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같이 바람같이
황송문 시집
弘益 現代 詩人 選
노을같이 바람같이
목차
제1장 노을같이 바람같이
가시나무새
길을 가다가
열꽃
진주의 잠
노을 2
노을같이 바람같이
연가(戀歌)
그리움 4
아름다운 것 2
개나리
詩語의 죽음
돌 2
가야산에서
시를 교살한 방
기원(棋院)에서
쉼표와 마침표
제2장 발레 환타지아
단풍
신락(神落) 1
신락(神落) 2
포장마차에서
길
청보리
팔싸리
칡차
노목(老木)
발레 환타지아
너 어디 있느냐
비비새 2
모시는 말씀
항아리
제3장 구름이 쉬어가듯
존재
세탁옷
종지부
매운탕집에서
구름이 쉬어가듯
화가상(畵家像) 2
죽필(竹必)
쑥
기상도(氣象圖)
수강표(受講票)
야외수업
꽃과 함께
인생 연습
섬
세종실록
파도
제4장 새로 나오는 봄쑥같이
환상곡(幻想曲)
고향의 징소리
곡(哭), 신석정 선생님
휴전선 안개
교정을 보면서
파초 잎을 두드리는
봄쑥같이
나의 시 나의 삶
황송문 시집
노을같이 바람같이
제1장 노을같이 바람같이
가시나무새
내 가슴속에는
피흘리며 노래하는 새가 있다.
아플수록 고운 노래
신락(神樂)에 사는 새가 있다.
안일한 둥우리를 떠나
핏빛 노을에 미쳐 날다가
가슴 찔려 피흘리는 새가 있다.
아프면 아플수록
삼키는 울음은 아름답고,
포도즙이 노을로 삭아 내리듯
안으로 다스리는 노래는 아름답다.
아름다운 것은
찔린 가슴에 붕대를 매어주는
따뜻한 한 편의 시,
울며 울며 노래로 보내는
구곡간장(九曲肝腸)의 피울음이다.
길을 가다가
길을 가다가, 왈칵
당신 손을 잡으면
내 안에 느껴지는 체온.
징그러운 임진강보다도
더 아픈 내 손바닥 속에서
파들거리는 당신의 손은,
오직 사랑을 위해
자명고(自鳴鼓)를 찢은 당신의 손은
내 하나밖에 없는
갑(匣 )속의 진주(眞珠).
세상이 아무리 추워도
내 손 안의
진주를 붙들고 있으면
아무 걱정이 없고……
세상이 아무리 어두워도
내 손 안의
당신 손을 붙들고 있으면
다시 피어나는 꽃.
그 입시울 웃음꽃 속에
불붙어 사는
한 마리의 새.
가슴속 어딘 듯 양지쪽에
온종일 지저귀며 사는
한 마리의 뜨거운 새.
열꽃
나의 시는
상상의 감주
한 모금의 희열이다.
누룩을 썩혀온
토속의 항아리에
괴어 떠낸 밀주다.
아무도 몰래
떠 마시는
달콤한 언어의 감주,
바람 맞은 놈들이
쥐불을 지르다
헤쳐 뿌리는 불꽃이다.
여왕벌을 쫓는 숫기로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르다가
합궁 끝에 떨어지는
찬란한 비명이다.
꽃 속에 갇힌 벌이
나래 떨며 울듯
황홀한 죽음의 절정으로
찰찰 넘치게 마셔대는
불 머금은 화덕이다.
번개바람 벼락 치는 사랑 끝에
저녁놀이 타듯,
자운영 꿀벌 잉잉거리며
소지처럼 타오르다가
사위어가는 목숨의 끄트머리
정겹게 피어오르는
한 아름의 열꽃이다.
진주의 잠
잔잔한 의식의 내만(內灣)에 내리는
빗소리 걸어두고
꿈꾸는 진주의 혼곤한 잠 끝에
피라미 한 마리 S자를 그린다.
건반(鍵盤)은 촉촉이
밀어(密語)의 손을 잡아끌고
머리맡 수풀 속엔
새록새록 내리는 기억의 나래들
벌 나비 위로 안개꽃 내린다.
선녀의 두레박으로
꿈을 길어 올리는
나의 진주는
속눈썹 가늘게 빗소리 듣는다.
조개 속 아늑한 꿈의 나라
내밀한 은어(隱語)에 벙그는 미소
밀 익는 온도로 도란거리는
새들도 내려와 꿈을 엮는다.
노을 2
노을은 연서(戀書)다.
산불로 오시는 임에게
송두리째 바쳐드리는
수박 속 발그레한 귓속말이다.
그 빛깔
홀로 보기 아까워
은밀한 항아리에 은근히 재워둔
꽃자주 빛깔의
잘 익은 포도주다.
눈웃음 해실해실
한 모금의 희열로 시근거리는
순연(純然)한 귓속말.
둘이 마시다 하나 잠들어도 모를
입술 속 연연(戀戀)한 불기운이다.
노을같이 바람같이
이제는 정말 마음 두지 않으리.
뿌리 같은 거
꽃나무 뿌리 같은 거
깊이깊이 내려뻗는 연민 같은 거
연민 같은 거
보내놓고 돌아서다 되돌아보는
눈빛 같은 거, 사랑 같은 거
푸른 산 줄기줄기 칡뿌리 같은 거
흔들리는 차창 저만치
비껴가는 노을같이
모이파리 사른사른
스치고 가는 바람같이
골짜기에 잠겼다가
풀려나가는 안개같이
이제는 정말 마음 두지 않으리.
노을같이 바람같이
막대로 뜬구름 가리키는 스님같이
이제는 정말 마음 두지 않으리.
연가(戀歌)
세상이 추워질수록
생각나는 당신,
가슴 속 열두 대문을 지나
안채 깊은 방구들목에
불을 지펴드리겠습니다.
불은
당신의 말씀, 입술의 기운으로
은근히 덮혀지는 따뜻한 나라
온돌방 아랫목
비단 금침 깊이깊이
밀어(密語) 한 꾸리 감아두겠습니다.
베개는 꽃씨로 채워서
밤마다 꿈자리는 꽃그늘에 만나고
달빛은 밤새도록
오동잎에 걸어두겠습니다.
그리움 4
여름날
나그네에게
샘물 한 바가지 떠주는 인정이 그립다.
행여 체할세라
버들잎 띄워서 건네는 소심(素心)
그 갸륵한 슬기와 덕성이 그립다.
돌아서며 사알짝 붉히는 볼
그 부끄럼타는 순수 뒤에
물결 일렁이는 사춘의 바람이 그립다.
그리운 이는 바람결
과즙이 풍부한 귓속말
과수원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말씀……
아름다운 것 2
아름다운 것은 웃음꽃이다.
삼동 가시나무 웃음꽃이다.
아픔을 참는 가시나무의 슬픔
상처에서 피워 올린 웃음꽃이다.
