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송문 시전집

목화의 계절 -제2시집-

SM사계 2010. 7. 9. 20:45

 

木花의 季節  

 

자서(自序)

詩는 세탁비누와 같은 것이다. 치대면 치댈수록 그 옷이 깨끗해지듯이, 쓰면 쓸수록 결국 그 人生은 깨끗해져 가는 것이다. 이 부단한 人生의 빨래를 통하여 우리들 영혼(靈魂)은 헹구어지고 바래져서 마침내는 영롱(玲瓏)한 빛을 발하게 된다. 한 편의 詩, 한 권의 詩集을 위해서 詩人의 時空은 소멸(消滅)되는 대신에 그의 영혼은 精神의 窓을 통하여 永遠한 꽃으로 핀다.

詩는 도토리묵과도 같은 것이다. 정답고 꽃답게 울여내면 울여낼수록 묵이 되듯이, 사랑스럽게 다듬고 다듬으면 詩가 된다. 日常의 떫은 언어(言語)라 할지라도 맑은 시어(詩語)에 가두어 두었다가 자꾸 자꾸만 울여내고 열을 가하게 되면 새로운 詩가 誕生된다. 이 새로운 詩의 탄생을 통하여 그의 영혼은 새롭게 부활(復活)되는 것이다.

詩는 허무(虛無)를 극복(克服)하는 정신의 등불이다. 詩를 왜 쓰는가 하는 자문(自問)의 파도(波濤)가 밀려올 때, 그것은 허무를 살라먹는 용기(勇氣)와 희망(希望)의 빛으로 나타난다. 몇 억만광년(億萬光年)이 흘러간 후, 사후(死後)의 나와 이승의 詩는 상관(相關)이 있을까. 로케트가 연료 캡슐을 차버리고 月世界로 향하듯 내가 원고지를 수없이 구겨 던지면서 조금씩 부활해 간다는 인식논리(認識論理)를 통하여 허무를 극복한다.

詩는 자유를 선언(宣言)하는 새의 부르짖음이다. 새는 목이 마를 때 물을 마시고, 희열(喜悅)이 넘칠 때 솟구치고, 동경(憧憬)이 일 때 비상(飛翔)하며, 즐거울 때 지저귀는 자유를 누린다. 이 무한한 자유가 시인의 정신세계에 열려있기 때문에 나의 영혼은 숨을 쉬며 존재한다. 온 천주(天宙)를 창조한 절대자(絶對者)가 詩의 자유를 부여했거늘 누가 감히 이것을 막을 것인가.

詩는 귀뚜라미와도 같은 것이다. ‘곤충’이라는 형상적(形狀的)인 면과 성상적(性相的)인 면을 동시에 지니면서도 또한 독특한 별개의 세계를 지닌다. 시골의 풀숲에서 이슬을 받아먹던 ‘곤충’의 귀뚜라미는 상경(上京)하여 빌딩의 창틈이나 목욕탕 화장실 구공탄창고 할 것 없이 도처에서 서식(棲息)하지만 ‘소리’의 귀뚜라미는 변하지 않고 있다. 나는 변하지 않는 귀뚜라미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문득 조상(祖上)들의 피리소리를 떠올리게 되고, 짚신발로 땅을 구르면서 가까워오는 풍장소리를 끄집어내게 되었다. 나는 역사의식(歷史意識)을 일깨우는 정한(情恨)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木花는 우리 겨레―백의민족(白衣民族)의 상징(象徵)이다. 그 순수(純粹) 이상의 순수는 없으리라. 그 지고지선(至高至善)의 순수가 나로 하여금 붓을 들게 하였는지도 모른다. 이 강산(江山) 낙화유수(落花流水) 흐르는 봄절기 문명시대(文明時代)를 맞이하여 하루 속히 피묻은 옷을 빨아 입고 일어나 본래적(本來的)인 목화(木花)의 계절(季節)로 복귀(復歸)되기를 희구(希求)하기 때문에 붓을 잡았는지도 모른다.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同族相殘)의 현장, 처참(悽慘)한 살육(殺戮)이 휩쓸고 지나간 이 강토(疆土), 피로 얼룩진 목화밭엔 해골(骸骨)들이 뒹굴고 있었다. 빨갛게 녹슨 따발총을 노려보는 농부(農夫)들의 퀭한 백골(白骨)에서 역사(歷史)의 파편(破片)들을 발견(發見)하게 된다.

이 『木花의 季節』은 『造船所』 이후 두 번째 시집(詩集)이 된다. 아직도 천후(天候)가 고르지 못한 때이므로, 어지러운 겨레의 가슴마다 민족(民族) 본래(本來)의 목화(木花)를 심어서 백의이념(白衣理念)으로 뿌리를 내리고 싶은 게 나의 풍향(風向)이다. 이 서사시집(敍事詩集)을 내는 소이(所以)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항상(恒常) 詩의 온상(溫床)이 되어 주시는 문단(文壇)의 선배제위(先輩諸位)에게 감사(感謝)를 드리고, 또한 작품(作品)을 해설(解說)해 주신 문학평론가(文學評論家) 김남석(金南石) 敎授님께 심심(甚深)한 사의(謝意)를 표(表)하면서 두서 없는 말을 서(序)에 가름한다.

1975년 10월 개천절(開天節) 날 사당동(舍堂洞) 우거(寓居)에서 黃松文 識

서시(序詩)

태초(太初)에

木花씨 한 알이 있어

화안한 봉오리로 피어오르다.

신시(神市)에

점지한 땅이 있어

백두(白頭) 한라(漢拏) 솟아 오르고

동해(東海)

동해(東海)

마알간 해 머리 감아 오르는

동방(東方)의 성지(聖地)로

향일(向日)하는 木花의 가슴이 있어

천례(天禮)의 두루마기로 내려 오도다.

목기(木器)엔 제물이 담기고

정한수 남실 남실

하늘을 머금은 사발(沙鉢)마다

대동(大同)의 해바라기 피어오르다.

한 밝은 누리

보다 따뜻한 양지(陽地)를 찾아

입춘대길(立春大吉)의 붓대에서

목화씨 한 알이 나오나니

생명 있는 만물(萬物)들이여

경천(敬天)의 손을 들어올려라.

어둠을 밟고 일어서는 두루마기와

하얀 옷자락의 만세 소리에

새벽은 어둠을 빨래한다.

神의 양치질로 피어오르는

목화의 우윳빛 비단 안개

천연(天然)의 비누거품이 굴러 내린다.

조상의 피리로 흐르는 강에서

용소(龍沼)의 안개 흐르는 산에서

하얀 잠옷이 풀어져 내린다.

하얀 안개 속에

무거운 잠을 털고 일어나

피묻은 역사를 빨래하는

세밀(細密)한 빛살이 빗질을 한다.

국방색 전투복에 윤기 흐르는

산의 머리카락이 빗질한다.

안개구름이 내린다.

산허리 휘감는

하얀 팔과

허어연 유방(乳房)들이 굴러 내린다.

임부(姙婦)의 잠옷이 풀어져 내리는

안개 속엔

족두리풀 일어선다.

최초(最初)의 빛으로 열리는

동방(東方) 토함산(吐含山)의 나라

아침 햇살로 태어나는

생육(生育)과 번성(繁盛)의 땅

유방의 계곡(溪谷) 위로

숭얼숭얼 열린 목화

대지(大地)의 배꼽엔

천 만 갈래의 강이 흐른다.

비오는 평야(平野)―

짚신과 지까다비

숨가쁘게 질척이던 황토(黃土) 길은

벌써부터 눈을 감더라.

삼천리 강토(疆土)―

몸부림치던 산하(山河)는

조상들의 피울음이다.

위만(衛滿)과 한(漢)에게 당한 고조선(古朝鮮)이여! 말갈(靺鞨)에게 당한 백제(百濟)와 신라(新羅)여! 위(魏)에게 당하고, 숙신(肅愼)에게 당하고, 선비(鮮卑)에게 당하고, 연(燕)에게 당하고, 수당(隋唐)에게 당했던 고구려(高句麗)여! 몽구(蒙古)에게 당하고, 원(元)에게 당했던 고려(高麗)여! 왜(倭)에게 당하고, 오랑캐에게 당하고, 뙤놈들에게 윤간(輪姦)당한 조선(朝鮮)이여! 병아리 꿈이 깊던 개나리 울타리는 날아가고, 박꽃이 하얗게 웃던 초가(草家)가 불타던 날, 일그러진 너의 얼굴을 붙들고 애타도록 가슴을 물어뜯는다. 물어뜯는다. 하늘로 열린 동자(瞳子)만 푸르게 남고, 화전(火田) 같은 목덜미에 인술(仁術)의 살점이 붙는다.

시방은,

짜깁기한 얼굴

이리떼에 물린 조국은

피투성이가 되었으니,

조상의 피리를 흙 속에 묻고

혈관(血管)의 노래를 들어라.

변함 없이 흐르는

낙동강(洛東江) 노래 소리는

언제 들어도 피울음이다.

태양이 쏟은 코피를 움켜쥐고

부러진 해바라기가 눈을 감는다.

하늘을 머리에 이고 살던

정화수 위로

뜨는 태양.

어머니의 불덩이는

지각(地殼)의 불꽃으로 타오른다.

목화가 피기 전

남방(南方) 유월의 녹두(綠豆)꽃

파랑새는

피를 흘리며 돌아가고,

평야(平野)엔

흙 속에 잠든 피리소리―

늙은 쑥돌 밑에 깔린 개와(蓋瓦)는

천년 징소리에 검어만 가고,

미친 마파람 창공(蒼空)에 휘돌던

열 두발 상모는 똬리 트는 뱀으로

풀뿌리에 휘감기어 썩어 내리고,

기름진 땅에 일어서는

영기(令旗)의 눈초리

짚신발 소리 뒤에서

징 소리 울려온다.

검은흙을 갈아엎으면

목화 심던 농부의 백골이 나오나니

각 잘린 혼신(渾身)으로

징 채를 끌어내어

삼천리 강산을 울리어라.

풀 우거진 논두렁에 귀를 대면

조국의 깃발소리 들려온다.

혈관에 파동(波動)치는 영기(令旗)를 들쳐메고

동서남북(東西南北) 땅을 구르는

짚신발 소리 들려온다.

열린 자의 심장(心臟)을 노래하자.

국방색 전투복에 열리는

푸른 동자(瞳子)의 하늘과 산하(山河)를.

들끓는 빛깔을 노래하자.

혈관에 파동 치는 애국의 깃발을.

강산을 노래하자

핏줄을 자랑하자

천 만 줄기 혈관을 타고

천 만 강물이 구비치는

찢어지는 깃발을 노래하자.

「양양한 앞길을 바라볼 때에

혈관에 파동 치는 애국의 깃발」을

노래 부르는 학도병들의

이마에 걸린 하늘 저 편에

푸른 산줄기를 타고

하얀 머리카락이 휘날려 온다.

목화의 심장으로 뿌리를 뻗어 나온

하얀 수염이 휘날려 온다.

하얀 옥양목 두루마기 자락과

하얀 옷고름이 휘날려 온다.

