠보는
굴의 둘레
죽은 여인의 머리카락을
천연스런 풀꽃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이름 모를 뼈와
이름 모를 총과
이름 모를 이와
이름 모를 새소리와
이름 모를 풀꽃 위로
산그늘이 내리고 있었다.
산그늘 속에서
풀꽃들이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붉은 완장의
외팔이 도주할 때
동행하던 바람을 부여잡고
행군종대로 쓰러지다가
눈 비비며 일어서던 풀꽃이
하얀 머리를 뒤흔들고 있었다.
산의 겨드랑이에서
미쳐 날뛰던 빨치산의 겨드랑이에서
손풍금소리 울려오는
솔밭 속 까투리같이
바람을 잡아먹는
휘파람 소리
아아, 저 휘파람소리…
외팔이 지나간 숲길에는
긁어먹다 버리고 간
누른 밥 냄새와
겨드랑이 냄새와
타다 남은 연기 냄새가 있었다.
15
강냉이가 누런 이를 악물고 있다.
단도를 든 손이 떨리고 있다.
길 잘 못 든 빨치산들이
불길 저 편에 찢겨지는
어미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있다.
나오너라!
손들고 나오너라!
부러진 좌익의 팔을 버리고
성한 팔만 들고 오라고
애타게 가슴을 물어뜯던
피울음 소리를 외면해야 했다.
돌아오라!
어서 돌아오라!
하얗게 울부짖는 머리카락이
갈대밭 속으로 파묻힌 때 쯤
하늘도 퍼렇게 멍이 들어있었다.
16
붉은 완장이 피를 물고 있었다.
지게 작대기로 후려치는
프롤레타리아의 깃발
찢겨진 헝겊, 그것은
계급의 덫을 말하고 있었다.
주인의 과일을 따먹은
붉은 완장
머슴의 백골이
누런 이빨을 악물고
물 속에 고꾸라져 있었다.
산삼 썩어 내린 물소리가
뼈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대검과 탄대와 수통과 모자가
물 속에 잠들어 있었다.
흥건한 잠 속
꿈을 도사린
겨레붙이의
적막의 골짜기를
바람이 뒤설레고 있었다.
17
어머니의 상처를 짓이겨
잉태한 손으로
수류탄을 터뜨려야 했던
그대들,
어지러운 이마 위에
풀꽃 하늘이 피어있었다.
징치고
피리 불고
푸른 산하를 짓밟으며
몰려오던 중공군들에게
윤간 당해 죽은 딸을 업고
하늘 보던 어머니,
피난 보따리 챙겨들고
남으로 내려온 어머니!
조국이 짜깁기한 기폭을 나부낀다. 휘날리는 깃발 저쪽, 아아! 조국의 하늘에 상처를 낸 철조망 가에서 노려보는 카인의 눈깔, 부릅뜬 포구로 눈 먼 유령이 드나들고 있었다. 녹슨 철조망을 삼킨 하늘이 선지피를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가물가물 떨어지는 초가고향이 산노을에 갈증을 느낄 때쯤 왈칵 달려드는 사립이 반쯤 기울어져 있었다. 뜸북새 뜸북뜸북 다가오던 날, 퍼런 하늘이 눈을 들고 일어나 부러진 팔에 눈가린 좌익의 모가지가 서러워 꺼익꺼익 울고 있었다. 어지러운 세상사 뜬구름이라고 봉선화 회한으로 타오르는 짐승스런 가슴을 열고 키득키득 민들레를 불어 날리며, 텅 빈 공간을 쐐기질하고 있었다.
18
검은 땅 속의
지렁이 울음 같이
오랜 울음이 기어 나오는
여기,
눈물의 골짜기에
손풍금 소리로 우는 게 있다.
어머니의 찢겨지는 아우성소리
귀마저 먹어버린 여기,
아우성의 골짜기에
발자국 소리로 우는 게 있다.
도주하면서 뒤돌아 보는 아아, 저 떨리는 손풍금 소리, 떨리는 손끝에 피어나는 꿀 먹은 자유. 자유가 가난할 때에도 구걸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상을 한 뀀지에 꿰지만 흩어져버리고 마는 뜬구름잡기다. 사랑으로 꽃을 기른 신의 농부다. 새가 조개껍질에 고인 물을 마신다. 새가 하늘을 마시며 치솟아 오른다. 비상하는 새를 따라 풀잎이 하늘을 숨쉰다. 하늘이 내려와 팔베개를 베고 누우면 눈부신 햇살은 왕관이 된다. 면사포를 내려쓴 구름송이 위로 빛살이 내리면, 빛살은 빛살끼리 만선을 궁리하며 그물을 짠다.
쇠사슬에 묶인 손으로
펼쳐든 자유,
쫓기는 이들의 손풍금이 운다.
가슴을 오므렸다 펴는 손풍금으로
하늘 한아름 끌어안고
하얗게 펼쳐든 손풍금으로
심장을 쥐어짠다, 쥐어짠다.
밤하늘 한아름 펼쳐들고
은하수를 쥐어짠다, 쥐어짠다.
19
회문산 골짜기에
허연 백골이 보이나니
밤 물소리에 귀를 씻고
반짝이는 별들의 이야기를 들으라.
그들의 끝없는 이야기에는
언제나 사랑이 고여 흐른다.
반짝이는 사랑의 눈물 속에는
언제나 샘이 솟는 까닭에
온갖 어지러움을 헹구어내는
별들의 이야기엔
조국의 눈들이 반짝이고 있다.
수풀 속의 잠샛별 같이
잠이 없는 겨레의
이야기 속에는
언제나 아침 비비새 소리가
떠서 흐른다.
자다가도 문득, 어머니를 더듬는
꿈속의 젖가슴에
안개가 건너오는
불멸의 노래가
물레소리로 다가온다.
눈 들어, 눈을 들어
눈에 익은 마을을 찾아
남쪽나라 십자성에 목에 메이는
아아, 나무의 합창이
일제히 피부를 뚫고 나온다.
옛 노래 숨겨둔 나무들이
일제히 일어나 팔을 벌린다.
회문산 골짜기에서
혼곤한 잠을 털고 일어나
하늘로 머리 두른 나무들이
일제히 팔을 들어올린다.
꽃잎은 꽃잎끼리
풀잎은 풀잎끼리
사랑으로 어깨 짜고
뿌리에서 만나자고
일제히 하늘로 팔을 들어올린다.
思母曲
어무이!
와, 우짤라꼬 여기꺼정 나오셨어예! 요샌 가실(가을)도 짚을대로 짚어져서 날씨가 몹시도 쌀쌀하지 안능기요? 차암말이제, 아적도 이 철움는 가시나는 어무이만 보먼 자꼬만 눈물이 나니더!
어무이!
날씨도 찬데, 감기 듭니데이! 얼른 들어가시이소 예? 어무이가 자꼬만 그러이까네, 동네 며느리들도 조롷게들 따라나오지 않습니꺼? 저도 예, 어무이를 떠나라이까네, 차암말로 발이 떨어지지 않지만, 내사 우이합니꺼? 인자는 시집을 갔으니……어무이 곁을 떠나지 않을 수도 없데이! 차암말이제 제 마음도 어무이 속 만큼이나 짜안시러븐기 말이 제대로 안나와 예!
어무이!
요, 정든 산천과 어무이를 두고시나 떠날라이까네, 참말이제 발이 안 떨어집니더! 앞엘 보면 정든 시냇가 빨래터가 있고, 뒤를 돌아보아도 정든 산이요, 정든 교회와 식구들……. 어무이는 나 어릴적부터 나랑 그 코빼기 고무신이 죄다 달앗뻐리도록 저 뒷산을 열심히도 올라댕겼지러! 저 미영(목화)밭에서 따낸 소캐(솜)로는 툭툭헌 이불을 세 채나 해주셨지러!
어무이!
지금도 조롷게 번쩍번쩍 빛나는 앞 냇가에서는 어릴적부터 빨래를 하러 다녔지러!산을 보나 물을 보나 들을 보나 구름을 보나 모두가 어무이 얼굴맹키로 자꼬만 보고저퍼질 때는 우이합니꺼!
어무이!
어무이는 내가 약혼을 하고 내려왔을 때는 뛸 듯이 기뻐하셨지예!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었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움다꼬 하시면서 절굿대춤을 덩실덩실 추셨잖능기요! 어무이는 “요 동네 사람들아! 우리 집에 경사났데이!” 하시면서 잔치를 베푸셨지예? 그런데 말임더. 막상 어무이 곁을 떠날라꼬 하이까네, 와 요롷게도 가심이 제리합니꺼? 와, 이라는지 내사 도통 모르갔데이!
