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련순의 소설 「거미를 살려줘」
거대한 한계상황의 실존의식
黃松文
허련순의 소설 「거미를 살려줘」의 주인공 ?남자?는 천애(天涯)의 고아(孤兒)다. 그의 어머니는 자식을 마음대로 낳지 못하게 하는 거대한 국가 사회 구조 속에서 ?산아제한?이라는 규범에 묶여있는 처지다. 인간 사회의 부조리라는 비 본래적인 틀에 갇히게 되어 미친 짓을 해야만 생존을 지탱할 수 있는 극한 상황 속에서 사투를 벌인 끝에 결국은 자살하고 만다.
이 소설의 현실은 ?남자?가 건너편 건물의 여인을 바라보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과거 회상은 건너편 여인 같은 어머니의 영상으로 차있다. 현재의 건너편 여인은 정신질환자요 과거의 어머니는 자식의 생존을 위해서 미친척하다가 급기야는 미치게 되고, 철저한 죽음 연습 끝에 죽음을 맞게 되는 스토리로 되어 있다.
그녀의 죽음 예행연습은 거미를 때려죽이는 사건 형태로 나타난다. 거미가 내려오면 밤손님이 온다는 속설을 여기에서는 거미를 죽이면 밤손님이 온다는 상징성으로 전이시키고 변형시키면서 복선을 깔고 있다.
거미의 하강(下降)이나 거미의 죽음은 밤손님, 즉 도적같이 도래하는 저승사자를 의미한다. 그녀의 철저한 거미사냥은 저승사자의 초대를 의미한다.
이 소설에서 특별한 의미를 캐낼 수 있는 근거는 심사관과 ?남자?의 대화에서 시발된다. ?당신이 번역가이고 시인이라고 누가 인정했는가??라는 질문에 ?누가 나를 인간이라고 인정을 했지요??하고 반문하는 남자의 철학적인 사고의 발성과 깊이 있는 질문(현답)에서 기인된다 하겠다.
인간의 실존에 관한 문제는 다음의 글에서도 서스펜스를 일으키게 하고 있다.
?우리가 매일 그 여자를 구경하는 것처럼 그 여자도 우리를 구경하고 있겠죠. 그리고 우리처럼 궁금해 하고 있을지 모르죠. 저 인간들은 도대체 저 건물 속에 모여서 뭘 하고 있을까??
이러한 물음은 인간 스스로 객관의 눈으로 자아를 성찰하게 한다. 그것은 이미 인간이 왈가왈부할 수 없는 영역 바깥의 범주의 세계를 망각한 채 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 실존의 문제로서 인간을 존재하게 한 어떤 원인적 근본 존재로서의 조물주(창조주)나 종교에서 말하는 신(神)에게나 물어야 하는 범주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물음은 결국 자식을 마음대로 낳아서 기르지 못하도록 규정한 사회의 모순된 카테고리라는 한계상황에서 자식의 생존을 위해서 죽어야 하는 모순이 상징적 장치 속에 암유(暗喩)되고 있다.
이 소설에서는 특히 ?저 인간들은 도대체 저 건물 속에 모여서 뭘 하고 있을까??라는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인간들의 부조리한 삶을 비꼬는 듯한 아이러니를 내비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거미를 살려줘?라는 말은 저승사자(죽음)가 오지 않게 해달라는 간접호소가 돠겠는데, 이러한 보조관념 뒤에 도사리고 있는 원관념이란 바로 누구나 자유롭게 아이를 낳아서 기를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오게 해달라는 간절한 바람으로서의 절규라 하겠다.
거미가 어머니의 손에 맥없이 죽는 것처럼, 어머니는 사회적 규범에 갇혀 죽게 되고, ?남자?역시 거미와 어머니처럼 죽을 수밖에 없는 실존의 상황의식을 명징하게 반영한 수작이라 하겠다.
이 소설은 마치 무늬를 넣어가면서 피륙을 짜듯이 치밀한 직조(織造)를 보이고 있다. 그것은 다음의 구절에서도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이상하다는 말에 남자는 음료 박스를 손에서 놓아버렸다. 금단현상처럼 손과 다리에 힘이 쭉 빠져나갔다. 그에게 이상하다는 말은 미친 사람 혹은 정신병자란 뜻이다. 그것은 정신병자로 살았던 엄마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매일같이 이상한 짓을 하고 일상처럼 이상하다는 소리를 들어도 아무렇지 않지만 그는 달랐다. 아버지가 엄마는 미친 것이 아니라 미친 척했을 뿐이었다고 해도 다를 바는 없었다. 엄마는 미친 사람이었고 그 자식은 그 유전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들이 미치게 하는 사회구조와 미쳐가는 인류의 모순을 단적으로 직시하게 된다. 요즈음 환경오염으로 인해서 오존층의 파괴로 하늘에 구멍이 뚫리고 지구가 몸살을 앓는 바람에 지진과 해일의 여파로 인해서 원자력발전소의 붕괴로 해안도시가 사라지는가 하면 사망과 실종과 병사하는 재앙을 맞게 되는 차제에 이 소설은 또 다른 윤리적 측면에서의 경종이 아닐 수 없다.
이 소설은 우연의 일치를 필연적 상사성(相似性)이라는 장치로 묶어놓고 있다. 검정 옷을 입은 그녀와 역시 검정 옷을 입은 엄마의 겹침이다. 두 영상은 클로즈업되면서 죽음이라는 동류의 입체성을 띄게 된다.
그녀가 엄마처럼 검정 옷을 입은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우연이든 필연이든 두 사람은 어딘가 닮은 데가 있었다. 혹시 어머니는 건너편의 검정 원피스를 입은 여자의 또 다른 모습이었던 건 아닐까? 아니면 검정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어머니의 또 다른 모습이거나…원래부터 두 사람은 한 인물일지도 모를 일이다…남자의 생각은 복잡했다.
작가는 이 소설을 윤회환생설에 입각해서 쓰지는 않았다. 그러나 독자는 혹 윤회설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나름대로의 상상력을 굴려서 유추해 보고자하도록 모호성으로 은폐시켜놓았다. 그래서 독자의 궁금증과 상상력은 더욱 증폭된다. 모르긴 해도 작가는 여기까지 감안(계산)해서 작품을 직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 이야기를 거시적인 망원경적인 눈으로 확대하게 되면 인간이 신의 영역까지 침범함으로써 불행하게 된다고 하는 자성의 계기가 될 수 있겠다. 그리고 미시적인 현미경적인 눈으로 통찰한다면 지금 국가마다 골머리를 앓고 있는 인구 문제의 심각성과 함께 윤리문제를 생각하게 하는 자성의 계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사회적 반영이라는 측면에서도 매우 소설답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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