기다리며 기다리며
평생을 하루같이 기다리며
침묵을 드러내는 웃음꽃이다.
찔린 상처가 아물지 않아도
기다리며 기다리며
생각하는 삼동 가시나무로 서서
먼 하늘 우러르는 눈빛이다.
아름다운 것은
천년을 하루같이 기다리며
하루를 천년같이 기다리며
속울음 삼키는 사람,
그 얼굴에 내리는 햇살이다.
아름다운 것은
속 아픈 눈물을 안에서 걸러내어
웃음꽃 피어내는 얼굴
그 얼굴의 해살이다.
고목(枯木) 뚫린 가슴을 틀어막듯
틀어막으며 틀어막으며
상처를 틀어막으며,
미소를 머금은 노을이다.
아름다운 것은
삼동 가시나무 꽃,
상처를 틀어막고 기다리며
노을빛 살려내는 웃음꽃이다.
개나리
개나리꽃 그늘엔
병아리가 있었네
개나리 꽃잎 물던
첫사랑이 있었네
첫사랑 꽃그늘엔
눈망울이 있었네
눈망울엔 오롯한
웃음꽃이 있었네
웃음꽃 속으로
빨려드는 하늘과
하늘을 빨아들인 입술과
입술로 녹아드는 은하수
입술 속 별이 출렁이는
밤하늘의 윤선(輪線)에는
첫사랑이 있었네
입술 속 하늘에는
불나비가 있었네
개나리가 있었네
시어(詩語)의 죽음
나는 나를 제사지낸다.
시어(詩語)가 죽던 날 밤부터
나는 나를 제사지낸다.
죽은
내 시를 제사지내는
내 말의 무덤 앞에서
나는 잔을 기울인다.
살아나지 못한 내 말의 무덤
아무도 살려낼 수 없는 말의 무덤 앞에
나의 죽음을 제사지낸다.
말이 소용없는
말의 죽음
구겨진 원고지가 바람에 굴러간다.
내가 나에게 술을 붓는다.
마셔도 마셔도
우는 보람이 없는
이 낙엽 같은 시신(屍身)에 술을 붓는다.
돌 2
물속에서 한 천년
매끄러운 소리만 내라 하네.
아픈 소리는 흘려보내고
편안한 소리만 내라 하네.
진주알 같은 말씀도
침묵만 못하겠거든
눈을 감고 한 천년
흙속에 묻혀 살아라 하네.
가야산에서
말하지 말아라.
세속의 쓰레기를 버리지 말아라.
도시의 문명을 지껄이지 말아라.
돌을 다듬으며
부드러운 물의 손길로 돌을 다듬으며
천년을 흐르는 물소리
가슴으로 들으며
구름 속 웃음 짓는 반월(半月)같이
눈으로만 말하라.
밤새도록 흐르는 물은 음악가였다.
바위틈에 푸른 소리로 연주하는
자연은 위대한 악성(樂聖),
풀잎으로, 바람으로, 별떨기로
오오, 은하수로 악보를 그리며
화음(和音)으로 말하는 음악가였다.
말하지 말아라.
은유를 눈치 채지 못한 말의 쓰레기는
꺼내지도 말아라.
여름, 해맑은 가슴 풀어 흐르는
저 물소리
밤새도록 번뇌를 씻어 내리는
저 물소리
오오, 내 말의 부끄러움,
허튼소리의 부끄러움이여!
손조차 담글 수 없는
그대 맑고 찬 말씀,
눈이 시려 볼 수 없는 눈이여!
산거(山居)한 나를 사로잡아가는
그대 휘감아 구비 도는 사랑,
사랑에 녹아내리는 물이 되리.
한 방울의 물이 되어
말이 소용없는 나라로 떠내려가리.
물소리 연주하는 악성(樂聖)과 더불어
떠내려가리.
시를 교살(絞殺)한 방
전화는 은밀한 방이다.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은 채
시를 교살(絞殺)한 방이다.
밀어(蜜語)가 무성한 암실에
둘만의 포옹을 누리는
갇힌 바람의 밤하늘이다.
푸른 바탕에 보석들 수놓은
밤하늘에 잠기다가 깔깔거리는
유성의 사정이다, 정사현장이다.
밖에서 문을 두드릴 때
홀로 있을 때만 문이 열리는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
음양불칙지위신(陰陽不則之謂神)
신기한 자동문이다.
하나의 방에서
하나의 꽃방석을
둘이 함께 깔고 사는 꿈의 오두막이다.
굴뚝엔 실연기 더듬거리며 피어오르고
방구들목도 더듬더듬, 내실엔 입술
은하수가 안개처럼 밀려다닌다.
오오, 그러나
꽃방석의 무늬는 너무 잘아
잔소리의 포식으로 죽어간다.
자기도 모르게 죽어간다.
꽃 속에 갇혀 죽는 벌이 되어
잔소리 잉잉거리며 죽어간다.
도시의 전화는 여우 떠는 글
시를 살려 보내지 않는 무서운 방이다.
시를 교살한 중죄수의 독방이다.
한 밤 중
오무라든 꽃 속에
갇혀 죽는 벌의 방이다.
시를 달달 볶아 죽인 잔소리의 방이다.
기원(棋院)에서 2
바둑이 무엇입니까?
인생이다.
인생이란 무엇입니까?
정석(定石)이다.
정석이란 무엇입니까?
정도(正道)다.
정도란 무엇입니까?
아생연후살타 (我生然後殺他)니라.
축(逐)으로 몰릴 때는 어찌해야 합니까?
단념하라.
생각을 어찌 끊습니까?
살려거든 단념하라.
다음 수는 무엇입니까?
먼 곳을 개척하라.
더 둘 곳이 없으면 어찌해야 합니까?
계산을 해야 하느니라.
백(白)과 흑(黑)의 계산입니까?
인생의 산술법이다.
인생이란 무엇입니까?
있다가도 없어지는 바둑판이다.
바둑판은
하늘과도 같은 것
뜬구름 모였다 흩어지는 하늘이다.
하늘은
흑(黑)을 다스리는
빈 마음……
먹구름 몰려들어
눈 가리는 흑심(黑心)을 버려야 하느니라.
쉼표와 마침표
모두들
종점(終點) 가는 길에
차를 내려
벤치에 앉아서 쉬어 간다.
나도
벤치에 앉아
계절이 지나가는 나뭇잎 사이로
열린 조각하늘을 보며
추억 하나 만지작거린다.
내가 만지작거리는
추억의 껍질은
속을 비우라고 말한다.
뜬구름 떠돌다 사라지듯이
잠시 머물다 가는
인생은 나그네라고 말한다.
벤치에서
여름에 만난 사람은
가을에 보내야 한다고……
꽃이 필 때 만나면
잎이 질 땐 보내야 한다고……
보내면서 보내면서
나는 다듬어진 조약돌 하나 주었고,
떠나면서 떠나면서
그녀는 조개껍질에 빈 바람을 남겼다.