어무이!
차암말이제, 나도 어무이 깊은 가슴 속 심정만큼이나 사무치면서도 독헌 맘을 딱 묵고시나 핑핑 떠나갈라꼬 혀도 차암말이제 맘 묵은 대로 안됩니데이! 어무이는 아부지를 일찍 잃었지러! 그 몹쓸 난리에 놓쳤뻐리고시나, 세상을 혼자서 외롭게 사셨지예! 하나님만 믿고시나, 요 철움는 가시나만 보믄서 서럽게 사셨지 않았능기요? 그러이까네……, 내가 요 세상에 나올적에는 아부지가 안 계셨지러. 아부지 움는 세상을 서럽게 서럽게만 사셨지예. 그러면서도 어무이는 아주까리 등잔불이 접시 위에서 가물가물 침침하여질 때까지 이야기를 들려주시다가 눈물을 찔끔 하시면서 타령 같은 소리를 하셨지러.
그럴 적마다 어무이는 나를 어무이 무릎 위에 앉히고시나 기도를 하셨지예? 아부지한테 받은 선물이라고는 요 가시나와 성경책뿐이라꼬……. 하나님께서 특별히 불쌍히 여겨주셔서 복을 받게 해 주시라고 자꾸만 기도를 하시고는 삼단같이 치렁치렁한 나의 머리를 곱게 곱게 땋아주시던 울옴매! 어무이는 와 울기만 하능기요!
아아, 그처럼 철웁는 나를 금이야 옥이야 곱게 곱게 길러주시던 울옴매! 어무이는 와 눈물이 많응기요. 어무이는 차암말이제 위대했지러!
책보를 허리에 짬매고시나 학교로 가는 길에 고양이한테 놀란 뒤로는 여러 해를 하루 같이 간호했지러!
아부지는 유명하신 학자라고 자랑도 곧잘 하시면서, 너도 책을 많이 읽어야 시집을 잘 갈 게 아이가? 하시며, 오동나무 잎사귀마다 다이 다 기울 때까지 책을 지켜보시다가는 내가 조을고 있으면 머리를 쥐어박으시고는 너무도 안쓰러워서 눈물을 감추시던 울엄매! 어무이가 아니었등교!
어무이는예, 하느님을 잘 믿어야만 착한 사람이 된다고, 자꾸자꾸만 말씀하시면서, 밤이면 밤마다 성경책을 펴놓으시고는 나랑 같이 번갈아 가면서 읽던 날들이 눈물겨워예!
어무이는 언제가 뒷동산의 솔잎을 따서 송편을 빚어 만드실 적에도 침만 삼키는 나에게 송편을 입에 넣어주시면서, 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떡과 포도주는 무엇을 상징하는 줄 알제? 하시고는 고개를 끄덕이는 나에게, 니도 송편을 곱게 곱게 만들어야 고운 신랑 만난데이! 하시면서 내 손을 꼬옥 잡은 채 자꾸만 울고 계셨지예! 치마폭에 얼굴을 파묻으면서 서럽게 서럽게 우셨지예!
언젠가 어무이는 내가 뒤안에서 머리를 깜으려 할 때, 아직도 연기가 풀풀 나는 부지깽이로 종아리를 사정없이 때리시면서, 이 오졸없는 가시나야! 니 우짤라꼬 밤에 머릴 깜노! 밤에 머릴 깜으면 곰보 신랑 만난데이! 하시던 울엄매! 나도 그 때는 참말이제 겁이 덜컥 났지러!
어무이! 나도 그 후로는 제발 곰보 신랑 안 만날라고 어무이가 하락하는 대로 송편도 곱게 곱게 빚어 만들고, 밤에는 머리를 감지 않았지예!
약혼을 하고시나 함께 내려온 머시마가 어무이한테 인사를 하고 간 뒤에도 어무이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시나 동네 사람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베푸셨지예! 그렇게 절굿대 춤을 추며 좋아라 하지 않았능기요?
고롷게도 마냥 싱글벙글 웃으시고, 신명나게 춤도 추시면서, 자꾸만 좋아라고 하시던 어무이가 와 워째서 고롷게 서럽게 우십니껴!
예? 머시라꼬예? 지게 딸을 낳아서 길러 갖고시나 시집을 보내보면 알게 된다꼬예? 고롷게도 강하시던 울엄매! 고롷게도 매정시럽던 어무이가 와 서럽게 우십니꺼?
하느님 뜻대로 살아야 헌다꼬, 우리들을 고아원에 맡기고시나 밤새도록 기도하시덩 어무이! 어무이는 우리들이 계시 받은 대로 개척전도를 가락카이까네 손을 붙들고 우셨지러!
내 곧 오꼬마!
내 곧 오꼬마!
손을 바르르 떠시면서 속으로 우시던 어무이! 돌아서면서 눈물을 감추시던 어무이가 몇 년만에 오셨능교! 어무이는 참말이제 위대했지러!
철없는 동네 가시나들은 내가 갯땅으로 시집을 간다고 수군거렸지만 말입니더……. 나는 그런 소리 듣지 않고시나 어무이 생각만 했심더! 언젠가 몹시도 무더웠던 여름에 개척 전도를 나갔지러!
무주구천동이라는 골짜기로 나갔지 않았습니꺼? 나무와 나무들이 너무 너무 많이도 들어차서 하늘만 빼꼼허게 보이던 그 구천동에서 말입니더! 그 때는 차암말이제 어무이가 보고저퍼서 못견뎠심더! 서울에서 학생들이 내려와 갔고시나 정상두 사투리로 허는 연극을 봄서 월매나 울었는지 모릅니더! 어무이가 보고저퍼서, 어무이가 보고저퍼서, 자꾸만 자꾸만 울었심더!
여름 캠프라고 하던가, 그 머시라고 하는 마지막 날, 나는 어무이가 보고저퍼서 울다가 차암말로 어무이를 볼라꼬 겁도 움씨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어무이한테 가지 않았십니꺼? 그때 어무이는 차암말이제 너무나도 매정시러벗어예!
그 날, 저녁을 짓고 계시던 어무이는 불이 꺼지면서 연기만 풀풀 나는 부지깽이로 나를 때릴라고 때릴라고 하시다가도 때리지를 못하시고는, 죄움는 소두방 뚜껑만 자꾸 자꾸 톡톡 톡톡 두들기면서 요 오졸없는 가시나야, 니가 우짤라꼬 에밀 찾아왔노! 천정을 저버리고 인정에 이끌려 돌아올 게 뭐꼬! 하시면서 석봉 선생 얘기를 들려주었지예! 어무이는 꼭 석봉 선생 어무이맹키로 고롷게도 바느질 뜸이 곱고, 송편도 곱게 곱게 만드셨는데……. 요제는 벌써 요롷게 손이 할마씨 손맹키로 꺼실꺼실허네요.
어무이! 요, 꺼실꺼실한 어무이 손을 놓고시나 소롱골 고개를 넘어갈락카이까네 마음이 자꾸만 짜안시러버예! 어무이, 뭐시오? 요제꺼정은 어무이가 좋아도 소롱골 고개만 넘어가면 어무이는 싹 잊었뻐리고 신랑배끼 더 좋아헐 사람이 움따꼬예? 그게 천지간에 이치이고 원리이니 워쩌는 수가 움따꼬예? 고롷지만 하느님을 잊었뻐리고 살면 벌받는다고예?
소롱골 고개를 넘어가면서부터는 하느님은 먼첨 사랑하고 신랑과 식구들을 사랑하고 나서 어무이를 생각하라꼬예?
어무이! 부디 안녕히 계시이소! 이러시면 감기 걸립니데이! 보꼬져라! 보꼬져라! 울엄매 보꼬져라! 어무이가 보고저퍼 울음 울 때는, 만리장성 편지 엮어 올리겠지러! 어무이가 그리버 그리버, 첫새벽 성지에서 기도하는 어무이가 그리우면 소롱골 하늘 올려보지러! 푸른 하늘에 어무이 얼굴 그려보며 건강을 축수 축수 천만번 빌겠지러! 이 지구가 돌기를 멈출 때꺼정 어무이 무병장수를 빌겠지러! 축수 축수 빌겠지러!
장작난로(長斫煖爐)
1.얼굴
내 가슴속에는
장작난로가 타고 있네
엄동(嚴冬)을 타작(打作)하는 장작난로가
가슴 활활 타고 있네.