푸른 하늘을 휘날리는

배달겨레의 깃발

찢겨진 깃발을 펄럭이며

어버이의 가슴이 내려온다.

청천 하늘에 머리 두른

갓두루마기가 펄럭이며 온다.

구풀구풀 힘찬 산맥을

하얀 노인이 달려온다.

굽이굽이 흘러내리는

강물의 푸른 정신으로

반만년의 핏줄이 쏟아지는

겨레의 아우성이 내려온다.

아우성의 깃발이 내리달리는

하얀 폭포 소리―

억수로 떨어지는 소리의 정상에는

피라미가 번득이며 솟아오른다.

잉어 비늘이 솟구쳐 오르는

겨레의 폭포 소리는

맑은 정신을 끌어올리는

영혼의 독수리.

겨레의 생기가 솟구쳐 오른다.

남풍(南風)아!

남풍(南風)아!

애타게 혈육을 부르며

험산준령(險山峻嶺)을 넘어온 노인이

풀밭으로 쓰러지며 손을 들어올린다.

갓두루마기로 펄럭이는

아우성의 깃발

혈관의 깃발이 나부낀다.

어진 눈으로 하늘 우러러

반만년을 소리소리 지른다.

남풍아!

남풍아!

어데 있느냐?

붉은 용(龍)이 내려온다, 어서 피해라!

붉은 용이 온다!

붉은 용이 온다!

시베리아의 바람을 데리고

붉은 용이 내려온다.

백두산 천지(天池)물 마시며

이재전전도하지(利在田田道下止)를 부르던

백발(白髮)이 풀밭에 쓰러진다.

국방색 핏줄이 우루루 몰려든다.

남풍아, 피해라!

아버지, 염려 마세요!

갈라진 하늘이 각혈을 하면

신들린 풀잎이 허공을 가른다.

목화의 빛깔로 빨래한

고난의 십자가에 하늘이 내린다.

피 흐르는,

피 흐르는,

피 흐르는 산하를 부둥켜안고

하늘이 둥둥 내려온다.

제1장 찢겨진 깃발

「시베리아의 바람아, 피를 부르지 말라!

빙하(氷河)를 내려온 총구(銃口)여

붉은 혀를 날름거리지 말라

갈라진 혓바닥에 이는 바람이여

무지(無知)한 칼로 강산을 자르지 말라!」

「남풍이여, 소리치지 말라

복중(腹中)에서 시작된 형제의 싸움은

남북의 대결에서 끝장난다.」

「여우로 둔갑한 바람아

지구의 북반(北半)을 동진(東進)한 바람아

그대는 낙엽도 남기지 않지만,

남풍은 해동(解凍)에 매화꽃 피우리니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라.」

「고향 없는 우리는 오늘뿐이다

끊임없는 계급의 투쟁으로

두더지의 천국을 노래하리니

남풍아, 이제는 손들고 나오너라.」

기관단총이 탄피(彈皮)를 탈곡(脫穀)한다

조국의 하늘을 둘러 끼운 총구

수평과 수직의 한 복판에

십자가를 긋고

못을 쾅쾅 때려 박으며

심장을 난도질하는 무리를 보라.

상상봉에서 좌익의 눈을 뜨는

붉은 기관단총 소리―

탄피는 흙을 집어삼키고

탄환은 미친 바람을 몰고 온다.

탄화(彈火)가 일어날 때마다

사수(射手)가 쓰러지고

하나씩 둘씩

부사수(副射手)가 쓰러지고

꽃 같은 꽃

조국의 꽃들이 떨어져 나갔다.

이삭처럼 사라져간

전우(戰友)의 시체를 들치고

남풍은 기관총을 챙겨들었다

열 여덟 짜리 학도병의 눈에는

화톳불이 이글거린다.

「저 북녘엔 어둠이 쌓여있구나

저 산악엔 살기가 서려있구나

총혈된 눈 부릅뜨고 동그라미 속으로

우주와 꽃잎이 들어오는데,

어찌하여 피를 부르는가!」

방아쇠를 당기는 金李朴崔

쓰러지는 金李朴崔

붉은 이리의 눈이 번들거린다

부러진 갈대도 마저 꺽지 않는

예수를 팔아서

단군 할아버지의 핏줄을 들먹이며

단군 할아버지를 때려잡는

민족의 도살자를 바로 보라.

같은 피를 이어받은 형제들끼리

손으로 손을 묶어서 가고

웃음으로 웃음을 사살하는

변증법적 유물인간을 보라!

동족의 이름으로 동족을 사살하는

붉은 오랑캐의 매서운 바람.

전우의 원수요

조국의 원수요

어미의 원수요

아비의 원수들이

좌익(左翼)의 눈을 뜨고 방아쇠를 당긴다.

억수로 쏟아지는 적탄 속에서

불을 뿜던 南風이

전우의 시체 위로 쓰러진다.

실탄은,

이빨을 부수고

혓바닥을 뚫고

턱뼈를 부수고

목덜미를 뚫고

조국의 오지랖으로

진한 피를 뿜어 올렸다.

저마다 따발총을 움켜들고

이 잡듯 뒤지며 산을 내려가는

꼭두각시 뒤에서

남풍은 피를 뱉고 있었다.

피와 피!

피와 피!

아아, 조국의 꽃이 흐린 피!

피를 뿌리며

피를 밟으며

찢겨진 꽃잎에 달려드는 어둠.

어둠을 헤치며

어둠을 밟으며

골짜기를 내려가는 남풍의 의식에는

낙동강 물소리가 굴러가고 있었다.

얄루강보다도 징그러운

밤의 강물소리여.

낙동강!

낙동강!

그 피범벅 치던 불길

말없이 울고 가는 강물을 따라

피비린내 더듬거리며

산그늘이 내리고 있었다.

어둠 속 치맛자락을 붙들고

강변을 치는 밤 물소리

하류로

하류로

남풍이 내려가고 있었다.

남풍이 전우를 일으켜 세운다.

진초록 국방색을 일으켜 세운다.

목발을 일으켜 세운다.

병신 되어 쓰러진 조국을 일으켜 세운다.

강물이 소리치는 하류를 따라, 앙가슴을 껴안으며 내려간다. 사랑을 어깨 짜고 내려간다. 소리 없이 소리지르며, 소리 없이 눈물 흘리는, 소리 없는 신음 소리와 소리 없는 아우성. 얼굴이 일그러진 진초록의 신음 소리와 다리 부러진 목다리의 아우성을 껴안으며, 징그러운 낙동강 밤 물소리로 흘러내린다. 천지의 어둠 속을 좌익의 자리를 잃고, 팔을 잃고, 얼굴을 잃고, 이빨을 잃고, 혓바닥을 잃고, 턱을 잃고, 목덜미까지 잃어버리고는, 송두리째 불태운 고깃덩이로 징그럽게 서서, 혼신(渾身)을 살라먹은 헐벗은 조국의 오지랖에 피흘린 병신 자식으로 서서, 앙가슴을 어깨 짜고 걸어나간다. 걸어나간다. 남풍과 초록과 목다리 한 덩이로 엉켜 붙어 선 채로 거꾸러지면서, 일어서면서, 부추기면서, 나뒹굴면서 차마 바라볼 수 없는 무서운 밤 강물 소리에 꺼익 꺼익 울음을 삼키면서, 자꾸 자꾸 걸어나간다.

내 뼈중의 뼈

내 피중의 피

내 살중의 살

내 강물로 우는 어머니의

맑은 눈동자에 흐르는

유성(流星)의 상처를 아는가.

푸른 눈동자에는 언제나

사랑의 샘이 솟는다.

그러나,

포연(砲煙) 속에 휩싸여 울고 있는 샘.

기관총으로 탄피를 탈곡하던 강산은

난도질당한 어머니의 시신(屍身)이었다.

피로 얼룩진 山河

뼛속에서 샘솟는

조국은 눈물이었고

민족은 강물이었고

혈관으로 휘날리는 깃발

학도병들의 아우성 소리는

진군의 나팔이었습니다.

핏줄의 노래를 부르며

남풍이 출정(出征)하던 날

정한수 받쳐들고 이어나

새벽을 길어 올리시던

어머니의 기도(祈禱)는

생명이었고

사랑이었고

생사(生死)의 땀방울이었습니다.

제2장 부상병열차

절름발이가 기어간다.

조선조 개와(蓋瓦)가 물결치는 전주(全州)로

어둠을 물어뜯고 달리는

부상병열차 바퀴에

목화(木花) 헝겊이 물려있다.

숨막히는 열차

달음박질하는 바퀴 밑에서

뎅겅뎅겅 떨어져 나간 해골(骸骨)들이

풀 우거진 둔덕에서 노려보고 있다.

열차는,

새벽이 어둠을 밀어내듯

고난(苦難)의 역사를 빨래한다.

피 흐르는 상처를 동여매고

흑암(黑暗)을 물어뜯으며 달려나간다.

동해(東海)의 안개 걷히면

하얀 치마폭 거느린 산맥(山脈)들

손 저으며 불러 일렁이는 새벽

눈썹 어수선한 단잠을 깨어

태양은 붉게 타오르려나

「태양은 떠오를 것이다!」

「태양은 가라앉을 것이다!」

「태양은 우리를 찾아온다!」

「태양은 우리를 외면한다!」

「태양은 역사의 밭을 간다!」

「태양은 묘지의 풀을 뜯을 것이다!」

푸른 눈의 이국(異國) 병사와

205전투경찰대원과

홍안(紅顔)의 학도병을 실은 열차가

목화밭을 지나고

콩밭 감자밭 수수밭을 지나

미친 바람으로 지러나갔다.

산지기 집의 개나리 울타리를 지나고

동학민병의 징소리 처박혀 죽은

호남평야의 논두렁 밭고랑을 지나

검은 헝겊 물어뜯는 이빨 끝에

강(江)이 흐른다.

상처 깊은 입으로 말을 못하는

남풍의 동자(瞳子) 속으로

끝없는 강물이 흐른다.

인육(人肉)의 피비린내 번지는

열차의 판자 쪽 사이로

밤하늘 별들이 깜박인다.

목숨처럼 반짝이는

병사(兵士)의 눈망울 속으로

유성(流星)이 꼬리 빼며 흐른다.

잔인한 계절을 달리는 열차 속

의식(意識)의 가장자리에서

울려오는 소리―

만경강(萬頃江)의 노랫소리는

맑은 혼기(魂氣)로 흘러내린다.

「무궁화 아름다운 삼천리강산

고귀한 우리 겨레 살고있는 곳」

선로(線路)를 구르는 열차 바퀴에

심장이 일렁일렁 어깨춤 난다.

오오, 그러나

어지럽게 들려오는

마귀들의 울부짖음 소리

빨치산들의 총구가 불을 뿜는다.

좌익의 눈을 굴리는

소비에트의 잔인한 바람이

죽음의 단추를 누른다.

쾅!

철로(鐵路)가 파괴되고

쾅! 쾅!

열차가 무너진다.

학도병 부상병들이 곤두박질한다.

빨치산들이 불을 지르고

불 타죽은 병사들의 아우성 속을

남풍이 탈출한다.

초록이 탈출한다.

목달이 탈출한다.

