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작품(단편소설) 초대

선우 휘 작 불꽃

SM사계 2012. 7. 30. 09:24

 

 

 

 

불 꽃

鮮于 輝

弟 1 部

산과 산. 또 산. 이어간 산줄기와 구비치는 골짜구니. 영겁의 정적.

멀리서 보면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이 골짜구니가 마치 푸른 모포를 드리운 것같이 부드러운 빛깔로 보였다.

그러나 골짜구니를 뒤덮고 있는 관목의 가지와 잎사귀에 가리어, 험한 바위가 짐승처럼 엎드리고 담그면 손목이 끊길 것같이 차디찬 냇물이 그 밑을 흐르고 있었다.

이 골짜구니가 내려다보이는 서녘. 부엉산 산마루. 거기 동굴이 있었고 그 동굴을 등지고 고현(高賢)은 앉아 있었다. 기대고 있는 바위가 차가왔다. 해가 산마루 뒤로 기울기 시작하면서 골짜구니의 이편에 지어졌던 그늘이 차차 저편 산허리로 물들어갔다. 그곳, 검푸르게 우거진 솔밭 가운데 현의 증조부의 산소가 보였고 거기서 눈길을 북으로 돌리면 보이지 않는 오욕(汚辱)의 날(刃)이 영겁의 산줄기를 끊어놓고 있었다. 아니 지금은 그 흔적뿐. 포성과 함께 피를 뿜고 남쪽으로 옮겨간 오욕의 날. 오욕, 인간이 땅과 인간에게 가한 오욕.

현은 손바닥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짐승처럼 사람의 눈을 피해 쫓겨 다닌 기나긴 시간이 턱과 뒷덜미에 흐르고 있었다. 가미쐐기같이 거치른 턱수염. 덜미를 뒤덮은 머리카락. 그리고 가슴에는 무수한 가시가 돋혀 있었다.

이 동굴에 기어 오른 지 두 시간. 방금 소총의 손질을 끝냈다. 두 달 남짓, 누더기로 감싸 동굴 안 바위 위에 올려둔 소총은 싸리를 박아 놓았던 탄도(彈道)를 남기고 거의 붉은 색깔로 변해 있었다.

엘·셋·세·엘(CCCP) 소련제 아식 보총. 그와 흡사히 녹슨 삼발의 탄환. 바닥에 스며드는 싸늘한 그 감촉.

현은 가만히 무릎에 놓은 소총 멜빵을 어루만져 보았다. 따각 하고 고리가 총신 복판을 치는 소리를 냈다. 견디기 어려운 죽음 같은 고요가 그의 전신을 엄습했다.

사르르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바위에 돋은 줄 잎사귀가 하늘거렸다. 그리고 뒤이어 풀숲에서 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외로움이 현의 가슴에 흘러들었다. 현은 그 외로움을 누르려는 듯이 두 팔을 가슴 위에 얹었다. 뚝 하고 동굴 천정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났다. 그는 가만히 고개를 돌려 어두운 동굴 안으로 들여다보았다.

31년 전 바로 이 동굴 안에서 그의 부친이 스물네 살의 짧은 생애를 끝마쳤던 것이다.

1919년 3월 상순. 일요일도 아닌 어느 날 하오. 서울에서 북으로 백여 리 떨어진 P고을. 이곳 조그만 교회 안에는 남녀 교인 삼십여 명의 조용한 모임이 열려 있었다.

한 늙은 교인이 일어서서 손을 움켜쥐며 고개를 숙이자 여러 교인들도 자리에 앉은 채 눈을 감았다. 노인의 기도 소리가 천정에 튀어 울렸다. 간간이 교인들 입에서 ‘아-멘’소리가 흘러나왔다.

기도가 끝나자 노인은 옆에 놓인 보따리를 풀어 차곡차곡 접어놓은 헝겊을 들어 한 장씩 나눠 주었다. 교인들은 말없이 그것을 펴 보았다. 그것은 삼색으로 물들여진 태극의 기폭이었다. 한 젊은이가 싸리로 깎은 한 묶음의 댓가지를 가져왔다. 모두 말없이 그 댓가지에 기폭을 달았다. 어떤 교인은 그것을 좌우로 가만히 흔들어 보고, 어느 젊은 여인은 기폭을 손으로 꼭 쥐어 보았다. 일행은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교인들의 경건한 얼굴에 갑자기 긴장의 빛이 떠올랐다. 교회를 나와 거리에 나서자 깃대를 나눠 주던 키 큰 젊은이가 선두에 섰다. 결의에 얼굴이 핀 젊은이는 번쩍 두 팔을 들며 만세를 절규했다. 삼십여 명이 그 뒤를 따랐다.

대한독립만세! 일행의 걸음은 갈수록 빨라지고 목이 터질 것 같은 만세 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몇 차례의 만세 소리가 그치면 흥분된 가락의 찬송가가 뒤를 이었다. ‘믿는 사람들아 군병 같으니 앞에 가신 주를 따라 갑시다…….’

이 때아닌 만세 소리에 문을 열고 내다보는 군중들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어떤 사람은 저도 모르게 밖으로 뛰어나와 뒤를 따라가며 마구 미친 듯이 만세를 불렀다. 창백한 얼굴과 얼굴. 찢어진 입부리. 휘청이는 다리와 다리. 감동과 공포에 찬 눈. 눈. 눈.

경찰서 가까운 싸전가게 앞에 군중들이 밀려갔을 때 목에서 째진 만세 소리는 마치 울음처럼 들렸다. 경찰서의 담장 위에는 밀물 같은 이 군중들을 기다리는 싸늘한 총구가 햇빛에 번득이고 있었다.

싸전가게에서 이 군중의 선두에 선 키 큰 젊은이를 발견한 혹부리 주인은 ‘악’하고 경악의 비명을 질렀다. 목에 달린 혹이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손발이 떨리고 눈앞에 확! 검은 장막이 내리는 듯했다.

“저 녀석이, 저 녀석이.”

하고 외쳤으나 그 소리는 목구멍 안에서 굴고 있었다. 무거운 덩어리가 머리 위를 꽉 짓누르는 것 같았다. 어이쿠! 주인은 그 자리에 털석 주저앉았다.

그러자 비명 같은 만세 소리에 뒤섞인 튀는 듯한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집안이 망했구나.”

주인은 가슴을 쥐어뜯었다. 뿌룩하면서 뜯겨진 옷고름이 떨리는 손아귀에 남았다.

또 콩을 볶는 듯한 총소리가 들려왔다. 만세 소리는 멎고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우루루 흩어져 달아나는 어지러운 신발 소리가 들려왔다.

주인의 눈에 총을 맞고 피를 흘리며 가게와 골목으로 뛰어드는 군중들이 보였다. 총알이 그 뒤를 좇았다. 주인은 번적 정신을 차렸다. 벌떡 일어나 버선발로 뛰어 나가자 가게 문에 덥석 손을 대었다. 그리고 미친 듯이 문짝을 뜯어 밖으로 내동댕이치기 시작했다. 마지막 한 장을 밀어던지고 몸을 날려서 방안으로 통하는 문짝에 손을 대었을 때 덩그레진 가게 안에 총에 몰린 몇 사람이 뛰어들었다.

경악에 눈고리가 찢긴 주인은 쌀 되는 글대를 들고 깨액하고 짐승 같은 소리를 지르며 덤벼들었다.

“나가아. 썩 나가아.”

고함이 목젖에 걸려 비껴나갔다. 이 주인의 기세에 그들은 다시 밖으로 뛰어 나갔다. 그 중 한 명이 가게 문턱을 나서자 총에 맞아 시궁창에 몸을 처박았다.

주인은 펄쩍 가게 한가운데 다리를 걷고 황급히 도사리더니 손으로 담뱃대를 끌어당겨 불을 그어댔다. 그리고는 눈을 꾹 감고 뻑뻑 담배를 빨았다. 군중을 좇아 총질하며 가게 앞까지 이른 경찰들은 사납게 일그러진 얼굴로 힐끗 안을 들여다보고는 그대로 달려가 버렸다. 그럴 때마다 한편 눈을 지그시 뜬 주인은 ‘허우’하고 한숨을 내어 쉬었다.

한 시간 후 피투성이의 시체가 늘어진 도로를 줄줄이 묶인 군중들이 개새끼처럼 끌려가기 시작했다. 경찰은 절름거리는 상한 다리를 총대로 후려갈겼다.

공포와 죽음의 그림자가 며칠 이 고을 위에 무겁게 뒤덮고 있었다. 여덟 명이 죽고 이십여 명이 상했다. 팔십여 명은 경찰서 유치장과 복도에, 그리고도 모자라 마구간에까지 꾸역꾸역 수용되었다. 그 안에서 밤새 무딘 신음 소리가 들려 나왔다.

일행의 선두에서 만세를 절규하던 젊은이는 총에 맞은 다리를 간신히 끌며 친구 두 명의 부축으로 그곳서 사십 리 떨어진 부엉산 산마루 동굴 속에 몸을 감췄다. 출혈이 심했다. 사십릿길에 염증이 생겼다. 몽롱한 정신 속에 고통을 견디는 젊은이의 얼굴에는 차차 죽음의 빛이 짙어갔다. 한밤을 신음으로 지낸 젊은이는 날이 밝자 친구가 떠다준 골짜구니의 얼음같이 찬 냇물을 마시고 죽었다.

다음 날은 비가 내렸다. 살아남은 두 명은 이 동굴까지 뻗친 경찰의 손에 잡혀가고 젊은이의 시체는 그의 부친에게 인도되었다. 싸전 주인인 젊은이의 부친은 눈물 한 방울 없이 아들의 시체를 공동묘지에 묻었다. 그는 죽은 아들을 가엾다기보다 증오했다.

“이것은 내 아들이 아니오.” 하고 냉정히 딱 자른 그의 한 마디는 일경이 입회한 탓만이 아니었다. 애비를 두고 죽은 자식은 자식이 아니라 요물이라는 것이었다.

본가에 갔던 며느리는 소식을 듣고 몇 번 기절한 끝에 간신히 몸을 가누어 달려와 남편의 무덤 앞에서 한밤을 새웠다. 아침에 사람들이 묘를 찾아 갔을 때 흙투성이가 된 며느리는 거의 실신한 병자같이 되어 있었다.

스무 살에 과부가 된 며느리는 본가에 돌아가 아홉 달 만에 아들을 낳았다. 이름은 현이라고 불렀다.

한 달 후 어린 것을 안고 시집을 찾아간 며느리는 시아버지가 석 달 전에 맞았다는 젊은 여인에게 머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를 드려야 했다.

며느리를 데리고 공동묘지를 찾아갔다 돌아오는 길. 주인은 말없이 ‘헙, 헙’ 느끼기만 했다. 며느리는 자기보다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시아버지가 대문을 들어서자 왈칵 목에서 피를 토하고 거꾸러지는 것을 부축해야 했다.

사흘만에 정신을 가다듬은 주인은 며느리더러 손자를 두고 본가로 돌아가 때를 보아 재가를 하라고 일렀다. 그러나 며느리에게는 이미 남편과 같이 지냈고 또 남편이 죽은 이곳에 머무를 결심이 되어 있었다. 며느리는 조용하고도 분명한 어조로 시아버지의 분부를 거절했다. 그때부터 현의 모친의 눈물과 피와 땀이 엉킨 30여 년의 인종의 삶이 시작되었다.

싸전 주인은 이 일 년 간 갑자기 얼굴에 깊은 주름이 파이고 머리와 수염이 회색으로 변했다.

고노인(高老人)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고노인은 자라나는 현을 냉랭히 대하는 듯하면서 남모르게 귀해 했다. 현이 계집애가 아니고 사내라는데 있었다. 그러나 자기의 핏줄을 보는 고노인은 어린 현에게서 때때로 어두운 그늘을 보는 듯했다. 그렇게도 맹랑하게 죽은 자식, 그 자식의 생명을 이어 그렇게도 야릇이 태어난 손자.

고노인은 아들이 죽은 다음 해 가을 P고을에서 이백여 리 떨어진 곳에 모셨던 선친의 무덤을 파서 뼈를 옮겨다가 부엉산에서 건너다보이는 저편 산허리 양지바른 곳에 이장했다. 선친의 묏자리 탓에 아들에게 화가 미친 것이라는 늙은 풍수장이의 얘기를 들으며 고노인은 이제는 마음 든든하다는 듯이 굳게 어금니를 물었다.

다음 해 겨울 고노인은 아들 영선을 보았고 또다시 겨울이 찾아오기 직전에 죽은 아들의 뼈를 옮겨다 선산발치에 묻었다.

그것은 현이란 핏줄을 남긴 탓이며 자라는 현에게 바랄만한 싹이 보인다는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며느리에게는 엄격했다. 첫째 아들이 죽은 책임의 절반은 며느리의 타고난 팔자에 있었다는 것, 둘째 젊은 과부가 어느 때 어떻게 될 것인지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고노인은 본시 여자란 것에 한 푼 가치도 두지 않고 있었다.

그러한 고노인이 현에게 떼어준 강 건너 논밭 몇 마지기가 현의 모친의 손을 갈구리같이 만들어 놓았다.

현모는 거의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땅을 다루었다. 어린 현은 노끈에 매어져서 밭머리 나무 밑에서 놀았다. 해가 떨어져 어두운 길을 더듬어 두간 방인 초가로 돌아올 때면 스며드는 외로움이 시달인 팔다리를 더욱 쑤시게 했다. 저녁을 먹고 누우면 과로한 탓으로 앓는 소리를 했다. 앓는 소리는 때로 울음소리로 변했다.

고노인은 여전히 싸전을 보며 때때로 생각나듯이 강을 건너와 현을 보고 갔다. 어느덧 현은 할아버지가 말없이 옷고름에 매어주고 가는 동전(銅錢)냄새를 그리워하도록 자랐다.

가혹한 현모의 삶에 마음의 의탁은 현이 자라가는 것을 보는 기쁨이며, 고노인의 눈을 꺼리며 일요일마다 찾아가는 교회의 복음이었다.

교회에 들어서면 현모는 거기서 어느 때나 남편의 체취를 느낄 수 있었다. 드높은 천정에 울리는 그윽한 오르간의 선율. 하나님을 찬송하는 노래와 경건한 기도 소리. 예상하는 피안의 안식처에서가 아니라 바로 그곳에서 남편을 대할 수 있었다.

찬송가의 가락에서 남편의 음성을 느끼고 기도 속에서 남편의 모습을 그릴 수 있었다. 환상이면서 그것은 더욱 가까이 있는 것. 상한 마음과 시달린 팔다리의 아픔을 잊게 하는 것. 현모는 이처럼 일주일에 한 번 교회 안에서 남편과 상면하고 있었다. “퍽 괴로워요.” “얼마나 고생이 되겠오.” “보세요, 현은 이처럼 자라고 있어요.” “당신이 그처럼 애쓰는 탓이오.” “언제나 당신 옆에 갈 수 있을까요.” “현이 곧 나요. 나는 항상 당신의 옆에 있는 것이오.” “저를 도와주세요. 견디기 어려울 때가 많아요.” “주께서 도와주실 것이요, 주께서는 모든 것을 살피고 계시니까.” 현에 대한 ─남편에 대한 흠모─거기 하나님의 깊은 은혜가 있었다.

현이 네 살 되던 해 가을.

고노인은 현모보고 현을 계속 교회에 데리고 가려거든 그대로 맡겨 둘 수가 없다고 일렀다. 그때부터 현은 일요일이면 할아버지 싸전에서 놀았다. 어린 현에게는 아버지라는 개념이 극히 희미한 것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저 높은 하늘나라에 계신다는 어머니의 얘기. 푸른 하늘과 흐르는 구름과 은하수.