장작불처럼 정겨운
그 얼굴이 보이네
그 모습 그 불길이
나를 활활 태우네.
환장한 노을 같이 나를 활활 태우네
그 얼굴의 햇살이 내 가슴에 내리네
빛을 받는 가슴에 불티가 톡톡 튀네
가슴이 튀네
장작이 튀네
경쾌한 불빛으로 말씀이 튀네.
말씀이 나를 사르는 소리,
말씀이 나를 불지르는 소리,
지글지글 피끓는 설측음(舌側音)이 들리네
송진(松津)이 지글지글 산소(酸素)를 깨우네.
주전자의 물방울이 창으로 몰리네
하늘을 사모하는 창으로 몰리네
사모하는 눈빛이 솔바람을 부르네
청솔가지 휘어 도는 솔바람을 부르네.
솔바람 춤추는 삼각 지붕이 보이네
간이역이 섰는 꿈속의 마을에는
교회의 장작난로 나를 부르네
잉잉대는 꿀벌 소리 꿈속에도 들리네.
한겨울 꿈꾸는 땅속의 꽃씨들,
봄날의 님들을 사모하네
어머니가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오시듯,
언제나 하늘을 머리에 이고 사는
교회는 꿀벌들의 자운영 밭이라네.
가슴을 열면 천왕봉이 보이고
해맞이 달맞이 오르는 식구들
나무들도 일어나 만세를 부르네
이중창 삼중창 넘나드는 바람
아름드리 겨울나무 타오르는 숲속
삼림(森林)은 사춘(思春)의 물을 끌어올리네.
알 낳고 홰치는 닭울음 같이
화들짝 일어나는 장작불 소리에
눈은 철철 녹아 내리고
얼음 동동 떠내려가네.
견고한 얼음 풀어져 내리고
물오리 화들짝 솟아오르네
하늘 둥둥
산 첩첩(疊疊),
만세를 부르며 임립(林立)한 나무들
가지마다 속잎을 여는 소리
꿈이 많은 꽃씨들 눈트는 소리
불 먹음은 산골이 수런거리네.
수런수런 빛을 받는 풀잎 위로
그 얼굴 오롯이 떠오르네
해처럼 달처럼 떠오르네
별들이 반짝이는 내 가슴속에는
식구들의 눈들이 속삭이네.
해와 달을 돌며 돌며
장작불을 태우네
내 가슴속에 장작불을 지피는
그 얼굴의 햇살을 보기만 해도
나는 언제나 걱정이 없네.
피로를 모르는 눈과
꺾일 줄 모르는 코와
두려움을 모르는 귀와
휴식을 모르는 입의 주인 되시는
그 모습만 보면 걱정이 없네.
내 가슴에 타는 불
장작난로,
그 얼굴만 보면 걱정이 없네.
2. 눈(眼)
내 가슴속에는 청노루가 우네
하늘이 그리워 청노루가 우네
산불로 치달리며 울음 우는
청노루 눈망울에 하늘이 고이네
하늘을 맴도는 흰구름이 떠도네.
흰구름 우러르는 청노루 눈에는
머언산 바라보는 그리움이 고이네
물기 서린 그리움이 가슴 절절 내리네
퍼어런 호수에 목을 늘이고
절절히 사무치는 天情에 울음 울면
하늘 가운데 눈이 보이네.
호수를 닮은 눈이 보이네
불꽃같은 눈이네
칼날 같은 눈이네
바람을 재우시는 눈이네
천하를 호령하시는 눈이네.
눈동자 속의 화염검이 보이네
밤하늘 동자에 화염검이 번쩍이던
눈에는 꽃이 피네 꽃이 피네
수많은 별떨기 꽃이 피네.
눈 속에 차있는 자녀들 눈에도
꽃 피네, 꽃이 피네
웃음꽃이 피어나네
웃음꽃 속으로 말씀이 흐르네.
폭포로 쏟아지는 말씀이 흐르네
말씀이 솟구치는 피라미가 번득이네
비늘이 번득이네, 말씀이 번득이네
밤꽃 향기 가득한 동산에
순애의 말씀이 흐르네
가슴에서 가슴으로 절절히 흐르네.
말씀은 꿀벌을 부르고
별들은 청밀(淸蜜)을 따내네
사랑의 꽃밭이 어울어지네
꽃밭에서 눈을 들면
흙으로 돌아가기 전에 흙에 입맞출
상사리 노간주나무가 보이네.
상사리 숲길에 햇살이 퍼지네
시오리 저쪽 바닷바람이
강냉이 수염을 흔들어대네
하늘은 청청
바람은 낭낭
햇살은 내 가슴 계곡을 비취네.
탄산동화작용을 일으키는 가슴속에는
천체(天體)가 한데 어울려 돌아가네
꿀별 떼같이 어울려 돌아가네
물새 떼같이 어울려 돌아가네.
별들은 밤새도록 피아노를 두드리며
해님 오시기를 기다리네
별들이 속삭이는 이야기들
말씀은 언제나 첫사랑 샘물이네.
생수가 끝없이 솟아오르듯
말씀의 샘물은 끝이 없네
한여름 샘도랑 생수 마시듯
생수 솟는 그 눈을 바라보면
이 세상 어둠은 사라지고
나는 언제나 걱정이 없네
그 눈만 보면 걱정이 없네.
3. 귀(耳)
내 가슴속에는 뜸부기가 우네
자운영 울인 물 남실남실
모포기 물어뜯으며 뜸부기 우네
뜸부기 울며울며 하늘을 보네
빨간 벼슬 세우고 하늘을 보네.
하늘을 우러르던 날 밤 꿈에는
고향이 그리워 뜸부기 우네
뜸부기 소리 울려오는
하늘은 별떨기 자운영이 한창이네.
노스탤지어의 꽃잎을 물어오는
꿀벌들의 잉잉소리 한차이네
벌떼들의 합창이 한창이네
말씀의 물을 마시네
사랑의 물을 마시네
온종일 생수 솟는 샘가에서
말씀은 봄빛으로 미나리를 씻겨주네.
내 가슴 샘도랑에 시심이 솟구치네
춤추는 생수를 돌담이 속삭이네
봄빛을 타고 내려오는
선녀 옷깃 스치는 소리
귓가에 아스라이 들려오네
내 가슴 꽃가지에 선녀들이 내리네
꽃잎을 한아름씩 베개 속을 채우네.
우리 님의 베개 속을 꽃잎으로 채우네
화사한 꽃잎의 베개로 하여
우리 님의 꿈자리가 찬란히 꽃피네
지상의 꽃꿈이 천상으로 열릴 때
내 가슴속에는 발소리 들리네.
족제비 쫓던 발소리 들리네
옷깃이 달밤을 스치는 소리
하늘을 휘감아 붓글씨 쓰는 소리.
노을지는 강변에 기도소리 들리네.
석탄차 끄는 수레 소리
명지바지 저고리에 불은 피 돋는 소리
생지옥 파넘기며 비료가마 묶는 소리
꿈결같이 아스라이 들려오네.
불구름을 등에 업고
용매도(龍媒島)로 가는
물길 뻘밭 시오릿길
파도 소리 밀려오네
내 가슴은 장작난로
시심으로 활활 타오르네.
사막을 거쳐오는 뜨거운 바람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나는 언제나 걱정이 없네.
훈훈한 봄바람,
그 말씀을 들으면
내 가슴 줄기에 물이 오르고
느릅나무 속잎이 피어오르네.
4. 코(鼻)
내 가슴속에는
풀냄새가 피어오르네
풀타는 냄새가 가슴을 적시네
한여름 별밤을 모깃불이 타오르네
모깃불 풀냄새가 싱그러이 풍기어오네.
뿌연 연기 실날대며
깻대 내음이 풍기어 오네
마당 가득히 하늘이 내려오네
둥근 멍석 위로 은하수가 출렁이네.
잠이 없는 할머니 기도 소리는
물레소리 데리고 저만치 오시네
할머니 손그림자 벽으로 날아다니고
잠에서 깨어나면 뻐꾸기가 울데.
뻐꾸기 울어싸던 산협(山峽)에는
취나물 냄새가 풍겨나네
가파른 보릿고개 언덕이 보이네
풋보리 비벼먹던 소녀가 보이네.
산그늘 내리는 산허리
할머니 등에서 개풀어진
어린 것 입에서 취나물 냄새가 나네
쇠자라기 냄새가 풍겨오네.
뜬구름 같은 세월 따라
목화 따던 할매는 저승엘 가고
풋다래 냄새를 풍기던 소녀는
順字 仁字 아기 어머니 되었네.
