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학과 인생

샘도랑집 바우

SM사계 2010. 6. 29. 09:50

샘도랑집 바우  

 

 


가까이 가지도 않았습니다.

탐욕의 불을 켜고

바라본 일도 없습니다.


전설 속의 나무꾼처럼

옷을 숨기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그저

달님도 부끄러워

구름 속으로 숨는 밤

물소리를 들었을 뿐입니다.


죄가 있다면

그 소리 훔쳐들은 죄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그 소리는 꽃잎이 되고 향기다 되었습니다.


껍질 벗는

수밀도의 향기……

밤하늘엔 女人의 비눗물이 흘러갑니다.


아씨가 仙女로 목욕하는 밤이면

수채도랑은 온통 별밭이 되어

가슴은 미리내로 출렁이었습니다.


손목 한번 잡은 일도 없습니다.

애기 한번 나눈 적도 없습니다.


다만 아슴푸레한 어둠 저 편에서

떨어지는 물소리에

정신을 빼앗겼던 탓이올시다.


시원(始原)의 유두(乳頭) 같은 

물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머리카락으로 목덜미로 유방으로 허리로

그리고 또……

곡선의 시야 굼틀굼틀

어루만져 보고 껴안아 보던

그 달콤한 상상의 감주(甘酒),

죄가 있다면 이것이 죄올시다.


전설 속의 나무꾼처럼

옷 하나 감추지도 못한 주제에

죄가 있다면

물소리에 끌려간 죄밖에 없습니다. 



우리 마을 황노인집 우물은 여름마다 생수가 솟았다. 우물 옆구리에서 다량으로 솟아나온 생수가 향나무 울타리 사이 미나리꽝으로 해서 과수원 쪽으로 흘렀다. 그 물은 이가 덜덜 떨리도록 시리고 맑았기 때문에 동네 여인들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게 되었다. 여인들은 그 샘도랑에서 채소를 씻는가 하면, 인적이 뜸한 밤에는 목욕들을 하였다. 그 당시 농경사회의 여인들은 여름 볕에 땀을 흘리며 밭일을 했기 때문에 밤이면 그 시원한 샘도랑에서 목욕하는 게 낙이었다.

우리들 또래의 조무래기들이 마을의 마지막 끝집인 그 황노인 집을 지나서 반딧불을 잡으려고 들녘으로 나갔다. 병에다 반딧불을 잡아들고 귀가할 때면 연인들이 그 샘도랑에서 목욕들을 하였다. 집으로 가려면 그 샘도랑 앞을 지나쳐야만 했다. 우리들은 그 앞을 지나가지 못하고 언덕바지 한 쪽에서 목욕이 끝나기는 기다리기로 했다. 한동안 어둠 속에서도 아슴푸레하게 전개되는 그 곡선의 시야를 즐기고 있었다. 여인의 비눗물 같은 흰 구름, 아니 새털구름이라고 할까 조개구름이라고 해야 할까 밤하늘의 신비로운 구름 사이로 비치는 달빛에 여인들의 그 곡선의 나상을 훔쳐보곤 했다.

달님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면 그게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래도 저만치 어둠속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자세히는 볼 수는 없었다. 그저 어둠 속에서도 약간의 아슴푸레한 곡선과 물 떨어지는 소리, “아유, 차가워!” 하며 외마디 소리를 내지르는 여인들의 목소리 등이 이제 갓 숫기가 생길락 말락한 우리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어머니가 쳐놓은 대청마루의 모기장 속에서 반딧불 병뚜껑을 열어놓으면 그 병속에서 기어나온 반딧불들이 모기장 여기저기에 달라붙은 채 반짝이는 것이었다. 모기장은 하나의 우주였고, 반딧불은 그 우주 공간의 별나라를 떠도는 아기별이었다. 잠이 들 때까지도 말이 소용없었다. 그저 아늑하고 편안하기만한 그 공간 속에서 밤하늘의 별나라를 가끔씩 날아다니는 반딧불에 눈을 주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엄마, 좋지?” “그래, 좋구나!” 우리들의 대화는 간결하면서도 느렸다. 급할 것이 없었다.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그 후 화가가 되지는 못했지만 마음속에는 그 여름밤의 샘도랑의 풍경을 간직하게 되었다. 창조적 상상력이 보태어져서 그 샘도랑은 어느새 시와 수필이라는 문학 장르 속에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음악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2001년 중국연변대학에 객원교수로 가있을 때였는데, 그때 인연이 되어 그곳에서도 나의 시가 작곡이 되고 노래가 되어 불리어지게 되었다. 중국조선족 작곡가인 최연숙 작곡, 연변인민가무단 단원인 홍인철 노래로 불리어진 「샘도랑집 바우」의 변형된 가사는 다음과 같다.


몰래 가까이 가지도 않았습니다. 탐욕의 불을 켜고 본 일도 없습니다. 전설에 나오는 나무꾼처럼 날개옷을 숨기지도 않았습니다. 달님도 부끄러워 구름 속으로 숨는 밤 물소리에 끌려간 죄밖에 없습니다. (후렴)아씨가 선녀처럼 목욕하는 밤이면 샘도랑은 은하수로 출렁입니다.(2절은 생략)


여기에 나오는 ‘바우’라는 인물은 지식수준은 낮지만 순박하기 그지없는 사람이다. 나무꾼이 지순하지 않으면 선녀를 만날 수 없는 이치라 하겠다. 손목 한번 잡은 적도 없는 데, 목욕하는 물소리에 마음이 끌려간 그 지순한 상상의 감주에 왜 취하고 싶을까? 세상이 너무도 되바라지고 까져서 「노트르담의 꼽추」나 「벙어리 삼룡이」 「바보 용칠이」 같이 순박한 인물이 그리워지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초․중생들이 파렴치한 집단 성폭행으로 타락하는가 하면, ‘대학이혼’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떠돌 정도로 대학촌 원룸에서는 결혼도 하지 않은 남녀학생들이 버젓이 동거하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그야말로 말세의 징조가 보이는 소돔과 고모라성 같은 세태이기 때문에 그 반동으로 인해서 지극히 순수한 순정의 샘도랑을 찾고자 하는 게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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