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송문 시전집

그리움이 살아서 -제5시집-

SM사계 2010. 7. 9. 21:17

 

黃松文제5시집

그리움이 살아서

 

□서문

古眞한 그 人品에 그

具常

 

그게 지지난해 말이던가 어느 시인들의 모임에서 황송문 시인이 나에게 다가와 수줍게 자기의 다음 시집에 서문을 써줬으면 한다는 청이었다. 평소 나는 그와 인간적인 접촉은 없었으나 때마다 대하는 그의 시에서 진솔성(眞率性)을 읽고 있던 터라 그것 뭐 어렵지 않다고 수월하게 승낙을 하였다.

그런데 내가 공교롭게도 곧 외지(外地)엘 나가게 되어 서로 전화로선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일년을 보내고 돌아왔는데 지난 여름 어떤 모임에서 다시 만나니 그는 몹시 기다렸다는 듯이 서문 얘기를 또 꺼내는 것이었고, 그래서 마침내 그 시고(詩稿) 뭉치를 내가 펼쳐보기에 이르렀다.

고진(古眞)이랄까! 이미 불혹(不惑)도 넘고 시집을 이것으로 다섯권째나 내는 그런 사람의 심지(心志)가 어찌 이렇듯 순박할 수 있을까? 그야말로 감복을 안 할 수가 없다. 이 시집을 펼치는 분들은 누구나 다함께 바로 내가 앞에서 얘기한 그 사람에 그 시라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그래서 감각의 참신이나 교치(巧緻)보다는 진실이 너무하도록 배어있는 시를 맛볼 것이다.

내가 왜 “너무하도록”이라는 형용을 하는가 하면, “시란 본디 진실과 거짓의 혼합물―쟝 곡토”로서 그 시심상태(詩心狀態)에서는 사무사(思無邪)하여야 하지만 소위 형상화에 있어서는 허구는 물론 흥청거림을 농(弄)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는 너무나 고지식하여 그의 시 「詩論 1」처럼

시를 쓰기 전에/ 인생을 정서하라.

가슴에 괸 술을/ 곱게 떠내어라.

성급하게 쥐어짜는 惡酒일랑/ 아예 꿈도 꾸지 말라.

<下略>

그 형상화에 있어서도 옷깃을 여민다. 물론 나는 오늘날 우리 시단(詩壇)에 횡행(橫行)하는 표상(表象)의 실재(實在)가 없거나 그 시심(詩心)마저 조작하는 거리의 마술사 같은 시인들을 혐오하고 있어 그의 저러한 시작(詩作)에 있어서의 정좌(正座)를 진귀(珍貴)하게 받아들인다.

또한 나는 그가 지닌 사유(思惟)의 깊이나 순화(醇化)된 심회(心懷)나 타락된 현실에 대한 진솔한 반감마저도 소중하게 여기고 더구나 그가 지닌 종교심이 갇혀있지 않고 열려있음을 기쁘게 여긴다.

그래서 저러한 그의 시는 앞으로 그의 연륜과 더불어 관조(觀照)와 격조(格調)와 유연(柔軟)을 더욱 깊고 높고 넓게 해서 우리 시사(詩史)에 크게 정채(精彩)를 발할 것을 바라고 믿으면서 이 시집의 기쁨을 저자와 함께 나누는 바이다.

갑자년(甲子年) 정초(正初) 관수재(觀水齋)에서

黃松文 第五詩集

그리움이 살아서․목차

? 아름다움 것

섣달

시래기국

자운영(紫雲英)

아름다운 것

가을 등산

가랑잎 소리

사당동 귀뚜라미

간장

가수 밀바

동전 두 닢의 슬픔

그리움 1

그리움 2

그리움 3

비비새

물레

장기를 두면서

Cine poem

건널목에서

? 망향가(望鄕歌)

수채도랑집 바우

우감(偶感)

詩論 1

詩論 2

뚝배기

고백

망향가 2

禪風 2

禪風 3

5월 서정

기원(棋院)에서

보리누름에 1

보리누름에 2

보리누름에 3

보리누름에 4

사랑의 기쁨

물레소리

싸리비 2

군불을 때면서

봄의 메시지

? 긴급동의(緊急動議)

화론(畵論)

신필(神筆)

유출(流出)

이장(移葬)

노변(路邊)에서

서울론(서울論)

시풍(詩風)

손금

화장터에서

긴급동의 1

긴급동의 2

운전사에게

착각(錯覺)

사중주(四重奏)

시인 1

시인 2

하루살이

이발소에서

내 가슴속에는 5

보내면서

? 시의 죽음

도시의 시

송가(頌歌)

샘물

Maya

Maya

항아리

도리깨질

시의 죽음

안부

분수(噴水)

풍경 6

풍경 7

도심(盜心)

묵념(黙念)

상황(狀況)

몽환의 시

눈의 부활

포효(咆哮)

철도중단점

조선낫

후기(後記)

■裝幀 金鍾元

■編輯 李俊寧

? 아름다움 것

섣달

시래기국

자운영(紫雲英)

아름다운 것

가을 등산

가랑잎 소리

사당동 귀뚜라미

간장

가수 밀바

동전 두 닢의 슬픔

그리움 1

그리움 2

그리움 3

비비새

물레

장기를 두면서

Cine poem

건널목에서

불 속에서 한 천년 달구어지다가

산적이 되어 한 천년 숨어살다가

칼날 같은 소슬바람에 염주(念珠)를 집어들고

물 속에서 한 천년 원없이 구르다가

영겁(永劫)의 돌이 되어 돌돌돌 구르다가

매촐한 목소리 가다듬고 일어나

신선봉(神仙峰) 화담(花潭)선생 바둑알이 되어서

한 천년 운무(雲霧) 속에 잠겨 살다가

잡놈들 들끓는 속계(俗界)에 내려와

좋은 시 한 편만 남기고 죽으리.

섣달

소복(素服)의 달 아래

다듬이질 소리 한창이다.

고부(姑婦)의 방망이 딱뚝 똑딱

학울음도 한밤에 천리를 난다.

참기름 불은 죽창(竹窓) 가에 졸고

오동(梧桐)꽃 그늘엔 봉황(鳳凰)이 난다.

다듬잇돌 명주 올에 선을 그리며

설움을 두들기는 오롯한 그림자

떼지어 날아가는 철새 울음

은대야 하늘에 산월(産月)이 떴다.

시래기국

고향 생각이 나면

시래기국집을 찾는다.

해묵은 뚝배기에

듬성 듬성 떠있는

붉은 고추 푸른 고추

보기만 해도 눈시울이 뜨겁다.

노을같이 얼근한

시래기국물 훌훌 마시면,

뚝배기에 서린 김은 한이 되어

향수 젖은 눈에 방울방울 맺힌다.

시래기국을 잘 끓여주시던

할머니는 저승에서도

시래기국을 끓이고 계실까.

새가 되어 날아간

내 딸아이는

할머니의 시래기국 맛을 보고 있을까.

고향 생각을 하다가

할머니와 딸아이가 보고 싶으면

시래기국집을 찾는다.

내가 마시는 시래기국물은

실향(失鄕)의 눈물인가.

내 얼근한 눈물이 되어

한서린 가슴, 빙벽(氷壁)을 타고

뚝배기 언저리에 방울방울 맺힌다.

자운영(紫雲英)

나는 그녀에게 꽃시계를 채워주었고

그녀는 나에게 꽃목걸이를 걸어주었다.

꿀벌들은 환상의 소리 잉잉거리며

우리들의 부끄러움을 축복해 주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만남은 이별,

보자기로 구름 잡는 꿈길이었다.

세월이 가고

늙음이 왔다.

어느 저승에서라도 만나고 싶어도

동그라미밖에 더 그릴 수가 없다.

이제는 자운영을 볼 수 없는 것처럼

그녀의 풍문조차 들을 수가 없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나의 추억 속에 살아 있는

그녀의 미소,

눈빛과 입술이다.

나는 그녀에게 사랑을 바쳤고

그녀는 나에게 시를 잉태해 주었다.

아름다운 것

보내놓고 돌아와

틀어박는 쐐기는 아름답다.

쐐기의 미학으로

눈물을 감추면서

피어내는 웃음꽃은 아름답다.

기다림에 주름잡힌 얼굴로

쏟아져 내리는

햇살의 만남은 아름답다.

태양의 미소와

바람의 애무

눈짓하는 나무는 아름답고

지저귀는 새는 아름답다.

아름다운 것은

눈짓하는 나무와

지저귀는 새,

떠난 이의 뒤에서 헛웃음치는 아픔이다.

보내놓고 돌아와

짜깁는 신경의 잔을 기울이며

하루를 천년같이 기다리는 노을이다.

노을 담긴 그리움이

한으로 괴이어

떠낸 시의 잔에 넘치는 술의 입술이다.

아름다운 것은

산불로 타오르던 나무

뚫린 가슴에

울며 울며 쐐기를 지르는

망각의 술, 기다림의 잔이다.

가을 등산

단풍은 투피스,

때가 되면 가식을 벗어 던진다.

절반은 벗은 채

절반은 걸친 채

얼근한 하늘을 환장하게 좋아하는

골짜기의 물소리를 안주삼아

우리 한 잔 하는 게 어때.