흙으로 빚은 물동이 하늘을 머금고 살 듯
청청 하늘에 맹물만 마시는
선비 가문의 송죽 같은 절개가
태백산 줄기로 구풀구풀 내려오네.
통조림 깡통에서 보리쌀이 끓고 있네
Made in U.S.A 깡통에서
조선쌀이 끓고 있네
국방색 물 바랜 바지저고리가
범냇골 하늘에 구름으로 떠있네.
5. 입(舌)
내 가슴속에는
말씀으로 불사르는 입이 있네
입의 막대기는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리네.
말씀으로 충만한 장작난로
불 먹음은 볼마다 꽃이 피는
능금의 나라에 불꽃이 날리네
아름드리 겨울을 활활 타오르는
청춘의 꿈을 실은 황금마치에
봄의 입김이 실려오네.
눈을 들면 바라보이는 상사리 저쪽
해풍이 봄바람 데리고 오네
달래 냉이 꽃다지 눈 비비며 일어나네
만물이 덩실덩실 춤추며 일어나네.
얼었던 갈물이 풀려 흐르고
뿌리는 잎사귀를 설계하네
말씀으로 불타는 장작난로는
가슴 활활 엄동(嚴冬)을 태우네.
봄을 부르는 나뭇가지마다
햇살로 녹말을 장만하네
망월(望月)에 쥐불놓은 언덕을 밟으시며
봄바람 거느리고 님께서 오시네.
물푸레나무 사이사이를
아는 듯 모르는 듯 걸어오시네
헝클어진 역사의 넝쿨을 풀으시며
아는 듯 모르는 듯 봄으로 오시네.
예감의 봄바람 날리시며
그 모습 그대로 임께서 오시네
푸른산 산허리 아침 안개 헤치시며
그 얼굴 그대로 초연히 오시네.
천정(天情)을 활활 태우시며
말씀으로 어둠을 불사르며 오시네
아아, 나는 장작난로
감관(感官)의 창을 열어제치고
말씀으로 활활 타오르네.
黃松文의 詩世界
애국과 영생의 진리
金 南 石(시인․문학평론가)
시가 한 인간정신의 진수(眞髓)요, 그 생애의 영원한 표시이며, 그 의식의 근본적인 반영이라면, 시인이 주장하는 바 그 주제는 바로 그 작자의 유일한 철학적, 인생관적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에 黃松文 詩人인 엮어낸 이 長詩들은 한결같이 우리 민족의 역사관을 또렷이 지적해 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의 장시들은 모두가 세기적(世紀的)인 현상을 추출하여 현재의 시점에서 그 의의(意義) 및 가치를 탐색함으로써 우리의 시가 잉태할 사적(史的) 계기(契機)를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진다.
시가 한 인간 영혼의 절규가 될 때 그 작품은 가장 상위를 차지하게 된다. 그래서 시가 바로 되면, 그것은 곧 시인의 전인적인 면을 여실히 전해 주는 가장 중요한 정신분석의 매개작용이 되어지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았을 때 그의 시들은 귀중한 사적인 입장에서 높이 평가되어지는 것이다. 역작(力作)인 「메시아의 손」은 바로 정확한 민족사관의 추출로서 중첩되어 온 외침(外侵)의 뼈아픈 피침(被侵)의 수난사(受難史)의 한 토막이다.
太古에 檀君 神人이있어
天王峰은 솟아오르고
하늘땅이 상봉하는……
여기에서 시의 영상은 이 나라의 지휘자로 상징화된 ‘메시아의 손’길에서 조국형극(肇國荊棘)의 시초를 마련하였다.
꿈꾸는 聖地
배달의 겨레는
하늘의 選民이었다.
이스라엘의 선민(選民)은 세례요한의 무능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달았지만, 우리 배달 선민은 유구한 발전과정을 고수한 위대한 민족임을 밝히고 있다.
비둘기 나는
아침의 제단(祭壇).
지붕과 지붕의
용마루를 타고 내려와
이뤄놓은 神市.
여기에서도 조국의 만세불요(萬世不搖)의 기반을 찬양하였으며, 모든 산맥들의 웅대한 기상으로 겨레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흩어진 나라의 역사를 풍운(風雲) 속에서 직관함으로써
오오, 원통했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정겨운 이야기가 왕래하던
개나리 울타리는 날아가고
박꽃이 하얗게 웃던
초가는 불탔다.
고 그는 항의를 했다. 그의 애국심리는 바로 이렇게 무한한 반복을 통하여 절실한 반성을 일깨워주고 있다.
통곡이 부서진 뒤
열리는 하늘을 보느냐
땅으로 눈감은 아버지를 보느냐
목발을 짚고 가는 아들을 보느냐
절뚝이며 내려온 역사를 보느냐.
이러한 전란의 피해와 억울한 희생을 갈파(喝破)한 울분은 지향적(志向的) 태도로 나가고 있다.
메시아의 손이 오른다
통일이여!
통일이여!
메시아의 손이 오른다
어서오라!
어서오라!
메시아의 손이 오른다
조국이여!
조국이여!
메시아의 손이 오른다
일어나라!
일어나라!
메시아의 손 가는 곳으로
하늘 끝 머리 두른 나무들이
팔을 들어올린다.
지휘자에게 순응하는 겨레의 슬기로운 자세를 보여주었다. 그러한 민족의 충성으로서 하늘의 축복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조석으로 길어 나르듯
머리로 하늘을 길어 나르듯
우리들 깊은 가슴속에
빛살을 내리시는 하늘이여
이리하여 웅대한 행진을 하는 민족의 화음(和音)0이 평화의 기틀을 굳게 다져 나감을 리얼리티의 방면에서 포착하였다. 그리고 메시아의 지휘력을 찬양하면서 조국의 영원한 평화와 번영을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하나님 우리를 위해
오셨다
우리를 위해
오셨다
하나님 우리를 위해 오셨다.
거듭 목메인 감격과 기쁨을 터뜨려 주었다. 이렇게 「메시아의 손」은 이 시인이 본 민족의 정사(正史)요, 있어질 내일의 축복이요, 그 기대라는 점에서 지극히 주목되어지는 장시(長詩)로 내용이나 형상화에서도 유감 없는 기교와 주제 표현에 대단한 성공을 보여주었다.
「약탕론(藥湯論)」은 시인의 현실적인 비판력을 인정할 수 있는 작품이다. 물질 구조 위에서 타락해 가고 있는 현세기의 인간에게 있어 그 정신상태를 바로 잡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시대적인 시사성을 농후하게 풍겨주고 있다는 데에 문제성이 있다.
끓는 물 속에서 메추리알이 죽더라
차창에 침몰한 나비가 바퀴 밑에 깔리더라
다리 부러진 지게와 몽당 싸리비가 전신주에 고꾸라져 죽더라
모래가 산이 되어 올라가고 빌딩이 폐수에 침몰하더라
콘크리트가 갈라지고 가로수는 폐렴을 앓아 눕더라.
이러한 현실 폭로는 이 시인이 시도하려는 세기말적 풍조의 현상인 것이다. 모든 물질구조 속에서 값진 생명이 이지러져 가고, 가치관이 전도되어 가는 서글픈 상황들의 적나라한 폭로다.
현대시의 위상은 바로 이렇게 역사적인 의식을 기대(基臺)로 하면서 주어진 사회적 현실과 세기말적인 세계 사조를 똑바로 분석하는 시적 이미지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시가 한갓 서정적 표현이라고 해서 시인의 고립된 감정이나 인식의 대상을 주관적인 면에서 신변기(身邊記)처럼 쓰던 시대는 이미 낡아버렸다. 한 시인의 안목 그 자체가 바로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그 현실생활의 반영이며 그 시정(是正)과 구원을 위한 벅찬 인도주의적 사명감을 전제로 하지 않고서는 좋은 시를 지을 수는 없다.
낭만시에 있어서도 엄격히 분석하면 그 시대의 좌절감이라든가 염세주의나 도피사상만이 아니라 현실을 현실보다도 더욱 위대한 역사적 현상으로 바꾸어 놓고 싶은 시대적 양심의 충동을 동기로 하는 것이기에 시인이 자아도취상태를 계속 지속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의미로 보았을 때, 이 「약탕론」은 현대인 정신의 정상(正常)을 기하려는 하나의 심리적인 처방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다음 시구(詩句)는 바로 그러한 이미지를 여실히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병든 도시에는 흙의 정신이 약이다.
