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수필의 원리
1. 수필이란 무엇인가
동양에서의 수필(隨筆)을 가리켜 서양에서는 에세이(Essay)라고 하는 데, 이 장르에 관한 동서양의 연원은 비슷하다. 동양의 경우, ‘수필(隨筆)’이라는 용어를 맨 처음 사용한 이는 남송의 홍매(洪邁)로서, 그가 쓴 <용재수필(容齋隨筆)> 서문에 “뜻한 바를 수시 기록하여 앞뒤 차례가 없으므로, 이름 붙여 수필(隨筆)이라 이른다”는 글이 있고, 서양의 경우는 몽떼뉴가 ‘Essais’를 자기의 책 이름으로 내세운 바 있다.
서양의 ‘Essay’는 브리태니카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보통 산문으로 쓰이는 적당한 길이의 작문으로 작자가 선택한 주제로써 그 주제와 작자와의 관계를 별 부담없이 취급한 글”로서 비평문이라든지, 가벼운 소논문도 여기에 포함시키고 있다.
여기에서 잠깐, 수필 독자의 혼란을 막기 위하여 분명히 해 둘 게 있다. 그것은 문예 창작으로서의 ‘수필’과 연구 대상으로서의 ‘수필’을 구분하여 개념 규정을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문예 창작으로서의 수필은 ‘문학으로서의 수필’, 또는 ‘문학 장르 개념으로서의 수필’을 말한다. 그러니까 ‘비평문’이나 ‘논문’은 이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 비평문이나 논문은 넓은 범주로서의 수필을 말할 때 가능하다. 그리고 문예 창작으로서의 대상이 아니라 연구 대상으로서 가능하다.
수필을 가름하게 될 때 무겁고(重) 딱딱한(硬) 느낌을 주는 포멀 에세이(formal essay)와 가볍고(輕) 부드러운(軟) 느낌을 주는 인포멀 에세이(informal essay)로 나누기도 하는 데, 우리나라의 경우, 문예 창작으로서의 수필은 대부분 이 인포멀 에세이, 즉 가벼운 느낌을 주는 경수필(輕隨筆)과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연수필(軟隨筆)이 대부분이다.
이 인포멀 에세이는 주로 신변잡사에서 소재를 구하지만, 신변잡기에 그쳐서는 안되고 여과과정이라 할까, 미적 창작의 경로를 거쳐서 문학 작품으로 승화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여 수필문학의 진로를 흐리게 하는 경향이 있다.
혼마 히사오(本間久雄)는 “어떠한 감정이나 정서도 그것이 예술 또는 문화의 요소로서의 미적 정서가 되기 위해서는 이 미적 경로를 취해야 하며 이것 없이는 결코 예술, 적어도 훌륭한 예술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미적 경로(美的經路)’라는 말이다. 어떤 경험에서 얻은 기억의 잔상(殘像)들을 사진 찍듯 그대로 복사하거나 재생해 내는 그대로 기록하는 것으로는 문학이 될 수 없고, 체험에서 얻은 당시의 감흥을 망각했다가 그 것을 상상의 힘을 통하여 생산적으로 재구성, 재창조하게 될 때 비로소 하나의 수필이라는 생명체가 탄생하게 된다는 지론이다.
문학 작품과 문학 작품이 아닌 것의 차이점은 작자가 생산적 상상을 통하여 미적 경로를 거쳤느냐 거치지 않았느냐, 또는 통일된 주제의식으로 재창조 과정을 거쳐서 재구성했느냐 그러지 못했느냐의 차이로 가름해도 좋을 것이다.
콜웰은 “독자와 작자의 두 마음이 만나도록 쓰는 것과 진실만을 서술하는 것의 큰 차이는 바로 문학 장르로서의 에세이와 해설적 산문으로서의 에세이와의 차이”라고 했다. 주체와 대상, 즉 주체로서의 작자와 수용자로서의 독자와의 교감이 일치하도록 창작한다는 것은, 주체와 대상, 작자와 독자 사이의 동질 소성의 상사성(相似性)에서 가능하게 된다.
벤 존슨(Ben Johnson)은 수필을 가리켜 “마음의 산만한 희롱”이라고 했다. 그러나 수필이 자유스럽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써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a. 수필의 정의
수필을 정의한다는 것은 수필이 지닌 바의 그 본질적 속성을 밝힘으로써 다른 장르 개념과 구분짓고 한정짓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수필을 정의하기 위해 어떤 공통분모를 찾는다면, 우선은 ‘붓 가는 대로 쓰는 글’ 또는 ‘형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 글’이라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얘기는 잠깐 접어 두고, 몇 가지 사전에 나타난 정의와 작가들이 내리고 있는 정의를 좀 더 살펴본 다음, 접근하고자 한다.
<世界文藝大辭典>(편저대표 문덕수)에는 ‘수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수필’이란 말은 영어의 ‘essay’의 역어로 생각하나, 동양에서는 일찍부터 써 왔으니, 중국 남송(南宋) 때 홍매(洪邁)의 <용재수필(容齋隨筆, 74권 5집)>의 서문에 “子習懶 讀書不多 意之所之 隨卽記錄 因其後先 無腹詮次 故目曰 隨筆(나는 버릇이 게을러 책을 많이 읽지 못하였으나, 뜻하는 바를 따라 앞뒤를 가리지 않고 써 두었기 때문에 수필이라고 일컫는다).”라는 말이 보이고, 한국에서는 박지원(朴趾源)이 연경(燕京)에 갔다 와서 쓴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일신수필(馹迅隨筆)’이라는 것이 처음으로 보인다. 프랑스어의 essaisms에는 ‘시도(試圖)’ ‘시험(試驗)’의 뜻이 있는데, 이 말은 ‘계량(計量)하다, 음미하다’의 뜻을 가진 라틴어 ‘엑시게레(exigere)’에 그 어원이 있다. 영어의 essay는 프랑스어의 essai에서 온 말이다. ‘에세이’라는 말을 작품 제목으로 처음 쓴 사람은 프랑스의 M.D.몽떼뉴이며, 그의 <수상록(Les Essais, 1580~88)>은 에세이라는 제목을 붙인 서책으로서 서양에서 최초의 저서이다. 어원(語源)에서 볼 때, 동서의 수필의 개념은 거의 일치한다. 수필은 일반적으로 사전에 어떤 계획이 없이 어떠한 형식의 구애를 받지 않고 자기의 느낌, 기분, 정서 등을 표현하는 산문 양식의 한 장르이다. 그것은 무형식의 형식을 가진 시도로서 비교적 짧으며, 개인적이며, 서정적인 특성을 지닌 산문이라고 하겠다. 전기(前記) 홍매의 정의나, “수필은 한 자유로운 마음의 산책, 즉 불규칙하고 소화되지 않는 작품이며, 규칙적이고 질서 잡힌 작문이 아니다).”라는 S.존슨의 정의, “수필은 마음 속에 표현되지 않은 채 숨어 있는 관념, 기분, 정서를 표현하는 하나의 시도다. 그것은 관념이라든지 기분, 정서 등에 상응하는 유형을 말로 창조하려고 하는 무형식의 시도다.”란 H.리드의 정의 등도 모두 대동소이하다.
이 외에도 몇몇 국어사전에는 수필에 대하여 피력한 다음과 같은 정의가 보인다.
어떤 양식에도 해당되지 아니하는 산문문학의 한 부분. 인생이나 자연에 대한 수상(隨想), 수감(隨感), 단상(斷想), 논고(論考), 잡기(雜記)가 포함되며, 생각나는 대로, 붓 가는 대로 형식이 없이 보통 1, 2페이지 또는 30페이지 가량 되게 쓴 개성적․관조적 또는 인간성이 내포되게 위트, 유머, 예지, 기지로써 표현됨.
― <국어새사전(이희승 편)
그때 그때 본 대로 들은 대로 느낀 대로를 붓 가는 대로 적어낸 글, 또한 그러한 글투의 작품. 상화(想華), 엣세이.
― <국어새사전(동아출판사)
형식에 묶이지 않고 듣고 본 것, 체험한 것, 느낀 것 따위를 생각나는 대로 쓰는 산문형의 짤막한 글, 또는 그러한 글투의 작품. 사건 체계를 갖지 않으며, 개성적 관조적이며 인간성이 내포되게, 위트(wit)․유머(humour)․예지로써도 표현함. 상화(想華). 만문(漫文), 만필. 수필문(隨筆文).
― <새 우리말 큰사전>(신기철․신용철 편저)
위의 사전적 의미가 가리키듯이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물론 여기에도 수필이 문학의 한 장르인 이상 예술적 가치가 있는, 문학으로서의 본질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는 단서가 붙는다는 전제하에 그렇다.
박종화(朴鍾和)는 수필평론집 서문에서 “우주를 관조해서 나와 우주 사이에 숙명적으로 매어져 있는 오묘한 유대를 발견해서 해명해야 하는 것이다.”라고 피력했는가 하면, 김광섭(金珖燮)은 <수필문학소고>에서 “수필은 달관과 통찰과 깊은 이해가 인격화된 평정한 심경이 무심히 생활 주변에 혹은 회고와 추억에 부딪쳐 스스로 붓을 잡음에서 제작되어지는 형식이다.”라고 했으며, 피천득(皮千得)은 <수필>이라는 제목의 수필 작품 서두에 “수필은 청자(靑磁) 연적이다. 수필은 난(蘭)이요, 학(鶴)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 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라고 했다.
이 말들을 종합해 보면 온아우미(溫雅優美)한 글이요, 관조적(觀照的)이고 자유로운 형식의 글인 동시에 유유 자적(悠悠自適)하게 산책하는 멋스러운 글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장편소설을 마라톤에 비유한다면, 단편소설은 2~3백미터 릴레이로 말할 수 있겠고, 시는 100m를 10초 내외에 끊는 단거리 달리기라면, 수필은 그렇게 치열하게 달릴 필요 없이 마치 고궁 뜰을 천천히 품위있게 거니는 공주나 왕비, 또는 궁녀들의 걸음걸이로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b. 수필의 본질
프랑스의 비평가인 알베레스는 수필을 가리켜 “지성을 바탕에 깐 정서적 신비적 이미지의 문학”이라고 했다. 이 말은 백번 타당한 말이다. 짤막한 이 말에는 ‘지성’과 ‘정서’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는 지적(知的)인 욕망이 있는가 하면, 느끼고 감흥하는 정적(情的)인 욕망이 있으며, 이러한 욕망들을 조절하거나 절제하는 의지적(意志的)인 욕망이 있어서, 이 욕망들이 서로 균형있게 조화하면서 공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세 가지의 내적인 욕망은 외적으로 진리를 추구하기도 하고, 아름다움을 추구하기도 하며, 선을 추구하기도 하는데, 이 내적인 지(知)․정(情)․의(意)에 의한 외적인 진(眞)․미(美)․선(善)의 추구는 수필에 있어서도 반영되는 데, 이 본질 문제가 정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혼란이 야기되는 것으로 보인다.
