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학과 인생

보리밭 밟기

SM사계 2010. 6. 29. 09:42

보리밭 밟기   


황송문    

시인․선문대 명예교수    


봄이면 청보리가 들판을 푸르게 장식한다. 보리밭이 천수답(天水畓)일 경우에는 산허리의 지형에 따라 바람의 행로가 다양하기 때문에 보리밭이 지그재그로 휩쓸리게 된다. 그 청보리밭 물결은 마치 여고생들의 매스게임처럼 율동의 극치를 이룬다. 곡선의 인파를 생각하게 하는 싱그러운 청보리밭 물결은 살찐 종아리와 휘어지는 허리와 풋풋한 물이랑으로 장관을 이룬다. 

겨울과 봄 사이의 보리밭은 얼고 녹기를 반복한다. 그러는 사이 부풀어 오른 땅이 다시 얼게 되면 떠있는 보리밭의 보리들이 얼어 죽게 된다. 그래서 시골에서는 보리가 얼어 죽지 않도록 보리밭을 밟아주게 된다. 나도 초등학교 때 동원되어 학교 주변 마을의 보리밭을 밟아준 적이 있다.

보리는 겨울을 나는 식물이다. 추운 엄동설한(嚴冬雪寒)을 잘 견디어내기만 하면 이듬해 봄부터 여름까지 황금들녘을 장식한다. 그야말로 황금빛 파도를 이룬다. 지그재그로 휩쓸리며 불어오는 남풍과 더불어 오는 봄여름의 황금마차는 그저 오는 게 아니다. 그런 황금의 계절은 시한 삼동을 견디어낸 끝에 오게 된다. 마치 일제의 질곡에서 풀려난 우리 겨레가 조국광복을 희구하듯이 보리밭은 태극기의 물결처럼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온 들녘을 가득가득 실리어 출렁이게 된다.

보리는 우리 민족을 닮았다. 서민적이면서도 끝없는 생명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겨우내 얼어 죽지 않고 차디찬 흙속에 뿌리를 묻고 있다가 날씨가 풀리게 되면 황금 들녘을 이루듯이, 우리 선지선열들은 조국광복이라는 그 한 날을 꿈꾸면서 상해 임시정부로, 북만주로, 연해주로 끈질기게도 침략자와 싸우면서 살아남지 않았던가.


보리를 밟으면서/ 언 뿌리를 생각한다.//아이들이 아비에게 대들 때처럼,/ 시린 가슴으로/ 아픔을 밟는 아픔으로/ 해동을 생각한다.// 얼마나 교육을 시켜주었느냐고,/ 얼마나 유산을 남겨주었느냐고,/ 시퍼런 눈들이 대드는 것은/ 나의 무능임을/ 나는 안다.// 뿌리를 위하여/ 씨알이 썩는 것처럼,/ 사랑할수록 무능해 지는 것을/ 나는 안다.// 내 아이들이 대어들듯,/ 어릴적 내가 대어들면/ 말을 못하시고/ 눈을 감으시던 아버지처럼,/ 나 또한 눈을 감은 채/ 보리를 밟는다.// 잠든 어린것 옆에/ 이불을 덮어주며/ 눈을 감는 것처럼,/ 나는 그렇게 눈을 감은 채/ 온종일 보리를 밟는다. -자작시 「보리를 밟으면서」-       

보리는 밟아줘야 산다. 보리밭을 밟아줘야 얼어 죽지 않기 때문이다. 보리밭 같은 자식에게는 아버지의 훈육이 필요하다. 엄동설한에 보리밭을 밟아주듯 엄격하게 훈육하는 엄친(嚴親) 밑에서는 효자가 나게 된다. 훈육을 모르고 조동으로 자라는 아이들 중에는 효자가 나기 어렵다. 어른에 배려할 줄 모른 채 이기적으로 자라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권위를 잃은 아버지가 엄친일 수 없다. 그래서 아이들은 버릇이 없다. 이러한 현상은 농경사회가 산업사회로 변하면서 생겨났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사는 대가족 사회에서는 위계질서가 서지만, 핵가족 사회에서는 그게 성립될 수 없다. 어린이가 이른 아침에 도시락을 챙겨들고 학교에 갔다가 학원을 거쳐서 밤늦게 오면 얼굴 보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나는 다행히 농경사회에 자라서 첨단과학문명을 누리고 있다. 나 어릴 때 우리 집은 목화를 재배했었다. 나는 어머니와 할머니와 누이들과 함께 밭에서 목화를 따오곤 했다. 물레로 실을 자아 베를 짜서 옷을 해 입었다. 가내수공업시절에서부터 첨단과학시대까지를 체험한 세대는 나의 세대가 마지막이다.

그 점에 대해서 나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슬픈 역사는 눈물겹지만 인정 많고 아름다운 대한만국에 20세기와 21세기를 걸쳐서 생존하게 하여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가난한 가정에 태어남으로써 일찌감치 겸손을 배우게 하신 은혜에도 감사한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 6.25를 겪었다. 내가 다니던 오수초등학교는 인민군의 소굴인 지리산과 회문산의 길목에 있었다. 그들은 우리 학교에 무기를 숨겨놓았었다. 미군이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폭격기 네 대가 와서 하늘을 빙빙 잡아 돌더니 시뻘건 불을 토해냈다. 그때 오수초등학교와 시장이 불탔다. 그때 나는 할머니와 함께 강변에 피란해 있었는데, 할머니는 그 폭격기를 피하려고 나를 폭탄 떨어져 파인 물웅덩이 속으로 끌어들였다.

머리 위에서는 미군 폭격기가 회전하면서 연신 시뻘건 불을 토해내는데, 할머니는 물웅덩이에서 나를 붙들고 주문을 외우시는 것이었다. 그것은 동학군이 외우던 주문이었다. 시천주조화정(侍天主造化定) 영세불망만사지(永世不忘萬事知)를 빠른 속도로 외우시는 것이었다. 그 후 할머니는 자기 주문의 영험한 힘으로 내가 살았다고 했다.

소실된 숭례문이 전소되지는 않았다. 1층 일부는 살아남았다. 보리가 죽어도 뿌리가 있으면 살아나듯이, 1층에 남은 뿌리로 해서 숭례문은 되살릴 수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6.25를 거쳐 온 숭례문이 완전히 전소되지 않고 그 뿌리가 살아있다는 것은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 학비(월사금)를 내지 못한 아이들을 수업시간에 돈 가져오라고 집으로 돌려보낸 일이 있었다. 나의 아버지는 말을 못하시고 나의 항변을 듣고만 계셨다. 나는 그때 무능한 아버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른 후 눈을 감은 채 듣고만 계시던 아버지의 그 무능이 바로 사랑인 줄 알게 되었다. 온갖 잡것들이 나면을 끓여먹고 오줌을 깔기는 등 흙먼지 속에서 더럽혀도, 불에 타죽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침묵으로 일관하는 숭례문처럼 그렇게…….

뿌리를 위하여 씨알이 썩는 것처럼 사랑할수록 무능해지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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