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송문 대표수필

인생의 빨래

SM사계 2012. 7. 30. 12:23

 

 

 

 

 

인생의 빨래

 

좋은 시를 쓰려면 우선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문학을 하기 전에 먼저 사람다운 사람, 시인다운 시인이 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사람다운 사람, 시인다운 시인이 되지 않고는 좋은 시가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문학작품이란 그 사람의 마음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글이란 바로 그 사람이라는 말도 있다. 이는 글쓴이의 마음 상태를 두고 하는 말이다. 마음이 비단결 같은 사람은 글 또한 비단결 같거니와 마음이 거지발싸개 같으면 글 또한 거지 발싸개 같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마음부터 깨끗하게 맑히고 바르게 닦는 청정심(淸淨心)이 요구된다.

여기에 멋있는 사람, 매력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개성적 인간으로서 도야(陶冶)된 인격이 요구된다. 잘 다듬어진 제목이 훌륭한 건축물에 쓰이듯, 잘 다듬어진 마음 바탕이 좋은 문장을 형성한다. 글을 쓰는데 있어서는 이러한 기본 문제를 도외시할 수가 없다.

글을 쓰는 사람들 중에는 흔히 재미있는 소재(素材)를 찾아 헤맨다거나, 문장을 요리조리 교묘하게 짜 맞추는 기교(技巧)에 많은 관심을 쏟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앞에서 말한 마음의 문제로서의 작자의 생각, 즉 주제의식으로서의 중심사상을 도외시하고서는 명문(名文)이 될 수가 없다.

글을 쓰는데 있어서는 무엇을 보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보느냐가 더욱 중요하다. 무엇을 보느냐는 문제는 사물에 대한 관심이지만, 어떻게 보느냐는 문제는 작가의 주체적 사고방식과 기교까지를 포함해서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좋은 시를 쓰고 싶어 하는 나의 관심사는 나의 마음을 비단결 같은 마음으로 직조(織造)하는 수심(修心)에 두게 되고, 이러한 인격의 도야나 개성의 완성을 위해서 고심하다 보니 어느덧 '돌'과 '물'이라는 사물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불속에서 한 천년 달구어지다가

산적이 되어 한 천녀 숨어 살다가

칼날 같은 소슬바람에 염주(念珠)를 집어 들고

물속에서 한 천년 원없이 구르다가

영겁(永劫)의 돌이 되어 돌돌돌 구르다가

매촐한 목소리 가다듬고 일어나

신선봉 화담(花潭)선생 바둑알이 되어서

한 천년 운무(雲霧)속에 잠겨 살다가

잡놈들 들끓는 속계(俗界)에 내려와

좋은 시 한 편만 남기고 죽으리.

-「돌」-

 

이 시에 나오는 돌은 바로 나 자신을 의미한다. 내가 돌이 되어 불속에서 한 천년 달구어지게 되면, 나에게 다닥다닥 붙어있던 온갖 몹쓸 욕망의 부스러기들은 모조리 타서 없어지게 될 것이다. 온갖 백팔번뇌를 일으키는 탐진치(貪嗔侈)는 말끔히 사라질 것이며, 타락성 근성 같은 때가 벗겨지고 오로지 동해에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는 저 석굴암 대불같은 표정의 돌덩이로 남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게 되면 탐욕도 없고 집착도 없기 때문에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산적이 되어 한 천년 숨어 산다 하여도 죄와는 상관없이 살게 될 것이다.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더라도 굶어 죽지는 않을 것이다. 주민등록증도 등기권리증도 필요 없는 산적이 되어 숲속에서 자유를 만끽하다가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지나친 자유가 구속이라는 것을.

보다 완전한 개성완성 인격완성을 위해서는 돌이 물속에서 오랜 동안 굴러야 한다. 그리하여 모서리가 그 부드러운 물에 씻기어져서 매촐하게 다듬어져야 한다. 그리하여 매촐한 조약돌로 둥글게 둥글게 원(圓)이 되는 상태, 이게 바로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원만한 인격의 표상(表象)이다.

이렇게 되면 저 유명한 송도삼절(松都三絶)의 절세 여인, 황진이가 프로포즈했다가 사모하게 된 화담선생과도 같은 품격을 갖게 될 것이다. 안개구름 자욱한 신선봉 바위 위에서 서화담과 황진이가 바둑을 두듯, 높은 품격의 소유자가 되어 유유자적하게 마음 편히 살 수 있을 것이다.

 

안개로 허리 두른 산허리

교교한 암자(庵子)에서

스님과 나는 바둑을 둔다.

해탈(解脫)한 스님은 백을 거느리고

범속한 나는 흑을 거느리고……

스님의 장삼(長衫)은 구름으로 떠 있고

나의 흑발(黑髮)은 번뇌(煩惱)로 얽혀있다.

『패(覇)를 받으시렵니까?』

『남무아미타불……』

『받지 않으시렵니까?』

『관세음보살……』

고진(古眞)한 백은 고진해서 좋고

천진(天眞)한 흑은 천진해서 좋고

장생(長生)의 노송(老松)에 걸려 흐르는

이백의 하늘은 대류무성(大流無聲)……

법열(法悅)의 구름은 발아래 떠 있고

변상(變相)의 바둑은 구름으로 떠 있다.

-「선풍(禪風)Ⅱ」-

 

나의 관심사는 좋은 시를 남기는 데 있다. 어떻게 하면 좋은 시를 쓸 수 있을까. 여기에서 말하는 좋은 시란 물론 높은 차원으로서의 예술적 가치가 있는 시를 가리킬 뿐 아니라, 영원히 남을 수 있는 시를 말한다. 영원히 남을 수 있는 시란 영원한 불변의 진리에 뿌리내린 예술적 가치의 것을 말한다.

나의 시에는 도교적인 요소와 불교적인 요소도 있지만 기독교적인 요소가 치열하게 작용하고 있다 하겠다. 나의 마음 세계가 신선처럼 운무 속에 잠겨 살 수 있는 어느 경지에 이르렀다고 해서 안일하게 자신의 안존만을 꾀하는 차원이 아니다. 천상에 계신 하나님이 지상에 내려와서 우리 겨레를 구원하듯, 온갖 잡놈들이 들끓는 속세에 내려와서 깨달음을 줄 수 있는 좋은 시를 남기고 가야겠다는 사고방식이다.

여기에 내 삶의 나침반이 있다. 나의 문학세계, 내 시는 결국 나의 개성완성, 인격완성의 바탕에서 꽃피워내는 예술적 가치의 것으로서, 인류구원에 있다 하겠다.

그러므로 이것은 종교적 차원에 버금간다. 시가 종교적인 차원으로 성스럽게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그리하여 속(俗)을 성(聖)으로 끌어 올리면 끌어 올릴수록 결국 시성(詩聖)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믿음이 나에게는 있어 왔다.

이러한 연유로 해서, 강한 돌이 부드러운 물결에 씻기며 굴러 다듬어지듯, 나는 세파에서 구르고 구르면서 조금씩 다듬어져 가는 시를 써나가게 된다.

결국 나의 시작과정(詩作過程). 시의 퇴고(推敲)와 교정(校正)은 나를 다듬어 가는 성질의 것으로서, 나를 깨끗하게 하는 내 삶의 빨래요, 나의 생활을 곱게 펴나가는 내 인생의 숯불 다리미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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