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수길 작「第三人間型」
지식인의 고뇌와 각성
6·25 사변으로 인해서 변화된 성격으로 나타난 인간의 타입, 이것이 안수길(安壽吉)의 문제 소설「제삼인간형(第三人間型)」이다. 인간이 어떠한 극한적인 상황에 처하게 됨으로써 비본래적(非本來的)인 인간으로, 또는 본래적인 인간으로 변화된다는 여기에 이 소설의 문제의식이 있다.
인간을 에워싸고 있는 어떤 상황의 변화는 그 인간을 나약하게 하기도 하고 오히려 강하게 하기도 한다. 가령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쉽게 저버리고 시류(時流)에 적응하는 인간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새로운 사명을 갖고 적극적으로 도전하려는 인간도 있다. 본질에서 떠나는 경우와 본질에 접근하는 경우의 인간형이다.
또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중간한 위치에서 방황하는 인간도 있다. 이러한 인간의 모습들을 작가 안수길은 인텔리 양식을 파헤치면서 문제성을 제시하고 있다. 1953년에 발표하여 문제작으로 높이 평가받았을 뿐만 아니라, 55년에 제2회 아시아자유문학상에 오른 이 소설은 6·25 동란을 겪어나가는 지식인의 고민상을 절실하게 부각하고 있다.
이 소설 속에는, 한때 작가였다가 6·25 사변 후 상인으로 전락한 ‘조운’이라는 인물과 그를 따르는 ‘미이’라는 문학소녀를 그리는 가운데에, ‘석’이라는 역시 작가이면서 가족의 호구책(糊口策)을 위해 교원 노릇을 하는 인물을 내세워 양식 있는 인텔리의 생태를 실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6·25 사변을 통해서 나타난 세 가지의 인간형을 그리는 가운데, 극한 상황에 부딪친 지식인을 제3인간형으로 묘사하고 있는 이 소설은 한국전쟁을 통해서 얻을 수 있었던 기념비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은 대청소를 한다고 야단법석을 떨던 아이들도 물러가고, 1천 5백여 명이 날마다 생선 떼같이 펄펄뛰던 교실도 교정도 한적하기 짝이 없는 토요일 오후, 어느 학교 분위기의 서술로 시작된다.
양식 있는 인텔리의 생태 묘사
이야기는 학교로 ‘석’을 찾아 온 ‘조운’의 등장으로 새로운 전환을 보이는데, ‘석’은 ‘조운’과 마지막으로 헤어지던 때를 회상한다. 그는 6·25 사변이 나던 다음날에 K신문사에서 헤어졌었다. 그 후 암흑의 90일 동안에 한 번도 만나지 못하였고, 서울 수복 후에도 ‘조운’은 나타나지 않았었다. 문단이나 다방에 나타나지 않는 ‘조운’에 대한 억측이 구구했었다. 부역해서 따라갔다느니, 폭격에 맞아 죽었다느니, 그러나 1·4 후퇴로 부산에 내려와 보니 신문 소식란에 ‘조운’이 자동차회사 중역이 되어 피난도 제1착으로 했고, 돈도 듬뿍 벌었다는 것이 보도되었다.
그렇게 문학에 대하여 결백하고 순교자적 태도였던 ‘조운’의 일이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능한 문인 자신에 환멸을 느낀 패들은 ‘조운’의 처사를 통쾌하다고 생각했지만, 반대파에서는 문단을 떠났다는 이유로 조소(嘲笑)하였다.
“꽁무닐 따라다니던 문학 소녀와 붙었다지?”
“그래? 달콤한 도피생활, 피난 북새통에 있을 법한 일이야.”
이런 소문까지 있었던 ‘조운’은 영 사라졌다가 3년 세월이 흐른 뒤에 불쑥 나타났고, ‘석’이를 자가용차에 태우고 가는 것이었다. 두 달이나 실업(失業)의 쓰라림을 맛보고 있던 ‘석’은 어디든 입에 풀칠할 자리를 얻지 않아서는 안 되었다. 기능과 경력이 그것뿐이라 문학적인 사무를 다루는 분야가 구직(求職)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분야이기에 물결은 더욱 거센 듯하였다. 문화는 그 독자성을 포기했다. 활자와 활자, 그림과 그림, 노래와 노래가 메가폰으로 변하였다.
