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동리 작「蜜茶苑時代」
휴머니즘과 삶의 근원적 의의
김동리(金東里)는 1933년에 단편 「밀다원시대(蜜茶苑時代)」로 제3회 자유문학상을 수상했다. 이 작품은 작가가 6·25 동란 당시 부산 피난시절에 겪었던 현실적인 사건의 실화를 바탕으로 소설화한 것이다.
이 작품이 종래에 그가 즐겨 사용해 오던 소설적인 정법(定法)을 쓰지 않고, 현실적인 실화를 그대로 소설화한 데에도 이 작품이 평가되는 까닭은 휴머니즘 정신에 입각하여 인간성을 옹호하면서 생(生)의 근원적 의의를 탐구해 가는 작가적 발상이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6·25로 인해 사회적 혼란에 처한 인간들의 모습이 여러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데, 이 암담한 사회 현실을 바라보는 작가의 눈이 예리하게 번득인다. 현실이 부정적인 양상으로 나타나게 될 때 작가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비뚤어진 현실을 고발하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전쟁과 폐허, 부정부패, 도피, 몰인정 등 1950년대의 암담한 현실은 독자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고 또 너무도 당연했다. 김동리의 「밀다원시대」는 바로 그의 인간성 옹호를 위한 고발의식이 암담한 사회 현실의 체험을 통해서 현장감 있게 전개된 작품이라는 데에 주목되고 있다.
상황과 인간, 그리고 휴머니즘
이 소설에 나오는 이중구는 서울에 노모를 남겨둔 채 마지막 피난 열차에 오른 지 27시간 35분 만에 부산에 도착한다. 피난 열차에서 함께 내린 윤(尹)의 뒤를 따라 K통신사의 지국 사무실 테이블 위에서 하룻밤을 새운 중구는 ‘밀다원(蜜茶苑)’이라는 이름의 다방을 찾아가서 문인들을 비롯하여 화가 등 예술인들을 만나게 된다.
김동리는 이중구라는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서 ‘밀다원’의 분위기를 “층계를 반쯤이나 올라갔을 때부터 다방에서 나는 사람들의 소리가, 닝닝거리는 꿀벌떼 소리 같이 고막을 울렸다.”고 했는데, 이는 진정으로 사람을 옹호하는 그의 휴머니즘적 기본 바탕에서 우러나온 말이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 시화자(視話者)의 주요 인물로 나오는 이중구의 입장이 밝혀지는데, 그는 아내를 어린 딸과 함께 충청도 친정으로 보내고, 병약한 노모 한 분을 그대로 남겨둔 채 피난을 내려왔는데, 그의 넋두리 한 토막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돈만 있었으면 나도 사실 어머니를 모시고 부산에 올 수 있었어. 원고료 몇 푼씩 받아서 그때그때 연명을 해 오던 우리 처지에 ‘육·이오’를 치르고 ‘구·이팔’을 당했으니 깨끗이 빈손이지 어떻게? 사실 원서동의 그 오막이라도 팔까 했지만 섣달 초승께부터 벌써 슬금슬금 남하가 시작되는 판인데 팔기는 어떻게 팔어? 스무날(섣달)이 넘어 아내가 딸년을 데리고 충청도 저희 오라범을 찾아간다고 했지만, 그것도 부모 없는 친정이요, 평소에 의까지 좋지 못했는데, 정 할 수 없어 죽여줍시사 하고 찾아가는 판인 걸. 거기다 어머니까지 붙여 보낼 수가 있나? 또 붙여 보낼래니 그만한 밑천이 있나? 어머니는 조형도 알지만 벌써 오래된 천만병으로 보행은 어림도 없고, 기차나 자동차도 복잡하게 밀고 짓밟고 하는 판에는 도저히 오 분도 견디지 못하시지. 리야까나 달구지 같은 것을 구해서 그 위에 타시게 하고 내가 끌어 볼 수는 있겠는데, 내 주변으로는 그거 하나 구하기도 하늘에 별 따긴데. 게다가 어머니는 찬바람만 쐬면 그냥 기침이 연발하여 숨이 막히시는 판이니 그러다가는 노상에서 지레 죽으실 것 같고……. 또 어머니가 한사코 움직이지 않으려고만 하시니 괜히 끌어내다 길에서 지레 죽이려느냐고, 이왕 죽는다면 집안에서 이불 덮고 편안히 누워 죽는 것이 얼마나 나으냐고, 그리고 집안에는 아직 연료와 식량이 다 남아 있으니 정 급하면 일어나 끓여 먹을 수도 있는데 왜 죽음을 사서 나가겠느냐고……."