흙으로 늙은 약탕관 속에서 끓어오르는 한약은 산의 숨결이다.
숲의 정신, 그것은 관이 향기로운 사슴뿔의 사상으로 징치고 피리 부는 짚신의 바람이다.
여기에서 주요한 시영상(詩映像)은 “병든 도시는 흙의 정신이 약이다.”라는 의미성(意味性)의 제시이다. ‘흙’은 바로 자연적인 바탕이요, 비인공적인 순수세계를 뜻한다. 약의 정신적인 효능이 바로 자연에의 순수로 회귀하는 데 있다는 뜻이 되겠다. “흙으로 늙은 약탕관 속에서 끓어오르는 한약은 산의 숨결이다”라는 것은 바로 ‘산’이 자연의 개념으로 사용된 예이다.
‘숲의 정신’이 사슴뿔의 사상으로 징 치고 피리 부는 정신이라고 한 것에도 신선한 생기를 뜻하고 있다. 사슴의 이미지는 ‘仁者’의 성격이며, “관(冠)이 향기롭다”는 것은 통속을 탈속한 숭고한 생리의 본질을 의미하며, 고귀한 품격의 인생관이 잠재의식으로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사슴은 곧 지상낙원의 적자(適者)이며, 주인공으로서의 인간상을 뜻하면서 종교적인 탈속성과 고매한 인격자의 영상으로 시인의 눈에 비쳤던 것이다.
이렇듯 성령(聖靈)을 인식하는 시정신은 바로 그가 깊은 신앙적인 세계를 알고, 그 진리와 은총을 가득히 받고 있다는 의미가 되어진다. 이 시에는 특히 많은 약재명(藥材名)이 나온다. 특효약을 처방했다는 것은 시작법이 하나의 아이러니컬한 세계에서 용해되어졌다는 시학적인 의미를 지니게도 되는 바, 그 태도에 있어 지극히 보람된 것이다. 특히 다음과 같은 시어(詩語)들은 그러한 의미를 내포하여 적절히 구사된 보기이다.
콩팥의 黑色信號와
폐장의 白色信號와
심장의 赤色信號와
간장의 靑色信號와
위장의 黃色信號와
온갖 위험신호를 침몰한다.
이런 수법은 바로 이 시인이 색채의식을 교묘히 詩作에서 구사한 예로서 가장 타당한 것임을 보여준다. 이렇듯, 이 시는 現實淨化作用을 위한 하나의 사회학적 운동으로서도 그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 풍자(諷刺)는 잘 쓰면 현대시에서 가장 높은 차원을 창조하는 계기가 마련된다는 견지에서 「藥湯論」은 바로 의미 심장한 작품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
「回文山」은 국토 찬미의 아름다운 詩情과 더불어 6.25동란에 침범 당한 역사를 통곡하면서 겪은 고난의 핏자국에 深大한 悲慘을 곁들인 것이다.
초가지붕마다
박꽃이 웃는다
하얗게 떠오르는
겨레 웃음이
白衣의 햇살로 쏟아져 내린다.
여기서 앞에 말한 국토찬미가 선행되면서 평화롭던 민족의 영광을 읊었다.
회문산 골짜기에
한 자루의 따발총이
나자빠져 있었다.
………………(略)
골짜기가 울고 있었다.
山이
山이
섬진강 나루에 내려와
山을 업은 山이 울고 있었다.
이렇게 6.25동란의 비극을 통탄하기도 한다.
뼈다귀는 뼈다귀끼리
뼈다귀의 뿌리로 만나서
조상들의 휘파람을 흉내내야 했다.
여기에서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상황을 눈앞에 제시하여, 이 나라 역사의 수치성을 고발한 것이다. 이렇게 회문산은 바로 뼈아픈 겨레끼리의 싸움터가 되어 겨레의 유구한 역사에 오점을 남긴 슬픈 날을 기록해 주었다. 역사의식의 정확성은 곧 민족에로 피어나 우국의 호소로 발전한 詩想을 보여준다.
옛 노래 숨겨둔 나무들이
일제히 일어나 팔을 벌린다.
회문산 골짜기에서
혼곤한 잠을 털고 일어나
하늘로 머리 두른 나무들이
일제히 팔을 들어올린다.
재생의 회문산은 바로 이러한 표정으로 다시 유구한 역사의 품에 안겨들어 장엄한 새 출발에의 氣象을 하늘 높이 떨쳐 간다는 것이다.
꽃잎은 꽃잎끼리
풀잎은 풀잎끼리
사랑으로 어깨짜고
일제히 하늘로 팔을 들어 올린다.
여기에서 가장 주목되는 표현은 바로 “뿌리에서 만나자”고 하는 신생 발랄한 史的 動機이며, “일제히 하늘로 팔을 들어올린다”고 한 민족의 일체감이다. 이러한 시정신은 회문산의 과거 현재 미래에 이어지는 역사의 자취와 가능성을 폭넓게 다루어, 회문산을 통해서 국토 전체의 史的 과정을 읊고 있다는 것이 큰 비중이 된다.
이 시를 분석하면 삼단계의 詩情으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산이 잠옷을 벗는다”―고 한 첫 시구에서 詩句에서 산의 엄숙한 성격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역사의 태동에 대한 실감을 내포했다는 점이다. 다음은 평화로운 생활이 동란으로 파괴된 질서에의 항거를 깔아놓고 있다는 점이다.
허연 이빨을 드러내는
빛의 순교를 말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 표현인 것이다. 어두운 현실 상황을 제시했다. 다음은 인내와 극복의 미덕으로 줄기찬 蘇生을 구가하는 민족의 대행진을 그려주었다는 점이다.
자다가도 문득, 어머니를 더듬는
꿈속의 젖가슴에
안개가 건너오는
불멸의 노래가
물레 소리로 건너온다.
눈 들어, 눈을 들어
눈에 익은 마을을 찾아
남쪽나라 십자성에
목이 메이는
아아, 나무의 합창이
일제히 피부를 뚫고 나온다.
이렇게 이시는 겨레가 겪어온 역사의 세 단계를 회고적인 운율로 읊었으며, 이런 시작법은 바로 오늘 우리 겨레가 기다리고 있어야 할 그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思母曲」은 낳아서 자란 자기 마을을 떠나는 아쉬움을 모녀간의 대화체로 읊은 시다. 이런 시는 사설조의 운율을 잘 타지 않으면 좋은 시로서 이뤄지기가 어려운 詩格이다. 그러나 方言을 깔아가면서 지방색을 여실히 나타낼 수 있었다는 점에서부터 성곡작이다.
“인자는 시집을 갔으니……, 어무이 곁을 떠나지 않을 수도 없데이!”
“어무이를 두고시나 떠날라이까네, 참말이제 발이 안 떨어집니더!”
이런 대화가 그 선행되는 이미지의 바탕이었다.
“어무이는 와 울기만 하능기요!”
“아부지는 유명하신 학자라꼬 자랑도 곧잘 하시면서 ‘니도 책을 많이 읽어야 시집을 잘 갈 게 아이가!’ 하시며, 오동나무 잎사귀마다 달아 다 지울 때까지 책을 지켜보시다가는 내가 졸고 있으면 머리를 쥐어박으시고는 너무도 안쓰러워서 눈물을 감추시던 울엄매!”
이렇게 정겨운 인간관계 속에서 우리 겨레의 깊은 사랑의 밑바닥을 꿰뚫는 정신적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長斫煖爐」는 인간의 顔面을 하나의 의미의 상징으로 여과시킨 작품이다. ‘얼굴’에서 보여주는 詩이미지는 바로 현실의 신앙적인 조감도인 것이다.
내 가슴속에는 / 장작난로가 타고 있네. / 엄동을 타작하는 장작난로가 / 가슴 활활 타고 있네. / 장작불처럼 정겨운 / 그 얼굴이 보이네. / 그 모습 그 불길이 나를 활활 태우네. / 환장한 노을 같이 나를 활활 태우네. / 그 얼굴의 햇살이 내 가슴에 내리네. 빛을 받는 가슴에 불티가 톡톡 튀네.
이 시에서는 장작의 불빛을 하나의 형이상학적인 세계로 끌어올려서 그 불길 속에 하나의 거대한 창조의 힘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하나의 신앙적인 능력과 은총의 빛으로 용화시켜 가고 있는 것이다.
경쾌한 불빛을 말씀이 튀네.
말씀이 나를 사르는 소리,
말씀이 나를 불지르는 소리,
지글지글 피끓는 舌側音이 들리네.
