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송문 시전집

내 가슴속에는 -제3시집-

SM사계 2010. 7. 9. 20:58

 

黃松文 第三詩集

내 가슴속에는

 

   

 

자서(自序)

  詩는 나의 보리밟기로 살아난다. 보리는 밟아줘야 산다고 하는 역설적인 시론이 풍악(風岳)의 뿌리를 살려내기 때문이다.

겨울이 추우면 추울수록 나의 시는 더욱 훈훈한 가슴으로 보리를 밟아 나선다. 이듬해에 다시 오는 새봄의 보리 잎이 한층 더 푸를 것으로 믿는 예감의 안테나를 곤두세우면서.

  내가 찾아 나선 시어(詩語)의 빛깔, 프리즘으로 굴절하는 시신(詩神)의 날개, 그것은 양질(良質)의 영양을 제공해 주는 인식의 창으로서, 내 곁을 떠나간 것들과 떠나고 있는 것들, 그리고 떠나려고 하는 것들의 영상이다.

오랫동안 망각되었던 뜸부기 소리가 향수 사무치게 들려올 때가 있다. 뜸부기의 울림에서 피어오르는 원시적인 자연의 고향 냄새에 느껴 울 때가 있다.

  이제는 꿈길처럼 아득해진 자운영(紫雲英) 밭이라든지, 수채도랑의 생수 웃음을 그리워하면 할수록 시 못지 않게 어려워지는 삶, 이 고통스러운 삶을 통하여 해바라기의 식물성정신을 일으켜 세울 때가 있다.

추운 오늘을 따뜻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두운 광맥을 따라 시의 등불을 켜들고 언어의 곡괭이로 파들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시로 하여금 어둠을 불지르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나는 내 영혼의 보리밭 인생의 보리밭을 묵묵히 밟아왔던 것이다.

이번에 펴내는 시집 『내 가슴속에는』은 『造船所』와 『木花의 季節』이후 세 번째로 내어놓는 시집이 된다.

  여기에서는 80편의 시를 편의상 2부로 나누어 실었는데, 제Ⅰ부는 일본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썼거나 발표된 작품들이며, 제Ⅱ부는 대부분 일본에서 쓴 작품들이다. 이 시집의 이름을 나의 대표작이 아닌 ‘내 가슴속에는’으로 택한 것은 이 시가 내 시의 흐름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밝혀둔다.

  독자의 이해를 위하여 시를 해설해 주신 金南石 敎授님께 심심(深甚)한 사의(謝意)를 표하며, 나의 시에 관심을 보여주는 시우(詩友)들과 이 기쁨을 나누고 싶다.

1977년 11월 15일 사당동 우거(寓居)에서 黃松文 識

제Ⅰ부 내 가슴속에는 토란잎 물방울이 있다

 

수돗물 받던 날 밤

 

수돗물 받던 날 밤

꿈에

뜸부기가 울데.

紫雲英 우린 물 남실남실

가슴에 드는

하늘.

물 받고 구름보고

모포기 물어뜯으며

뜸부기 울데.

 

 

湖水

 

시원(始原)의 자궁 속을

목선(木船)이 간다.

초록의 하늘로

밀리는 물살

거슬러

구름 가르면

산장은

등불

여기

저기

석류(石榴)가 터지고,

물빛

시오리

호반새 소리.

 

 

禪風

 

노을이 물드는 산사(山寺)에서

스님과 나는 법담(法談)을 한다.

꽃잎을 걸러 마신 승방(僧房)에서

법주(法酒)는 나를 꽃피운다.

스님의 모시옷은 구름으로 떠있고

나의 넥타이는 번뇌(煩惱)로 꼬여있다.

“자녀를 몇이나 두셨습니까?”

“사리(舍利)는 몇이나 두셨습니까?”

“더운데 넥타이를 풀으시죠.”

“더워도 풀어서는 안됩니다.”

목을 감아 맨 십자가

책임을 풀어 던질 수는 없다.

내 가정과 국가와 세계

앓고 있는 꽃들을 버릴 수는 없다.

 

 

木船

 

흐른다.

한 척의 목선이 흐른다.

그물을 물어 올리는 햇살

은빛

도루묵이 파닥인다.

강물을 끌어안고 비벼대는

얼근한 하늘.

루즈의 동그라미 속으로

한 척의

목선이 흐른다.

 

 

日出情景

 

하늘과 바다의

합궁을

본다.

합죽선(合竹扇) 펴드는

공작새

날개.

사랑의 절정으로

입술을

빤다.

 

 

강변로 부근

 

흑인의 이빨이 떨어지는

허연 웃음 속의 강물이

두터운 외투를 벗어 던진다.

강물로

투신한 빛살이

이빨과 이빨로 기어오른다.

발광하는 웃음판이 강심을 싸고돈다.

모닥불을 질러놓고

손뼉치는 물살

은어 비늘이 팔딱인다.

원시 바람의 윙크와 휘파람

유방의 계곡 위로

상아 목거리가 흔들거린다.

 

 

디자이너

 

나는 사랑한다.

자연의 드레스를 재단하는

그대, 무형의 디자이너를.

초록의 미풍으로

가위질을 하는 그대를.

그대 보이지 않는 손

유방과 허리와

풍만한 곡선의 율동들을.

노고지리 알 품은

황금 보리밭

살찌는 종아리.

보리누름을 눈짓하는

빛살을 사랑한다.

드레스를 재단하는

숫기의 바람을.

 

 

가을 연주 1

 

달빛이 풀잎을 연주한다.

달빛이 활을 쥐고

바이올린을 켜는

풀 푸른 소리.

은하(銀河) 이슬이 흐른다.

강물은 비늘을 털고

악보(樂譜)의 눈들이 반짝인다.

풀꽃에 자지러지는 바람

천연(天然)의 머리카락이 흩날린다.

풀잎은 풀잎끼리

별빛은 별빛끼리

볼을 비벼대는

애무의 밤

지칠 줄 모르는 연주

나도 하나의 활이 된다.

 

 

가을 연주

 

달빛이 통행금지를 알지 못하듯

사람들은 푸른 소리를 알지 못한다.

별들이 소곤대는 하늘 나라

베일 속의 소리를 알지 못한다.

모두들 잠 든 밤에도

연주는 계속되지만

자연의 악보를 아는 이는 없다.

이슬에 젖은 별들이 연주한다.

풀잎에서 자고 깨는

달빛과 별빛

반짝이는 악보의 푸른 동자는

언제 보아도 첫사랑이다.

깊은 밤 나는

이슬 속에 활을 쥐고

푸른 소리를 연주하는

한 마리의 귀뚜라미가 된다.

 

 

立春

 

아름드리 타오르는 나뭇가지에

눈잎이 내리네.

엄동(嚴冬)을 타작하는 장작난로는

사춘(思春)의 꿈에 부풀고.

개구리 잠 속

보리밭은

자운영을 깨우네.

과즙이 풍부한

귓속말에도

자상스런 꽃바람 일어

기지개 켜는 수풀

눈 터는 소리.

아름드리 타오르는 숲 속에선

족두리풀 일어나네.

 

 

물의 부활

- 馬耳山 塔舍에서 -

 

산신령의 그늘에 잠든

오소리의 발톱은 보이지 않았다.

새벽녘 사립짝 밖에서

도솔천으로 혼신의 물 물고

우러러 사는

눈물의 둘레.

눈길 하늘 따라

맹물만 마시고 살다가

청청 하늘에

찬별 같은 목숨.

정정한 가슴으로

별무리 내려와

미역 감고 올라가는

쌍접(雙蝶).

빈 손 모아 하늘보고

찬물만 마시고 살아도

태양과 마주 지저귀는

풋풋한 하늘의 눈동자.