그러므로 애비 없는 자식이라는 걷잡을 수 없는 모멸보다 오히려 현에게는 할아버지의 목에 달린 혹을 조롱당했을 때의 충격이 더욱 강렬했다.

현은 어느 일요일 할아버지의 혹을 두고 조롱하는 싸전 근처의 애들에게 맹렬히 대들어 얼굴에서 피를 내고 갈갈이 옷을 찢긴 일이 있었다.

할아버지의 명예를 위해 싸운 자랑에서 현은 의젓이 할아버지에게 사연을 얘기하고 은근히 공명과 찬사를 기다렸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입에서 떨어진 것은 뜻밖에도 질책이었다.

“뭐? 혹 얘끼! 그래─ 그렇다고 ─ 이런 꼬락서닐하고 누구하고? 머? 김주사 아들녀석을? 이런! 야 이 녀석아 웬 말썽이냐, 제발, 네 애비처럼─!”

허둥지둥 가게를 달려나가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어린 현의 가슴에 예기치 않았던 불안이 밀려들었다. 할아버지에게 가해진 모멸. 분연히 일어선 행동의 동기. 용감했던 대결. 까닭 모를 할아버지의 심뇌와 분노─그것은 마치 주인에게 대드는 사람에게 덤벼들다 되려 주인의 몽둥이를 맞고 꼬리를 거두는 개에게 비길 수 있는 의혹과 환멸의 감정이었다. 그 후 현은 그러한 경우 말없이 발길을 돌렸다. 처음에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으나 나중에는 되려 일종의 쾌감까지 느끼게 되었다. 현이 열 살을 넘으면서부터 가끔 죽은 아버지 얘기를 물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현모는 초점 없는 시선을 저편에 부으며 흠모와 자랑에 떠는 목소리를 일렀다.

“참 훌륭한 분이었어. 남을 위하는 마음이 두터웠고 바른 일을 위해서는 무엇이고 두려워 하시질 않으셨지. 야학을 짓고 애들을 가르치기도 하시고 지나가는 가엾은 행인을 그대로 보내시는 일이 없었지. 그리고 이 고을에서 너의 아버지처럼 의젓한 이는 또 없었단다.”

그러고 현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고는 그 눈매와 입 언저리에 죽은 남편의 모습을 엿보고,

“아버지 얼굴을 보려거든 거울을 들여다보렴.”

하며 손가락으로 현의 머리를 똑똑 두드리곤 했다. 가엾고 귀여운 내 아들. 단 하나의 내 생명.

그러한 현모에게 있어서 돌아간 남편에게 내리는 고노인의 가혹한 평가는 가슴을 에이는 아픔을 주었다.

그것은 현이 열일곱 살 나던 해 여름. 바깥은 햇빛이 내려 쏟던 어느 날.

고노인은 자기는 아들의 묘에서 멀찍이 떨어져서 현더러 절하게 하고는 자리에 제물을 펴놓고 먼저 한 잔을 마시고 나서 또 한 잔을 따라 현보고 마시라고 일렀다.

현모는 그것을 보고 고개를 돌렸다. 현이 놀라면서 머뭇거리는 것을 보자 고노인은,

“너두 이젠 마실 나이가 되었느니라.”

하며 손을 흔들어 재촉을 했다.

현은 그래도 잔을 들고 주저하다가 간신히 한 잔을 삼키고는 느껴서 기침을 했다.

“술은 어른 앞에서 배워야 하느니, 그래야 술버릇이 점잖아지지.”

“─요즘 젊은 녀석들은 버릇이 없어. 신학문 했다는 녀석들은 버릇이 없어 탈이란 말이야.”

“…………”

“신문학이니 뭐니 하지만 글은 제 이름자만 쓰면 족한 것이고 예의범절은 명심보감 한 권이면 알아본단 말이야.”

“근데 할아버지! 돌아가신 아버지 얘기 좀 들려주세요.”

“음, 네 애비가 사람은 똑똑했지, 유달리 영특하였기에 나는 내 앞장감이 생겼다고 적지아니 바란 것이 있었다만 이르는 말을 안 듣고 ‘야소교’를 믿기 시작해서부터 잘못 되어갔지.”

고노인은 저편 언덕에 햇살을 받고 눈부시게 솟아있는 예배당을 내려다보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현모는 고개를 숙인다.

“그때부터 네 애비는 묘에 가서 간신히 절은 했다만 죽어도 음복은 안 했거던, 절조차 어디를 보고 했는지 모르지, 조상을 위하는 미풍을 저바리구 생고집만 부리다가 그 몰골이 되고 만 것이지, 어디서 흘러왔는지 그 ‘야소교’란 귀신이 탈이란 말이야.”

현은 말없이 풀을 뜯고 있는 어머니를 훔쳐보고 취기를 느끼며 다시 물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훌륭한 일을 하시고 돌아가신 것이라고 저번에 선생님도 말씀하시던데요.”

고노인이 버럭 화를 내고 소리를 질렀다. 성성한 흰수염이 떨렸다.

“어떤 놈이 그런 소릴 하든, 훌륭한 일을 했다구, 애비 두고 죽은 불효자가 훌륭하다든, 네 어미를 청상과부 만든 것이 훌륭하다든.”

“그러나 나라를 찾으려구 한 일이 아닙니까.”

현모가 현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눈짓을 했다.

“나라라구, 그래 그 놈의 나라가 뭘 하는 나라랬다든, 벼슬하는 놈들만 버티고 앉아서 백성들 것 모조리 훑어가기질이나 하구. 안내면 잡아다 볼기나 치구 그런 놈들의 나라가 뭣이 아쉬워서 도루 찾느니 뭐이니 야단이냐 말이다. 나라를 판 놈들도 바로 그놈들인 걸, 그래 그렇지 않다 치고 나라를 찾는다니 뭐라고 제가 나서서 야단을 했다는 거냐.”

“그러나 할아버지.”

“글쎄 그때보다야 지금이 살기가 낫고 사람들도 많이 깼지. 네 애비 죽은 생각을 하면 나도 가슴이 아프다만 그래 어리석은 짓을 했지 뭐이냐, 그 총칼 가진 놈들 앞에 무슨 수가 있겠다구 맨손으로 덤벼들었단 말이냐, 죽을려구 환장을 한 것이지.”

“…………”

“네 애비가 살아 있었으면 네 어민 무슨 고생을 그리 하겠느냐. 나는 네 어미 볼 때마다 죽은 네 애비가 고얀 생각이 들더구나.”

고노인의 음성이 차차 젖어들었다.

“네 애비가 살아 있었으면 이 늙은 것두 오죽이나 편하겠니, 요즘은 도무지 습증 때문에 요동을 할 수가 없으니 말이다.”

잠시 입을 다물었던 고노인은 이마의 땀을 훔치고 다시 노기 띤 소리를 질렀다.

“그래 네 애비 훌륭한 일 했다니, 그놈들은 어째서 번번이 살아서 너한테 쓸데없는 귀뜨임을 한단 말이냐, 고을놈들도 봐라, 네 애비가 죽은 뒤에 무어 들어주는 놈 하나 있느냐, 이런 놈의 세상이니라. 네 애비를 쏜 놈두 일본 놈이 아닌 같은 조선종자 보조원 녀석이었느니라. 네가 공립중학엘 못가고 사립을 가게 된 것두 그 때문이 아니냐.”

현의 등 뒤에서 현모의 참고 견디려고 애써도 새어 나오는 오열이 들려왔다.

“사람이 순리대로 해야 하느니라. 나라 뺏긴 것이 좋을 리야 있으랴만 종자가 원래 제 구실 못하는 말종이니 말이다. 그리구 언제는 나라가 사람 살렸다든, 그저 세상 형편에 따라 제 주먹으로 제 일 처리를 해야지. 믿을 것은 자기밖에 없느니라. 딴 녀석을 위해 손가락 하나 까닥거릴 것도 없고, 손톱만큼이라두 남의 도움을 바랄 것도 없이 제 몫으로 제 살림을 해야지.”

고노인은 얘기를 그치고 현모를 건너보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얘기가 좀 과했나보다만 말인즉 그렇다는 게지.”

고노인은 담배를 한 대 담아 물고 으흠으흠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이젠 집으로 돌아가자.”

하고는 먼저 일어서서 뒤도 안 보고 성큼성큼 산을 내려갔다.

집으로 돌아온 현모는 눈이 붓도록 울었다. 그리고 현더러 다시는 할아버지 앞에서 아버지 얘기를 꺼내지 말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현은 할아버지의 얘기가 그처럼 가혹한 것이기만 하다고 생각지는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부친의 죽음을 할아버지처럼 생각할 수는 없었다.

오직 그때 부친이 그렇게 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한 어쩔 수 없었던 마음 가운데의 그 무엇, 빈손으로 의젓이 죽음과 대결하고 생명을 태웠던 그 무엇에 대한 모색과 두려움이 현의 첫 술에 타는 가슴 속에서 사납게 회오리치고 있었다.

현은 중학에서 수영선수를 지낸 일이 있었다. 그것은 현이 운동에 특별한 관심을 둔 때문은 아니었다. 알몸으로 혼자 물속에 몸을 담그고 마음대로 헤엄칠 수 있는 것이 번잡한 어느 운동보다도 현의 성격에 맞았던 것이다.

어느 날 현이 늦게 혼자서 헤엄치고 있을 때 그것을 엿본 수영 코치는 즉석에서 그를 선수단 속에 집어넣었다. 선수생활에 필요한 얼마간의 금전 지출에 고노인은 비위를 상했다.

“학교엘 보내면 공부나 할 게지, 돈을 들여가며 헤엄이란 무슨 짓이냐, 헤엄 잘 치는 놈 물에 빠져 죽는 영문도 모르는군.”

그러한 할아버지의 비위 때문이 아니라 현은 곧 수영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규정에 얽매인 조직생활. 한 초를 다투는 경쟁의식.

그것은 거침없이 뛰놀 수 있는 수영을 견디기 어려운 한 가지 체형으로 만들었다.

일 년도 못가서 현은 애원하다시피 간청한 끝에 선수생활에 종지표를 찍고 말았다.

그 후 현은 식물채취에 취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산과 들을 헤매다니며 가지각색의 화초를 채취하는 데는 특별한 즐거움이 있었다. 허리가 굽은 식물학 선생과 함께 들을 헤매는 한나절, 한 마디 대화도 교환 않는 것이 예사였다. 지쳐서 누우면 높고 푸른 하늘에 흐르는 구름이 눈을 시울게 했고 말없는 꽃과 풀줄기에서 흐르는 생명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오학년 되던 해 초여름.

시간을 마친 M선생이 교실을 나서자 그 자리에서 일경 고등계에게 끌려가고 이튿날 같은 반 학생 두 명이 붙들려간 현과 같은 P고을 출신인 R을 포함한 다섯 명이 행방을 감춘 사건이 일어났다.

젊고 팔팔한 M선생은 시간이면 가끔 암시적인 얘기를 하는 적이 있었다. 그 어조에서 항상 냉소하는 가락이 섞여 있었다.

들려오는 사건의 내용은 M선생이 주최하여 몇 명의 학생이 불온한 독서회를 열었고 모종의 과격한 행동까지 꾀했다는 것이었다. 현은 어느 땐가 R한테서 그런 권유를 받은 일이 있었으나 당장 해야 할 숙제나 시험만 해도 자기에겐 과중하다고 거절했던 일을 생각했다.

끌려간 M선생은 학생들을 은근한 여론 속에서 하나의 우상이 되고 말았다. 더욱 옥중에서 쪽지를 보내 학생들을 격려했다는 소문이 어쩔 수 없는 흥분의 도가니를 이루게 했다.

며칠 후 현은 R의 부친이 외아들의 행방불명과 경찰의 추궁에 기겁해 뇌빈혈로 돌아갔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그는 어쩐지 그 도가니 속에 흔연히 몸을 담글 수 없는 주저를 느꼈다.

─무엇을 하려고 한 것일까. M선생 혼자서는 단행할 수 없었던 그런 거대한 일이였을까. 연행해 가던 형사의 굵직한 팔다리. 창백한 얼굴에 안경알만 빛나던 M선생의 메마른 얼굴. 옥중에서 연락된 종이쪽지. 우상화. 흥분의 도가니. 소년잡지에 나오는 모험담. 팔인 조 소년 모험담 단장. R의 행방. 부친의 죽음. 전과 다름없이 이어져 가는 생활. 눈앞에 닥친 시험.

이듬해 봄, 현은 학교를 졸업했다. 친구들이 고등학교니 전문대학이니 서두는 때에도 현은 오직 집으로 돌아갈 생각만 하고 있었다.

현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담임선생도 너무나 무관심한 그 태도에 놀랐다.

“이만하면 저는 족합니다. 무리를 할 생각은 없습니다. 저는 집에 돌아가 어머니 모시고 편히 살아갔으면 합니다.”

“그러면 인생에 대한 아무런 목적도? 청년다운 아무런 야망도?”

“네, 남을 괴롭히지 않고 그저 저는 저대로 살아간다는 것, 저는 그것뿐입니다.”

현은 돌아가는 차 안에서 눈앞을 스치는 낯익은 시골풍경을 내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저 나대로 살아가겠다는 것은 할아버지 같은 그런 생각일까. 아니 할아버지와는 다르다고 생각되지만, 설혹 같은 것이라면 그것이 또 어떻다는 것이냐. 인생의 목적? 야망? 포부?─

모두 그에게는 걷잡을 수 없이 희미한 술어에 지나지 않았다.

─남이야 어떠하든 내야 얼려들 것이 무엇이랴.─

검푸른 부엉산 밑에 질펀한 들이 눈앞에 전개되고 창문으로부터 흙냄새 섞인 바람이 날아 들었을 때 상쾌한 아픔이 찌르르 가슴을 스쳐갔고 전류 같은 흥분이 전신의 혈관을 굽이쳐 흘렀다.

그리운 땅. 그에게 있어서 오직 이것만이 분명한 것이었다.

현은 어머니의 힘을 덜어주는 일이 즐거웠다. 모자가 같이 아침을 치르고 들로 나가 밭을 갈고 씨를 뿌렸다. 현이 삽으로 도랑을 칠 때면 어머니는 삽에 맨 줄을 당겼다. 저녁이면 어머니는 먼저 돌아가 밥을 지어놓고 민요처럼 찬송가를 부르며 아들을 기다렸다. 푸성귀 찬이나마 그것은 철에 맞아 신선한 맛이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도 어머니는 일요일의 예배를 빠지는 일이 없었다.

흰 무명옷으로 차린 어머니가 성경책을 들고 싸리문을 나설 때마다 현은 그 뒷모습에서 젊었을 시절의 어머니를 그려보곤 했다. 어머니의 그 얼굴에서 슬픔과 신고의 그늘을 거두면, 아직도 꺼지지 않은 아름다움의 자죽이 피어져서 현의 안막에 젊은 어머니의 얼굴이 되살아오는 것이다. 그리고 오랜 세월 오직 자기에게 바쳐진 희생된 어머니의 젊음에 생각이 가면 현의 마음은 스스로 암연해지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무병한 어머니는 때때로 허벅다리를 어루만지며 신음하는 때가 있었다. 현이 걱정을 하면 어머니는 까닭 없이 얼굴을 붉혔다. 한번은 몹시 열을 내고 몽롱한 상태에 빠져 거리의 의사를 부른 일이 있었다. 무슨 까닭인지 어머니는 흐릿한 정신 가운데서도 두 손으로 한편 허벅다리를 꼭 누르며 의사의 진단을 거부했다. 현은 그 손을 물리치고 어머니가 손으로 누르던 곳을 들여다보았다. 무릎 가까이가 몹시 곪기고 붉은 줄이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현은 그 붉은 줄의 좌우에 생생히 남아있는 무수한 상흔을 보았다.