인생길이 가파르면

쉬엄쉬엄 쉬어서 가고

일락서산(日落西山) 해떨어지면

병풍 같은 산허리에 천막을 치고,

삼겹살이라도 볶아놓고 둘러앉아서

우리 한 잔 하는 게 어때.

세상살이가 어지러우면

청류(淸流)에 발을 담그기도 하고,

구름처럼 초연히 털고 일어나

반나(半裸)의 수림 사이사이로

바람같이 속편하게 정좌수(鄭座首)랑 불러놓고

우리 한 잔 하는 게 어때.

가랑잎 소리

여행용 시계의 태엽을 감다가

풀어지는 목숨을 감고 싶어지는

아이스크림 같은 시간을 핥다가

천년 같은

나의 하루를 야금거리다가

문득 문득 올려보는

목이 시린 밤하늘에는

아직도 젊은 별이 반짝이는데

스쳐간 청춘의 바람 한 자락

발에 밟히는 가랑잎 소리…

포도주를 나팔불다 비틀거리는

마지막 지는 노을같이

목숨의 벼랑 가물가물

바람 따라 흩어지는 가랑잎 소리…

가슴에 바스러지는 가랑잎 소리는

하늘 한 자락 오려 타고

이쪽과 저쪽을 넘나드는 소리…

사당동 귀뚜라미

도시문명에

참여해온 귀뚜라미에도

순수한 소리가 고여 흐른다.

부황(浮黃)든 몸뚱이는 볼품이 없어도

진실한 시음(詩吟)은 목숨보다 진하다.

한 방울의 이슬 속에

숨쉬는 것은

아득한 풀잎의 꿈나라…

부음(訃音)을 듣던 날

고향을 목놓아 울다 잠들던

지하실 연탄 아궁이 속에서

더듬던 아득한 풀잎의 꿈나라…

빌딩에 잔월(殘月)이 걸리는 밤이면

쓰러진 술병 옆에서

가슴을 물어 소리를 내는

날이 선 절규,

참여의식이 순수로 고여 흐른다.

간장

우리 조용히 썩기로 해요

우리 기꺼이 죽기로 해요

토속(土俗)의 항아리 가득히 고여

삭아 내린 뒤에

맛으로 살아나는 삶,

우리 익어서 살기로 해요.

안으로 달여지는 삶,

뿌리깊은 맛으로

은근한 사랑을 맛들게 해요

정겹게 익어가자면

꽃답게 썩어가자면

속맛이 울어날 때까지는

속삭는 아픔도 크겠지요.

잦아드는 짠맛이

일어나는 단맛으로

울어날 때까지,

우리 곱게 곱게 썩기로 해요

우리 깊이 깊이 익기로 해요

죽음보다 깊이 잠들었다가

다시 깨어나는

부활의 윤회(輪廻),

사랑 위해 기꺼이 죽는

인생이게 해요

사랑 위해 다시 사는

재생이게 해요.

가수 밀바

풍만한 성량(聲量)으로

연서(戀書)를 날리는

그대, 광란의 불꽃이여!

청춘의 등걸불을 환장하게 일으키며

달빛에 우짖는

금발(金髮)의 야성(野性)

물무늬 아른아른

개울물 건너오는 목소리에

흐느끼는 바이올린이여!

계절이 흐르는 꿈의 개울에

머리카락 풀어헤치고

꽃빛 노을을 불러들이는

정열의 불꽃이여!

그대 입술의 동그라미 속

이빨이 쳐들릴 때

강변로 휘어 도는 가로등 불빛,

아아, 그 반짝이는 은어 Ep

불 머금어 흐늘거리는 강물이여!

아픔의 공지, 환희의 혓바닥,

율동의 허리 흐늘흐늘

환장하게 타오르는

눈물 속 애욕의 불꽃이여!

동전 두 닢의 슬픔

비가 오고 있었다.

하늘에도

땅에도

내 가슴에도.

공중전화 상자 속에서

동전을 넣고

다이얼을 돌렸다.

꽃다발 같은 기대를 한아름 안고

전신줄을 타고 달려간

동전 두 닢이

벽에 부딪쳐 쓰러졌다.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안개 저쪽은 통화중이었다.

수화기를 놓자

두 개의 동전이 굴러 떨어졌다.

나는 새로운 삶을 찾아

수화기를 들었다.

척박한 동전을 일으켜 올리고

결사적으로 다이얼을 돌렸다.

그러나, 그러나,

두드려도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견고한 궁성 저쪽은

통화중이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자

나의 동전이 또 굴러 떨어졌다.

그러나, 그러나,

사랑하는 나의 가난이

언제까지나

공중전화 상자에 머물 수는 없다.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전진을 계속하다가도

틈틈이 다이얼을 돌렸다.

그러나,

학고다산(八甲田山)에서 얼어죽은

나의 동전이여!

다방에서도, 거널목에서도

정유소에서도, 지하도에서도

우체국에서도, 서점에서도

나의 동전 두 닢은 밀려났다.

떨어진 동전을 움켜쥐고

바라보는 창으로

비가 오고 있었다.

하늘에도

땅에도

내 가슴에도.

그리움 1

그리움은

해묵은 동동주,

속눈썹 가늘게 뜬 노을이다.

세월이 가면

괴이는 술,

꽃답게 썩어 가는

눈물어림이다.

눈물을 틀어막는

쐐기의 아픔이다.

뜬구름 같은

가슴에

삭아 괴는 한(恨),

떠도는 동동주다.

그리움 2

고향이 그리운 날 밤엔

호롱에 불이라도 켜보자.

말 못하는 호롱인들

그리움에 얼마나 속으로 울까.

빈 가슴에

석유를 가득 채우고

성냥불을 붙여주자.

사무치게 피어오르는 향수의 불꽃

입에 물고

안으로 괸 울음 밖으로 울리니

창호지에 새어드는 문풍지 바람

밤새우는 물레소리 그리워 그리워

졸아드는 기름 소리에

달빛도 찾아와 쉬어 가리니…

그리움 3

그리움이 살아서

바가 나를 부르네

비가 나를 오라 하네

괴로워 말고

정말 괴로워만 말고

어수로 젖어 오라 하네

그리움의 비는,

가슴에 내리는 그리움의 그대는

빙벽을 타는 눈물인가

전신주에도 신호등에도

방울방울 맺히네

내 한이 썩어 내리는

그대 눈물의 비,

애수의 눈시울을 타고

방울방울 맺히네

그리움이 살아서

비가 나를 부르네

비가 나를 오라 하네

괴로워말고

정말 괴로워만 말고

실버들 아래로 젖어 오라 하네

언제부터 오시는 소리이기에

저리도 온몸으로 젖어오는가

아무리 어두운 밤이어도

그대 치마폭 아늑한 고향,

천 갈래 만 갈래 부서져 내리는

내 감관(感官)의 창문이여!

산발한 실버들 아래

산발하며 오는 그대,

부서지는 목숨의 벼랑이여!

비비새

정 이월 다 가고 삼월이 오면

우리집 대숲에선 비비새가 울었지.

내가 항상 그리워하는

마음의 고향에는

비비비비 비비비비

非非非非 非非非非

훈민정음(訓民正音)으로 울뿐만 아니라

이두(吏頭)로도 울었지.

요즈음 유행가에서처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라든가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라고

저질로 악쓰는 소리가 아니라

죄를 모르는 죽순 밭에서

청명한 이슬을 퉁기며

非非非非 하늘 보는

순수와 참여의 소리로 울었지.

순수하면서도

참여의식이 강한

비비새 소리는

내 하나밖에 없는

언로(言路)의 숨구멍이었지.

물레

목화(木花) 다방에

한 틀의 물레가 놓여있었다.

수십년만에 햇볕을 받는

할머니의 뼈다귀처럼

물레는 앙상하게 낡아 있었다.

도시의 시가 타살되던 날 밤

다방으로 피신해 온 나는

물레소리에 미쳐들고 있었다.

할머니의 진언(眞言)처럼

사른사른 살아나는 물레소리가

너무너무 좋아서

나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청죽(靑竹) 같은 자식을

전장(戰場)에 보내놓고

사방팔방 치성을 드리던

할머니의 물레소리가

내 가슴 다르륵 물어 감고 있었다.

보기도 아까운 그 얼굴,

한줌의 재되어 온 자식을 끌어안다가

까무러치던 할머니의 목쇤 소리 다르륵,

숨이 막혀 울지도 못하고

낮은 음자리 돌아 감기는

한(恨)의 물레소리

가락에 시름을 감으며

지렁이 울음을 게워내고 있었다.

달지는 밤이면

버언한 창호지 마주 앉아

남편 생각 자식 생각에

손을 멈추다가도

꺼지는 한숨, 달달달달 다르륵,

시름을 감아 돌리고 있었다.

장기를 두면서

나는 인창이와 장기를 두면서

뜻을 생각한다.

「士」밖에 안 되는 나의 눈에는

인창이가 宮으로만 보인다.

때로는 재빠르게 차포(車包)로도 보이고

때로는 슬기로운 마상(馬象)으로도 보인다.

“아버지 왜 쩔쩔 매십니까?”