나는
빈 바람 남기고 가는 그녀에게
꽉 찬 돌 하나 주었다.
그러나,
나의 돌은 채워주지 못한 채
가슴에 금이 갔다.
깊은 밤
초침 뛰는 소리에도
가랑잎에 금이 갔다.
금 간
가슴에 내리는 가랑잎 소리는
봄 여름 가을……
벤치에 앉아 쉼표를 찍다가
마침표를 찍으러
종점(終點))으로 떠난다.
황송문 시집
노을같이 바람같이
제2장 발레 환타지아
단풍(丹楓)
얼근히 떠오르는 그리움
외상술 넘기는 목구멍이다.
골짜기가 화끈거리는
물과 불의 갈림길이다.
그것은
시간의 혓바닥
부끄럽게 낭비한 인생을
불사르는 목숨이다.
만나고 헤어질 때
순간과 영원의 손을 흔들며
연소하는 노을이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가는
애증(愛憎)의 빛깔,
부끄러운 인생의
화끈거리는 저녁나절이다.
신락(神樂) 1
나비가 제 향기에 취해서 날아갑니다.
샘물이 제 맑음에 취해서 흘러갑니다.
날아가는 것은 아름답고,
흘러가는 것은 아름답습니다.
동경하는 눈빛은 아름답고
흘러가는 눈빛은 아름답습니다.
그리워하다가 사랑하다가
속아 사는 사람은 아름답고
상처받은 이는 아름답습니다.
아무도 몰래
달빛 속 눈물 뿌리며
밤새도록 가시밭길 걸어 나와
서리 맞은 홍시(紅柿)처럼
눈물 속의 햇살은 곱습니다.
서리 까마귀 산허리로 돌아가고
인생이 맛들 때
목숨 끝가지마다 열린 까치밥
서리 맞은 열매는 곱습니다.
오오, 저 투명한 하늘에
매어달린 나(我)여!
한 모금의 은혜를 기다리며
하늘만 바라보고 사는
잎사귀 끄트머리에
흐르는 일월(日月)……
산새가 제 소리에 취해서 날아갑니다.
구름이 제 멋에 취해서 흘러갑니다.
신락(神樂) 2
하늘에는 눈이 있어요.
맑은 눈이 있어요.
세상에서 볼 수 없는 눈이 있어요.
세상에서 눈멀면
하늘을 봐요.
말갛게 개인 눈, 하늘을 봐요.
세상에서 피흘리며 아파 울다가
나도 모르게 올려보는 하늘
거기엔 당신의 눈이 있어요.
언제 보아도 싫지 않는 눈이 보여요.
맑은 눈을 자진 이들만 모여서 사는 나라
하늘나라엔
찌르는 가시가 없다지요.
찔림도 아픔도 없다지요.
하늘을 보면 가슴엔
눈이 녹아요.
하늘을 보면 심장엔
얼음이 풀려요.
티끌 하나 없는
빈 가슴에
구름이 떠돌듯
속 삭는 동치미 항아리에
당신이 오셔요.
비둘기 나래 끝에 떨어지는
햇볕 살 웃음 안고 당신이 오셔요.
세상이 싫어질 때 올려보는 하늘
청청 하늘에
떠도는 구름 한 점
먼빛으로 살아요.
포장마차에서
그녀는 시를 쓰고 나는 잡문을 끄적였다.
잔잔한 눈으로 말하는
그녀의 시는 꿈이었다.
그녀가 호수 같은 눈으로
꿈꾸듯 속삭일 때
나는 허튼 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옥합(玉盒) 속 깊은
수심(水深)을 알지 못한 나는
참새처럼 짹짹거리고 있었다.
그녀가 내 입을 막을 때
내 의식하기 싫은 의식의 세포들이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군참새를 씹으면서
짹짹거릴 때
그녀는 몸서리를 쳤다.
내 입에 들어가는 생활의 모래주머니
내 입에서 나오는 허튼소리를
변명하지 말았어야 했다.
교감(交感)의 불은 꺼지고
싸늘하게 식어버린 멍든 가슴
씽씽 아파 우는 찬바람 야멸차도
차라리 변명하지 말았어야 했다.
생활의 거름자리 후비던 발톱을
차라리 변명하지 말았어야 했다.
짹짹거리면 시가 되지 않는 공복에
술을 마시다가
검정 넥타이를 쓰다듬는다.
내 목을 감아 맨
내 상장(喪章)을 펴들고
내 제사(祭祀)를 지내는
내 영혼을 쓰다듬는다.
시의 불감증으로 죽어지내는
나의 제전(祭典)에
그녀는 술을 따르고
나는 부끄러운 잔을 받아 마셨다.
길
시도(詩道)는
고행(苦行)이데
살얼음 위를 걸어가는
험로(險路)
혈투(血鬪)의
고행(苦行)이데
청보리
청보리의
푸른 정신으로 살고 싶다.
가난한 나라에 태어나 살아도
가난한 줄 모르게
수천 톤의 햇살을 받아들이는
양지바른 토양에서
보란 듯이 살고 싶다.
국어보다 영어를 더 잘 가르치는
그런 사대(事大)의 사내새끼가 아니라,
자가용 열쇠를 빙글빙글 돌리면서
어깨를 으쓱거린다거나,
면사포를 쓰고
깜둥이에게 들리어가면서도
하이힐 코빼기를 까딱거리는
정신 티미한 계집의 헤픈 웃음은 말고,
짓밟히면서도 일어서는
청보리의 사상,
농부의 뚝심으로 살아나는
그 푸른 정신으로 살고 싶다.
팔싸리
내 인생은
민화투 놀음의 팔싸리.
아무리 기다려도 기다려도
좀처럼 오지 않는 행운.
바닥에서 알짝이 일어날 때까지
싸리 껍질만 불끈 쥐고 살아온 시업(詩業).
아내가 움켜쥐고 싶어 하는
돈이나 권세
송동월(松桐月) 광도 떨어버리고
흑싸리 껍질만 홍싸리 껍질만
그저 빈 껍질만 불끈 쥐고 살아온 가난 속에
청빈의 물소리 쪼르륵 들리나니,
가난해야 넉넉한
내 시의 산술법(算術法)……
마음을 열면
뜰의 달빛……
보자기로 구름 잡는
내 인생은
무능(無能)한 無無明亦無無明盡無老死) 팔싸리……
고집으로 걸어온 내 시도(詩道)는
화투놀음에서 그야말로
끝내주는 팔싸리.
칡차
오늘은 내 나라 칡차를 들자.
조상의 뼈가 묻힌 산
조상의 피가 흐른 산
조상 대대로 자자손손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 묻힌 산
그 산 진액을 빨아올려
사시장철 뿌리로 간직했다가
주리 틀어 짜낸 칡차를 받아 마시고
내가 누구인가를 생각하자.