정치적인 운동에는 일체 흥미가 없는 ‘석’은 이 거친 폭풍 속에 몸을 던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들은 밥을 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아내는 아내대로 빤히 아는 바가지를 박박 긁었다. 가느다란 팔에 매달리어 굶주리고 헐벗는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석’에게 학교는 구원의 안식처였다.
마음의 지주였고 생활의 목표였던 문학의 길을 하루아침에 분필로 바꾼다는 것이 자신을 배반하는 일밖에 되지 않았다. 더욱이 제 자신에 충실하여 학교를 그만둔다면 그나마 생활의 방편이 막히는 것이었다. 직업에도 충실하지 못하고 자신에도 엉거주춤한 자책의 채찍을 맞으며, 석은 점심과 원고지가 들어 있는 무거운 가방을 들고, 날마다 삭막한 통근 코스를 흐리터분한 분위기 속에 학교에 왔다 갔다 하였다.
그러나 그럴수록 마음은 공허해 갔다. 그리고 안일(安逸)을 탐하여 현실과 타협하려고 들었다. 허탈한 마음으로 학교 주위의 바다 풍경을 즐기고, 일요일을 고대하는 게으른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가 ‘조운’에게서 정신적인 위압을 느낀 것은 그의 내면이 이러했기 때문이다.
‘석’이 술을 마시고 귀가하는 날은 허튼 소리를 하였다. 그리고 우는 버릇이 있었다. 그는 가족들에게 잠깐만 참으라고 하면서 이제 책이 척척 출판되어 인세(印稅)가 꼬리를 물고 들어올 거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때는 집안이 희망으로 명랑해지지만, 그 후 1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 인세(印稅)는커녕 밤을 밝혀 끄적인 잡문(雜文) 고료도 들어오지 않았다.
몇 번 속아본 식구들은 이젠 ‘석’의 큰소리에 흥미는커녕 질색을 하였다. 술을 마시고 돌아온 날이면 ‘석’은 자리에 엎디어 훌쩍훌쩍 서툰 푸념을 섞어가며 울었다. 그럴 때면 아내도 노인들도 비감(悲感)해 하였다.
검정 넥타이를 매셔야죠
“고진감래라고, 피이는 날이 있겠지. 그렇게 비감해 말게나.”
아버지는 담배를 뻑뻑 빨며 말했고,
“그저 몸만 튼튼하면 이만 고생을 고생이라고 하겠는가? 애들이 무럭무럭 자라구…….”
그리고 어머니는 ‘관세음보살’을 뇌이며 코를 풀었다.
“그만 주무세요. 옛말 할 때가 있겠지요.”
아내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머리맡에 와서 베개를 베어주고 이불을 발끝까지 똑바로 덮어 주었다. 이러한 부드럽고 어루만짐을 받은 분위기 속에 ‘석’은 그날 밤 울다가 이내 자버렸다. ‘석’은 이것에 맛을 들였다. 그 후 그에게는 술을 마시면 집에 들어 우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나 처음에는 어루만져 주던 가족들도 거듭되는 울음에 또 머리를 저었다.
중국 요릿집에 들어간 두 사람은 빼주를 마시면서 얘기를 하게 되는데, 3년 동안 타락했다는 ‘조운’의 말에 ‘석’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이를테면 넓은 데서 좁은 구멍으로 기어들어가 옴짝달싹 못하고 기진맥진하고 있는 터이지마는, 자네야 넓은 세계에 활활 날아다니는 셈 아닌가? 작품 세계가 커지고 힘차리라고, 오늘 자네를 대할 때부터 그런 기대를 가지고 있었네.”
“작품?”
“그래!”
‘조운’은 잠간 머리를 푹 숙였다가 갑자기 일어나더니, 못에 걸어 놓았던 외투 안주머니에서 종이에 싼 것을 끄집어냈다.