가령, 수필에 있어서 포멀 에세이라야 진짜 수필이지 개인적인 감정 발로로 나타나는 미셀러니라든지, 인포멀 에세이는 지양되어야 한다거나 하여 자기 취향이나 신념에 따라 혼란이 생기기도 하는데 여기에서는 이 점을 잠시 언급하고자 한다.
수필의 본질은 자유로움이지만, 그 본질에는 한 마다로 설명하기 어려운 그 ‘무엇’이다. 만일 논리적인 언어를 차용해서 쓴다면, 피천득의 <수필>이라는 글보다도 본질적 접근이 어렵다. 따라서 필자의 <수필적 인간>이라는 글을 통해 그 본질에 접근해 가고자 한다.
수필적 인간이란 먹을 것(소재)을 찾아 나서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일단 걸려든 먹이(제재)는 놓치는 일이 없이 알뜰하게 요리를 해내는 솜씨를 지닌다. 그렇다고 해서 그 요리 솜씨(기교)가 유별나게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마치 나물을 무치는 이(작자)의 손에서 맛이 우러나듯이, 주물러대는 손놀림(묘사력), 그러니까 무형식의 형식이랄까, 무기교의 기교에서 묘한 맛이 우러나는 것이다. 거미가 줄을 늘이듯이 어디서부터 시작하여 어디에서 끝내는 줄도 모르게 해내는 솜씨, 그 보이지 않는 솜씨가 그에게는 분명히 있다.(생략)
그는 정석(定石)을 잘 놓는다. 욕심으로 눈을 가리지 않은 채 정석을 놓기 때문에 많은 것을 차지하게 된다. 옆에서 누가 훈수를 하려 들어도 여간해서 그 훈수에 응하지 않는다. 그는 어디까지나 자기의 생각대로 정석을 놓아 가는 편에 속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많은 이야기를 귀담아 들으려고 하는 귀를 지니고 있다. 그는 시인이나 소설가의 얘기를 즐겨 듣는다. 화가나 음악가의 얘기도 즐겨 듣는다. 마치 닭(작자)이 조개껍질(제재)이건 모이(소재)건 닥치는 대로 먹지만 매끈하고 곱게 생긴 계란이라는 제3의 새로운 형태(작품)를 낳듯이, 종교적 신념이건 철학적 사상이건 일단 그 속에 들어가 용해(미적 경로)되면 새로운 형태의 것(수필)을 창조하게 된다.
그의 동작은 완만하다. 그런데, 그 완만함으로 인해서 전체를 포용하게 된다. 소설적 인간이 남성적이요 동적이라면, 수필적 인간은 여성적이요 정적(靜的)이다. 그는 마치 흙과도 같은 성질을 지닌다. 그것은 움직이는 모든 생물에 이용되는 피동체다. 그러면서도 결국에 가서는 그것들을 포용하듯이, 수필적 인간은 얼핏 보기에 소설적 인간에 비하여 피동적으로 보이지만 결국엔 능동적인 행동 이상의 것을 찾아내는 마력을 지니게 된다. 수필적 인간, 그는 먹이를 찾아 헤매지 않으면서도, 완만한 동작으로 점령해 들어가는 바보스러운 천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c. 수필의 특성
일반적으로 수필을 가리켜 ‘붓 가는 대로 쓰는 글’로 알려져 왔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다시 생각하면 그렇다고만 말할 수 없는 일면이 있다. 시나 소설 등과 같은 다른 장르에 비교하여 그렇게 말할 수는 있어도 맹목적으로 그렇게 단정지을 수만은 없을 것이다. 붓이 가는 대로 쓰되 형식이 없는 가운데 형식을 갖추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수필이란 마음의 자연스러운 표현이기 때문에 내적인 지(知)․정(情)․의(意)가 외적인 진(眞)․미(美)․선(善), 또는 의(義)나 인(仁)이 나타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인생을 통찰하고 달관하는 경지나 여과되거나 발효된 정서로서 얻어지는 멋스러움이나 맛스러움이라든지, 재기 발랄한 유머와 위트, 날카롭게 찌르는 풍자 등 지성과 감성이 세련되게 번득여야 한다.
윤오영(尹五榮)의 <수필문학입문(隨筆文學入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는데, 이 글은 수필의 특성을 이해하는 데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늦은 가을 풍상(風霜)을 겪어 모든 나무에 낙엽이 질 때, 푸른 하늘 찬 서리 바람에 비로소 붉게 익은 감을 본다. 감은 아름답다. 이것이 문장(文章)이다. 문장은 원래 문채(文彩)란 뜻이니 청적색(靑赤色)이 문(文)이요, 적백색(赤白色)이 장(章)이다. 그 글의 찬란하고 화려함을 말함이다. 그러나 감이 곧 곶감은 아니다. 그 고운 껍질을 벗겨야 한다. 문장기(文章氣)를 벗겨야 참 글이 된다는 원건랑(袁巾郞)의 말이 옳다. 그 껍질을 벗겨서 시득시득하게 말려야 한다. 여러 번 손질을 해야 한다. 그러면 속에 있던 당분(糖分)이 겉으로 나타나 하얀 시설(柿雪)이 앉는다. 만일 덜 익었거나 상했으면 시설은 앉지 않는다. 시설이 잘 앉은 다음에 혹은 납짝하게 혹은 네모지게 혹은 타원형으로 매만져 놓는다. 이것을 곶감을 접는다고 한다. 감은 오래 가지 못한다. 곶감이라야 오래 간다. 수필은 이렇게 해서 만든 곶감이다. 곶감의 시설(柿雪)은 수필의 생명과도 같은 수필 특유의 것이다.
여기에서는 수필을 감으로 만드는 곶감에 비유하여 그 특성을 말하고 있다. 수필의 창작과정을 감으로 곶감을 만드는 과정에 비유하여 효과적으로 얘기한 것이다. 그것은 감의 껍질을 벗겨서 시득시득하게 말리되, 여러 차례 손질하여 당분이 겉으로 배어나게 함으로써 시설(柿雪)을 앉게 한다는 얘기다. 그는 한 편의 수필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이렇게 적합한 사물을 차용하여 빗댐으로써 효과적인 이해를 돕고 있다. 시설(柿雪)이 앉기 까지가 수필이 완성되는 과정인 동시에, 그 시설은 수필의 생명이요, 곶감을 여러 형태로 매만지는 작업은 수필의 스타일을 꾸미는 것으로 비유하고 있다.
오늘날까지 여러 학자들이 제시해 온 수필의 특성은 대개 ‘형식의 자유성’ ‘개성의 노출성’ ‘제재의 다양성’ ‘문체의 품위성’ ‘작문의 간결성’ ‘매체의 산문성’ ‘유머와 위트성’ ‘토의의 비평성’ ‘주제의 가치성’ 등이라 할 수 있겠다.
형식의 자유성은 수필이 다른 장르에 비하여 형식적인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 말이거니와 개성의 노출성은 작자가 자기를 그대로 드러내는 글이라는 점에서 하는 말이며, 제재의 다양성은 모든 소재가 다 제재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특성으로 인정된다 하겠다.
또한 문체의 품위성은 수필은 작자의 인격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문학이기 때문에 품위있는 문체를 위해서는 먼저 품위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되겠고, 작문의 간결성은 수필의 길이나 성격으로 봐서 간결체 문장이 바람직하기 때문에 나온 말이며, 매체의 산문성은 수필이 15매 내외의 짧은 산문이라는 특성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그리고 유머와 위트성은 짧은 산문 속에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이라든지 그 무슨 느낌을 받아야 하는 데, 이를 위해서는 흐뭇한 유머(humour)나 재치있는 위트(wit)라든지, 날카로운 지성적 통찰력과 아름다운 시, 찌르는 듯한 풍자, 또는 아이러니(irony)와 패러독스(paradox), 페이소스(pathos) 등도 요구된다. 이 외에도 토의의 비평성이나 주제의 가치성은 수필이 비평적 요소라든지, 인생의 새로운 해석으로서의 가치가 주어지므로 간과할 수 없는 요소라 하겠다.
수필은 다른 모든 장르에 비하여 작자의 개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특징이 있다. 이는 수필이 은폐하거나 모호성 속에 가릴 수 있는 기교적 장치를 지니지 않고 드러나는 것을 당연시하는 성격을 가졌기 때문이다. 인격이 도야되고 개성이 맛들어서 멋스럽고 품위있는 사람의 글은 개성이 노출된다 하여 하등의 나쁠 것이 없지만, 그렇지 못하여 천박하고 지저분한 글이 될 수 밖에 없는 사람에게는 개성의 노출이 치명적인 결함으로 작용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수필의 경우는 특히 작자의 마음 자세가 더없이 긴요하다. 글은 바로 그 사람이라는 말도 여기에 해당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수필의 특질에 대한 이해가 없이 수필을 창작한다는 것은 마치 여행을 떠나려는 사람이 행선지를 모른다거나, 안다 하여도 교통, 숙박, 관광, 역사, 종교, 민속, 문화, 예술, 역사, 지리, 정치, 경제 등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이 떠난다거나, 사업가가 시장 조사 등등의 사전 지식이 없이 사업에 착수하려는 것과도 같다 하겠다.
제 아무리 위대한 학식이나 식견이 풍만하여도 이 인간의 향기에 젖지 않은 사람이면 수필을 쓸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수필을 쓰기에 앞서 인간미에 젖어야 하고, 수필을 읽기 전에 인간다운 자기 소지를 발견해야 한다. 이렇게 보면 가장 인간적인 문학의 장르가 바로 수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디서든지 살아가는 가장 궁극적인 자세는 바로 이 진지함이다.
― 구라야카와 하쿠손(廚川白村)의 <현대수필선집(現代隨筆選集)>에서
이상에서 수필은 자아를 드러내는 과정에 있어서 개성의 향취를 작품화하는 문학이라는 점을 여러 작품 또는 문헌을 통해서 검토해 보았다. 수필을 가리켜 ‘심적 나상(心的裸像)’이라고 하는 것은 자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개성적 노출이라는 특성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바, 품위를 잃게 되면 천박한 신변잡기로 쳐질 위험이 있기 때문에 문장의 조탁에 소홀히 해서도 안 된다.