칡뿌리 같이 목숨 질긴 우리의 역사
칡뿌리 같이 잘려나간 우리의 강토
내 흉한 손금 같은 산협(山峽)에
죽지 않고 살아남은 뿌리의 정신,
흙의 향기를 받아 마시자.
어제는 커피에 길들어 왔지만
어제는 정신없이 살아왔지만
오늘은 내 나라 칡차를 들자.
노목(老木)
철학이 깊다.
시공(時空)을 건너뛰는
침묵의 하늘을 덮고 있다.
넓은 허공에
작은 공간을 차지하면서도
생각하는 이파리 하늘을 가렸다.
바람 한 차례
뚫린 가슴으로 빠져나가면
거기, 휩쓸려나가는
가랑잎들,
썰물 같이 외롭다.
철학이 깊다.
달 밝은 밤
실바람이 불어오면
근육으로 꼬인 껍데기에
어리는 침묵……
철학이 깊다.
발레 환타지아
말씀이 빚어 만든 사람 속의 무지개는
새가 되고 꽃이 되고
안개 속 은사시나무 흔드는 바람이 되어
박하사탕 먹은 별이 되고 은하(銀河)가 되네.
은물결 남실남실
뿌연 미립자 더듬어나가는 손은,
학의 나래 가볍게 가볍게
해에게로 해에게로 뻗어나가는 나뭇가지,
꽃눈을 반짝이며 꿈길을 가네.
학(鶴)이 모여서 꽃이 되고
꽃이 모여서 학이 되는
무한천공(無限天空)을 유영(遊泳)하는 민들레
사랑스런 눈짓이 손끝에 오가네.
손은……
꽃가지에 움트는 손은……
꽃은……
손끝에 움트는 꽃은……
웃음꽃 환하게 피어오르는
신(神)의 정교한 걸작 속의 무지개.
새가 되고 꽃이 되고
안개 속 은사시나무 흔드는 바람이 되어
박하사탕 먹은 별이 되고 은하가 되네.
너 어디 있느냐
너 어디 있느냐?
네, 저 청보리 밭에 있어요.
삼동(三冬)을 견디는 청보리 뿌리로
끈질기게 살아있어요
당신의 나라로 눈을 뜨고 있어요.
얼어붙은 땅속에서 눈을 뜨고 있어요
입춘대길(立春大吉)을 노래하며 햇빛 받고 있어요
눈더미를 뚫고 솟아오르고 있어요
푸른 싹 쏘옥쏘옥 눈을 트고 있어요.
바람은 언덕 너머 재워두고요
웃음꽃 피우려고 뿌리 뻗고 있어요
청보리 물결 일렁일렁 밀려오는
그 찬란한 매스게임을 위해
찰진 흙속에 뿌리 뻗고 있어요.
너 어디 있느냐?
네, 저 계해년 돼지우리에 썩고 있어요
청보리밭 거름이 되고 싶어서
짓밟히며 시달리며 썩고 있어요.
속 썩는 인생은 아름답기에
불평없이 감사하며 썩고 있어요
숨죽은 강산을 일깨우기 위해서
종처럼 희생하며 사랑하고 있어요.
시궁창 토란(土卵) 잎이 아름답게 피듯이
토란잎에 물방울이 영롱하게 빛나듯이,
청보리 짙푸른 들녘을 위해
인류의 열병 분열식을 위해
온유하고 겸손하게 기다리고 있어요.
너 어디 있느냐?
네, 저 당신 곁에 있어요
당신께서 끌어올린 물고기의
그 비늘 끝에 있어요
번쩍이는 비늘의 찬란한 햇살 같은
당신의 눈웃음 속에 살아있어요.
노아의 방주 안에 살아있어요
아브라함의 땀방울 속에 살아있어요
모세의 지팡이에 살아있어요
예수의 십자가에 살아있어요.
참깨 밭에 내리는 해살의 미소 같은
당신의 기쁨을 마음에 모셔두고
청보리밭 이랑에 거름 뿌리고 있어요.
사랑의 윤선(輪線)에 불꽃이 오가듯
잘 주고 잘 받은 돼지우리와 청보리밭,
목자(牧者)와 양의 무리, 그 안에 있어요.
비비새 2
3월이면 죽순(竹筍) 밭에서 비비새가 운다
非非非非 非非非非
그게 아니라고 아니라고 비비새가 운다.
비비새가 非非非非
제 이름만 부르는 것은
정직한 대밭에서 살기 때문이다
반칙(反則)을 모르는 정칙(正則)으로 살기 때문이다.
밀물 같은 만세 소리 우렁찬 데에도
아니야 아니야 그게 아니야
매국노는 뻔뻔스럽게 활개치고
애국자는 독립선언서를 콜록이다가
피골이 상접한 채 두 눈만 살아있는
도깨비장난 같은 요지경 세상이야.
非非非非 非非非非
아니야 아니야 그게 아니야
비비새는 죽순 밭에서 비비비비
청명한 이슬을 퉁기며 봄을 부른다.
춘삼월(春三月) 호시절(好時節)에 부는 바람은
산 넘고 물 건너 만세 바람은
봄 쑥을 움틔우며 아픔을 다스리는
철학이 있었고 사상이 있었다
지게 목발 두드리는 초동목수의
흘러간 노래에도 뜻이 있었다.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머지않아 온다고 길길이 뛰면서
깽맥 깽맥 깽맥깽
하늘 어질어질 감아 돌리며
지잉징 징징 징도 울었다.
흙 다시 만져보며 산처럼 울던 사람,
하늘 가득히 경천(敬天)의 손 뻗쳐 올리던
백의민족은 다 어디로 갔느냐?!
똑 부러지게 말 한 마디 못하는
눈알 티미한 병신 머저리들아
오늘은 비비새 소리를 듣기로 하자.
참여의식이 강한 비비새가 非非非非
죽림(竹林) 속 퉁기는 이슬 받아먹으며
티미한 정신을 맑혀내기로 하자.
모시는 말씀
깊어진 가을의 초막(草幕)으로
당신을 모시고 싶습니다.
병풍이 둘려 쳐지듯
산이 둘리어 솟아있고,
소잔등 구풀대듯
울타리 용마름도 굽이굽이
호박넝쿨 박넝쿨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가을 당신께 드리고 싶은 것은
황금도 아니고 몰약(沒藥)도 아닙니다.
푸른 달빛 홈초롬히 가슴으로 받으며
수줍어 조용한 박덩이의
가을밤을 드리고 싶습니다.
당신께서 오시는 날 밤에는
달빛이랑 별빛이랑 거느리고
박꽃과 더불어 마중을 나가겠습니다.
당신께서 오시는 날 밤에는
풀벌레 연주회도 천주적으로 베풀어
온밤을 당신께 바치겠습니다.