“이걸 보게.』 ”
내미는 종이 꾸러미를 펴보고 석은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뭔가?”
거기엔 언뜻 보기에도 새것인 검정 넥타이 위에 흰 봉투가 놓여 있었다. 봉투에는 ‘조운 선생님’이라고 틀림없는 여자의 글씨가 단정하게 쓰여져 있었다. 어안이 벙벙해 앉았는 ‘석’에게, ‘조운’은 편지를 집어 알맹이를 내어 주었다.
“읽어 보게.”
“읽어두 괜찮은가?”
“읽게.”
펴보니 간단한 문맥이었다.
선생님 호의는 뼈에 사무치오나 제가 취할 길은 이미 작정되었습니다. 그 사이 저는 선생님 몰래 간호장교 시험에 지원했습니다. 시험은 월요일 대구에서 치르나, 준비 때문에 지금 떠납니다……. 그때 그 넥타이는 집과 함께 재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 대신입니다. 선생님은 역시 검정 넥타이를 매셔야 격에 어울립니다. 안녕히.
미이 올림
‘미이’와의 관계가 소문과 같으냐는 ‘석’의 물음에, ‘조운’은 술을 쭉 들이킨 다음 결심한 듯이 입을 열었다. 그의 이야기로는 사실이 아니었다. 물론 ‘미이’는 ‘조운’을 따르던 문학소녀였다. ‘미이’는 화려하고 명랑한 편이었다. 다방 같은 데서 이 테이블 저 테이블로 깡충깡충 뛰어다니며 이 시인 저 작가에 대해 종알거리며 까불랑거리는 행동 전체가 재기(才氣)의 발산으로 보였다.
대단한 다변(多辯), 재빠른 말투였으나 귀를 기울이고 들으면 입을 비쭉거리며 지껄이는, 독설(毒舌) 같은 데서 새롭고 날카로운 센스를 붙잡을 수 있었다. 그녀는 모 회사 중역의 딸이었고, 의대에 다니다 문학을 한다고 학교를 집어치웠던 경력의 소녀였다. 그녀가 은행원인 오빠를 통해서 문학의 길로 인도해 달라고 부탁해 온 후로는 그림자같이 ‘조운’과 함께 있었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미이’는 ‘조운’이 매고 있는 넥타이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선생님 넥타인 항상 검정 거니 그건 무얼 의미하는 거예요?”
“내 넥타이가 검정이었던가?”
그제야 나는 내 넥타이가 낡아빠진 검정 것임을 깨닫고 그것을 어루만지며 웃었네.
“의민 무슨 의미야, 없으니 이걸 맸지.”
“인생에 대한 상장(喪章) 아녜요?”
“상장? 허, 허, 그런 걸 일일이 생각하고 옷을 입다간 머리가 빠지겠네.”
“난, 선생님 대할 때마다, 그리고 늘 검정 넥타이만 매구 계시는 걸 보구 그렇게 생각했어요.”
“아무렇게나 생각하지, 그래.”
“체홉의 「갈매기」아시죠? 엊저녁 읽었는데, 퇴역 중위의 딸 마샤가 늘 검정옷을 입고 있는 걸 보구, 소학교 교사 메도벤가…… 무언가 하는 청년이 묻지 않아요. 왜 검정 옷을 입고 있는가구. 마샤의 대답이 그거예요. 인생에 대한 상장이라구.”
“그런 거 있지. 그러나 난 그런 상징적인 의미로 검정 넥타일 매는 건 아냐.”
“선생님 태도와 검정 넥타인 어울려요.”
“어떻게 하는 말인지?”
“가령 속세적(俗世的)인 것에 초연한 거라든가……. 세상 일 얼굴 찡그리구 꼬치꼬치 캐서 생각하는 거라든가.”
