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송문 대표수필

망향의 노래

SM사계 2012. 7. 30. 12:16

 

 

 

 

망향의 노래

 

나의 아버지는 내 나이 16세 되던 해에 돌아가셨다. 그리고 그 이듬해엔 누이동생이 폐렴으로 죽었다. 연거푸 두 죽음을 보게 된 나는 허탈에 빠질 겨를도 없이 중학생의 몸으로 아버지 대신 가정을 책임져야 했다. 다 늙으신 할머니와 그저 순하기만 하신 어머니, 그리고 철모르는 어린 동생들을 책임지지 않을 수 없는 몸이 되고 말았다. 정말 하루아침에 엄청난 무게의 십자가를 지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나는 이때부터 어린 나이에 돈을 벌어야 했고, 가정 살림을 꾸려가면서 고학을 해야 했다. 새벽부터 일어나 신문배달을 했고, 학교에 다녀온 후에는 나무장사를 하였다. 그 당시 내 고장에서의 나무장사란 산판에서 실어온 원목의 껍질을 벗겨 파는 일이었다.

그때, 나의 고민은 그런 일들이 어린 몸에 몹시 힘들어서라기보다는 인생과 우주에 관한 실존적인 고민이었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할 거신가. 꿈속에서 자주 뵙게 되는 나의 아버지는 과연 저승에 계시는 것일까. 아니면 혼비백산(魂飛魄散)하고 만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생계를 이어가는 것만으로 만족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나는 무엇인가 할 일이 있어서 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으로 여겨졌다.

언젠가는 한 밤 중에 아름드리 원목을 퍼 내리기 위해서 군용 트럭에 올라간 일이 있었다. 나는 그 원목더미 위에서 피곤한 몸을 쉬는 동안에 가까운 숲속에서 울려오는 새소리를 듣게 되었는데, 신비로운 그 소리는 나로 하여금 사색하게 하고 고민하게 하였다.

그 밤새 소리를 듣는 동안에 나는 "저 새들도 저렇게 아름다운 소리로 노래하는데, 나는 도대체 뭔가" 하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잇달아 일어났다. 그것은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새만도 못한대서야 되겠느냐는 생각이었다.

이때부터 나의 실존적인 고민은 더욱 심화되어 갔다. 나는 너무 조숙(早熟)했다. 어찌 보면 조달(早達)했고 조로(早老)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세상이 싫어졌다. 살기 좋은 곳으로 이사를 가서 살고 싶었지만, 이 인간들의 세상 말고 다른 세상이란 있을 수 없었다. 나는 염세를 느낀 나머지 방황하게 되었다. 소월(金素月)처럼 아름다운 시를 남기고 죽어야겠다는 허무적 센티멘털에 사로잡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책임을 물려받은 나로서는 죽고 싶지만 죽을 수도 없었다.

나는 삶과 죽음의 문제, 사랑과 미움의 문제로 종교와 철학과 문학의 세계를 넘나들면서 섭렵하였고, 학업을 계속하여 외국으로 유학의 길을 떠났으며, 문단에 데뷔한 이래 30권의 저서를 갖기에 이르렀다.

나는 시인이 되기 위해서 시를 쓴 일은 없다. 무엇인가 얘기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그 무엇, 그 어떤 무엇이 나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하였다. 나는 내 마음 속에서 나로 하여금 노래하게 하는 그 무엇이 있다고 보는데, 그 정체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깊은 밤 숲속에서 새들로 하여금 지저귀게 하던 그 어떤 존재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고향의 밤 새 소리를 잊을 수가 없다. 추운 겨울이면 아침마다 솔가리불로 밥을 짓는 아궁이에 돌을 구워 가지고 헝겊에 싸주시던 어머니, 눈에 눈물이 글썽해 가지고 어이구 내 새끼 춥것네 어쩌고 하시며 등을 톡톡 두들겨 주시던 어머니가 그립다.

내가 유학을 떠나던 날 비행기 속에서 먹으라고 차시루떡과 송편을 싸주시던 그 시골 어머니가 불현듯이 그리워지는 까닭은 웬일일까.

 

어매여, 시골 울엄매여!

어매 솜씨에 장맛이 달아

시래깃국 잘도 끓여 주던 어매여!

어매 청춘 품앗이로 보내 들녘

가르마 트인 논두렁길을

내 늘그막엔 밟아 볼라요!

동짓(冬至)날 팥죽을 먹다가

문득, 걸리던 어매여!

새알심이 걸려 넘기지를 못하고

그리버 그리버, 울엄매 그리버서

빌딩 달 하염없이 바라보며

속울음 꺼익 꺼익 울었지러!

앵두나무 우물 가로 시집 오던 울엄매!

새벽마다 맑은 물 길어 와서는

정화수 축수축수 치성을 드리더니

동백기름에 윤기 자르르한 머리카락은

뜬구름 세월에 파뿌리 되었지러!

아들이 유학을 간다고

송편을 쪄가지고 달려오던 어매여!

구만리장천에 월매나 시장허꼬!

비행기 속에서 먹어라, 잉!

점드락 갈라먼 월매나 시장허꼬!

아이구 내 새끼, 내 새끼야!

돌아서며 눈물을 감추시던 울엄매!

어매 뜨거운 심정이 살아

모성의 피되어 가슴 절절 흐르네!

어매여, 시골 울엄매여!

어매 잠든 고향 땅을

내 늘그막엔 밟아 볼라요!

지나는 기러기도 부르던 어매처럼

나도 워리 워리 목청껏 불러들여

인정이 넘치게 살아 볼라요!

자운영(紫雲英) 환장할 노을진 들녘을

미친듯이 미친듯이 밟아 볼라요!

-「망향가」-

 

서울에 살면서도 내가 항상 그리워하는 마음의 고향에는 새벽마다 물동이에 물을 이고 오시는 어머니가 있다. 어머니께서 하늘에 기원하시던 경천(敬天)의 정화수가 있다. 산나물이 담겨 있는 종발이 있고, 솥에는 구수한 숭늉이 있다.

시래깃국을 잘도 끓여 주시던 어머니께서는 내가 밤새도록 지지껍질(소나무 껍질, 땔감)을 벗기고 있으면 밤참을 해내오곤 하셨는데, 그 고생스러웠던 시절이 지금엔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눈에 선해 온다.

나의 어머니는, 나의 고향은, 내가 금의환향(錦衣還鄕)하는 게 아니라 빈털터리로 간다 할지라도 업신여기는 법이 없다. 잘났건 못났건, 출세를 했건 하품(下品)에 머물건, 참된 사람이 되어 돌아오건 죄인이 되어 돌아오건 간에 선별하여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폭넓은 아량으로 무조건 따뜻이 받아들인다.

내가 성공으로 흥기(興起)할 때나 실패로 좌절할 때나, 어느 경우에나 언제든지 받아들이는 고향에는 추억의 필름 조각들이 얼마든지 널려 있어서 가는 곳마다 빛을 발하는 것이었다.

자운영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자운영 밭에서 꽃목걸이를 엮어서 걸어 주던 그 소녀의 능금 볼이 아련히 떠오른다.

나는 꽃시계를 만들어 그녀의 손목에 채워 주었었는데, 부끄럼 타던 그녀의 능금 볼 같이 빨갛게 타오르는 보조개 웃음이 아슴푸레 피어난다.

고향에 가게 되면 나는 그 웃음꽃을 떠올리기도 하고, 풀벌레 소리를 발길로 차면서 쓸쓸히 거닐기도 한다. 고향은 어머니와 같지만 인생은 뜬구름 같은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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