 

 

秋風嶺

 

포도주를 마신

여인의 입술

노을 비낀

골짜기

연지볼이

곱다

 

 

蘭草

 

하늘을 마셔봤으면

햇살을 마셔봤으면

노을을 마셔봤으면

竹筍

하늘 위에 하늘이 있고

하늘이 있고

하늘이

있고

하늘이

하늘이 있고

하늘 위에 하늘이 있고

너도

나도

오순도순

말간 하늘 우러러 보는

비비새가 비비새사

비비비비

비비

비비

비비새 우는 대숲에선

죽순이 이슬을 물고

이슬을 물고

이슬을

물고

 

 

풍경 1

 

약수를 마시고

일어서는데

문득,

하늘이 둥둥 내려오데.

오랜만에

참으로 오랜만에

마주치는 눈길엔

약수가 철철 흘러 넘치데.

풀벌레 소리 개풀저진 뒤

동동 뜬 바가지는

노을을 담고

대웅전 모퉁이를 돌아가데.

 

 

풍경 2

 

등산을 좋아하는

그녀의

엉큼한 바람.

바람에

살랑거리는

스님의 옷고름.

노을에

떠내려가는

 

 

풍경 3

 

수도꼭지의 노래에

귀가 밝은

동치미 항아리.

야자수 그늘을

담아 온

일제 냉장고.

연탄 굴뚝에

기대서서

교신하는 안테나.

플라스틱 하늘을 뜯어내고

눈 터는

골목.

 

 

풍경 4

 

기와지붕에 널려있는

빨간 고추여

고추 위에 모여 노는

구름이여

흩어지는 틈서리로

내려보는 하늘이여

하늘 아래 꼬리치는

암소여

꼬리에 붙어 가는

밀짚모자여

풍경 5

노을을 베고 누운

갯벌

위로

달구지가

 

첫 눈

 

나의 동자(瞳子)를 보게

나의 심장(心臟)을 보게

나의 혈관(血管)을 보게

 

 

(禪)

 

중국인 화가는 아침부터

석굴암 대불을 그리고…

일본인 교수는 그의 뒤에서

사진을 찍어대고…

그의 뒤에 산처럼 앉은 나는

담담한 미소로 내려보고…

 

 

욕녀(浴女)

 

속옷을 벗어 던지고 어둠을 걸친다.

허연 이빨을 드러내던 달빛이

구름 속으로 숨는다.

비눗물처럼 미끄러운 여자의 몸

돌 틈을 구르는 물소리

양털구름이 밀려 내린다.

처녀들을 사랑하는 물소리와

물소리에 안긴 젖가슴이

어둠을 조용히 밀어낸다.

밀리는 물비늘이 자지러진다.

겨드랑에 떨어지는 웃음소리가

능금밭 바람에 끌려간다.

 

 

동치미

 

아침을 드는데

문득,

종발(鍾鉢)에 내린 햇살이

동치미를 길어 올리데.

천진한 햇살을 타고

욕녀(浴女)들이 내려와

머리를 풀어 헹구데.

온 몸이 시린 수채도랑

신(神)의 자궁으로부터

발싸심하던 생수가

욕녀들 겨드랑을 흘러내리데.

머리카락으로 목덜미로 유방으로

연애하던 햇살들이

종발에 몰려들어

동치미를 길어 올리데.

 

 

음악의 천국

 

토란(土卵)잎에 떨어지는

한 방울의 소리는

신(神)의 새끼손가락에서 풀려 나온

천연(天然)의 이슬반지.

토란잎에 떨어지는

소리의 거울,

꿈의 동그라미 속에는

호수의 잔물결을

은어(銀魚) 비늘이 번득인다.

밀려드는 물결을

달빛에 찰랑거리고,

꼬리로 물을 차며 솟구치다가

죽림(竹林) 속을 빠져나와

토란잎에 떨어지는 비비새 소리.

 

 

 

호박잎쌈을 싸는데

저만치 오시는 할머니.

어쩌다 꿈에 뵈옵듯

안개로 내리는 할머니.

주름살을 펴듯

호박잎을 펴는데,

쌈이 목에 걸려

넘기지 못하는 이승.

호박잎 할머니가

저승에서 쌈을 싼다.

 

 

데생

 

여행모자의 그녀가 웃어

루즈의 동그라미가 커진다.

빨간 동그라미 밖으로

가을 하늘을 비행기가 간다.

목탄으로

하얀 이(齒)를 붙드는

일본인 화가의 어깨 너머로

하늘의 렌즈가 살구를 씹는다.

그녀와 화가와 사진사 뒤에

시인이 있었다.

 

 

안개

 

젖빛 잠옷이 풀어져 내리네.

머리카락 윤기 자르르한 봉우리와

허연 어깨 드러나는 바위와

유방의 골짜기 굼실굼실

여름밤 잠옷이 풀어져 내리네.

물오른 가지마다 걸리는 잠옷

소피 보는 산의 계곡에는

욕녀(浴女)들이 속살을 드러내네.

뿌연 안개 저 편에

보이지 않는 신비 있어

무형의 알몸들이 꿈틀거리네.

 

 

눈잎

 

눈잎이 나를 흔드네.

이러지 말고

정말 이러지를 말고

시골로 내려가라고

나를 흔들어대네.

이러지 말고

정말 이러지를 말고

청국장 끓는 고향으로

내려가라네.

장독대와 초가지붕과

배추밭 고랑 위로

수 만리 꿈을 물어온

눈잎이 나를 흔들어 깨우네.

 

 

풍경의 잠 1

 

판잣집에 살아도

죄 짓지 않고

오직 구세주 계신

천당을 헤매 돌며

복권장수 여인이 졸고 있다.

조간(朝刊)을 보다가 졸고 있는

복덕방 영감 안경 너머

햇살들이 부산하다.

당의정 같은 해가 기웃거리는

빌딩의 숲 속

창구(窓口)마다

혀를 빼어 문 팬츠가

늘어지게 잠을 잔다.

동회 아저씨의

모시적삼에 내린 구름이 몇 점

옥상에서 졸고,

골목엔

휘파람이 두려운 그늘이

웅크린 채 졸고 있다.

 

 

풍경의 잠 2

 

능금 상자 위

갓난아기의 잠

아기 잠 속 십리 밖에는

비단잠자리

개울에 흘러내리고

울타리 잎새를 구르는

이슬 속에

엄마 얼굴이 흔들린다.

능금 상자 위

행운을 기다리는 복권들이

세상을 수놓으며

잠을 잔다.

 

 

약수(藥水)

 

햇살이 약수를 길어 올린다.

하늘 한쪽 도려내어

뜬구름 걸러 마신

조롱바가지.

약수가 햇살을 끌어내린다.

대불(大佛)의 눈길 떨어지는

조롱바가지.

햇살과 관계하던 약수가

대웅전 모퉁이를 휘어 돌아

나뭇잎 사이로 사라진다.

 

 

세공(細工)

 

하나의

돌에

하나의

다른 빛깔의 돌을

또 다시 그 옆에

하나씩 둘씩

금잔디 꽃무덤 같은

옹기종기 그림을……

하나의 혼이 누우면

그의 곁에

다른 하나의 혼이 누우면

그의 곁에

다른 하나의 혼이 누우면

숨결 고른

꽃 무덤은

자연으로 내려가고,

하나의 돌과

하나의 돌

혼에 혼을 포개어

시의 꽃잎을

대지 위에

떨어뜨리고……

 

 

꽃나무들

 

내 울 안에 심은 꽃나무들

내 가슴에 물을 적셔주시고

멋진 이야기도 들려주시고는

내 가난한 머리맡에

꽃씨들의 꿈도 길어 올려주시다가

어디론지 사라져간 꽃나무들.

어느 날 밤 꿈속에

꿈을 꾸던 꽃나무들이 살아와서

하나씩 둘씩 살아와서는

밤하늘 별들이 초롱초롱한

푸른 눈동자끼리 모여서 사는

내 울안에 내려와서는

내 가슴속에 뿌리를 내리시더니

자꾸만 파고드는 꽃나무들.