그것은 끝이 뾰족한 것으로 찔러서 내인 상처였던 것이다. 그 상처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현이 그것을 깨닫기에는 그로부터 오 년이 지나야 했다.

일 년이 흘렀다. 그 해 추석. 묘지에서 돌아온 현은 마당 꽃밭을 가꾸고 있었다. 현의 집 꽃밭은 이 마을뿐 아니라 강 건너 P고을의 어느 가정에서도 볼 수 없는 화려한 것이었다. 이른 봄부터 늦은 가을에 이르는 동안 십여 종의 꽃이 뒤이어 마당을 장식했다.

마루에 걸터앉아 현의 넓직한 어깨에 시선을 붓고 있던 어머니가 혼잣말처럼 얘기했다.

“영선이는 내년에 대학을 간다지?”

“뭐 그런답니다.”

현에게는 아무 흥미도 없는 화제였다.

“너는 그대로 집에서 농사나 지을테냐?”

“녜?”

현이 휙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어머니는 시선을 땅에 떨구었다.

현은 손을 털고 일어서서 어머니 옆에 와서 앉았다.

“저는 어머니 모시고 이렇게 지내면 됩니다.”

부엉산 쪽을 바라다보던 어머니는 한참 있다 입을 열었다.

“나는 조금만 일삯을 사면 농사를 지을 수 있으니 할아버지보고 얘기해서 너두 대학에 가도록 하렴.”

현은 벙어리처럼 한참 말을 못했다. 이 일 년이 넘는 기간 어머니의 힘을 덜게 했다는 자위가 하나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현은 이 일순에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현은 바람에 흔들리는 흰 코스모스와 붉은 따리아를 보며 한참 시름에 잠겨 있었다.

─결국 무위에 그친 일 년 간. 어머니의 착한 가슴에 솟는 불퇴전의 의지. 그것은 사랑.─

그러나 어머니의 운명에 어떻게 할 수 없는 숙명적인 고독과 신고의 그림자가 뒤따르고 있는 것 같은 불안이 현의 마음을 어둡게 했다.

고노인은 아들 영선에게 글은 이름자만 쓰면 족하다는 원래의 처세철학을 적용시키지 않았다. 연소시부터의 적수 김주사의 아들이 연전 군수를 나간 때부터 마음에 기약하는 것이 있었던 때문이다. 현이 중학을 나올 수 있는 것도 고노인의 영선에 대한 교육열의 부산물이었을지도 몰랐다. 현은 차라리 할아버지가 완강히 거부했으면 했다. 그러나 고노인의 도리(道理)는 현의 청을 최소한도의 출혈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다음해 봄에 현은 낡은 트렁크를 들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아름다운 나라라고 생각했다. 사람들도 생각한 것보다 인정이 있고 살뜰했다. 그러나 어딘지 빈틈없이 빡빡한 것이 싫었다.

엄지발가락을 겹쳐 놓은 앉음앉음이에서 정신을 가다듬는다는 자학. 칼질하는 것조차 도(道)로써 불려지고 부정을 탄다는 지붕 밑에 무리하게 기를 쓰는 육체의 힘. 일본은 그때 이미 전 중국을 석권하고 있었으나 현은 놀라움보다 어딘지 요기(妖氣)가 감도는 인상을 받았다. 일본도의 푸른 날. 번득이는 찰나에 떨어지는 사람의 모가지. 정예의 천황의 군대와 빈약한 미훈련의 중국군. 어렸을 때 P고을에서 본 호떡집 주인의 모습.

삼 년의 예비단계가 끝나고 학부에 들어가는 날 백발의 총장은 점잖은 어조로 대학생활의 커다른 하나의 소득은 좋은 벗을 얻는데 있다고 했다. 그러나 현은 친구라면 친구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정도의 ‘아오야기’라는 한 명의 일인학생과 가까워졌을 뿐이었다. ‘나가사끼’(長崎) 출신인 ‘아오야기’는 소위 만주사변에 부친을 여의고 잡화상을 경영하는 어머니의 밑에 자라난 독자였다. 핏기 없는 얼굴을 하고 이가 높은 ‘게다’를 신어야 키가 겨우 현의 귀밑에 닿았다. 그렇게 흡사히 외로운 경우에서 자라난 두 성격이 서로를 당겨서 가까이 했는지도 몰랐다. ‘아오야기’는 즐겨 ‘다꾸보구’의 노래를 읊었다.

동해의 작은 섬 바닷가 흰 모래터에

나홀로 눈물젖어 게와 노닐다

그는 항상 가락을 붙여 이 노래를 불렀다.

현이 대학생활에서 얻은 지식은 강의에서보다 오히려 독서에 있었다. 당시 일반학생들의 교양에 다대한 영향을 준 영국 옥스퍼드학파의 이상주의 철학에 관한 서적이 그를 매료했다. 거기에는 개인존재에 대한 깊은 배려와 이상에 대한 겸허하고 불타는 정열이 있었다.

일부 학생들은 그런 것은 자본주의의 마지막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웃으며 그때 아직도 꺼지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한 구석에서 타고 있던 ‘맑시즘’에 대해 이상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물론 거기에는 종전의 사상과는 판이한 새롭고 직선적인 논리의 명확한 전개가 있기는 했다. 그러나 도식화한 관념으로 역사를 판가리하고 집단의 위력으로 인간을 조여 틀에 박으려는 살벌한 냉혹과 숨막히는 병적 흥분이 있는 듯했다. 그것은 차차 일인학생들 간에 젖어들기 시작한 전체주의 경향과 흡사한 체취를 풍기고 있어서 현은 본능적인 혐오를 느꼈다.

현에게는 현실의 국가적 요구에 응해야 하는 긴박한 조건도 눈앞에 매어달린 긴급한 과제도 없었던 까닭에 별다른 제약 없이 그 성품에 맞는 의론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현에게 있어서 결국 종이 위에 씌어진 인간의 하나의 꿈으로서 직접 그의 행동에 변동을 일으키는 힘은 가지고 있지 못했다. 오직 현의 마음을 움켜잡고 있었던 것. 그것은 한 달에도 몇 번 꿈에 보는 P고을. 봄철에 피는 부엉산의 진달래꽃 내려다보이는 푸른 골짜구니. 여름이면 그 숲속에 열리는 산딸기. 목마르면 떠 마신 차디찬 냇물. 선산의 잔디. 마을사람들. 싸전을 보실 할아버지. 외로이 계실 어머님.

“해치웠어. 기어코 해치웠단 말이야.”

으슥히 추운 겨울에 들어선 어느 날 ‘아오야기’는 한 장의 호외를 움켜쥐고 현의 하숙으로 뛰어 들었다. 진주만 공격. 이어서 싱가폴 함락. 비율빈 상륙. 쟈바 상륙. 축하 행진. 광적인 흥분과 도취가 떠돌고 거리에는 국방색이 범람해 갈 때, 현은 어딘지 각본에 어긋나는 연극이 연기자도 관중도 예기할 수 없는 엄청난 종막을 향해 줄달음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동양윤리를 강의하는 ‘다까다’ 교수는 갑자기 엄숙한 표정을 짓게 되었고 서양문명의 몰락과 절망, 동양의 정신문화의 세계사적 의의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날도 다가다 교수는 마치 십억 아시아 민족 전체를 눈앞에 놓은 듯이 신이 나서 떠들어대고 있었다.

“오노오노 소노 도고로워 에시무…… (각기 그 응당한 자리에서 서게 함……)이란 만고불역의 진리다. 개인을 절대적 단위로 하고 무원칙적인 평등과 무제한한 자유를 목적으로 한 서구의 사회질서는 극도의 혼란을 조장케 되었고 그 문명은 바야흐로 몰락의 과정에 돌입하게 되었다. ……으흠.”

“그러므로 일찍이 니이체나 슈펭글러는 솔직이 그들 자체의 몰락을 예언했고─”

“─서구사상 자체의 모순의 필연적 기형아로서 출생한 유물 변증법은 계급투쟁을 도발하여─서구의 기계문명은 총와해에 직면해 있고─이때야말로 빛은 동양으로부터─천손(天孫) 민족의 궐기할 때는 당도한 것이다─”

“‘오노오노……’(그것은 존재의 조화원리를 투시한 것이며 겸허한 인간정신의 가치를) ‘고에 다까라까니 우다우꼬노’ (소리 드높이 노래하는 것)이다─”

이까지는 또 몰랐다.

“역사적 대사명─팔굉일우(八紘一宇), 얼마나 장엄한 선언이냐─대동아 공영권 건설의 정신이 바로 이것이다─미영의 굴레에서 억압된 황색민족을 해방하고─새로운 아시아의 질서를 회복한다─일본은 그 맹주(盟主)가 되는 사명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비장 차 장엄한 사명이냐.”

그래서?

“따라서 국민 각자는 높은 긍지를 파지하고 전아시아 창생의 구출과 나아가 거룩한 정신을 펴기 위해─자아를 멸하여 이 대목적에 헌납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의 섭리인 것이다. 그것은 얼마나 빛나는 영광이겠느냐!”

“보라, 들에 노니는 축생일지라도 그들 자신을 멸함으로써 그 가치를 발휘하고 있지 아니하냐─그들은 그들의 한 가닥 뼈마저 달게 인간을 위해 바치고 있는 것이 아니냐, 창생의 절(絶) 섭리의 묘(妙).”

달게?

“축생조차 그러하거늘 하물며 인간에 있어서랴. 아시아 민족이 각기 그 응당한 자리에 서게 하기 위해서 자아를 멸하여 대의에 살아야 한다. 슬프고 아름다운 인간존재의 대원칙이다.”

불쾌!

거기에는 현의 부친도 그 희생자의 단 한 사람인 평화적 시위의 군중에 총탄을 퍼부은 일경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할아버지와 같은 무원칙적 순종의 인생을 요구하는 강요가 있었다. 천손 일본민족과 아시아의 여러 민족. 인간과 축생. 고양이와 쥐와의 우애와 단합.

더욱 현의 비위가 상한 것은 교수의 고고한 것 같은 표정과 강의답지 않은 웅변에서 누구도 원치 않는데 스스로 나서서 결과적으로 남을 괴롭히는 선민의식과 값싼 영웅주의적 감상, 그리고 자기기만을 발견한 것이다. 현은 어느덧 자기 손이 들려진 것을 깨달았다. 교수는 유창한 자기 강의에 취하고 있다가 얘기를 멈추고 불쾌한 얼굴을 했다.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자아멸각과 대의에 순해야 한다는 뜻은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소나 돼지가 인간을 위해 달게 그 생명을 바친다고 하셨는데─물론 인간은 그들 고기를 부득이 먹어야겠지오─그런데 저는 어렸을 때 도살장에 가 본 일이 있습니다. 소는 도살장에 끌려들어갈 때 발을 버티고 들어가기를 주저했습니다. 특히 돼지 같은 것은 굉장한 소리를 지르며 야단을 하다가 도살당하는 것을 보았는데─그들은 결코 달게 그 생명을 바치는 것 같이는 안 보였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약간의 설명을─”

교수는 쓴웃음을 짓고 학생들은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러나 저도 모르게 웃고난 학생들도 웃음이 사라지자 석연치 못한 것을 느끼는 것같이 보였다.

현은 자리에 앉으며 벌서 자기의 행동을 후회하고 있었다. 교수가 불쾌히 생각한다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공연히 충동을 받고 발끈하고 일어선 자기의 멋이 싫어졌던 것이다. 십억 아시아민족의 청탁이나 받은 듯이 스스로 일어서서 항의한 것이 싫어졌다. 그래서 어쩌자는 것이었던가?

“비유라는 것은 때로 오류를─. 그러나 이 경우는─동양인의 직관력은─”

중얼거리는 교수의 얘기가 귀에 들리지 않았고 그는 다만 자기혐오 속에 깊숙이 잠겨들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드러냈던 자기의 알몸이 부끄러워 다시 껍질 속에 몸을 처박는 소라와도 같았다.

철학사를 가르치는 젊은 ‘히다까’조교수는 ‘다까다’ 교수와 좋은 대차를 이루고 있었다. 명철한 두뇌와 섬세한 정서를 가진 그는 소집을 받고 떠나면서 찾아간 현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

“틀렸어. 모두 돌아있어. 늦으막이 세계역사의 조류에 뛰어든 일본은 한다는 모든 일이 엇먹고 있단 말이야. 칠십 년의 달음박질에 무리가 생긴 탓이겠지. ‘빅토리아’왕조의 꿈과 전체주의의 결합. 완전한 시대착오지. 중원(中原)에 사슴을 쫓는다. 이미 그런 시대가 아닌데. 중국민중에 대한 선무 하나 제대로 안 되는 모양이야. 그래서 전진훈(戰陣訓)도 나와야 하는 게지. 중국인은 되려 대범한데 이편에서 공연히 독이 들어 까부러대거든. 구할 수 없는 도국(島國) 근성의 비극이지. 전투엔 이겨도 승리를 거두기는 힘들어. 강력한 문화의 뒷받침이 없거든. 아시아민족의 해방, 좋은 말이야. 그렇다면 선결문제는 조선의 자치나 독립에 있었지. 기껏 한다는 것이 창씨개명, 성명을 고쳐 놓는다고 무엇이 되겠나, 웃지 못할 넌센스지. 나가긴 하네만 나는 이 나라의 국민된 죄로 국가가 뿌린 씨를 거두러 나가는 셈이야.”

그리고 중부중국으로 떠난 조교수는 일 년도 못 가서 전사하고 말았다.

다시 일 년.

전세는 반전(反轉)되기 시작했다.

병력증강에 따르는 하급간부의 부족을 느끼게 된 일군당국은 젊은 학생들에게 단기간의 훈련을 베푼 후 전열에 배치하는 안을 세웠다.

학도출신의 일대시위에서 돌아온 ‘아오야기’는 현을 찾아와 흥분에 익은 얼굴로 죽는 얘기만 했다.

“전쟁터에 나간다구 모두가 죽는 것은 아니겠지.”

“아니 죽는다는 결의가 되려 마음을 거울같이 맑은 심경으로 이끌어 가거든.”

산란하는 마음을 모으기 위해 아오야기는 기를 쓰고 있는 것이라고 현은 생각했다.

“이젠 마음을 남길 아무것도 없어.”

그리고 약간 어두운 표정을 짓더니,

“다만 어머니의 일이 걱정되기는 하지만 그도 전렬의 뒤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돌봐 주겠지.”

현은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토마스 그린 것과 학생총서는 자네한테 주지. 나는 『하가꾸레(葉隱)』하고 『만뇨슈(萬葉集)』 두 권이면 되네. 실토하면 고민이 없지는 않아,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아시아의 해방이라는 명분은 어떻든 하나의 구원이야.”

현은 가슴에 젖어드는 측은한 감정을 억제치 못했다.

─여기 어긋나는 하나의 톱니바퀴(齒車). 원치도 않는데 기를 쓰며 구해주려는 것은 고맙지 않은 참견─

깊은 밤 ‘아오야기’의 멀어져가는 게다 소리를 들으며 현은 고향에 생각을 보냈다. 일인 학생들을 휩쓴 회오리바람 속에서 벗어나 그는 한껏 고독한 자신을 발견했던 것이다.