이렇듯, 불빛을 聖典 속의 ‘말씀’을 간주하고 있다. 불빛의 개념은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나 ‘절대자의 설득’으로 들린다는 의미를 내재시켜가고 있는 것이다. “말씀이 나를 부르는 소리”라고 직설적으로 된 표현은 바로 그러한 시적 영상이 된 것이다. 그리고 표현형식의 언어학적인 면으로 분석한 때에도 시적 구사가 매우 세련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가령 “지글지글 피끓는 舌側音이 들리네”에서, 그 설측음의 발견이 말해주고 있다. “송진이 지글지글 산소를 깨우네”에 이르러서도 하나의 창조적인 상태를 뜻하는 것이다.
이렇듯 이 詩想에서 보여주는 시적인 영상은 靜的인 것의 묘사적 방법인 순객관화된 素描性을 지양하고 가장 중요한 관념적인 세계를 비현실의 재창조에 결부시킴으로써 하늘을 사모하는 인간의 신앙적인 사상을 뚜렷하게 해주었다. 다음으로 ‘눈(眼)’의 소재로 형성된 것을 보기로 한다.
내 가슴속에는, 청노루가 우네. / 하늘이 그리워 청노루가 우네. / 산불로 치달리며 울음 우는, / 청노루 눈망울에 하늘이 고이네. / 하늘을 맴도는 흰구름이 떠도네. / 흰구름 우러르는 청노루 눈에는, / 먼 산 바라보는 그리움이 고이네. / 물기 서린 그리움이 가슴 절절 내리네.
이 시에서는 ‘눈’은 바로 하늘을 우러르는 눈이요, 눈의 주체도 어진 ‘청노루’로 되어 있다. 이 맑고 맑고 어진 청노루라는 실존 속에는 탈속한 성실성이 내포되어 있으며, 그것은 항상 먼 하늘만을 동경하고 있는 것이다.
지상 생물인 ‘청노루’가 맑은 하늘을 우러르는 실존적인 의미 속에서 우리는 항상 ‘하늘’을 그리는 인간의 목마른 영상을 찾아낼 수 있으며, 그 절실한 의미는 바로 깊은 신앙성을 나타내는 시적 변용으로서의 뜻을 지니게 된다. ‘눈(眼)편’에서의 청노루의 맑은 눈은 호수와 연결된다.
“퍼런 호수에 목을 늘이고, / 절절히 사무치는 天情에 울음 울면, / 하늘 가운데 눈이 보이네.”―에서의 “天情에 울음 울면”은 天情이라는 詩語에서 풍겨오는 뜻의 深奧性을 강조한다. 그것은 곧 ‘하늘의 정’이며, ‘하늘의 뜻’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귀(耳)’에서는 더욱 그런 시상이 확대되어 표상되어 가고 있다.
내 가슴속에는, 뜸부기가 우네. / 紫雲英 울인 물 남실 남실, / 가슴에 드는 하늘 / 모포기 물어뜯으며 뜸부기 우네. / 뜸부기 울며 울며 하늘을 보네.
여기에서는 뜸부기 울음이 곧 향수라는 이미지로 이어져 있다. 고향이 그리워 뜸부기 운다는 詩想은 소리를 듣는 기능에서 하나의 本鄕을 찾는 현대인의 실존적 상황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코(鼻)’에서는 냄새를 통한 감각적인 뜻을 내포시키고 있다.
내 가슴속에는 풀냄새가 피어오르네.
풀타는 냄새가 가슴을 적시네.
한여름 별밤을 모깃불이 타오르네.
모깃불 풀냄새가 싱그러이 풍기어 오네
여기에서 주목되어지는 것은 후각을 통한 신선한 냄새의 맡음이다. 풀냄새를 맡는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汚濁된 ‘현실의 장’에서 항상 새롭게 신선한 세계를 지향하고 있는 神聖性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이 시편에서는 더욱이 민속적인 세계에 대한 갈구가 선행된다는 데 의미가 깃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통조림 깡통에서 쌀이 끌고 있네.
Made in USA 깡통에서
朝鮮쌀이 끓고 있네.
이 末尾의 정리는 ‘한국인의 냄새’ 곧 한국사람의 본질인 식물적인 냄새를 풍조의 대조적 상징으로 표현한 것이다. 여기에 애국적인 정서가 짙게 풍기고 있다.
마지막에 가서 “입(舌)으로 곧 입(口)이 아니고 혀(舌)를 소재로 삼은 것은 더욱 의미가 깊다고 하겠다.
내 가슴속에는 / 말씀으로 불사르는 입이 있네. / 입의 막대기는 철장로 / 만국을 다스리네. / 말씀으로 충만한 장작난로 불 먹음은 볼마다 꽃이 피는 / 능금의 나라에 불꽃이 날리네.
민족적인 주체의식에서 비롯된 시의 영상은 바로 오늘 역사 사회의 당면한 문제성을 제기시켜 가고 있다.
이상과 같은 분석을 통해 보았을 때 이 시인의 長詩들은 한결같이 애국적 사상에 뿌리박고, 현실의 정화에 선행된 인간의 숭고한 정신풍토를 개척하며, 나가서는 평화로운 지상낙원을 실현시키기 위한 성실한 신앙적 정신으로서 영생의 진리를 우리 앞에 펼쳐 나가는 높은 의식수준에 있다고 보겠다.
後記
詩는 쓰면 쓸수록 가랑잎이 쌓이듯이 허전하기도 하지만, 더없이 위안이 되는 것은, 시가 영원한 존재와 교감하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에 붙들린 뒤에는 허무가 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위안을 받는 경우는 영원한 물줄기에 뿌리를 내리는 때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까지 시를 통한 탄산동화작용을 시도해왔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미 청춘의 정오를 넘어섰다. 원고지를 수없이 발송하며 잎을 피우던 계절에서 이제는 착실히 익어가야 한다는 깨달음 같은 것을 느끼게 되고, 절대자나 대자연의 순리 앞에서 겸허하게 옷깃을 여밀게도 된다. 이제는 좀더 겸손의 옷을 입고 구름 저쪽 보이지 않는 무한의 세계와 교신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내 의식의 세포, 내 정신의 이파리는 서서히 단풍이 들기 시작할 것이다. 언젠가는 땅에 떨어져 비료가 되기 위하여 정겹고 꽃답게 썩어가야 할 것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나는 요즈음 곱게 썩는 인생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결국 시란 근원으로부터 뽑아 올린 진액의 이파리라면 나의 영혼, 나의 인생은 그 뿌리요 줄기임에 틀림이 없다.
나는 나뭇잎을 수없이 떨어뜨리면 떨어뜨릴수록 그 썩음으로 하여 무성한 숲의 사상이 생기듯이, 내 원고지의 소멸은 오히려 나를 영원하게 한다는 깨달음에서 허무를 극복하고 위안을 받게 된다는 존재론적 詩論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나의 진솔한 얘기를 외면하는 이가 있다 하더라도 나는 하는 수가 없다. 이 세상에서 다만 한 사람만이라도 나의 시를 진정으로 이해하여 주는 이가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족하다. 그 한 사람을 위해서 나는 기도처럼 시를 쓰고 싶다. 나는 이러한 감관의 창을 통해서 살맛이 나지 않는 세상을 더러는 살맛 나게 살아가는 셈이다. 지독하게도 인정머리가 없어진 세상에서 몇몇 문우들과 더불어 제법 오순도순 인정 있게 살라갈 수 있다는 것, 여기에서도 사는 재미가 살아나게 된다.
시계의 초침 뛰는 소리가 신경을 자극하는 까닭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 동지섣달만 지나면 70년대는 막을 내리고 80년대가 시작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나간 10년과 다가오는 10년을 생각하다가 문득 망각되어온 몇 편의 장시를 생각하게 되었다. 장시는 70년대 초엽부터 발표하여 왔으나 단행본을 엮어낸 일이 없었다. 머지않아 80년대를 맞게 되는 차제에 일단 정리하고 넘어가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갑자기 시집 출판을 서두르게 되었다.
장시 「메시아의 손」은 시민회관이 불타던 해에 이화여대에서 베풀어졌던 연주회에 참석하였다가 想을 얻어 쓴 작품이다. 이번이 이 『메시아의 손』이라는 이름으로 펴내는 이 책은 『造船所』와 『木花의 季節』, 그리고 『내 가슴속에』에 이어 네 번째로 내어놓는 시집이 된다.