“오냐, 오냐, 나는 네가 부럽다!”

“아버지, 지 車를 잡수세요.”

“오냐, 나는 내 효(孝)에 졌다!”

차포를 떼고 두는 장기에도

인창이는 어질게 빛나고

나는 내 이름자(松)처럼 질기기만 했다.

Cine Poem

뻐꾸기 소리에 문득 눈을 떠보니 버언한 창호지 빛살 사른사른 죽림 속 비비새 맑은 이슬 하늘 청명하여 날리는 의식의 갈피에 떨어지는 계절이 분주하도다.

별떨기 그윽히도 맑은 눈 반짝이는 건반의 손가락 하얀 소녀 보조개 피는 꽃 가슴에 불이 붙는 하늘의 회전 비탈진 달 한 쪽 모서리 기우는 음악 한아름 황홀하도다.

하늘나라 꿈자리 밤바다에 출렁이는 은하수 떨어지는 은어 떼 퉁기는 선율 끝 날리는 옷고름 가슴에 불이 붙어 피는 꽃꿈의 파라다이스 사춘의 바람 일구는 스케이팅 왈츠가 한창이도다.

가시내야, 가시내야, 시골 가시내야. 루즈의 동그라미로 빌딩을 오르는 가시내야. 날 짝사랑했다는 가시내야. 달뜨는 밤이면 남몰래 고개 하나 넘어와서는 불켜진 죽창문 건너보며 한숨쉬던 가시내야. 날 어쩌라고 요염한 입술로 살아와서는 도시의 석벽을 올라와 보느냐.

가시내야, 가시내야, 시골 가시내야. 저만치 혼자서 창연한 눈빛으로 승천하는 가시내야. 너의 깊은 속 샘물 줄기 돌돌거리는 잠샛별 회포 쌓인 이야기를 일찌감치 들려주지 못하고, 어찌하여 멀리 떠서 눈짓만 하느냐. 어느 이승 골짜기에 우연히 마주칠 때 날라온 찻잔에 넌지시 떨구고 간 사연 갖고 날 어쩌란 말이냐.

가시내야, 가시내야, 시골 가시내야. 저 달을 물동이에 이고 와서는 정화수 남실남실 달빛 가득 뒤안의 장독대 바람소리 축수축수 치성을 드리던 어미 죽은 줄도 모르고, 루즈의 동그라미만 붉게 붉게 불이 붙는 가시내야. 날 어쩌라고 저만치 창연한 눈빛, 볼그레한 연지볼로 웃기만 하느냐.

건널목에서

가로수가 눈을 맞는 것은

철학적이다.

빈 주머니에 손을 찌른 것은

식물적이다.

그것은

건널목 이쪽과 저쪽

가난뱅이와 재벌이 동거하는

시와 지폐다.

빨강불 앞을

태연하게 건너가는 사람과

파랑불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고장난 적신호 앞을

눈치껏 건너가는 무리들을

응시하는 시의 눈초리다.

불법과 합법이 동거하는

건널목의 한 대지대

단념과 기다림의 간격이다.

비틀거리는 돈의 신 뒤에서

눈을 맞는 가로수는

식물의 정신이다.

떠내려가는 사어(死魚)

이쪽에서

눈을 맞는 식물의 정신이다.

? 망향가(望鄕歌)

수채도랑집 바우

우감(偶感)

詩論 1

詩論 2

뚝배기

고백

망향가 2

禪風 2

禪風 3

5월 서정

기원(棋院)에서

보리누름에 1

보리누름에 2

보리누름에 3

보리누름에 4

사랑의 기쁨

물레소리

싸리비 2

군불을 때면서

봄의 메시지

수채도랑집 바우

가까이 가지도 않았습니다.

탐욕의 불을 켜고

바라본 일도 없습니다.

전설 속의 나무꾼처럼

옷을 숨기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그저

달님도 부끄러워

구름 속으로 숨는 밤

물소리를 들었을 뿐입니다.

죄가 있다면

그 소리 훔쳐들은 죄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그 소리는 꽃잎이 되고 향기가 되었습니다.

껍질 벗는

수밀도의 향기…

밤하늘엔 여인의 비눗물이 흘러갑니다.

아씨가 선녀로 목욕하는 밤이면

수채도랑은 온통 별밭이 되어

가슴은 은하(銀河)로 출렁이었습니다.

손목 한번 잡은 일도 없습니다.

얘기 한번 나눈 적도 없습니다.

다만 아슴푸레한 어둠 저편에서

떨어지는 물소리에

정신을 빼앗겼던 탓이올시다.

시원(始原)의 유두(乳頭) 같은

물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머리카락으로 목덜미로 유방으로 허리로

그리고 또…

곡선의 시야(視野) 굼틀굼틀

어루만져보고 껴안아보던

그 달콤한 상상의 감주(甘酒),

죄가 있다면 이것이 죄올시다.

전설 속의 나무꾼처럼

옷 하나 감추지도 못한 주제에

죄가 있다면

물소리에 끌려간 죄밖에 없습니다.

우감(偶感)

- 詩論 3 -

마음 편한 식물성 바가지 같은 시

단기를 쓰던 달밤 교교한 음력의 시

사랑방 천장에선 메주가 뜨던

그 퀘퀘한 토속의 시를 쓰고 싶다.

인정이 많은 이웃들의 모닥불 같은 시

해질녘 초가지붕의 박꽃 같은 시

마당의 멍석 가에 모깃불 피던

그 포르스름한 실연기 같은 시를 쓰고 싶다.

겨울엔 춥고 여름엔 머리 벗겨지는

빨강 페인트의 슬레이트 지붕은 말고,

나일론 끝에 목을 맨 플라스틱 바가지는 말고,

뚝배기의 숭늉 내음 안개로 피는

정겨운 시, 푸짐한 시, 편안한 시,

더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고구마 한 소쿠리씩의 시를 싶다.

고추잠자리 노을 속으로 빨려드는 시,

저녁 연기 얕게 깔리는 꿈속의 시,

어스름 토담 고샅길 돌아갈 때의

멸치 넣고 끓임직한 은근한 시,

그 시래기국 냄새나는 시를 쓰고 싶다.

詩論 1

- 용수에서 떠낸 술 -

시를 쓰기 전에

인생을 정서하라.

가슴에 괸 술을

곱게 떠내어라.

성급하게

쥐어짜는 악주(惡酒)일랑

아예 꿈도 꾸지 말라.

시는

썩는 의식의 항아리에

용수를 질러놓고

기다리는 사상.

인생이 익을 때까지

기다리며 참는

꽃술의 아픔이다.

떫은 언어가

익느라고

썩는 동안엔

남모르는 눈물도 흘려야 하느니라.

속을 썩혀서

단맛으로 울여 내는

내밀(內密)의 결정(結晶).

꽃답게 익은 술,

정겹게 괸 술을

곱게 떠내어라.

詩論 2

- 도토리묵 -

높은 산의

경험의 나무숲과

깊은 골의

인식의 물소리 찾아 헤매며

주어온 도토리 옹배기에 붓고

바위틈의 맑은 물 남실남실

잠재우는 日月로

떫은 언어를 우려낸다.

우려내면 우려낼수록

맑아지는 정신,

혼신의 열을 가한다.

창조의 질서를 찾아

열을 가하고

열을 식히면

오롯하게 어리는

산향(山香)의 묵,

시어(詩語)를 퍼담은

심상(心象)의 옹배기에

도토리묵만 오롯하게 어린다.

뚝배기

뚝배기는,

보리누름을 지나면서

그름을 타시던

아버지의 입술이다.

어머니가 뜯어온 쑥을

열지펴 훌훌 마시며

웅족(熊族)의 습성 아질아질

훈김 서린 눈물이다.

춘궁(春窮)엔 입을 벌리고

하늘 우러러

우기(雨氣)를 도모하는

경천(敬天)의 좌상(座像)이다.

참나무 숯불에

닳아 오르는

토속(土俗)의 열병,

한(恨)의 절규(絶叫)다.

하늘로 소리치는

검은 입술,

그름을 타시던

아버지의 마늘 냄새다.

고백

나는 안내양의 종아리를 어루만졌다.

두부 세모쯤은

한 손으로 깰 수 있다고 큰소리치던

친구의 죽음을 조상(弔喪)하고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

나는 안내양의 피곤을 어루만졌다.

두부를 깰 수 있다고 큰소리치던

친구의 식물성 깨소금 같은 미소가

사진틀 속에 갇혀있는 웃음소리가

자꾸만 서러워

주점에서 한잔, 포장마차에서 한잔,

자리를 옮겨가며 친구를 받아 마신 나는

아픈 내 속주머니를

한잔 한잔 짜깁기했다.

주는 대로 잔을 들어

짜기우면 기울수록

더욱 터지는 그리움의 실밥

바람도 지나면서 눈치를 챘다.

버스도 인생처럼 가기는 가는 모양인데,

친구들 이야기로는

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

이야기 조각들을 맞추어보는 순간,

두부를 빼어 문 수인(囚人)의 입술이

종아리 밑으로 어스러져 내렸다.

망향가(望鄕歌) 2

어매여, 시골 울엄매여!