적탄(敵彈) 속을 뚫고 달리는 자여

절룩이며 역사를 이어온 자여

시베리아의 바람이 선동할지라도

다시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

조국행진곡이 달려온다.

시냇물의 맑은 정신으로

불어오는 휘파람소리와

청국장 끓는 고향의 냄새

그 애향(愛鄕)으로 끓어 넘치는

싱싱한 시절을 다스리며

근육으로 꼬여 일어서는 소리―

소리소리 지르며

민방위대가 다려온다

특별기동대가 달려온다.

향토방위대의 고함소리와

빨치산들의 쫓겨가는 소리―

따발총이 고꾸라지고

탄창이 굴러 떨어지는 소리―

누런 탄환(彈丸)의 이빨들이

여기 저기 흩어지며 히히 웃는다.

웃음으로 사람잡는 바람의 이빨.

웃으면서 분노하고 총살하는

찬피동물의 미친 빛깔

욕망의 붉은 팬티가 히히 웃는다.

죽은 자는 흙으로 돌아가고

산 자는 열차를 기다리는데,

남풍의 눈을 닮은 하늘에서

예배당에서,

여인들이 나와서 간호를 한다.

「어린 학생들이 부상을 당했구나!」

「입을 다쳐서 말을 못하네!」

「죽물도 못 넘기니 큰일이야!」

「아이구, 가엾어라! 세상에……」

면장 남편은 쫓겨다니고

아들은 병정 간 뒤 소식이 없고

딸들은 빨치산에 끌려 다니는

가슴앓이 여인의 눈이 빛난다.

자식 같은 남풍의 눈길 속에는

끝없는 강물이 흘러내리고

강물은 굽이굽이 천리를 돌아

달밤을 애처롭게 찰랑거렸다.

하얀 손으로

하얀 십자가를

하얀 목에 걸어준다.

하얀 손으로

하얀 마음을 풀어 넣어

하얀 죽을 끓여준다.

하얀 손수건의 사상으로

하얀 죽물을 쥐어짜며

하얀 마음을 흘려 넣는다.

빨치산 졸개의 눈초리가

노집사를 쏘아본다.

검푸른 나뭇잎 사이로

쏘아보는 눈길에 독이 오른다.

죽 한 숟갈 떠 넣지 못하고

손수건을 쥐어짜며

심정을 흘려 넣어야하는

조국은 말을 잃은 벙어리 되었으니

답답한 가슴을 물어뜯는 바람이여!

남풍은 손가락으로 글씨를 쓴다.

땅에 그린 글씨,

그것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 뿐

세상에서 아는 이가 없다.

「내가 출정하던 날 우시던 어머니!

뒤란의 장독대에

정한수 올려놓고 기도하던 어머니!

행주치마에 돌을 나르시던 당신은

언제나 우리들의 가슴속에

목화를 심어왔는데,

사랑을 심어왔는데,

당신의 자랑이었던 나는

피투성이로 돌아와서는

얼굴 한쪽에서 목덜미까지

짜깁기한 깃발을 펄럭이며 웁니다!」

태양의 불꽃으로 부르짖는다.

손으로 부르짖는 불꽃

진한 피를 흘리며

손으로 노래하는 핏줄

손으로, 손가락으로,

검은흙을 후벼파며

심장으로 혈서를 쓴다.

배꼽으로 영기(令旗)를 받쳐들고 일어나

동서남북 어깨춤 추던

조상들의 백골(白骨)이 피리를 분다.

가슴으로, 심장으로,

애국의 노래를 부르며

혈관에 파동(波動)치는 조국의 깃발을

손가락으로 부르짖는다.

무명지 깨물어서 붉은 피를 흘려서

태극기 그려놓고 천세만세 부르며

화장할 노을로 타오르는 핏줄

피묻은 깃발이 펄럭인다.

빨치산을 무찌르고 돌아온

향토방위대원들이 삽질을 한다.

불타는 열차에서 시신(屍身)을 끌어내어

산그늘 내리는 백련산 허리에

무명용사 이름으로 합장(合葬)을 한다.

그 분노의 아우성으로

끓어오르던 열차의 불길!

머리풀며 울고 가는 강물은

언제 보아도 피눈물이다.

강물로 흐르는 눈물 언저리

꿈결처럼 바라보이는 산허리에

뜸부기 운다.

뜸부기 운다.

섬진강(蟾津江).

「어이, 남풍! 저 소리 들리는가?」

「듣고 있네……」

「저 소리엔 자운영(紫雲英)이 피어나지.」

「자운영뿐인가, 개나리도 핀다네.」

「그 옛날 논배미엔 뜸부기도 울었지…」

「병아리 시절이 그리워지는군…」

「개나리 꽃잎 물고 꿈꾸던 병아리…」

「옛날엔 발톱이 날카롭지 않았어.」

「전쟁을 후벼 파먹는 발톱들이야.」

「자운영 울인 물엔 하늘이 둥둥!」

「병아리 떼 봄나들이 다녀보았오?」

「할매랑 누이랑 취나물을 뜯었지!」

「나물 뜯던 가시내는 빨치산이 되었다네!」

「공비의 씨를 밴 채 죽은 계집도 많다지?」

「지리산은 눈물의 골짜기 뿐이야!」

「뜸부기 울던 논두렁에 시체들도 널렸어!」

「뻐꾸기 울던 골짜기엔 해골들뿐이지!」

「울지 말게…」

「울지 말게…」

누가 그대들의 무덤을 찾는다면

누가 그대들의 추억을 찾는다면

검은흙을 가리키리

푸른 풀잎을 가리키리

섬진강.

그 타오르던 불길

그 아우성이 여기에 잠들고

국방색 녹음으로 우거질

이 귀한 목숨들.

이 귀한 목숨들.

별들이 소곤대는 수풀 속에는

오천만 눈들이 반짝인다.

잠샛별을 머리에 이고 나가서

첫새벽을 길어오시는 어머니처럼

청명한 물을 이고

우리들 가슴으로 들어오시는

조국의 숨소리를 듣는다.

제3장 이 산하에는

산그늘이 내리는 오두막으로

할배와 할매가 기어든다.

산약(山藥)을 캐던 핼배와

ar화(木花)를 따던 할매의

골 깊은 손금으로 흘러내리는

목동(牧童)들의 피리소리―

피리는 약탕관(藥湯罐) 속에서

의병(義兵)들의 짚신 스치는 소리로 끓고 있다.

의병들의 뼛속에서

아우성으로 자란 인삼 녹용이

약탕 속에서 들끓고 있다.

손자(孫子)의 고추 하나 보자고

할배가 캐어온 약초를

할매가 끓이고 있다.

「짓밟힌 산하여, 이어나소서!

이 약을 드시고 원기(元氣)를 찾으소서!

보심(補心)의 진액에서 신기를 찾으소서!」

한밝산에 내려온

밝달 임금

한울님 보호하사

목숨을 이어 나온

배달(倍達)의 회생(回生)을 부채질하며

할매는 한약(韓藥)을 끓이고 있다.

일어나리라!

일어나리라!

기지개를 켜면서 일어나리라!

꿈틀거리면서, 출렁거리면서

이 강산(江山)은 일어나리라!

태양의 불꽃으로 일어나야 하는

이 산하(山河)에는

있어서는 안 될 일도 많고

있을 수 없는 일도 많다.

난데없는 바람이 목화를 타살하고

무명 두루마기를 목 졸라 죽인다.

진달래 개나리 다투어 피고

뻐꾸기 앞산 뒷산 울어대던

우리의 산하는 일그러졌다.

한 구덩이에 일흔 세 양민을 몰아넣고는

삽으로 곡괭이로 찍어 죽이고

쥐도 새도 모르게 묻어버리는

처참한 참극이 전국 방방곡곡

푸른 달빛 아래 진행되었다.

머슴이 주인을 살해하고

주인의 딸을 겁탈했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자의

팔뚝에 걸린 폭력,

불은 완장이 피를 불렀다.

산그늘 내리는 강영산(降靈山)으로

굶주림에 지친 양민(良民)들이

핫바지 차림으로 끌려나갔다.

소나 돼지처럼 끌려나갔다.

배운 거 있다고 끌려나가고

땅 몇 마지기 있다고 끌려나가고

공무원 노릇했다고 끌려나가고

군경(軍警) 가족이라 끄려나가고

하나님 믿는다고 끌려나가서는

온몸을 찢기어 죽임을 당하는

차마 바라볼 수 없는 참극이

목화밭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백의민족(白衣民族)의

하얀 가슴을 열고 목화를 가꾸던

농부는 끌려가 죽임을 당하고

쑥풀 개풀을 쥐어뜯으며 울던

어미는 겁탈 당하고

꽃 같은 꽃

조선의 딸들은 윤간(輪姦)당했다.

포승에 묶인 채 잔월(殘月)을 밟고 가는

지사(志士)들의 머리카락이

갈대 숲에 휘날리고 있었다.

사립문을 부여잡고 울부짖는

할매의 뼈울음을 짓밟으며,

둔덕을 뒹굴며 울부짖는

어미의 피울음을 짓밟으며,

삼십리 산길을 오르는

총 든 자의 머리카락 위에서

악령(惡靈)들이 칼춤을 추고 있었다.

목화밭으로 끌려온 촌로(村老)들이

피땀을 떨구면서 구덩이를 판다.

「자식의 무덤을 파다니

손자의 무덤을 파다니

이 빨갱이 앞잡이들아

너희들은 아비도 없느냐

너희들은 자식도 없느냐

욕된 삶은 죽기보다 못하다

늙은이도 함께 죽여라!」

두 눈을 뜨면서 감으면서

짓밟힌 목화밭으로

하얀 머리카락 휘날리면서

가슴을 판다.

가슴을 판다.

하늘을 올려보면서

조국의 심장을 판다.

죽음을 눈감으면서

어머니의 핏줄을 판다.

북방의 총구가 심장을 겨눈다.

반항도 못하고 학살당하는 양민들.

곡괭이에 찍혀 죽는 사람

따발총에 맞아 죽는 사람

흰옷 입은 양민들이 생매장을 당한다.

달빛을 밟으며 머리를 떨군 채

묶여 가는 사람들의

포승 위로 땀방울이 떨어진다.

「지금은 내가 묶여가지만

너희들은 영원히 묶일 것이다!」

「반동분자는 동물이다,

동물을 죽이는 데 가책(呵責)은 없다!」

「네 아비도 동물이고,

네 어미도 동물이란 마이냐?」

「반동부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동물이다.

적화(赤化)에 합당하면 정당화된다!」

「에이, 몹쓸 놈의 자식!

네 자식이 너를 저주하고

네 후손이 너를 증오할 것이다!」

「우리는 조국이 없지만,

끝날에 훈장(勳章)이 기다리고 있다!」

「무자비한 학살로 얻은 훈장은

저주(咀呪)의 징표(徵表)가될 것이다!」

달빛이 구름 속으로 도사릴 때

노루처럼 튀어나온 박대장이

복수(復讐)의 칼을 갈며 숲길을 간다.