독자의 이해를 위하여 장시를 해설해 주신 김남석 교수님과 題字를 써주신 李鶴 선생님, 그리고 교음사의 강석호 형의 호의에 사의를 표하며, 나와 뜻이 통하는 詩友들과 함께 이즐거움을 나누고 싶다.
1979년 仲秋節 冠岳山房에서 黃松文
黃松文 長詩集 메시아의 손
1979년 11월 3일 인쇄
1979년 11월 7일 발행
정가 1200원
著 者 黃松文
發行人 姜錫浩
發行處 敎音社
서울시 서대문구 홍제3동 277-34
등록 제7-271(1979. 5. 16)
著者住所 서울시 冠岳區 舍堂洞 91-67 電話 50-5773
타락한 도시를 넘어 울려 퍼지는 구원의 합창
-황송문의 「약탕론(藥湯論)」과 「메시아의 손」을 중심으로
고인환(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양학부 교수)
1. ‘장시’의 새로운 가능성
우리 시사에서 장시의 가능성은 「국경의 밤」(김동환), 「금강」(신동엽), 「오적」(김지하), 「농무」(신경림) 등이 시사하듯 장편서사시, 이야기시, 담시, 연작단편시 등의 이름으로 다양하게 탐색되어 왔다. 황송문은 이들의 성과를 이어받아 장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그의 「약탕론(藥湯論)」과 「메시아의 손」을 통해 ‘장시’의 세계로 자맥질해 보자. 장시의 장르적 개념은 분명치 않다. 관습적으로 단시에 대한 대립 개념으로 사용되어 왔으나, 무턱대고 길다하여 모두 장시라고 할 수는 없다.
한국문학사에서 장시의 장르가능성은 김종길, 서준섭, 오세영, 장부일 등에 의해 중점적으로 검토되어 왔다. 이들의 장르설정은 허버트 리드의 시론에 의거한 것이다. 오세영 역시 이를 원용하여 다음과 같이 장시의 정의를 내린 바 있다.
장시란 다수의 정서적 갈등을 인위적으로 통일시켜 시인의 이념으로 하여금 형식성을 끌고 가게 하는 어느 정도 이상의 길이를 지닌 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시에서 시인의 메시지가 형식성을 끌고 가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시간적 질서에 의존하는 방법이요, 또 다른 하나는 공간적 질서에 의존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그 전자를 서술적 형식(narrative form), 그 후자를 공간적 형식(spatial form)이라고 부른다. 서술적 형식은 시에 주인공을 등장시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듦으로써 시인의 이념을 형상화시키는 방법이요, 공간적 형식이란 주인공이나 스토리의 설정없이 서정 단시와 마찬가지로 이질적인 이미지들과 정서들을 일관된 주제의식 아래 공간적으로 배열시킴으로써 시인의 이념을 형상화시키는 방법이다.
삶은 시간적 질서와 공간적 질서의 교차로 지속된다는 점을 전제로, 오세영은 장시를 서술적 형식으로서의 장시와 공간적 형식으로서의 장시로 구분한다. 그에 따르면 공간 형식으로서의 장시는 구체적인 사건의 전개과정이나 결과는 숨기고 서로 다른 이미지나 정서들이 공간을 달리하여 배열되는 방식을 취한다. 여기에서 이미지와 정서는 시인의 내면 의식을 형상화하는데 기여한다. 그것은 우선 시에 드러나는 자기 독백적 어조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주인공의 설정 없이 전개되는 시상(詩想)에서 공간 형식의 장시는 시인의 자기 독백적 어조라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시에서 드러나는 목소리가 아무리 자기 독백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것은 시인만이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대상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완전하게 시인의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시에서 목소리의 주체가 실재 시인일 수도 있고, 내적 혹은 외적 화자일 수도 있으며, 내포 독자 또는 실재 독자일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다분히 복합적이고 유동적인 어조가 황송문의 「약탕론(藥湯論)」과 「메시아의 손」에서도 드러난다. 뿐만 아니라 이미지와 정서가 일관된 주제의식 아래 공간적으로 배열된다. 이에 황송문의 「약탕론(藥湯論)」과 「메시아의 손」은 공간적 형식으로서의 장시라 할 수 있다.
2. 타락한 문명을 넘어 -「약탕론(藥湯論)」
황송문의「약탕론(藥湯論)」은 이미지의 공간적, 대위법적 교차로 진행된다. 주된 사건의 통일된 행동도, 사변적 논리 전개도 없는 까닭에 시적 진술은 이미지의 연상과 유추에 의존한다.
문명은 시간이 지날수록 ‘타락’과 ‘폐허’의 냄새를 진하게 내뿜는다. 이는 현대문명의 숙명적인 딜레마지만, 여전히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자연친화적인 인간과 휴머니즘을 간직한 인간의 영혼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문명과 자연은 화합보다 불화의 심연을 더욱 가중시킨다. 지금까지 인류가 이룩한 문명이 자연의 희생을 바탕으로 성립된 것을 떠올린다면, 이 불화는 어느 정도 예견된 결과이다. 이 불화의 대표적인 공간이 바로 ‘도시’다. 도시에는 발달된 기계문화와 문명화된 인간이 존재하는 반면, 자연파괴와 인간성 상실 등의 부조리한 문화도 공존한다. 하여 「약탕론(藥湯論)」에서는 추락하는 인간과 타락의 도시가 중첩되어 묘사된다.
잡담으로 가득 찬 도시여
썩어 문드러지는 니코틴이여
할 일 없는 비곗덩어리여
충혈의 술집, 거짓 사랑이여
어지러운 밤거리에서
비틀거리는 도시, 흔들 도시여
화자에게 도시는 “모래가 산이 되어 올라가고 빌딩이 폐수에 침몰”하며, “욕망의 풍선들이 터지고 해골들 뼈다귀가 꿈틀거리”는 곳이다. 그곳에는 “어지러운 잡담”이 가득 찬 “다방”과 “주정꾼들로 가득 찬” “비틀거리는 술집들”이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거짓 사랑”과 “거짓 연애”가 무성한 “여관”으로 넘쳐난다. 이렇듯 “위선으로 꽃피는 도시”는 인간에게 뿌리칠 수 없는 유혹으로 다가온다. 바로 그 불신의 공간 한 가운데 “내용 없는 껍질”인 인간이 존재하는 것이다.
모든 존재들은 자신이 “병든 도시”에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 추락하기 시작한다. 시인은 서두 부분에 하강 이미지의 서술어를 많이 배치함으로써 그것을 증명한다. “울더라 / 죽더라 / 깔리더라 / 침몰하더라 / 눕더라 / 내리더라 / 굳어죽더라 / 기울어지더라” 등의 시어는 도시 속 현대인의 추락과 타락, 몰락을 상징한다. 현대인은 쾌락의 무늬를 지닌 황폐한 도시에서 삶의 지표와 방향성을 상실하고 방황한다. “하늘에서 내려보면” 그들은 “모두가 죄인”이다. 그리고 공포감와 황홀감을 동시에 간직한 존재들이다. 이 부정과 탐닉의 도시에서 사람들은 수많은 일탈과 해체를 감당해야 한다. 그 중 한 사람인 시인이 도시를 구원하기 위해 약탕론(藥湯論)을 읊고 있는 것이다.
병든 도시의 구원책은 “약”이다. 색깔도 없고, 크기도 없고, 무게도 없지만 그것은 이 세상 어디라도 반드시 존재한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시인이 끓이고 있는 한약은 “조상들의 뼛속에서 아우성으로 자란” ‘자연애(自然愛)’와 “한울님 보호하사 목숨을 이어온” “겨레의 정신”을 말한다. 즉, “흙의 정신”, “산의 숨결”, “숲의 정신”, “꽃잎의 정신”, “시냇물의 정신”, “식물의 정신”을 담은 약탕관을 달여 창백한 도시의 “불안과 공포”, “우울증과 초조감”을 몰아내려는 것이다. 자연의 이치와 인간의 삶을 동일시하는 시인의 사유는 추락하는 인간에게 희망의 등대가 된다. 시인은 “식물성 겨레”인 우리 민족에게, 더 “늦기 전에” 자연으로의 회귀를 당부하고 있다. 문명과 자연의 조화를 제시하고 인간이 함께 호흡하기를 소망한다. “한방울의 약물에서 온 우주가 살아”나고 “맑게 깨어나는 서울의 정신이 빌딩 위에 해바라기를 심으”면 이 “해바라기”에서 나오는 “사랑과 생명의 진액의 영험함을 깨달은 도시가 새로운 정신”으로 되살아날 것을 믿고 있다.
