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송문 시전집

꽃잎 -제7시집-

SM사계 2010. 7. 9. 21:36

 

 

黃松文 詩集

 

꽃잎

 

차례

 

사막을 거쳐 왔더니

알래스카 1

알래스카 2

화음(和音)

나이아가라

김치에게

불꽃

럭키산맥

로스앤젤레스 해장국 1

로스앤젤레스 해장국 2

그랜드 캐년

조선소(造船所) 2

사막을 거쳐 왔더니

마이애미 소라

덴버리의 빛

내 가슴 속에는 7

꽃이 질 때는

꽃잎

간장 2

앙금

돌 3

프리즘 1

프리즘 2

환(幻)

원추리꽃

열락(悅樂)의 해

어느 날 밤에

낙서(落書)

성묘(省墓)

눈썹

공법(工法)

꽃이 질 때는

내 가슴속에는

5월 서정(抒情)

소리의 거울

명암(明暗)

배설의 시

내 가슴속에는 8

무제(無題)

자서(自敍)

묵시록(黙示錄)

약혼녀

화투(花鬪)

잔해(殘骸)

고향예배(故鄕禮拜)

초가를 곡하노라

해바라기

수틀 속의 꽃밭을 보듯

너 어디 있느냐

수(繡)틀 속의 꽃밭을 보듯

도시(都市)

씨나락 까먹는 소리

우상편(羽象片)

민들레꽃씨 날리듯

쑥의 나라 선비여

立春大吉을 꿈꾸는 도시

하나님 전상서

청평(靑平)

예술의 샘

대숲에서 솟아나는 죽순같이

사군자(四君子)

청보리頌

삼동(三冬) 가시나무꽃

꽃다운 꽃처럼

인생의 빨래

엮고 나서

알래스카 1

알래스카의 하늘과 산과 바다는

물음표로 가득했다.

물어도 물어도 끝이 없는

물음표와 물음표……

알래스카의 구름과 눈과 파도는

느낌표로 가득했다.

느껴도 느껴도 끝이 없는

느낌표와 느낌표……

밤이 없는 알래스카의 여름은

불타는 태양으로 가면을 벗는다.

가식의 옷을 벗고

구리빛 등살을 드러낸다.

곰이 앞발로 물고기를 건져먹듯

시원(始原)을 건져먹는

내 의식(意識)의 어망(魚網)……

알래스카는

내가 잡은 물고기의 싱싱한 회다.

관념의 껍질을 벗기고

고추장을 찍을 때

일제히 몰려온 물음표 느낌표가

만선(滿船)으로 가득했다.

*1987년 7월 12일, 미국 알래스카 코디악 섬에서

알래스카 2

나는 바라본다

박제된 곰을

곰 같은 민족을 바라본다.

코 큰 사내도 바라보고

코가 빨간 사내가 입맛을 다시는

수천의 물개도 바라본다.

빙신이 녹아내리는

빙하의 물고기를 물고 가는

갈매기도 바라보고

갈매기를 채어가는

독수리도 바라본다.

50개의 별을 가진 독수리의

눈을 가진 침입자와

사라지는 에스키모를 바라본다.

사냥하던 알레우트와 아사바스칸을

가두어 사냥하는 침입자를 바라본다.

백인 같은 눈이 산을 타고 앉았고

원주민 같은 물이 그 아래 누워있다.

막대로 뜬구름 가리키는 스님같이

그 위를 떠도는 구름은 방관자

보고도 본체만체

사팔뜨기 눈을 하고 있다.

*1987년 7월 14일, 알래스카 코디악 섬에서

화음(和音)

태양을 모시고 사는

바다의 악보 위를

반월이 미끌어져 간다.

검푸른 오선지 위에

반짝이는 음표는

시원(始原)의 모음과 자음,

바람과 파도와 물비늘

건반을 두드리는 손가락 끝에

구름 속 무지개 뻗쳐 흐른다.

*1987년 7월 26일, 미국 보스턴 글라스터 앞바다 대서양에서

나이아가라

나는 바라본다.

하나님의 메시지를

순식간에 살려내는 수십억의 인류를.

까물치며 처박히며 살아나며

내지르는 인류의 함성 소리

그 말씀의 우레 소리를

나는 환장하게 바라본다.

말씀의 우레는

물기둥이 되고 불기둥이 되고 무지개가 되고

사랑이 되고 생기가 되는

언어의 알맹이,

부르는 소리를 바라본다.

부르는 소리는

신비의 베일 저쪽

풀어지는 잠옷 속에

떨어져 내리는 여신의 소피소리

해산의 고통과 희열을 바라본다.

기억만년을 안으로 다스리다

터져 나오는 소리,

하나님의 너털웃음과

그 속에 숨겨진 울음이

통곡이 되어 눈물이 되어

환장하게 쏟아져 내리는 소리

떨어지고 부서지고 사람이 되는

물의 낙법(落法),

죽었다가 다시 깨어나는

천주(天宙)의 우레 소리를 바라본다.

*1987년 7월 29일, 나이아가라 폭포 앞에서

김치에게

여보게

오랜만일세 그려!

정말 오랜만일세 그려!

외국 말만 떠도는

타국을 떠돌다가

제넬 만나니 이젠 정말 살겠네 그려!

말도 다르고 입맛도 다른

외국 사람들 틈에서

자넬 만나니 눈물겹게도

도봉산이 그리워지고

한강물이 그리워지네 그려!

여보게

이게 뭔가, 뭐겠는가

지진처럼 깊은 데서 찡하게 울려오고

가슴이 터질 것만 같은 이게 뭐겠는가.

할아버지는 짚신을 삼으시고

할머니는 물레를 돌리시던 곳

맨발 벗은 어머니가 이삭 줍던 곳

그곳을 꿈엔들 잊겠는가.

여보게

자네는 내 고향의 순수 그대롤세 그려!

세상 어디를 가거나

자네 없인 못살겠네 그려!

어머니가 포기포기 담그시던

자네의 그 내 나라 맛을

어디 꿈엔들 잊겠는가.

내사 내사 못 잊겠네 그려!

*1987년 8월 3일, 미국 시카고 한인교회에서

불꽃

시카고에 해가 지면

보석 상자가 열린다.

꿈길로 가는 시어슨 타워의

103층 창문에 빨려드는

별떨기 모자이크에

이야기는 새록새록 풀려나고

호심(湖心)에 잠기는 신부의

그윽한 눈과 쪽 고른 이빨이

라이트 불빛에 반짝거린다.

보석으로 반짝이는 신부는

까만 신랑의 품에서

꽃베개 베고 잠이 든다.

*1987년 7월 30일, 미국 시카고 시어슨 타워에서

럭키산맥

럭키산맥은

풀밭에 누워있는 인디언 처녀와

버티고 서있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정열 덩어리.

얼음에 식힌 몸둥아리 일어나면서

안개를 뿜어낸다.

깃털 꽂은 처녀와

옷통 벗은 총각의

모닥불 향연

얼근한 노을에 살이 익는다.

산맥은

비스듬히 누워있는 처녀들과

우뚝우뚝 서있는 총각들이

도가니 채 들이마신 포도주 빛깔,

막대기 두드리며 소리 지른다.

풀잎으로 꿈틀대는 처녀들과

깽깽이 뛰는 총각들이

목덜미 가슴팍 허벅지마다

지층(地層)으로 물든 문신(文身)이

차창에 흔들린다.

*1987년 7월 31일, 미국 럭키산맥을 넘으며

로스앤젤레스 해장국 1

미국에서 해장국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행복이다.

보는 것마다 크고 신기하여 감탄할 겨를도 없이

높은 콧대에 꺾여 지내다가

날개 접고 찾아든 코리아타운에서

해장국을 훌훌 마시다가

태평양에서 대서양에서

큰 고기를 낚아 올리고

KAL기를 탈 수 있다는 것은

백의민족(白衣民族)의 광영이다.

가는 곳마다

살기 위해 먹는 것 같은 햄버거

맥도널드 햄버거에 지겨워 지겨워

김치와 된장찌개 불을 켜고 찾다가

만나게 된 해장국은

보글보글 끌어 제키는

어머니의 가슴……

아리랑 타령을 부르다가

도라지 타령을 부르다가

속울음 게워내며 어깨 짜고 울다가

속아픈 울음을 퍼질러 울다가

손흔들어 보내고 떠나는

인정 많은 내 나라 사람들,

해장국 뚝배기 같은 내 나라 사람들……

*1987년 8월 3일, 로스앤젤레스에서

로스앤젤레스 해장국 2

해장국을 먹어본 사람은 알게 됩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6․25 사변 때

미군을 따라와서

미국 말만 지껄이고 살아도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

뚝배기에 서리는 훈김같이

아슴푸레한 기억 속에서

아물거리다 사라져가는

1․4후퇴 때의 어버이……

그 동지섣달에 제사를 지냅니다.