이중구는 먼저 피난 내려와 자리 잡은 조현식의 집, 본래 부산에 살고 있는 오정수의 집 등을 전전하는데, 다방과 가정집을 왕래하면서 겪게 되는 여러 종류의 인간상을 보여준다.그 여러 인물이란, 가령 인정도 의리도 없이 서울에서 피난 내려온 문인들을 깔아뭉개고 주도권을 잡으려는 전필업이라든지, 빈대떡과 술을 사면서 울분을 참을 길 없어 바닷물에 빠져 죽어야 한다고 눈에 불을 켜며 토로하는 송 화백, 처 외삼촌에게 설움을 당하고 그의 치부와 비리를 폭로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안정호, 제주도로 도피하려던 길 여사, 전쟁의 물결에 애인을 빼앗기고 실의에 잠겨 있다가 약을 먹고 자살한 시인 박운삼, 어린 자식들을 길 위에 흩어버리고 혼자서 떡 세 개씩으로 목숨을 이어간다는 허 시인, 늙고 병든 어머니를 죽음에게 맡겨둔 채 혼자서 달아나 온 이중구, 인정이 많고 의리가 있는 부산 토박이 오정수와 그의 부인 등 대조적인 이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중에서도 전필업과 오정수는 대조를 이룬다. 이 두 인물은 다 같이 부산의 문인이면서도 서울에서 피난 내려온 문인들을 대하는 양상이 정반대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평론가 조현식이 전필업을 만났을 때의 분위기와 그 행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그날도 나는 마침 이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내가 무심코 고개를 드니까 그는 이미 저쪽 들어오는 문 앞에 서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더군. 나는 처음 저 친구 너무 반가운 나머지 어쩔 줄 몰라서 저러고 있나보다 했더니, 종시 움직이지 않고 그냥 서서 빤히 바라보고만 있잖아? 나는 웃는 얼굴로 손을 들어 보이며, 전형 하고 불렀지. 그랬더니 그는 그냥 그 자리에 선 채 고개만 까딱하잖아. 묘한 녀석이라 생각하고 그냥 내버려 두었더니 나중 저쪽 나 모르는 신문기자들 있는 자리에 가서 같이 앉았다가 그냥 쓱 나가버리더군……. 그것까지는 또 존데, 그리고 며칠 지난 뒤 그 자가 허형(허윤)을 보고 하더란 말이 걸작이야. 이렇대, 지금까지는 서울 있는 놈들이 문단을 리드해 왔지마는 지금부터는 부산이 수도로 됐으니까 재부(在釜) 문인들이 문단의 주도권을 잡아야 한대. 그래서 이번에는 중앙 문인들이 재부(在釜) 문인들 앞에 머리를 수그리고 나와 문안을 드릴 때까지 이쪽에서는 버티어 줄 작정이라는 거야.”
“전필업이가 내는 『항도문학』이란 주간 신문을 좀 보시오. 거기, 중앙서 내려온 문인으로서 글줄이나 바로 쓰는 현역 가운데 벌써 욕먹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있는가? 그 위에다 좀 더 유력한 문인에 대해서는, 무전취식을 했다느니, ‘문총’ 공금을 착복했다느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거짓말로 갖은 인신공격을 다 하고 있었으니까.”
다음은 이중구가 오정수를 따라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 따뜻하게 대하는 두 부부 오정수와 그의 아내의 언행을 살펴보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눈을 끈다.
오정수의 부인이 들어와서 인사를 했다. 키가 훨씬 크고 몸이 뚱뚱하고 얼굴빛이 거무스름한데다 목소리가 컬컬한 부인이었다. 다만 가늘게 뜨는 실눈에는 어딘지 소녀다운 애티가 있어 보였다. “아무꺼도 없임니더마는 마아이 드이소이.” 하고 절을 한 번 하더니 그냥 나가 버렸다. 뒤이어 저녁상이 들어왔다. “아직 좀 더 있다가 가지고 오너라.” 오정수가 저녁상을 도로 들여보냈다. “술 좀 더 할란대이.”하고, 그는 또 안쪽으로 향해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생략)
오정수는 중구의 빈 잔에 또다시 술을 쳐 주었다. 중구는 취기로 인하여 이미 얼얼한 손으로 그 술잔을 잡으려 했다. 그때, 갑자기 그의 두 눈에서는 취한 얼굴로서도 열도를 깨달을 만한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쏟아지며 뜻하지 못했던 울음이 복받쳐 오르는 것이었다.