어매 솜씨에 장맛이 달아

시래기국 잘도 끓여주던 어매여!

어매 청춘 품앗이로 보낸 들녘

가르마 트인 논두렁길을

내 늘그막엔 밟아 볼라요!

동짓(冬至)날 팥죽을 먹다가

문득, 걸리던 어매여!

새알심이 걸려 넘기지를 못하고

그리버 그리버, 울엄매 그리버서

빌딩 달 하염없이 바라보며

속을음 꺼익 꺼익 울었지러!

앵두나무 우물가로 시집오던 울엄매!

새벽마다 맑은 물 길어와서는

정화수 축수축수 치성을 드리더니

동백기름에 윤기 자르르한 머리카락은

뜬구름 세월에 파뿌리 되었지러!

아들이 유학을 간다고

송편을 쪄가지고 달려오던 어매여!

구만리장천에 월매나 시장허꼬?

비행기 속에서 먹어라, 잉!

점드락 갈라먼 월매나 시장허꼬

아이구 내 새끼, 내 새끼야!

돌아서며 눈물을 감추시던 울엄매!

어매 뜨거운 심정이 살아

모성의 피되어 가슴 절절 흐르네.

어매여, 시골 울엄매여!

어매 잠든 고향 땅을

내 늘그막엔 밟아 볼라요!

지나는 기러기도 부르던 어매처럼

나도 워리워리 목청껏 불러들여

인정이 넘치게 살아 볼라요!

자운영 환장할 노을진 들녘을

미친듯이 미친듯이 밟아 볼라요!

선풍(禪風) 2

안개로 허리 두른 산허리

교교한 암자에서

스님과 나는 바둑을 둔다.

해탈(解脫)한 스님은 백(白)을 거느리고

범속(凡俗)한 나는 흑(黑)을 거느리고…

스님의 장삼(長衫)은 구름으로 떠있고

나의 흑발(黑髮)은 번뇌(煩惱)로 얽혀있다.

“패(覇)를 받으시렵니까?”

“나무아미타불……”

“받지 않으시렵니까?”

“관세음보살……”

고진(古眞)한 백은 고진해서 좋고

천진(天眞)한 흑은 천진해서 좋고

장생(長生)의 노송에 걸려 흐르는

이백(李白)의 하늘은 대류무성(大流無聲)…

법열(法悅)의 구름은 발아래 떠있고

변상(變相)의 바둑은 구름으로 떠있다.

선풍(禪風) 3

산그늘 내리는 원두막에서

할머니와 나는 염불을 한다.

내가 선창을 하면

할머니는 복창을 하고…

할머니가 되물으면

나는 또 되풀이하고…

총기 밝은 할머니와

눈이 밝은 손자의

인과(因果)와

응보(應報)와

끝없는 문답의 윤회는

색즉시공(色卽是空)……

무주공산(無主空山)에 달이 밝아

공즉시색(空卽是色)……

……………………

……………………

5월 서정

5월 보리밭은

여고생들의 매스게임

곡선의 인파를 생각게 한다.

싱그러운 바람의 눈짓에

이끌리는 물결,

살찐 종아리와종아리와종아리와

휘어지는 허리와허리와허리와

풋풋한 이랑을 타고 오는

초여름의 황금마차.

이제 마악

사춘(思春)의 물이랑을 건너온 바람에

구름이 한 점

노고지리 소리를 귀담아 듣는다.

기원(棋院)에서

바둑이란 무엇입니까?

인생을 살펴 가는 것이다.

인생이란 무엇입니까?

정석(定石)을 놓아 가는 것이다.

정석이란 무엇입니까?

人之當行之道니라.

도(道)란 무엇입니까?

시(詩)와 같은 것이다.

시란 무엇입니까?

죽은 수를 찾는 것이다.

바둑을 어떻게 두어야 합니까?

잘못 둔 인연은 단념해야 한다.

왜 단념해야 합니까?

인정에 이끌리면 갇히어 죽는다.

죽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無)다.

무는 무엇입니까?

유(有)다.

有와 無는 무엇입니까?

있다가도 없는 바둑판이다.

바둑판은 무엇입니까?

인생이다.

인생이란 무엇입니까?

정석(定石)이다.

보리누름에 1

보리누름에

자연을 재단하는 이는 누구인가

초록의 원피스를 꾸며내는

베일 저쪽 나뭇가지의 손

신비의 디자이너는 누구인가.

보리누름에

풋풋한 논두렁길 따라가면

나를 부르는 노고지리 소리

가슴 스멀스멀 지줄지줄 잴잴

소리의 주인은 누구인가

보리누름에

기쁨이 일렁이는 유방마다

청춘의 물 오르게 하고

풋보리 종아리 살찌게 하는

눈짓의 연인은 누구인가

보리누름에 2

보리누름에

보리밭 이랑을 가면,

구름 속 가물가물

볼 붉은 소녀가 보인다.

소녀는,

눈물이 헤픈

유랑극단의 바람.

그녀의

검정 치마폭

검게 그을린 보리를 비비면

아스라한 기억을 비비면,

시원한 그 눈 속에

내가 보인다.

보리누름에 3

보리누름이면

내 가슴에

청보리 바람이 인다.

청춘을 어깨 짜고

풋풋하게 살쪄 가는 소녀들.

머리카락 흩날리며

매스게임을 하는

아아, 저 무질서한 질서들.

머리카락과 머리카락과

팔다리와 팔다리와

가는 허리와 가는 허리와

푸른 물결 일렁일렁

가슴 사른사른 속삭인다.

꽃빛 사랑을 훔치려고 불어오는

푸른 바람,

보리누름이면

내 가슴에

청보리 바람이 인다.

보리누름에 4

사발에 동치미 뜨듯

보리누름에 떠가는 흰구름아

구름 같은 흰머리

무등할매,

눈물 많던 조선쑥의 할매야

해마다

해해마다

동치미를 무등 잘 담그시던 할매야

쑥부쟁이 쥐어뜯으며

피울음 느껴 울던 할매야

전장에 나간 자식

돌아온 뼛가루 받아들고

하늘 우러르다 까무러치던

무등 할매야

청대 같은 자식 잃고

가슴앓이 쥐어뜯다가

쑥부쟁이 우거진 언덕에서

까무러치던 할매야

바람막이 밭 언덕에 들불을 질러놓고 보리모가질 그슬려 허기를 채우는 춘궁의 현기증, 보리누름을 떠가는 구름아! 무등 할매 한세상 한이 많은 뜬구름아!

사랑의 기쁨

물안개 피어오르는 욕실에서

거울 앞에 서면

보이는 게 주름살이다.

뜬구름 세월에 주름잡힌

내 회한(悔恨)을 쓰다듬으면

생각나는 게 미숫가루다 .

맹물에 타 마시던 미숫가루는

나의 세포 어디쯤 살아있을까.

목욕을 하고 몸무게를 다는데

아이는 무게가 올라가고

나는 무게가 내려간다.

아이의 무게는 나이와 정비례하고

나의 무게는 나이와 반비례한다.

정비례와 반비례 사이에는

일출(日出)과 일몰(日沒)의 거리가 있다.

그것은,

여명(黎明)의 찬란함과

노을의 애상이다.

가벼워지는 나의 슬픔을

무거워지는 아이가 상쇄시키는

내 인생의 계산법이다.

나의 산술(算術)로는,

아이의 정비례가 대견스럽기만 하다.

샌드백 두드리듯

이 아비를 두들겨대는

아이의 주먹이 아프면 아플수록

가슴 속 스멀스멀 기쁨이 일렁이고…

뼈마디가 으스러지게 아프면 아플수록

얻어맞는 인생은 여물어 가나니…

계절이 지나가는

창 밖의 별빛,

목이 시린 세월의 별빛,

여무는 주름살 아랑곳없이

아이는 나의 아픔을 즐거워하고

나는 아이의 즐거움을 즐거워한다.

물레소리

낮은 음으로 감겨 우는 물레소리는

할배 잃고 늙어버린 할매 울음.

늘인 실이 감기면서 떠는 소리는

자식 잃고 까무러친 할매 넋두리.

낮은 음으로 낮은 음으로 달달달달 다르륵

끊겼다가 이어지는 겨레 숨소리.

싸리비 2

산 좋고 물 맑은 우리네 마을

그 푸짐한 인정 다 어디 두고

여길 찾아왔니

이 어리석은 것아!

하늘을 이고 살던

그 싸릿골 다 어디에 버리고

어쩌자고 여길 왔니

이 불쌍한 것아!

낯선 타관 땅

정붙여 살아보겠다고

차가운 시멘트 쓸고 또 쓸다가

문둥이 손처럼 뭉그러진

이 불쌍한 것아!

속이 아파도 말을 못하는

이 불쌍한 것아!

어쩌자고 낯선

타관에 와서

쓰레기만 쓸다가 몽그라졌느냐!

이 불쌍한 것아!

이 안쓰러운 것아!

군불을 때면서

군불을 때면서

얼어붙은 구둘 목을 생각한다.

조상 대대로 등따시게

다독거리던 인정을 생각한다.

천장엔 메주가 뜨고

아랫목 콩비지 구수해지던

우리네 짭짤한 분위기,

법 없이도 잘 살던 시절을 생각한다.