저는 그 때

철모르는 아이였답니다.

어머니 등에 엎여온 저를

양아버지가 미군 배에 실었답니다.

아슴한 기억 속에 살아나는

부르는 소리와

그 뒤를 이은 총소리……

어수선한 레이숑 박스 곁에 노닥이는

쑈리 최와 따링 누나

뱃고동 소리를 들으며

양아버지의 나라로 왔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미국 음식을 먹고

미국 말을 지껄여도

동물원 곰같이 멀리 하늘 보는 향수

가슴 속 밑바닥에서부터

더운 김처럼 피어오르는

어머니 등허리의 땀 훈김

그 아늑한 잠의 꿈속

고향을 잊지 못합니다.

*1987년 8월 3일, 로스앤젤레스에서

그랜드 캐년

피맺힌 돌 속에

침묵하는 말이 새겨져 있었다.

신(神)의 부름을 받은

콜로라도 강물이 어루만지기를

천년 만년 억년

그리고 수 십 억년……

신의 장색(匠色)들이

코피를 풀어 헹구면서

출렁거려 만들어낸

기묘한 조각품 속에

문신이 새겨져 있고,

그 아픈 문신 속에는

계시된 말이 새겨져 있었다.

피맺힌 돌 속에

침묵하는 말이 수십 억 년을……

- 1987년 8월 5일, 그랜드 캐년에서

조선소 2

땜질하고 있어요

가다듬고 있어요

색칠하고 있어요

하얀 소금 몰고 오는

바닷가 언덕에서

땀흘리고 있어요

철판을 누덕누덕 기워도

내일에 달려나갈 꿈이 있어요

내 가슴 속 꿈의 산실에는

진수식을 마치고 달려나갈 꿈이 있어요

내 가슴속 꿈의 산실에는

진수식을 마치고 달려나갈

태평양이 있어요

대서양이 있어요

인도양이 있어요

오대양 육대주가 펼쳐지고 있어요

하늘과 바다 사이

신기루가 있어요

새소망 합창 소리가 들려오고 있어요

- 1987년 8월 8일, 바이올 라 바트러의 앨리배마 조선소에서

사막을 거쳐왔더니

사막을 거쳐왔더니

쓰레기 같은 잡념이 타버렸어요.

사막을 거쳐왔더니

갈증 심한 욕심이 타버렸어요

사막을 거쳐왔더니

번뇌의 박테리아

번식하던 미움이 타버렸어요

사막을 거쳐왔더니

타버린 생각의 잿더미에서

살아나는 그리움……

사막을 거쳐왔더니

그리움은 모래가 되어

바람결에 묻혔어요

- 1987년 8월 9일, 마이애미 사하라 호텔에서

마이애미 소라

하늘 가득히

마음을 비우고 있어요.

바다 가득히

마음을 넓히고 있어요.

모든 것 아낌없이 다 빼어주고

빈 껍질로 돌아앉아 별을 담는

소라의 아픔……

하루.

이틀,

사흘……

빈 가슴에 바람이 들어

귓속 윙윙 울고 있어요.

- 1987년 8월 10일, 마이애미 해변에서

댄버리의 빛

캄캄한 밤하늘에

하나의 별이 떠있었습니다.

하나의 별 곁에

또 하나의 별이 떠 있었습니다.

그 두 별의 주변에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샘물을 길어 올리듯

반짝이는 별떨기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습니다.

남루한 밤하늘에

별이 반짝일 때

살아나는 눈동자를 보았습니다.

댄버리 교도소 담장 아래서

멧새새끼처럼 잠을 자다가

동트는 새벽 꿈에 고향을 보았습니다.

별을 찾아다니며

그 발자취를 더듬다가

아침 햇살을 받으며

햄버거를 먹다가 목이 메어

속아픈 눈믈도 흘렸습니다.

내가 우러르는 하늘

청청 하늘에

하나의 태양이 떠있었습니다.

늘 푸른 하늘

내 마음의 고향에.

- 1987년 8월 13일, 댄버리에서

내 가슴속에는 7

내 가슴속에는

한 척의 배가 있다.

구름에 달 가듯이

파도를 몰고 가는

한 척의 뉴 호프가 있다.

햇살의 미소와 바람의 애무

아버지의 눈짓이 있고

어머니의 귓속말이 있다.

번개 비바람 벼락치는

대서양 망망대해(茫茫大海)에서 비를 맞는

이 나라 朝鮮의 風岳이 있다.

솔뿌리가 있다.

그 솔뿌리 곁에서 비를 맞는

내가 있다. 松文이가 있다.

순간에서 영원으로 질주하는

새 희망의 나라가 있다.

- 1987년 8월 18일, 태평양 상공에서

꽃이 질 때는

꽃잎

간장 2

앙금

돌 3

프리즘 1

프리즘 2

환(幻)

원추리꽃

열락(悅樂)의 해

어느 날 밤에

落書

성묘(省墓)

눈썹

공법(工法)

꽃이 질 때는

꽃잎

내가 바라볼 때 너는 피어났고

내가 외면할 때 너는 시들었다.

나의 눈길에 너는 불이 붙었고

나의 손길에 너는 악기처럼 소리를 내어

꿀벌들을 불러모았다.

네가 잉잉거리는 벌떼들을 불러들일 때

별은 빛나고,

내가 너의 꿀물에 젖을 때

달은 부끄러워했다.

네가 피어날 때 나는 살고

네가 시들 때 나는 죽었다.

간장 2

내 시는 아파요

너무너무 아파요

당신이 뿌려준 소금

썩을 대로 썩은 가슴

너무너무 아파요.

내 시는 쓰려요

너무너무 쓰려요

충혈된 눈을 맑혀 내는

당신의 준엄한 말씀

너무너무 쓰려요.

그래도 그래도

동치미 같은 구름 둥둥 뜬

하늘에 입을 크게 벌려도

토속(土俗)의 항아리 뚜껑 덮인 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인고의 세월

맛들 때만 기다려요.

썩음으로 죽어 사는 마음에

당신이 볕들면

뜨거운 눈물, 펄펄 끓는 사랑

당신 손에 거듭나는 기쁨

한 종발의 짭짤한 삶을 위하여

사계(四季)를 하루같이 기다리는 시,

내 가난한 시, 춥고 배고픈 시

너무너무 아픈 시.

우리 아픔 뒤에

우리 썩음 뒤에 만나요

우리 죽음 뒤에 다시 살아요.

밖에는 꽃이 피고 잎이 지고

철새들이 지나가도

눈감고 혼곤한 잠을 다스려

맛으로 거듭나는 시가 되게 해요

아픔과 쓰라림이 거듭나게 해요.

앙금

떠날 때는 말이 없어도

가슴엔 물굽이 굽이굽이

싸아하니 빠져 달아나는

울둘목의 썰물 소리……

그렇게

보내고 나면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앙금이 쌓여

비단 같은 무늬를 이루다가……

노을이 환장하게 타오를 때면

그 앙금이 그리움이 되어

밀물로 밀물로 밀려와서는

뚫린 상처를 재우다가……

3

말하지 말자.

말은

깊은 잠에 재워두고

입은

천년 후에나 열기로 하자.

말하는 기교를 따르지 말고

말하지 않는 법을 배우기로 하자.

말은

믿을 수 없는

불완전 풍사(風詞).

차라리 바위가 되어

오랜 침묵으로 다져두었다가

한 천년 세월이 흘러간 후

돌 같은 말 한 덩이

땅 깊이 심어 두고 떠나기로 하자.

프리즘 1

유리조각을 본다.

시멘트 바닥 위에 깨어져 나간

내 상처 같은 거……

산산하 부서진 관념의

창 밖에 흩어진

색종이를 바라본다.

빛이 소용없는 잔상(殘像)에서

사라진 나의 꿈을 본다.

나의 꿈은

색종이에 불과했다.

꺾인 빛이 꽃피우는

유리 대롱 속처럼

착각의 순간은 황홀했다.

꽃 속의 벌이

꿀을 빨 때처럼,

공상의 날개는 찬란했다.

프리즘 2

나의 하나밖에 없는

프리즘은 조각났다.

오직 하나밖에 없는

마지막 꿈은 사라졌다.

나의 꿈은

색종이에 불과했다.

시멘트 바닥에 부서져 나간

유리조각과 함께 흩어진

색종이에 불과했다.

삼각의 유리대롱 속을

들여다볼 때처럼,

굴절하는 빛살에 취해 살 때가

행복했다.

꽃 속의 벌이

꿀을 빨 때처럼,

꿈조각을 어루만지며

프리즘에 취해 살던 때가 행복했다.

(幻)

그대는 나의 골짜기

물이 되어 그대 타고 흐르다가

불새가 되어 천길 만길

채어 날으리.

푸른 산 골짜기 골짜기

꿈속을 날 듯

하루를 천년 같이 펼쳐 살으리.