앉은 자리에서 그는 어머니를 그리는 긴 편지를 썼다. 곧 모두 편안하며 허약한 탓으로 고향으로 돌아와 있던 영선은 면소에서 일을 보게 되었다는 회답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처음 못 마땅히 입맛을 다셨으나 지금은 아들을 안전한 곳에 잡아두게 된 것을 적이 만족하고 계시며 어느 때나 그러하듯이 편지의 말미에는 항상 너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있다고 씌어 있었다.

아오야기의 경우는 얼마 후 그대로 현의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와 다른 점이란 현에게는 어거지로 내세운 ‘아시아의 해방’이란 슬러건도 『하가꾸레』나 『만뇨슈』에 해당되는 책 한 권도 있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렇다고 독일 전몰학생의 수기도 당치 않았다.

현의 전쟁 참가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고향에 돌아오자 그는 어머니가 주는 얼마간의 돈을 가지고 해주(海州) 가까이서 어업조합장을 지내고 있는 외조부벌 되는 집으로 도망을 갔다.

며칠을 지낸 후, 현은 까닭모를 어떤 범죄의식에 못 이기기 시작했다.

─이처럼 엄습해 오는 불안감은 무엇일까. 울타리다. 울타리 안에 들어있는 것이다. 거대한 감옥으로 화한 울타리 안에서 뼈에 젖어든 옥안의 타부. 그것을 범하는 죄인의 불안. 날아올 간수의 채찍. 마련된 옥안의 옥─하나의 길은 있었다. 그러나 현이 이 울타리를 벗어나기에는 두리의 담장이 너무나 높았다. 다만 숨어있는 죄인일 수밖에 없었다.

이 주일 후 현은 날카로운 눈초리의 형사의 방문을 받았다. 그리고 기한 넘은 지원서에 이름을 써 넣어야 했다.

불안의 해소. 그것은 노예의 안도. 죄인의 굴종.

현은 해주를 거칠 때 하루 저녁 유행가 같은 멋으로 마음껏 술을 마셨다. 그리고 간단히 술집 여자와 몸을 섞었다. 홧김에 저지른 욕정에서 그는 처음 여자를 안았던 것이다. 이튿날 어지러운 정신으로 그 집을 나서며 연거푸 몇 번 헛구역을 했다.

집으로 돌아오자 자기가 붙잡힌 것은 유능한 일경의 조직망 탓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할아버지는 현의 도주가 다음해 중학에 들어가게 될 둘째아들 영선에게 미치는 영향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러나 현은 할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다. 자기 탓으로 어린 삼촌 영철에게 화를 미친다는 것은 현의 본의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P고을의 몇 친구와 함께 떠나게 되는 전날 현은 조용히 어머니와 함께 지냈다. 어머니는 대학에 가라고 이른 권고의 용서를 빌었다. 더욱 현모는 현의 나이가 꼭 돌아간 남편의 나이와 일치하는데서 어떤 불길을 느끼고 몸을 떨었다. 현은 어머니를 달래 쉬게 하는데 땀을 흘렸다. 벽을 보고 돌아누운 현모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기도만 드리고 있었다.

“주여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 죄인을 용서하시와……은혜를 베푸시옵기……이것은 단 하나의 죄인의 소원이온즉……”

원죄의식과 박명의 검은 강박관념의 굴레 속에서 갈피를 못 잡고 극도의 고뇌에 사로잡힌 현모는 자기에게 가해질 하나님의 형벌에서 그 아들을 제외해 달라고 애원했다.

“아들에 대한 사랑에서 주께서 부르신 남편에 대해 더욱 깊은 사랑을 느낄 수 있사옵는 이 죄인, 주어진 단 하나의 아들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옵는 믿음이 약한 이 죄인. 주여! 저의 깊은 죄를 용서하시와 아들의 생명을 구해주옵소서.”

현은 가슴을 치미는 대상없는 노여움에 떨었다.

─나는 내 자신이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신의 존재를 인정해왔다. 그것은 어머님의 신산한 생활에 마음의 편안을 주는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어머니는 까닭 없이 깊은 죄인을 자처하며 신 앞에 몸을 떨고 있다. 살고 있는 모든 인간이 죄인일망정 어머니는 죄인일 리가 없다. 형무관 같은 신. 이유 없는 원죄.

어머님. 나기도 전 옛 일에 책임을 질 수야 없지 아니합니까!

이튿날 역전에서 열린 환송식에서 군수가 격려사를 하고 서장이 만세를 선창했다. 함께 떠나는 B는 술이 만취해서 빈정대며 떠들어대고 있었으나 현은 그런 것이 무의미에 더욱 무의미를 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무표정한 얼굴로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현은 뒤죽박죽 앞서고 뒤서는 거친 군가를 들으며 군중의 대열에 버티고 서서 군수와 서장의 인사를 받고 있는 할아버지를 보았다. 할아버지는 그 뒤에서 손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있는 어머니를 돌아보며 간간이 타이르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이렇게 생각하시겠지. 내가 죽으러 떠나게 되는 것은 거역할 수 없는 천운이며 산소 탓이라고. 삼촌 영선이 허약해서 학교를 중퇴하고 면서기가 된 것이 또한 묘자리 탓일라고. 그리고 어느 경우가 어느 산소 탓인지 청룡, 백호부터 풍수의 원리를 뇌까리고 계시겠지. 아득한 때의 혼돈, 고온의 지체. 흐르는 용암. 풍화작용. 지술(地術) 무덤 속의 뼈다구.

나를 보낸 면목은 서고 영선의 탓으로 공출이 헐케 될 것을 만족하고 계시겠지. 그러나 할아버지 등 뒤에서 울고 계시는 어머니를 언짢다고는 생각하시지 마십시오─

그는 멀어져가는 부엉산 검푸른 산봉우리를 바라보며 차안에서 생각을 이었다.

─그렇다면 너무나 가혹한 일이지. 어떻든 죽고 싶지는 않은 일이다─

창씨한 탓으로 산자가 붙어 ‘다까야마’(高山)가 된 현은 일본 ‘나고야’부대에 입대되었다. 치중병이 되었다. 마구간 당번을 하게 되었다. 때로는 손으로 말똥을 긁어모아야 했다. 어느 달 밝은 밤. 말다리 밑에 기어 들어가 말똥을 긁어모으고 있다가 유난히 비쳐드는 달빛에 고개를 들었다. 둥근 달이 말의 배밑에 늘어진 거대한 것 끝에 걸려서 마치 손잡이가 검은 큰 놋주걱같이 보였다. 현은 히히히 하고 저도 모르게 웃었다. 덩그란 마구간 안에 웃음소리가 반향을 일으키는 것이 기괴한 감을 주었다. 갑자기 말한테 조롱당한 것 같은 모욕을 느꼈다. 이 자식한테! 치밀어 오르는 홧김에 삽을 들어 힘껏 그것을 후려갈겼다. 놀랜 말이 껑충 뛰자 현은 뒤로 쓰러졌다.

어느 일요일 일인 친구를 따라가서 마음껏 뱃속에 집어넣고 온 일이 있었다. 어떻게 먹었던지 씨걱씨걱 호흡이 곤란했고 자유로이 몸을 가눌 수조차 없었다. 그러고도 저녁에는 다시 한 그릇을 비웠다. 그날 밤은 밤새 변소 출입에 바빴다.

다음날 아침 관물 몇 가지가 분실된 것을 알았다. 분대장의 주먹은 현의 얼굴에서 폭발했다.

“자식아, 잃었거든 멍청하지 말고 딴데 것을 훔쳐와.”

그래도 이튿날 현은 취사장에서 얻어낸 누룽지를 가지고 간밤에 쪼그리고 앉았던 변소간에서 먹었다. 그것을 뜯으면서 현은 그린의 ‘의지와 인간의 도덕적 발전에 쓰여지는 자유의 각종 의미에 대하여’가 어떤 것이었던지 무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현에게 있어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모두들 두 줄로 마주 세워 놓고 서로를 두드리게 하는 일이었다.

개인적으로 손톱만한 원한이 없는 인간끼리 서로의 육체에 고통을 가한다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치면 때리고 때리면 치고 한참 그것을 반복하고 있으면 차차 서로에 대한 근거 없는 증오심이 끓어올랐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얼마나 덧없고 슬픈 일이었을까.

다음해 봄, 현은 북부중국에 파견되는 노병들 가운데 섞여 있었다. 황막한 중국 땅에 내려섰을 때 현은 틈을 타서 도주할 결심을 했다.

─구타, 학대, 잔인, 오만, 비굴, 허위의 범벅. 군대란 인간이 있을 데가 못된다. 그래도 명분이 있다면 참기도 하겠다. 그런데 내게는 털끝만한 명분이 없다. 어째서 내가 중국인을 죽여야 하는가─

얼어붙었던 대지가 철을 맞아 지르르 녹아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밤이 되면 추위가 뼛속에 스며들었다.

어스름 달밤. 현은 보초를 서다가 틈을 탔다.

덮어놓고 서쪽으로 달리면 된다는 막연한 계획이었다. 숨겨두었던 건빵 두 주머니, 통조림 한 통, 캬라멜 두 개를 끼고 밤새 허리까지 오는 마른 잡초 사이를 걸었다. 몇 번 뒹굴어 손등과 얼굴을 긁혔다. 끝없는 대지 위 칠흑(漆黑)속에서 현은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공포에 떨었다. 지구 밖 어두운 허공 속에 혼자 던져진 느낌이었다. 그대로 지옥으로 열린 문으로 향해 걷고 있는 것 같았다.

동쪽 하늘이 희미하게 밝아올 때, 현의 손에는 이미 소총이 없었다. 불그레 동쪽 하늘이 물들기 시작하더니 붉디붉은 커다란 덩어리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대로 대지에 못박혀진 현은 꼼짝 않고 그 장엄한 광경을 황홀히 주시하고 있었다. 아아! 이 커다란 것, 그 앞에 초라한 이 모습. 그는 갑자기 짐승 같은 소리를 질렀다. 아-악, 갸-악, 캬-악. 고였던 잡것이 터져나가는 가슴속에 태양은 새로운 생명을 부어 넣어 주는 듯했다.

이튿날 멀리 조그만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이르자 추위와 주림과 공포와 피로에 지친 그는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고 말았다. 현이 눈을 떴을 때 태양은 머리 위에서 빛나고, 대여섯 가옥의 인가 근처에는 주민 두 서넛이 얼신거리고 있었다. 좁다란 길이 현이 누운 언덕 밑을 지나 마을 쪽으로 뻗고 있었다.

중국인을 만나면 어떻게 해서 자기의 입장을 알려야 하는지 궁리가 나지 않았다.─마을로 가야 할텐데─몸을 가누기가 싫었다. 이렇게 그대로 영원히 누워 있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현은 그대로 망연히 언덕 바위틈에 기대고 누워서 나머지 몇 개의 건빵을 씹으며 마을 있는 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을 어구에 이리로 발을 옮기는 조그만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느릿한 걸음으로 언덕 밑길로 가까이 오고 있는 것은 단발한 앳된 중국소녀였다. 소녀의 출현은 현의 가슴에 말할 수 없는 그리움을 부어 넣었다. 소녀가 바위에 가까운 길을 지나갈 때 그는 똑똑히 그 검은 눈동자와 윤기 있는 빨간 입술을 보았다. 그리고 눈앞을 지나 저편으로 걸어가는 소녀의 불룩한 젖가슴과, 허리에서 허벅다리로 내리 흐르는 자극적인 선을 주시했다. 현은 저도 모르게 꿀꺽 생침을 삼켰다. 하반신이 취하는 듯했다. 벌써 그는 지난 이틀 밤의 공포를 깨끗이 잊고 있었다. 할단새. 히말라야에 산다는 가상적인 새. 밤새 떨면서 아침이 되면 둥지를 틀리라 마음먹고 해가 뜨면 깨끗이 잊고 만다는 할단새.

현은 두리를 돌아보았다. 넓은 이 벌판에 아무것도 움직이는 것이 없었다. 전신에 저린 감각, 단 한 번 이름 모를 여인과의 욕정에서 느낀 야릇한 감촉이 맹렬한 속도록 되살아왔다. 헛구역을 느끼던 환멸은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다만 그 따스하였던 체온만이─.

목이 타고 침을 삼키면 꼬르르 이상한 소리가 났다. 현은 자기 이성이 흐려져 가는 것을 억제치 못했다.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느덧 그 손에는 허리의 대검이 들려 있었다. 그때, 태양의 빛을 가리고 땅에 던져진 그의 그림자가 너무도 선명히 그의 눈에 뛰어들었다. 그는 꼼짝 않고 그림자가 보여주는 꼬락서니를 내려다보았다. 영화에서 본 타잔. 맹수를 노리는 타잔 맹수와 소녀. 타잔과 맹수와 소녀와 나. 휘휘 머리가 어지러운 듯하더니 번적 정신이 되살아오면서 가슴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만 그 자리에서 털석 주저앉고 말았다. 벌써 소녀는 멀찍이 저편을 걸어가고 있었다. 현은 얼빠진 사람 모양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이마의 땀을 씻으며 대검을 자루에 넣으려고 했다.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취한 듯한 하반신의 감각. 이 고기덩이가─현은 그대로 칼날을 허벅다리에 내리 질렀다. 욱! 붉은 피가 군복바지를 통해 쭈르르 흘러내렸다. 몸에서 욕정의 불길이 일순에 걷어졌다. 내의를 찢어 다리를 동여매고 그대로 바위틈에 몸을 뉘어 물끄러미 배어나오는 붉은 피를 보고 있었다. 그때 현의 뇌리에 지난날의 한 가지 일이 번개같이 스쳐갔다.

─어머니의 다리에 새겨졌던 그 무수한 상흔. 무수했던 무수했던 그 상흔─

어찌할 수 없는 애타는 그리움과 함께 어머니의 환상이 현의 안막에 떠올랐다. 그것은 인간의 가누기 힘든 서러운 조건에 항거하는 한 젊은 여인의 피는 듯 아름답고 처절한 얼굴이었다.

그와 함께 높은 가락의 노래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것은 대지 위를 뒤덮고 그의 머리 위를 감돌아 무한히 흘러가는 환각의 가락 어머니의 찬가(讚歌). 뒤이어 주림과 추위에 저린 현의 가슴 속에 인간의 슬픔과 고통이 회오리쳤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몇 방울의 눈물로 변해 아득한 대지 위에 뿌려졌을 따름이었다.

저녁에 현이 중국인 부락으로 내려가 한(漢)자를 써가며 사유를 납득시키고 따뜻한 한 그릇의 옥수수죽을 마실 때, 걱정 어린 눈으로 싸매인 다리를 응시하고 있는 그 소녀의 영롱한 눈은 현에게 끝없는 기쁨과 안도를 주었다. 그곳은 주로 팔로군이 유격활동하는 지역이어서 그 길로 연안으로 안내되었다. 그는 여기서 숨을 돌리기 전에 먼저 놀랬다. 토굴 같은 집에 살고 있는 그들의 양식은 수수밥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느 때고 그들이 활기를 칠 수 있는 세계가 오고 말리라는 확신이었다. 현은 중국거지 같은 초라한 모습을 한 김 모라는 노인에 접하고 아연했다. 인민의 해방이 머지않아 이루어지리라고 예언하는 김노인은 실은 까닭모를 복수심을 만족시키는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이었다. 공산주의 의론은 정감록(鄭鑑錄)과 다름없는 운명의 예언서. 다르다면 그것은 과학의 이름을 붙인 예언서라는 것, 김노인은 그것을 놓고 잃어진 자기반생의 몇 배를 미래에 충당할 수 있는 노다지판을 그리고 있었다.