자랑스런 눈의 꽃나무들이

그대의

동자 속 노을로 내리시더니

솔개처럼 훨훨 맴을 돌면서

사랑의 슬픔과

사랑의 아픔과

사랑의 무능을 적셔주시고는

어디론지 사라져간 꽃나무들.

 

 

새알 속에

 

새알 속에 강이 흐른다

천만 갈래 핏줄이 흐른다

새알 속에 산이 꿈꾼다

산맥은 줄기줄기

초록의 하늘을 꿈꾼다

새알 속에 안개가 내린다

시원(始原)의 잠을 터고 일어나

수평을 나는 꿈을 꾼다

 

 

입추(立秋)

 

동회 아저씨가 흘리고 간 바람이

할 일 없이 맹물을 휘젓고 있다.

저만치 떠가는 낙엽 위로

얼근한 노을이 누워있다.

비스듬히 삐딱한 농부가

엽초(葉草)를 말아 피우고 있다.

 

 

홍채모양체염(虹彩毛樣體炎)

 

홍위병의 깃발처럼 붉은

팬티가 나부끼는

빌딩의 창은 고달프다.

두 가지 빛깔은

상극으로 피곤할 뿐 아니라

상대로도 피곤하다.

푸른 창은 창을 위하여

도시에게 안경을 끼우지만

매소(賣笑)를 머금은 팬티는

더욱 붉은 팬티를 자랑한다.

자유와 평화로 민주화하는 것은

오직 눈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하늘을 얼싸안은 창문이기 때문에

흰빛은 흰빛을 원하면서도

검은 동자를 옹호한다.

거울 속에서

눈의 깊은 곳을 찾을 때가 있다.

펄럭이는 만장(輓章)을 바라볼 때처럼

충혈의 순간들이

때로는

노을로 타오를 때가 있다.

하나의 동자 속에서

두 세계가 공존한다.

빛을 찾아 나온 낮과

어둠 속으로 숨는 밤이

적당한 선을 경계로

모(矛)와 순(盾)을 주장해 왔다.

신의 제품들은 어김없이

낮은 선변(線邊)에서

신비의 문을 열고 있지만

동자(瞳子)가 감기는 날

태양은 묘지의 풀을 뜯으며

생식을 즐길 것이다.

거울 앞에서

거울 속의 표정을 살필 때가 있다.

환장한 노을을 바라볼 때처럼

정신 없이 바라볼 때가 있다.

온갖 사금파리를 찾아 헤매던

착각의 순간과

부끄러운 인생의

부스러기를 바라볼 때가 있다.

깊은 부분이 충혈된 눈병을

거울 속에서 쓰다듬는 것처럼

나의 깊어진 회한(悔恨)을

쓰다듬을 때가 있다.

다만 쓰다듬을 뿐이다.

이제는 어찌할 수 없는

눈의 흰 창과 검은 창의

안쓰러운 쓰다듬음이다.

하늘과 땅 사이

푸른 눈을 잃어버린

새의 슬픈 쓰다듬음이다.

 

 

싸리비

 

흙탕물에 투신한 태양이

둑으로 기어오르는

노을,

동그라미 속에서

나는 죽음을 바라보고 있었다.

청정한 싸리 둑 가

급류에 휩쓸리는

거기,

익사한 싸리비가 걸려있었다.

낙원 삼층천(三層天).

시멘트 바닥을

핥고 핥고

투신한 태양에 매달려

통곡하더니

이제

너는

하류에서 하늘을 찾아야만 하는가.

환장한 노을 속에서

부러진 갈비뼈를 바라보고 있었다.

콘크리트를 긁던 날부터

고향을 잃은

손톱도 문드러져 있었다.

눈을 감으면 떠내려가는

모세.

능금상자에

익사한 싸리비가 걸려있었다.

 

 

DIARY LOVE

 

난 그대를 사랑해.

그대 가슴 밤마다 펼치는

장미꽃 꿈자리를 사랑해.

하루의 행진이 흩어지고

참새도 깃을 사리는 밤,

마음의 등불 들고 기다리는

그대 의식(意識)의 남녘 6월을

난 미치도록 사랑해.

아무도 몰라주는 나의 비밀,

나의 모두를 털어놓을 수 있는

그대는 내 인생의 길동무

고난의 발자국을 사랑해.

사랑의 슬픔과

사랑의 회한(悔恨)

추억의 자운영 밭을 뒹굴며

그대 어지럽히는 아름다운 글씨,

곤충들 줄지어 가는 사랑의 글씨,

잉크 먹은 가슴에 눈물 떨구며

난 그대를 심장으로 사랑해.

그대에게 낙서를 하면 할수록

베개 속 꽃씨 채우는 그대,

환희의 꿈으로 어우러질

해바라기 씨앗들,

머리카락 쓰다듬어 내리듯

쓰다듬을수록 쓰다듬을수록

푸른 글씨 눈물에 번지는

영혼의 빨래 인생의 빨래

난 밤마다 만년필로 사랑해.

 

 

내 가슴속에는 2

 

내 가슴속에는

장미꽃이 차지했네.

뜰에는

장미 붉은 불.

꿈속을 나는

나비

그대 눈 속을 떠가네.

내 가슴속에는

저녁놀이 차지했네.

꽃잎 타는 언덕엔

윙윙대는 벌떼들.

얼근한 구름들

그대 눈 속을 떠가네.

 

 

내 가슴속에는 3

 

내 가슴속에는

푸른 물이 오르네.

열 길 땅 밑에서

끝없는 샘물이 솟아오르네.

내 가슴속에는

파랑새가 오르네.

푸른 물새 한 자웅

물을 물고 솟아오르네.

 

 

내 가슴속에는 4

 

내 가슴속에는

수채도랑의 생수 웃음

미나리 씻는 처녀 웃음이

가슴 찰찰 넘쳐흐르네.

내 가슴속에는

꿈속을 떠도는 꽃잎들

벌떼 잉잉대는 자운영 밭엔

꽃시계 채워주던 볼 붉은 소녀

부끄럼타던 추억의 눈망울이 곱네.

내 가슴속에는

풀잎을 스치는 뜸부기 소리

얼근한 들녘에 일어서는 벼슬

꽃구름 같이 꽃구름 같이

그리움은 노을로 타오르네.

 

 

소녀

 

내 가슴속에 지저귀던 새

나의 소녀가 웃고 있다.

앨범 속에서.

내 가슴속에 피어나던 꽃

소녀가 나를 울리고 있다.

무덤 속에서.

내 가슴속의 소녀

내 가슴속에 살아남은 추억

수석은 물소리를 기억한다.

내 가슴속에 살아있는

무덤의 풀잎들

시간을 끌고 온 초침이 멎어있다.

 

 

조용하게 살으리

 

이제는

조용하게 살으리.

그대,

차분한 목소리 같이.

전신줄 속에서 튀어나온 언어와

전신줄 속으로 뛰어들어간 언어가

몇 번인가 만나고 헤어지고

전신줄 멀리 멀리 벗어나서는

마침내 언어들을 보내면서

눈을 맞는 숲 속의 나무들처럼

이제는 눈감고 조용하게 살으리.

전신줄에서 튀어나온

그대 은밀한 목소리에선

향기 짙은 수밀도 내음.

오오, 그 빛깔이여!

이제는 그 환희 접어두고

손을 저어보내며

조용하게 살으리.

손바닥으로 가리울 수 없는 하늘

조각 하늘에

계절을 걸어두고

전신줄에 매달린 낙엽과

낙엽을 어루만지는 흰구름도 보내면서

이제는 눈감고 조용하게 살으리.

 

 

무제(無題)

 

10년 만에 시집을 찍으러 가다가

몽땅 털리고 돌아서서

텅 빈 하늘 우러러보는

시인이 있었다.

세상사 그저 그런 거라고

빈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헛웃음 치며 돌아서는

시인이 있었다.