햇살이 되어 꽃을 피우리

단풍이 되어 불을 지피리

꽃 속을 헤매는 벌떼 같이

꿈속에 빠져 하루를 살으리.

하루를 천년 같이

천년을 하루 같이

굽이굽이, 굽이굽이 펴며

골짜기 활활 불을 지피리.

원추리꽃

풀어헤친 머리카락 치렁치렁

손끝만 까딱이는

중국 여인,

밤마다 야들야들 바람을 부른다.

홍등(紅燈)처럼 서있는 여인들의

홍등가(紅燈街)……

싸늘한 가슴을 덥히기 위해

분칠한 얼굴을 쳐들고

손끝으로 바람을 잡는다.

비단옷 휘감고 웃다가

문득, 뒤돌아 보는

물먹음은 눈빛,

밤이면 저만치

손끝만 까딱이는

부끄러운 몸짓,

황적색 자흑점의

머플러가 나풀거린다.

- 1985년, 타이페이에서

열락(悅樂)의 해

언제나 황송한

내 이름 석자가

관세음보살상 속에 살아 있다.

나면서부터

빈주먹 쥐고 나온 몸에

욕심이 붙어

온갖 집착에 끌려 다니다가

빈손으로 오른 산에서

내 정신을 만나

내 이름자를 새겨 넣었더니,

극락의 나무 가지에

해를 따먹은 새가 내려와서는

온종일 지저귀더니,

푸르게 열린 하늘

깨어진 얼음장 사이사이로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언제나 황송한

내 이름을 찾아온

열락(悅樂)의 해가 비치네.

어느 날 밤에

별들이

랑데부를 하고 있었다.

神의 손가락에서 풀려 나온 달빛에

떨어져 내리는 별떨기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상현(上弦)달 아래

비스듬한 개나리 꽃그늘

그 은밀한 타선(唾線) 속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별과 꽃과 나비

스케이팅 월츠의 선을 그리며

수정 같은 유리 바다를

미끌어지고 있었다.

우주를 빨아들이는

입술의 기운은

열오른 조개탄 난로,

충만한 윤선(輪線)에

해일(海溢)이 일고 있었다.

꿀벌들 잉잉대는

청밀(淸蜜) 속 꽃가루

은하수가 빨려들고 있었다.

落書

인생은 낙서다

지우고 싶은 회한(悔恨)이다

썼다가도 지우고 싶은

칠판의 글씨들이다.

검은 칠판에

하얗게 줄지어 가는

밤낮의 곤충들……

모였다가 흩어지는

생활의 출퇴근,

가랑잎이다.

배가 고프면

발톱으로 거름자리 후비다가

생각을 쓸어모으며

궁리하고 궁리하고

미궁(迷宮)에서 잠이 깬다.

가랑잎처럼

생각을 태우면서 후회하는

내 인생은 낙서,

내 삶의 껍질이다.

내 생활의 분필가루

내 인생의 부스러기다.

성묘(省墓)

석물(石物) 위에 술잔 올려놓고 절을 합니다.

생전엔, 살아생전엔, 따뜻한 적을 좋아하셨는데…

호박 적을 올려놓고 따른 술잔에 구름이 찾아왔습니다.

생전엔, 살아생전엔, 풍년가를 잘 부르셨는데…

솔바람 소리에도 허무가 밀려오는

뜬구름 세월에 매무시를 바르게 합니다.

생전엔, 살아생전엔……

흰옷을 입고 절을 하다가 올려보는 하늘,

목이 시린 하늘에 당신이 보여

술을 따르어 올리고 또 절을 합니다.

눈썹

눈썹 같은

초승달마저 없는 밤은 문둥이의 밤이다.

죄짓듯 머뭇머뭇

걸음도 주춤주춤

고향 찾는 문둥이,

완행열차에서 내린 문둥이의 밤이다.

성한 사람 곁에서는

밤에도 색안경을 쓰고 자는 문둥이,

눈썹 하나 보이지 않는 문둥이의 밤이다.

언제나

색안경을 끼고 사는

문둥이의 밤……

여인숙에서 하룻밤

계집을 끼고 자다가

몰매 맞고 쫓겨나는 문둥이의 밤이다.

공법(工法)

게오르규가 말한

반원형(半圓形)은 평화롭다.

고추와 목화와 숯과

이들을 엮어내는 금줄과

무덤은 평화롭다.

팥죽 끓듯 솟아올라

떼풀을 덮고 누워있는

무덤은 평화롭다.

금줄과 무덤 사이

반원(半圓)은 사랑스럽다.

구멍과 꼬챙이 공법에서

문명이 찬란하고

문화가 꽃피다가

그것으로 망하는

불가사의……

창세기와

계시록 사이에는

많은 건축공법이 있지만,

그 중 제일은

사랑이 장작을 태우는

아궁이와 페치카,

불을 머금은 화덕이 있었다.

꽃이 질 때는

꽃이 질 때는

곱게 지도록

놓아두는 게 좋아요.

봄 햇살에 녹아 내린

눈잎 같이

흙 속에 잦아들도록…

세상 모르는

영원한 잠에 빠져

침묵하도록…

속이 깊은

대지의 벙어리 되어

無念으로 無想으로…

바람은 땅속에 재우고

피리는 흙 속에 묻어두어요.

아무 걱정도 없이

시나브로

대자(大慈)의 손바닥 위로 꽃이 지도록

日月에 맡기는 게 좋아요.

꽃이 질 때

슬픔은 구름 너머 날려보내고

아무 말 하지 않는 게 좋아요.

내 가슴속에는

오월 서정

소리의 거울

명암(明暗)

배설의 시

내 가슴속에는 8

무제(無題)

자서(自敍)

묵시록(黙示錄)

약혼녀

화투(花鬪)

잔해(殘骸)

향(鄕)

고향예배

초가를 곡하노라

해바라기

오월 서정 2

오뉴월 보리밭 밀밭은

여의도 광장과 워싱턴 모뉴먼트 광장을 가득히 메운

수백만 군중의 환호성―

푸른 하늘에 푸른 소리를 띄워 오린다.

알을 품던 노고지리는

애드벌눈처럼 떠오르고

지줄뱃쫑 지죽뱃쫑 지줄지줄 뱃쫑―

영어와 중국어와 일본어와

불어와 독일어와 소련어와

이 세상 모든 말들을 발음하며

서울올림픽 꿈에 부푼다.

여고생들의 종아리처럼

통통히 살찐 보리밭 사잇길을 거닐면

마음엔 스멀스멀 뭉게구름이 피어오르고,

사랑을 일깨우는 바람이 지나면

보리밭 밀밭은 일제히 팔을 올리고

하늘로 하늘로 만세를 부르며

유연한 허리들 일렁일렁 일렁이며

인파(人波)의 물굽이 구비치는 매스게임

젊은 파도 할렐루야 들을 달린다.

소리의 거울

이슬을 이고 사는

토란잎에서는

푸른 소리와 하얀 소리가 도르르 울린다.

풀물 든 가슴엔 바이올린이 울고

달빛이 흐느끼는 그 소리 곁에서

피아노가 하얗게 일어선다.

푸른 하늘에

하얀 달,

떼지어 나는 물총새

날개 끝에

물 속의 달 그림자 도르르 울린다.

명암(明暗)

도깨비방망이 보이지 않은데

금나오라 똑딱 금 나오고…

은나오라 똑딱 은 나오고…

결혼식장에서

깜둥이 신랑이 나오고,

흰둥이 신부가 나오고,

똑딱 하는 순간에

물방개 속으로 들어가고

쏜살같이 사라지는

한낮의 도깨비 장난.

오늘날 낮도깨비 장난은

황소눈깔을 한 깜둥이 신랑과

목이 가느른 흰둥이 신부의

신혼여행

신혼의 택시가 사라지듯

하늘로 쏜살같이 내리꽂히는

서울 밤의 유성(流星)은

눈이 큰 깜둥이 사내

첫날밤의 사정이다.

한강변에 내리비치는

C字型 가로등 불빛은

불독 입술 찢어지게 웃는

미군 신랑의 헤픈 웃음,

허옇게 드러난 이빨 빛이다.

배설의 시

애국자는 묶여 들어가고

매국노는 고대광신에서 잘도 살더라.

석유를 먹은 불도저가

순수한 풀잎을 깔아뭉개더라.

지사(志士)의 자식은 눈만 겨우 살았는데

그 앞을 활개치는 살살이 발발이…

춘향이 변사또에 차를 나르는

다방은 플라스틱 꽃만 만발하고…

푸른빛을 잃은 하늘 아래

가로수는 뽑혀 나가고

신문지가 바람에 날리더라.

몸서리치는 오자(誤字) 속에서

꿈꾸는 젊은이와

환상을 보는 늙은이가

경련을 일으키는

검은 박쥐들의 골목,

밤낮이 굴러 떨어지더라.