빈방에 불을 지피는

내 의식의 구둘 목엔

청솔가지 톡탁거리는 소리도 들리고

솔이파리 치직거리는 소리도 들린다마는

세상은 왜 이리 냉랭하냐.

군불을 때면서

불 머금은 야성(野性)을 생각한다.

내 불붙는 아궁이

말씀의 혓바닥

깻대궁이 톡톡 튀는

불의 잉태를 생각한다.

봄의 메시지

정신결핍증을 앓는 이는 오세요

몰인정의 아픔을 참는 이는 오세요

진실이 사랑 받는 꽃시장에서는

버들강아지의 봄이 한창이랍니다

머리 내두르던 이는 겸허하게 오세요

핏대를 세우던 이는 온유하게 오세요

문명에 찌든 속 사람을 데리고

도시의 숨구멍으로 나들이를 오세요

봄햇살 가득한 웃음꽃을 보세요

맹물에도 잘 사는 생명들을 보세요

세상을 모른 채 기쁘게만 사는

봄 사상의 털북숭이를 바라보세요

? 긴급동의(緊急動議)

화론(畵論)

신필(神筆)

유출(流出)

이장(移葬)

노변(路邊)에서

서울론(서울論)

시풍(詩風)

손금

화장터에서

긴급동의 1

긴급동의 2

운전사에게

착각(錯覺)

사중주(四重奏)

시인 1

시인 2

하루살이

이발소에서

내 가슴속에는 5

보내면서

화론(畵論)

내가 좋아하는 그림은

붓 한번 쓰윽 그신

하늘 한 자락.

보면 볼수록

어쩐지 넓어지고

속이 시원한

공간,

빈 마음에

푸른 바람이 한 차례

스치는 순간,

고였다가 흐르는

영원……

신필(神筆)

- 어느 서예전에서 -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붓끝에서

환성이 터져 흐느낀다.

먹을 듬뿍 찍어 들고

수직으로 그으면 호수가 갈라지고

수평으로 그으면 물결이 인다.

묵향(墨香)은 호면(湖面)에 번져

물안개 피어오르고,

꿈꾸는 화선지(畫宣紙)

곡선(曲線)의 원형(圓形)으로

휘두르는 붓끝에

환성(歡聲)이 터져 흐느낀다.

유출(流出)

- 노재승 조각전을 보고 -

동굴에

고드름이 열리는 것은

시원(始原)의 자궁이다.

총천년색 시네마가 펼쳐지던

천지창조 당시,

안개 자욱한

도가니에서 흘러내리는

수억 만개의 정충이다.

태초에

용암이 분출하는

파격(破格)의 경지,

아픔과 환희의 윤선(輪線) 속

불 먹음은 혓바닥이다.

동굴이 무너져 내릴 때

범람하면서 내지르는

파열음(破烈音)은

신(神)의 생명창조다.

이장(移葬)

우렁이같이 진액을 빨리고

빈 깍지로 떠나간

할머니 잔해(殘骸)를 어루만지며

나는 죽음을 접골한다.

세월에 삭은 뼈다귀와

두골(頭骨)을 들어올려

솔뿌리로 털어 내는

흙 속에

사람의 향기가 젖어 있다.

스무 해만에 햇볕을 받는 해골

퀭 뚫린 눈뼈 속으로

명주실 같은 뿌리가 어지러워

목뼈와 갈비뼈와 다리뼈

내려가면서 흙을 털면

뼈 속에 내가 만져진다.

내가 할머니의 뼈를 어루만지듯

언젠가는 자식이나 손자들이

내 뼈를 어루만질 때

내 정신은 어디에 있을까.

시인은 죽어서 파랑새가 된다는데

내 이름자 닮은 솔가지에 내려와

松松松松, 지줄 뱃쫑 松松,

영겁(永劫)을 노래 부르며

상징시라도 한 곡조 뽑을 수가 있을까.

노변(路邊)에서

해묵은

옹배기 위로

햇살이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햇살 끝에

찬란히 빛나는

개구리 알과 도롱뇽이

5백 원에 거래되고 있었다.

지폐를 건넨

창백한 얼굴의 사내가

개구리 알을 후루룩 마신 다음

도롱뇽을 꿀꺽 삼키고는

소주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이 악물스런 세상을

마르고 닳도록 살라닝께!”

옹배기 위로

부서져 내리는 햇살을

쳐드는 이빨로 히히 웃고 있었다.

서울

풀잎을 잃은 귀뚜라미가

구공탄 속에서 울 듯

신문지 속에서 울어야 하는

사람들은 피곤하다.

도로는 언제부터 당뇨인가

뿌리가 뽑힌 채

엉거주춤 나자빠진 가로수

황달(黃疸)까지 들어있다.

고층 빌딩 아래

눈을 흘기던

걸신(乞神)이 손을 내밀고 있다.

시풍(詩風)

한 조각의 빵을 먹으면서

인생을 생각한다.

한 컵의 우유를 마시면서

모성(母性)을 생각한다.

어머니의 품속 같은

대지의 골짜기,

자연의 물소리를 생각한다.

아침 식탁에 떨어지는 햇살과

야채와 밀크와

신선한 공기,

한나절의 고향을 생각한다.

법열(法悅)의 새는 나뭇가지에서 지저귀고

해탈(解脫)의 구름은 도솔천에 떠있다.

시냇가 잔잔한 물소리도

내 가슴,

여울 돌아 내리나니,

내 구름의 시공(時空)은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천주(天宙)의 윤회(輪廻)로 떠도나니……

손금

내 흉한 손바닥 금줄에는

도벌 당한 산협(山峽)이 징그럽다.

미친놈 팔자 보듯

손금을 보면

지도엔 번뇌의 주름이 어지럽다.

늙은 기와지붕에서

떨어져 내리는

상고조(上高祖) 징소리에 뜬구름도 조각난다.

화장(火葬)터에서

지식이 분필가루로 날리듯

허무하게 떨어져 내리는

정신의 껍질을 바라본다.

로케트가 캡슐을 차고 떠나가듯 ,

육신을 버리고 떠나가는

영혼의 껍질을 바라본다.

불의 혓바닥에 소멸되어 날아가는

한 그루터기의 몸뚱이,

자연의 식사는 완만하다.

하루에도

천년을 살 것 같이

기염을 토하며 짓밟고 올라서던

욕망의 죽음은 간단하다.

보내놓고 돌아와 부서지는 뼈

남아있는 껍질은 허무하다.

돌아갈 때는 불꽃으로 말하는

혀는 입의 막대기,

불빛의 계시는 무한하다.

돌아가는 북망(北邙)이 조용한 것은

인생이 시끄러운 까닭이다.

유혹하던 몸과 끌려가던 마음,

등기권리증도 승소판결문도

핏대를 세우면서 얻어낸 약속어음도

한줌의 재, 한줌의 재,

분필가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긴급동의(緊急動議) 1

자아, 여기 손을 들었다.

시 쓰는 사람에게도 발언권을 달라.

이 몸이 죽어서 시가 되고,

내 시가 썩어서 나라가 산다면

이슬 같이 사라져도 좋다.

시인이 존경받는 세상이 와야 한다.

시인이 사랑 받는 세상이 와야 한다.

시인이 거리를 지나게 되면

모두들 나와서 인사를 하는

그런 시인 공화국이 와야만 한다.

한 시인이 죽어서 나라를 살리고

한 시가 썩어서 세계를 살린다면

그는 聖字 붙는 메시아가 될텐데

오늘의 시는 타락을 했다.

옹졸해지고 치사해지고

눈치만 살아서 심약해졌다.

출근과 퇴근을 벗어나지 못하고

버스에서 발등을 밟히고 내려와

손수건으로 구두를 닦으면서

독립선언문을 생각해 내다가

황달(黃疸) 든 가로수

콜록이는 기침에

시는 길바닥에 나뒹굴었다.

요즈음 사람들은 등신들뿐인지

삼백 년 전만 해도 시는 눈이 살아서

죽으면서도 시를 찾았는가 하면

장원급제(壯元及第)도 하고

암행어사(暗行御史)도 되었는데

오늘의 시는 천더기가 되어서

연지 찍고 분 바르고

아양을 살살 떤다는 데

이래서야 되겠는가.

시가 어디 양화폐점처분이냐?

신문이나 잡지에 팔리면 되는 거냐?

붓이 칼보다 무섭다지만,

돈에는 약한 게 사실이지만,

시인은 돈을 우습게 보지만,

결국은 모두가 시시하지만,

돈의 신이 빌딩으로 올라간 뒤

그 아래서 햇살만을 기다릴 게 아니라

시인공화국의 이름으로

비상경보를 울려주기 바란다.

긴급동의(緊急動議) 2

자아, 여기 손을 들었다.

시 쓰는 사람에게도 발언권을 달라.

마지막 해를 보내는 이 마당에

냉가슴만 앓아서야 되겠는가.

새해부턴 집집마다 곰쓸개를 달아놓고

나갈 때나 들어올 때 핥기로 하자.