무지개 뜬 엽차로 목을 헹구고

원고지로 입술을 닦으려다 말고

돌아갈 여비를 가늠하는

시인이 있었다.

눈마다 쌍불로 노려보는 도시에게

침 뱉고 돌아오는 골목에서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시인이 있었다.

 

 

 

그대 눈은 슬프다

그윽이 들여다보이는

물 속의 달.

그대 달은 슬프다

호심(湖心)의 달빛 속으로

빠지고 싶은 나는

슬픈 짐승이 되어

그대 눈을 찾는다.

눈을 감으면

슬픈 표정을 하고

잠에 빠진 사람

그대 잠은 슬프다.

 

 

도시의 변증(辨證)

 

팬츠가 윙크한다

영창(影窓)은 노이로제

거짓으로

빨간 팬츠를 사랑하는

사춘(思春)의 바람.

정사(情死)한 빛깔을 사랑한다.

증오한다.

 

타살

 

볼펜이 나오던 날부터

나의 만년필은 죽어갔다.

플라스틱 볼펜이

아아, 플라스틱 볼펜이

소모품밖에 안 되는

플라스틱 볼펜이

나의 만년필을 타살시켰다.

그것은 타살이었다

분명한 타살이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첫사랑의 타살이었다.

 

그대는

 

그대는

등산길에 있었네.

그대 눈짓을 밟으며

오르던 천마산

꽃잎 흐드러진 골짜기에

그대는 있었네.

과즙이 풍부한 밤 물소리

그대 품속에 울어

등산길로 나를 깨우네.

 

봄소식

 

쥐불을 놓고 간

언덕에서는

달래 냉이 꽃다지

눈을 뜨네요.

보리밭 둑 언덕에

나물 바구니

파릇 파릇 쑥들도

눈을 뜨네요.

시냇가에 물오른

버들강아지

봄바람 하늘하늘

춤을 추네요.

나들이 온 분이의

머리 위에는

노고지리 옥구슬

굴러오네요.

 

생활

 

아내의 구설수에는

상추쌈을 좋아하는

일상의 이빨이 있다네.

나의 신수에는 언제나

보자기로 구름 잡는

풍선 꿈이 있지만,

아내에게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있어

날 새면 날을 세워 긁어댄다네.

 

 

북행(北行)

 

가도 가도

울긋 불긋

샐비아 꽃

남으로도

북으로도

꽃길이네.

 

 

대리석화병

 

선은―

꿈꾸는 미녀의 머리카락

천년을 머리감은 원추리 그늘에

내려와 흐르는

해맑은 하늘

시원의 그리움을 손짓하는

청아한 여인의 곡선으로

해심 흔드는 미역 줄기.

색은―

하늘을 차고 치솟아

구름 위로 훠얼 훨

천리를 나는 학의 빛깔.

꽃무늬 난초무늬 해초무늬 학의 무늬

꿈길로 인도하는 조촐한 무늬여!

오오, 빛깔!

꿈꾸는 빛깔!

화사함을 잉태하는 비취빛 동자

물기 서린 가을 하늘에

이는 구름……

 

 

비석에 걸린 달

 

돌의 뼈 속에

달빛이 고여있었다.

바람은 잠을 털고 일어나

몰사한 이름들을 부르며

피묻은 살점을 핥고 있었다.

위령(慰靈)의 밤이면

해골 속에 고인 달빛이

풀잎에 흐느끼고 있었다.

텅 빈 하늘 가

머리 풀어 날리던

산이 내려와

깊어진 상처를 핥고 있었다.

손목은 묶여있었다.

포승을 내려보다

머리카락 미쳐 돌아다니는

산의 겨드랑에

산짐승도 달빛을 물어뜯고 있었다.

동조고리 바람에 끌려나와

잔월(殘月)을 밟고 가는

이승의 난간에서

울음을 삼키는 산,

산이 울고 있었다.

돌의 뼈 속에

몇 마디 말이 새겨져 있었다.

죽음의 붓으로

죽음을 건너뛰는 글체

비문(碑文)이 새겨져 있었다.

심장으로 말하는 돌의 주변에

갈대는 늙어있었다.

창백한 목숨의 시간이

돌의 뼈를 옹호하고 있었다.

돌의 심장으로 빨려든

이름들을 부르며

무덤을 파야 했던 사람들,

묶인 손으로

묶이지 않은 손을 찾아야 했다.

마지막 시각에 기울던

비석의 달이여 일어나라

밤새도록 어둠을 빨래하던

햇덩이는 솟아오르고

새 순(筍)이 자랄 여기,

강령산(降靈山)에

유복자(遺腹子)가 올라와

깎여진 이름을 찾을 것이다.

 

 

천지(天池)

 

나와 당신의 나라

우리나라에

제일 높은 산이 있습니다.

나와 당신의 나라

우리나라에

제일 깊은 못이 있습니다.

새벽마다

맑은 물을 길어오시는

어머니처럼

맑은 물을 이고

우리들 가슴으로 스며오는

당신의 숨결이 있습니다.

하늘을 얼싸안은 물동이에는

어머니의 숨결이 어리듯

우리들의 심장에는 언제나

당신의 혼이 고입니다.

그러나

안개와 어둠에 쌓여

울고 있는 혼

당신은 거대한 눈물입니다.

눈물은 눈물끼리

얼키고 설키어

고산식물의 뿌리에서 뿌리로

흘러내리고

이름 모를 새소리와

바람소리는

고로뢰 심장으로 스며들지만,

나와 당신의 메아리는

만나지 못하고

나와 당신의 목소리는

껴안지 못하고

벽과 벽이 마주보는

골목에서

아이들은 줄을 넘으며

통일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나와 당신의 겨레

우리 겨레에

뼈저린 기원이 있습니다.

안개와 어둠으로 정상을 가린 채

하늘을 우러르는 눈에도

애끓는 바램이 고입니다.

가슴 깊이 뿌리를 내리시는

어머니의 물을 마시며

우리들은 기다립니다.

참는 보람 알기 때문에

등산광처럼 기다립니다.

다시 만날 그 날

천지 밝아올 날을 기다립니다.

 

제2부 내 가슴속에는 자운영 그리움이 있다

 

저 하늘 아래

 

아침을 들다가도

문득,

올려보는 하늘

저 하늘아래 보이는 땅이

내 고향이다.

대밭엔 비비새 울고

하얀 연기 얕게 깔리는

꿈속의 마을

부르면 부를수록 청국장 냄새가 난다.

청국장을 잘 끓여주시던 어머니

시골 어머니는

가슴에 활활

솔가리 불을 지피신다.

- 일본 나고야(名古屋)에서 -

 

 

만년설(萬年雪)

 

백발이 성성

절벽에 박힌 눈을

수석(壽石)으로 파노라.

천년 만년

세월에 삭은 뼈

태고의 숨소리 듣노라.

한 줌 나

뭉쳐 들고

뜬구름 보노라.

- 일본 후지산(富士山) 정상에서 -

보리를 밟으면서

보리를 밟으면서

언 뿌리를 생각한다.

아이들이 아비에게 대들 때처럼,

시린 가슴으로

아픔을 밟는 아픔으로

해동(解凍)을 생각한다.

얼마나 교육을 시켜 줘 보았느냐고,

얼마나 유산을 남겨 줘 보았느냐고,

시퍼런 눈들이 대드는 것은

나의 무능임을 나는 안다.

뿌리를 위하여

씨알이 썩는 것처럼,

사랑할수록 무능해지는 것을

나는 안다.

내 아이들이 대어들 듯,

어릴 적 내가 대어들면

말을 못하시고

눈을 감으시던 아버지처럼,

나 또한 눈을 감은 채

보리를 밟는다.

잠든 어린 것 곁에

이불을 덮어주며

눈을 감는 것처럼,

나는 그렇게 눈을 감은 채

온종일 보리를 밟는다.