내 가슴속에는 8

내 가슴속에는

봄 햇살 소리,

아침 병아리

물 넘기는 소리…

검은 눈에 고인 하늘

그 속에 비낀 구름,

조개 껍질에 고인 물을

퉁겨보고 올려보고,

매화꽃 그늘에서

물 넘기는 소리…

내 가슴속에는

발자국 소리,

아침 병아리

나들이 가는 소리…

눈 녹은 보리밭

발자국에 고인 물을

뿅뿅 물고 구름 보고

뿅뿅 물고 하늘 보는

노란 봄 병아리

나들이 가는 소리…

무제(無題)

바다가 변하여 뽕나무밭이 되고

뽕나무밭이 변하여 도시가 되더라.

나비를 모르는 번데기 장수는

정육점을 차리고 톱날을 갈더라.

장롱에 갇힌 내 오버는

깊은 잠에 빠지고,

주머니 속의 만년필

잉크의 늪이 말라붙더라.

뽕나무에 오디가 익듯

전등은 밤에 익고,

기억의 사금파리들은

불빛을 먹고 귀가(歸家)하더라.

자서(自敍)

나는 차라리

피뢰침이 되고싶다.

천둥이 먹구름 속에서 울 때

눈물을 받아 마시고,

터지는 핏덩이, 불을 삼키는

피뢰침이 되고 싶다.

주님을 찌른

무지의 창이 아니라,

하늘을 목놓아 우짖는

십자가 머리 위의 가시관이 되어

번갯불 삼키는 창자 속 깜부기로

안쓰러운 눈물을 뿌리고 뿌리고,

눈물의 골고다 골고다

골고다 언덕 저 멀리

십자가 지고 오시는 주님에 눈멀어

불 머금은 피울음을

천년이고 만년이고 울고만 싶다.

묵시록(黙示錄)

하늘을 찌른 교회의

삼각지붕을

나는 싫어했다.

삼각지붕

위의 십자가

위의 피뢰침은

빗속에서 온몸으로 울었다.

관원의 창을 닮은

피뢰침이 서러워

하늘로 하늘로 목을 늘여 울었다.

창 끝에 찔린

하늘이 서러워

더운 눈물 선혈(鮮血)로 울었다.

울다가 울다가

목이 쇤 종소리

깨어진 채 녹을 벗기며 울었다.

약혼녀

밤마다 꿈길을 밟고 오는

그대

피아노 소리―

가슴을 두드리는 그대,

손가락 끝 가는 곳마다

해초 내음이 풍겨 나오고,

모닥불을 끌안는

호수의 눈빛,

뒹구는

달빛

불붙는

은방울 소리―

별밭에 내리는 능금바람

꿈길을 밟고 오는

그대

입시울 웃음―

화투(花鬪)

꽃이 싸우는 것은

인간들의 세상뿐이다.

이 세상에

돈이 있기 때문이다.

돈을 먹겠다고 덤비는

속물들이 있기 때문이다.

돈으로 꽃을 따겠다는 족속이나

꽃으로 돈을 노리는 족속이나

모두가 불쌍한 속물들이다.

한 밤 중

십팔 광땅 잡은 놈도

해장이면 꼴불견이다.

식전에 해장국 흘려보내듯

흘려보낸 인생.

충혈의 눈을 들여다보는

흰 창과 검은 창 사이.

밤낮을 씨름하는

꽃놀음이다.

잔해(殘骸)

갯벌 위에

한 그루터기의 잔해가 꽂혀있었다.

팔을 벌리고 있었다

쳐들린 한쪽 팔과

한쪽 다리 위에

물새들이 울고 있었다.

모래톱에 꽂힌

팔과 다리의 주변에서

게들은 숨어들고 있었다.

언젠가 미쳐버린 해일에

사내를 기다리다 지친

여인의 혼백인양

뻑뻑꾹 뻑뻑꾹

뻐꾸기 운다

뻐꾸기가 운다.

골짜기,

망부의 한 피로 쏟으며

홀어미 혼백이 홀로 운다.

나는

쓰다듬는다

갯벌 위의

한 그루터기의 잔해를 어루만진다.

해일에 밀려온

죽음의 등걸

검은 뼈다귀의 그림자를.

- 영종도 진등 해변에서

(鄕)

꿈속에 우는

뜸부기 소리

논두렁 우는

뜸부기 소리

가슴에 우는

뜸부기 소리

고향예배

모자를 벗고

돌아서서

절을 합니다.

눈을 감고

초가집을 그리고

어머님 얼굴을 그려봅니다.

눈을 감고

눈으로 그리는 얼굴

창호지에 등불이 흔들립니다.

모자를 쓰고

별을 올려보다가

모자를 벗어들고

또 절을 합니다.

초가를 곡하노라

초가야, 초가야, 정든 초가야. 비비새가 비비비비 뛰어 놀며 노래하던 대밭머리 하얀 연기 얕게 깔리던 꿈속의 마을 아름아름 아슴히 눈뜬 초가야. 날 어쩌라고 모조리 사라졌느냐. 가난해도 인정이 많아 옷고름에 눈물 꼭꼭 찍어내던 이웃들의 훈김이랑 감자랑 강냉이 푸짐한 별밤에 오순도순 깊여간 이야기 끝없이 구수한 숭늉 내음 피어오르는 흙벽담 모퉁이 봉숭아 꽃물 손톱에 물들이던 앵두나무 우물 속 깊고 깊은 샘물을 퍼 올리는 두레박물 바가지의 조상적 대대로 내려온 소박한 인정 다 어디 두고 사라졌느냐.

초가야, 초가야, 정든 초가야. 밤이면 지붕에 소복의 박꽃이 피고, 흥부의 박이 배부른 사랑채 아궁이에서는 청솔 가지 깻대 내음 푸릇푸릇 툭탁툭탁 소리를 데리고 울려나오는 흥부가랑 춘향가 들으며 문풍지 울 무렵 촐촐한 밤이면 건너 마을 단자(單子) 가지고 제삿집 찾아갈 때 뛰놀던 굴뚝새 푸드득 돌담 모퉁이 끄름을 지나 밤참 한아름 안고 돌아오면 창호지 버언한 대 이파리 사른사른 귓속말로 청명한 이슬방울 자자손손 총기 있게 키우던 뒤안의 장독대 정화수 거느리고 살던 초가야, 어쩌라고 날 어쩌라고 사라졌느냐.

해바라기

나는 당신의 무지개가 되고 싶다.

당신의 맑은 눈 속에 하늘 속에

당신의 정열 입술, 태양 속에

한없이 타오르고 풀어져

섞임으로 빛나는

일출(日出) 무렵의 강물같이

나아닌 내가 되어 당신이 되고 싶다.

당신 속에 내가 풀어지면 풀어질수록

아아, 하늘이 되고 태양이 되고

푸른 언덕 향일화(向日花)로 서서

온종일 섞이며 무지개 되는

당신의 아름다운 작품이 되고 싶다.

당신의 발등에 향료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씻겨드리는 심정으로

원고지 앞에서 펜을 잡으면

하나 둘 나온 별이 은하수로 출렁이듯

당신과 나, 우리 서로 한 몸으로 섞인다.

청춘의 정오(正午), 풋풋한 수림(樹林)을 위해

바다, 끝없이 넘실대는 율동을 위해

우리는 아낌없는 사랑으로 섞인다.

당신과 내가 우리로 섞일 때

글을 쓰고 문선을 하고 조판을 하고

이 세상 구석구석 비질을 하면서

하얀 가슴 검은 활자로 찍히며 섞일 때

우리는 숨쉬는 그림이 된다.

새벽 강물 소리를 들으며

햇님을 기다리는 향양화(向陽花),

당신을 머리에 이고 사는 것은

어머니가 새벽 하늘을 길어 오시듯

천지(天池)물 이고 사는 우리들의 숙명이다.

당신을 보기 위해서 새벽잠에서 깨어나는

꽃의 외침이 연약하다고

불도저로 깔아뭉개지 말라

진실을, 정의를 총살하지 말라.

우리들의 강물이 흘러간 후

쇠붙이는 녹이 슬고

풀잎은 일어나

가능의 씨알을 준비할 것이다.

태양이 어둠을 살라먹고 이어나듯

더러운 활자를 교정 볼 것이다.

물구나무로 재주부리는 활자,

모로 쓰러져 눈 흘기는 활자,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고

새치기 들어와 행세하는 활자를

보는 쪽쪽 어김없이 교정 볼 것이다.

새벽 강물 같은 맑은 정신으로

희미한 정신을 교정보리라.

그물을 버리고 나서는 어부처럼

당신의 무지개 되고자 하는 나는

모든 오자(誤字)를 지워버리고

새로운 활자로만 채울 것이다.

