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송문 대표수필

자운영 환상

SM사계 2012. 7. 30. 12:01

 

 

 

 

자운영 환상

 

누가 나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빛깔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없이 자운영(紫雲英) 꽃빛을 말할 것이다. 그가 나에게 그 이유를 묻는다면, 나는 나도 모르게 어쩐지 좋아서 무조건 사랑하게 되었노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가 나의 이 '어쩐지' 좋다는 말에 코웃음을 치고 돌아선다고 해도 하는 수 없는 일이다. '왜'와 '어쩐지'의 세계, 그것은 객관과 주관의 성질로서 과학과 예술을 단적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어쩐지'의 영상에는 간단히 설명할 수 없는 심오한 예술이 있고 철학이 있다. 그것을 간단히 설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설명하려 할 때는 이미 그가 지닌 바의 생명을 잃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흔히들 꽃 속의 향기는 생각하면서도, 꽃 속의 철학이나 꽃 속의 사상은 감지하지 못한다. 대개 사상 하면 어떠한 이데올로기나 체제의 사상만을 생각한다.

그러나 사상이란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는 어디에나 다 깃들어 있기 마련이다. 꽃에는 꽃의 사상이 있고, 숲에는 숲의 사상이 있다. 더욱이 이러한 사상이야말로 인간의 본질과도 깊은 관계의 것임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따라서 나는 자운영이라는 사물을 통해서 그와 관계되어진 나를 확인하고 싶고, 나 속에 내재되어 있는 자운영 사상을 끌어냄으로써 현대 도시의 메커니즘에 끌려가는 비본질적인 나를 본질적인 순수의 나로 회귀(回歸)시키고 싶은 것이다.

자운영은 노스탤지어의 꽃이다. 어릴 적 시골길 양쪽 논배미 가득가득 화사하게 어우러진 자운영 꽃밭을 연상하게 되면, 나는 지금도 향수에 미친다.

얼근히 취한 저녁의 노을 밭을 정신없이 바라볼 때처럼, 나는 지금까지도 잊지 못한 채 못 견디게 그 피어나던 자운영 밭을 향수 사무치는 그리움의 눈으로 바라볼 때가 있다.

나의 신비로운 환상의 세계, 그것은 절정으로 타오르는 화신(花神)의 빛깔이었다. 프리즘의 빛살로 굴절하는 환상적인 꽃잎의 사상에서 인생을 배운다. 정겹게 피었다가 꽃답게 썩어가야 하는 내 인생의 꽃빛 술맛을 배운다.

그날, 우리들은 그 벌떼 잉잉대는 자운영 밭에 파묻혀서 그 꽃빛만큼이나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여기에서의 '우리'라는 복수(複數)는 초등학교 시절의 같은 반 아이들, 가시내와 머슴아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꿀벌들이 잉잉거리는 자운영 꽃밭에서 나는 화자라는 이름의 계집애의 손목에 자운영 꽃시계를 만들어 채워 주었으며, 그녀는 꽃목걸이를 만들어서 나의 목에 걸어주던 그 황홀하고 부끄럽던 추억을 나는 지금까지 간직해 왔다.

어느덧 옛날이 되어버린 그 시절이 그립다. 자운영이 그리워지는 만큼 그녀가 그립고, 그녀가 그리워지는 만큼 자운영이 그립다. 모래알같이 많은 사람들, 별떨기 같이 많은 사람들, 그 속 어디에선가 그녀는 살아있을 것이다.

별이 반짝이듯이 그녀는 반짝반짝 모래알 같은 이야기를 남기면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추억은 아름답다고 하는 말을 진부한 말이라고 넘겨 버리기에는 뭔가 아쉬움과 함께 여운이 남는다.

자운영, 그것은 콩과의 2년초 식물로서 봄에 홍자색(紅紫色) 꽃을 피우며, 녹비용(綠肥用)으로 많이 재배했었던 20년 전을 기억할 수 있는 30, 40대 이상 되는 연령층의 사람들에게는 향수심을 안겨 주는 꽃임에 틀림이 없다.