독자는 여기에서 작가의 의도를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 작가가 쓰고자 하는 소설의 주제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 눈치를 채기 시작할 것이다.
그것은 어려운 상황에 처하여 있을 때에 나타나는 여러 인간들에 대한 조명과 작가적 양심의 소리로서의 인간주의적 메시지다. 여기에는 그 부조리를 확인하고 고발하는 휴머니즘의 정신이 뜨겁게 흐르고 있다. 이것은 투철한 작가정신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는 이중구라는 사람의 눈을 통해서 보여지는 사람들, 가령 냉철한 사람, 따뜻한 사람, 시류를 타고 재빠르게 적응하는 사람, 시류에 적응하지 못하고 구차스럽게 사는 삶 보다는 차라리 깨끗한 죽음을 택하는 사람 등을 그려가고 있다.
이 소설의 클라이맥스는 박운삼 시인이 ‘밀다원’에서 수면제를 먹고 자살할 때부터 전개된다. 그가 자살할 당시의 상황과 그가 남긴 유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안정호는 손가락으로 이층을 가리키며, “박운삼씨가 약을 먹었어요.” 했다. “약이라니?” “수면제.” “수면제를 왜?” “왜가 뭡니까, 아주 뻗어 버렸어요.” 순간 조현식의 얼굴이 파랗게 질린다. 길 여사의 입술이 바르르 떨린다. “얼마나 먹었기에?” 중구가 묻는다. “형편없이 먹은 모양입니다. ‘레노발비탈’ 육십 개에 ‘새콜사나듐’ 다섯 개를 합쳐 먹었다니 말 다 했지요 뭐.” “그토록 몰랐을까?” “모르는 게 뭡니까, 언제나 혼자 앉아 있는 그 구석자리에서 그냥 졸고 있는 줄만 알았지요.” 하고 안정호는 의사를 부르러 가면서 뛰어나갔다.
세 사람이 다방 안에 들어갔을 때 사람들은 서북쪽 구석에 거멓게 둘러 서 있었다. “이 망할 자식아! 이 못난 자식아!” 하고, 박운삼의 오바 소매를 잡고 흔들며 엉엉 울고 있는 것은 송 화백이었다.
(생략)
허 윤이 울먹울먹하며 곁으로 오더니 조현식에게 접어진 종이쪽을 내어주었다. 그 첫 장에는 「고별(告別)」이라고 제목이 붙어 있었다.
‘나는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페노발비탈 육십 알과 새콜사나듐 다섯 알을 한꺼번에 먹었다.
나는 진실로 오래간만에 의식의 투명을 얻었다. 나는 지금 편하다.
나는 지금 출렁거리는 바다 저편에서 나를 향해 웃음을 보내는 나의 애인의 얼굴을 본다. 그리고 지금 나의 앞에는 나의 친애하는 벗들이 거의 다 모여 있음을 본다. 나는 그들이 나를 지켜주고 있는 이 시간 이 자리에서 더 나의 생애를 연장시키고 싶지는 않다.
잘 있거라, 그리운 사람들.’
오십일년 일월 팔일 박운삼
시인 박운삼의 자살로 인하여 밀다원 시대는 막을 내리고, 문인들은 ‘스타 다방’과 ‘금강 다방’으로 흩어지게 되는데, 유엔군의 북진으로 전세가 호전된다.
이중구가 일을 보게 된 『현대신문』문화란에는 「박운삼의 인간과 예술」이라는 조현식의 평론과 아울러, 송 화백의 컷이 곁들어진 박운삼의 유작시 「등대(燈臺)」가 게재되었다고 밝힌 다음, 그의 시를 끝으로 결말을 짓고 있다.
어쩌면 해일(海溢)이 있을
듯한 저녁 때
나는
홀로 바닷가에 섰다.
저 어리광을 부리는 듯한
푸른 물결에
마음은
드디어 무너져 가는가.
먼 바다 저 쪽
흰 옷의 신부(新婦)는
등대 같이 섰는데
나는 나를 살르어
불을 켜는가.
삶의 근원적 의의를 연상
이 작품은 문인들이 부산 피난 당시 겪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여러 가지 양상으로 나타나는 인간상을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동시에 여기에서 나타나는 본연적인 인간과 비본연적인 인간을 확인해 가고 있다.