수틀 속의 꽃밭을 보듯

너 어디 있느냐

수틀 속의 꽃밭을 보듯

도시

씨나락 까먹는 소리

우상편(羽象片)

민들레 꽃씨 날리듯

쑥의 나라 선비여

立春大吉을 꿈꾸는 도시

하나님 전상서

청평

예술의 샘

대숲에서 솟아나는 죽순같이

사군자(四君子)

청보리頌

三冬 가시나무꽃

꽃다운 꽃처럼

인생의 빨래

너 어디 있느냐

너 어디 있느냐?

네, 저 청보리 밭에 있어요

삼동을 견디는 청보리 뿌리로

끈질기게 살아있어요.

당신의 나라로 눈을 뜨고 있어요

얼어붙은 땅 속에서 꿈을 꾸고 있어요

입춘대길을 노래하며 햇빛 받고 있어요

눈 더미를 뚫고 솟아오르고 있어요

푸른 싹 쏘옥쏘옥 눈을 트고 있어요.

바람은 언덕 너머 재워두고요

청보리 물결 일렁일렁 밀려오는

그 찬란한 매스게임을 위해

차진 흙 속에 뿌리 뻗고 있어요.

너 어디서 왔느냐?

네, 저 계해년 돼지우리에 썩고 있어요

청보리밭 거름이 되고 싶어서

짓밟히며 시달리며 썩고 있어요.

시궁창 토란(土卵) 잎이 아름답게 펴듯이

토란잎에 물방울이 영롱하게 빛나듯이

청보리 짙푸른 들녘을 위해

인류의 열병 분열식을 위해

온유하고 겸손하게 기다리고 있어요.

너 어디 있느냐?

네, 저 당신 곁에 있어요

당신께서 끌어올린 물고기의

그 비늘 끝에 있어요

번쩍이는 비늘의 찬란한 햇살 같은

당신의 눈웃음 속에 살아있어요.

노아의 방주 안에 살아있어요

아브라함의 땀방울 속에 살아있어요

모세의 지팡이에 살아있어요

예수의 십자가에 살아있어요.

참깨 밭에 내리는 햇살의 미소 같은

당신의 기쁨을 마음에 모셔두고

청보리밭 이랑에 거름 뿌리고 있어요.

사랑의 윤선(輪線)에 불꽃이 오가듯

잘 주고 잘 받는 돼지우리와 청보리밭,

목자(牧者)와 양의 무리, 그 안에 있어요.

(繡)틀 속의 꽃밭을 보듯

수틀 속의 꽃밭을 보듯

세상을 보자.

하나님이 비단실로 수를 놓으신

선화의 푸른 동산을 바라보듯

그렇게 세상을 보자.

맑은 눈을 가진 이들이 볼 수 있는

하늘나라 청실홍실 땅에 내려와

꽃이라는 꽃은 모두 피어나고

새라는 새는 모두 날아들어

노래가 되고 춤이 되어 어울어지는

선화의 봄동산을 바라보듯이

세상을 그렇게 바라보자.

나비와 노고지리와 청노루가

느릅나무 속잎 피는 산협의 굽이와

보리밭 이랑의 음계(音階)를 오르내리며

하늘을 모시고 사는 수풀을 바라보고

사른대는 나뭇잎을 햇살이 사랑하듯

아름다운 음빛깔 이끌어내는 지휘자가

합창단원을 바라보듯이

그렇게 그윽한 눈으로 세상을 보자.

작은 천사의 손가락이 건반을 두드릴 때

잔잔한 시냇물 피라미 떼 뛰어 놀고

은사시나무 이파리를 타고 내리는

달빛이 풀잎을 연주할 때

온몸으로 휘어지며 일렁이는 보리밭은

꿈길로 가는 파라다이스……

풋풋한 종아리와종아리와종아리와

유연한 허리와허리와허리와허리와

정직한 입과 슬기로운 눈, 너그러운 귀

수억천만 세포마다 불이 켜지는

그 수틀 속 별나라 꿈나라를 보듯

그렇게 세상을 보자.

하나의 태양 아래에서 꽃을 피우듯

하나의 꽃 곁에 또 하나의 꽃이 피고

하나의 새 곁에 또 하나의 새가 날면

꽃과 새는 또 하나의 모자이크가 되어

수틀 속엔 천태만상의 조화가 벌어지는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진다.

이 세상 꽃이라는 꽃은 모두 피어나고

이 세상 새라는 새는 모두 날아들고

이 세상 물이라는 물은 모두 솟아올라

꽃물결 춤추는 저 무지개 너머

세련된 지휘봉으로 끌어내는 화음(和音)…

샘물 같은 눈으로 하늘을 보듯

깨꽃 같은 눈으로 구름을 보듯

공작새 날개 펴듯 부챗살을 펴들고

아침해가 웃음꽃을 흩뿌려 날리는

해맑은 선화(仙和)의 눈으로 세상을 보자.

도시

플라스틱 꽃이 무덤을 장식하듯

플라스틱 꽃이 다방을 장식하듯

플라스틱 꽃이 사람을 장식하듯

하나님을 장식하고

하나님을 장사지내며

하나님의 무덤을 파는

십자가……

별같이 많은 십자가

별처럼 빛나는 십자가

별처럼 거룩한 십자가가

단군성조(檀君聖祖)를 살해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매달아 죽인

그 끔찍한

십자가 형틀이 뭐가 좋다고

자랑처럼 높이높이 꽂아 세우고

자랑처럼 목에 걸고 다니면서

훈민정음 총살하는

플라스틱꽃……

피에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도시가 이빨을 드러내고 있다.

씨나락 까먹는 소리

1

씨나락을 까먹느라고

강물은 피임을 선언했다.

흐늘어지는 달빛에

풀어지는 월경은

환장하다 미쳐버렸다.

썩어 가는 강물에

고기 떼는 떠내려가고

비린내는 코를 찔렀다.

풀잎은 불도저에 깔리고

녹슬어 가는 철제 위에

낮달이 창백하다.

기침을 콜록이는 바람결에

자지러지는 풀밭,

깨어나는 아이들마다

메스를 가하는 소리,

살점이 박쥐처럼 날아다녔다.

2

하늘은 황달이 들고

땅은 기근이 들었다.

논배미가 쩍쩍 갈라져도

씨나락은 아꼈었다.

도적이 들끓고

산모가 부황이 들어도

쑥으로 풀뿌리로 연명해온 목숨들도

씨나락을 아꼈었다.

잘난 아기는 역적 된다 빼앗아가고

못난 아기는 종살이 끌어간 뒤

풀죽은 말 이어가지 못한 채

춤사위 숨가쁘게 한풀이하다가

개풀어져 죽은 마당 구석을 파보면

영락없이 씨나락이 나왔다.

호남평야 차진 흙을 파보면

깨어진 옹배기, 꿈꾸는 씨앗 곁에

이를 문 해골이 나오나니

이 나라 씨나락 아껴온 백성이여

조상들의 피울음을 들으라.

오오, 그러나 들리는 소리는

가는 곳마다 씨나락 까먹는 소리,

참새들 짹짹짹

비비새 非非非

걸신들린 걸신들의

씨나락 까먹는 소리―

3

조선낫으로 달빛을 베는 농부가 있었다.

바람은 먹고사는 백성이 있었다.

달빛 타고 내리는 三冬을 베어버린

농부가 있었다.

농부의 밀짚모자는

언제나 하늘을 모시고 살았다.

땡감을 씹던 게오르규는

이 나라 농부의 얼굴에서

하나님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고생으로 늙은

농부의 주름살 같은 강산은

팔자 사나운 손금,

질긴 역사의 지문(指紋)이 어지럽다.

실탄짐 지고 개처럼 끌려 다니던

눈물의 골짜기 골짜기

죽음의 구덩이 구덩이

으스스 몸으로 우는 갈대를 헤쳐보면

씨나락이 말똥말똥 살아있었다.

4

말의 껍데기가 날려간다.

말의 진수성찬이 썩어나간다.

말의 살인 방화 약탈

말의 비둘기가 걸레쪽처럼 찢겨나간다.

말이 소용없는

말은 숨이 넘어가고

썩어 문드러지는 쭉정이들이

가식을 걸치고 키들거린다.

구겨진 신문지가

차에 깔려죽은 비둘기처럼 흩어진다.

비둘기를 파먹는

거리의 벌레들이 득실거린다.

반쯤 깨어진 소주병 속에

피흘리는 도시가 비웃고 있다.

말의 탁류가 흘러간다.

말의 오물(汚物)들이 떠내려간다.

말의 시기 질투 모략 중상

말의 행진곡 같은 장송곡이

씨나락 까먹으며 어스러져 내린다.

5

나는 바라본다.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꽃 속에 갇혀 죽는 말의 살풍경,

말의 장송행렬을 바라본다.

기독성서에

not 하나 빠져

‘따먹어라’가 되어버린

오식(誤植)을 바라본다.

두 개의 혓바닥이 낼름거리는

죽음의 도시,

붉은 팬티가 깃발처럼 나부끼는

눈 目字 건물에서

삐걱거리는 聖俗을 바라본다.