 

 

망향가(望鄕歌)

 

어매여

남녘의 어매여

바느질 뜸이 곱고

송편을 잘 빚으시던 어매,

어매 잠든 고향 땅을

내 늘그막엔 밟아 볼라요.

어매 가슴 찾아

진달래 걸러 마신 노을같이

얼근한 들녘을 가면서

삐비라도 뽑아들고 피리를 불라요.

뜬구름 세월

흰머리 날리며

논두렁 밭고랑 구비 구비

풀피리 줄면서 찾아 갈라요.

닐릴리 닐릴리 풀피리 불면

미영 따던 할매도 나오시것제.

하얀 조선무로

동치미를 잘 담그시던

가르마 고운 할매!

남도 땅 차진 흙을 밟아 볼라요.

개나리 울타리로 인정이 오가던

법이 없이도 사는 사람들,

품앗이하던 이웃이랑

정겨운 꽃이 되어

논배미에 밟혀 썩어지는

차진 거름이 될라요.

내 피와 살이 녹아

못자리에 밟혀 썩어지는

꽃다운 자운영이 될라요.

 

 

향수(鄕愁)

 

고추잠자리가 몰려오네

하늘에 빨간 수(繡)를 놓으며

한데 어울려 날아오네.

어느 고향에서 보내오기에

저리도 빨갛게

상기되어 오는가.

저렇게 찾아왔던

그 해는,

참으로 건강한 여름이었지.

그대 꽃불 같은

우리들의 강냉이 밭에는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지.

잔모래로 이를 닦으시던 할아버지의

상투 끝에 맴돌던 잠자리 같이

강냉이 이빨을 흉내내며

단물을 빨던 나의 눈앞에

떼지어오는 고추잠자리는

누가 보낸 전령인가.

어디서 오는 전령이기에

노스탤지어의 손을 흔들며

저리도 붉게

가슴 이리저리 맴돌며 오는가.

 

 

스카이라운지

 

하늘이 땅과 식을 올린다.

쳐들린 도시의 손가락 끝에

반지를 둘러 끼우는 중이다.

웨딩드레스 휘감아 돌듯

한 시간에 한 바퀴

풍경을 사로잡는다.

맥주 컵마다 출렁이는 은하수

별은 반짝이고,

이야기는 하늘 끝

위성(衛星)이 돌고 있다.

하늘에는 전등

땅에는 별

웨딩마치가 한창인데,

건반을 두드리는 손가락 끝에

라이트 불빛이 뻗쳐 흐른다.

하늘에는 별

땅에는 전등

신부는 가슴에 보석을 걸치고

한 시간에 한 바퀴

신랑의 품에서 반짝인다.

- 일본 나고야 쥬니치빌딩에서 -

 

 

꽃꽂이 여인

 

그녀는 장미 입술로 웃는다

햇살을 사모하는 웃음꽃으로

루즈의 동그라미를 그리며

하늘을 온통 봉오리 채 웃는다.

속눈썹 곱게 펼쳐 올리고

신비의 눈 그윽하게 올려보면서

햇살 거슬러 웃음 쏘아 올린다.

나는 그녀의 웃음을 훔쳐낸다.

세상에 없는 웃음이기 때문에

나는 웃음꽃을 가슴에 심는다.

숲속의 새처럼 경쾌한 율동으로

꽃을 고르는 눈동자와

밑줄기를 자르는 그녀의 손,

세련된 움직임 하나 하나에

꽃의 미소를 담고 있다.

그녀가 화병에 꽃을 꽂을 때

나는 그녀를 가슴에 꽂는다.

神의 손가락 하나 하나에

세상은 꽃밭으로 어우러진다.

하나의 꽃 곁에

또 하나의 꽃을,

꽃과 꽃을 정답게 꽂으면

꽃다운 꽃 그 사이사이로

얼근한 하늘이 내려온다.

- 일본 남산대학에서 -

 

 

오바라(小原) 마을에서

 

지난 시간의 껍질을 우려내어

오늘의 창을 바르는

小原村에는

해묵은 잉어가 떠돌고 있었다.

플라스틱 통 속에

닥나무 껍질이 담겨있었다.

손잡이는 매달려 있었다.

현대의 쇠가

고대의 창호지를 위하여

개풀어진 나무껍질을 옹호하고 있었다.

대나무 통을 통하여

약수가 들어오고 있었다.

산삼 썩어 내리는

골짜기의 물

토속(土俗)의 생리가 흐르고 있었다.

플라스틱 통 속에서 떨어지는

대나무 파이프의 물이

오물(汚物)을 우려내고 있었다.

우려내면 우려낼수록

투명해지는 닥나무 껍질은

때묻은 도시를 빨래하고 있었다.

- 일본 小原村에서 -

 

 

누룩

 

우리 서로 쓰다듬으며

꽃빛 노을로 타오르자.

안으로 괴어오르는

얼근한 가슴

술 익는 항아리에

향수의 불이 붙는다.

썩어 괴이는

일상의 아픔으로

타는 가슴

고향이 삼삼하다.

할매는 할배랑 극락에 계실까.

뒷꿈치에 눌러빠진

아픔의 토속 덩어리

술에 삭은 뼈

얼근히 계실까.

눈물로 괴는

니밀(內密)의 벙어리로

가슴 앓고 계실까.

술 익는 가슴에

용수를 질러놓고

아픔을 우려내는

정겨운 항아리에 타는 노을.

항아리를 어루만지며

안쓰러운 7월을 부른다.

발뒷꿈치로 누르는

내 회한의 눈물어림을.

쓰다듬는다, 쓰다듬는다.

꽆잎에 우려내는

그대 술빛

썩는

내 도가니 속

생활의 진액으로 괴어오르는

내 노을로 쓰다듬는다.

 

 

병풍(屛風)

 

팔곡병풍에 학(鶴)이 열

솔을 차고 솟아오른다.

기지개를 켜는 시원(始原)의

하늘은 천길 물 속인가.

꿈꾸듯 들리는 학의 울음소리

헤집는 나래 끝에 물살이 인다.

 

 

꿈길로 가는 파라다이스

- 龍安寺 石庭에서 -

 

툇마루에서

석정(石庭)을 바라보는

가슴에는 물이 오르네

물이 찰찰 넘쳐흐르네

햇살은 새와 함께 지저귀고

구름은 바람을 재우네

내 항상 얼싸안은 하늘

텅 빈 가슴에 물이 오르네

돌담 기와가 춤추네

마당은 초록빛

모래 물결 남실남실

가슴 찰찰 넘쳐흐르네

이렇게 한 나절 걱정 없이

툇마루에 앉아서

석정(石庭)을 바라보면

등 뒤 산수화엔 안개가 피어

겨드랑이로 골짜기로

굼실굼실 휘감아 내리네

이렇게 나도 모르게

나를 휘감아 도는 것은

무아(無我)인가 선경(仙境)인가

나는 아무 걱정이 없네

다사로운 햇살을 가슴으로 받으며

꿈을 꾸듯 앉아있으면

내가 사는 곳은

이승인가 저승인가

내 가슴 골짜기엔 안개 내리네

안개 속 돌돌돌 물이 흘러내리네

 

 

교토(京都)의 밤길

 

달 그림자 밟으며

밤길을 간다.

천년 전

숲길 걷듯

골목을 간다.

어둠 속 등불 켜든 주막집들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을 흔든다.

처마 밑에 떨어지는 나막신소리

기모노 자락 붙들고 바람이 운다.

 

 

삼국지(三國志)

 

와리바시가 짜장면을 삼킨다

짜장면이 와리바시를 물들인다

와리바시와 짜장면 싸움에 사발(沙鉢)이 금간다.

짜장면을 감아 올리던

와리바시가 부러져나가고

금 간 사발에 개풀어진 짜장면

뙤놈들 대가리에 황사(黃砂)가 인다.

짜장면은 식품(食品)이지만

와리바시는 소모품(消耗品)이지만

사발에는 품(品)을 붙일 수 없는

경천(敬天)의 우러름이다.