논어(論語)의 옹야편(雍也篇)에도 나와 있는 바와 같이 모든 문학은 내용과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형식은 문학적인 아름다움, 예술성을 결정짓는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시된다. 그것은 작품의 형태로서의 생명을 잉태하여 생산하는 모태이기 때문에 그렇다. 형식은 내용과 유기적인 결합 관계를 이루면서 작품을 통일적으로 구체화한다. 이는 문학의 예술성을 위해서 긴요하다. 그러니까 형식은 문학의 예술성을 살리는 데 있어서 내용적인 면, 즉 정서와 사상을 작품화하는 그릇이라 할 수 있다.
김진섭(金晋燮)은 그의 <수필의 문학적 영역>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수필은 무엇이든지 담을 수 있는 용기라고도 볼 수 있을지니 무엇을 그 속에 담든 그것은 오로지 필자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맡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수필은 그 담은 내용과 그것을 요리하는 필자에 의해서 그 취향이 여러 가지로 변화할 것은 또한 물론이다.
수필의 영역이 광대하다 함은 장점이면서 그것이 곧 단점일 수도 있다. 안일한 타성에 젖거나 나태에 빠질 위험성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장백일(張伯逸)은 그의 <현대수필문학론(現代隨筆文學論)>에서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다.
알베레스가 이미 제시한 바와 같이 “지성을 기반으로 한 정서적 신비적인 이미지로 되어진 것”이어야 한다. 바꿔 말하면 ‘비유컨대 흔들리는 구슬들 사이에서 반짝이는 그윽한 불꽃’이어야 한다.
토지는 꽃을 위해 존재하고, 꽃은 그 토지로 하여 피어나면서 새로운 의미를 제시하게 된다. 그 새로운 의미 제시란 곧 인생의 새로운 해석과 이해에의 제시이다. 그로부터 우리는 오늘을 살아가는 삶에의 새로운 지혜를 얻는다. 수필은 바로 이 양자의 융합에서 피어난 꽃이다. 그 꽃은 흙(사상)으로 하여 향기를 풍기되 새로운 의미를 발산하는 향기로운 꽃(예술성)이기도 하다.
2. 수필을 왜 쓰는가
수필을 왜 쓰는가? 쓰고 싶어서 쓴다. 왜 쓰고 싶을까? 그건 내가 심리학자가 아니라서 잘 모르지만 나 자신 속에 글을 쓰고자 하는 그 무엇이 있는 것 같다. 이러한 문제는 <시경(詩經)>에도 나와 있다. 주희(朱熹)가 쓴 <시경집주서(詩經集註序)>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보인다.
누군가가 나에게 시를 왜 짓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고요한(虛靜) 상태로 있는 모습은 천성적인 성품(性稟)이다. 이 성품이 사물에 감응되어 발동하는 것을 가리켜 성(性:本性)의 욕망(欲望)이라 한다. 인간에 있어서 본성의 욕망이 발동하게 되면 사고(思考)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또 사고하게 되면 언어가 있지 않을 수 없다. 언어가 있어도 언어로써 능히 다 표현하지 못하게 된다. 이에 슬픔과 기쁨의 감탄사를 써서 표현하는 그 이상의 어떤 깊은 감동의 극치에 이르고도 뭔가 모를 부족한 듯한 여운(餘韻)이 남게 마련이다. 또 자연계의 음향(音響)이라든지, 서로 어우러지는 화음(和音)에 있어서도 그것을 다 표현하지 못하는 것으로 이것이 시(詩)가 이루어지는 까닭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글을 쓴다는 것이 태어날 때부터 천부적으로 지닌 바의 성품이라든지, 욕망과 관계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주희의 말에 의하면 인간은 이 본성의 욕망에 의하여 표현의 자유를 누리고자 하는 충동을 어쩌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천부적으로 지닌 바의 자체에 대한 자극적인 감성을 어떤 대상을 통하여 상대적으로 또는 타각적으로 느끼게 될 때 기쁨을 느끼게 되는 존재의 본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로부터 희열을 느끼는 존재라는 것이다.
따라서 수필도 우선 쓰는 그 자체가 즐거워서 쓴다는 게 틀린 말이 아니다. 또 그래야 한다. 수필은 그저 쓰는 게 즐거워서 쓰는 그 순수한 마음에서 출발해야지, 등단을 목표로 한다거나 사회적인 지위를 얻기 위해서, 또는 친구들에게 뻐기기 위해서 쓰기 시작한다면 그건 순수하지 못하기 때문에 좋은 글을 쓰기 어렵게 된다.
이는 마치 농부가 자작농산물을 애지중지 가꾸는 그 농사일이 좋아서 농사하는 경우하고, 떼돈을 벌기 위해서 농사짓는 경우를 대비해 봄직한 일이다. 농사가 좋아서 농사짓는 농부는 겨울 같은 농한기(農閑期)에는 이듬해의 농사 준비를 위해서 새끼라도 꼬고 가마니라도 치지만, 돈버는 게 목적인 농부는 도박판에서 도박을 일삼을 수도 있기 때문에 농사 역시 순수해야 하듯이 수필 쓰는 일 역시 순수해야 한다는 얘기다.
수필 쓰는 일도 거미줄 늘여지듯 그렇게 술술 풀려나오면 좋겠지만, 제대로 풀려지지 않는 괴로움도 즐거움으로 느낄 줄 알아야 한다. 그런 괴로움 끝에 한 편의 글을 완성하는 보람이란 어떤 것과도 견줄 수 없는 큰 즐거움이 된다.
산을 오르는 사람이 땀을 뻘뻘 흘리며 정상에 올랐을 때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을 맛보듯이, 창작하는 행위도 역시 그 이상의 기쁨을 맛보게 된다. 사람에게는 보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심리가 있다. 그리고 좋은 곳에 소속되고자 하는 심리도 있다. 그리고 보다 오래 살고 싶은 심리, 가능하다면 죽지 않고 영생하고자 하는 심리도 있다.
글을 쓰는 것, 즉 문예 작품을 창작하는 것은 이러한 인간의 본질적이고도 원초적인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요소가 있기 때문에 그 까닭을 잘 모르면서도 밤이 깊도록 잠을 잊은 채 썼다가 지우고 구겨 던지기를 되풀이하면서 열심히 몰두하는 게 아닌가 한다.
돈도 되지 않는 수필, 남들이 알아주지도 않는 수필을 왜 쓰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필자는 그에게 돈도 되지 않는 아이, 남들이 알아주지도 않는 아이를 왜 낳느냐고 되묻고 싶다. 수필은 자기 아이와 같은 자기의 분신이다. 누가 뭐라해도 소중한 자기 아이처럼, 자기의 작품은 자기의 분신이므로 소중한 것이다.
그런데, 그 소중한 분신을 얼마나 무게가 나가는지, 저울에 달아보지도 않고 목욕도 시키지 않은 채 피붙이 그대로 둘둘 말아서 남의 집 대문간에 놓고 도주하듯이 그렇게 함부로 찍찍 갈기고는 저절로 크기를 바라는 이들이 있어서 수필문단을 한심하게 만드는데, 이는 지양되어야 한다.
잘나도 내 자식, 못나도 내 자식이다. 수필을 일단 썼으면 퇴고를 게을리해서도 안 된다. 아이를 낳고 키울 때 저울에 달아보고, 목욕도 시키며, 이유식을 언제 할 것인가, 옷은 무엇으로 입힐 것인가, 어느 유치원으로 보낼 것인가를 고심하듯이, 자신의 진실한 발성이 담겨진 글도 생명체처럼 애지중지해야 할 것이다.
시가 우상(牛上)의 문학, 즉 관조(觀照)의 문학이듯이, 수필도 관조의 문학이다. 우리가 어떠한 사물을 보고 인식했을 때, 그리고 그 인식과정을 통하여 미적 경로를 거칠 때에는 바라보는 주체자로서의 나와 바라보여지는 대상으로서의 사물 사이에는 무엇인가 동질의 요소가 작용하기 때문에 인식이 가능하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이런 논리에 기초할 때 관조자가 어떤 색채의 의식세계를 지니고 있느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좋은 수필을 쓰려고 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호소하는 소리를 들을 때가 있는데, 이는 세속을 벗어난 높은 견식이라든지, 사물을 널리 통달하는 관찰력, 즉 달관의 경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좋은 수필을 쓰려면, 사소한 일에 얽매이거나 흔들리지 않는 초탈의 경지에 이르는 데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한 가지 예를 들고자 한다. 언젠가 외지로 나들이를 떠나는 날 서울은 비가 왔기 때문에 나는 온 세상이 비가 오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비행기가 김포공항 활주로에서 공기를 박차고 뜨는 순간, 이 세상 모든 곳에 비가 오는 게 아니라 일부 지역만 비가 올 뿐 대부분이 찬란한 햇빛이 빛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면벽(面壁) 좌선(坐禪)하는 고승(高僧)이 천리 밖을 내다본다는 말은 마치 비가 내리는 세상에서 날씨 좋은 세계를 통찰하는 이치와 흡사하다 하겠다. 아무튼 좋은 수필을 위해서는 관조(觀照)하는 자세와 달관(達觀)의 경지에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 그래야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진리를 찾아내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안목이 생기기 때문이다.
수필에는 멋과 맛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 데, 이를 위해서는 작자 자신의 인간미가 풍윤해야 한다. 수필은 인간미를 담아내는 용기(用器)이기 때문이다. 인간미는 공감을 유발함으로 독자로 하여금 수월하게 작품 속으로 빨려들게 한다. 물그릇에 따라 물의 모양이 달라지듯이, 수필도 형식에 따라 천차만별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3. 수필은 어떻게 쓸 것인가
우선 독자로 하여금 쉽게 읽혀지도록 써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힘들여서 정성껏 써야 한다. 수필 독자들은 시나 소설에서처럼 어떤 심오한 철리(哲理)라든지, 가스똥 바슐라르가 말한 바 있는 ‘순간의 형이상학’ 같은 것을 원치 않는다. 그저 길가는 나그네가 느티나무 그늘에서 잠시 쉬어 가는 기분으로 그렇게 읽는 게 수필이다.