술집과 당구장과

교화와 여관,

젓가락을 두드리면서, 당구를 치면서,

손뼉을 치면서, 삐걱거리면서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바라본다.

나사 풀린 사람들이

혓바닥을 낼름거리며

나사처럼 꼬여드는 소리,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바라본다.

우상편(羽象片)

나의 눈으로 들어와

서서히

둥우리를 트는 구름,

마침내

하늘을 잃은

충혈(充血),

어둠 속 이데올로기.

푸른 하늘에 휘날리던

붉은 깃발과 완장,

그것은

구겨진 걸레쪽

너절한 비둘기.

하늘과 땅 사이에

타들어가는

폭약

핵의 징조.

마취 바늘이 핏줄을 찾을 때

동굴 속

어스러져 내리는

박쥐의 날개.

피구름

조각.

민들레 꽃씨 날리듯

하늘을 사모하는 민들레꽃잎이

꽃씨를 달고 하늘 높이 올랐다가

낙하산부대처럼 내려오듯이,

민들레꽃씨 날리듯

하늘로 땅으로 바다로, 이 세상 끝까지

꽃피는 마음 환하게, 희생하고 봉사하는

그 알뜰한 웃음꽃은 곱습니다.

벌 나비가 이곳 저곳 날아들 듯이

아름다운 풍광과 풍속을 찾아서

인류의 행복 위해 보여주고 자랑하는

저 꿈꾸는 파라다이스.

엄동설한에 보리밭을 밟아주듯

얼어붙은 뿌리가 죽지 말라고

시한삼동 보리를 밟아주듯이

사랑으로 밟아주는 마음은 곱습니다.

그저 다독다독 다독거리며

그저 오순도순 주고받으며

그저 청국장 끓듯 사랑이 넘치게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

새소망 울타리를 가꿔 나가며

심정의 인연으로 봉사하는 삶으로

만국기로 펄럭이는 가슴들은 곱습니다.

세계로 향하여 날고 싶은 사람들의

날개가 되어주고 꿈이 되어주면서

겸손의 옷을 입고 온유하게 살되

위하여 사는 삶으로 보람 있게 살되

청춘의 정열 쏟아 죽순 같이 살으리.

김치와 해장국에 익숙한 백성들이

뉴욕에서 런던에서 파리에서

알래스카, 나이아가라, 그랜드 캐년에서

손을 잡고 흔들다가 얼싸안고 춤추며

아리랑을 부르는 눈물겨운 장면이

금강산에서 벌어질 그 날을 위해서

타이프를 두드리는 손은 아름답습니다.

민들레 꽃씨가 날려서 날려서

이 세상 끝까지 퍼져 나가듯

KAL기가 공기를 차고 구름 위를 날 듯

드높은 이상을 온 세계에 펼치되

너무 우쭐대지도 말고

너무 주눅 들지도 말고

모름지기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되

날로 새롭게 발전하기를

우리 다함께 바라고 있습니다.

- 세일관광 창립3주년을 기념하여

쑥의 나라 선비여

천잠산(天蠶山) 마파람은

태양의 파트너

도원(桃園)을 들락이며 미팅을 한다.

피를 먹고도 자라지 못한 陽四月이 아니라

새벽종 울고도 날샐줄 모르는 陽五月이 아니라

태양력(太陽曆)으로 檀紀를 쓰던 우리네 조상

쑥을 자시고 햇살을 받으시던 春三月 好時節에

바른말 똑 부러지게 미팅을 한다.

커피의 쓴맛을 설탕으로 속여 먹는

그런 치사한 몰상식이 아니라

혀꼬부라진 소리로 훈민정음을 총살하는

그런 썩은 문화의 장송행진(葬送行進)이 아니라

활자라는 활자는 모두 때를 벗고 일어나

총명한 눈으로 반짝이는 만남이다.

미친 여자 널뛰듯 하는 세상을

바로 잡는 신문,

싸늘하게 얼어붙은 구들에

불을 지피는 신문,

희미한 정신을 흔들어 깨우는

신문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너무 우쭐대며 목에 힘주지도 말고

너무 옹졸하게 주눅 들지도 말고

양심의 나침반이 가리키는대로

주장하고 비판하는 신문이 되기를

우리 다함께 바라고 있다.

언제나 새로 나오는 봄쑥 같이

순하고 질기게 견디어내면서

우리네 조상 웅족(熊族)의 정신으로 살되

그저 따뜻하게 그저 훈훈하게

사랑이 넘치게 다독거리며

눈치보거나 아첨 떨지도 말고

대쪽같이 짜개지는 직필을 휘두르되

쑥과 마늘을 자시던 우리네 조상같이

쓸개 있는 선비정신 살려야 하느니라.

새로 나오는 봄쑥 같은

영민한 학생들의 눈동자는 활자

정직한 활자는 살아있는 눈동자

쑥의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

그대 예리한 눈과 정직한 입과 폭넓은 귀와 숨쉬는 코와 민첩한 손이 가리키는 대로 우리들의 심장은 뛰고 있다. 심장은 맥박, 맥박은 깃발, 깃발은 동학민병의 징소리 울리며 해돋는 쑥의 나라 상아탑의 소리 영원하기를 우리 다함께 바라고 있다.

풀 우거진 향토에 귀를 대어보라

조상들의 징소리 북소리 울려온다.

천잠산 뻐꾸기도

쑥의 나라 선비 되라고

캠퍼스에 피를 뱉는다.

쑥國! 쑥國! 쑥쑥國!!

立春大吉을 꿈꾸는 도시

삼동(三冬) 가시나무꽃처럼

입춘을 꿈꾸는

서울의 밤은 남산 타워

별떨기 꽃술에서 피어난다.

살구나무 가지에 오르던 달은

꽃구름 뚫고 솟은 빌딩에 걸리고

스카이라운지마다 내려온 별들이

맥주컵 속에서 출렁이는

활기찬 도시는 꿈꾼다.

난로 가에서

주전자의 물 끓는 소리를 들으며

웃음꽃 피우는 시민들의

부딪치는 맥주컵 출렁이는 은하수

별은 반짝이고,

이야기는 하늘 끝

유성이 날고 있다.

하늘에는 전등

땅에는 별

송년 파티가 한창인데,

건반을 두드리는 손가락 끝에

라이트 불빛이 뻗쳐 흐른다.

희망을 속삭이며 질주하는

환희의 불빛과

강변로 휘어도는 가로등 불빛은

흑인가수의 이빨처럼 빛나고

북악(北岳)을 스치는

역사의 바람소리

조상들의 피리소리 울려오나니

그대 일상의 눈을 감고

종로의 인경소리를 들으라.

지난 봄부터 여름 가을

수 천 만 톤의 햇살을 내려주던

해는 다시 돋기 위해 저물고,

어두운 시대엔 더욱 빛나던

별들은 눈을 반짝이나니

그대 상식의 책을 덮고

가슴에 불을 밝혀라.

향수 젖은 호롱을 찾아내어

석유를 가득 채우고

가슴 환히 불을 밝혀라.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무릎 꿇고 호롱불 바라보면

상투 꼿꼿한 선비 올라오듯

어둠 저쪽 해가 솟는다.

立春大吉을 써붙이던 조상들의

그 옥양목 두루마기 같은 마음,

백의민족의 따뜻한 마음이

무교동 동동주집 나무기둥의

고풍스런 묵향(墨香)에 젖어온다.

- 서울시보, 1983. 12. 30 -

하나님 전상서

토란잎 물방울 같이

자운영(紫雲英)밭 꿀벌 같이

천국의 웃음꽃을 피우기 위하여

집집마다 교회마다 마음과 마음마다

고집으로 굳은 담을 헐 수 있도록,

고질의 담을 헐고 새 길을 내도록

하나님 형상대로 모자이크를 꿈꾸는

5월의 편지를 살펴보아 주십시오.

목련꽃 하나님, 라일락의 하나님,

호수를 보면서 눈을 수놓고

산맥을 보면서 코를 수놓는

당신의 모자이크를 보아주십시오.

당신으로부터 태어나온

서로 다른 빛깔의 돌과

서로 다른 빛깔의 모래,

유리조각과 콩깍지와 지푸라기

오곡백과로 당신을 수(繡)놓는

저희들의 솜씨를 바라봐 주십시오.

하나의 빛깔의 돌 곁에

하나의 다른 빛깔의 돌을 놓듯이,

하나의 사람과 사람의 만남,

하나의 인간과 인간의 대화,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꽃을 피워 모자이크를 만듭니다.

풀잎을 연주하는 달빛 같이

강물을 연주하는 별빛 같이

서로 서로 볼을 비비며 애무하는

조화로운 뜻이 이뤄질 수 있도록

조금만 더 빛을 내리시어

강퍅한 마음을 녹여주십시오.