항아리
기도하고 있어요
사랑하고 있어요
빈 가슴이 되어
온전히 빈 가슴이 되어
당신을 모셔들이는
둥근 마음이 되어
입을 크게 벌리고
구천에 사무치는 목소리
안으로 모두어
합장하는 모습……
사랑도
미움도
뜬구름으로 보내면서
그리움만 배부르는 마음……
빈 마음에
해와 달과
구름이 한 점
하늘과 얼싸안는 몸짓으로
사모하고 있어요.
제3장 구름이 쉬어가듯
存在
당신이 하늘이라면
나는 그 속에 떠도는 구름
당신이 바다라면
나는 그 속에 출렁이는 물결
당신이 땅이라면
나는 하나의 작은 모래알
당신의 손바닥 위에
숨쉬는 나는
당신의 영원 속의 순간을
풀잎에 맺혀 사는 이슬
한나절 맺혔다가
사위어가는
목숨……
세탁옷
나의 시는
날 선 이빨에 절망하다가
들어오기가 바쁘게 나가버리는
그놈의 돈 때문에 실망하다가
더 이상 절망할 수 없을 때
살아나는 나의 시,
나의 촉촉한 물기는
아내의 손끝에서 살아나고
옥상 드높이 하늘 드높이
태양과 마주보는 나의 시,
남방 유월 같은 나의 시는
죽었다 깨어나는 세탁 옷
아내의 손끝에서 다시 산다.
종지부(終止符)
인생은
쉼표와 마침표.
마디 위의 끄트머리 위의 구름 위의
순간에 걸려있는 영원의 손짓이다.
인생은
낮과 밤의 바둑알.
한 점으로 시작하여
마지막 놓는 바둑알이다.
잠시 동안 머물다 흐르는
유연한 유성(流星)
정차장과 종점(終點)이다.
종점은 다시 여로(旅路)
자고 깨는 생활 속에
허허한 공지(空地)가 흐른다.
빈 공간을 메우기 위해
잔속의 은하수를 마셔도 보지만
인생은 마침표,
쉬어가다 도달하는 마침표.
줄기 위의 가지 위의 하늘 위의
순간에 걸려있는 영원의 손짓이다.
매운탕 집에서
낙엽 위에 처녀가 누워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자는 듯이 누워있다.
매운탕 집 여인이
그물로 건져 올린 쏘가리처럼
미끈한 목덜미와 어깨와 허리께로
삼단 같은 머리카락이 치렁치렁 늘어졌다.
벽에서 튀어나온 젖꼭지를
만져보고 싶은 상사바람은
식탁 밑에 숨겨두고……
차마 눈이 시려 바로 보지 못하는
머리카락 흘러내린 그 아래로는
넌지시 흘금흘금 훔쳐보다가……
“거 히얀헌 작품도 다 있네그려!” 하고
감탄 같은 신음을 토해낸다.
밤하늘 불꽃 터지듯
터지는 신음은 신음인데,
살구 씹다 한 쪽 눈 씰룩거릴 때의
양철 삐걱대는 신음소리다.
구름이 쉬어가듯
노자 없는 구름이 쉬어가듯
나는 쉬어 쉬엄 걸어간다.
먼지 낀 하늘도 닦아보고
자적(自適)한 구름도 손짓해 보면서
허허실실(虛虛實實) 쉬엄쉬엄 걸어간다.
시우(詩友)에게
혀꼬부라진 소리 하긴 싫고,
아직은 염치(廉恥)가 살아
빈손으로 걸어간다.
정처 없이
하늘을 보다가
땅을 보며 가는 나는 누구인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구름같이
왔다가 가게 하는 이는 누구인가.
빈 마음에
구름이 한 점
쉬엄쉬엄 쉬어 간다.
화가상(畵家像) 2
화폭 앞엔
설원(雪原)을 찾는
화가의 백발(白髮).
파레트는
텅 빈 꼬막.
말라붙은
물감,
화폭엔
구름이 한 점.
푸른 하늘
떠도는
종지부(終止符) 하나.
죽필(竹筆)
시를 쓰려거든
청죽(靑竹)같이 절개 곧은 직필(直筆)로 써라.
병신 머저리같이
혀 꼬부라진 소리를 흉내 내려거든
차라리
모래밭에 혀를 물고 죽어라.
시는
까마귀 송장 뜯어먹듯,
아무거나 뜯어먹고 살아가듯,
그렇게 유치하게 쓸 수는 없느니라.
학(鶴)처럼
싱싱한 물고기 채어 물고 솟아올라
무주공산(無主空山) 천리를 날 듯
운무(雲霧) 거느리고 떠가야 하느니라.
쑥
단군 할아버지 적부터
흉년 들면 연명해 온
쑥들이 일어나 춤을 춘다.
덩덩 덩덩……
전장에서 재가 되어 돌아온 자식을
받아 들고 돌아오다 까무러친 그 자리에
목숨 질긴 쑥이 살아 쑥춤을 춘다.
덩덩 덩덕꿍……
땅을 치며 목을 빼고 울다가
풀을 뜯으며 하늘 보고 울다가
사무치는 한(恨),
피울음 울다 개풀어진
쑥의 나라 어머니!
이 산에서
저 산에서
쑥국 쑥국 쑥쑥국.
기상도(氣象圖)
대륙에서 다가오는 기압골의 영향으로
북서풍이 불다가
해상에서 접근하는 고기압의 영향으로
남동풍이 불다가
구름이 모이다가
비가 내리다가
반칙(反則)을 일삼는
뇌성벽력(雷聲霹靂)
세상사
미친 여자 널뛰다가
소나기로 퍼 울다가
수강표(受講票)
잉크 냄새 싱그러운 수강표에서
라일락 향내가 난다.
수강표의
그 또박또박 박아 쓴 글씨에
젊음의 윤기 자르르 흐른다.
보면 볼수록 반짝이는 눈동자
샘물 마시듯 속이 시원하다.
샘물에 내려와 사는
하늘의 별떨기 같이
이름자마다 반짝이는
땅 위의 별……
슬기롭게 반짝이는
하늘과 땅의 유아독존(唯我獨尊)들……
수강표의
또박또박 박아 쓴 글씨에서
라일락 향내가 난다.
야외수업(野外修業)
복숭아꽃 흐드러지게 핀 도원(桃園)에서
나는 웃음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들짝 웃다가
깔깔거리며 웃다가
꽃잎 물고 하늘 보는
저 귀여운 햇병아리들……
그리움 같은 눈망울에 구름이 떠돌고
구름 저 너머 꿈꾸는 미래,
가슴속에서는 뭉게구름이 일 테고……
어쩐지 어쩐지
위태로운 봉오리……
저 천진난만한 것들이
거름자리 후비는 세상에 나아가
어떻게 살 것인지 걱정이 되어
꽃잎 한번 보고 구름 한번 보고
얼굴 한번 보고 하늘 한번 보고
제발 제발 이 귀여운 것들아
가난해도 좋고 못살아도 좋으니
거름자리 후비는 데 눈 팔지 말고
순난의 발톱을 키우지 말아다오.