자운영이라는 말을 듣게 되는 순간, 사람들은 나름대로 추상(追想)의 날개를 펼치게 될 것이다. 못자리를 밟을 때라든지, 모를 심기 위해 써레질을 할 때부터 논배미에 밟혀 썩어지는 자운영 꽃의 사상에서 나의 영혼, 나의 인생, 나의 시는 더욱 화사한 빛깔로 향토정서의 향기를 장만한다.

 

나는 그녀에게 꽃시계를 채워 주었고

그녀는 나에게 꽃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꿀벌들은 환상의 소리 잉잉거리며

우리들의 부끄러움을 축복해 주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만남은 이별,

보자기로 구름잡는 꿈길이었다.

세월이 가고

늙음이 왔다.

어느 저승에서라도 만나고 싶어도

동그라미밖에 더 그릴 수가 없다.

이제는 자운영을 볼 수 없는 것처럼

그녀의 풍문조차 들을 수가 없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나의 추억 속에 살아 있는

그녀의 미소,

눈빛과 입술이다.

나는 그녀에게 사랑을 바쳤고

그녀는 나에게 시를 잉태해 주었다.

-「자운영」-

 

옛날에는 그렇게 많던 자운영이 지금에 와서는 볼 수가 없다. 그 씨앗마저 어디로 사라졌는지 흔적도 없다. 다만 상상으로 그려보는 나의 정신세계에서만 피어있을 뿐이다.

자연의 풍류를 즐길 줄 알던 사람들이 인공의 상가에 눈이 밝아진지 이미 오래다. 요즈음 세상은 원두막에서 참외를 헤아리던 사람의 순박한 눈빛 같은 것은 찾아볼 수도 없게 되었다. 그 대신 주판알 같은 계산의 눈을 반짝이는 모양을 흔히 보게 된다.

목장 같은 1차 산업보다는 우유공장 같은 2차 산업이 수익성이 높고, 그것 보다는 분배되고 소비하는 곳의 3차 산업이 수익성이 더 높기 때문에 전방연관효과(前方聯關效果) 후방연관효과를 생각하게 되고, 경제적이나 합리적이라는 등의 무슨 적적(的的)이 판을 치게 되었다.

삶의 목적과 수단, 이 목적과 수단이 전도(顚倒)된 생활에서 현대 지성인들의 심령에는 불안과 공포의 압박감이 짙어가고 있다.

2차 산업이나 3차 산업의 효과로서 비료가 쏟아져 나오니까 자운영으로 거름을 하는 식의 전근대적인 불편을 외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불편을 선택할 사람은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많은 사람은 예의 편리를 쫓다가 더 많은 심령의 불편을 겪게 되었다.

자운영을 썩힌 거름이라든지, 퇴비를 외면한 채 화학비료만을 좇다가 농토는 산성화되고 메말라져서 토질을 개량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악화되었다. 화학비료만을 즐겨 쓰다가 그 좋은 맛을 잃어버린 게 얼마나 많은가. 서늘한 원두막에서 단맛을 즐기던 그 개구리참외의 맛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여호와의 신과 돈의 신, 이 중에서 돈의 신을 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돈이란 태양의 직사광선을 외며하고, 비닐하우스로 대량생산을 꾀해야 벌 수 있다고 하는 돈의 신을 신봉하게 되었다.

비닐하우스로 시간을 단축하여 대량생산을 시도하여 재미를 보는 동안에 사람들은 날로 심약해지게 되었다. 그래서 창백한 도시는 역시 창백한 약국의 형광등 불빛 아래서 기침을 콜록이는 것이었다. 그가 기침을 콜록이면 콜록일수록 건강하던 과거가 더욱 그리워지는 것이다.

늙기도 전에 벌써부터 시들시들 겉늙어 가는 도시를 바라볼 때마다 나는 싱싱하고 화사하게 젊기만 하던 지난날의 그 아름답던 자운영 피던 계절이 더욱 그리워지는 것이다.

자운영의 계절,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꿈이요 생명이었다. 짧은 여름밤의 꿈일수록 못내 아쉬워지듯이 꿈을 꾸다가 못다 꾼 꿈일수록 더욱 그리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숙명인지도 모른다.

자운영 꽃빛으로 수놓아진 나의 소년시절은 너무도 빨리 흘러가 버렸다. 언젠가 내 늘그막이 되어 고향에 가게 될 때에는 그 자운영 꽃을 볼 수 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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