요즈음 헤비메탈이라고 해서, 악을 바락바락 쓰면서 내지르는 노래를 들어보려면 도무지 힘이 들고 불편해서 들을 수가 없다. 조용하고 편안한 클라식에 길들어있는 이들은 귀가 따갑다고 거부하게 된다. 마음이 불편한 것은 예술의 본질에 어긋난다. 물론 그런 노래를 즐겨 부르는 이들은 그들대로 내세울 만한 주장이 있겠지만, 보편적인 예술의 본질에는 어긋난다는 얘기다.
수필은 읽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게 장점이므로 그 장점을 살려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어렵게 써서 쉽게 읽혀지도록 해야 한다. 쉽게 읽혀지는 글은 대개 어렵게 써진 글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소재에서 착상은 얻었을 때 주제를 설정하고, 제재로 더욱 구체화하면서 미적 경로와 조탁의 과정을 거쳐서 완성될 때까지는 감으로 곶감을 만드는 과정처럼 많은 장애물은 넘게 된다.
수필은 매력이 있어야 한다. 자칫 편안한 수필은 희롱과는 거리가 있어서 매력이 떨어지기 쉽고, 매력있는 수필은 파격으로 넘나들기 때문에 안정세가 흔들릴 수 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욕심을 부리자면, 여운(餘韻)이 있어야 한다.
여운이란 길게 끄는 에밀레종소리처럼, 차를 마신 후의 그 뒤끝처럼, 뒤끝에 뭐가 남느냐가 문제다. 뒤끝에 감미로운 여운으로 남는 게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수필의 이러한 여운을 위해서는 여유로운 큰 마음이 요구되는 데, 동양적인 호연지기(浩然之氣)도 좋은 바탕이 될 것이다.
수필의 자유로운 형식을 장점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그게 오히려 단점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수필의 자유로운 형식은, 수필을 안이하게 여긴 나머지 그 품격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모든 문학이 다 그러하지만 수필에 있어서의 문장도(文章道)는 역시 책을 많이 읽고(多讀), 글을 많이 지어보며(多作), 많이 생각하는(多思) 이 삼다(三多)가 기본이다. 이 삼다(三多)를 떠나서는 문장을 제대로 닦을 수 없다. 수필이 아무리 형식이 없고 제재의 제한이 없다고 하더라도, 각고(刻苦) 없이 저절로 될 수가 없다.
남의 글을 많이 읽는다는 것은 마치 전장에서 병사가 기관총에 연결되어 있는 실탄을 상자에서 줄줄이 장치하는 것과도 흡사한 예가 될 것이다. 그래야 필요에 따라서는 총탄을 연발로 퍼붓듯이 막힘이 없는 글이 종횡무진으로 펼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
수필은 작자가 자기가 느낀 정서나 사상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고백적인 글이기 때문에 자기를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자칫하면 잔소리의 나열에 그칠 위험성이 있으므로 신변잡기의 글로 쳐지지 않도록 미적 경로를 거쳐야 한다.
권투경기에서 목이나 어깨에 너무 힘을 주지 말라고 주문하는 소리를 듣는 경우가 있는데, 수필에 있어서도 주제에 너무 힘이 실리게 되면 딱딱한 글이 되기 쉽거니와 그렇다고 또 너무 자상하게 나열하다 보면 잔소리 일변도의 설명문으로 쳐지기 쉽다.
수필을 쓰는 데 있어서 주제를 독자에게 강요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 작자가 느끼고 사고한대로 피력해 나가다 보면 독자들은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느낌으로 받아들이고, 주제는 그러는 동안에 저절로 전해지게 된다.
수필을 가리켜 ‘산책수필’이니 ‘수필산책’이라는 말을 심심찮게 사용하는 것은 그 성격이 마치 고궁의 뜰을 품위있게 거닐듯이 그렇게 담담한 필치로 써나가기도 하고 또 그런 기분으로 읽기를 즐기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주제에 힘을 준다거나 너무 야심만만하게 과욕을 부리는 것은 금물이다. 너무 욕심을 부리다가는 용을 그리려다가 뱀의 꼬리도 제대로 그리지 못하고, 호랑이를 그리려다가 고양이도 제대로 그리지 못하는 형편에 처하게 되기 십상이다.
이 세상은 넓고 독자들의 눈은 예리하다. 수필을 겸허한 자세로 쓸지언정 아는 체 한다거나 독단적인 단정을 내리지 않는 것이 좋다. 자기가 잘 아는 일이라 할지라도 독자가 알고 있는 상식적인 이야기나 보편적인 이야기는 ‘다 아는 바와 같이’나 ‘들리는 소리에 의하면’, 또는 ‘요즈음 여론에 의하면’ 하는 등등 되도록 아는 체 하지 않는 게 바람직하다.
심지어는 주제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내용을 나열하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가령 “내가 영국 갔을 때…” “내가 프랑스 갔을 때…”하고 필요없는 말을 끼워넣는 경우가 있다. 이는 과잉된 의식으로 자기를 내세우려는 우월감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쓰고자 하는 글을 쓰는 것 보다 써서는 안되는 글을 쓰지 않는 편이 수필을 잘 쓸 수 있는 길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수필을 가리켜 ‘중년의 글’이라거나 40~50대의 글이라는 데에는 그만한 일리가 있다. 진솔한 삶을 통한 경험의 보석, 수필은 그 경험의 보석에서 얻어진 프리즘의 빛깔 같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진솔한 애환이 담기고, 생활에의 사색과 향기가 스며드는 글은 역시 세상만사(世上萬事) 산전수전(山戰水戰) 다 겪는 동안에 곶감의 시설(柿雪)처럼 묻어나는 게 아닌가 한다. 생로병사(生老病死) 라든지 길흉화복(吉凶禍福) 등 인생과 우주를 가늠하는 상상력에서 꽃핀 결정체로 보게 될 때 그 시설(柿雪)은 참으로 귀한 인생과 영혼의 훈장이 아닐 수 없다.
a. 수필의 주제
세계문예대사전(편자대표 문덕수)에는 ‘주제’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글이 눈에 뜨인다.
1)문장의 중심사상, 본질적 개념, 근본적 의도, 화제(話題). 작문에는 ①주제설정, ②취재, ③구상, ④기술, ⑤퇴고― 여기에 ‘목적, 종류의 결정, 태도의 결정’을 추가할 수 있다. 등의 차례가 있는데, 그 중의 최초의 절차. 주제는 문장의 통일성(統一性)과 긴밀성(緊密性)을 유지하는 구실이 있다. 주제는 단순히 문장의 중심 사상일 뿐 아니라, 소재의 성질을 분별하여 그것을 선택함으로써 문장의 통일성을 유지하며, 선택된 소재를 다시 일정한 순위로 정하여 배열, 조직함으로써 문장의 긴밀성을 유지한다.
수필 작자는 자기가 쓴 작품에 대하여 객관적으로 엄격하게 검증할 필요가 있다. 모든 사람들은 대개 남에게는 엄격하고, 자기에게는 너그러운 데에 길들여져 있어서 자기 작품을 엄밀하게 볼 줄 모르는 맹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또는 ‘그러니 어떻다는 말인가’ 하고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여기에 대답이 궁색하게 되면 주제가 제대로 설정되었다고 볼 수 없다.
한 편의 수필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소재(素材)가 선택되어야 하고, 그 소재를 통해서 작자가 무엇인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설정되어야 한다. 이때 주어지는 소재 가운데에서 주제를 위해서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소재를 제재(題材)라고 한다.
수필 창작을 위해서는 우선 소재가 있어야 하는데, 그 소재는 주제를 나타내는 데에 적합한 소재, 즉 제재여야 한다. ‘수필감’이라고 할 때의 그 제재는 주제에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작품 창작이 가능하도록 기여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주제는 인간의 정신작용 같은 것이다. 주제는 인간의 정신처럼, 작품에 스며있을 뿐 보이지는 않는다. 이는 마치 정신이 육체의 신경계통과 유기적인 관련을 가지고 전달하고 지시하며 조절하는 기능을 발휘하는 것과도 흡사하다. 정신이 전체적인 통일된 합목적대로 사지백체를 움직여 원활한 활동을 돕듯이, 주제는 인생을 이해하고 비판하여 이를 새로운 해석으로써 재표현하려는 정신적인 과제인 만큼, 제재의 배후에서 그것을 지배하는 근본적인 통일원리가 되기 때문에 식물의 씨앗에 발아하는 씨눈이라든지, 계란의 배자(胚子)와도 같이 생명 창조의 원동력이 된다.
b. 수필의 소재
소재(素材)란 넓은 뜻으로는 예술 작품이 아니라 그 작품으로 형상화할 모든 재료를 말한다. 즉 어떤 가치 원리에 의해서 통일된 미적 형상 그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형상에 이르기 이전의 정신적, 감각적 모든 재료를 의미한다. 좁은 의미로는 예술적 표현의 대상인 제재와 표현 수단으로 사용되는 물질적 재료를 말한다.
수필에 있어서 작품상의 표현은 소재에서 얻어지는 어떤 모티프에 의해서 주제를 도출(導出)하는 경우가 있는 데, 김시헌(金時憲)의 <소재와 충격>이라는 글은 여기에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한 사람의 미식가(美食家)에게 맛이 있는 요리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우선 질이 좋은 요리의 재료를 선택해야 한다. 재료가 나쁘면 요리사의 솜씨가 좋아도 그 힘을 다 나타내지 못한다. 무우, 배추, 고추, 마늘, 파 등 수많은 재료 중에서 무엇을 자기 자리의 재료로 끌어오느냐? 이것은 요리사의 생각에 달려 있다. 재료의 배합을 고루 잘 해서 한 작품을 완성해 놓으면, 그 안에 맛이 생기고, 향기가 생긴다. 맛이 있고 향기가 있는 작품은 따라서 영양가도 있다. 미식가가 아니라 해도 이왕이면 누구나 향기 좋고 맛 좋은 요리를 먹고 싶어한다. 그래서 소재를 잘 선택한다는 것은 좋은 수필을 쓰기 위한 기초 조건이 되는 것이다.
수필의 소재는 크게 잡아 두 가지 종류, 가령 무거운 느낌을 주는 중수필(重隨筆)과 딱딱한 느낌을 주는 경수필(硬隨筆)에 해당되는 포멀에세이(Formalessay)의 경우는 사회적인 소재를 보편적인 논리로서 객관적으로 그린다면, 가벼운 느낌을 주는 경수필(輕隨筆)과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연수필(軟隨筆)에 해당되는 인포멀 에세이(Informal essay)의 경우는 개인적인 신변문제를 주관적인 정서로 표현하는 특징이 있다. 그러니까 수필의 소재는 이 두 가름 가운데에서 사회적인 소재를 객관적으로 그리느냐 개인적인 신변잡사(身邊雜事)를 주관적으로 그리느냐에 따라서 그 소재의 성격을 가름할 수도 있다.