그렇지 못하면 초라한 그 모습을 사진틀 속에 담아 벽에 걸리거나 그 이름이 당사(黨史)의 찬란한 한 페이지를 차지하리라는 개기름같이 번쩍이는 욕망.

인민의 해방이란 방정식에 절대적인 의미를 붙이고 이를 갈고 있는 이름은 말하자면 청탁자 없는 청부업자였다.

─도대체 이들은 어째서 그렇게도 남의 걱정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야단일까. 그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솜옷에 끄리는 이를 퇴치하는 것이 급선무일텐데.

아마 이들은 이들의 때가 오기만 하면 겪어온 빈궁과 고통의 몇 백 배의 보수를 요구하겠지─

현이 한 달도 못 되어 다시 이곳을 빠져나와 남만주에 잠복한 것은 1945년 7월 중순이었다. 넓고 어수선한 것이 중국의 대지였다.

만주에서 헤매던 현은 9월 중순이 지나 고향 P고을로 돌아왔다. 그 동안 소련군이 진주한 만주에서, 현이 목격하고 느낀 것은 인간이란 개 이하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약탈, 강간, 파괴, 살인. 현은 그 책임을 전쟁에서 돌려버리는 의견에 찬동할 수 없었다. 문제는 그러한 행동을 저지를 수 있는 본질적인 것이 인간에게 잠재해 있다는데 있었다. 그것은 오히려 개보다 못했다. 인간은 거기에 이유를 붙이기 때문. 어떻든 일본을 대신해서 인민의 해방자로 나선 청부업자 소련인들은 처음부터 그처럼 으리으리했던 것이다.

─원래 청부업자란 수지가 맞는 법이니까─ 현은 인간에 대한 실망과 환멸을 거쳐 이렇게 뇌까리고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남루한 차림으로 하고 낯익은 싸리문을 들어섰을 때 마루에 앉았던 어머니는 잠시 멍하니 현을 바라보다가 버선발로 뛰어나와 와락 현을 붙들고 울기만 했다. 동리사람들이 집으로 몰려들었을 때 어머니는 마루에 엎드려 소리를 내어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8·15를 당하고도 절실한 해방의 뜻을 느끼지 못한 현모는 이 순간에 남다른 해방감에 가슴이 터질 듯했다. 현모의 가슴 속에 굳게 뿌리박고 있던 원시종교적 숙명의식의 장벽이 소리를 지르며 분화구처럼 터져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현모는 그것이 터져나가 화안히 트이는 곳에서 소낙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는 듯했다.

고노인의 경우 8·15는 쌀공출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했다. 아들 영선의 덕을 보기는 했으나 워낙 냅들성 없는 영선의 힘이란 별것이 없었다. 고노인은 전쟁 말기의 일제당국의 처사에 대해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작은 꾀를 부려서 고런 짓을 했으니 망하지 않을 리가 있었겠느냐고 떠들었다.

아슬아슬 고비에서 38선 이남으로 책정된 이 고을에는 미군들의 풍부한 물자의 시위가 있었다. 모두가 놀라워 보이는 고노인은 둘째 아들더러 단단히 영어공부를 하라고 일렀다. 그리고 영선이 무사했고 현이 목숨을 건져 돌아온 것은 선친의 묘를 이장했던 탓이라고 더욱 풍수원리에 대한 믿음을 굳게 했다.

현에게는 몇 갈래로 찢겨 서로 엇먹고 켱기는 소용돌이가 모두 현실의 정곡에서 빗나가고 있다고밖에 보지 않았다.

해방이란 앉아서 얻어진 것. 그러므로 나서서 호통을 칠 이유도 없었다. 아무에게도 남에게 돌을 던질 자격이 없었다. 따지고 보면 있어야 할 것은 오직 얼굴을 붉힐 부끄러움과 조심성 있게 건너야 할 조용한 어조뿐이었다. 그런데 오고 가는 무수한 돌멩이와 고막이 터질 노호.

또한 논하자면 해방이란 당연한 것. 응당 있어야 할 것이 지금까지 그렇지 못했다는 것. 그런데 누구를 보고 국궁재배 아양을 떨어야 한단 말인가. ‘스파씨─바그다스나야 아─르미아’(고맙소 붉은 군대) 또 그렇지 않으면 어린애 같은 경탄. ‘워터홀 C 레이숀’.

이런 곳에서 생겨날 것은 과연 어떤 것, 암담한 실망이 현의 마음을 뒤덮고 내어 디디려던 그의 일보는 허공을 휘젓고 다시 제자리에 못 박혀 버리고 말았다. 그는 또다시 자기 껍질 속에 몸을 오므리고 만 것이다.

삼일절을 맞아 선열의 유가족으로 현모와 현이 특별한 좌석을 배당받았을 때 할아버지도 그 옆에 점잖이 앉아 있었다. 고르지 않은 가락의 애국가. 우국의 절규에 가까운 열변, 만세. 만세 소리의 진동.

기념품인 놋상을 들고 돌아오던 갈림길에서 현은 언뜻 할아버지의 눈에 빛나는 것을 보았다. 주름지고 늘어진 눈시울 밑에 가득히 고인 눈물. 현에게 있어서 그것은 하나의 새로운 발견이었다.

─험구의 할아버지는 기실 아버지의 죽음을 누구에게도 못지 아니 마음속에서 슬퍼한 것이지 모른다. 아버지의 죽음. 어머니의 신고. 할아버지의 고통. 가난한 이 사회. 특설된 좌석과 기념품인 놋상.

다음해 현은 교장의 간청으로 고을 여학교 교원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네 소견대로 하려무나.”

어머니의 의견은 조용한 이 한 마디였다.

사회의 혼란은 더욱 조장되고 대립은 더욱 첨예화되어 갔으나 학교의 울타리 안은 그래도 그 권외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학교만을 남겨 두지는 않았다.

사회의 혼란이 반영되어 학생들이 동요하기 시작하고 몇몇 교원은 거기다 불을 지르는 역할을 했다. 교내에 삐라를 뿌린 학생들은 마치 순교자 같은 얼굴로 끌려갔다. 어지러운 흥분 속에 사로잡힌 어린 학생들을 보면 현은 가엾은 생각이 들었다. 무엇 때문의 흥분. 누구를 위한 순교.

불을 지르는 교원들. 시간에 들어가 가르칠 것은 걷어치우고 무책임한 발언으로 철없는 학생들의 머리를 어지럽히는 것은 죄악에 속했다. 자신이 있거든 걷어붙이고 나서서 직접 행동을 해야 할 것이다. 교단과 연단. 교원과 연기자와의 차이. ─학생에겐 손을 대지 말고 그대로 두어야 한다.─그러나 이러한 신념은 다만 현 자신에게만 적용되는 좁은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북에서 남으로 흘러가는 인간의 행렬은 그치지 않고 그 수효는 더욱 늘어만 갔다. P고을에서 하루 이틀을 묵어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으리으리한 청부업자의 입찰을 거부한 사람들. 현은 지금은 그곳서 대단한 감투를 쓰고 있다고 전해지는 중국연안에서 만난 노인 김 모를 생각해 보았다. 하루에 몇 번 목욕을 하고 눈이 부신 흰밥에 입맛을 다실 그 모습들.

─대를 이어온 땅을 버리도록 낙찰된 가격은?

그러나 현에게 있어서 이러한 현상은 그의 눈앞을 지나가는 한낱 영화의 화면에 지나지 않았다. 현은 그것을 보고만 있으면 되었다. 다만 비극영화를 구경하는 관중이 느끼는 그런 정도의 동정심을 가지고─.

현의 흥미는 이년간에 확대된 꽃밭에 들어가 각가지 꽃을 가꾸는데 있었다. 가지각색의 꽃이 봄에서 가을에 이르는 동안 그치지 않고 화려히 장식하는 화단이 있음으로써 현의 마음은 푸근했다. 금잔화, 봉선화, 카나리아, 석죽, 나팔꽃, 카네이션, 문풀러워, 나비꽃…….

넓은 하늘 밑에 하루의 노동에 노곤해진 다리를 뻗고 부엌에서 새어나오는 생선 굽는 냄새를 맡는다. 왕성한 기능의 위. 재촉을 하면 어머니는 어린애 같다고 꾸중을 한다. 찬란한 꽃밭 매미 노래와 새 소리. 이것이 곧 인간의 삶. 생명을 받고 태어난 인간이면 누구나가 향유할 수 있는 삶의 조그만 권리.

그 동안 현은 몇 번 혼담을 퇴했다.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현실의 혼돈 속에서 혼인이란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저 북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꺼슬리고 피로한 얼굴에 슬픔과 분노를 가득히 담은 눈동자. 그 무수한 눈동자는 다만 살 곳을 마련하면 그대로 안주할 그런 미지근한 눈동자일까.

그 무수한 눈동자에 그토록 분노의 불길을 부어 넣은 으리으리한 신흥청부업자들. 그들은 한 가지 공사를 끝냈다고 그대로 있을 그런 절제 있는 업자가 될 수 있을 것일까.

악착같은 이윤의 추구. 그들이 즐겨 퍼붓는 기성업자들에 대한 욕설. 그것은 그대로 그들이 이어받은 것.

태풍의 징조에 불안을 느끼며 새로운 집을 지으려는 어리석은 짓은 삼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없는 자기의 미래에 한 사람의 남을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나 자신이 그러하거늘 더욱 남의 생애에 대한 자신이란─.

현은 그러한 때에 더욱 뼈저리게 어머니의 반생을 그려보았다. 어두운 초가 안에서 지낸 30년. 외로움과 신고. 자기의 혼인이 또 하나의 어머니를 만들어 낼는지도 모른다는 의구.

고노인은 몇 번 달래보다 내어던지고 말았고, 현모는 현모대로 병정으로 보낼 때 한 번 겪고 나서는 무엇이고 간에 강요는커녕 권유도 않고 현이 하는 그대로 두었다. 그 팔에 한번 묵직한 손자의 무게를 느껴보고자 목마르게 원하고 있으면서도.

그러한 불안은 불안대로 두고 현은 눈앞에 걸린 자기의 직책에 충실하려고 했다. 꼬박꼬박 시간을 채우는 현은 그리 인기 있는 선생은 못 되었다.

가을이 와서 교사를 증축하게 되었을 때 상서롭지 않은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공사비를 둘러싸고 불미한 일이 생겼는데 교장도 거기 한몫 끼어들었다는 것이다.

전투적인 교원 몇 명이 말썽을 일으키고 교장을 규탄한다는 불온한 공기가 떠돌았다. 현은 분명치도 않은 일을 가지고 떠들 필요가 어디 있느냐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말썽을 일으킨 교원들은 이 사건을 들고나가 오랫동안 사상적인 문제 때문에 교장으로부터 받아온 굴욕의 울분을 일거에 품어보리라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한편 교장은 때마침 일어난 일부 학생들의 조그만 정치적 소동이 교장 배척을 한 가지 슬로건으로 들고 나섰던 까닭에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들 교원에게 사건의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말았다. 세 명의 교원은 그날로 경찰에게 구속 문초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 교원들이 학생소동의 책임을 진다는 것은 이번만은 누가 보아도 부당했다. 그러나 교원들은 교장의 교활을 눈앞에 보고도 감히 입을 열어 정면으로 대항하지를 못했다.

직원회의가 열렸을 때 교장은 점잖은 어조로 유감의 뜻을 표하며 세 명의 교원이 경찰에 끌려간 것은 참으로 안된 일이라고 했다. 현은 아연했다. 교활과 비열이 뒤섞인 교장의 얼굴을 쳐다보다 저도 모르게 불쑥 일어섰다.

“교장선생님, 어떤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장은 평소 온건하던 현이 뜻밖에 긴장한 얼굴로 자기를 정시하는데 놀랬다.

“대책이래야 세울 도리가 없는 걸 어떻게 하우.”

“대책이 없다니요. 세 분 선생이 이번 소동에 아무런 관련도 없다는 것은 교장선생님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니 고선생 내가 그런 것을 어떻게 아우?”

“배선생님은 그 동안 부친상을 치르러 가서 사건 때는 안 계셨고 두 김선생님은 일주일 간의 수학여행에서 그제야 돌아오시지 않았습니까.”

“그건 모르디요. 없었다고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닐터이니까.”

“그러나 그것은 경우와 상식으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고선생은 왜 그르케 그런 사람들을 두호하시우?”

“두호가 아닙니다. 과거에는 어떻든 간에 그대로 버려둔다면 그것은 세 분 선생에 대한 공정한 처사가 못되기 때문입니다.”

“그거야 경찰에서 공정히 하갔디요.”

어디까지나 시치미를 떼는 교장을 보고 현은 가슴 속에서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교장선생님께서 직원들의 신상에 대해 그렇게 냉정하셔서야 어떻게 안심하고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교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니 고선생, 그게 무슨 말이요. 사상이 불순하다고 경찰이 하는 일을 나보고 어드케 하라는 거요?”

파렴치─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교장선생님은 이번 부정사건 때문에 일부러 세 선생님을 몰아넣었다는 비난을 듣게 됩니다.”

교장의 낯색이 변했다.

“고선생, 말을 조심하우. 그게 무슨 소리요. 그럼 내가 부정사건에 관계가 있단 말이요?”

진일보……앞으로……결정적인 공격! 그러나!

“저는 그런 단정을 안했습니다. 말하자면 남들이 그렇게 보기가 쉽다는 겁니다.”

그것을 단정한다는 것은 또한 교장에 대해 공정을 결(缺)한다는 생각이 현의 얘기를 끊게 했다.

─슬픈 일이다. 이북 출신인 늙은 교장은 못마땅한 것의 모든 처리방법으로 저렇게 사상적인데 결부시키게 되었으니─

그리고 또 하나의 불쾌. 끌려간 세 선생. 그들은 어느 때나 조금 들려오는 얘기만 있으면 그것의 확실여부를 확인하기도 전에 떠들어대는 것이 실수였다. 어린 학생들에게 자기의 첨단적 경향을 번적거리던 것도 다름 아닌 그들이었다.

─여하튼 창피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교문을 나섰을 때 뒤따라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조선생. 여대를 중퇴한 조선생이었다. 깨끗이 접힌 흰 샤쓰. 흰자위가 맑은 검은 눈. 검은 스커트.

“고선생님이 오늘은 어떻게 그렇게 대단하셨어요. 교장선생님이 패배 정도가 아니라, 고선생님 말씀처럼 완전히 패북당하고 말았어요.”

현은 고소를 지었다. 그는 말없이 걸으면서 차차 굳어졌던 자기 마음이 풀려져가는 것을 느낀다.

─나는 조선생이 가까이 있으면 어느 때나 따뜻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 저도 모르게 끌리는 것을 느낀다. 그러면서도 욕정을 느끼지는 않는다. 이것이 아마 이성에 대한 애정의 싹인지 모른다. 패북 아아 그때의 얘기로군─

겨우 맞춤법을 한 권 들춰본 현의 한글실력으로 국문과를 다닌 조선생을 당할 수 없었다. 그가 일절이니 패북이니 하였을 때 조용히 가르쳐준 것은 조선생이었다.

그때 그는 낯을 붉히며,

“그래두 어쩐지 일절이니 패북이니 해야 어감이 바로 맞아드는 것 같은데요. 일체, 패배, 좀 약한데.”

“그것은 잘못된 일어의 습성에서 나온 것예요.”

