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송문 대표수필

시가 있는 수필 까치밥

SM사계 2012. 7. 30. 11:55

 

 

 

 

까치밥

 

늦가을, 감나무 가지 맨 끝에 한두 개 남겨 두는 홍시(紅柿)를 가리켜 까치밥이라고 한다. 말랑말랑하면서도 먹음직스러운 그 까치밥을 유심히 살펴보면 가느다란 상처가 나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도 떫은 기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까치밥, 단맛만이 울어난 까치밥에도 보일듯 말듯한 상처는 있는 법이다. 다만 그 상처가 홍시로 익은 그 아름다움에 묻혀서 보이지 않을 따름이다.

홍시, 까치밥으로 남아지기 위해서는 풋풋한 계절, 덜 익은 연륜도 넘겨야 한다. 봄이면 감꽃을 피우지만, 비라도 내리게 되면 그 감꽃은 수도 없이 떨어지고 만다.

그래도 감나무에 붙어 있는 감꽃들은 좌절하는 일이 없이 열매를 준비한다. 이 감나무 열매에 떫은 기가 사라지고 단맛만이 울어나기 위해서는 여름의 질풍노도시대를 지나 가을의 햇살을 받아야 한다.

가을날의 그 자애로운 햇살을 자기 몸속으로 받아들여 진실한 잉태를 서둘러야 하겠기 때문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노래했다. "…마지막 과실들을 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시켜,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십시오"라고.

진실로 그러하다. 남국의 햇살에 포도주가 익듯, 대자연의 순리 앞에 겸허한 옷깃을 여미게 될 때는 우리가 곱게 익어가는 때이다. 따라서 우리는 한나절의 햇살에서도 인생과 우주를 관조하면서 감사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지식이 분필가루로 날려 소멸되어서는 안 된다. 세상을 저 잘난 맛으로 산다고 하지만 그렇게 목에 힘줄 것 까지는 없다.

인간이면 누구를 막론하고 세월 따라 한줌 흙으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남을 깔아뭉개고 올라갔던 사람도 결국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남을 거꾸러뜨리고 거머쥔 승소판결문도, 핏대를 세우면서 받아낸 등기권리증도 한 줌의 재, 한 줌의 흙과 함께 사라지게 된다. 그것은 익어 보지도 못한 채 떫은 땡감으로 떨어지는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나는 까치밥을 바라볼 때마다 곱게 늙은 농부를 떠올리게 된다. 만고풍상을 다 겪어 오면서도 고진으로 견디어 온 농부가 더없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내가 관심하는 농부는 바로 게오르규에게 하나님을 보여준 그 농부를 가리킨다. 25시의 작가 게오르규 그는 까치밥처럼 곱게 늙은 농부의 얼굴에서 하나님을 보았던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사랑은 아픔이요 희생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아름답고, 아름다운 사람은 아파한다. 아무도 몰래 조용히 혼자서 아파한다.

 

우리 죽어 살아요.

떨어지진 말고 죽은 듯이 살아요.

꽃샘바람에도 떨어지지 않는 꽃잎처럼

어지러운 세상에서 떨어지지 말아요.

우리 곱게곱게 익기로 해요.

여름날의 모진 비바람을 견디어내고

금싸라기 가을볕에 단맛이 스미는

그런 성숙의 연륜대로 익기로 해요.

우리 죽은 듯이 죽어 살아요.

메주가 썩어서 장맛이 들고

떫은 감도 서리 맞은 뒤에 맛들듯이

우리 고난 받은 뒤에 단맛을 익혀요.

정겹고 꽃답게 인생을 익혀요.

목이 시린 하늘 드높이

홍시(紅柿)로 익어 지내다가

새소식 가지고 오시는 까치에게

쭈구렁 바가지로 쪼아 먹히고

이듬해 새봄에 속잎이 필 때

흙속에 묻혔다가 싹이 나는 섭리(攝理)

그렇게 물 흐르듯 순애(殉愛)하며 살아요.

-「까치밥」-

 

까치밥처럼 아름다운 것이 이 세상 말고 어디에 또 있을까. 늦가을, 아니 초겨울, 쪼아 먹는 까치들에 의해서 상처투성이로 쭈그러든 까치밥은 차가운 겨울, 땅 위 어딘가에 떨어져서 새로운 질서를 위하여 조용히 자취를 감출 것이기 때문이다.

 

 

 

'황송문 대표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생의 빨래  (0) 2012.07.30
목욕하는 여인들  (0) 2012.07.30
망향의 노래  (0) 2012.07.30
연날리기   (0) 2012.07.30
자운영 환상  (0) 2012.0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