가족은 피를 말린 원수의 족제비 눈깔을 증오하면서, 두 갈래 갈라진 붉은 혓바닥을 저주하면서, 고지(高地)마다 초소를 세울 때, 국방색 나무들이 하늘을 붙들고 일제히 일어선다. 억새풀을 풀어헤치며 천왕봉(天王峰)이 일어선다. 원추리를 빗질하며 할미峰이 일어선다. 솔바람 소리에 귀를 세우며 토끼峰이 일어선다. 각시머리 따 내리며 옥녀봉(玉女峰)이 일어선다. 꺽정샘에 물 마시고 반야봉(盤若峰)이 일어선다. 신포정에 미역 감던 해월봉(海月峰)이 일어선다. 하얀 안게 굼틀거리며 청룡(靑龍)은 솟아오르고, 산허리 감돌던 안개 벗어 내리며 왕실봉(王室峰)이 솟아오른다. 안하(雁下) 열 두 봉을 굼실굼실 치달리며, 부서지는 햇살을 받아 마신다.

제4장 푸른 행진

공명정대(公明正大)하게 하라

공명정대(公明正大)하게 하라

양심이 조상의 선언문(宣言文)을 읽는다.

북한군 패잔병이 도주하는 가막재에서

조상들의 피리소리를 듣는다.

자유의 환성이 터져 나오는

열린 이의 가슴속에는

파란 죽순(竹筍)이 뻗쳐오른다.

죽순들이 소리를 지른다.

죽순은 죽순끼리

푸른 하늘을 소리지른다.

동해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목숨껏 휘날리는 깃발을 마주 잡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향토방위대가 일어선다.

박대장의 눈물 속에는,

오리발의 눈물 속에는,

강바람의 눈물 속에는,

끝없는 강물이 흐른다.

전장(戰場)에서 찢겨진

주국의 기폭을 짜깁기해 들고

생사(生死)의 기로(岐路)에서 돌아온

남풍의 눈물 속에는,

초록의 눈물 속에는,

달이의 눈물 속에는,

끝없는 강물이 흐른다.

자유롭게 흐르는 강,

평화를 찾아 달리는 강,

역사를 증언하며 살아온 강,

사랑을 어깨 짜고 얼컥여 온 강,

조국의 영원한 강줄기는

울어도 울어도 울 수 있으니

우는 보람이 있었고

우는 자의 내일이 있었다.

조국은 언제나 강물이어라

강물은 언제나 눈물이어라

충신(忠臣)의 산맥(山脈)을 몸부림치는

강물은 언제나 생명이어라

태양에 끓어 번지는 눈물이어라

눈물 속에 피어나는 소망이어라.

하늘을 길어 붓는 물동이에는

어머니의 숨결이 어리어 있다.

우리들의 심장에는 언제나

겨레의 종(鐘)이 울고 있다.

그러나,

안개와 어둠에 쌓여

우고 있는 혼(魂).

조국은 거대한 눈물이어라

민족은 거대한 불길이어라

눈물은 눈물끼리

얼키고 설키어

고산식물의 뿌리에서 뿌리로

흘러내리고

이름 모를 새소리와 바람소리는

고로쇠 심장으로 스며들지만,

아아, 산이 막혀 못 오시나요!

목이 메어 울던

나와 당신의 메아리는

만나지 못하고,

나와 당신의 목소리는

껴안지 못하고,

벽(壁)과 벽이 마주보는

낮과 밤의 갈림길에서

통일의 노래를 부르노라!

이이들도 줄을 넘으며

시냇물의 정신으로 노래 부르는

나와 당신의 나라

우리나라의

뼈저린 소원을 비노라!

어린이들이 역사책을 햇살에 말릴 때

아이들은 어른의 흉내를 낸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군가를 흉내낸다.

아이들은 어른의 몸짓을 흉내낸다.

막대에 끈을 달아 어깨에 메고

삼천리강산을 노래 부른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걸어가면서

낙동강 꽃잎을 노래 부른다.

말금한 빛살로 노래하던

가을 햇살이 산마루에 걸린다.

어둠이 밀려드는 원통산 골짜기

감자밭 수수밭 바람이 흩어진다.

괴뢰군 장교가 껄축 껄축 걸어온다.

두 간호병이 치적 치적 걸어온다.

풀 죽은 시베리아의 바람을

남풍이 쓰러뜨린다.

박대장이 다리를 걷어 넘길 때

오리발이 따발총을 나꿔챈다.

어둠이 깊을수록 여명(黎明)은 다가온다.

어둠 속을 낼름거리던

붉은 혓바닥은 가고

푸른 행진이 시작된다.

메마른 강물 다시 흐르고

산맥들 일어나 어깨춤 춘다.

현관으로 파도가 밀려온다.

애국의 깃발이 펄럭인다.

곡식(穀食)으로 무기(武器)를 구입하여

무장(武裝)한 향토방위대원들이

마을 주변에 초소를 짓고

빨치산들의 준동을 막고 있었다.

국방색 전투복이 어둠을 가른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눈동자에서

반짝이는 별빛을 본다.

반짝이는 별빛 속에서

폭포(瀑布) 소리를 듣는다.

반짝이는 그대들은

겨레의 정신을

폭포의 하늘로 솟아오르게 하는

영혼의 독수리.

그대들이 바라보는 눈,

그대들이 소리치는 입,

그대들이 뒤흔드는 손,

그대들이 질주하는 발,

그대들의 영과 육이 움직이는 대로

우리들의 심장은 뛰고 있다.

그대들의 메아리―

혈관에 파동치는 깃발!

그대들은,

애향의 정신으로

겨레의 가슴속을

목화의 빛깔로 빨래하고 있다.

밤하늘의 별은 그대들의 눈동자

그대들의 별빛을 사랑한다.

그대들 가슴속 사랑의 뿌리

줄기와 가지와

향일(向日)하는 잎사귀를 사랑한다.

어둠을 살라먹고 피어오르는

목화의 의지를 사랑한다.

그대들의 잎사귀,

빛을 향하여 팔을 벌리는

의식(意識)의 세포(細胞)를 사랑한다.

그대들은 그렇게 사랑할 수 있도록

그대들은 언제나

겨레 모두가 믿고 따를 수 있도록

불행한 시대와 싸우고 있다.

그대 번득여 온 눈,

그대 소리쳐 온 입,

그대 고동쳐 온 피,

그대 변함 없는 조국의 얼로써

붉은 무리를 무찌르거늘

누가 그 기개(氣槪) 꺾을 것인가.

나는 바라본다.

그대들의 슬기를.

그대들의 눈에 형형이 빛나는 광채(光彩)

그대들의 아침 이슬을 바라본다.

그대들의 예리(銳利)한 판단과

그대들의 놀라운 용기(勇氣)와

그대들의 기백(氣魄)이 어디서 솟구치며,

그대들의 불붙는 정의감(正義感)과

그대들의 불굴의 투지는 어디서 샘솟는가.

「공명정대하라」는 하늘의 소리

「공명정대하라」는 민족의 소리

「공명정대하라」는 본심의 소리 있어

공명정대하려 하오니

머리로 하늘을 이고

어깨로 하늘을 메고

두 발로 대지(大地)를 딛고

두 팔로 허리를 짚고 서서

하늘과 땅을 움직인다.

천지가 반동을 시작하면

어깨와 어깨와

팔과 팔

탄대(彈帶) 두른 허리와 허리가

영기(令旗)의 바람을 일으킨다.

「양양한 앞길을 바라볼 떼에

혈관에 파동치는 애국의 깃발

넓고 넓은 사나이 마음

생사도 다 버리고 공명도 없다

들어라 우리들의 힘찬 맥박을

가슴에 울리는 조국의 소리―」

푸른 군가(軍歌)를 따라가는

푸른 행진(行進)의 강물 소리

푸른 산맥들이 춤을 추고

푸른 강물의 치맛자락이

푸른 생기(生氣)로 용솟음친다.

「군수 영감님은 아버지 같습니다.」

「면장은 면민의 어버이 아닌가?」

「군수님을 어버이로 생각합니다.」

「어버이 되기는 어려운 일이야.」

「심정의 뿌리는 어버이 심정이지요.」

「사랑의 뿌리는 부모의 사랑이지.」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아프지 않은 게 없지요?」

「아파야 한다! 아파야 한다! 아파할 줄 알아야 한다! 떨고 있는 자있거든 잠자지 않고 울어야 한다! 넘기지 못하는 밥덩이에 걸려 우는 조국! 목메어 우는 어버이의 심정으로 아들딸을 품어야 한다. 품어야 한다. 어버이의 사랑으로 품어야 한다.」

면민 앞에서 면장이 눈물을 흘린다.

군민 앞에서 군수가 눈물을 흘린다.

마이크에 피를 토하는 사람과

피와 눈물과 땀이 재산인

한민족의 무명 두루마기들이

조각 가마니에 앉아 울고 있다.

선량한 양민들이 그 얼마나 당했는가!

죄 없는 형벌을 그 얼마나 받았는가!

도끼로 찍어 죽이고

낫으로 찍어 죽이는

그 처참한 참극을

모두들 보았으리!

모두들 겪었으리!

제5장 중과부적(衆寡不敵)

무명지 깨물어서 붉은 피를 흘려서

태극기 그려놓고 천세 만세 부르는

정의(正義)의 핏줄이 흐르고 있다.

진실이 거짓을 집어삼키고

어둠이 천지를 뒤덮는다 할지라도

피 흘리며 일어서는 용사가 있다.

산그늘이 내리는 국사봉(國師峰)을

국방색 전투복이 기어오른다.

수류탄을 양 가슴에 주렁주렁 달고

총을 멘 향토방위대원들이

국사봉 상상봉으로 기어오른다.

빨치산은 1800명

향토방위대원은 30명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에

창백한 초승달이 내려보는 숲을

마파람이 머리를 가로젓는다.

빨치산들이 소를 잡아먹는다.

면장 집에서 끌려온 소의 눈깔이

돌무더기에 떨어져 있다.

고난(苦難)의 밭을 갈아온 소가

반역의 무리에 도살(屠殺)당한다.

北에서 내려온 ‘이리’와

南에서 둔갑(遁甲)한 ‘여우’가

조상(祖上)의 뼈에 못을 박는다.

네 개의 말뚝과

여덟 개의 말뚝에

붙들려 죽은 우신(牛神)의 십자가

가죽에 고인 육수의 하늘에서

살점을 건져 먹는다.

산발(散髮)한 연기가 피어오른다.

약탈해 온 백미(白米) 타는 냄새

불 타 죽은 누른 밥 덩이가

매운 눈물을 흘린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족제비 눈깔이 번득인다.

억수로 쏟아지는 총탄 사이를

국방색 행렬이 흩어져 내린다.

따발총에서 탈출한 탄창이

꽹과리소리를 지르면서

논두렁 밭고랑을 굴러 떨어진다.

빨치산에 끌려온 여인이

국군에 밥해주었다는 죄명으로

삼나무에 매달려 죽임을 당한다.

벼락에 맞아죽은 삼나무

하나씩

둘씩

각을 자르는

붉은 대검의 싸늘한 바람이

맹수처럼 여인을 찢어발긴다.

「내 하늘이 무너졌구나

내 조국이 동강났구나

오오, 원통한 죽음이여!