꽃과 함께
스승의 날에 꽃을 받았다.
고동치는 심장 바깥 호주머니에
꽃을 찾는 그녀들의 웃음꽃을 받았다.
안개꽃에 둘러싸인
백장미와 흑장미는
내 가슴 환하게 피어났다.
나는 개선장군처럼 돌아와
꽃을 챙겼다.
그대들 웃음꽃을 간직하기 위해
샘물을 찾아 나섰다.
깊은 땅속에서 길어 올린 생수를
콜라 컵에 붓고 꽃을 모셨다.
신들린 듯 눈부신 꽃웃음에
밝아지는 세상,
환한 꽃세상이 하도 좋아
세상만사 두문불출하고
사흘 낮 사흘 밤을 꽃과 함께 살았다.
인생연습(人生演習)
-어느 운동회에서-
나란히 나란히
쌍쌍이 쌍쌍이
사내아이와 계집아이가 달려간다.
오른발 왼발을 한데 묶고
하낫둘 하낫둘 달려간다.
그 가운데 때로는
박자가 맞지 않을 때
두 사람은 도중에서 쓰러지고 만다.
너무 성급해도 안 되거니와
너무 느려도 안 되고,
그저 알맞은 박자로 하낫뚤 하낫뚤
어깨 짜고 조심조심 달려야 하느니라.
세상사 마찬가지,
가사와 정사도 마찬가지,
만인이 보는 앞에서
너무 서두르지도 말고
너무 꾸물대지도 말고
알맞게 알맞게 달려야 하느니라.
나란히 나란히
쌍쌍이 쌍쌍이
알맞게 알맞게 달려야 하느니라.
섬
가랑비 오시는 날
강단에 서면
강의실은 잔잔한 바다
푸른 숨결 찰랑거린다.
바다 풀빛 책보를 펴고
출석을 부르면
해면(海面)에 떠오르는
작은 섬들이
대답을 하면서 반짝이고……
총명한 눈을 가진 섬과
예쁜 이름을 가진 섬과
글씨를 곱게 쓰는 섬과
질문을 잘하는 섬……
그 윤기 자르르한 섬들이
안개를 벗어 내리며
가슴에 몰려온다.
저만치 오는 것은
안개 속의 섬
가랑비 오는 소리……
종강 시간에
책을 덮고 마주 보면
그 많은 섬들이
보이지 않는다.
안개 자욱한 해면엔
푸른 숨결만 찰랑거리고……
세종실록(世宗實錄)
새마을호 특급은 비싸서 못 타고
통일호 3등 급행열차를 탔다가
구두를 밟히던 날 밤 꿈에
독립선언서를 다시 읽는데
세종 임금께서 나와 울더이다.
간밤엔
비껴 앉은 독립문이 서럽게 울더니
고층 빌딩에 주눅 든 남대문도 울더니
히라가나와 혀꼬부라진 소리에 밀리어
한국은행 전속 모델로 연명하시다가
훈민정음을 총살당한 세종대왕께서는
안중근 의사를 붙들고 그렇게 울더이다.
분단 반세기가 넘도록
우리 말 똑 부러지게 하는 이 없고
나라 팔아먹는 놈들이 활개 친다고
서럽게 서럽게 그렇게 울더이다.
피임을 선언한 도시에서
그렇게도 서럽게 울어 싸시더니
세종로에도 계시지 못하고
파고다공원으로 피신하더이다.
파도(波濤)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던
병사의 찢겨진 군복 자락이다.
폭풍(爆風)에 날라는 연서(戀書)를
따라가던 손이
뜯어 뿌리 풀잎이다, 민들레다.
국방색 전투복이 일어설 때마다
낮은 포복으로 높은 포복으로
하얀 이빨 백마 떼 물비늘
청기와 물무늬다.
목숨 바친 산골짜기
줄기줄기 피흘린 노을 언저리에
미친바람이 불면
풀빛 주름
뿌리째 녹아내리는
산욕(産慾)의 허릿짓이다.
제4장 새로 나오는 봄쑥 같이
환상곡(幻想曲)
나무들은 꿈을 꾸고
새들은 환상을 보도다.
새들은 노래하고
별들은 건반을 두드리도다.
바이올린을 켜는 풀잎 위로
노을은 강물로 흐르도다.
나비들은 등불을 켜들고
꽃 속을 헤매는 도다.
꽃가루 날리는 바람 끝에
물오리 숨결이 가쁘도다.
고향의 징소리
별이 빛나는 밤이면
나는 고향의 징소리를 듣는다.
사랑방에서 쏟아져 나온
하얀 무명 중우 적삼 두루마기
상투 꼿꼿한 겨레붙이들이
동네방네 동서남북 사방팔방
지신(地神) 밟는 소리를 듣는다.
밤하늘이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별 더욱 빛나듯이
세상이 추우면 추울수록
더욱 훈훈히 덥혀오는 징소리
깊은 곳에서 낮은음으로 들려온다.
별밭에 서서 징소리 들으면
나는 백의민족이 되고,
엄동(嚴冬)을 화끈하게 타작(打作)하는
우주의 침묵(沈黙)을 듣는다.
침묵은 울음, 울음은 항변, 항변은 깃발!
깃발은 가슴에 울리는 징소리다.
한번 내려치면
뿌리 깊이 울먹이며 내달리는 그 소리는
부조리를 사랑해야 했던 하나님의 통곡이다.
별들도 우는 밤이면
지잉 지잉
가슴 두드리는 소리,
여명(黎明)을 밟고 오시는 소리……
깊은 밤
가슴 속에 태양으로 떠오르며
입춘대길(立春大吉)을 예언하는
아아, 고향의 징소리는
검푸른 밤하늘에 보석들 반짝이듯
흑인가수 이빨처럼 빛나는
아침의 나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곡(哭), 신석정(辛夕汀) 선생님
석정 선생님!
송문이가 왔습니다.
이제 겨우 철이 들어 왔습니다.
돌과 난초를 데리고 사시다가
산과 구름 거느리고 사시던
그 깊은 뜻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가슴 깊이 불을 지닌 산이
서늘한 숲 그늘을 드리우듯,
속아픈 한을 품으시고도
언제나 의젓하신 당신을
이제야 겨우 알듯 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어지러워도
구김이 없으시던 당신은
제게도 시심(詩心)을 심으셨습니다.
산처럼 의젓하라고, 햇볕처럼 다냥하라고,
황제에게 송시(頌詩)를 봉정(奉呈)한 괴테가 되지 말고
악보를 찢어버린 베토벤이 되라던
그 말씀, 그 훈김이 살아 숨쉬나이다.