속까지 입을 벌리고

하늘 우러러 두 손 비는

백의민족의 몸짓이다

흰옷의 눈물어림이다

하얀 순백(純白)의 사발에서는

<福>자 <喜>자 원추리 글씨가

햇살을 모셔들이지만

황하(黃河)를 건너온 짜장면에서는

홍위병(紅衛兵)의 깃발이 꿈틀거리고

고꾸라진 와리바시에서는

사무라이 칼날이 번쩍거린다.

 

 

망향(望鄕)

 

장맛을 아는 사람은

장을 잘 담그시는

어머니를 안다.

돈지루를 먹을 때나

미소시루를 먹을 때

된장국을 잊지 못하고

해장국을 잊지 못하는

한국산 일본 사람들.

초가에서 태어난 사람은 안다

구들에서 잠을 자 본 사람은 안다

고추잠자리 몰려오는

한여름의 향수(鄕愁)를.

쑥풀이 타는 저녁 연기와

모기소리 그리워지고

마당의 멍석 가득히

쏟아져 내리는 별떨기

이웃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을은 안다.

해묵은 된장에

상추쌈을 싸 본 사람은 안다

고향의 냄새와

고향의 빛깔

밤으로 죄스럽게 꿈을 꾸듯

어머니 가르마 곱게 트인

고향 길을 볼 줄 안다.

 

 

타락론(墮落論)

- 下降한 女神의 신음 -

 

불도저가 골짜기를 강간한다

철제가 풀잎을 깔아뭉갠다

생목이 쓰러지고 풀잎이 가로눕는다

저만치 굴러 떨어진 바위

해골바가지들이

허연 이를 드러내며

때로는 갈기도 하면서

불도저를 노려본다

“도시는 죽어간다

시멘트는 빠개진다.”

악을 쓰는 불도저와

이를 가는 벽돌들…

그 사이

깔려죽은 풀잎들

씨알을 품은 채 잠들었다.

 

 

산중호수(山中湖水)

 

산이 끌어 안은

초록 치마 끝에

몇몇 척의  돛배

하늬 바람 탄다

- 일본 후지산에서 -

 

 

맹인용 점자 안내판

 

  나는 바라본다. 점자(點字)가 가리키는 길, 외로운 길을, 감긴 눈으로 바라본다. 감긴 눈 속에서, 눈 뜬 손으로 더듬어 여는 감관(感官)의 창(窓)으로 원경(遠景)이 보인다. 하얀 손이 더듬어 가는 예감의 길 위에 바람이 설레고, 흩어지는 낙엽들은 햇살을 그리워한다. 플라스틱 점자를 더듬는 손가락 끄트머리마다 촉수는 길을 찾는다. 녹말과 꼬냑을 궁리하는 겨울 포도원에 불이 들어오고, 등불 켜든 손가락 끄트머리마다 새로운 길이 열린다.

 

 

석가정(夕佳亭) 가는 길

 

꿈속을 가듯

숲길을 간다.

나뭇잎 굴을 가면서

릴케의 시를 읽는다.

노을이 단풍을 애무할 때

바람도 남몰래 속삭인다.

그가 산의 입술을 빨 때

나는 부끄러운 눈을 감는다.

못을 베고 누운

구름이 한 점

얼근히 취해서 간다.

 

 

법륭사(法隆寺)의 정오

 

기와지붕 위에

머리 풀고 앉은 풀,

산발한 궁녀 옷자락에

구름이 걸려있다.

햇살은 전설을 더듬거리고

먼 기억의 풀잎들

기와에 씨를 떨군다.

검은 꽃으로 굳은

고대(古代)의 흙이

귀를 기울인다.

벽화(壁畵)에 날아온 학의 울음은

천년 뜰에 날개를 치며

간 간 솟는데……

아름드리 기둥에 귀를 대면

백제불(百濟佛)의 발자국 소리

나라인의 나막신 소리

징 소리 울려온다.

 

 

강의실 정경

일본인 여교수

사미셍의 목소리

화사하게 날리는

사쿠라 꽃잎

흑판엔 춤추는 히라가나.

중국인 여학생의

빨간 미소

매화꽃 겨드랑이에 이는

사춘(思春)의 바람

사성(四聲)으로 오르내리는

물새 소리.

미국인 여학생

웃음소리는

조선 닭 알 낳고

홰치는 소리

참깨 밭에 쳐드는

햇살의 이빨.

호주인 학생

수염에서 떨어지는

계곡의 물소리

바람소리

나는 말없는

석굴암대불(石窟庵大佛)…

- 일본 남산대학에서 -

 

 

열병(熱病)

 

나는 오늘 장작을 팬다.

위선의 양복을 벗어 던지고,

가식의 넥타이도 풀어 던지고,

구릿빛 등살을 드러낸 채

손바닥이 부르트고 팔목이 시도록

온종일 땀흘리며 장작을 팬다.

결이 고운 것은 제쳐두고

결이 나쁜 놈들만 골라잡아서

혼신으로 내려찍어 장작을 팬다.

“얘, 야야. 몸조심해라!

믿는 도끼에 발등 찧을라!”

근심으로 주름진 할아버지는

걱정이 되시는 모양이지만

열병 앓는 젊은 놈 눈에는

뵈는 게 없기 때문에

할아버지의 무서움을 내려찍는다.

어둠 속 배알이 뒤틀린 놈들

어둠 속 혓바닥이 배배 꼬인 놈들

어둠 속 오기의 모가지 비틀어진 놈들

어둠 속 고집의 관솔이 박힌 놈들

어둠 속 끈끈한 송진으로

도끼 날을 붙들어 매면서

독버섯과 동거한 놈들을 골라잡아

이를 물고 빠개나간다.

장작을 패면 팰수록

울고 싶은 까닭은 무엇인가

어둠을 내려찍으면 찍을수록

떨어져나가는 내 가슴의 상처.

부조리를 사랑해야 하는

아픔을 견디는 아픔으로

아픔을 아픔으로 내려찍는다.

 

 

사태(沙汰)

 

폭우(暴雨)는

미치광이의 지랄병이다.

주저앉아 울던 산이

미친 지랄하다가

단애(斷崖)에서

할복(割腹)을 기도했다.

집을 덮친 모래덩이가

도로도

선로도

민가도 휩쓸고

바다로 투신(投身)했다.

머리풀며 울고 가는

물결을 따라

풀뿌리

나무뿌리

혀를 물고 흘러갔다.

- 일본 나고야에서 -

 

 

가을의 노래

 

삼(杉)나무 그늘아래서는

소월의 시가 좋아라.

금잔디 넓은 들에 누우면

푸른 하늘이 좋아라.

떠도는 흰 구름 타고 오르면

고향의 산하가 좋아라.

 

 

아내

 

그대는 나의 갈비뼈인가

떨어져보니 허전하네.

보아도 보나마나 했었는데

멀리서 보니 이제 알겠네.

그대는 나의 갈비뼈인가

언제나 내 속에 있어야겠네.

 

 

조율사(調律師)에게

 

여보게 조율사

제발 좀 부탁이야

너무 그렇게 조이지 말게

너무 팽팽해도 안되고

너무 늘어져도 안 된다네.

아이들 웃음 달래듯

그렇게 조심스럽게

소리를 맞춰주게나.

자네는 그 드라이버나

뻰치 한번 잘 못 만지면

우리 연주는 버리는 게야.

화음(和音)만을 생각하는

우리들의 연주가

자네 손에 다린 줄 알면

그렇게 함부로 하지는 못할 걸세.

여보게 조율사

제발 부탁이야

너무 그렇게 조이지만 말고

한번씩 소리도 들어보게.

무슨 소리가 들리는지

귀를 기울여보고 나서

알맞게 알맞게 조여주게나.

 

 

아로이쥬스 파와헤 신부

 

산호빛깔의 대리석에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햇살을 받고 있었다

고열(高熱)로 굳은 돌의 주변이

빨갛게 물들여져 있었다.