팔과 다리 잘린 혼신(渾身)으로

까마귀 떼 날아들지라도

일편단심을 쪼아먹지 못하리.

천지 물도 못 마시고 간 여인이라고

나의 두개골(頭蓋骨)을 파먹는다 할지라도

나의 영혼은 앗아가지 못하리!」

여인의 고무신짝이 나뒹굴고 있다.

저만치 벗겨져 나간 고무신짝이

분노한 흙을 집어먹고 있다.

세상에 무슨 죄가 있기에

치마저고리로 끌려나와

개죽음을 당해야 하는가.

어릴 때 주워다 기른

미친개에게 물려 죽는다.

붉은 완장에 우쭐대는

머슴에게 몸을 빼앗기고

목숨까지 빼앗기는

여인의 옷고름이 풀숲에 걸려있다.

아아, 가슴에서 떨어져나간

옷고름 짝,

시베리아의 바람에 펄럭이는 옷고름과

찢겨진 치맛자락이

풀숲에 버려져 있다.

누런 이빨이 히히 웃는다.

복수의 칼날이 번득인다.

남근 잘린 늑대가 나동그라지고

혀를 물고 쓰러진 여인의 오지랖에

개미들의 행렬이 뻗어나간다.

반만년의 눈물을 찍어 내리며

한숨을 불어 끄던 눈물의 어머니.

새벽마다 늘 맑은 물을 이고

물동이에 초롱초롱한 별을 이고

숨가쁘게 출렁이며 오시던 어머니.

서리 돋은 물방울을 씻어 내리며

가슴으로 들어오시던 어머니가

미친개에게 물려 죽는다.

빨치산 처녀가 주검을 바라본다.

어머니의 죽음을 보면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여성동무!

여성동무!

오오, 그러나

여성동무의 껍질 속 씨알은

아메바가 아니다!

유인원(類人猿)이 아니다!

인간의 소리로 태어나던 날부터

인간의 이름으로 숨질 때까지

잠겨있는 내용은 어머니의 것이다.

자다가도 젖을 찾는 어머니의 것이다.

쐐기로 눈물을 틀어막는다.

양심이 방망이질을 하는

감관(感官)의 창(窓)을 닫는다.

부락(部落)을 기습하는 핫바지들이

고지(高地)를 점령한다.

괭이 잡던 손으로 총을 들고

회문산(回文山)으로

백년산(白蓮山)으로

원통산(元通山)으로

용골산(龍骨山)으로

성수산(聖壽山)으로

팔공산(八公山)으로

문수산(文殊山)으로

추월산(秋月山)으로

지리산(智異山)으로

천왕봉(天王峰)으로

국사봉(國師峰)으로

소 돼지처럼 몰며 끌며

때리며, 밟으며, 찌르며, 죽이며

부녀자들을 겁탈하며

푸른 목숨들을 윤간하며

어둠을 칭칭 감고 있었다.

붉은 혀를 날름대는 두 개의 혓바닥

갈라진 야욕이 발광을 한다.

적화(赤化)를 위하여

살인이나 양친을 밀고하는 행위도

정당화된다고 하는

적색(赤色)의 신조(信條)가

뇌세포(腦細胞)를 조종하여

대량학살(大量虐殺)을 일삼는다.

아우성의 불길이 타오른다.

산불로 타오르는

분노의 아우성

아우성의 불길

사랑과 미움과

저주로 깎여 내린 산허리마다

솔바람 흙바람이 어스러져 내린다.

제6장 위기일발(危機一髮)

밤은 겨레의 본질을 가린다.

밤은 공비(共匪)들을 출몰하게 하고

밤은 야성이 눈을 뜨게 하고

밤은 붉은 피를 흘리게 한다.

총구마다 야욕의 혓바닥이 날름거린다.

피를 부르는 독사(毒蛇)의 눈초리가

어미의 심장을 강타한다.

몇 자루의 따발총 아래

소처럼 말없이 끌려가는

아이들의 아버지들이 있다.

짐승에게 끌려가는

슬픈 아이들의 아버지.

윤 목사가 끌려간다.

송 장로가 끌려간다.

목덜미를 타 내리는 십자가가

땀 속으로 침몰한다.

「주여, 조국을 지켜주소서!」

「종교는 아편이다, 헛소리 말라!」

「종교는 사랑이다, 침을 뱉지 말라!」

초가삼간에 타오르는 불길!

애끓는 산하(山河)에 불이 번진다.

농부의 가슴엔 화톳불이 붙고

사람과 짐승을 분간할 수 없는

수라장 속에서

애를 밴 박이 나뒹굴고 있다.

병아리 떼 나들이 다니던

개나리 울타리는 날아가고

박꽃이 하얗게 웃던

초가집은 불탔다.

아우성과 아우성과

눈물과 눈물과

한숨과 한숨과

몸부림 맘부림

물려 뜯겨온 조국의

뼈대있는 피리소리를 붙들고

할매와 손주딸이 몸부림친다.

똑똑한 자식들은 죽어나가고

비틀어진 족제비눈들은 완장을 뽐내는

이 오탁(汚濁)의 시궁창에서

땅을 치며 울부짖는

하얀 무명옷의 여인.

여인의 신(神)께서는 아우의 제물만 받으시므로 분노한 형이 아우를 죽일 때부터 형제의 싸움이 계속되더니, 끝날에는 동강난 반도, 피로 얼룩진 산허리에서 총맞아 죽은 형제를 부르며 찢어지는 아픔을 삼키면서 피묻은 역사를 짜깁기해 온 여인은 항아리가 되었다.

찢겨진 깃발을 짜깁기해 들고 일어나

핏줄로 휘날리는 부르짖음 소리―

징그러운 잔등 밑으로 강이 흐른다.

공비(共匪)들이 우글거리는

추월산(秋月山) 골짜기

뱀의 주둥이를 흉내내는

붉은 깃발들

총을 겨누는 공비들 앞에서

가슴을 열고 손을 들어올리는

찬송가와 기도 소리가

하늘을 흔들어 깨운다.

조국의 심장을 겨누는 총구 앞에서

주여, 할만하면 이 잔을 지나가게 하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

기도에 강물도 귀를 기울인다.

보리밭 하늘가에서 젖을 물리던

어머니의 젖줄이 흐른다.

만경강(萬頃江)

만경강(萬頃江)

만경강의 노랫소리에

빨치산의 귀가 잠긴다.

좌익(左翼)의 미친 바람에 죽어 자빠진 이의 옷자락을 찢어, 아주까리 기름불을 붙여들고, 선반 밑을 더듬거리며, 고추장을 훔쳐내던 빨치산 처녀에게 돌아오는 식물의 정신, 깨소금을 털어 가던 손이 떨린다. 밤새도록 잠 못 잔 눈이 빛나고, 붉은 학습의 벽돌에 막혔던 귀가 열리고, 멍든 핏줄이 일어날 때, 죽었던 어머니가 살아날 때, 양심이 가리키는 곳으로 좌익이 좌익을 사살한다.

푸른 하늘을 여는 자유여

심장으로 비벼대는 기도여

그대 말씀의 씨앗이

빨치산 처녀를 구원했노라

그대가 포승을 자르고

묶인 자를 돌려보낼 때부터

그대는 자유를 얻었노라!

그대 가슴에 잠겨있던

검은 골짜기의 안개 걷히고

마음껏 열리는 자유의 창으로

평화의 햇살이 비치는가.

저 하늘에 새가 날 듯

자유함을 받는 자여

죽고자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는

죽음 속 삶의 역설에

윤 목사와 빨치산이 죽고 산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신작로를

향토방위군이 밟고 간다.

진주라 천리 길

내 어이, 내 어이

소금물 적신 주먹밥을 베어먹으며

남으로 남으로 내려간다.

더럽혀진 땅에 서식(棲息)하는

기생동물을 바라본다.

민족이야 망하거나 말거나

이웃이야 죽거나 말거나

자기만을 위해서 남의 등치는

이기(利己)의 동물을 바라본다.

남편과 아들딸을 전장에 잃고

영영 가슴아피 병으로 남아서

실날 같은 목숨을 이어 나오던

죽창댁의 비명이

눈 덮인 담장을 뛰어 넘는다.

석양(夕陽)이 기대앉은 담장 밑에는

남루한 떡목판이 놓여 있었다.

눈길에 고꾸라져 비틀어진 손

영영 병신이 된 손을 움직이어

정성으로 빚어 만든 떡을 보고

굶주림에 지친 사내들이

백주(白晝)에 훔쳐 달아난다.

노파(老婆)의 찢겨지는 비명 소리는

양심의 지하실에 처넣어두고

행렬 속으로 사라지는 기생동물들

민족의 행렬에는 언제나

행진곡과 장송곡이 오르내렸다.

모성(母性)을 빼앗긴 아이들이

양공주에 흙을 뿌리며 욕설을 퍼붓는

오탁(汚濁)의 군상(群像)들을 보았지!

테라마이신의 약효가 번지듯

사지백체(四肢百體)로 번져나가는

썩은 죄의 뿌리를 나는 보았지!

굶어 죽은 죽창댁의 대밭 속에는

언제나 비비새가 울고 있었지

죽창댁이 물을 길어 오르는

새벽녘 가파른 오르막길을

비비새가 울고 있었지.

겨레의 맑은 정신으로 우는

비비새의 혼(魂)은

죽순(竹筍)의 이슬방울을 퉁겨 올린다.

죽창댁의 눈물을 햇살이 닦는다 .

아침 이슬로 열리는

민족의 창세기(創世記).

머리로 목덜미로 돌돌 감아 내리던

목화 빛깔의 목도리에서

녹아 내린 눈이슬이 빛을 뿜는다.

그대, 목화로 피어오르는

영롱한 빛깔

겨레의 동자(瞳子)로 살아서

돌아누운 산하를 이야기한다.

엿 목판을 든 소년이 할매를 본다.

엿 목판을 든 노파(老婆)가 손자를 본다.

할매!

오야!

할매!

오야!

내 새끼, 내 새끼, 내 새끼야!

내 새끼 부랄 좀 만져보자!

애비 에미 죽은 터에 씨는 살아서

짝만 지어주면 눈을 감겠구나!

죽창댁이 죽던 날부터

온 몸에 기갈이 들어

소년의 대지는 황폐해져 갔다.

술이 오른 무명 두루마기가

바람에 휘날리며 엄동(嚴冬)을 간다.

南으로 가는 행렬을 가로막으며

양팔을 벌리고 서서

못 간다, 못 간다, 이 놈들아!

이 고장 버리고는 못 간다, 이놈들아!

조국을 버리고 어디로 가느냐!

앉은뱅이 어미를 버리고

길 잃은 어린것을 버리고

너희들이 어디로 가고 있느냐!

너희들의 살과 너희들의 뼈,

너희들의 피는 누구의 것이며,

너희들의 혼(魂)은 누구의 것이냐!

너희들끼리 가려거든

나를 밟고 지나가거라!

오리발이 면장을 붙들고 소리지른다.

「형님!」

「이놈아!」

「어쩌려고 이러십니까? 여기서 총에 맞아 죽으면 개죽음입니다!」

「이놈아, 너는 헐벗은 조국에 총을 겨누지 말라!」

어머니의 아픔으로 태어나

어머니의 품에서 자란 놈들이

어머니의 가슴에 총을 겨눈다.