외모가 나약해 보이면서도 조선생은 강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땐가 남녀교원이 함께 걷고 있을 때 미군병사와 나란히 걸어오는 여인을 보내놓고 어느 남선생이 야유 겸 힐난을 한 일이 있었다.

“저것이, 저게 다 인간이라구 창피두 모르구 턱을 쳐들고 걸어가다니 원 더러운 것이.”

그때 조선생이 얘기를 가로막았다.

“왜 저런 불쌍한 여자를 탓하시지요?”

“불쌍하긴, 자기가 택해서 저런 짓을 하고 다니는 걸.”

“그렇게 얘기할 게 안예요. 택하긴 누가 좋아서 택했겠어요. 남자들이 참견한 사회가 여자들을 저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게 안예요.”

“남자들이 어떤 사회를?”

“글쎄 선생님도 정신 차리세요. 연약한 여자 하나 지키지 못하는 이 땅의 남성들이 참 가엾기도 하지.”

─그리고 이런 일도 있었지─

어떠한 경우에도 별다른 의사표시를 않는 현보고 어느 땐가 이렇게 물은 일이 있었다.

“고선생님은 아무 일에도 관심이 없으세요?”

“네?”

“왜 어떤 일에도 의사표시가 없으세요?”

“그것은 할 사람이 따로 있겠지요. 저는 남의 일에 이러니저러니 할 입장에 있지 못합니다.”

“소극적이시군요.”

“소극적일는지 몰라도 저는 남의 일에 흥미도 없거니와 남의 한계를 침범할 생각은 더욱 없습니다.”

“어쩌면 그러실까.”

“싸움을 말리려다 더 큰 사움을 만드는 일이 있지요. 자기 하나도 가누기 힘든 형편에 남의 일 참견이란─”

“주위가 어떻게 되어도 괜찮으세요?” “되어가는 것이야 제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선생님은 그렇게 뵈이진 않는데요.”

“저는 공연히 참견해서 남에게 누를 끼치는 경우를 허다히 보아 왔습니다. 남을 위한다는 것이 결과적으로 남을 해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을 너무나 많이.”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지 않겠어요?”

“물론 그야 그렇겠지만, 사리를 통찰하는 예지나 심성에 있어서 훨씬 뛰어난 성자 같은 소수인에게만 해당되겠지요.”

“고선생님은 자신이 뛰어나셨다고 생각지는 않으세요?”

“천만에 저는 제 자신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아무 특징도 없는 일개 속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기껏 자기만을 지키고 이처럼 살아가면 됩니다.”

“그러면 저 같은 경우 즉 생활양식을 강요받게 된다면 그때도 고선생님은 자기를 지키고 그대로 살아가실 수 있겠어요?”

조선생은 8·15 다음해 가을 가족과 함께 이북에서 넘어왔던 것이다.

“글쎄 그건 지내봐야 알겠지만.”

“저는 지내봤어요. 더욱 부친은 뼈저리게 느끼셨지요.”

“무슨 해를 입으셨습니까?”

“해가 아니라 처음은 몹시들 떠받들었지요. 부친은 젊은 시절에 사회주의 운동을 하시다 몇 년 고생을 하신 일이 계셨대요. 과수원을 하시던 부친은 해방이 되자 끌려 나가다시피 인민위원장을 하시게 되었지요. 그런데 소련군이 진주하면서부터 부친은 퍽 언짢아하시더니 쌀공출을 강요받고는 거부하시던 끝에 사임하시고 말으셨지요. 아버지는 내가 젊었을 때 할려고 한 것은 저런 것이 아니었다고 하시면서 우울증에 걸리셨어요. 그 후부터 그들은 뒤에서 이러니저러니 귀찮게 굴기 시작하더니 한번은 무슨 혐의가 있다고 보안서에서 아버지를 불러 갔어요. 두 주일 후 나오신 부친은 아무 말씀도 않고 계시더니 갑자기 이남으로 떠나자고 하셨어요. 거기서 자기를 지킨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예요.”

“물론 저도 제가 하고 싶은 일, 꽃밭을 가꾸며 즐기고 싶은 시간이나, 마루에 누워 하늘을 쳐다보는 시간조차 상실하게 된다면 글쎄, 저도 생각을 달리하겠지요.”

“그것뿐이겠어요. 무슨 집단에 가입해라, 모임에 빠지지 말라. 누구를 미워해라. 누구를 좇아가야 한다. 누구를 죽여야 한다. 연설에 찬성하는 박수를 쳐라, 주먹 쥔 팔을 높이 내어 흔들어라. 하면요?”

“그야, 그렇다면 그땐 저도.”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럴 땐, 그럴 땐 조선생처럼 도망을 치지요.”

현이 자기 얘기가 우스워 그만 실소를 하자 조선생도 따라 웃었다.

“어디까지나 소극적이시군요.”

갈림길 가까이 와서 추상에서 깨어난 현은 입을 열었다.

“실은 교장한테 얘기하고 나선 퍽 후회가 되었습니다.”

“왜요?”

“멋없이 떠들었다는 생각이. 남은 것은 불쾌뿐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결코 청부업자가 될 수는 없지요.”

“녜?”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후, 문제의 선생들은 경찰에서 돌아오자 곧 학교를 떠나고야 말았다.

현은 우울했다. 어쩐지 학교에 나가는 것이 거북했고 교장을 대하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한 달도 못가서 사표를 내고 말았다. 이층 교실을 찾아 인사를 하는 현에게 조선생은 뚫어질 것 같은 시선을 부었다.

“왜요, 무엇이 거리끼는 게 있으세요?”

“모든 게 귀찮아져서.”

현은 조선생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신 게 아니겠지요. 교장선생님을 보시기가 거북해서 그러시지요.”

“그것도 그렇지만.”

“역시 마음이 몹시 약하시군요.”

“…………”

“그야말루 완전 패북하셨군요.”

한참 침묵이 흐른 뒤에 현이 입을 열었다.

“패북이고 패배고 할 나위가 없는 일이지요. 조선생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든, 그저 저는 그만둔다는 인사를 드리러 온 것뿐입니다.”

현은 곧 발길을 돌려 교실을 나선 탓으로 조선생의 눈에 서리기 시작한 뽀얀 안개 같은 것이 방울지면서 마루에 떨어지는 것을 보지 못했다.

어머니는 아무 얘기도 없었다. 할아버지는 쯔쯔 혀를 찼다.

“관운이 없군. 그것도 팔자소관이지.”

이애 겨울에 들어서기 전 현은 고을에 들어갔다가 여수와 순천에서 일어난 사건얘기를 들었다.

—무엇 때문에 사람을 죽이려 드는 것일까—

현은 송아지 한 마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여물을 썰고 분뇨를 떼어내고 짚을 갈아주는데 열중했다. 콩짚과 볏짚에 콩을 섞어주면 소는 보는 눈앞에서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일군에서 말을 먹이던 때와는 달랐다. 여기엔 아무런 강제가 없었다. 키우고 보면 소도 한 가족과 다름이 없었다.

밭갈이가 심해 잔등이 벗어져 피를 낼 때면 표정이 없는 까닭에 더욱 가엾었다. 그럴 때면 그 한 가닥 뼈마저 달게 바친다던 ‘다까다’ 교수를 생각했다.

—지금쯤 살아 계신다면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여의하다면 ‘스끼야끼’ 냄비 속에 저를 넣어 쇠고기를 끄집어내다 자아를 멸할 수 없이 달게 잡숫고 계시겠지. 이젠 퍽 늙었을 게다—

한없이 퍼진 허허 벌판이었다. 현은 잃어버린 총을 찾으려고 애를 태웠다. 다리가 땅에 박혀서 떨어지질 않았다. 피아의 군대가 뒤섞여 우왕좌왕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거기엔 ‘아오야기’도 ‘히다까’ 조교수도 보였다. 중국군 일본군 모두가 적으로 보였다. 포탄이 터졌다. 총! 총이 없다. 총. 총이 있었다. 아 이번에는 총검과 탄환이 없었다. 밀려드는 적군, 쿵 하는 포소리, 아악 아악!

현은 잠에서 깨어났다. 쿵! 포소리가 들렸다. 아직 날이 밝지 않았다.

그날은 하루 종일 포성이 들리더니 부상자를 실은 후송열차가 숨가쁘게 P역을 지나 남하했다.

또 한 밤을 새운 이튿날 아침, P고을에는 전차의 ‘캐타비라’ 소리도 요란히 인민군의 대열이 지나가고 있었다. 늘어진 시체 붉은 깃발의 시위.

─이것은 또 무슨 짓이냐? 그러나 하고 싶거든 멋대로 하려무나. 여하튼 간에 나는 모르는 일이고 나에겐 손톱만큼의 관련도 없다. 너희는 너희고 나는 나다─

의혹, 끝없는 혐오.

하늘도 산도 들도 눈에 띄는 모든 것, 꽃을 보아도 회색이었다.

며칠 후, 이북으로 갔다던 연호가 머리를 길게 느리고 P고을로 들어오자 먼저 현을 찾았다.

“어때, 고생 많이 했지?”

“머 별반.”

“고통이 많았을 거야. 그러나 이젠 강도놈들도 물러가고!”

“…………”

“그런데 자네 왜 이러고 있나?”

“무엇을?”

“뛰어 나와 일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일을?”

“이 사람이! 자네가 이처럼 배겨 있는 것도 이때를 기다린 것이 아닌가?”

“때를 기다리다니?”

무슨 뜻인지 의아해하는 현의 표정.

“물론 예기치 않았던 일이니까! 그러나 어리둥절할 것은 없어.”

“그야 충격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나야 결국 일개 평범한 속인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래 이대로 이러고 있을 작정인가?”

“이대로 나는 흡족하니까.”

“아니 굿이나 보다 떡이나 먹을 셈인가.”

“떡은 둘째 치고 굿을 볼 흥미조차 없네.”

“자네 왜 그러나?”

뜻밖이라는 연호의 그 표정.

“왜 그러긴 나야 원래 이런 놈이 아닌가. 부탁이니 나를 이대로 가만히 버려두어 주게.”

“버려두다니 자네야말로 열성적으로 일해야 할 사람이 아닌가?”

“일이야 할 사람이 얼마든지 있는 걸. 나까지 뛰어들 필요야 없지. 나는 모든 것이 귀찮게만 생각이 드네. 자네가 들어오기 전 나는 들로 나가던 길가에서 어떤 젊은 군인의 시체를 보았지. 살눈썹이 길고 검은 머리를 느린 앳된 얼굴을 하고 있더군. 나보다도 십 년이나 어려 뵈는 젊은 소년이야, 그는 며칠 전만 해도 자기 가족에게 편지를 보냈고 이웃에 사는 어떤 처녀를 그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째서 그가 이 길가에서 이처럼 생명을 잃어야 했는가의 의문이 들드군. 살아야 했을 인간이 인위적으로 죽은 것이다. 어째서? 누구의 탓으로?”

“물론 사람이 죽는다는 건 유쾌한 일이 못되지, 그러나 피의 대가 없이 어떻게 혁명의 성취를 바랄 수 있겠나.”

“누구의 피, 누가 흘려야 하는 핀데.”

“그것은 혁명을 가로막는 원수들의 피, 그리고 혁명에 바쳐지는 인민전사들의 고귀한 피. 그러나 더 많은 원수들의 피가 요구되지.”

“자네는 죽는 사람의 경우를 생각해본 일이 있나. 다만 한 가지 살고자 발버둥치는 인간들의 죽음을. 고통과 공포. 죽는 인간에 있어서는 죽는 그 순간에 그 자신의 모든 것—아니 전 세계가 상실된다는 것을.”

“그러나 새로운 희망 ‘푸롤레타리아트’는 그 시체를 넘어서 전진해야 한다.”

“전진? 어디를 향해? 얼핏 들으면 감동적인 얘기긴 하지. 그런데 그 감동이란 게 탈이거든.”

“모든 것은 불가피한 혁명의 첫 과정이니까.”

“도대체 그처럼 많은 시체를 넘어서야 하는 혁명의 목적이란 무엇인가?”

“착취 없고 계급 없는 사회의 건설?”

어린애 같은 질문에 불과하다는 표정의 연호.

“나도 그런 사회가 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네. 그러나 그 목적에 이르는 과정이라는 것, 그것은 어떠한 과정이며 또 언제까지를 과정으로 치나, 과정 속에서도 인간은 살아야 하고 또 인간은 계속 과정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인생의 목적이란 곧 인간이 산다는 것, 사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가. 최후의 목적, 그런 것이 있을 리 없지. 구태여 말하자면 조그만 중간 목표가 있다고 할까.”

“그럼 자네는 전적으로 이 혁명을 인정치 않는군.”

“혁명이 획득한 어떠한 결과도 인간의 생명보다 귀할 수는 없으니까.”

“그러면 자네는 역사 자체를 부정하는군.” “혁명이란 말에는 확실히 매력이 있겠지. 역사가들도 그 태반은 혁명은 역사적 전환에 필요한 하나의 중요한 계기라고 하니까.”

“자네도 그것까지 부정하지는 않는군.”

“아니지, 다만 역사가들이 다루기 좋은 재료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야. 요행히 삶의 골패짝을 쥐어든 인간들은 태연히 소파에 앉아 ‘소수의 희생된 생명 운운’ 하고 뇌까릴 수도 있겠지, 그렇게 허다한 혁명이 없었던들 별로 지금보다 못한 세상은 안 되었을 것이네.”

“이건 놀랬는데.”

“어떻든 나는 분명치도 않은 목적을 위해 공연히 남에게 미움의 눈길을 보낸다든가 내 생명을 희생할 그런 용기는 가지고 있지 못하니까.”

“인민의 투쟁을 그렇게 보는군.”

“투쟁? 어째서 그렇게 싸우고 싶은가. 그렇게 싸우고 싶거든 싸우고 싶은 친구끼리 클럽을 만들어 게임을 하면 되지 그래.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은 인간들까지 끌어들여 싸우게 하고 있으니 말이야. 애매히 피를 흘리는 것은 이들이거든. 자네 익수를 보게.”

“익수, 그는 기맥힌 투사야.”

“자네, 지금 그가 올바른 제정신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나. 익수 같은 처지에 있는 친구가 가난을 벗어나야 하고 인간다운 생활을 해야 한다는 데는 의론의 여지가 없어. 그러나 지금의 익수는—”

“지금의 익수는?”

“그의 눈을 보게. 무엇에 열중하는 것이야 좋겠지. 그러나 그의 눈에는 독기가 가득 차 있어. 귀염성이 있고 선량하던 그의 조그만 눈 속에 차 있는 것은 증오와 살기뿐이란 말이야. 나는 그를 보았을 때 어째서 인간이 저런 눈을 해야 하는가의 의문이 생기더군. 그리고 측은하다는 생각이. 물론 자네야 되려 이러한 나를 측은히 생각하겠지만.”

“도대체 지금이 어떤 때인 줄 아나?”

답답하다는 연호의 표정.

“근거 없는 미움이 들끓고 있는 때이겠지.”

“근거 없는 미움이라니?”

“그럼 자네는 그렇게 뼈아픈 원한을 누구한테 품게 되었고 대체 누구를 저주하고 어떻게 미워하고 있나?”

맑은 눈으로 연호를 응시하는 현.

“지금에 와서 그런 질문을 하다니.”

“자본가, 지주, 친일파, 반동분자, 이런 거란 말이지?”

“그리고 기회주의자.”

연호의 언성이 튀었다.

“나는 기회주의자가 아니야. 미워할 것은 지적할 수 있는 그 누구가 아닐세. 인간 서로의 미움이란 미움이 미움을 낳는 악순환(惡循環)밖에 가져 오질 않아.”