보름달 같은 얼굴이

오래된 돌의 중심을

달무리하고 있었다.

투명한 안경 사이로

바라보는 눈동자

천주(天宙)의 창이 열려있었다.

참깨 밭에 내리는 비둘기의 눈빛으로

진디 위의 학생들을 굽어보는

눈동자에 사랑이 고여 흐른다.

입은 굳게 다물면서도

활기찬 히라가나로 말하고 있다.

그것은

가슴에서 샘솟는

하느님의 말씀

빛을 받아서 뿌려주고 있다.

잔디 위에서 책을 읽는 젊은이들에게

어둠을 살라먹는 빛의 지혜를

소리 없이 가르쳐주고 있다.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돌이

남산 자락에 살아있다

비가 오는 날에도

눈이 오는 날에도

눈 비 폭풍이 몰아쳐 오는 날에도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신이 흙으로 사람을 빚으신 것처럼

이 땅에 사랑을 심은 자

신이 사람들을 지켜보는 것처럼

그렇게 훈훈한 가슴을 열고

비둘기 떼의 행렬을 지켜보고 있었다.

-1975년 일본 남산대학 교정에서 -

 

 

해설

영원히 샘솟는 청신한 서정

- 황송문 제3시집의 이미지 -

金南石 문학평론가

 

  시는 가장 맑고 깨끗한 순수 속에서 샘솟는 생명력의 찬가이며, 가장 높은 인간의식의 정규이다. 그것은 시정신이라고 하는 인간 영혼의 최고의 불길로 용화(熔化)되고 승화되어지는 진리의 구현이다. ‘시는 영혼이다’라는 말라르메의 감격과 도취는 바로 그 속에 잉태되어지는 최고의 미의식을 뜻한다. 미의식은 진선(眞善)의 탐구이며, 실존이 염원하고 있는 가장 절실하고도 의미 깊은 창조의 요람인 것이다.

  황송문 시인이 이번에 또 『내 가슴속에는』이라는 시집을 세상에 선보이게 된다. 이 시인의 시정신세계에서 가장 높이 평가할 수 있는 것은 현대인의 사념 속에서 근본 바람이 되어지고 있는 현실여과에 대한 작업이다. 그것은 현실을 영원한 진선 속에서 승화시키려하고, 그러한 노력을 부단히 계속하고 있다는 지구력이다. 그것은 시적 의지가 강렬한 진리의 추구로 일관되어있고, 현실의 가상적인 현상 속에서도 영원으로 이어질 신앙의 세계에의 회귀를 마련하고 있다.

  그의 시는 언제나 들뜬 바람결이 없다. 차분하게 안전된 제 자리를 굳혀가고 있으며, 자아에 대한 재확인으로부터 대아(大我)의 세계를 지향하는 신에의 신념이 삶의 자리를 확고히 마련하였다고 볼 수 있겠다. 이러한 특징과 장점들은, 첫째로 현실을 보는 안목이 미래지향적이기 때문이며, 둘째로 자아의 실존을 신의 세계로 연장할 확신을 갖고 있기 때문이며, 셋째로 현실과 이념의 한계분석에 대한 척도를 역시 신의 세계로 뻗치고 있다는 이미지에서 그렇다.

 

내 가슴속에는

푸른 물이 오르네

열길 땅 밑에서

끝없는 샘물이 솟아오르네.

내 가슴속에는

파랑새가 오르네

푸른 물새 한 자웅

물을 물고 솟아오르네.

- 「내 가슴속에는 1」-

 

  여기에서 보여지는 이미지계열은 바로 때묻지 않은 순수한 자아, 본연의 시원성(始原性)이 빛나고 있다. ‘푸른 물’과 ‘파랑새’의 푸른 색채의 색감이 바로 창조되어지는 새로운 생명력과 감동의 운율적 상징을 깃들인 것이라고 보아질 때, 그는 언제나 근본적인 세계에 자기의 시정을 뿌리박고 있다는 표시가 된다.

  푸른 색감은 영원한 창조의 빛이요, 참된 대자연 그대로의 형상이다. 거기에는 탄생의 계기가 있고, 생육의 질서가 있으며, 비약과 성숙의 경지가 함께 자리를 하고 있다. 이런 시정(詩情)은 이 시집의 가장 근본적 특질을 마련하면서, 현실과 이념과의 비유적인 수법으로 시제(詩題)들이 바르게 시화(詩化)되어 있다.

  오늘의 시가 난해하다는 문제성들은 바로 오늘의 시가 지나치게 관념화되어서 사물의 진상에 대한 추구보다도 감각적 기교가 아니면, 지나친 의식구조의 심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결과가 된다. 이 시인은 이러한 시가 지닌 과잉상태에서 벗어나 리얼한 속에 비판적인 미래에의 의지를 도사리고 있기에 현실에 국한된 모든 세속적인 현존재에 하나의 새롭고 맑은 입김을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내 가슴속에는

장미꽃이 차지했네

뜰에는

장미 붉은 불

꿈속을 나는 나비

그대 눈 속을 떠가네.

내 가슴속에는

저녁놀이 차지했네

꽃잎 타는 언덕엔

윙윙대는 벌떼들

얼근한 구름들

그대 눈 속을 떠가네.

- 「내 가슴속에는 2」-

 

여기에서는 가슴속에 ‘장미’가, ‘나비’가, ‘벌떼’가, ‘저녁놀’이 차지하면서 얼근한 구름들이 눈 속에 떠간다고 읊었다. 이런 대자연의 본연한 이미지의 추구는 이 시정의 맑은 시원적 모멘트를 착안했다는 사실과 함께 그것을 현실의 순화로 귀의시켰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다.

자연관은 인간에게 순수와 영원의 이미지를 심어준다. 그것을 심미(審美)할 수 있는 능력은 현실에서 정화되어진 시안(詩眼)에서만 가능하다. 이 자연의 속성열거는 현실에서 창조되려고 하는 청신한 생명력에 대한 다함 없는 기대요, 그 실현에 대한 찬미가 된다.

황송문 시인의 시적 출발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는 모질게 피어오른 고향에의 향수가 있다. 생명의 근원에 대한 차원 높은 자각의 과정이었다.

 

내 울 안에 심은 꽃나무들

내 가슴에 물을 적셔주시고

멋진 이야기도 들려주시고는

내 가난한 머리맡에

꽃씨들의 꿈도 길어 올려 주시다가

어디론지 사라져간 꽃나무들.(1연)

 

이렇게 시작된 「꽃나무들」이란 시는 흘러간 날 마음의 고향에 아름다운 수(繡)를 놓던 추억이다. 그는 인정의 푸른 고향 속에 ‘사랑의 연유와 업과’를 들여다보고 있다.

 

자랑스런 눈의 꽃나무들이

그대의

동자(瞳子) 속 노을로 내리시더니

솔개처럼 훨 훨 맴을 돌면서

사랑의 슬픔과

사랑의 아픔과

사랑의 무능을 적셔주시고는

어디론지 사라져간 꽃나무들

내 울안에 살아있는 꽃나무들.

  이렇게 그는 ‘내 울 안에 살아있는’ 그 ‘꽃나무’를 발견하고, 그 흘러간 자취에 맴도는 상념 속에서 역시 보다 순수한 시절의 감동에 젖어있다. 그것은 현실승화의 피나는 노력이며, 영원을 염원하는 존재의 생명력에 대한 갈구이다. 이래서 그의 시정(詩情)은 영원에의 벅찬 탐색에 시의 날개를 펴가는 것이다.

 

시원(始原)의 자궁 속을

목선(木船)이 간다.

초록의 하늘로

밀리는 물살

거슬러

구름 가르면

산장은

등불

여기

저기

석류(石榴)가 터지고,

물빛

시오리

호반새 소리.