이 두 종류의 수필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위해서 인포멀 에세이의 예로 <백치아다다>의 작가인 계용묵(桂鎔黙)의 수필 <실직기(失職記)>의 끝부분을, 포멀 에세이로는 필자의 <초가와 정서가치> 중 일부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제 직업과 같이 눌리었던 창작에의 만만한 야심 - 그것은 마치 눌러도 눌러도 기어코 땅속을 뚫고 나와 마침내 아름다운 꽃을 피어내고야 마는 한 떨기의 봄풀과 같이, 누를내 누를 수 없다는 형세(形勢)로 해직(解職)조차 기회를 만난 듯이 머리를 들고 일어섰다.
나는 이제 이것을 어느 정도까지 살려가며 만족해볼 것인가. 녹슬은 붓끝, 사색에의 둔감(鈍感), 표현에의 치졸(稚拙)은 끝없는 수련(修鍊)을 요해마지 않건만, 철없이 서두는 참을 수 없는 충동, 두려운 붓대를, 부끄러운 붓대를 나는 다시 들어야 되나 보다.
신문사가 깨어져 한가하겠으니 창작을 달라는 잡지 편집자들이 주는 자극(刺戟), 그대는 나더러 무엇을 쓰기를 요구하는 것인고. 그리고 나는 또 무엇을 쓰지 않아서는 안되는 것인고. 창작(創作)과 제재(題材)의 빈곤(貧困), 나는 무엇을 써야 되나? 여기에 창조적 고민이 다시금 새롭다.
― <실직기> 중 끝부분
인간은 무릇 생리적인 면과 인격적인 면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가 없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생리적인 면과 인격적인 면, 이 양면의 조화와 균형이 유지됨으로써 생존할 수 있다고 하는 기본 논리가 성립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구조 자체가 생리가 요구하는 육신과 인격이 요구하는 정신의 양면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와 같이 이중구조(二重構造)로 되어 있는 까닭에 생존 번영하기 위해서는 이 양면성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욕구 충족은 개인이나 가정이나 사회나 국가를 막론하고 마찬가지로 요구된다. 생활의 단위로서의 가정의 확대가 사회요 국가인 까닭에, 가정에서 요구되는 이 양면성의 욕구 충족은 사회나 국가도 마찬가지로 요구된다.
사회나 국가는 민족공동체의 얼을 수용한 생활의 보금자리인 까닭에 사회나 국가의 생존 번영에 관한 문제에는 마땅히 이 양면성의 욕구충족이라고 하는 기본 바탕 위에서 시도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양면성의 기본 요건을 왜 내세우느냐 하면, 사회나 국가의 대사(大事)를 꾀하는 어떠한 정책 결정이 이러한 양면성의 지극히 상식적인 기본 바탕 위에서 이루어지지 못하는 면이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기 때문에, 그 원점에서 확인하고자 하는 소이가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1972년부터 1977년까지의 기간 중에 총 2백65만 채의 초가(草家)를 개량하였다. 여기에서 말한 ‘개량(改良)’은 초가지붕을 슬레이트 지붕이나 기와지붕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얘기이다. 융자와 국가지원액을 포함하여 총 3백 44억 7백60만원이라는 예산을 들여서 시도한 초가지붕 개량사업은 ‘민족중흥의 역사적 과업’을 위한다는 넘치는 의욕을 보였는데, 이것을 농촌근대화의 차원에서 보게 될 때 얼마만큼의 공과(功過)가 나타났는지 나는 아는 바가 없다.
다만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초가지붕을 개량하는 사업 그 자체를 가지고 왈가왈부하려는 게 아니고, 그 시행방법과 함께 양면성으로 본 관심의 일단을 피력하고자 하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초가집 보다 기와집을 장려하기를 바라면서도, 초가지붕을 슬레이트 지붕이나 기와 지붕으로 모조리 개량하여 자취를 감추게 하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고 본다.
초가를 가리켜 빈곤의 상징인 것처럼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에 대하여, “초가를 개량하는 것은 찬성하지만, 더러는 남겨둘 가치도 있다”고 하는 절충식 사고의 논리가 자리하고 있는 셈이다. 농촌경제가 부흥이 되어 잘 살고 있는 덴마크나 일본 같은 나라들도 그들 특유의 초가가 있다. 초가지붕 때문에 가난한 게 아니라, 가난하기 때문에 초가집이 많다는 논리에 모순이 없다면 삼간초가(三間草家) 한 채에 3만원이라는 지붕개량자금을 융자해 주면서 획일적으로 개량하기보다는, 농촌경제가 부흥되도록 영농정책에 힘쓰면서, 점진적으로 개량하도록 유도, 계몽하는 편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초가에는 경제적인 가치로 따질 수 없는 정서적인 가치로서의 그 무엇이 있다. 초가집은 그 정서적인 분위기와 함께 두텁고 자연스러운 친근감과 아늑한 모성(母性)이 있기 때문이다. 초가는 또한 실제의 생활에 있어서 흙벽과 목조건물들의 구조상의 한난(寒暖)을 조화롭게 조절하는 건축상의 묘미를 무시할 수 없는 면도 있다. 인간이 지닌 바의 천부적인 심리는 자연과의 동화를 원한다. 식물성으로 이루어진 볏짚과 목조건물, 그리고 화학작용을 거치지 않은 흙벽에서 아늑한 안정감을 얻는다.(이하 생략)
농촌경제가 성장되면 초가지붕은 해마다 탄탄해지고 기와집은 늘어날 것이다. 따라서 농촌경제가 좋아져서 뼈대 좋은 기와집도 많아지는 동시에 더러는 군데군데 남아있는 초가집도 해마다 탄탄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농촌은 깡마른 슬레이트 지붕에 찬바람이 돌고 있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마음은 강퍅해져 가고 있다. 강퍅해진 마음에 새로운 훈김을 불어넣을 수는 없을까. 한 동네에 서너 채라도 민족의 생활문화재를 두고두고 사랑할 수는 없을까.
― <초가와 정서가치> 중 일부
이러한 포멀 에세이, 즉 무겁고 딱딱한 느낌을 주는 중수필은 개인의 사상 감정을 정서적으로 표현하는 경수필과는 달리, 전문적인 지식이나 박식함이 요구되기 때문에 때때로 메모하는 습관을 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메모하는 순간이나 그 이후에 생각의 실마리를 풀어내면서 수필을 만들어 가는 기쁨은 창작자만이 감지할 것이다.
5.16 군사정권이 들어선 후 초가집 개량사업을 벌일 당시에 필자는 위의 글을 써서 <월간조선(月刊朝鮮)>에 발표했었다. 1972년부터 1977년 사이에 2백 65만 채의 초가집을 개량하는 데에 3백 44억 7백 60만원이 소요된다는 사실도 알아내어 메모하기도 했었다.
다른 장르도 물론 그렇겠지만, 특히 수필은, 그 중에서도 사회적인 문제를 객관적으로 피력해야 하는 중수필은 자기의 역량에 맞는 주제를 택해야 한다. 축적된 지식이 얄팍한 사람이 철학적이고 사상적인 중수필을 쓰려고 할 때 감당하기 어려운 한계에 부딪히기 때문에 실패하게 된다. 그러므로 너무 욕심을 부릴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잘 아는 바를 쓰는 게 상책이다.
남다른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거나 몸소 절실한 체험을 쌓아서 그것이 체질적으로 육화되었다고 할까, 자기화된 상태에서 미적 경로를 통한 수필화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c. 수필의 구성
수필은 소설의 경우처럼 인물과 사건과 배경이라고 하는 구성의 3요소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수필에서 필요로 하는 구성은 수필이 존재하기 위한 최소한의 존재형태를 위하여 시도하는 정도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물은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곤충, 어류나 조류 할 것 없이 대부분 머리 부분과 몸통 부분, 그리고 다리나 꼬리 부분으로 3분되어 있다. 문학에서도 이러한 원리가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수필에서도 수필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시작과 중간과 끝’이라고 하는 질서적인 3단구성이 요구된다. 한시(漢詩)의 기(起)․승(承)․전(轉)․결(結)과 같은 4단구성도 원리적으로는 이 3단구성과 다를 바가 없다. 모든 사물은 처음과 마지막이 있고, 중간이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수필이 있어서의 이 최소한의 3단구성은 언어의 질서화를 위해서 불가피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바와 같이 그 통합의 질서화를 위한 최소한의 3단구조는 존재의 기본 단위라 할 수 있다.
최승범(崔勝範)은 <수필의 형식>이라는 글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수필의 자유 분방성을 살리기 위해서도 3단구성의 형식으로 수필을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일본의 가면음악극인 노우기쿠(能樂)에서는 그 구성 형식을 서(序)․파(破)․급(急)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본다. 이 서․파․급도 3단구성이라 하겠는데, ‘중간’에 해당하는 ‘파(破)’라는 말이 재미있다. 한 편의 수필에 있어 중간 부분은 수필의 자유분방성을 가장 잘 드러내야 할 부분으로, 그야말로 ‘파(破)’자가 갖는 의미에 적절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d. 서두와 결말
수필의 서두는 그 해당 작품의 첫 인상이 되므로 작품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칠 정도로 긴요하다. 글의 출발점은 그 작품의 운명을 좌우하는 절대적인 분위기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수필의 서두는 글의 전체적인 흐름을 예시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서두는 간결하면서도 상징적인 표현이거나 단순하면서도 어떤 깊은 의미를 부여한다거나 여운을 드리움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관심을 갖고 읽도록 하는 흡인력을 지니기도 한다.
시작이 절반이라는 말이 있다. 시작을 하면 절반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다는 얘기다. 그래서 문장의 바른 길은 발단의 예술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그만큼 서두는 중요하다는 얘기다.
수필은 청자(靑磁) 연적이다. 수필은 난(蘭)이요, 학(鶴)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 수필은 가로수 늘어진 페이브먼트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깨끗하고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에 있다.
수필은 청춘의 글은 아니요, 서른여섯 살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며, 정열이나 심오한 지성을 내포한 문학이 아니요, 그저 수필가가 쓴 단순한 글이다. 수필은 흥미는 주지마는 읽는 사람을 흥분시키지는 아니한다. 수필은 마음의 산책(散策)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있는 것이다.