여기에 이르면 「약탕론(藥湯論)」의 주제가 타락한 도시 문명에 대한 고발과 그 극복에 대한 의지로 요약됨을 확인할 수 있다. 황송문은 위선적인 도시와 추락하는 인간들이 존재하는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도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오히려 불안과 절망을 극복하려는 겨레의 정신과 자연애(自然愛)의 가능성을 끈질기에 탐색함으로써, 타락의 도시를 넘어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세계를 제시하기에 이른다.
3. 구원의 합창 -「메시아의 손」
황송문의 「메시아의 손」은 ‘민족’ 이미지와 ‘음악’ 이미지가 접목되어, 민족혼과 화음의 파동으로 형상화된다. 민족의 시련과 저항의 역사를 음악의 본질과 교차시킴으로써 각별한 상징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이들은 단순한 배합의 의미를 넘어 균형과 조화를 이루며 절조 있게 서로를 향해 스며들고 있다. 「메시아의 손」은 전체 10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주제 의식의 전개 양상에 따라 발단(1장) 전개(2장) 위기(3장~6장) 절정(7장~9장) 결말(10장)로 정리할 수 있다.
1장은 시인이 표출하고자 한 주제의식의 발단부분으로, 우리 민족의 태초 상황을 묘사함으로써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만고풍상(萬古風霜) 다 겪어온 겨레”에게 “단군(檀君) 신인(神人)이” 천하 제일의 명당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오묘한 반도(半島)는 꿈꾸는 성지(聖地)”이며 “배달 겨레는 하늘의 선민(選民)이”다. 이 “천례(天禮) 신시(神市)의 때로부터 음악은 눈을” 뜨고 있다. 하늘이 선택한 민족과 음악은 스미듯이 서로를 지탱함으로써 파편화된 생을 부드럽게 연결지어 준다. “밝음을 찾아온 화음(和音)이 뿌리에서 가지로, 가지에서 꽃으로” 피어오르면, 우리 역사의 태동을 알리는 음률(音律)이 솟아오르게 되는 것이다.
2장은 전개 부분으로 시인의 내면 의식이 제시되고, 구체적인 상황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화음(和音)이 나뭇가지에서 눈을” 뜨고, “꿈 속 퉁기는 선율을 타고” 평화로운 “고요의 아침나라”에서 “이방민족의 간계”가 시작된다. 외세 침략으로 “압박과 설움”을 겪는 “눈물 젖은 겨레”에 “음악이 마중을 나온”다. 그러나 애타게 하늘을 찾던 이들의 “얼굴은 일그러”지고 “다리는 잘려”나간다. 이 암울한 시대에 음악이 민족의 “눈시울을 적신”다. “고조선 / 백제 / 신라 / 고구려 / 고려 / 조선”은 외세에게 억압당하고 “하늘을 올려보며 꺼익꺼익” 운다. ‘음악’과 ‘역사’ 사이에서, ‘영혼’과 ‘상처’ 사이에서 몸부림치던 그들의 몸과 마음이 훼손되어 가는 과정이 눈물겹도록 아름답게 제시된다. 이렇듯 2장에서는 우리 역사의 수난사가 핍진하게 묘사된다.
그런 혼돈과 핍박의 와중에서도 우리 민족은 “구원의 하늘”을 숭상하고 있다. 3장부터 6장까지는 위기 단계로, 민족의 고통을 그려내고 구원에 대한 희망을 담고 있다. 3장에서는 암울한 시대를 견디는 민족의 고난이 제시된다. “대동의 지도를 펴면 한반도의 손금은 복잡”하다. “조상들의 백골이 묻힌”, “빼앗”기고 “더럽혔던 땅”을 다시 찾을 때마다 우리 겨레는 “잃어버린 팔”과 “잘려나간 몸”이 되었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상실과 좌절은 물론 우리 민족 전체의 역사적 상처를 진솔하게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4장에서는 절망적인 비극에 저항하는 인물들을 그리고 있다. “강원감사와 평안감사를 죽인 왜장 소섭”에 맞서는 “월천(月川)”의 육신은 비록 “왜적에게 짓밟혔어도”, 그 “영혼은 조국”을 통해 되살아난다. 특히, “왜장 평수길(平秀吉)”에 대항하는 “목단(牧丹)의 슬기”를 강조하는 부분은 인상적이다. “모란의 분노”는 우리 민족의 분노이며 하늘의 분노인 것이다. 외부 세력의 폭력성 앞에 절망하기보다 오히려 당당한 분노를 간직하며, 폭력적 삶 속에 굳건한 희망의 씨앗을 뿌린다.
5장에서는 그 씨앗이 겨레의 화합과 통일에의 염원으로 자란다. 화자는 “같은 피를 이어받고서 왜 미워하느냐”, “한반도가 누구의 땅이냐”라는 자조적 물음을 던진다. “조상의 핏줄”을 잊지 말고 “겨레의 혈관”을 끊지 말고, “한 손으로는 생활”과 “한 손으로는 핏줄”을 붙들라고 토로한다. “메시아의 손”이 “통일”과 “조국”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6장에서는 통일의 음악을 연주한다. 민족의 “가슴 속에 빛살을 내리시는 하늘”과 “음악이 손을 잡”고, “아이들의 가슴에” “조국”과 “하늘”이 새겨지기 시작한다. “악장(樂長)의 손끝에서 백조의 합창이 쏟아져” 나온다. “찬란한 빛의 선율을 타고 사랑의 노래가” 울려 퍼진다. 이는 민족의 화합과 공동체 의식이 생성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화자는 고통 속에서도 누추한 절망이나 남루한 희망에 미혹되지 않고 담담하게 자신과 민족을 지켜나가고 있다.
7장부터 9장까지는 주제가 선명하게 부각되며 결말 도출의 계기가 되는 절정 부분이다. 7장에서는 구원자에 대한 갈망이 묘사된다. “우리들 영혼을 투망질하는” 원초적인 욕망들을 지적하며 “메시아”의 구원을 소망하는 것이다. “혀끝에 번득이는 죄의 뿌리를 뽑”고 “바른 길을 찾아”가라는 인도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진다. 시인은 단호한 의지로써 부정적 현실을 거부하고 이에 맞서려는 의지를 표명한다.
8장에서는 인간의 내적 갈등과 현실에서의 고난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자르지 않으면 썩어”가는 육체를 제시하며, 현실이 싸움의 생생한 현장이고 혹독한 절망의 공간임을 되새긴다.
9장에서는 자유의 통일 강산을 묘사한다. “통일”에 “미친 사나이”는 우리 민족에게 “찢겨진 흰옷을 꿰매어 입고” “눈물을 거두”라고 호소한다. 그것은 상처받은 민족을 위로하는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다. “춘삼월 호시절” “찬란했던 한반도문화”는 여름과 가을, 그리고 엄동의 겨울이 지나고 나서야 “입춘(立春)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너무도 시련이 많아서” 구원자의 손을 잡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래도 화자는 메시아가 “두려움이 없”는 “자유의 천당”으로 “나의 조국”을 인도하길 간절하게 소망한다.
10장은 결론 부분으로 갈등이 해소되며 시인이 말하고자 한 바가 구체적으로 배어나온다. “생명”과 “사랑”으로 “어지러운 감정의 뿌리를 씻어 내리고” “음악을 따라”가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올 것임을 확신한다. “메시아의 손”은 “하늘의 지휘봉”이며 우리 민족은 하늘의 보호아래 현존함을 일깨운다. 마침내 구원의 합창 소리가 울리기 시작한다.
4. 나가며
황송문은「약탕론(藥湯論)」과 「메시아의 손」을 통해 시대의 불화를 넘어 조화와 긍정으로 가는 길을 제시한다. 자연과 민족과 메시아가 어우러진 그 길에서 그의 시세계가 개화한다. 그것은 현대인의 잃어가는 본모습을 반성하게 하고, 자연과 조화된 삶의 본령과 자유의 의미를 지향한다. 이렇듯, 그의 시편은 개인의 구원을 꿈꾸면서도 언제나 공동체를 도외시하지 않는 미덕을 지니고 있다.
황송문의 시는 휴머니즘과 자연애를 곱씹으며, 민족과 자연을 향한 순정한 그리움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러나 이 구원과 희망이 어떤 모습인지는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다. 시인은 이 희망의 메시지를 하나의 예감으로 남겨 두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필자는 그가 추구하는 조화로운 희망의 실루엣이, ‘지금 여기’의 현실에서, 자신과 세계를 구원하는 역동적인 메시지로 거듭나길 기대해본다.
後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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