침묵은 산의 얼굴이라고
숭고(崇高)는 산의 마음이라고
산의 서곡(序曲)을 읊으시던 당신은
바로 산중의 산이로소이다.
세상 모두 우러르는 고봉(高峰)이로소이다.
산이 영원하듯
당신은 영원한 전원시인(田園詩人)
목화를 말리는 가을 햇살 같은 눈길로
오늘도 저를 부르십니다.
“송문이 왔냐?”
“네, 선생님!”
다냥한 햇볕 아래
시나대 바람결 여전한데,
손이 닿지 않습니다.
휴전선 안개
휴전선 안개는
자다가도 어미 찾는 아기처럼
산과 들을 더듬어나간다.
어미의 젖가슴 풀어헤치고
꿈속을 헤매는 아기의 손이
북녘의 산하를 더듬어나간다.
국적이 분명해도 못가는 내 땅을
그는 슬금슬금 잘도 간다.
밤마다 아기에게 세 차례 건너가는
어미 가슴에서 피어오른 안개처럼
가벼운 몸짓으로 잘도 건너간다.
나는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여권을 가지고도
내 땅엘 가지 못하는데
그는 빈손으로도 거침없이 잘도 간다.
철조망도 지뢰지대도
그에게는 거칠 것이 없다.
그는 사상이 없는 까닭에
걸리지도 않고 빠지지도 않는다.
자다가도 더듬는 아기의 손처럼
사상이 없는 안개는 취해서 산다.
밤마다 건너가는 어미의 안개
휴전선의 안개는
자유와 평화를 누리고 있다.
사랑도 미움도
밤마다 우유빛 유방으로 일어나
한많은 휴전선을 넘나들고 있다.
교정을 보면서
나는 교정을 본다.
죄인을 찾아내듯
숨은 오자를 잡아내면서
주님을 생각한다.
용서할 수 없는 부조리를
사랑해야 하는
십자가의 아픔,
하나님의 슬픔을 생각한다.
주님처럼 사랑하지 못한 나는
썩은 이를 뽑아내듯,
토라진 놈들을 뽑아낸다.
거짓으로 눈 가리며 아옹 하는 놈
비굴하게 꼬리치며 아첨하는 놈
엎어지고 넘어지고 물구나무 선 놈들을
하나하나 적발하여 뽐아 낸다.
교정을 본다는 것은
신나는 일이지만
보아도 보아도 끝이 없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신나는 일과 불행한 일 사이에서
어중간히 교정을 봐야 하는
나의 현실 위에
이상의 나비가 침몰한다.
교정을 보면 볼수록
통쾌하면서도
시원치 않는
내 가슴의 활자
명조체 고딕체 눈초리가 무섭다.
나는 교정을 보면서
죽은 활자들이 녹아내리는
화덕을 생각한다.
소돔과 고모라 성의 불길 속에
아우성을 치는 무리들,
비뚤어진 부조리를 불태우며
뒤를 돌아보지 말라 외치던
하나님의 구슬땀을 생각한다.
파초 잎을 두드리는
파초 잎을 두드리는 소리의 저쪽
신비의 베일 저쪽에는
하얀 음률이 손짓을 한다네.
물방울 퉁기는 병아리 부리마다
개나리 꽃잎이 둥둥 뜬다네.
파초 잎을 두드리는 소리의 하늘
신비로운 소리의 하늘에는
속삭이는 꽃그림자 꿈속을 돈다네.
하나님의 손가락의 손가락의 손가락
물오리 날개 끝에 물살이 인다네.
파초 잎을 두드리는 소리의 저쪽
신비로운 소리의 물속에는
은빛 피라미 떼 몰려간다네.
은비늘 번쩍이며 꼬리치는 소리
시원(始原)의 물살을 헤집는다네.
새로 나오는 봄쑥 같이
- 주간종교 1985년 새아침에 -
도봉산 소나무는
지조 높은 콘닥터
머리카락 휘날리며 지휘를 한다.
산이라는 산은 모두 일어나라고
강이라는 강은 모두 깨어나라고
세련된 대자연의 손으로 지휘를 한다.
지휘봉은 솔가지
바람을 일으켜
티미한 정신을 불러 깨운다.
굳센 바위틈에 뿌리 뻗은 소나무
그 억센 소나무에도
눈이 쌓이고,
삭풍(朔風)이 넘나드는 억덕배기
쑥의 나라에도
눈이 덮였다.
더럽혀진 땅에
눈이 덮이는 것은
하늘의 은총(恩寵)이다.
미친 여자 널뛰듯 하는 세상을
불쌍히 여기는 것은
끝이 없는 사랑이다.
세상을 사랑하는
하늘도 얼어붙은 것은
아픈 눈물의 빙벽(氷壁)이다.
그러나,
쟁반 같은 달도 얼어붙고
모진 바람 불어제키는 엄동(嚴冬)에도
신묘(神妙)한 섭리(攝理)에 의하여
솔은 여전히 푸르고
쑥은 질기게 살아나나니
그대 가나긴 잠을 털고 일어나
아침의 나라에 돋아오는 해를 맞으라.
너무 잘난 체 목에 힘주지도 말고
너무 못난 체 주눅 들지도 말고
양심의 나침반이 가리키는 대로
글을 쓰고 문선(文選)을 하고 조판(組版)을 하며
설설분분(雪雪紛紛)
송송청청(松松靑靑)
눈을 소나무 겨울을 견디듯이
그렇게 슬기롭게 해를 맞으라.
새로 나오는 봄쑥 같이
질기게 견디어내고
순하고 순하게 참아내면서
우리네 조상 웅족(熊族)의 정신으로
삼한사온(三寒四溫)을 지켜나가라.
삼한사온도 지킬 줄 모르는 세상이
아무리 반칙(反則)을 일삼는다 하여도
너희들은 반칙하지 말라.
사해동포(四海同胞)를 긍휼히 여기되
양풍(洋風)에 무 바람 들지 말고
북풍에 언 팔 자르지도 말라.
그저 따뜻하게 그저 훈훈하게
동지 팥죽 끌듯 인정이 넘치게
오순도순 다독거리
백자 입 벌고 하늘을 올려보듯
경천(敬天)의 우러름으로 마음을 모아라.
버들잎 야들야들 간지럽히지도 말고
눈치 보거나 엄살떨지도 말고
대쪽 같이 짜개지는 직필(直筆)을 휘두르되
쑥과 마늘을 자시던 우리네 조상 같이
쓸개 있는 글을 써야 하느니라.
새로 나온 봄쑥 같은
쏘옥쏘옥 올라오는 봄쑥 같은
총명한 눈은 활자(活字)
활자는 말씀,
말씀은 하늘이 되고 땅이 되고 별이 되어
천계천체(天界天體)의 원무(圓舞),
화음(和音)되어 돌아가나니
슬기로운 눈을 들어 새해를 보자.