― 피천득(皮千得)의 <수필> 중 앞부분
독자들은 헤밍웨이의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중의 마지막 장면을 잊지 못할 것이다. 마리아라는 이름의 소녀와 사랑에 빠졌던 로버트 죠던은 적진의 철교를 폭파한 후 허벅지에 총상을 입게 되고, 그녀를 떠나보낸 후 기습해 오는 적과 대치하다가 최후를 맞게 되는데, 그가 그녀에게 마지막 남긴 말을 잊지 못할 것이다. “당신은 가야 해. 하지만 나는 당신 곁을 떠나는 건 아냐. 두 사람 중 하나가 있는 한 우리는 함께 거기 있는 거야.” 하던 그 말 한 마디를.
수필에 있어서도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수 있는 감동적인 말을 여운으로 남기는 것은 좋지만, 설교조나 교훈조로 설득하려 든다거나 강요하거나 지시하는 듯한 인상을 주어서는 안된다. 결말은 글을 마무리하는 부분이므로 매듭을 잘 지어야 한다. 결말에서 매듭을 제대로 짓지 못하고 허술하게 처리하게 되면 실패작으로 쳐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수필의 결말에는 작자 나름대로의 인생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수필이 인생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가능케 하는 인생 탐구의 문학이라면, 결말은 그 인생 탐구의 귀결점이라 할 수 있다. 평범 속에서의 비범함이 재기 넘치게 반짝이는 결말을 보여주는 글이라면 좋은 매듭이 될 것이다.
전쟁 미망인, 납치 미망인들의 윤리를 운위하는 이들의 그 표준하는 도의의 내용은 언제나 청교도의 그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채찍과 냉소를 예비하기 전에 그들의 굶주림, 그들의 쓰라림과 눈물을 먼저 계량할 저울대가 있어야 될 말이다. 신산(辛酸)과 고난을 무릅쓰고 올바른 길을 제대로 걸어가는 이들의 그 절조와 용기는 백번 고개 숙여 절할 만하다. 그렇다 하기로니 그 공식, 그 도의(道義) 하나만이 유일무이의 표준이 될 수는 없다.
어느 거리에서 친구의 부인 한 분을 만났다. 그 부군은 사변의 희생자로 납치된 채 상금 생사를 모른다. 거리에서 만난 그 부인 - 만삭까지는 아니라도 남의 눈에 띌 정도로 배가 부른 - 그이와 차 한 잔을 나누면서 “선생님도 저를 경멸하시지요. 못된 년이라고…….” 하고 고개를 숙이는 그 부인 앞에서 내가 한 이야기가 바로 이 바둑판의 예화(例話)이다.
과실(過失)은 예찬할 것이 아니요, 장려할 노릇도 못 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과실이 인생의 올 마이너스일 까닭도 없다. 과실로 해서 더 커지고 깊어 가는 인격이 있다. 과실로 해서 더 정화(淨化)되고 굳세어지는 사랑이 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어느 과실에도 적용된다는 것은 아니다. 제 과실의 상처를 제 힘으로 다스릴 수 있는 ‘가야’ 반(盤)의 탄력 - 그 탄력만이 과실을 효용한다. 인생이 바둑판만도 못하다고 해서야 될 말인가?
― 김소운(金素雲)의 <특급품(特級品)> 중 끝부분
이 글은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 새로운 삶의 희망을 갖게 하는, 즉 인생의 카운셀러가 되어 줄 수 있는 삶의 지혜와 교훈이 담긴 글이다. 과실은 장려할 것이 못되지만, 인생의 올 마이너스일 까닭도 없다고 하는 지론이 바로 그것이다.
4. 좋은 수필을 쓰려면
a. 영농설(營農說)
수필 창작에 임하는 마음의 자세에는 여러 의견이라든지, 방법이 있을 수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우선 심전정리(心田整理)를 통한 경지정리(耕地整理)를 얘기하고자 한다. 심전정리란 글자 그대로 마음밭(心田)을 정리하는 것이다. 마음을 넓히고 바르게 하듯이, 글을 쓰기 위한 마음의 자세를 바르게 하기 위해서 경지정리, 즉 토지의 이용가치를 높이기 위하여 경지의 구획정리나 배수시설, 관개시설, 객토작업, 농노개설 등을 시행하는 일을 말한다.
가령 화선지에 그림을 그린다거나 붓글씨를 쓰는 경우, 물이 묻어 있는 부분은 먹이 묻지 않듯이, 글을 쓰는 경우에도 작자가 지닌 바의 지식이나 경험 등의 고정관념이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경우가 있다.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 내지는 가르침에 대하여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레의 가락이 곧으면 부드러운 소리를 고르게 내지만, 그 가락이 굽으면 시끄럽게 떠는 소리를 불규칙적으로 내듯이, 작자도 그 심성이 물레의 가락, 즉 물레로 자은 실을 감는 쇠꼬챙이처럼 곧거나 굽은 직곡(直曲) 여하의 심성에 따라서 문장의 품위가 달라지게 된다.
그러므로 수필을 창작함에 있어서 선행조건은 마음의 밭을 넓히고 바르게 고를 뿐 아니라 기름지게 해서 글의 이용가치를 높이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마치 논에서 물을 뽑아내는 배수(排水)와 같이, 사무사(思無邪) 즉 사특한 생각, 불필요한 생각을 버리고 순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
관개(灌漑) 즉, 필요한 물을 끌어대는 관개와도 같이, 취사선택(取捨選擇)하여 쓸 것과 버릴 것을 가려서 써야 한다. 인사(人事)는 만사(萬事)라는 말이 있는 데, 글을 쓰는 데 있어서도 역시 적합한 언어를 찾아내어 적합한 자리에 끼워 넣는 일이 긴요하다.
그리고 객토(客土), 즉 토질을 개량하기 위하여 논밭에 흙을 넣는 것과 같이, 마음을 풍부히 하고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하여 새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또한 농삿길을 수리하거나 새로 내는 일을 가리켜 농로개설(農路改說)이라 하는 데, 이는 상상력의 개발이라든지, 유추능력(類推能力), 은유기능(隱喩機能) 등으로 비유될 수 있다.
육신을 버린 후에는 훨훨 날아서 가고 싶은 곳이 꼭 한 군데 있다. ‘어린 왕자’가 사는 별나라, 의자의 위치만 옮겨 놓으면 하루에도 해지는 광경을 몇 번이고 볼 수 있다는 아주 조그만 그 별나라,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안 왕자는 지금쯤 장미와 사이좋게 지내고 있을까. 그 나라에는 귀찮은 입국 사증(入國査證) 같은 것도 필요 없을 것이므로 가 보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내생에는 다시 한반도(韓半島)에 태어나고 싶다. 누가 뭐라 한대도 모국어(母國語)에 대한 애착 때문에 나는 이 나라를 버릴 수 없다. 다시 출가 사문이 되어 금생에 못다 한 일들을 하고 싶은 것이다.
― 법정(法頂)의 <미리 쓰는 유서> 끝부분
앞에서 전제한 대로 곧은 가락 같은 소리를 내는 듯한 글이다. 어린이들의 마음처럼, 순수하기 그지없는 마음밭(心田)을 열심히, 그리고 곱게 가꾼 듯한 작품이다. “어린아이 같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갈파한 예수의 말씀처럼 순수가 배어있는 글이다.
다음으로는 농부가 논밭에서 쟁기질을 하게 될 때 쟁기를 세워서 깊이갈이를 함으로써 많은 수확을 얻듯이, 사고(思考)의 심화(深化)를 통하여 종교적 상상력이라든지, 철학적 인식, 작가적 양식, 역사의식 등을 자양으로 하여 아람진 작품을 생산해야 할 것이다.
송월대를 버리고 다시 서로 이 산 일맥을 타고 내려다보니, 길은 뚝 끊어지고 수십 길 되는 절벽이 있고, 절벽 밑에는 시퍼런 강이 흐른다. 이 절벽이 낙화암이다. 낙화암은 옛날 나(羅)․당(唐)의 연합군이 백제의 궁성을 함락할 때 비빈(妃嬪), 궁녀들이 버선발로 뛰어나와 여기서 몸을 던져 죽었다는 곳이다. 이 바위에 나는 홀로 서 있다. 눈을 감고 그때의 광경이나 다시 그려보자 - 꽃같은 미인들이 수없이 떨어진다. 자개잠 금비녀는 내려지고, 머리채는 흐트러지고, 치맛자락은 소리치며 펄렁거린다.
― 이병기(李秉岐)의 <낙화암 찾는 길에> 중 일부
이 글에는 작자의 역사의식이 현사법(現寫法)으로 표현되어 있다. 여기에서 적용한 현사법은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이 현재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현재진행형으로 나타내는 기법을 말한다. “치맛자락은 소리치며 팔랑거린다”가 바로 그것이다. 만일 이 작자가 ‘역사의식’이 없다면, 이러한 글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어떤 대상을 그리고자 하는 주체인 내게 종교적 상상력이라든지, 철학적 인식, 역사의식, 사회의식 등 사물을 깊고 넓게 볼 수 있는 고성능의 렌즈가 요구된다.
농부는 이른 봄, 씨앗을 뿌리기 전에 종자 고르기를 한다. 다른 계통의 잡종이 섞이지 않은 순종(純種)을 고르는 작업을 하는 것은 질좋고 풍성한 수확을 내기 위해서다. 잡종(雜種)이 섞인다거나 알맹이가 들어있지 않고 겉껍질만 남은 쭉정이를 가려내기 위하여 종자(種子)를 물에 담가서 물 위로 뜨는 것들을 제거하듯이, 글을 쓰는 데 있어서도 순수하지 못한 어떤 잡스런 생각을 쫓아내는 의지적 작용이 요구된다.
공자는 일찌기 사무사(思無邪), 즉 생각에 사특함이 없어야 한다고 했거니와 불교의 사홍서원(四弘誓願) 가운데 세번째 나오는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즉, 끝없이 일어나는 번뇌를 자르게 하여 달라고 서원하는 것처럼, 글을 쓰는 데에도 잡스런 생각을 버리고, 주제에 기여할 수 있는 내용이나 형식을 취사 선택하는 작업이 요구된다.