쑥으로 늙은

웅담(熊膽)을 핥으면

안질(眼疾)과 치루(痔漏)가 다라나고

경간(驚癎)과 열병이 사라진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병신 같은 반거들충이

날씨마저도

삼한사온을 지키지 않고

반칙(反則)을 일삼는 미치광이에겐

곰의 쓸개가 명약(名藥)이다.

웅장(熊掌)의 언덕엔

지금도 백골이 나오나니,

짚신발로 땅을 구르며

깽맥 깽맥 깽맥깽

하늘 어질어질 감아 올리던

농부들의 백골이 나오나니,

동학민병의 징 소리

함성 소리 울리나니,

그대 상식의 책을 덮고

차진 흙에 귀를 대어보라.

탄식하는 조상들의 피리소리

간담이 서늘하게 들려온다.

왜란(倭亂)의 여인이 당하는 소리

호란(胡亂)의 여인이 당하는 소리

동란(東亂)의 여인이 당하는 소리

소리가 혀를 물고 죽어나가도

처용(處容)의 춤을 추는 쓸개 빠진 놈들아.

쓸개 빠진 자부터 쓸개를 핥아라

정신이 비틀거리는 자 쓸개를 핥아라

시력이 아물거리는 자 쓸개를 핥아라

발음이 꼬부라진 자 쓸개를 핥아라

눈치만 살아 남은 자 쓸개를 핥아라

아부에 살이 찐 자 쓸개를 핥아라

마음이 검고 생각이 희미한 자여

우리네 조상, 웅족(熊族)의 쓸개가 쓰거든

단기 4300년 역사는

쓰디쓴 고난의 눈물史인 줄 알라.

보기도 아까운 단군의 자손

같은 피를 이어받은 형제들끼리

헐뜯고 싸우는 것도 원통한데

유괴가 다 뭐고, 토막살인이 다 뭐꼬.

자아, 여기 손을 들었다.

시 쓰는 사람에게도 발언권을 달라.

집집마다 문머리에 쓸개를 걸어놓고

나갈 때나 들어올 때 핥기로 하자.

쓸개의 쓴맛에 혓바닥이 아리거든

쓸개마저 빼버리고 살아온 삶이

얼마나 허무한가를 뼈저리게 알리라.

히광이의 칼춤에 머리가 떨어져도

바른 말을 하고 죽은 대바람 소리에

상투만은 꼿꼿했던 선비의 정신,

정치 같은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대쪽 같이 짜개지는 날선비의 정신

쓰디쓴 곰쓸개 핥는 생활로

조상들의 웅지를 이어받도록 하자.

운전사에게

여보게 젊은이,

너무 그렇게 속력을 내지 말게나.

젊다고 그렇게

혈기를 부려서는 안되네.

액셀레이터를 너무 밟지도 말고

브레이크를 조급하게 밟지도 말게나.

자네의 운전을 지켜보는 나는

손님이 아니라

주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게나.

너무 그렇게 혈기를 부리면

우리는 다 함께 죽는 게야.

너무 그렇게 달리지만 말고

무슨 소리가 나는지 귀를 기울이게나.

어디서 깨어지는 소리가 나는지

어디서 떨어져 나가는 소리가 나는지

귀를 기울이면서

조심조심 운전을 하여주게나.

착각(錯覺)

시계가 錯覺 錯覺 가고 있다

초침이 再覺 再覺 가고 있다

시간이 착각을 일으킨 것은

공간을 착각했기 때문이다

착각은 자유라지만

자유는 착각이 아닌 것을…

맥주 한 컵 마시는 동안의

닭다리 하나의 공간과

밤하늘 출렁이는 은하수

부딪치며 꽃피는 유리컵,

은하수는 자유롭지만

유리컵은 자유롭지 못한 것을…

사중주(四重奏)

참새들이 훈민정음으로 지저귀고

제비들은 알파벳으로 지줄댄다.

물새들은 사성(四聲)으로 오르내리고

앵무새는 히라가나를 흉내낸다.

훈민정음과 알파벳과

사성과 히라가나,

지저귀고 지줄대고

오르내리고 흉내내는

참새들과 제비들과

물새들과 앵무새

그들의 악보(樂譜)는 전선줄

오선(五線)이 있었다.

詩人 1

고환(睾丸)을 까라고

유혹의 손을 내밀어 왔지만

나는 끝끝내 듣지 않았다.

수술도 무료로 해주고

혜택까지 준다고

가진 양념을 다 쳤지만

나는 듣지 않았다.

씨알을 살릴만한 자신이 없으면

차라리 거세하는 편이 났다고

입을 모아 지저귀었지만

나는 끝내 듣지 않았다.

시가 천대받는 세상에서

詩語의 고환을 까지 않는 까닭은

내가 시의 씨방이기 때문이다.

자자손손 널리널리 번성을 못해도

눈이라도 초롱초롱 살아있는

시인이기 때문이다.

詩人 2

시간을 낭비한 죄의 그림자를 끌며

구겨진 언어를 구겨 던지는 사내가

저만치 아질아질 흔들리고 있다.

쉼표를 찍다가 종지부를 찍을 때

현기증을 일으키는 아지랑이

속의 사내,

지푸라기와 사금파리로

모자이크를 만드는

도시의 종지부(終止符).

행진곡과 장송곡의 심포니

의식의 머리카락 나풀나풀

아지랑이 속을

원고지가 아른거리고 있다.

하루살이

우리 꼭 하루만 살아요

단 둘이서 산에 올라

남부럽잖게 하루만 살아요

일상에는 만날 수 없는 그대

젊은 하늘을 푸르게만 봐요

천년을 하루 같이 살아요

하루를 천년 같이 살아요

영원히 사는 마음으로

하루를 구비 구비 펴며 살아요

골짜기가 산에서 존재하듯

내 속에 살아있는 그대여

우리 하루를 천년 같이 살아요

산허리에 하루살이 솥을 걸고

불때 솔때 불때 솔때

소꿉놀이하며 천년을 살아요

이발소에서

머리카락이 발 밑으로 굴러 떨어진다.

추락하는 번뇌의 머리카락과 함께

때묻은 생활이 떨어져 내린다.

집착의 줄기가 잘려나갈 때마다

범속한 인연들이 떨어져 나간다.

오욕(五慾)의 거름자리 후비던 발톱,

죄짓던 날카로움이 떨어져 나간다.

무성하던 수풀이 베어져 나갈 때

헐벗은 산이 돌아눕는 것처럼,

온갖 허욕이 떨어져 나갈 때

아집(我執)이 머리를 떨군다.

세속의 머리카락이 떨어져 나갈 때

미련은 눈을 감고 해탈을 생각한다.

내 가슴속에는 5

내 가슴속에는

첫사랑이 있다네.

간이역이 서있는 초등학교

통나무교실의 불꽃이 있다네.

불을 먹음은 장작난로

인절미 구워먹던 소녀가 있다네.

내 가슴속에는

첫사랑이 있다네.

세상이 추울 땐

그리워지는 소녀,

기쁨에 넘치는 불 그림자

부끄럼 타던 능금 볼이 타고 있다네.

보내면서

손아,

이별의 손아,

마지막으로 그녀를 포옹하라.

눈아,

정열의 눈아,

마지막으로 그녀를 꺼안아라.

보내는 손아,

사랑하는 눈아,

낙엽으로 편지를 태우듯

그녀 노을을 태워 마셔라.

그대 불타던 입술이여,

그대 환장하게 녹아 내리던 혼신이여,

마지막 시각까지 꿈을 붙들어

구천의 별을 빛나게 하라.

? 시의 죽음

도시의 시

송가(頌歌)

샘물

Maya

Maya

항아리

도리깨질

시의 죽음

안부

분수(噴水)

풍경 6

풍경 7

도심(盜心)

묵념(黙念)

상황(狀況)

몽환의 시

눈의 부활

포효(咆哮)

철도중단점

조선낫

都市

나는 바라본다.

도시의 죽음을.

생활의 이빨에 물려죽은

내 오이셔츠 속의 시를.

전신주에 고꾸라져 죽은

다리 부러진 지게와

몽당 싸리비의 시를

나는 바라본다.

하루의

남루를 걸치고

골목을 지나다 올려보는 고향,

초승달의 시를 바라본다.

하늘을 보면 추억

떨리는 피리소리

다듬이질 소리도 바라본다.

내가 바라보는 서울의 시는

세탁기 비눗물에 젖어

알아볼 수가 없다.

송가(頌歌)

대지를 밭가는 농부의 근육은 아름답다

농부에 길들여진 흙은 향기롭다.

심상(心象)에 버려진 자갈을 주어내며

잡초를 뽑아내는 농심의 흙은

억센 뿌리를 받아들이기에 적합하고…

바다가 육지를 휘감고 애무하듯

뼈를 가리운 살갗은 부드럽고

별처럼 박힌 눈은 영롱하게 빛난다.

신이 빚어 만든

하얀 능선과 검푸른 골짜기

호수의 물결을 일으키는 바람,

파도의 이빨로 달려드는 백마 떼와

신음을 포용하는 대지는 아름답고,

옥토를 찾는 나무의 뿌리와

바람의 잎사귀는 감미롭다.

샘물

내 가슴속에는

발싸심하는 샘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모래알을 들썩이며

솟구치는 샘물이

가슴 절절 흘러 넘쳐

수채도랑을 돌아가고 있다.