자식에게 총을 맞고 죽은 어머니

슬픈 이 조국을

우리는 마르고 닳도록 지켜야 한다.

제7장 선무공작(宣撫工作)

함박눈이 내린다.

사랑눈이 내린다.

목화의 마음이 세상을 덮는다.

겨레의 가슴으로

하얀 목화송이가 쌓인다.

탕자의 이마 위에

사랑의 손길을 펴드는

성자(聖者)의 은혜가 내린다.

맑은 눈을 가진 분이 계시거든

향토방위대를 보라!

그들의 동자(瞳子)에 타오르는

조국의 횃불을 보라!

슬플 때면 우러러도 보고

외로울 때로는

얼싸안던 하늘에

저리도 찬란히 솟아오르는

태양의 불꽃을 아는가.

한 마음, 한 뜻을 뭉쳐나는

꿀벌 떼들의 이야기를.

조국은 하나요,

겨레도 한 겨레라는

태양족의 노래를 아는가.

푸른 행진의 발자국 소리

울려 퍼지는 산하(山河)

청청 하늘 가득히

심정을 어깨 짜고

역사의 밭을 갈아온 비둘기 떼를

당신은 아는가.

모진 비바람 맞으면서도

사선(死線)을 뚫고

사선(死線)을 뚫고

하늘로 머리 두른 수림(樹林) 같이

팔을 벌리며

팔을 벌리며

찢겨진 깃발을 펄럭여온

조국의 아픔을 아는가.

편안한 불의(不義)의 길을 버리고

험난한 정의(正義)의 길을 택하여

애타게 가슴을 쥐어뜯으며

카인을 아벨로 돌이키려는

국방색 심장을 아는가.

여기,

싱싱한 풀을 기르며

하늘로 머리 두른 대지 위에는

공비들의 총탄에 맞아 죽은

향토방위대원들의 혼령도 떠돌았다.

산그늘 내리는 골짜기에서

자식의 죽음에 피를 토하고

메마른 쑥을 쥐어뜯으며

파란만장한 생애의 숨을 거둔

백발의 혼령도 떠돌았다.

마파람 설레는 야산(野山)에는

공비들의 포탄에 맞아 죽은

어린 학생들의 혼령도 떠돌고,

혈육의 핏자국을 따라가면서

고무신짝에 살점을 주워담던

미친 어머니의 혼령도 떠돌았다.

맑은 눈을 가진 분이 계시거든

진실의 눈으로 바라봐 주오.

원한이 아무리 사무쳤다 하여도

공비들을 사살하지 말고

자수시켜 사려주자고

우익(右翼)의 팔을 들어 선도하는 것은

내일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맑은 귀를 가진 분이 계시거든

흙 속에 묻힌 소리를 들어주오.

피를 피로 갚지 말고

눈물 속 사랑으로 가꾸어 온

비둘기 떼의 날개 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오.

화염(火焰)이 불타는 조국산하를

하늘을, 땅을, 온 천주(天宙)를

진실의 눈으로 바라봐 주십시오.

뜨거운 가슴으로 자수를 바라는

이 아침 비둘기 떼를 바라봐 주오.

공비들이 나와서 자수를 한다.

고무줄을 넘으며 통일의 노래 부르는

영희네 아빠와

순이네 아빠는

머리를 수그리고 자수를 한다.

경찰서장은 자유를 선언했다.

참깨 밭에 내리는 비둘기 같이

아침 햇볕도 마음대로 쪼이고

맑은 공기도 마음대로 마시라고

자수한 이들에게 광명을 선언했다.

오오, 그러나

자유는 싸워서 쟁취해야 하는 것

평화는 피흘려 찾는 것이기에

값진 보물, 영원한 생명이어라.

아무리 깊은 어둠 속에서도

이 보물만 간직하면

흑암(黑暗)은 밀려가고

아무리 거센 폭풍 속에서도

이 보물만 간직하면

바람은 사라진다.

깊은 밤

누운 달을 밟으며

빨치산들이 내려온다.

눈을 번득이며

칼을 번득이며

마을을 기습한 공비(共匪)들이

잠자는 자수자들을 사살했다.

제8장 옥쇄직전(玉碎直前)

산그늘 내리는 팔공산에서

공비들이 내려온다.

용골산에 진을 치던 외팔이부대가

어둠을 데리고 내려온다.

늙은 어머니의 약을 다려 짜던

신순경이 공비들에게 붙들린다.

어둠 속의 공비들이

양민을 개돼지처럼 끌며 몰며

사지를 갈기갈기 절단 낸다.

차마 바라볼 수 없어

하늘도 땅도 눈을 감은 밤

겨레붙이의 팔다리를 자르는

공비들 속에는

신순경의 형도 있었다.

죽음의 문으로 들어서면 말이 없지만

죄 없이 죽어 가는 피의 소리는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불안과 공포,

원귀도 천추의 원한으로 떠돈다.

피투성이가 논고랑으로 굴러 떨어진다.

풀뿌리에 흘러내린 물줄기가

붉은 피를 투명하게 얼어 있었다.

조상의 백골과 만나는 피,

자자손손 널리널리 퍼지는 피,

피는 산하의 물소리 따라

밤새도록 십리를 흐르고

밤새도록 백리를 흐르고

산하를 메아리치던 신순경의 피는

어둠 속을 흐르다가

투명(透明)하게 얼어붙는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

동학민병의 백골이 묻힌 평야―

논두렁과 논두렁 사이사이

투명하게 얼어붙은 도랑물 어름위로

붉은 피가 굳어 있었다.

밤하늘 나는 철새들이

끼륵 끼륵 울면서 어둠을 간다.

한 밤 중 지난 어둠의 늪을

피는 피끼리 엉겨붙는다.

눈알 뽑힌 동굴에 열린 하늘

하늘을 철새들이 날아간다.

어둠을 헤집는 새들도

길게 목을 늘인다.

푸른 목숨이 끊어지는

오오, 이 밤엔 철새들도 우는가.

남북을 오가는 날짐승도 우는가.

숨쉬던 조국의 피가 멈추고

눅눅한 어둠 속

하늘땅의 혈관을 절단시키는

동족상잔의 피울음을 우는가.

이렇게,

한 인생과

한 우주가 무참히도 짓밟히다니!

이렇게,

따뜻한 말 한마디

주고받을 수도 없게 되는 것을.

어머니의 한약을 짜던

그대 뜨거운 손

조국의 손을

만져볼 수조차 없게 되는 것을.

살아도 살아도 끝나지 않는,

골백번 고쳐 살면 되는 것처럼

그렇게 못살게 굴던 무리들이

본심의 천둥소리를

타작 마당의 방망이질 소리를

어찌 다 감당할 수 있을까.

팔을 자르면 팔이 순응하나

눈을 뽑으면 눈이 순응하나

변하지 않는 본심과

변할 수 없는 사랑의 눈

자유의 빛살을 찾아가는

의식(意識)의 풍향(風向)을 막을 수 있을까.

무장공비들이 마을을 기습(奇襲)한다.

산산이 부서지는 약탕관 속에서

들려오는 신순경의 비명 소리

비명은 하늘땅을 찢어놓았다.

노모(老母)의 신음 소리가 토방으로 떨어진다.

아가야!

아가야!

어떤 놈들이 우리 아기 데려가느냐!

한 나절의 총격전에 실탄은 바닥났다.

포위 당한 아군들은

깨끗한 죽음을 찾아

실탄 두 발을 아끼고 있었다.

옥쇄 직전의 순간에

향토방위대원들이 달려온다.

박대장이 달려온다.

오리발이 다려온다.

진초록이 달려온다.

공비들의 심장부에서 박격포탄이 터졌다.

쫓겨가는 공비들을 삽살개가 짖는다.

잠들었던 조상들이 영기(令旗) 들고일어나

꽹과리 치고 징치며 미쳐 날뛴다.

제9장 밀물과 썰물

「배운 거 있다고 죽이기냐?」

「지식인은 반동분자다!」

「땅 몇 마지기 있다고 죽이기냐?」

「착취계급은 모조리 죽여야 한다.」

「제물이 선악의 기준이 되느냐?」

「피고는 웬 말이 많으냐? 재판은 5분간이다. 이 악질 반동에게 기름을 끼얹고 불을 질러라!」

불붙어 나뒹구는 몸뚱이 위로

불티가 휘날리는

만일사의 밤은 눈이 멀었다.

인민군 패잔병들이 우글거리는

만일사(萬日寺)의 밤은

붉은 학습으로 눈이 멀었다.

혁명일꾼의 이름으로

마을마다 불을 지르고

사살하고 탈취하여 가는

두더지의 밤은 눈이 멀었다.

만일사를 사이에 두고

낮과 밤으로 갈라지는

회문산 골짜기는

홍채모양체염(虹彩毛樣體炎)에 걸려있다.

검은 동자는 검은 동자를 옹호하고

흰 창은 더욱 흰 창을 옹호한다.

검은 동자와 흰 창 사이

낮과 밤의 경계선에서

충혈의 눈을 굴리는

백발 노인의 두루마기가 펄럭인다.

낮에는 박대장의 말을 들어야 하고

밤에는 외팔이의 말을 들어야 하는

밀물과 썰물의 우렁이 껍질은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숙명이었다.

학정(鶴停) 노인은 이념의 덫을 알지 못했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낮과 밤의 갈림길에서

큰놈과 작은놈이 갈라진 사연이다.

큰놈 빨치산은 밤에만 오고

작은놈 경찰관은 낮에만 와서

늙은 아비를 통하여 은밀한 사연을 전한다.

큰놈의 편지가 작은놈에게 전해지고

작은놈 편지가 큰놈에게 가지만

그것은 밤낮의 역사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갈 뿐이었다.

「외팔이 밤에 오거든

손들고 나오라고 전해주시오

여단작전이 시작되기 전에

자수하라고 전해주시오」

화전(火田)에서 강냉이를 꺾어들고

허기진 배를 채우면서

산자락을 내려가다가

마을을 털어 오던 공비와 부딪친다.

붉은 완장에 우쭐대던 머슴이

주인의 가족을 강변으로 끌어내어

생사람에게 기름을 뿌리고

불을 질러 태워 죽였다.

갈 곳 없는 외팔이부대는

혁명군의 이름으로 우쭐거리며

험한 산의 준령을 기어오른다.

엠원소총과 아세보총과 카빈총과 따발총의

불을 뿜는 총격전은 오래 가지 못했다.

푸른 주검들이 나뒹굴고

공비들은 퇴각한다.

외팔이의 뒤를 쫓아

박대장이 추격한다.

콩을 볶는 총소리는 산등성이를 넘어가고

골짜기를 울리는 신음 소리

대낮이 이렇게 무서울 수가

정적(靜寂)이 이렇게 무서울 수가.

징그러운 이를 악물고 노려보는

강냉이의 이빨

물어뜯다 버린 강냉이가

빨치산의 옆구리에서 나뒹굴고 있다.

백발이 성성한 학정 노인이

큰놈과 작은놈의 시신(屍身) 곁에서

하늘을 우러르며 절규하고 있었다.