- 「호수(湖水)」전문 -

 

여기에서도 시원, 초록, 석류, 호반새로 요약된 시어(詩語)는 모두가 자연율(自然律)이다. 호수의 풍경이지만 그저 풍경이 아니요, 호수의 정서이지만 그저 정서가 아니다. 인간이 그리운 풍경이며, 인정이 사무친 정서이다. 대자연은 그에게 있어 모두가 살뜰한 정(情)의 샘물이요, 온통 삶의 벗이요, 일체의 오성(悟性)이다. 물길을 따라가는 목선의 흐름은 스스로의 흐름이 아닌 자연의 파손이요, 아픔들이 무너지는 자연의 문명 속의 붕괴이다. 잃어져 가는 자연미에의 탄식이 불타고 있다.

 

달빛이 풀잎을 연주한다

달빛이 활을 쥐고

바이올린을 켜는

풀 푸른 소리

은하(銀河) 이슬이 흐른다

강물은 비늘을 털고

악보의 눈들이 반짝인다

풀꽃에 자지러지는 바람

천연(天然)의 머리카락이 흩날린다

풀잎은 풀잎끼리

별빛은 별빛끼리

볼을 비벼대는

애무의 밤

지칠 줄 모르는 연주

나도 하나의 활이 된다.

- 「가을 연주 1」 -

 

여기서는 대자연의 정경 속에 우주의 입김이 내리면서 하나의 역동적인 작용이 인간에게 일어나는 그 벅찬 생동의 맥박이 뛰고 있는 정염의 비약이 별빛과 풀꽃의 앙상블을 통해서 연상되는 과정은 자연과 인위의 집약된 하나의 창조라 볼 수 있겠다.

가을이라는 계절의 조화력을 창조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시적 모멘트가 특히 대견스럽다. ‘가을의 달밤’은 하나 뿐인 가을의 지고(至高)한 정서다. 그것은 투명한 인간의 의식이 하나의 삶의 약동을 일으키는 훌륭한 모멘트로서다. 이 가을 연주는 다시 계속되어 간다.

 

달빛이 통행금지를 알지 못하듯

사람들은 푸른 소리를 알지 못한다.

별들이 소곤대는 하늘나라

베일 속의 소리를 알지 못한다.

모두들 잠든 밤에도

연주는 계속되지만

자연의 악보를 아는 이는 없다.

이슬에 젖은 별들이 연주한다.

풀잎에서 자고 깨는

달빛과 별빛

반짝이는 악보의 푸른 동자(瞳子)는

언제 보아도 첫사랑이다.

깊은 밤 나는

이슬 속에 활을 쥐고

푸른 소리를 연주하는

한 마리의 귀뚜라미가 된다.

 

여기에서 “달빛이 통행금지를 알지 못하듯”은 사실 “사람들은 푸른 소리를 알지 못하다”라는 인간의 문명지대의 비순수, 비정서적, 비관조적인 기계화의 성격을 대구적으로 나타냄으로써 시인은 이미 아름다운 자연과 순수한 정감을 상실한 비극적 상황을 은유로 지적하는 슬기를 보였다.

 

“모두들 잠든 밤에도/ 연주는 계속되지만/ 자연의 악보는 아는 이는 없다.” 하고 현대인의 고갈된 정감세계를 고발하고 있어, 보다 근원적인 진실을 생활 속에서 염원하는 이미지가 선명히 부각되어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너무나 기계적이며, 냉각한 가슴의 주인이 되어버렸다. 이런 상황은 현대사의 근본적인 비극성이다. 이 시는 바로 이러한 시정신을 투명하게 나타낸 휴머니즘을 지녔다.

「선풍(禪風)」이란 시에서 “노을이 물든 山寺”, “꽃잎을 걸러 마신 僧房”, “스님의 모시옷은 구름으로 떠있고…” 등은 세속을 떠나 초연한 불법의 정경을 숭앙하는 이미지요, “나의 넥타이는 번뇌로 꼬여있다”, “목을 감아 맨 십자가, 책임을 풀어 던질 수는 없다”, “내 가정과 국가와 세계, 앓고있는 꽃들을 버릴 수는 없다.”를 스님과 대조시켜, 현실정화의 생활이념을 속중(俗中)에서도 실현하는 삶을 살아가려는 대중화된 의식은 고답적 자세의 신앙에 묻혀서 미적인 세계로 현실을 정화시켜가려는 굳은 휴머니즘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 경향은 이미 이 시인이 첫 시집에서부터 안고 오는 심적 태도이며, 그의 벗어난 적이 없는 모럴이다. 여기에서 시의 신념은 바로 삶의 신앙으로 동화되어 가는 것이고, 그것은 그만치 현실을 정화, 미화시킬 수 있는 구실을 다하려는 자성적인 도덕관념이기에, 그 시정신의 차원은 신앙적이며, 구세적인 수훈(垂訓)의 입김을 온 가슴속에 깃들인 숙명적인 세계로 나타나 있다.

  “홍위병의 깃발처럼 붉은 팬티가 나부끼는 빌딩의 창은 고달프다.”(虹彩毛樣體炎)에서 보듯, 도시의 피곤을 적발할 줄 알며, “하늘과 땅 사이/ 푸른 눈을 잃어버린/ 새의 슬픈 쓰다듬음이다.”의 목적격으로 “부끄러운 인생의/ 부스러기를 바라볼 때”에 연결시켜 준 것도 역시 고된 역사의 매연에 퇴색된 문명의 괴물과 대립한 인간의 순수에의 향수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이 시인의 생리는 어디까지나 내재율로서 두각을 보일 수 있는 시재에 이르러 있으며, 그 기교보다 우월한 시정신 속에서 하냥 못 잊는 비중은 생명과 육체의 근원인 자연과 모체에 대한 향수를 앞세워 나아가는 그 특기에 있다고 하겠다.

 

어매여

남녘의 어매여

바느질 뜸이 곱고

송편을 잘 빚으시던 어매

어매 잠든 고향 땅을

내 늘그막엔 밟아 볼라요.

어매 가슴 찾아

진달래 걸러 마신 노을 같이

얼근한 들녘을 가면서

삐비라도 뽑아들고 피리를 불라요.

뜬 그름 세월

흰머리 날리며

논두렁 밭고랑 구비 구비

플피리 불면서 찾아 갈라요.

- 생략 -

 

내 피와 살이 녹아

못자리에 밟혀 썩어지는

꽃다운 자운영이 될라요.

 

  이 「망향가(望鄕歌)」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시의 명맥으로 이어져 절절이 울음 섞인 향수는 그의 뼈와 살에 사무치는 고향 땅에 대한 그리움이요, 이 그리움으로 하여금 다시 재연되는 의식은 고향 같은 조국의, 조국 같은 민족의, 민족 같은 온 천하 인류에게 보내어져 흘러 넘치는 그리움이다. 이는 곧 향토애로부터 물들여놓은 인류에의 사랑이요, 동경이요, 사모요, 살뜰한 공생의 기원으로 귀착되는 이미지이다.

  시집 『내 가슴속에는』은 대체로 이상과 같은 시적 이미지가 용해되어 있어 순간에서 영원으로, 영원에서 영생으로 가려는 시정(詩情)의 목표의식이 투명하게 나타났고, 어지러운 현실이지만, 역시 인생은 그 속에서만이 인간미를 여과하는 작업, 진실을 실현하는 생활을 영위함이 바른 삶의 길이라는 신념이 신앙의 세계에 비약하고 있어, 그 시혼의 잔잔한 호수 속에 비쳐지는 청신한 샘물줄기 소리를 듣게 된 희열을 공감하게 된다.

 

黃松文 第三詩集 내 가슴속에는

1977년 12월 21일 인쇄

1978년 1월 1일 발행

정가 1200원

著 者 黃松文

發行處 敎育評論社

서울특별시 종로구 도렴동 116번지 301호

전화 73-1928, 연락처 전화 794-6511

등록 1959. 12. 9 NO. 제 라-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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