풀잎은 하늘에 떠가고

구름은 물밑에 흘러도

티끌 하나 없는

빈 마음…

샘물이 한여름을 흘러가고 있다.

Maya 1

검은 구두가 하얀 돌을 밟는다

그 뒤를 여인의 맨발이 따라간다

바람이 옷깃을 공략하는 것은

검은 공포의 숙명이다.

검은 바지 밑의 구두가 걸어온다.

붉은 치마 밑의 맨발이 따라온다.

두 개의 숨은 발이 계단을 오르고,

두 개의 나온 발이 계단을 오르고,

네 개의 다리

스무 개의 발가락

문을 열면

침실

꽃이 된 입술이 가슴을 찍는다.

꽃이 누우면

밀려오는 파도

바람도 미쳐 죽는다.

관을 닮은

대리석 침대 밑으로

한 송이

꽃이 떨어져 죽는다.

Maya 2

통행금지 시간에

통행금지 지역을

통행하고 있었다.

천년 후, 아니면 만년 후,

인류역사의 막을 내리고

개미새끼 하나 얼씬도 않는

청계천 돌기둥을 돌아가고 있었다.

검푸른 물 속에 잠든

고가도로 돌기둥과

빌딩의 숲 속을

달빛이 굴절한다.

깊은 밤,

소가죽을 삼아 신은 척추동물이

손전등을 번득이며 다가온다.

“당신은 누구요?”

“나는 사람이오.”

“통행금지 위반이오.”

“대한민국의 시인이오.”

미래의 해골이 신분증을 달빛에 비춰보고

그 달빛에 그림자를 끌며

역시 미래의 해골이 잠든

시멘트 상자 속으로 사라진다.

항아리

하늘이 좋아

입을 벌리고 우러르는

조선 여인아!

넋 놓고 임을 보듯

환장하게 올려보다

토속(土俗)으로 굳어진 규방 여인아!

청자 빛 하늘에 미쳐

안으로 눈물짓다

흙으로 남은 정한(情恨)의 여인아!

할 말이 너무도 많아

입은 크게 벌려도

고독만 배부른 채

속으로 눈물짓는

두터운 입술의 서름아!

침묵이 고인 가슴에

별 뜨면 수를 놓고

바람 불면 물결 이는

독수공방 여인의 냉가슴,

삼껍질에 부르튼 입술아!

낮은음자리 돌아 감기는

한(恨)의 물레 소리

타래실에 시름을 감고 푸는 생활,

대바람 소리 한숨쉬는 뒤안의 장독대

바보처럼 입을 벌려 하는 보는 여인

안으로 빗장 거는 여류 시인아!

이슬 내리는 밤이면

눈물은 창호지에 어리고,

달빛 흐르는 밤이면

다듬이소리 구천에 사무치나니,

흙으로 늙은 조선여인의

흙 속에 잠든 은장도(銀粧刀)

은대야에 내려와 풀어지는

모시치마 흰 달빛

내 꿈속의 여인아!

도리깨질

도리깨질을 하면서

동학난병의 죽창(竹槍)을 생각한다.

죽창은 빛이었다.

죽창은 꿈이었다.

죽창은 혼이었다.

죽창은, 아아 황토재 하늘을 찌르던 죽창,

해묵은 된장에 상추쌈을 싸먹던

내 할아버지의 죽창은

생명이었고, 사랑이었고, 겨레의 맥박이었다.

죽창은 할아버지의 눈초리,

눈초리의 깃발,

깃발은 숨결이었고, 불길이었고, 시의 목숨이었다.

시에도 숨결을 불어넣은 이 땅의 불길은

눈치보는 시를 사라먹고

아첨하는 시를 태워 날렸다.

대쪽같은 선비 머리 땅에 떨어지면 문풍지도 뒤안의 대바람으로 울었다 .

도리깨질을 하면서

할아버지의 상투를 생각한다.

상투는 지조였다.

상투는 의리였다.

상투는 얼이었다.

상투는, 아아 차진 흙바람에 목이 떨어져 굴러도

상투만은 꽂꽂했던 할아버지의 눈초리

죽창 같은 눈초리가

도리깻열 끝에서 불 튀기고 있다.

머리가 땅에 떨어져 굴러도

바른 말을 했던

그 숨결, 그 지조 간 곳 없고,

머저리들만 치킨센터로 꼬꼬댁 꼭꼭

울지도 못하는 시는 써서 무엇하며

거지발싸개 취급도 안 하는 시는 써서 무엇하리!

내 시가 농작 다리 밑에 깔려 죽어야 하나! 내 시의 억울한 유산을 위해 붓을 꺾어야 하나! 도리깨질을 하면서 생각한 알곡은 죽은 쭉정이 가운데 살아난 고난의 왕자, 까지면 까질수록 더욱 단단한 이 나라 질긴 목숨, 샛별같이 총명한 떼풀 같은 목숨, 가난이 유죄요 무능이 죄악이라고 자기 가슴 자기가 두드리는 이 땅의 시인아! 죽었다가 다시 깨어나는 봄풀 같은 시인아! 해맑은 소주잔에 향수 사무치게 꺼익꺼익 우는 이 땅의 시인아! 해장에 속풀려고 얼쩡거리는 시인아! 첫새벽에 눈 비비며 출발하는 차를 타자! 가난의 손때 묻은 시내버스를 타고 배나무골로 굴레방다리로 씽씽 씽씽 달리자.

의 죽음

나의 시는

생활의 이빨에 물려 죽었다.

오랜만에

하나

시궁창에서 건져낸 시가

세탁기의 비누거품에 소멸되었다.

불도저에서

플잎이 깔리듯

존재도 없이 사라져 간

내 시를 찾아

호주머니를 뒤지면

아아, 떨어져 나간

내 시의 살점들.

도살당한 혈육을 찾듯

떨리는 손으로 더듬어 찾으면

가슴에 피가 고인다.

안부(安否)

고향 사람을 만나면

해묵은 안부를 묻는다.

소천양반은 언제 가셨고

엉굴댁은 어떻게 갔는가.

세월이 가고

사람은 떠나갔어도

강산은 여전하신가.

내가 심은 은행나무와

개나리 울타리도 여전하신가.

우리집 대밭의 비비새

여전히 울고

시냇물 여전히 흐르시는가.

대청마루를 시원스레 지나던

푸른 바람도

더러는 쉬엄쉬엄 쉬어가던가.

대이파리 사른대던 햇살이

대청마루로 내려와

발바닥을 간지릴 무렵,

뻐꾸기 소리에 눈을 뜬

소년은 겁이 났었지……

책보를 허리에 동여매고

달리는 시오리 길,

필통 속에서는 몽당연필들이

달그락거리고,

가슴속에서는 콩닥쿵 콩닥쿵

방아찧는 소리가 나던

그 하얀 가르마 트인 신작로랑

구풀대던 강산은 여전하신가.

분수(噴水)

바람난 풀잎끼리 타오르는

싱싱한 계절의 절정(絶頂)이다.

눈이 맞아 타오르는

그대 환장할 장작난로다.

생솔가지 질러놓고

손뼉치는 원무(圓舞).

바람난 날개

햇살로 쳐드는

공작(孔雀)의 부챗살이다.

풍경(風景) 6

노을이 입술을 빨고 있다.

갯벌 위를 가는

한 마리

소는

꿈길 가듯

취해서 간다.

그 뒤를 따르는

밀짚모자가

하나

쟁기 메고 취해서 간다.

하늘이 얼근하게 익어있다.

노을을 사모하는

갯벌의 입술

딸기주를 머금고 있다.

풍경(風景) 7

미나리 씻는

시금치 씻는

샘도랑의 처녀 웃음

보릿대 타는

쑥불이 타는

마당가의 모깃불 내음

초승달 숨는

잠샛별 숨는

초가지붕의 박꽃 소심(素心)

도심(盜心)

나는

릴케의 가을날을 훔치고 싶다.

가로수 거리를 서성이는

그의 우수(憂愁)를 훔치고 싶다.

우수 가득한 눈빛을 훔치고 싶다.

나는

릴케의 포도주를 훔치고 싶다.

빌려온 햇살로 단맛을 우려내는

그의 낭만을 훔치고 싶다.

노을 빛 사랑을 훔치고 싶다.

나는

릴케의 편지를 훔치고 싶다.

밤마다 꿈길을 밟고 오는

그의 고독을 훔치고 싶다.

숨겨진 눈물을 훔치고 싶다.

묵념(黙念)

- 金宗文 詩人을 보내며 -

공간이여, 눈을 감아다오.

시간이여, 숨을 멈춰다오.

기별이 오던 날

소나기로 마시듯,

내 감관(感官)의 창이여, 불을 끄고

목숨의 목구멍 억수로 울어다오.

침묵은 휘장을 내리고

트럼펫은 저음으로 울어다오.

저승 가는 나그네

해찰하지 않도록

지렁이 울음으로 낮게 낮게 울어다오.

푸른 하늘을 이고 사는

토란(土卵) 잎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여.

마지막 장송곡은

그가 좋아하던

청동빛 하늘로 맑게 맑게 울려다고.