다음으로 씨앗을 뿌려서 심는 파종(播種)처럼, 창작의 단계, 즉 집필에 착수하는 단계에 이르게 되는 데, 이 때는 주제가 설정되어야 한다. 가령 사진을 찍는 데에도 어떤 구도를 잡고 샷터를 누르듯이, 쓰고자 하는 글의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그리고는 김을 맨다거나 하여 잡초를 제거하는 제초(除草) 작업과 농약을 살포하여 병충해를 막기 위한 소독(消毒)처럼, 창작과정에 있어서는 퇴고(推敲)라든지, 잡다한 생각의 속진(俗塵)을 털어내려는 생각이라든지, 잡념(雜念)을 제거하고자하는 자신과의 싸움이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는 곡식을 타작(打作)하게 되고, 탈곡(脫穀)하여 도정(搗精)을 하게 되는 마지막 단계처럼, 작품을 완성하는 최고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농사의 전 과정은 어디까지나 변함없는 농심이 바탕이 되어야 하듯이, 수필 창작에 있어서 그 완성을 위해서는 시심이라든지, 작가적 양식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돈을 벌기 위해서 농사하는 농부는 돈버는 게 목적이기 때문에 농사일을 쉬는 농한기(農閑期)에는 도박판에서 돈을 날릴 수도 있고 패가망신(敗家亡身)할 수도 있다. 그러나 농사짓는 일이 그저 즐겁고 보람있어서 농사하는 농부의 경우는 그 순후한 농심에 의해서 겨울 같은 농한기에도 쉬지않고 새끼를 꼰다거나 가마니를 치는 등 농사 준비를 하나 하나 해두기 때문에 그런 패가망신이 있을 수 없듯이, 글을 쓰는 창작 행위도 그저 좋아서 한다고 하는 순수한 창작동기에서 이루어지는 게 바람직하다.
그러니까 문학을 인생의 본질에 입각해서 해야지, 어떤 수단으로서 해서는 안된다는 얘기다. 농심(農心)이란 일확천금(一攫千金)을 꿈꾸는 도박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수단으로서의 문학이 아니라 그저 정직하게 살아가는 본질로서의 문학하는 자세를 견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온 겨울의 어둠과 추위를 다 이겨내고, 봄의 아지랑이와 따뜻한 햇볕과 무르익은 장미의 그윽한 향기를 온몸에 지니면서, 너 보리는 이제 모든 고초(苦楚)와 비명(悲鳴)을 다 마친 듯이 고요히 머리를 숙이고, 성자(聖者)인 양 기도를 드린다.
이마 위에 땀방울을 흘리면서, 농부는 기쁜 얼굴로 너를 한 아름 덤석 안아서 낫으로 스르릉스르릉 너를 거둔다. 너 보리는 그 순박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농부들과 함께 자라나고, 또한 농부들은 너를 심고, 너를 키우고, 너를 사랑하면서 살아간다.
보리, 너는 항상 순박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농부들과 함께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한흑구(韓黑鷗)의 <보리> 중 끝부분
보리의 순박함과 강인함을 농부의 덕성과 우리 겨레의 끈질긴 민족성에 비추어 쓴 작품이다. 늦가을 파종에서 시작하여 겨울을 이겨낸 끝에 봄을 맞는 보리의 생명력을 피력하면서 무르익은 다음, 수확에 이르기까지 찬미로 이루어진 이 글은 보리를 2인칭 의인법으로 지칭하여 표현하고 있다. 이 수필은 보리와 농부와 우리 겨레를 ‘순박함’과 ‘강인함’이라는 성질의 이미지를 동일선상에 두고 그 의미를 입체적으로 통일시키고 있다. 즉 보리 이야기는 농부의 이야기이면서 바로 조국 광복을 꿈꾸는 우리 겨레의 이야기인 동시에 농심이 짙게 스며있는 작품이다.
b. 양잠설(養蠶說)
먼저 윤오영(尹五榮)의 수필 <양잠설(養蠶說)>을 소개한 다음 설명하고자 한다.
어느 촌 농가에서 하루 저녁 잔 적이 있었다. 달은 훤히 밝은 데, 어디서 비오는 소리가 들린다. 주인더러 물었더니 옆 방에서 누에가 풀 먹는 소리였었다. 여러 누에가 어석어석 다투어서 뽕잎 먹는 소리가 마치 비오는 소리 같았다. 식욕이 왕성한 까닭이었다. 이때 뽕을 충분히 공급해 주어야 한다. 며칠을 먹고 나면 누에 체내에 지방질이 충만해서 피부가 긴장되고 윤택하며 엿빛을 띠게 된다. 그때부터 식욕이 감퇴된다. 이것을 최안기(催眼期)라고 한다. 그러다가 아주 단식을 해버린다. 그리고는 실을 토해서 제 몸을 고정시키고 고개만 들고 잔다. 이것을 누에가 한잠 잔다고 한다. 얼마 후에 탈피를 하고 고개를 든다. 이것을 기잠(起蠶)이라고 한다. 이때에 누에의 체질은 극도로 쇠약해서 보호에 특별히 주의를 해야 한다. 다시 뽕을 먹기 시작한다. 초잠 때와 같다. 똑같은 과정을 되풀이해서 최안, 탈피, 기잠이 된다. 이것을 일령 이령(一齡二齡) 혹은 한잠 두잠 잤다고 한다. 오령이 되면 집을 짓고 집 속에 들어 앉는다. 성가(成家)된 것을 고치라고 한다. 이것이 공판장(共販場)에 가서 특등, 일등, 이등, 삼등, 등외품으로 평가된다.
나는 이 말을 듣고서, 사람이 글을 쓰는 것과 꼭 같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대개 한 때는 문학소년 시절을 거친다. 이 때가 가장 독서열이 왕성하다. 모든 것이 청신(淸新)하게 머리에 들어온다. 이때 독서를 많이 해야 한다. 그의 포부는 부풀대로 부풀고 재주는 빛날대로 빛난다. 이때 우수한 작문들을 쓴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그는 사색에 잠기고 회의에 잠긴다. 문학서적에서조차 그렇게 청신한 맛을 느끼지 못한다. 여기서 혹은 현실에 눈 떠서 제 각각 제 길을 찾아 가기도 하고 철학이나 종교 서적을 읽기 시작한다. 그리고 오직 침울(沈鬱)한 사색에 잠긴다. 최안기에 들어선 것이다. 한참 자고 나서 고개를 들 때, 구각(舊穀)을 벗는다. 탈피다. 한 단계 높아진 것이다. 인생을 탐구하는 경지에 이른다. 그러나 정신적으론 극도의 쇠약기다. 그의 작품은 오직 반항과 고민과 기피에 몸부림친다. 이때를 넘기지 못하고 그 벽을 뚫지 못하고 대결하다 부서진 사람들이 있다. 혹은 그를 요사(夭死)한 천재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시 글을 탐독하기 시작한다. 전에 읽었던 글에서 새로움을 발견한다. 이제 이령(二齡)에 들어선 것이다. 몇 번이고 이 고비를 거듭하는 속에 탈피에 탈피를 거듭하며 자기를 완성해 간다. 그 도중에는 무수한 탈락자들이 생긴다. 최후에, 자기의 모든 역량을 뭉치고, 글 때를 벗고, 자기대로의 세계에 안주한다. 누에가 고치를 짓고 들어앉듯 성가(成家)한 작가다. 비로소 그의 작품이 그 대소에 따라 일등품, 이등품으로 후세에 평가의 대상이 된다.
대개 사람의 일생을 육십을 일기로 한다면, 이십대가 일령이요, 삼십대가 이령이요, 사십대가 삼령이요, 오십대가 사령이요, 육십대가 되면 이미 오령기다. 이제는 크든 작든 고치를 짓고 자기 세계에 안주할 때다. 이때에 비로소 고치에서 명주실은 풀리기 시작한다. 자기가 뽕을 먹고 삭이니만치 자기가 부단히 고무되고 고초하고 탈피해 가며 지어 논 고치(境地)만큼, 실을 뽑는 것이다. 칠십이든 구십이든 가는 날까지 확고한 자기의 경지에서 자기의 글을 쓰고 자기의 말을 하다가 가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십대~육십대로 예를 들어 말한 것은 육체적인 연령을 말한 것은 물론 아니다. 육체적인 년령에 대비해 보는 것이 알기 쉽기 때문이다. 우수한 문학가는 생활의 농도와 정력의 신비가 일반을 초월한다. 그런 까닭에 이 연령은 천차만별로 단축된다. 우리는 남의 글을 읽으며 다음과 같이 논평하는 수가 가끔 있다.
“그 사람 재주는 비상한데, 밑천이 없어서.”
뽕을 덜 먹었다는 말이다. 독서의 부족을 말함이다.
“그 사람 아는 것은 많은데, 재주가 모자라.”
잠을 덜 잤다는 말이다. 사색의 부족과 비판 정리가 안 된 것을 말한다.
“그 사람 읽기는 많이 읽었는데, 어딘가 부족해.”
뽕을 한 번만 먹었다는 말이다. 독서가 일회에 그쳤다는 이야기다.
“학식과 재질이 다 충분한데 그릇이 작아.”
사령(四齡)까지 가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그 사람 아직 글 때를 못 벗은 것 같애.”
오령기(五齡期)를 못 채웠다는 말이다. 자기를 세우지 못한 것이다.
“그 사람 참 꾸준한 노력이야. 대 원로지. 그런데 별 수 없을 것 같아.”
병든 누에다. 집 못 짓는 쭈구렁 밤송이다.
“그 사람이야 대가(大家), 훌륭한 문장인데, 경지가 높지 못해.”
고치를 못 지었다는 말이다. 일가(一家)를 완성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양잠가에서 문장론을 배웠다.
― 윤오영(尹五榮)의 <양잠설(養蠶說)>
여기에서는 문장의 기본 정도(正道)가 되는 삼요소, 즉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사(多思)가 망라되어 있다. 누에가 뽕을 먹고 잠을 자며 고치가 되어 가는 양잠의 과정이 수필 작법을 효과적으로 깨우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수필 창작에 도움이 되는 그 과정적인 비유도 비유지만, ‘글때를 벗는다’고 하는 어떤 경지를 말해 주는 데에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c. 요건설(要件說)
글을 쓰는 동기라 할까, 그 목적은 작자의 정서나 사상을 표현하는 데 있겠고, 독자에게 전달하는 데 있겠다. 정서와 사상의 표현은, 천부적으로 타고난 표현을 통한 기쁨을 누리고자 하는 데에 있겠고, 전달은 내적인 정서나 사상을 외적으로 표현하여 전달하는 데 있어서 보다 효과적으로 하려는 언어의 활용이 요구된다.