새빨간 따리아 한 송이
‘미이’는 어머니가 자기를 배기 전에 유산을 했었다고 하면서, 언니가 될지 오빠가 될지 모르는 아기가 유산되지 않았다면 자기는 세상 구경도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그걸 생각하면 인생은 즐겁고 고마워서 견딜 수 없다고 깔깔대다가는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선생님도 인생을 즐겁게 보세요. 좀 화려해지시구, 이맛살 펴시구, 우선 그 넥타이부터 풀어 던지세요. 이리 오세요.” 하더니 ‘조운’의 팔을 끌고 동화백화점으로 들어가서는 남색 바탕에 새빨간 따리아 한 송이가 타는 듯한 넥타이를 골라서 매어 주고, 낡은 검정 넥타이는 자기 핸드빽 속에 넣었던 것이었다.
그 후 며칠 지나지 않아 6·25가 터졌고, 가족을 데리고 처가(妻家)가 있는 수원 어느 시골로 내려가 숨어 지내면서 적의 무자비한 박해에 따른 배신·음모·고발 등 추악한 면을 보면서 죽지 않고 살아남게 되면 인생은 결코 까다롭게 살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녀가 넥타이를 사주던 때에는 무심히 들어 넘겼던 말이 떠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수복 후 당면한 생활문제 때문에 어떻게 처삼촌과 손을 잡고 일을 한 것이 자동차 운수업이었는데, 짐은 얼마든지 있어서 어름어름하는 사이에 돈을 벌게 되었고, 1·4 후퇴 때는 광주에 본거지를 두고 있다가 이번에 부산으로 진출해서 승합과 버스 영업을 해보려고 왔다고 했다.
‘조운’은 좁은 방에서 떠드는 아이들에게 신경질을 부리면서 원고지 빈칸을 메우는 생활이 고리타분하게 여겨졌었는데, 일체 생각을 하지 않으니 몸이 나고, 마음을 즐겁게 가지니 이맛살이 펴지고, 잘 먹고 잘 자니 얼굴이 붉어져 갔다. 처음 얼마 동안은 이런 생활이 올바른가 하고 일종의 가책도 있었으나 에라 내가 한국에서 글을 썼댔자 프뢰벨이 되겠나, 지드가 되겠나, 한 푼어치 값도 못 가는 것을 글이랍시고, 신문·잡지를 통해 이름이 알려진 것으로 괴뢰적당의 박해의 대상이 된 것밖에 더 있었느냐고 생각하고 이름마저 호(號)인 ‘조운’을 버리고 ‘최춘택’이라는 본명으로 돌아가 술과 계집을 무작정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판이었는데 부산 와서 ‘미이’를 만나게 되었다고 했다.
‘조운’이 만난 ‘미이’, ‘미이’가 만난 ‘조운’은 너무도 변해 있었다. 6·25 사변으로 인해서 성격이 변한 것이었다. 사변 통에 ‘미이’의 오빠는 행방불명이 되고 아버지는 반신불수, 집은 재가 되었다면서 그녀는 침착한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조운’은 이튿날부터 ‘미이’를 날마다 만났고, 그의 판잣집에도 찾아가서 꼼짝 못하고 누워 있는 ‘미이’ 아버지의 얼빠진 모양이라든지, 고생을 모르고 곱게 늙어가던 어머니의 목판 장사하는 정경을 보고는 그 가족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미이’와 자주 만나는 사이 처음의 순수했던 생각보다도 야심이 더 앞을 서게 되었다.
결국 ‘조운’은 그녀에게 다방을 차려 주겠다고 제의했으나 그녀는 연락 장소인 다방의 레지에게 종이쪽지를 맡겨놓고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여기에서 ‘석’이에게 들려준 ‘조운’의 이야기 마지막 부분을 살펴보자.