특히 이 작가의 주체적 관심은 ‘밀다원’에서 닝닝거리는 꿀벌떼 같은 문우(文友)들의 소리에 있다. 이것은 동질적인 사고영역으로서 민족공동체 의식과 통한다. 이 작가는 사랑스러운 문우들에게 뜨거운 애정을 보내는 반면에 부정적으로 비치는 소인배들에게는 고발의 화살을 사정없이 날려 보내기도 한다.
‘밀다원’에 있어서의 ‘蜜’은 글자 그대로 ‘꿀’을 의미한다. 김동리도 이 작품에서 여러 차례 “닝닝거리는 꿀벌 떼”라고 표현한 바와 같이 그것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써 마음을 따뜻하게 덮여주는 곳이다.
의식주마저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채 바깥세상에서 얼어온 마음과 몸을 훈훈하게 덮힐 수 있는 곳이다. 잘 곳이 없어서 아는 집을 전전하고, 끼니를 때우지 못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체온을 나눌 수 있는 이 다방을 작가는 애정의 눈으로 보았던 것이다. 바깥세상은 전쟁과 빈곤과 고통과 부정과 부패와 몰인정에 떨고 있지만 오로지 이 ‘蜜茶苑’이라는 이름의 다방만을 꿀벌들 닝닝대는 꽃밭과 같은 마음 편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다방은 바로 피난지 속의 안식처가 되는 셈이다.
문학이라고 하는 이상적인 꿈과 전쟁의 현실적인 상황 사이에서 적응을 못한 채 자살하고 마는 시인 박운삼의 죽음과 그의 유작시(遺作詩)를 통해서 작가는 인간의 원초적인 문제, 그리고 생(生)의 근원적 의의를 연상케 한다. 이것은 인간의 유한성과 문학(예술)의 영원성을 두고 하는 말이다.
결국 시인 박운삼은 이만치의 현실을 청산하고 저만치의 세계─저쪽 피안의 세계(흰옷의 신부·약혼녀)로 향하여 떠나갔던 것이다.
두 개의 원고뭉치와 한 편의 마지막 유작시(遺作詩)를 남긴 채…….
좌익 문인과의 이론 투쟁한 김동리
소설가 김동리(金東里)는 1913년 경북 경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시종(始鍾). 대구 계성중학교에서 수학하다가 서울 경신고등학교로 전학했으나 중퇴하고 귀향하여 박목월(朴木月)과 4년 동안 사귀면서 동서의 명작을 섭렵했다. 신과 인간과 자연에 큰 관심을 가진 그는 1933년에 다시 상경하여 서정주(徐廷柱) 등과 교우했다. 이듬해인 34년 『조선일보』신춘문예에 시 「백로(白鷺)」가 입선되고, 35년 단편소설 「화랑의 후예」가 『중앙일보』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또한 그 상금을 여비 삼아 다솔사(多率寺), 해인사 등지를 전전하며 쓴 작품「산화(山火)」가 36년 『동아일보』신춘문예에 재차 당선되어 작가적 위치가 굳어졌다.
그는 다솔사에서 창작의 여가에 야학을 설립하여 나중에는 광명학원이라는 사립학원으로 발전시켰다. 그 후 40년까지 「黃土記」 「잉여설」 「찔레꽃」 등 주옥 같은 작품을 발표하다가 일제의 어용문학단체인 문인보국회(文人報國會) 가입을 거절, 이에 광명학원마저 강제 폐쇄당하자 만주 등지를 방황하다가 경남 사천에서 광복을 맞이했다.
해방 후 좌우 투쟁의 와중에서 민족진영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서정주·조연현·곽종원·박목월·조지훈 등과 한국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하고 그 초대 회장에 피선되었다.
그는 창작활동을 하는 한편, 좌익문학인과의 이론 투쟁에도 선봉에 나서서 「순수문학의 진의(眞意)」「문학과 자유의 옹호」 등 평론을 발표하면서 민족진영 문학을 옹호했다.
경향신문 문화부장, 민국일보 편집국장 등 언론에도 종사했는데, 신비적·허무적 색채가 짙었던 그의 문학이 해방 후에도 인간성의 옹호와 삶의 근원적 의의를 탐구하는 주제를 곁들여 사상적 깊이를 더하고 있다. 그는 경력도 화려해서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예술원 원장, 서라벌예술대학 학장 등을 지냈다. 또한 다각적인 업적에 따라 자유문학상, 예술원상, 3·1 문화상 본상, 서울시문화상 등을 받았고, 국민훈장 동백장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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