헌화하는 백발 노장들이여.

거수경례는 씩씩하게 해다오.

터지는 조포(弔砲) 은은히 퍼질 때

그가 사랑하던 별을 보게 해다오.

분향(焚香)하는 시우(詩友)들이여

재배(再拜)할 때는 겸허하게 해다오.

장성(將星) 시인을 마지막 보내는 길에

특사(特賜)도 없다고 섭섭해하지 마오

생 제르망 테프레의 카페 플로르에서

저녁마다 한 구석에 자리잡고

석조(石造) 좌상(坐像)을 바라보던 그에게,

이제는 돌아와

한줌 재되어 떠나가는 그에게

그의 파이프 엽초(葉草) 연기 대신

마음의 향이나 무럭무럭 피워다오.

상황(狀況)

창백한 달이 각혈을 하고 있었다.

온밤을 썰던

생쥐 한 마리

하수구로 내려가고,

고양이는

여자의 하이힐을 물고 올라갔다.

귀뚜라미가

구공탄 화덕에 타죽던 날 밤,

미친개는

걸레조각을 물고 달아났다.

夢幻

나는 보았다.

새벽 꿈속에서

반짝이며 숨쉬는 지성을.

감성을 거느린 시의 사금파리들이

유언 한 등짐씩 부려놓고는

정열을 태우는 것도 보았다.

어둠 속에서

사내가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누군가가

반칙의 손을 치켜올릴 때,

응시하는 시의 눈초리를 보았다.

적당히 눈감은 레퍼리가

꼬리를 살래살래 흔들 때의

그 미친개의 풍장도 보았다.

빈 꽹과리에 박수를 보내는

계집의 화간도 보았고,

복사꽃을 교살(絞殺)한

매니큐어가 빛날 때

퇴장하는 선비의 눈초리도 보았다.

한 칼에 떨어져 뒹구는

상투를 붙들고 울다가,

벌레에게 갉아 먹힌 역사책을 보다가,

육식동물들에

할퀴고 물어뜯긴 地圖를 펴보다가,

간경변증에 신음하는

모성(母性)을 찾아 빈혈을 앓다가,

잡놈들에게 팔려간

목숨의 시를 찾아 나서다가,

연명해 온 꿈속에서

두 개의 눈을 찾아 헤매다가,

나는

거울에 비치는

범죄한 눈을 보았다.

한 쪽 눈 범죄하면

그 눈을 빼버리고

한 눈으로 살아가는

목숨 같은 시의 눈초리를 보았다.

눈의 부활

어디서 눈이 내리는가

이 어지러운 머리 위에

이 잔인한 손톱에

봉선화 꽃물을 들여주던

누이 같은 눈이 오는가

어느 구천 원귀로 떠돌다가

집나갈 때 모습 그대로 머뭇거리며 오는가.

어느 이역만리 전장의 풀밭에서

왜군들에 윤간 당해 죽은 누이야

쓸개 빠진 망국의 설움 씹으며

뜨거운 눈물만 안으로 안으로

어느 저승 모퉁이에 숨어살다가

언 눈물 소복으로 고향 찾아오느냐.

얼마나 면목 없는 눈물이기에

올 듯 말 듯 머뭇머뭇 울며 오느냐.

더럽혀진 몸둥아리 그대로는

죽어도 고향 땅을 밟을 수 없다고

먼 하늘 바라보며

피울음 울다가 까무러친 눈이야.

어디서 이런 눈물의 뼛가루가 내리는가

이 초라한 머리 위에.

“내가 죽으면 이 몸을 태워

트랙섬 바다에 뿌려주셔요.”

그 목소리 데리고 온 바람,

그 바람에 밤새도록 얼어 내리는가.

어디서 누이가 살아오기에

하얀 치마폭 나풀나풀

정한(情恨)의 눈시울 꿈벅꿈벅

면목 없이 머뭇거리며

꿈을 꾸듯 내리는가.

포효(咆哮)

나는 차라리 목이 짧은

육식동물이 되고 싶다.

약골을 잡아먹는 짐승이 아니라

악질을 물어 할퀴는 맹수가 되고 싶다.

논 몇 마지기 있다고 잡아가고

배운 게 있다고 잡아가고

공무원노릇 했다고 잡아가고

하나님 믿는다고 잡아가서는

개돼지 몰 듯 끌며 몰며

한 구덩이에 도살하고 돌아선

하이에나들을 물어뜯고 싶다.

목화밭을 피로 물들여놓은

하이에나의 목털을 물어 흔들고 나서

미움의 임진강 살얼음 목놓아 우짖고

달빛에 묶여간 이름들을 부르며

썩다 남은 고무신짝 물어 흔들며

산 올라 하늘 북녘 끝……

두 눈물 내리는 천지(天池) 물줄기,

목이 쉬도록 목이 쉬도록

강물로 강물로 울고만 싶다.

철도중단점(鐵道中斷點)

북으로 녹슨 선로 위에

화차(火車)가 멎어 있었다.

갈대는 하얗게 늙어 있었다.

어제의 쇠가

오늘의 풀잎 속으로 침몰하고 있었다.

전쟁의 빛깔로 시간을 빼앗은

철제(鐵製)의 뼈다귀,

무너지는 근육은 풀잎보다 약했다.

풀꽃들이 일어나는

우리들의 작은 마을과

미루나무와 흰구름을 지나며

소리소리 지르던 철마(鐵馬)의

공허한 잔해(殘骸) 사이로

하늘이 걸려있었다.

세월에 삭은 뼈다귀는

늙은 갈대의 바람을 붙들고

쓰다듬는 모성(母性)을 지녀야 했다.

북으로 녹 슨 선로 위에

하얀 푯말이 서 있었다.

혈서가 새겨져 있는

그 하얀 푯말 위로

흰 구름 둥둥 머리에 인 채

한 마리의 비둘기가 앉아 있었다.

조선낫

조선 낫은, 달빛에 환장한

아리랑의 눈초리,

목숨의 번뜩임이다.

조선 낫은, 쓰레받기로

꽹과리 치며 날뛰던

옥양목 바지 가랑이

초승달 칼바람이다.

조선 낫은,

농군의 뚝심으로 일어나는 영기(令旗)

분노하는 흙의 숨결이다.

후기(後記)

고상하고 품위 있는 말로 마지막을 장식해야 할 터인데 웬일인지 자꾸만 엉뚱한 생각이 떠오른다. 그것은 화투(花鬪)노름 중의 팔싸리다. 팔싸리, 팔싸리……. 그것은 대개 관심 밖의 것으로서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것에 속한다.

내가 그동안 돈이 되지 않는 시를 붙들고 살아온 것은 정말 이 매력 없는 싸리 껄짝(껍질)을 붙들고 살아온 셈이 된다. 운명처럼 움켜쥔 흑싸리 껍질, 홍싸리 껍질과 정이 들대로 들어서인지 이제는 정말 떨어져 살 수 없게 되었다.

세상살이가 어려워지고 힘에 겨울 때마다 나는 싸리 껍질을 바닥에 떨어버리듯 그렇게 붓을 꺾어버리고도 싶었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인생이라는 화투놀음은 이미 시작되었고, 나는 그 틈바구니 속에서 목숨처럼 그것을 움켜쥔 채 제발 바닥에서 싸리 알짝이 일어나 주기를 기다려왔던 것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그 빛나는 三八光 솔광을 먹어가고, 청단 홍단 비 풍 초약을 먹어가면서 돈도 벌고 권세도 누리는 동안에 그런 재주가 없는 나는 춥고 배고픈 싸리 껄짝(껍질)을 불끈 쥔 채 잘도 견디어 온 셈이다.

나의 서툰 화투놀음에 어떻게 바닥이 일어났던지, 재작년 12월 29일, 신문예문학상을 탈 때부터 웬지 자꾸만 주변머리 없게도 팔싸리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훌륭한 시인들이 기라성 같이 많은데, 하필 나의 작품을 선정해 주신 것은 아무래도 싸리 껄짝만 쥐고 살아온 그 고집을 좋게 보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1979년 네 번째 시집을 펴낸이래 써 발표한 시 80편을 모아서 4부로 나누어 싣는다. 앞에 칼라 사진과 함께 게재하는 14편의 시는 이미 발표된 시임을 밝혀둔다.

낙엽을 태우듯 그렇게 태워버리고 싶은 졸작이지만 그래도 귀엽게 보아주시고 기꺼이 서문을 써주신 具常 선생님, 그리고 이 책을 꾸미는데 힘써주신 金鍾元 선생과 李俊寧 형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 시집의 탄생을 위하여 조력해 주신 고마우신 분께 甚深한 謝意를 표하며, 그동안 동고동락(同苦同樂)해 온 詩友들과 함께 이 기쁨을 나누고자 한다.

1984년 1월 1일 관악산방에서

저자 적음

黃松文 第五詩集 그리움이 살아서 값 3000원

1984년 1월 21일 초판발행

1985년 6월 15일 2판 발행

著 者 黃松文

發行人 李俊寧

發行處 自由文庫

서울 中區 南大門路 4가 17-9호

(청룡빌딩 203호)

전화 753-1239, 752-8919, 756-2239

등록 1979년 12월 31일 제2-9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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