새로 나오는 봄쑥 같이
죽었다가 다시 사는 삶,
재생하는 부활의 윤회(輪廻),
껍데기는 묵은 해 가는 길에 보내고
알맹이는 등불 하나씩 준비하여
무명옷 갈아입고 해에게로 가자.
나의 시 나의 삶
나의 시와 나의 삶은 나침반과 배와의 관계와도 같다. 나는 나침반 없는 배를 생각할 수 없듯이, 시 없는 삶도 생각할 수 없다. 시 없는 삶, 그것은 노래 잃은 새와도 같은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를 희구하는 나의 시는 이상과 현실 사이를 넘나들었다. 잠자지 않고 끄적이지 않을 수 없는 밤이면 진실의 부스러기를 찾아 헤매었다.
나는 값진 진주를 찾아 무서운 바다로 뛰어들어야 했고, 먼 산에서 금빛이 반짝일 때마다 힘겨운 등산을 계속해야 했다.
그러나 나의 손에는 진주도 황금도 쥐어지지 않았다. 내가 금빛 반짝이는 산봉을 향하여 기를 쓰고 오른 끝에 발견한 것은 햇빛을 반사하는 사금파리에 불과했다.
내가 도달한 정상의 그 자리, 분명히 보석이 영롱하게 빛나던 그 자리엔 보잘것없는 사금파리만이 저무는 석양빛에 반사하고 있었다. 나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믿고 소망했던 진실이 결국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절망하고 절망하다가 나의 그 착각이 진실임을 알게 되었다. 나에게서 욕심이 빠져나가고 깨달음이 왔다.
나에게 허무가 밀려왔다. 허무는 죽음의 늪으로 끝없이 밀려왔다. 생각하고 생각하고, 절망하고 절망하던 나의 눈앞에 깨어진 유리 조각과 색종이가 보였다. 산산이 부서져버린 프리즘 곁에 착각의 시만 남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의 시는 내 죽음 가운데 태어난 유복자인 셈이다. 낡은 언어의 죽음을 통하여 새로운 시가 태어나기 때문이다. 나는 살아남은 몇 편의 시를 붙들고 죽은 내 삶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셈이 되었다.
내 시어(詩語)가 질식해 죽을 때 나의 삶이라는 것도 운명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나의 시는 내 삶의 파편에 불과한 것 같지만, 떨어져나간 상처의 아픔을 내 시가 대신한다.
어미 잃은 자식 같은 내 시를 통하여 나는 위로받는다. 나의 시는 착각의 순간들을 포착한 프리즘의 꽃무늬들이지만, 가식 없는 분신이기 때문에 위안을 얻는다. 이제 나는 나의 시를 욕되게 하지 않을 것이다. 바보의 행진은 끝났고, 병신춤도 끝났다. 이젠 시나대에 바람 스치듯 서늘하게 살고 싶다.
앞으로 시골집 대청마로로 넘나드는 그 바람같이 서늘한 시만 쓰고 싶다. 원추리 그늘지는 돌담에 사른거리는 햇살 같이 다사로운 시를 쓰고 싶다. 사랑도 미움도 아랑곳없이 빙그레 미소 짓는 석굴암 대불같은 시를 쓰고 싶다.
그런 시를 쓰노라면 나의 삶도 철이 들겠지. 박애(博愛)와 자비(慈悲)와 인심(仁心)으로 뭉쳐진 돌이 되어 침묵대월(沈黙代越) 로 시다운 시 한 편은 남기고 죽을 수 있겠지……
나의 시는 내 삶의 부스러기지만, 빛을 내는 부스러기임에 틀림이 없다. 청(靑)은 남(藍)에서 나지만 남(藍)보다 푸르고, 얼음은 물에서 나지만 물보다 차갑듯이, 나의 시는 나에게서 나지만 나를 살려낼 것으로 믿는다.
이것은 내 삶의 마지막 보루인 셈이다. 내 시는 바로 내 인생의 길동무이기 때문이다. 내 인생의 길동무들 중에는 도중하차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먼저 떠난 이도 있고, 이탈하는 이도 있어 외로운 가을 길을 쓸쓸히 걸어가는 중이다. 그러나 나의 시는 내가 먼저 배반하지 않는 한 나를 배반하는 일이 없고, 도중하차하는 법이 없다.
그뿐 아니라 내가 이 세상을 하직한 후에도 나의 울림으로 남을 것이다. 얼마 안 되는 삶을 살아가게 될 나보다도 오래 남아서 울림으로 이어질 나의 시를 애지중지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이 남루한 시를 붙들고 신앙처럼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나는 앞으로도 기도처럼 시를 쓸 것이다. 나의 시를 진정으로 이해하여 줄 그 한 사람의 진실한 애독자를 위해서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시와 혼인하여 살아갈 것이다.
나의 시와의 결혼생활은 내가 나를 빨래하는 시간의 연속이다. 나의 시와 나의 생활이 나를 치대며 빨래하여 옥상의 하늘 높이 휘날리게 한다.
내가 고난을 통해서 탄생시키는 한 편의 시는 내 영혼을 빨래하여 옥상의 하늘 높이 휘날리게 한다.
내가 고난을 통해서 탄생시키는 한 편의 시는 내 영혼을 빨래하여 인생을 아름답게 하는 세탁비누요 촛불 다리미다. 나는 나의 시를 통해서 때 묻은 나를 빨래하고 구겨진 나를 다리미질하여 곱게 펴나간다.
이러한 의미와 차원에서 너의 시는 나의 구원자라 할 수 있다. 나의 시는 나의 신앙이요 메시아다. 신(神)은 사람을 낳고 사람은 신을 표현하듯이, 나는 시를 낳고 시는 나를 나타내는데, 이러한 뜻에서 나의 시는 나의 독생자인 셈이다.
비록 마구간에서 태어난 나의 시이지만 나는 나의 시를 처마 밑에 재울 수는 없다. 나의 시는 남루하지만 사내답고 가식이나 엄살을 모르는 까닭에 내가 보아도 호감이 갈 때가 있다.
나는 시와 운명을 같이 한다. 자나 깨나 시를 옹호하면서 살아가는 나의 삶은 바로 시와 삶의 회전목마(回轉木馬)다. 절대사랑을 추구하며 시와 함께 오르내리는 회전목마인 셈이다.
1987년 10월 황송문(黃松文)
책이름 / 노을같이 바람같이
채 갑 / 2000원
전국공급처 / 서울특별시 종로구 낙원동 280-4
(건국빌딩 1-204호)
전화 735-3627, 732-0527
초판인쇄 / 1987년 10월 10일
초판발행 / 1987년 10월 20일
저 자 黃松文
발행인 李升用
발행처 / 弘益出版社
출판등록/1984년 5월 21일(제1호)
충남 서산군 서산읍 동문리 10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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