“그러면?”

“미워할 것은 인간이 지닌 어리석은 조건일세. 자네나 내 가슴에 숨어 있는 인간심리의 독소. 남을 억압하려는 포악성. 착취하려는 비정. 남보다 뛰어났다는 교만. 스스로 나서려는 값싼 영웅주의적 참견. 남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다는 무엄. 그런 것들이겠지.”

“언제부터 자네는 목사가 되었나.”

“나는 신자도 아니네만, 이웃을 사랑해라. 뺨을 치거든 또 하나의 뺨을 내어 놓으라고 이른 때부터 지금은 50년이 모자란 2천 년. 인간은 겨우 이 모양 요꼴일세. 물론 자네야 내 뺨을 칠 리도 없고 나도 왼뺨을 맞고 바른 뺨을 내놓을 아량까지는 없네만.”

“그래서?”

“나는 싸운다는 건 질색이니까. 내놓기 전에 도망을 치고 말겠지. 이젠 나는 내가 인간으로 태어난 것 자체가 창피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네. 내 자신이 싫고 또 그 누구 할 것 없이 인간이란 게 싫어졌어. 그렇다고 무슨 대단한 절망을 느꼈다고 자살할 것까지는 없으니 살아갈 대로 살아가 보자는 게지.”

연호는 멸시와 동정이 뒤섞인 눈으로 현을 쳐다보았다. 자본주의 사회의 혼탁 속에서 갈피를 못찾고 허우적거리는 푸치 푸르의 퇴영. 그는 현에게 혁명가들의 영웅적인 고난과 자기 희생을 얘기해 주려고 했다.

“혁명가들의 자기희생을 생각해 보게.”

“어째서 그것이 자기희생인가, 누가 그것을 청탁했는가. 자아도취와 허영에 치른 값이 어째서 희생인가. 단지 값이 비싸게 먹었다는 것뿐이지. 되려 일반 대중의 꼬락서닌즉 가관이지. 그것은 불의의 재액이며 더 할 수 없는 모욕이니까.”

“모욕이라니?”

“그럼, 모욕이지. 그 이상의 모욕이 또 어데 있나. 누구한테서 무엇을 받았다는 거야 되려 응당 받았어야 할 것을 오래도록 막아온 것은 다름 아닌 청탁 없는 그들 청부업자들이지.”

“청부업자?”

“그들은 자기 멋에 겨워서 흥분하고 비분하고 때로는 웃고 때로는 눈물을 흘린다. 그 노호와 웃음과 눈물 속에 애매한 인간들은 희생되거든. 어떤 존경과 무슨 갈채를 보내라는 거야. 각기 제 생명을 타고난 인간들은 그것이 어떻게 초라하든 간에 모두 자기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법이야. 그것은 누구도 범할 수 없지. 그들은 결코 청부업자들의 연기에 동원된 엑스트라는 아니거든. 나는 이렇게 생각하네. 다음에는 어떠어떠한 세계가 반드시 올 것이니, 재빨리 끼어들어 한몫을 보려는 인간—그러한 인간이란 폐품불하에 눈치 빠르게 달려들어 낙찰시키려는 장사치와 다름이 없다고. 자기가 나서야 이 사회를 건질 수 있다는 무엄을 자기가 그 폐품을 맡아야 소비자들이 헐값으로 쓰게 된다는 장사치의 헛소리나 다름이 없거든. 다름없다기보다는 되려 못되었다고 볼 수 있지. 장사치는 이윤만을 탐내는데 그들은 존경과 기배(㧪拜)가지를 요구하거든. 청탁도 않는 청부를 맡아가지고는 더욱 괴롭게 한단 말이야.”

“자네 그런 의견이 통용될 줄 믿는가?”

“얘기가 났으니 나대로의 생각을 말해 본 게지, 일제시대에도 나는 병정으로 끌려가기까지 나대로 살았네. 8·15 후에도 역시 난 나대로 살아왔네. 이제부터도 난 나대로 살고 싶으네. 떠들어대 봤자 인간이 산다는 건 별것이 아니니까 난 나대로 조용히나 살아가자는 게지. 다만 그 뿐이야.”

“그건 어려울 걸, 혁명은 무위의 한 사람도 용인하지 않아. 마비된 인간의 잠을 깨우고 그 머릿속에 새로운 인간의 의식을 부어넣어야 하니까.”

연호가 떠난 뒤 현은 마루에 앉아 혼자 시름에 잠겼다. 뉘우칠 것은 없었다. 얘기를 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한 마음 가운데의 그 무엇.

망연히 꽃밭을 바라보았다. 며칠 동안 느끼지 못한 꽃들의 개성이 들어나 있었다. —인간은 꽃에다 여러 가지 뜻을 붙인다. 정열, 불안, 비애, 고결, 죄악, 분노, 모호, 온순, 광약(狂躍) 그러나 꽃은 그저 아름다울 뿐인데. 때가 오면 피고 때가 가면 말없이 지고. 그런데 인간은 꽃에다 제멋대로의 의미를 붙인다. 뿐더러 인간 자신을 색깔로 갈라놓고 편과 편을 만들어 서로의 가슴에 칼날을 겨눈다—

여태까지 현은 황금률(黃金律)을 뒤집어 놓은 것, 즉 남에게서 괴로움을 받기 싫은 것처럼 나도 남을 괴롭히지 않는다는 신조를 굳게 지켜왔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현은 자기에게 파상적으로 몰려 닥치는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번의 청부업자는 종자의 유가 아닌 것 같았다. 한 명도 놓치지 않고 건들여 놓고야 말려는 유능하고 가혹한 업자. 구석구석을 파헤치려는 집요하고 치밀한 계산자. 현이 웅크리고 있는 껍질도 그들의 날카로운 눈길에서 빠져날 수는 없는 듯싶었다.

발길을 돌린 연호는 혀를 찼다.

—무엇 그런 자식이 있나—

이번 그가 공작의 임무를 맡고 고향인 P고을에 파견되었다는 것은 삼 년이 넘는 자기의 신산을 갚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는 고을 사람들이 자기에게 부어지는, 눈초리에 제법 흡족한 것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승리자에게 보내는 존경과 경탄, 외포와 선망의 눈초리. 그렇지 않으면 가시가 돋은 분노와 증오의 눈초리. 어떠한 눈초리든 간에 거기에는 어떤 반응의 표시가 있었다. 그런데 현의 눈만은 그렇지가 않았다. 거기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두려움의 빛은커녕 무관심과 권태와 혐오가 뒤섞인 눈에 어딘지 연민과 동정의 빛조차 깃들이고 있던 것이 아닌가.

공포 가운데서 또는 완강한 조직 가운데서 그렇게 애써 쌓아올린 탑을 그렇게도 가벼이 보아 넘기다니. 거기다 걷잡을 수 없었던 허망한 얘기의 논리.

—청부업자라구—

승리자로서의 여유와 관용을 가지고 현의 얘기를 들어 넘긴 자신이 기특했다기보다 어리석었다. 가슴 한 귀퉁이에 생긴 솜사탕 같은 공허. 연호는 그 공허를 증오의 불길로 메꾸어갔다.

다시 열흘이 지난 어느 날, 칠월의 하늘 아래 찌는 듯 뜨거운 땅 위에서 청부업자들은 하나의 잔치를 베풀었다. 이글거리는 태양은 처참한 이 잔치에는 너무나 강력한 조명이었다. 아직도 명확한 태도를 결정치 못하고 서성거리고 있는 ‘인민’들에게 산 제물을 도륙함으로써 그들의 손에 인간의 피를 발라놓고 가슴마다에 결정적인 공포와 증오의 씨를 심어 놓아야 했다. 죄악의 조각은 나눠져야만 했다.

P고을 중앙 네거리에서 열린 인민재판, 연호는 그 자리에 현을 불렀다. 현에게 피를 보이고 그 반응을 보고자 한 것이다.

예정하였던 규탄과 계획한대로의 군중의 아우성이 쏟아지며 인간의 것이 아닌 잔인한 흥분의 도가니를 이루어갈 때 연호는 옆에 세워놓은 현의 얼굴만 응시하고 있었다.

—반드시 무슨 변화가 있을 것이다. 초연히 홀로 고고하겠다는 너는 돌멩이가 아닌 이상 반드시 어떤 마음의 동요가 생길 것이다. 공포. 당황. 기겁. 애원. 그러면 너는 수월히 내 손아귀에 들어오게 된다. 그것은 굴복. 네 사설은 결국 하나의 관념의 유희.

첫째번의 희생자, 국민회 회장이 언도를 받자 군중의 까닭모를 아우성과 함께 집행자들의 손에 쥐어졌던 굵다란 곤봉이 얼굴이 거의 흙빛이 된 반백의 머리 위에 쏟아졌다. 뼈가 부숴지는 소리, 살이 떨어져 나가는 소리.

—어떠냐— 연호는 현을 뚫어질 듯이 쏘아보았다. 그러나 그는 현의 얼굴에서 한 오리의 공포의 빛도 찾아낼 수 없었다. 경화(硬化)된 현의 얼굴에서는 다만 땀이 흘러내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그러나 그것은 연호의 오진이었다. 현의 얼굴을 흐르는 땀은 더위 때문만이 아니라 가슴에서 타는 분노의 불길 때문이었다. 두 번째의 희생자가 끌려 나왔을 때 현이 흘린 땀은 땀이 아니라 전신의 혈관에서 배어나오는 피였다.

희생자는 다름 아닌 조선생의 부친이었다. 다만 어울리지 않는 생활양식을 거부하고 남으로 내려온 것 외에 아무런 반항도 꾀하지 않은, 한 무력한 늙은이에 지나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현의 뇌리를 조선생의 모습이 스쳐갔다.

현은 땀이 흐르고 있는 얼굴을 돌려 연호를 쳐다보았다. 그 야릇한 눈동자와 입가에 띠운 까닭모를 웃음, 이것이 같이 자라난 친구—인간의 얼굴이라니.

그 얼굴이 눈앞에서 확대되는 착각을 느끼자 현의 입에서 찢는 듯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살인이다!”

오랜 회상에 잠겼던 현은 감았던 눈을 크게 뜨며 어두운 하늘에 송송히 박힌 별들을 쳐다보았다. 뚝! 동굴 안 천정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어느덧 바람은 자고 벌레 소리도 가 있었다.

그 다음의 일을 더듬을 수 있는 분명한 기억이 없었다. 그것은 불연속선. 순간적으로 내어민 자기의 주먹에 쓰러지던 연호 앞에 버티고 섰던 보안서원의 소총을 나꿔채고 군중의 틈으로 빠져나가던 기억. 수라장이 된 네거리. 집행자들의 고함과 군중들의 비명. 몇 발의 총성. 눈앞에 드리웠던 황갈색 베일. 그 베일을 통해 눈에 뛰어들던 땅을 밟으며 어디를 어떻게 달리었던지. 쫓기던 끝에 ××강 하류에 이르러 물속에 뛰어들던 기억. 그래도 소총은 그 손에 있었다.

—그때의 충동. 그렇게 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한 마음의 충동은 무엇이었을까. 이 검은 눈으로 목격한 살인 목격은 일종의 묵인. 묵인하는 군중의 일원으로 그대로 느리고 있을 수 없었던 마음의 줄. 그리고 아픔. 희생자의 머리와 어깨와 허리에 내려지는 아픔은 곧 나 자신의 머리와 어깨와 허리에 가해지는 아픔이었다. 어찌하여? 나와 그와 그리고 모든 군중. 거기에는 아무런 육체적인 연결이 없었다. 그런데 나는 아픔을 느꼈다. 그리고 그 아픔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리고 결국 도망을 치고 말았던 것이다—

현은 지난날의 그 몇 번인가의 저항의 충동을 생각해 보았다.

—일인 교수에 대한 반발—자기혐오와 함께 몸을 오무린 퇴각.

학교장에 대한 항의—계면쩍어 사직을 하고 만 패배. 아니 패북.

일군에서의 탈주—또다시 연안에서의 도주. 도피의 연속.

어느 때 정면으로 싸워 본 일이 있었던가. 단 한 번. 그것은 극히 어리던 시절의 일. 할아버지의 혹을 두고 얼굴에 흘린 피와 갈갈이 찢긴 옷. 뜻밖에도 할아버지는 노하셨지. 모든 거북한 일에 등을 돌리는 습성이 내 가슴에 깃든 것은 어느 때부터였던가. 그리고 껍질 속에 몸을 오무린 삼십 년의 결산은 결국 도망을 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 이처럼 다시 귀딱지를 느리고 P고을을 찾아든 것은 무슨 까닭일까. 지구의 끝까지 도망을 칠 수 없었던 때문이었던가. 동굴 안에 두고 간 소총 때문이었던가. 그렇지 않으면 외로움 때문이었던가. 실상 한없이 외로웠고 지금도 또한 말할 수 없이 외롭다. 수풀이나 산골짜기의 어둠 속에서 외로움에 못 이겨 어린애처럼 어머니를 그리던 나날. 어머니—삼십 년의 신고를 견디며 길러준 어머니를 버려두고 나는 거침없이 혼자 도망을 쳤던 것이다.

외로움. 그것은 뭇사람들과 떨어져 홀로이 있는 외로움이 아니었다. 한 번도 그들과 함께 있어 본 일이 없었다는 인식에서 오는 외로움이었다. 섞여 있으면서도 거기엔 보이지 않는 장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완전히 단절되어 있었던 것이다.

—견딜 수 없는 이 외로움. 거기서 더욱 목마르게 바래지는 그리움. 어째서 이렇게 사람이 무서우며 또 그리운가. 파상적으로 밀려닥치는 그리움. 그 그리움 속에서 더욱 생생히 피어오르는 하나의 얼굴—

그것은 바로 이 동굴에 기어오르기 전. 저 지금은 칠흑(漆黑)의 어둠속에 파묻힌 S촌.

그 앞들을 비쳐 흐르는 내에서 만난 조선생의 얼굴. 때묻은 베옷에 골이 떨어진 집세기. 아무렇게나 뒤로 동여맨 먼지 앉은 머리카락. 꺼슬린 얼굴. 경악에 차던 그 눈동자.

현은 거기 인간의 모욕을 보았다. 절망과 슬픔이 뒤섞여 멀거니 흩어진 그 눈동자. 살아 있는 인간이 그런 눈을 가져야 하다니. 거기에 갑자기 환희의 빛이 몰아치며 터져 나오는 눈물이 아니 그것은 피.

날이 밝으면 조선생이 이 동굴을 찾아올 것이다. 이런 속에서도 한 줄기의 빛은 있고나, 그때를 기다리고 한잠 눈을 붙여야 한다.—

현은 흩어진 풀을 모아 깔개를 하고 누웠다. 소총에 탄환을 재우고 그것을 베개로 했다. 녹쓴 쇠냄새가 났다. 올려다보는 눈에 무수한 별들이 아름다웠다. 서로 당기고 있으면서 저렇게 자기 자리에서 빛나고 있다는 실감이 들지 않았다.

문득 가슴에 치솟는 한 가지 불안이 있었다. 조선생과 헤어져서 마을 어구를 지날 때 느낀 방아깐 영밑에서 자기를 응시하던 한 젊은이의 시선.

잠시 깃들였던 그 불안은 곧 피로 속에서 흩어지고 현의 두 눈이 감기더니 어느덧 가느다란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弟 2 部

골짜구니에 드리운 안개를 가르며 핏빛 같은 태양이 솟아올랐다. 흩어진 안개가 천천히 동굴을 향해 기어 올라갔다.