좋은 글이란 내용과 형식의 균형있는 조화가 요구되는 데, 그 효과적인 표현이라든지, 전달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의 요소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요건들은 우선 ‘내용’이 있는 글이어야 하겠고, ‘독창성’이 있는 글이어야 하며, ‘정성’이 깃들어 있어야 하는가 하면, ‘명료’한 문장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주문은 최소한의 기본 요건이다.
내용이 있어야 한다고 해서 반드시 깊은 사색의 결과로 철학적인 어떤 진리를 내포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넓게 보면 이 세상에 진리 아닌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여기에서의 내용이란 주제를 말한다. 주제가 없는 글은 배자(씨눈) 없는 계란처럼 생명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주제, 즉 내용이 충실하다는 것은, 써야 할 글이 들어 있고, 그 글은 쓸 만한 가치가 있다는 얘기가 된다. 내용이 별로 없어서 주제가 잡혀있지 않은 상태에서 글을 썼을 때에는 내용이 없는, 즉 충실하지 못한 글이 되기 쉽다.
개구리 소리는 들떠 있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다. 무엇인가를 생각케 하고 자꾸만 깊은 곳으로 그 생각을 유도해 간다. 음악의 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허공 속으로 증발시킨다면 개구리 소리는 자기의 참모습을 찾아 스스로 마음의 골짜기를 헤매게 한다.
불가(佛家)에서는 최고의 이상경(理想境)을 열반(涅槃)이라고 한다. 열반이라 함은 번뇌의 불길을 불어서 끈다는 취소(取消:nirvana)의 뜻이 아닌가. 개구리 소리를 밤이 이슥하도록 혼자 듣고 섰으면 드디어 열반의 경지에서 불사선 불사악(不思善不思惡)을 느끼는 순간을 맛보게 된다. 개구리 소리를 들으며 이러한 순간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동양(東洋)의 진수(眞髓)를 안다고 할 수 없으리라.
인류의 역사는 시간의 선(線) 위에 굴러가는 소리와 모습의 함수(函數)관계라고 할까. 세상이 달라지면 소리도 변하고, 소리가 달라지면 세상도 변해갔다. 이제 이 지상에서 자연의 소리는 차츰 문명의 소리에 밀려나고 있다. 개구리 소리는 더욱 그렇다. 문명의 소리와 자연의 소리가 조화를 잃을 때 인간 세상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문명의 소리가 동(動)이라면 자연의 소리는 정(靜)이다. 그리고 개구리 소리는 선(禪)일지도 모른다. “개골 개골 개골 가르르 걀걀걀걀” 개구리 떼들이 연신 울고 있다. 나는 먼 훗날 애환(哀歡)을 모르는 한 개 바위가 되어 해마다 제비꽃 필 무렵이 되면 개구리 소리에 부딪치며 무거운 침묵에 잠기고 싶다.
― 김규련(金奎鍊)의 <개구리 소리> 끝부분
별로 내용이 있을 것 같지 않은 소재를 가지고 상당한 제재를 주제로 이끌어내고 있다. 그리하여 평범한 소재를 가지고 비범한 주제로 이끌어내는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 여기에 수필의 묘미가 있다. 문명의 소리가 ‘동’이요 자연의 소리가 ‘정’이라면 개구리 소리는 선(禪)일지도 모른다는 발상은 ‘평범을 비범으로 이끈’ 단적인 예가 될 것이다.
다음으로, 독창성이 없으면 안 된다. 가끔 ‘신선한 충격’이라는 말을 듣게 되는 데, 이 신선한 충격은 주로 독창성에 의해서 주어지게 된다. 작자의 창의력이 글 속에 스며있지 않으면 창작하는 일에 의미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글의 독창성은 주제와 기교에 의해서 나타나기 마련이다. 처음 습작기에 있어서 글의 형식(틀)을 모방하는 경우라면 몰라도 작품을 제대로 쓰게 될 때 다른 사람의 글을 전거(典據) 없이 그대로 옮기거나 모방해서는 안 된다. 또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상식적인 내용의 글을 써서도 안 된다. 이 역시 독창성이 없는 글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始終一貫) 독창적인 글로만 채울 수는 없다. 때로는 다른 사람의 명언(名言)이나 명구(名句)를 차용하여 쓸 수도 있다. 법정에서 변호사가 증인을 이용하여 자기 주장을 관철시키는 것처럼, 창작하는 데에도 다른 사람의 글 중에서 필요한 부분의 출처를 밝히고 이용할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의 글에 대한 출처를 밝히지 않으면 표절(剽竊)이 되므로 지탄을 받게 된다. 남의 글을 훔친 것으로 간주된다는 얘기다.
다른 사람의 글을 차용해서 쓰는 자료가 너무 많아도 안 된다. 차용한 게 많으면 주객이 전도되는 인상을 주기 때문에 주체적인 힘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 출근길에 문조(文鳥) 한 마리가 죽어서 길섶에 버려져 있는 것을 보았다. 무서리가 내린 강변에 어린 물새 한 마리가 죽어 쓰러진 것을 보고 치마폭에 싸다가 양지에 묻어 주던 소녀가 생각난다. 이듬해 봄에는 그 무덤을 찾아가 풀꽃을 뿌려 주던 그 천사의 동심이 오늘 황량한 내 가슴에 강물로 출렁인다.
― 김규련(金奎鍊)의 <강마을> 앞부분
수필을 쓰고자 하는 사람이 앞에 소개한 김규련의 수필 ‘강마을’의 스타일이 마음에 들어서 그 형식대로 “오늘 아침 쓰레기를 버리려고 쓰레기통에 갔다가 죽은 귀뚜라미 한 마리를 보았다.”고 썼다면 그 형식만을 모방했기 때문에 표절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결코 독창적인 글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수필 뿐 아니라 어떤 장르를 막론하고 모든 독자는 정성이 담겨있는 진실한 글에서 감동하기 마련이다. 훌륭한 글이란 어렵게 쓰여져서 수월하게 읽혀지는 글을 말하는 데, 이는 정성이 담겨있는 글로서 진실이 스며있는 글을 말한다. ‘그 글에 그 사람’이라는 말도 있고, ‘글은 마음의 거울’이라는 말도 있다. 진지한 자세로 주제를 설정하고, 제재를 선택하며, 적합한 언어를 찾아내어 적재적소(適材適所)에 배치하기에 고심하였는 데도 그런 흔적이 보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읽혀지는 그런 글이 명문이다.
그들은 가난한 신혼 부부였다. 보통의 경우라면, 남편이 직장으로 나가고 아내는 집에서 살림을 하겠지만, 그들은 반대였다. 남편은 실직(失職)으로 집 안에 있고, 아내는 집에서 어느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쌀이 떨어져서 아내는 아침을 굶고 출근을 했다.
“어떻게든 변통을 해서 점심을 지어 놓을 테니, 그때까지만 참으오.”
출근하는 아내에게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마침내 점심 시간이 되어서 아내가 집에 돌아와 보니, 남편은 보이지 않고, 방 안에는 신문지로 덮인 밥상이 놓여 있었다. 아내는 조용히 신문지를 걷었다. 따뜻한 밥 한 그릇과 간장 한 종지……쌀은 어떻게 구했지만, 찬까지는 마련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아내는 수저를 들려고 하다가 문득 상 위에 놓인 쪽지를 보았다.
왕후(王侯)의 밥, 걸인(乞人)의 찬……이걸로 우선 시장기만 속여 두오.”
낮익은 남편의 글씨였다. 순간, 아내는 눈물이 핑 돌았다. 왕후가 된 것보다도 행복했다. 만금(萬金)을 주고도 살 수 없는 행복감에 가슴이 부풀었다.
― 김소운(金素雲)의 <가난한 날의 행복> 중 앞부분
진실이 배어 있는 글이다. 진실 앞에서는 감동을 받기 마련이다. 다음으로, 명료성을 강조할 차례인데, 수필뿐만 아니라 모든 문장은 세 가지 원칙을 지키는 게 바람직하다. 그것은 명쾌하고, 바르고, 간단하게 쓰라는 얘기인데, 좀 더 세분하며, 명백하고 정확하며, 간결 명료하게 쓰기를 권장하는 주문이다. 이는 논리가 질서 정연하게 잡혀있는 문장을 위해서 필요하다.
그런데 이처럼 간단 명료하게 쓰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작자가 쓰고자하는 글을 군더더기가 없이 효과적으로 조립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문학이나 문장은 언어의 질서화를 의미한다. 잡다한 삶 속에서 나타난 무질서한 언어들을 질서화시키는 게 문학이라면, 수필문학 역시 여기에 예외일 수 없다.
d. 자질론(資質論)
김광섭(金珖燮)의 <수필문학소고(隨筆文學小考)> 가운데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수필을 창작하는 데 있어서 그 자질을 가다듬는 길잡이가 될 것이다.
시는 심령(心靈)이 감각의 전율(戰慄)된 상태에서, 희곡과 소설은 재료의 정돈과 구성에 있어서 과학에 가까우리만큼 엄밀한 준비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보면, 수필은 달관과 통찰과 깊은 이해가 인격화된 평정(平靜)한 심경이 무심히 생활 주위의 대상에 혹은 회고와 추억에 부딪쳐 스스로 붓을 잡음에서 제작되는 형식이다.(생략)
수필은 논리적 의도에서 제작된 일은 없다. 수필은 써 보려는 데서 시작되어 써진 것이다. 어느 작가가 소설이나 희곡이나 시를 써 보려는 한가로운 마음에서 쓸 것인가? 그것들은 작가에게서 의식적으로 제작되었다.
그러나 수필은 한가로운 심경에서의 시필(試筆) 쯤에 그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수필은 수필(隨筆)되었다고 하고 싶다. 그러므로 희곡이 조직적이고 활동적이요, 시가 운율적(韻律的)이고 정서적이라면, 수필은 진실한 태도에서 인생을 관조하는 격(格)이라고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걷잡을 수 없으면서 그래도 어딘가 한 줄기의 맥(脈)이 있다.
― 김광섭(金珖燮)의 <수필문학소고(隨筆文學小考)> 중 일부
여기에서 특히 관심을 끄는 부분은, “수필은 진실한 태도에서 인생을 관조하는 격(格)이라고 비유할 수 있을 것”이라는 대목이다. 여기에서의 ‘격’은 품격을 말한다. 수필은 작자의 모든 게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품위를 잃으면 결정적인 타격이 된다. 따라서 수필은 필자의 자질이 중요시된다는 점을 잊어서도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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