교회의 종소리는 서로 싸울 수가 없고

예배당의 찬송은 서로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악보의 눈들로 반짝이는

밤하늘 별들의 끝없는 이야기,

말씀으로 샘솟는 실로암에서

충혈의 눈을 씻고 돌아와

보리밭 고운 봄길에 서서

당신을 우러르게 하여 주십시오.

가시가 많은 고슴도치들끼리

찌르고 찔리고 피를 흘리다가

고독으로 감긴 눈 당신께로 뜨오니

병아리 신앙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거름자리 후비던 발톱도 잘라 주시고

퇴색된 털빛도 되살려 주십시오.

토란잎 물방울 같이

자운영 꿀벌 같이

천국의 웃음꽃을 피워주십시오.

청평

청평은

창조의 근원지,

엿새 동안 해산을 마치신

하나님의 구슬땀을 생각하게 한다.

주름살 얽혀 도는

길은 많아도

가는 길은 외줄기

험산 준령을 넘고 넘어

육천년 굽이굽이 설움 길 헤쳐오신

하나님의 피눈물을 생각하게 한다.

천성산(天聖山) 가는 길은

물길 시오리에

꽃길 시오리

꿈을 꾸듯 거슬러 가는

부활의 발아래

안개 둥둥 피어오른다.

물은 천심호(天心湖)

설악봉(雪岳峰) 줄기줄기

천만 줄기 핏줄 사이로

천연의 날개 일어나는 청평은

안식의 휴양지,

이레째 돌아와 쉬지 못한

하나님의 슬픔을 생각하게 한다.

예술의 샘

당신은 예술의 샘

맑은 눈을 가지게 하십니다.

말씀의 깊은 곳에서 솟는 샘물로

갈한 목을 축여 주시고

충혈된 눈을 맑혀 주시고

어두운 귀를 열어 주십니다.

맑은 햇살 가득히 모셔들이고

맑은 별빛 가슴에 수를 놓아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미소를

사랑으로 가꾸어주십니다.

영생하는 샘물의 율동에서

노래가 되고 춤이 되는

창조의 아픔,

산고를 웃음으로 보여주시는

당신은 예술의 주인입니다.

맑은 눈을 갖고 싶은 별떨기같이

부드러운 귀를 갖고 싶은 바람결 같이

하늘 땅, 인류의 평화 위해 춤추는

보기도 아까운 웃음꽃 봉오리

그 끝이 없는 마음 밭을

나는 연초록 빛깔로 사랑합니다.

말씀의 깊은 곳에서 샘솟는

웃음꽃의 근원을 아는 까닭에

나는 샘물 솟듯 사랑합니다.

어떠한 기교로도 따를 수 없는

예술을 꽃피우는 당신은

살아있는 맑은 샘,

스스로 얼굴을 들여다보게 하시고

부끄러운 손으로 눈을 씻게 합니다.

- 선화예술학교 개교 10주년에 -

대숲에서 솟아나는 죽순 같이

나와 당신의 나라, 우리나라에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해가 오른다.

동이 트는 새벽마다 정한수를 떠놓고

축수축수 치성을 드리던 어머니의 옥동자 같은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가 오른다.

묵은 해 근심 걱정 어둠을 살라먹고

공작새 날개 펴듯 빛살 펴며 오시면

활짝 열린 대문마다 입춘대길이 빛난다.

대숲에서 솟아나는 죽순 같은 마음으로

우리네 뚝배기 해장국이 설설 끓는

섭리의 새 역사가 가슴마다 열린다.

농부는 농사를 짓고, 어부는 고기를 잡고

스승은 가르치고, 학생은 배우고

정치인은 다스리고, 국군은 나라 지키는

그러한 적재적소에서 죽순 같이 솟으면

세상은 웃음꽃으로 꽃마을을 이룬다.

나와 당신의 세계, 우리 세계에

젊음과 희망과 심정의 해가 오른다.

해장국 설설 끓는 뉴욕에도 워싱턴에도 LA에도

만선으로 돌아오는 알래스카에도 보스턴에도

하늘 드높이 안테나를 드리우고

모두가 믿고 따를 수 있도록

우주와 교신하며 꿈같이 오른다.

눈물 속의 햇살로 웃음꽃을 피우는

고난으로 빨래한 형제여 인류여

칡뿌리 같은 풍악의 소나무들이여

보기도 아까운 할아버지의 자손들이여

대숲에서 솟아나는 죽순 같이

푸르고 곧게, 젊고 바르게

마음을 비우면서도 쭉쭉 뻗는 죽순 같이

해장국 끓어제끼듯 사랑이 넘치게

심정으로 어깨짜고 아리랑을 부르며

찾아오신 메시아, 해에게로 가자!

- 미국, 세계일보, 1988. 1. 1)

사군자(四君子)

고결한 정절은 청죽보다도 곧고

지조 높은 지절은 매화보다도 강하여라.

모진 북풍한설 몰아쳐 올 때에도

꿋꿋하게 살아남아 충절을 지키면서

고매하게 피어오른 梅蘭菊竹은

유연하면서도 강하였어라.

휘어질 듯 하면서도 휘어지지 않고

꺾일 듯 하면서도 꺾이지 않는

절개와 순결을 지켜온 여인

이화출신 최정순 선생의

그 파란만장한 애화(哀話)에

멧새도 매화 가지에 내려와

꽃잎에 볼 비비며 울고 가더이다.

천후(天候) 불순한 그 만고풍상은

설한풍(雪寒風)에 날려보내고

심정의 뿌리 천혜(天惠)로 깊이깊이

은은한 아취(雅趣) 고이 다스려

지덕(智德)의 화신 신앙으로 피웠어라.

힘겨운 눈덩이 머리에 인 채

하늘을 사모하는 불꽃같은 꽃잎

봉오리 봉오리 사랑을 보여주었네.

모도(茅島)에서 사선을 넘으시고

원주 춘천에서 핍박을 견디시며

거룩한 모성으로 가꾸어오신

눈물의 결정(結晶), 기도의 결정,

아픔을 참아 오신 인생은 곱습니다.

아아, 그 고운 인생

춘난(春蘭)보다도 수려한 청절(淸節)에

칼날보다도 더 단호한 인종(忍從)이여!

청죽(靑竹)보다도 더 푸른 그 생명에

홍매보다도 더 붉은 그 사랑 꽃피었어라.

아아, 그 진한 사랑

춘란보다도 더 수려한 청절에

칼날보다도 더 단호한 그 인종,

봉오리 봉오리 사랑을 보여주었네.

사랑 붉은 봉오리는

슬기 닮은 자녀들,

믿음의 자녀와 직계의 따님들,

그 梅蘭菊竹은 筍蘭惠花

하늘이 보시기에 좋았어라.

하늘이 보시기에 좋은

고결한 정절은 청죽 보다도 곧고

지조 높은 지절은 매화보다도 강하여라.

- 崔貞順 先生 古稀를 기리며, 1984. 5. 13 -

청보리

金官楷 博士,

三冬을 견디어온 청보리여.

당신은

엄동설한에 매운 바람이 불어도

뽑히지 않았지요.

의지 굳고 기개 높은 선비로서

휘어질 듯 하면서도

부러질 줄 몰랐지요.

뿌리를 언 땅에 뻗어도

잎은 하늘을 사모하는 까닭에

밟히면 밟힐수록

일어서는 정신

꼿꼿한 선비정신 살려왔지요.

강원도 원주에서 일어나

개척전도로 교구장으로

세계선교사되어 오대양 육대주로

중동 땅 모래밭에 돌베개를 베고

총명한 별과 함께 잠도 자더니

그 별을 따라 박사를 따셨군요.

청보리밭 일렁이는 바람결 같이

바람결에 일렁이는 청보리밭 같이

하늘나라 열병 분열식과 매스게임

오오, 그 찬란한 기쁨의 한날을 위하여

초침 뛰듯 쉬임없이 역주(力走)하는

학문의 줄달음질은 계속되리.

김관해 박사,

눈밭에서 일어난 청보리여.

밟히는 흙이 모든 것을 포용하듯

부드러움으로 강한 것을 포용하는

새아침 청보리의 나라 지순한 시민,

순하면서도 끈질긴 사나이

침묵으로 말해온 김관해 박사여

언제까지나 청보리 그대로 푸르소서.

- 金官楷 博士 學位取得을 祝賀하여 -

三冬 가시나무꽃

삼동 가시나무꽃처럼

이제는 마음 편히 웃으셔요

겨울을 보내는 가시나무꽃처럼

얼굴 가득히 웃음꽃을 피우셔요

가슴 활짝 새움을 티우면서

웃음꽃 오순도순 정겹게 사셔요.

무거운 생활을 잠시 벗어두시고

인생의 길동무 손을 잡으시고

나란히 나란히 새 걸음 걸으셔요

카네이션도 가슴에 꽂으시고

가족과 오붓하게 기념사진도 찍으셔요.