멍든 가슴을 열고 사는

조국은 눈물의 강이라고

청청 하늘을 우러르고 있었다.

으스스 어스러지는 북녘의 바람,

공비들이 여기 저기 흩어져 내린다.

막다른 길에서

쥐구멍을 찾는 무리가

가랑잎 날리듯 흩어져 내린다.

東洋拓植株式會社를 뚫어놓고

정신대를 빼어먹고 도주한

왜군들의 지까다비

돌머리(石頭里) 뒷산에는

폐광(廢鑛)이 흉한 입을 벌리고 있었다.

박대장에 쫓기던 외팔이가

동굴 속으로 숨어들고

향토방위대원들이 입구를 지킨다.

손들고 나오라!

손들고 나오라!

박대장의 목소리가 굴속을 울린다.

나와서 항복하라!

항복하면 살려준단다!

어머니의 떨리는 목소리도

꿈결처럼 굴속을 떨며 맴돈다.

외팔이는,

어머니의 떨리는 목소리를 듣는다.

아내의 떨리는 소리를 듣는다.

어린것의 아우성을 듣는다.

조상들의 풍악 소리를 듣는다.

모든 소리가 심장으로 빨려드는

빨치산은 마침내,

눈물을 꺾쇠로 틀어막고

수류탄 안전핀을 뽑는다.

내 아들딸에게는

두더지의 생리를 물려주지 말라

태양도 부끄러워 바로 보지 못하고

하늘도 염치없어 올려보지 못하며

그늘에서 그늘 속

땅굴로만 숨어드는

이 두더지에 침을 뱉게 하라.

내 두개골에 내려오는

까마귀 떼의 저주를

아이들에겐 듣게 하지 말라.

얄루강보다도 징그러운

시베리아의 쇠가

손금을 벗어나려는 순간,

어머니―, 용서하세요!

쾅!

천지 무너지는 폭음과 함께

혼신은 갈기갈기

피투성이로 찢겨나가고

산발한 옷자락이 석벽에 걸린다.

늙은 어머니가 까무러친다.

젊은 아내가 몸부림친다.

물푸레나무 뿌리를 붙들고

울부짖는 여인의 뒤에서

어린것이 흙을 파며 아우성친다.

아우성이다. 아우성이다. 분노한 아우성이다. 폭발하는 아우성이다. 아비의 반란을 반란하는 반란의 아우서이다. 반란에 대한 반란의 아우성이다. 아우성은 찢겨진 깃발이다. 펄럭임이다. 휘날림이다. 찢겨진 깃발을 짜깁기해 들고 돌아온 어머니의 속 아픈 피눈물이다. 아아, 돌아온 자식의 아픈 상처를 붙들고 우는 모성의 펄럭임이다. 몸부림, 맘부림이다.

어린것이 손톱으로 땅을 후비며

아우성치는 回文山과 聖壽山 사이

폐광의 석굴에는

처참한 죽음의 물이 고인다.

자유를 모르는

석은 물웅덩이 속엔

대화가 소용없었다.

이끼 푸른 돌무더기 속엔

허연 백골의 앙다문 이빨,

퀭한 눈으로 노려보는

해골의 주변에는

古代의 쇠가 녹슬고 있었다.

다리 부러진 지게가 나자빠져 있었다.

그 옆에

한 자루의 따발총이 나뒹굴고 있었다.

물웅덩이에 고꾸라져 죽은

시베리아의 쇠가

돌의 주변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부러진 대검과 탄대와 수통과

반합과 수저와 군화와

수류탄 파편들이

순간과 영원을 갈라놓고 있었다.

제10장 뻬리깡 설화

오랑캐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든다.

눈을 밟고 일어서는 갈대 숲으로

미친 바람이 으스스 흩어진다.

비바람도 숨을 몰아쉬는 산허리를

하얀 노파가 오른다.

바우야!

바우야!

마파람에 실려오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꿈속의 질화로를 안겨온다.

눈길에 쓰러지며, 일어서며

물오리 숨결로 혈육을 부르는

어머니 가슴에 피는 꽃

조국의 꽃

꽃이 훨훨 날아오른다.

사랑사랑 내사랑아

어허둥둥 내사랑아

우리새끼 총을들고

밤새도록 지키는데

내가어찌 편안하게

잠을잘수 있을소냐

시암탉을 잡아놓고

너데리러 내가왔다

사랑사랑 내사랑아

어허둥둥 내사랑아

김치찌개 끓여놓고

너데리러 내가왔다

청솔가지 타오르는 구둘목에서

바우는 어미의 정을 먹는다.

자식의 언 발을 가슴으로 품고 잠든

어머니의 사랑, 그것은

뻬리깡의 혈관이다.

살중의 살

피중의 피

뼈중의 뼈속에 깊이 사무친 조국은

밤마다 세 번씩 안개로 내린다.

대문을 두드리는

빨치산의 고함 소리에

어미의 가슴엔 해일이 일었다.

자식을 숨겨놓고

문을 여는 어미의 손이 떨린다.

짓밟힌 땅에 기근이 든다.

풀 한 포기 자랄 수 없는

이 불모의 황무지 위에

양심을 사살하는 붉은 손이

소련제 따발총의 방아쇠를 당긴다.

드르르륵―

드르르륵―

총구가 불을 뿜을 때마다

대바람소리 흩어지는 뒤안길을 돌아

부엌으로 들어가던 노파가

풀잎처럼 쓰러진다.

하얀 머리카락과 치마저고리를

붉은 피가 적셔 내린다.

피는 아궁이로 도르르 굴러 흘렀다.

하얀 마음

하얀 조선무로

하얀 동치미를 잘 담그시던 하얀 목화 어매가 눈을 감는다.

석류꽃 울타리 가로

가마 타고 시집 왔다던 어매!

속눈썹 곱게 내려 감고

족두리 다소곳이 기울었다는

울엄매 흘린 피는 사랑이로다!

울엄매 흘린 피는 자랑이로다!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기와가루로

식기를 반질반질 닦으시던

조국의 어머니

겨레의 꽃이 솟는다.

창자를 잘라내어 새끼들을 살리고

쓰러져 죽은 뻬리깡

불멸의 새가 솟는다.

정한수 받쳐들고 기도하던

조국의 여신이 꽃으로 솟는다.

제11장 빨치산 처녀들

조상들의 풍장을 데리고 오는

바람은 미쳐있었다.

꽹과리 뒤에서 찢어지는

빨치산 처녀들의 경악의 소리―

추월산 상상봉을 울리는

밤의 마술에

전쟁동이가 눈을 뜬다.

철로가 파괴되고 역사가 불탔다.

살인과 방화와 약탈을 선동하는

꽹과리의 불길이 타오른다.

하늘을 비웃는 불빛

낼름대는 혓바닥 사이로

검은 그림자가 밀려온다.

그 무리 속에는

일부인을 찍던 자도 있고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개찰을 하던 자도 있고

뽕잎을 따 나르며

명주실을 뽑던 여인도 있었다.

잠샛별 반짝이는 하늘로

팔을 벌리는 종소리

겨레는 종소리를 사모한다.

양심을 흔들어 깨우는 소리

그것은,

탕자를 찾아 헤매는 어버이의

슬픈 몸부림이었다.

전쟁을 새끼치는 총소리 위로

울며 가는 종소리는

겨레의 본성을 흔들어 깨운다.

줄을 당기는 송장로의 동공엔

종소리로 돌아오는

생사의 강이 흐른다.

목숨을 잘라먹는 질주의 소리―

적탄이 내리 꽂히는 손등

힘줄 돋은 산맥마다

순간의 피가 터지고

손바닥이 깜짝 펴진다.

종줄을 놓친 송장로가

줄을 잡으려고

줄을 잡으려고

텅 빈 허공을 허우적이며

피에 젖은 무명 두루마기로

깃발처럼

깃발처럼

종대를 부둥켜안고

강을 건너오는 목숨들을 지켜본다.

축복의 장

고난으로 빨래한 겨레의

하얀 마음이

목화송이로 피어올라라!

목화꽃을 피우는 겨레

백의민족(白衣民族)은

어둠을 살라먹는 광명이어라!

밤새도록 잉태한 배를 뒤틀며

아픔을 견디어 온

어머니의 숨은 웃음꽃이어라!

어둠을 열고 일어서는

하얀 봉오리

희열에 반짝이는 아침 이슬은

눈물 속 햇살로 쏟아지는

인고의 씨앗이어라!

어둠을 견디어 온 생명들이

아침 햇살에 팔을 벌린다.

모두들 목숨 있는 나무로 서서

하늘 향하여 팔을 벌린다.

전장에서 돌아온 남풍과

진초록과 목달이 일어선다.

향토를 지켜온 박대장과

오리발과 강바람이 일어선다.

피아골을 탈출한 목화의 씨알들,

목화여인들이 일어선다.

「나에게 보석은 없지만

아침 햇살의 미소가 있습니다.

나에게 화려한 의상은 없지만

사랑의 목소리는 향기롭습니다.

나에게 유혹의 기교는 없지만

가슴에 흐르는 강이 있습니다.

나에게 자랑할 미모는 없어도

마음은 언제나 진실합니다.」

경천(敬天)으로 자란 나무들이

하늘 향하여 팔을 들어올린다.

온 겨레가

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너를 위해서 봉사하는

우리가 되기 위해서

大同의 하늘을 알아야 한다고

무성한 팔을 들어올린다.

하늘에서 내린 목화

땅에 심으면

땅심에 여린 목화

하늘로 피어오른다.

목화로 피어오르는

봉오리 봉오리마다

숭얼

숭얼

새 빛이 열린다.

동방은 해돋는 아침의 나라,

동방은 빛으로 열리는 신의 나라,

동방은 어둠을 몰아내는 곳이기에

빛을 찾아 모여드는

목화 줄기에 물이 오른다.

격물(格物)의 물이 오르고

치지(致知)의 물이 오르고,

성의(誠意)의 물이 오르고,

정심(正心)의 물이 오르고,

수신(修身)의 물이 오르고,

제가(齊家)의 물이 오르고,

치국(治國)의 물이 오르고,

평천하(平天下)의 물이 오른다.

한반도문화의 꽃을 피우는

청명한 정신의 물이 오른다.

하늘이 내려주신 햇살을 붙들고

思春의 나뭇가지마다 물이 오른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하라고

젖과 꿀이 흐르는 금수강산을

일찍이 아시아에 예정한대로

태양은 어둠을 빨래한다.

병신 되어 돌아온 조국에는

맑은 정신의 꽃이 피고 있다.

仁術로 오려붙인 얼굴 언저리

살점을 짜깁기해 돌아온 깃발

찢겨진 깃발을 어루만지며

꽃들이 사랑을 노래한다.

돌아온 木女가

율동의 이파리 휘날리며

목화의 천국을 노래한다.

휴전선 155마일 굽이굽이

서리 돋은 미움의 강이 흐른다.

임진강

임진강

감도는 물굽이

두더지 파헤친 산허리마다

녹 슨 철조망에 비단잠자리

전쟁의 상처 씻고 합궁을 한다.

그대의 18금반지

가슴을 둘러 끼운 하늘엔

영원한 축복이 내린다.