“다른 길과 달라 간호장교이고 보니 생활방편을 위한 것이 아님이 대뜸 짐작이 갔고, 더욱 나의 뒤통수를 때린 것이 검정 넥타이었었네. 그러면 ‘미이’가 첫날 다방에서 ‘사명 운운……’했던 것은 그 길을 말함이었던가? 나는 부끄럽기 짝이 없었네. 검정 넥타이를 들고 나는 비로소 3년 동안 내가 정신적으로 타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는 것을 뼈아프게 느끼었네. ‘미이’가 말하는 그 사명을 찾는 길, 사명을 다 하는 일을 나는 사변이라는 외적인 격동 때문에 포기하고 만 것일세. 가장 잘 생각하는 척하던 나는 가장 바보같이 생각했고, 부박하다고 세상을 모른다고 여기었던 ‘미이’는 사변에서 키워졌고 굳세어졌고, 올바른 사람이 된 것일세. 이렇게 생각하자 나는 천야만야한 낭떠러지를 구을러 떨어지는 듯했네. 구을면서 걷어잡으려고 한 것이 친구의 구원이었네. 자네를 찾은 것은 이 때문일세.”
‘조운’의 이야기를 듣고 난 ‘석’의 뇌와 마음은 강렬한 ‘미이’의 인상으로 꽉 차 있었다. 그리고, ‘미이’가 ‘조운’의 마음에 던져준 충격 이상의 충격을 석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에게 충격을 던져준 그것은 인생에 대한 상장(喪章)을 말하는 지극히 순수한 깨끗함이었다. 결국 ‘조운’은 사변의 압력으로 사명을 포기했고, ‘미이’는 사변을 통하여 오히려 용감하게도 시대적 요구에 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하였다. 그리고 사명을 포기하지도, 그것에 충실하지도 못한 석이도 사변이 빚어낸 한 타입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세 인물의 성격적인 변화, 그것은 본질과 수단 사이의 갈등에서 나타나는 결과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지식인의 고뇌를 본다.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내팽개친 지식인이 ‘미이’라고 하는 순수에 얻어맞고 아파하며 자각하는 그 자성적(自省的) 각성이 이 소설의 주제의식이라 할 수 있다.
차원 높은 민족의식 그린 작가
소설가 안수길은 1911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출생했다. 1924년 부친이 있는 간도(間島)로 가서 간도 중앙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함흥으로 돌아와 함흥고보에 입학했으나 27년 2학년 재학 중 맹휴(盟休) 사건이 일어나 주동학생으로 인정되어 자퇴, 28년 서울 경신학교 3학년에 편입, 29년 광주학생사건에 가담하여 일경(日警)에게 체포되어 15일간의 구류 생활을 치르고 경신학교에서 퇴학당했다.
1930년 일본의 교토 양양중학을 거쳐 31년 도쿄 와세다 대학 고등사범부 영어과를 수학한 후 간도에 돌아와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문학 공부에 전념했다. 35년에 문예지 『조선문단(朝鮮文壇)』에 단편 「적십자병원장」과 콩트「붉은 목도리」가 동시에 당선, 박영준·이주복·김국진 등과 간도에서 문예동인지 『북향(北鄕)』을 간행했다.
1948년 월남하여 경향신문사에 입사, 문화부 차장과 조사부장을 역임하였다. 49년 광복 후 처음으로 붓을 들기 시작하여 단편소설을 잇달아 발표, 문단의 주목을 끌었다. 6·25 동란 때는 해군 정훈감실 문관으로 근무, 52년부터는 교편을 잡으면서 작품 활동을 했다.
1953년 문제작으로 높이 평가 받은 단편 「제삼인간형(第三人間型)」을 발표했으며, 43년 『북원(北原)』이라는 첫 창작집을 낸 이래 제2창작집 『제삼인간형』을 간행했는데, 이 창작집으로 55년 제2회 아시아자유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특히 장편 대하소설 「북간도(北間島)」로 서울시문학상을 받았고, 장편 「성천강(城川江)」과 「부교(浮橋)」로 3·1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그의 초기 작품이 만주에 이주한 우리 농민들이 흙과 싸우는 모습을 그리는데 주력했다면, 해방 후에는 월남하여 도시 소시민의 생활 단면을 그렸다고 볼 수 있다. 59년 장편 「북간도」를 집필하기 시작한 후부터는 차원 높은 민족의식이 더욱 작품에 젖어들어 장단평의 문제작들이 크게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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