삼동 동치미가 맛들게 되면

인생살이도 속맛이 든다지요

아이들 커가는 잔재미를 지나서

친손자 외손녀 안아볼 무렵에는

새움 트는 마음에 웃음꽃이 핍니다.

아름다운 것은

삼동 가시나무꽃,

아픔에서 피어 올린 웃음꽃은 곱습니다.

고난의 연륜, 인생의 빨래,

고난으로 빨래한 인생은 곱습니다.

따뜻한 온돌의 겨울을 보내면서

식구들의 앨범이 정리됐으면,

아이들 손을 잡고 나들이를 하셔요

눅눅한 엄동을 털어 버리시고

버들강아지 우쭐대는 기분으로 사셔요.

아픈 가시나무 꽃잎이 곱듯이

고난으로 빨래 해온 인생은 깨끗해요.

아름다운 것은

부모와 부부와 자녀,

기다리는 아내는 아름답고

귀가하는 남편은 아름다워요.

건강한 몸으로 귀가하는 남편과

아이들 재미에 늙는 시름 잊으시고

인생은 60부터, 새 출발을 하셔요.

꽃다운 꽃처럼

하늘을 우러러

태양을 모시고 사는 꽃같이

웃음꽃 활짝 피우셔요.

가난한 이웃을 위하여

희생하고 봉사하며 적선하다가

주름잡힌 잔주름도 곱게펴시고

햇님같이 밝은 얼굴 활짝 웃으셔요.

많은 열매를 위하여

기꺼이 썩는 씨알 같이

이웃의 아픔을 아파하고

이웃의 슬픔을 슬퍼하며

의로운 일 공덕으로 밝혀 나오신

그 꼿꼿한 대나무 정신으로 바르게 사셔요.

겨울이 추우면 추울수록

이듬해 돌아오는 새봄 더욱 따뜻하고

밤길이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동터오는 새아침은 더욱 밝으리니

묵묵히 밭을 가는 소처럼

충성과 효도의 밭을 가소서.

샘물에 속삭이는 햇살같이

햇살에 웃음 짓는 샘물같이

봄햇살에 속잎 피는 느릅나무 같이

푸른 하늘 키대로 우러러

섭리의 소명 앞에 바르게 서셔요.

새봄이 오면 무거운 외투를 벗듯이

세상 번뇌는 털어 버리시고

식구들과 함께 오순도순 사셔요.

하늘을 머리에 이고 살듯

태양을 모시고 살아가듯

언제나 청청한 소나무 같이

바위틈에 뿌리 뻗는 소나무 같이

끈질긴 내 나라 칡뿌리 정신으로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

식구들 일일이 손을 잡아주셔요.

맑은 눈을 가진 분들이 사는 나라

넓은 귀를 가진 분들이 사는 나라

절제하는 입과 너그러운 가슴

심정어린 기도와 정성으로

작은 메시아가 되셔요.

하늘 앞에는

소돔과 고모라성이 불타기 전에

하나님께서 목마르게 찾으시던

그 의인이 되시고,

식구들에게는

논배미에 밟혀서 썩어지는

꽃다운 자운영이 되셔요.

꽃이 썩어 거름되는 아픔과

그 위에 가득 실리는 결실의 기쁨

봉사하는 몸 속에서 정신이 사는 행복을

꽃다운 꽃처럼 누리셔요.

- 수원교회 장립식을 축하하여, 1987. 12. 6 -

인생의 빨래

바느질 뜸이 고운 이복종 권사님

바느질 같이 고운 마음 다림질하시어

꽃피는 봄 길로 화사하게 오셔요.

순한 마음 가득가득 봄 햇살 받으시고

마음 문 활짝 열어 젖히시고

일상의 웃음꽃 곱게 피우셔요.

외로움과 고독일랑 아주 접어두시고

고운 봄길 가득히 웃으면서

고목에서 꽃피듯 다시 젊어지셔요.

삼동 동치미 속맛이 들 듯이

잘 썩은 누룩에서 농주가 익듯이

아픔을 참는 인생은 아름답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온 아픔의 세월

고난의 빨래 인생의 빨래

곱게 곱게 빨아온 눈물의 세월을

코스모스 꽃길에 손 흔드는 아이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보내주셔요.

따뜻한 온돌의 겨울을 보내시고

화분들을 알뜰하게 정리하셨으니

이제는 마음 편히 푸른 하늘 보세요.

아픈 가슴 올올이 꿰매어온 인생,

때로는 터지는 그리움의 실밥,

생활의 실밥을 꿰매면서

신앙의 주름을 펴오신 모습이

살구나무에 걸리는 저녁달처럼

그 고운 마음씨가 그리워집니다.

아버님 바지저고리 바느질을 하시다가

어머님 치마저고리 바느질을 하시다가

봄 햇살 가득 꽃답게 웃으시며

생수를 내놓으시던 이복종 권사님!

오늘은 지난 세월 개켜두시고

새로운 옷을 입고 출발하는 날

버들강아지 우쭐대는 기분으로 사셔요.

금 햇살 녹아 내리는 들길에 서서

하늘이랑 강이랑 신비롭게 보시고

기념사진도 예쁘게 찍으셔요.

아픈 가시나무 꽃잎이 곱듯이

고난을 바느질해 온 인생은 곱습니다.

바느질 뜸이 고울수록 인생은 곱습니다.

상처 때문에 아픈 사람은 곱습니다.

치유 때문에 참는 사람은 곱습니다.

아픔을 참는 기나긴 세월은

오늘 오롯한 웃음꽃으로 핍니다.

그 고운 웃음꽃 속에는

이복종 권사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초창기 시절의 간증담이 있습니다.

“음식을 주욱 해놓았더니

식구들이 어찌나 잘 잡숫고,

유효원 협회장님도 보리꼽살미 잡수어 보시고는

좋아하시더라“던,

그 꿀벌 잉잉거리는 소리가 있습니다.

바느질 뜸이 고운 이복종 권사님

바느질 같은 마음 고이 간직하시어

기쁜 날 올 때까지 만수무강하시고

하늘의 영광과 땅의 평화 위하여

웃음꽃 환히 피워주셔요.

- 이복종 권사의 화갑을 축하하여 -

엮고 나서

작년 여름, 나는 38일 동안 미국 전역을 돌아보았다. 앵커리지 공항에서 내린 나는 다시 경비행기에 올라 알래스카 코디악 섬으로 가서 나보다 더 큰 물고기를 낚아 올렸었다. 그 중 새끼 물고기(할리벗)를 회를 쳐서 고추장에 찍어먹던 1987년 7월 12일, 그 원시적인 생명감 넘치던 그 날을 시발로 나는 기행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찬란한 무지개를 일구며 달리는 모터보트로 두 시간, 할리벗을 낚아 올리던 그 빙산이 녹아 내리는 빙하(氷河), 에스키모가 살던 주위 산엔 눈이 하얗게 쌓여 있는 백야(白夜)는 북극, 그 얼음물 위에서 몇 편의 시를 건져 올린 후, 다시 뉴욕 워싱턴을 거쳐 보스톤에 이르러 대서양 바다를 누볐다.

여기서부터는 순전히 자동차로만 달리기 시작하였는데, 버팔로의 나이아가라 폭포를 시발로, 시카고, 덴버, 럭키산맥과 설트레이크를 지나 샌프란시스코까지 동부에서 서부로 횡단한 다음, 다시 로스앤젤레스, 라스베가스, 그랜드 캐년, 엘파소, 휴스톤, 마이애미 최남단까지 내려간 후 다시 덴버리까지 북상하여 30개 주를 거치는 동안에 4만리를 달리게 되었다.

4만리면 한라산에서 백두산까지 열 세 번을 달리는 거리가 된다. 나는 이처럼 아메리카 전역을 누비는 동안에 김치 없이는 정말 못 살 것만 같은 향수병을 몹시 앓았고, 그 향수병 덕으로 몇 편의 시를 건져 올리게 되었다.

마이애미 해변의 소라를 찾아 사막을 거치는 동안에 깨달음을 얻었고, 그것은 마침내 『꽃잎』이라는 시집을 탄생시키게 되었다.

이번에 펴내게 된 이 책은 일곱 번째 시집이 되는데, 제1장은 기행시를 모았고, 제2장은 6시집 이후에 써서 발표한 시들이며, 제3장은 몇 번 버리려고 망설이다가 차마 버리지 못한 것들, 흘리고 다닌 이삭들이다. 그리고 제4장은 축시 일부가 포함되어 있다.

시가 천대받는 시대에 기꺼이 출판해 주신 한그루의 황태운 사장께 감사하며, 이 탄생의 소박한 기쁨을 하나님께 바치고자 한다.

- 1988년 7월 12일, 冠岳山房에서 黃松文

꽃잎

지은이 / 황송문

편낸이 / 황태운

펴낸곳 / 한그루

우편번호 / 110-040

주소 / 서울 종로구 통의동47

전화 / 738-8777

1판 발행일 / 1988년 11월 11일

값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