흰 점 파랑새 떼 날아든다.

공작새 날개로 피어오르는

부챗살의 빨간 꽃

아침 태양이 피어오른다.

꽃중의 꽃

조국의 꽃

5천만 가슴에

화안한 빛살로 피어오른다.

증오하던 사람들이 애무하는

사상 최초의 첫날밤이

이 땅에서 이루어진다.

사나이의 억센 산맥에

불 먹음은 여인의 대지는 꽃이 피고

열매 맺는 아침의 나라에

뱃고동이 운다.

한반도는 거대한 조선소

새역사의 출항을 꿈꾼다.

태평양으로

대서양으로

인도양으로

바다로 땅으로 하늘로

섭리의 출범을 선포한다.

시원스럽게 미끄러져 나아가리라.

출항!

출항!

고동소리는 언제나

출발을 앞질러 예언하고 있다.

완성의 못질이 떨어지는 날

거대한 배는 떠날 것이다.

피끓는 혈관으로 떠날 것이다.

우렁찬 숨결로 떠날 것이다.

한반도가 태평양에서 빨래를 한다.

피로 얼룩진 반만년의 빨래

오랜 고난의 빨래를 통하여

겨레의 숨결이 목화로 핀다.

풍악(風岳)의 나무 밑에 깔린 바위를

뚫는 뿌리는 질기고 강했다.

질긴 역사의 뿌리 끝에는

금 간 바위가 열리나니

무량한 피의 희생을 치르고

한 날을 바라보고 나오는

뿌리의 의지는

목화의 영광으로 빛난다.

신은 진실한 종자를 고른다.

하얀 마음의 씨앗을 찾는다.

피흐르는 무용담을 지각에 사르고

순수의 미소를 머금은

겨레의 씨앗을 찾는다.

메마른 땅을 일구어온

질긴 역사의 동토에서

순수한 종자의 눈트는 소리―

그 누구도 남아질 수 없는

불모의 벌판에서

수난을 이겨온 겨레는

역사의 빛을 발한다.

風岳의 바위틈을 뻗는 나무는

사랑과 생명의 흡수력을 갖는다.

가슴과 가슴에 목화를 심고

조상의 영기 들쳐 메고 일어나라.

목화는 백의민족의 본성,

목화는 백의민족의 본질,

이 땅의 노인들은 환상을 보고

이 땅의 아이들은 꿈을 꾸리라.

이 땅의 젊은이는 잠을 털고 일어나

어지러운 터전에 목화를 심고

심정의 뿌리로 만날

조상들의 징소리 울리어라.

흘러가는 물에 떠내려가는

썩은 고래가 되지 말고

폭포를 타고 솟아오르는

은빛 피라미가 되어라.

폭포 소리 같은

生生化成

生生化成

목화의 계절로 돌아가야 하느니라.

목화꽃 다시 피는 그날이 오면

나는 이 강산 목화밭에서

넘치는 기쁨에 목을 놓아 울리라.

목화를 심어서 이불솜을 해주던

우리 어매여!

우리 어매여!

목화 다시 피는 조국은

피묻은 옷 흙 속에 묻고

무명옷으로 일어나리니

하늘 우러러 기도하리라

하늘 우러러 기도하리라

하늘의 영광과 땅의 영광

온 누리의 영광 위하여

목화의 계절엔 뿌리로 만나서

하얀 솜 봉오리로 피어오르리라.

해설

민족혼의 웅건한 절규

- 詩에스프리와 주제성에 대하여 -

金南石 문학평론가

서사시의 유래를 찾으려면 그리스의 아클로포리스 구릉에 꽃핀 아테네의 역사를 더듬어 올라가야 한다. 저 아득한 민족부흥의 계절에 그리스인의 용감한 자주정신이 호메로스의 詩想을 타고 아테네의 축제 속에 불꽃이 튕긴 저 시단의 요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한 민족의 고난의 역사가 국운을 걸고 일어나던 그 복고정신은 바야흐로 민족정신의 발양을 위하여 인력과 국력을 떨친 자취는 오늘도 우리의 가슴에 강렬한 인상을 새겨주고 있다. 이렇듯 서사시는 민족과 더불어 싹텄고 민족과 더불어 발전하여 왔던 것이다.

서사시 속에는 한 시인의 가슴을 통한 민족의 얼이 꽃피어 있고, 민족의 역사와 진로가 명확히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서사시의 본질이며 동시에 그 지향하는 바 유구한 時空을 거느리는 창조의 길이기도 하다.

이렇게 대견스럽고 지존하고 빛나는 서사시의 정신은 민족문학의 정수요, 역사의 지침이요, 국민 총화의 귀감으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이렇게 거대한 수목을 천년 반석 위에 올려놓은 작업은 투철한 시정신과 시기교의 절정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전인적인 슬기와 역사에의 혜안이 필요하며, 전통의 정확한 파악과 그 비판적인 태도가 선행되어져야 한다.

『木花의 季節』은 이러한 서사시의 본질 위에서 다루어진 작품으로서는 우리나라에서 흔치 않은 성과라 하겠다. 그 주제의식에서 문제되는 것이 <전쟁문학>이라는 그 성격에서부터다. 민족수난의 역사는 모든 국가와 민족들이 겪게 되는 상황이지만 우리의 동족상잔의 살육은 민족의 비극이며 역사적 치욕이었다.

5천년의 유구한 역사 위에 꽃피운 겨레의 자랑이나, 지향에 하나의 새로운 전율을 일으켰던 6.25의 뼈아픈 역사는 영원히 가실 수 없는 민족의 상처가 되어버렸다는 作意는 민족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목화’는 우리 겨레의 성품을 상징한 이미지이다. 『목화의 계절』은 겨레의 수난이 가셔지고 새로운 삶의 터전이 마련되어질 그 미래에의 예측이며 그 기대인 것이다.

목화가 피는 계절엔 우리 겨레의 전설이 다시 곱게 꽃피는 그 날이다. 그것은 겨레의 한결 같은 염원이며, 희망이며, 생명의 보람이기에 이 시인의 절규는 바로 온 겨레의 음성이요, 온 겨레의 묵도이며, 온 겨레의 축제인 것이다.

그날이 오면 길목에 서서 이 시인은 뼈저린 戰雲의 기슭에 뜨거운 눈물을 뿌리고, 샘솟을 삶의 휘황한 들판에 하얀 꽃송이로 물결칠 목화의 국토를 반겨 맞으려고 한다. 그것은 시인의 에스프리의 건전성을 보여주며 속물적 사상을 초월하여 天心에로의 길고 먼 고난의 과정을 극복하는 자세를 제시해 주었다.

목화밭에 흐르는 흰구름의 이미지. 그것은 민족혼의 표현이 된다.

태초에

목화씨 한 알이 있어

화안한 봉오리로 피어오르다.

이 서시의 첫 구부터가 백의민족의 얼이 시작된 始原의 의미가 깊이 뿌리를 박고 있다.

神市에

점지한 땅이 있어

백두 한라 솟아오르고

동해

동해

마알간 해 머리감아 오르는

아침의 나라

동방의 성지로

향일하는 목화의 가슴이 있어

天禮의 두루마기로 내려 오도다.

이렇듯, 우리 겨레의 얼이 이 땅, 성지에 생겨난 유래를 유구한 역사성으로 다져놓았으며, 그것이 <백두, 한라, 동해>로 넓은 지역성을 닦아온 내력을 정확한 시상으로 묘사하였다는 데서 이 시의 강인한 민족적인 의도가 엿보인다. 그것은 역사의식 속에 숨쉬고 있는 민족의 기원이기도 하다. 이러한 시인의 잠재의식은 언제나 우리에게 필요한 문학 영토의 토양이다. 그런 연유로 이 시의 시적 이미지는 지극히 중요한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특히 “동방의 성지로/ 향일하는 목화의 가슴이 있어/ 天禮의 두루마기로 내려오도다.”에서는 우리나라 지역사회의 위치와 그 성스러운 판도의 의미가 남김없이 승화되어 있다. “향일하는 목화의 가슴”은 영원으로 이어진 무궁한 발전의 상서로운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시어의 성능은 오늘 서사문학에서 귀중한 지향성이라고 하겠다.

애국애족적인 관념이 이미지를 거느리고 무한한 발전의 전도를 예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영광된 조국의 발상이 때아닌 민족 수난으로 비오는 평야가 되고, 숨가쁘게 질척이는 황토길이 되고 말았다는 역사의 흐름을 배경으로 깔아놓고 있다. 민족수난의 황폐성이 바로 깔려있다.

“위만(衛滿)과 한(漢에)게 당한 고조선이여! 말갈(靺鞨)에게 당한 백제와 신라여! 위(魏)에게 당하고, 숙신(肅愼)에게 당하고, 선비(鮮卑)에게 당하고, 연(燕)에게 당하고, 수당(隋唐)에게 당했던 고구려여! 몽고(蒙古)에게 당하고, 원(元)에게 당했던 고려여! 왜(倭)에게 당하고, 오랑캐에게 당하고, 뙤놈들에게 윤간당한 조선이여! 병아리 꿈이 깊던 개나리 울타리는 날아가고, 박꽃이 하얗게 웃던 초가가 불타던 날 일그러진 너의 얼굴을 붙들고 애타도록 가슴을 물어뜯는다. 물어뜯는다. 하늘로 여린 동자(瞳子)만 푸르게 남고 화전(火田) 같은 목덜미에는 인술(仁術)의 살점이 붙는다…”라는 서시의 대목은 실로 이 나라가 외침으로 만신창이가 된 역사성을 읊은 것이며, 시상은 비탄에 젖는 겨레의 울음을 터뜨려 가고 있다. 그리고 서시의 끝에 가서 조국의 피눈물을 6.25 전란에서 취재하여 가고 있다.

남풍아 피해라!

아버지, 염려 마세요!

갈라진 하늘이 각혈을 하면

신들린 하늘이 허공을 가른다.

목화의 빛깔로 빨래한

고난의 십자가에 하늘이 내린다.

피 흐르는

피 흐르는

피 흐르는 산하를 부둥켜안고

하늘이 둥둥 내려온다.

이 서시의 끝은 서사시의 주제가 시작되는 사건이 모티브로 되어 있다. 그리하여 민족수난의 가혹한 사건을 ‘제1장 찢겨진 깃발’로부터 ‘제11장 빨치산 처녀들’과 에필로그 ‘축복의 장’까지 피흘린 투쟁의 세미다큐멘터리의 수법으로 치밀하게 사건을 전개시키며 읊어가고 있다.

이 서사시의 특성이라면, 흔히 볼 수 있는 개적 정서가 아니라, 민족의 역사를 반기록적인 기교로 묘사하였다는 시적 한계성이다. 특히 전투라지만 사상적 갈등과 애국적 정염을 차곡차곡 읊어 나가려는 의도는 오늘 역사과정에서 뜻깊은 시도라 하겠다.

<1975년 8월 15일>

黃松文 敍事詩集 木花의 季節

1975년 10월 15일 인쇄

1975년 10월 19일 발행

정가 1200원

著者 黃松文

發行 成和社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동 1가 170

등록 1961. 5. 20 NO. 제9-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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