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송문 대표수필

팔싸리

SM사계 2012. 7. 30. 12:30

 

 

 

 

팔싸리

 

화투 노름에 팔싸리라는 것이 있다. 팔싸리는 흑싸리 넉 장과 홍싸리 넉 장을 합한 여덟 장의 제구를 말한다. 그런데 이 여덟 장을 차지하지 못하는 경우, 마흔여덟 장으로 된 노름 제구 가운데 가장 매력 없는 것이 바로 흑싸리와 홍싸리이다.

무엇보다도 우선 구미가 당기는 것은 한 장에 스무 끗이 계산되는 광(光)과 칠십 약이 되는 칠띠, 그리고 석장씩 모으면 삼십 약이 되는 청단과 홍단이다. 그 다음으로 이십 약을 하는 비약과 풍약과 초약이다.

여기에 비하면 흑싸리와 홍사리는 오띠와 열 끗씩밖에 계산되지 않기 때문에 가장 인기가 없는 제구에 해당된다. 물론 흑싸리 넉 장과 홍싸리 넉 장을 합한 여덟 장의 팔싸리를 하게 되면 팔십 약이 되지만, 이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애당초부터 기대하는 법이 없다. 그래서 대개의 사람들은 따 먹어갈 게 없을 때는 이 별 볼일 없는 흑싸리와 홍싸리 껄짝(껍질)부터 바닥에 내어던지게 된다.

나에게는 팔싸리에 얽힌 얘기로서 잊혀 지지 않는 기억이 하나 있다. 그게 벌써 언제적 일인가. 삼십 년 전의 일이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시골 아이들은 모이기만 하면 어른들 몰래 화투 노름을 곧잘 하였다. 아이들이 화투 노름에 거는 것은 주로 성냥꼴이었다. 그 성냥꼴 하나라도 더 따려고 안간힘을 쓰던 아이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어쩌다가 한 번은 나에게 흑싸리 껍질 두 장과 홍싸리 두 장이 들어왔었다. 잘못 들어온 화투짝을 집어 들게 된 나는 하기 싫은 화투 노름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른 아이들은 솔광 비광을 먹어가는가 하면, 단약을 먹어 가는데 나는 아무것도 물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다른 아이들 앞에는 눈을 끄는 것들이 수북이 싸여 가는데, 나의 앞에는 싸리 껍질만 초라하게 놓여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나는 이미 시작된 그 화투 노름을 단념할 수도 포기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초라할 수가 없는 싸리 껍질을 불끈 쥔 채 바닥에서 제발 일어나 주기를 은근히 기다리고 있었다. 이 기다리는 마음을 천지신명께서 굽어 살피셨던지 거짓말같이 바닥표가 일어나서 팔싸리를 하게 되었다.

팔싸리를 하기 위해서는 때로 알짝을 내어던지는 경우도 생기게 된다. 황금 같은 비광을 떨어 버린다는 것은 여간한 모험이 아니다. 화투표가 잘못 들어와서 팔싸리밖에 다른 것을 기대할 수 없게 되는 경우에는 정말 물어다 놓은 화투란 보잘 것이 없게 마련이다.

송동월(松桐月) 알짝 광을 움켜쥐듯, 욕심 많은 친구들은 돈도 벌고 출세들을 해서 의기양양 거들먹거리며 앞서 가는데, 나는 이제까지 싸리 껍질만 쥐고 있는가 싶어 서글픈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때로는 승산이 없을 것 같은 싸리 껍질을 내어던져 버리고도 싶지만, 인생이란 화투 노름처럼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내 인생은

민화투 놀음의 팔싸리.

아무리 기다려도 기다려도

좀처럼 오지 않는 행운.

바닥에서 알짝이 일어날 때까지

싸리 껍질만 불끈 쥐고 살아온 시업(詩業).

아내가 움켜쥐고 싶어 하는

돈이나 권세

송동월 광도 떨어버리고

흑싸리 껍질만 홍싸리 껍질만

그저 빈 껍질만 불끈 쥐고 살아온 가난 속에

청빈의 물소리 쪼르륵 들리나니,

가난해야 넉넉한

내 시의 산술법……

마음을 열면

뜰의 달빛……

보자기로 구름 잡는

내 인생은

무능한 無無明亦無無明盡無老死팔싸리……

고집으로 걸어온 내 시도(詩道)는

화투놀음에서 그야말로

끝내주는 팔싸리.

-「팔싸리」-

 

나는 이날까지 돈이 되지 않는 시를 붙들고 살아왔다. 나의 시, 그것은 화려한 송동월 광이 아니다. 그것은 버리고 싶은 흑싸리 껍질에 불과하다. 나는 어찌하여 다른 것을 다 내어주어 가면서 싸리 껍질만을 움켜쥐고 살아온 것일까. 그것은 아무래도 가장 초라하게 보이면서도 가장 값진 것이 바로 팔싸리라고 믿어왔기 때문이리라.

팔싸리, 그것은 나의 시다. 나의 시는 바로 팔싸리다. 고집스럽게도 팔싸리의 기대를 버리지 못한 채 흑싸리 홍싸리 껍질을 쥐고 있는 나에 대해서 아내는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아내는 송동월 광 같은 돈이나 단약 같은 실속을 요구한다.

여기에 나의 고민이 있다. 끝내 단념하지 못하는 내 시의 고민이다. 싹수가 노란 것은 빨리 떨어 버리고 새 길을 찾는 게 상책이지만, 그러지를 못한 채 살아온 게 내 인생이다.

 

나의 시는

생활의 이빨에 물려 죽었다.

오랜만에

하나

시궁창에서 건져낸 시가

세탁기의 비누거품에 소멸되었다.

불도저에

풀잎이 깔리듯

존재도 없이 사라져 간

내 시를 찾아

호주머니를 뒤지면

아아, 떨어져 나간

내 시의 살점들.

도륙당한 혈육을 찾듯

떨리는 손으로 더듬어 찾으면

가슴에 피가 고인다.

삭아 내린 뼈를 접골하듯

시 조각을 맞춰 보면

가슴에 피가 고인다.

-「시의 죽음」-

 

나는 1982년에 문학상을 받은 일이 있다. 시상식은 그 해 12월에 실시되었는데 나는 상패를 받고 아내는 상금을 받았다. 나는 좀 더 고상하고 품위 있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주변머리 없게도 엉뚱한 팔싸리 얘기가 튀어나오게 되었다.

세상살이가 어려워질 때마다 살기 좋은 곳으로 이사를 가고 싶지만, 이 인간들의 세상 말고는 갈만한 곳이 없는 까닭에 하는 수 없이 시와 더불어 살아온 나에게 있어서 팔싸리는 나의 하나밖에 없는 마지막 보루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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