찬 기운이 서린 골짜구니의 숲속에서 두 그림자가 나타나더니 안개를 타고 동굴을 향해 걸어 오르기 시작했다. 고개를 숙이고 앞서서 걷고 있는 고노인과 뒤따르는 연호. 연호의 허리에 비스듬히 박힌 쏘제 때때권총.

쿵! 하고 남쪽 멀리서 은은한 포소리가 들려왔다.

연호의 신경을 날카로이 하는 저 소리. 그리고 어쩌면 이렇게도 날카로운 바위가 깔려 있을까. 연호는 초조히 걷고 있었다. 인민재판 때의 현의 주먹에 쓰러졌던 연호는 금시 몸을 일으킬 수 있었으나 그 순간에 그가 쌓아올린 공든 탑은 산산이 조각을 내고 무너져 버렸던 것이다. 이미 지금은 현에 대한 심리적인 대결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그 후 중앙당부로부터 지난날 현이 연안에서 탈주한 까닭에 체포해 넘기라는 지령을 받고 설욕과 임무를 겸해 갖은 애를 태워가며 현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어제 저녁 현이 나타났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미끼로 고노인을 끌어내었던 것이다.

—자식이 연안까지 갔다면서, 그런 어려운 경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혁명을 배반하고 나의 피와 땀에 젖은 탑을 무너뜨리고 말다니—

고노인은 걷고 있다기보다 들뜬 발을 간신히 옮겨놓고 있는데 불과했다. 인민군이 P고을에 나타난 다음 고노인은 그의 팔십 년의 생애에서 몇 번이고 넘었던 고비와는 달리 내어놓을 어떠한 골패짝도 찾을 길 없다는 절망을 깨닫게 되었다. 국민회의 일을 보던 영선은 어디론지 도망을 했고 둘째 아들은 의용군으로 끌려 나갔다. 혹시나 하고 실오리 같은 기대를 걸었던 현은 더욱 아득한 절망의 장막을 고노인의 눈앞에 드리우고 말았던 것이다. 그 장막을 뚫고 간신히 새어드는 한 가닥의 빛깔. 고노인은 지금 그것을 찾아 가시덤불의 길 없는 날카로운 바윗길을 걷고 있었다.

흐르는 안개의 틈으로 검푸른 동굴 앞 바위가 보이자 고노인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안개가 흘러가는 저편 푸른 솔밭 사이에 선친의 산소를 바라보았다.

“어서!”

등에서 싸늘한 연호의 목소리와 함께 절컥하고 권총을 재우는 쇳소리가 났다.

고노인은 동굴을 향했다. 그리고 무거운 입을 열었다.

“현아!”

오랜 세월에 꺼슬린 무게 있는 음성이 슬픈 가락의 메아리를 일으켰다.

“현아!”

흩어진 머리와 맑고 날카로운 두 눈이 조심성 있게 바위 위로 들렸다.

말할 수 없는 그리움이 왈칵 고노인의 가슴에서 솟아올랐다. 그 그리움은 또한 비길 수 없는 고통.

“얘기해요 빨리!”

연호의 소리.

고노인은 무거이 입을 열었다.

“현아 내말 듣거라—네가 내려오기만 하면—선생들은 모두—용서해 주신단다아—현아—걱정말고 내려오너라—”

고노인은 얘기를 끊고 현의 대답을 기다렸다. 견디기 어려운 침묵의 순간. 대답은 없이 현의 내어졌던 얼굴은 다시 바위 밑으로 사라져 버렸다.

고노인은 한 발자국 발을 내어 디디었다.

“현아—”

또 한 발자국.

“현아—”

저도 모르게 현의 이름을 부르며 동굴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현아, 현아, 네 어미도—”

문득 고노인은 오는 길에 들렸던 현모의 생각을 했다.

고노인과 연호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내 아들아 내 아들아.”

나직이 아들을 부르며 두툼한 성경책을 소리를 내어 낭송하던 현모. 그 절실하고 애타는 음성은 아직도 고노인의 귀에 쟁쟁히 남아 있었다. 어쩌면 그 음성에 그처럼 범(犯)치 못할 위엄이 담겨 있었을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아브라함이 이에 번제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이삭이 가로되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려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하는지라……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마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네가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여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거기 서요.”

뒤에서 날카로이 쏘아지는 연호의 목소리. 고노인은 멈칫 그 자리에 섰다. 이제 자기의 생애는 이미 진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손에 쥐어진 풋밤알같이 확실한 것 같았다.

쿵! 하고 또 멀리서 포소리가 들려왔다. 다가왔고 또 멀어졌다. 그리고 또 되돌아오는 저 소리. 차라리 한 번 스쳐가고 영영 돌아오지 않았으면, 그렇다면 고노인은 설령 지옥 같은 참혹 속이라도 어떻게든지 비벼대려고 애를 썼을 것이다. 둘째놈이 의용군에 끌려 나갈 때도 고노인은 뼈를 에이는 아픔을 느끼면서 한 치나마 발붙일 땅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런데 되돌아오는 저 소리.

—혹시나 저 소리는 첫째놈이 되돌아오는 신호일는지도 모른다.—

고노인의 마음은 몇 갈래로 찢기고 엉켜서 사납게 뒤틀렸다.

고개를 돌려 선친의 뫼 있는 곳을 건너보았다. 그리고 괴로움을 이기려는 듯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 일순에 고노인은 자기의 80생애를 일변했다. 고달팠던 기나긴 생애. 몇 번이나 뒤바뀐 세태였던가, 얼마나 많은 고통과 굴욕을 참으며 핏줄을 잇기에 애를 썼던가, 자기를 낳은 선친. 까마득히 올려 뻗은 대대의 조상.

고노인은 연호의 재촉이 이제는 아무렇게도 생각되지 않았다. 다만 기나긴 생애 속에서 항상 재촉하는 소리에 떤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憐憫)만이 있었다.

그래도 자기 딴에는 주어진 80년의 생애를 악착같이 살려고 애를 써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 번 쿵 하는 포소리. 저 포소리만 없었어도 고노인은 현을 불러내는데 다시 한 번 애를 썼을는지 몰랐다. 그러나 다가오는 저 소리. 삶과 죽음, 그 어느 하나의 선택을 재촉하는 저 소리.

고노인은 또 한 번 동굴을 올려보았다. 저 동굴 안에서 아들이 죽었고 지금 또 손자가 저 속에서 죽음의 위험에 직면해 있다. 그리고 자기도 또한 그것을 목격하며 위기의 순간에 서 있었다. 이 야릇한 숙명적인 불행의 부합, 다시 고노인은 눈길을 선친의 산소에 돌렸다. 문득 이처럼 가혹한 숙명의 사슬에 엉키도록 자기는 조상의 뼈를 묻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변사—전쟁 앞에는 과거의 어떠한 원리도 무색해지는 것일까. 혈통이 이어져 벋어가는 기준의 상실. 골수에 젖은 풍수원리를 굳게 믿고 조상의 뼈다구를 메고 다닌 지난날의 노력의 공허.

그렇게 허탈해 가는 고노인의 마음속에 차차 하나의 새로운 감정이 흘러들었다. 모두가 기정의 숙명에서 벗어나 있다는 해방감과 다음 순간의 운명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다는 어떤 종류의 감동이었다. 그 감동 속에서 고노인은 80평생에 처음 무엇에도 구애되지 않는 순수한 자기 자신의 의지를 결정했다.

—이까지 용케 견디어 온 가상할 자기의 80생애, 산소의 탓도 목에 달린 복의 상징이란 혹의 탓도 아닌 맨주먹 알몸으로 기를 쓰며 살아온 80평생, 나는 이것으로 족한 것. 지금은 가는 것이다. 현아 이젠 네가 살아야 한다.—

여울 같은 감동이 고노인의 전신을 흘렀다. 머리카락과 수염이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크게 숨을 들이 모았다.

“현아! 너는 살아야 한다. 저 대포 소리를 듣거라. 어떻게든지 여길 도망해서—”

순간 고노인은 등을 꿰뚫는 불덩어리를 느꼈다. 중심을 잃고 풀숲에 쓰러지는 고노인은 총성의 메아리 속에 현의 절규를 들었다. 그리운 그 음성.

“할아버지!”

따각! 불발탄을 끄집어내고 다음 탄환을 밀어재운 현의 소총과 연호의 권총에서 동시에 불이 튀었다.

순간, 현은 왼편 어깨에 뜨거운 쇠갈고리의 관통을 느끼며 연호가 천천히 왼쪽으로 몸을 틀면서 숲속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바위를 넘어 밑으로 내어 달리려던 현은 아찔하면서 그대로 바위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어깨를 움켜쥔 손가락 사이로 붉은 피가 뿜어 나왔다. 땅으로 끌려들어가는 듯한 의식의 강하. 어깨의 고통—꼭 삼십 년을 살고 지금 여기서 죽어가는구나. 생각을 모아야겠다.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생각을, 생각을 모아보자. 이것이 한 인간의 삶? 삼십 년! 어떻게 살았던가? 외면, 도피, 밤낮을 가림 없이 도피, 외면, 도주, 그 밖에 무엇을 하고 지내왔는지 도무지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첫번째 탄환처럼 불발에 그친 삼십 년. 그것은 영(零). 산송장. 그렇다면 결국 살아 본 일이 없지 아니한가.

나는 다음 탄환으로 연호의 가슴을 뚫었다. 사람을 죽인 것이다. 남에게 손가락 하나 가풋하지 않으려던 내가 사람을 죽인 것이다. 가엾은 연호. 연호와 나와는 아무런 원한도 없었는데. 인간이란 이래서 죄인이라는 것일까, 어쩔 수 없이 살인을 하게 되는 인간의 불여의. 죄악을 내포한 인간의 숙명? 그것은 원죄?

우거진 꽃밭의 울타리 안에서 스스로 죄 없다는 내 자신을 잠재우고 있을 때 밖에서는 검은 구름과 휘몰아칠 폭풍이, 그리고 사람이 죽어가는 비명이 준비되고 있었다.

그것은 먼저 네가 질러야 할 비명이었을는지도 모른다. 그 어린 병사 대신 네가 그 길가에 누웠어야 했을는지도 모른다. 나 같은 인간은 아직 살아 있었고 살아야 할 인간은 죽어갔다. 이런 것이 그대로 용허될 수 있었다고 생각되는가. 동굴에서 죽은 부친. 강렬히 살아서 아낌없이 그 생명을 일순에 불태운 부친. 부친은 살아남는 인간들을 대신해서 죽었고 그들의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했을는지도 모른다.

저 숲속에 누운 할아버지. 시체가 아니라 그것은 삶의 증거. 모든 불합리에 알몸으로 항거하고 불합리 속에 역시 불합리한 삶을 주장한 피어린 한 인간의 역사. 거인의 최후 같은 그 죽음.

어머니. 가냘픈 여인의 몸으로 그토록 견딘 인간의 아픔. 그 아픔을 넘어서 내게 대한 사랑, 죽은 부친에 대한 사랑, 그리고 기어이 모든 것을 의탁하는 신에 대한 사랑으로 놓인 어머니.

너는 어느 때 어떠한 아픔을 견디었던가. 껍질 속에서 아픔을 거부한 무엄과 비열.

너는 너절한 녀석이었다. 생생한 여자의 알몸을 안기가 두려워 자독행위로 스스로의 육체를 기만한 너절한 자식. 져야 할 책임이 두려워 되지 못한 자기 변명으로 자위한 비겁.

껍질 속에 몸을 오므리고 두더지처럼 태양의 빛을 꺼린 삶. 산 것이 아니라 다만 있었다. 마치 돌멩이처럼 결국 너는 살아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 살아본 일이 없다면 죽을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살아본 일이 없이 죽는다는 것—아니 죽을 수도 없다는 안타까움이 현의 마음에 말할 수 없는 공포의 감정을 휘몰아왔다. 현은 잃어져 가는 생명의 힘을 돋구어 이 공포의 감정에 반발했다.

—살아야겠다. 그리고 살았다는 증거를 보이고 다시 죽어야 한다.—

현은 기를 쓰는 반발의 감정 속에서 예기치 않은 새로운 힘이 움터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힘이 조금씩 조금씩 마음에 무게를 가하더니, 전신에 어떤 충족감이 느껴지자 현은 가슴 속에서 갑자기 우직하고 깨뜨려지는 자기 껍질의 소리를 들었다. 조각을 내고 부서지는 껍질. 그와 함께 거기서 무수한 불꽃이 튀는 듯했다. 그것은 다음 차원(次元)에의 비약을 약속하는 불꽃. 무수한 불꽃. 찬란한 그 섬광. 불타는 생애의 의욕. 전신을 흐르는 생명의 여울. 통절히 느껴지는 해방감.

현은 끝없는 푸른 하늘로 트이는 마음의 상쾌를 느꼈다.

—나머지 한 알의 탄환. 그처럼 내가 살아남는 것이라 하자. 그러면 어떻게 될 것일까. 그것은 누구도 모른다. 먼저 나 자신이 선택할 것이다. 다음은 —그것은 더욱 누구도 모른다.

분명한 한 가지는 외면하거나 도피하지는 않을 것이다. 외면하지 않고 어떻든 정면으로 대하자.

도피할 수가 없도록 절박된 이 처지. 정면으로 대하도록 기어코 상황은 바싹 내 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이미 꽃밭의 시대는 끝난 것이다.

살아서 먼저 청부업자들을 거부하자. 떠들어대어야 인생은 더욱 무의미할 뿐이라는 것을 뼈저리도록 알으켜 주자. 꺼리고 비웃는 데 그치지 말고 정면으로 알몸을 던져 거부하자. 나 같은 처지의, 아니 나 이상의 경우의 무수한 인간들.

이웃을 보는 눈 귀 하나에도 조심을 담고, 건네는 한 마디의 얘기에도 남을 괴롭힐사 애쓰는 인간들. 늙은, 젊은, 어린 남녀의 수많은 얼굴들. 그리운 그 얼굴들이 있지 아니한가. 나는 외로울 수 없다. 이제부터 그들 가운데서 잃어진 나 자신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청부업자들을 격리하고 주어진 땅위에 그들과 함께 새로운 마을을 세우자. 거기에 내 다음의 삶을 바치는 것이다. 청부업자들의 교만과 포악을 곧 같은 인간인 자기 자신의 부끄러움으로 돌리고 한결같이 고통을 참고 견디어온 ‘조용한’ 인간들, 광기(狂氣)의 청부업자는 사라지고 ‘조용한’ 인간들의 세계가 와야 한다.

조용한 인간들의 세계—

현은 가슴에서 피어오르는 훈훈한 것을 억제치 못했다. 되살아오는 어깨의 아픔.— 땅위에 가득 찬 이 몇 백 배의 아픔. 이만한 아픔이면 기꺼이 받고 수월히 이겨내야 한다.—그리고 살아서 먼저 가까운 사람들에게 조용히 내가 지내온 얘기를 들려주어야 한다.—

현은 흐려져가는 의식 속에서 자기를 부르는 하나의 소리를 들었다. 쿵! 하고 들려오는 포소리보다 가까운 하나의 부르짖음.

“보아, 저 소리 벌서 저기 가까워 오는 그리운 저 목소리.”

울음에 가까운 그 부르짖음은 차차 이 동굴로 가까워 오면서 산과 산에 부딪치고 골짜구니를 감돌아 메아리에 또 메아리를 일으켜 갔다.

산과 산. 어디까지나 이어간 산줄기. 굽이치는 골짜구니. 영겁의 정적은 깨뜨려지고 거기 새로운 생명이 날개를 치며 퍼득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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