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송문 수필집

시가 있는 수필들

SM사계 2012. 7. 30. 11:48

 

 

 

시가 있는 수필들

 

우리 곱게 썩어요

 

자기희생이 없이 사람을 제대로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죽여야 한다. 김치 담글 때의 배추포기처럼 소금 뿌려 숨을 죽여야 한다. 속 썩는 마음을 곱게 썩여야 한다. 마치 간장이 되기 위해서 콩이 메주가 되어 곱게 썩듯이, 우리는 제대로 곱게 썩어야 한다.

우리들의 생활, 우리들의 인생이란 마치 간장이 되는 과정과도 같다. 메주는 장독 속에서 소금과 어울리게 된다. 소금은 물에 녹아서 메주의 곰팡이를 정화한다. 메주는 잘 썩어야 하지만 소금은 아무렇게나 썩지 못하도록, 부패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에 소임이 있다.

메주는 그 뚜껑 덮인 장독 속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다. 빛이 차단된 어둠속에서 통풍도 되지 않는 가운데 소금물에 젖을 때부터 숨이 막히는 자기 갈등과 고통은 시작된다. 소금물에 쓰리고 아픈 그 고통을 참고 견디어야 하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도 이와 흡사하며, 사회와 국가 세계의 문제도 이와 흡사하다. 성격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만나게 되면 상충이 생긴다. 아니꼽고 메스껍고 짜증나고 신경질이 나는 경우가 생기게 된다.

간장이 되기 위해서는 이처럼 잡다한 갈등을 스스로 여과하고 순화해서 견디어내고 걸러내어야 한다. 마음의 항아리에 연달아 일어나는 갈등을 여과해야 한다. 은혜를 폐해로 갚는 사람에게 사랑으로 감싸주기 위해서는 너그러운 아량과 자기희생이 요구된다.

사람이란 고난의 과정을 통해서 보다 높은 차원으로 성숙해 간다. 그 성숙한 사랑으로 인해서 인생이 맛이 들게 된다.

자기 수련의 과정을 통해서 떫은 기는 사라지고 익어가게 된다. 생각이 잘 익은 사람, 정신이 잘 여문 사람은 크게 후회하지 않을 수 있다. 사랑으로 자기를 연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이란 자기 연소의 과정이 아닐까. 자기를 연소함으로써 빛을 내고 열을 내듯, 자기의 헌신적인 희생과 봉사를 통해서 사랑을 깊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자기희생은 자기의 썩음이다. 철저한 자기희생은 철저한 자기의 썩음이다. 메주가 철저한 썩음으로 해서 간장이 되어 가듯, 우리는 철저한 자기의 인내를 통해서 이웃과 사회에 이바지해야 한다.

 

우리 조용히 썩기로 해요.

우리 기꺼이 죽기로 해요.

토속의 항아리 가득히 고여

삭아 내린 뒤에

맛으로 살아나는 삶,

우리 익어서 살기로 해요.

안으로 달여지는 삶,

뿌리 깊은 맛으로

은근한 사랑을 맛 들게 해요.

정겹게 익어 가자면

꽃답게 썩어 가자면

속맛이 우러날 때까지는

속 삭는 아픔도 크겠지요.

잦아드는 짠 맛이

일어나는 단 맛으로

우러날 때까지,

우리 곱게곱게 썩기로 해요.

우리 깊이깊이 익기로 해요.

죽음보다 깊이 잠들었다가

다시 깨어나는

부활의 윤회

사랑 위해 기꺼이 죽는

인생이게 해요.

사랑 위해 다시 사는

재생이게 해요.

-「간장」-

 

간장독의 뚜껑에 덮인 채, 숨이 막히는 세월을 참고 견디노라면 속 삭는 아픔도 클 것이다. 뚜껑 덮인 간장독이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시사철 기나긴 세월을 참고 견디기에는 말할 수 없는 각고의 인내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소금기 진한 짠물에 몹시도 쓰리고 아픈 세월을 참고 기다리면서도 그 마음은 항상 평온을 유지해야 한다.

열심히 썩혀온 메주와 부패를 막는 소금기와의 대립 투쟁이 아닌 조화로운 융합, 이 기막힌 고난의 과정을 통해서 고난으로 뜨겁게 달여지는 삶이 뿌리 깊은 맛으로 은근한 사랑을 맛 들게 할 것이다.

꽃이 웃으면서 지듯이, 우리는 꽃답게 살다가 꽃답게 져내려야 한다. 꽃답게 살기 위해서는 꽃답게 썩어가야 한다. 꽃답게 썩어가면서 정겹게 익어가야 한다. 그래야만이 인생에 있어서 보람 있는 속맛이 우러나게 되기 때문이다.

세월이 지나게 되면 간장 속의 메주는 소금물 속에서 삭게 된다. 속 삭는 아픔으로 곱게 다스려 안으로 맛 들게 된다. 그리하여 때가 되면 장독 속의 액체를 솥에 붓고 열을 가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결국 그 간장은 펄펄 끓는 가운데, 잦아드는 짠 맛이 일어나는 단 맛으로 우러나게 된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곱게 썩는 사람이요 깊이 익는 사람이다. 진정으로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죽음보다도 더 깊이 잠들었다가 다시 깨어나는 사람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 오랜 계절을 숨이 막히는 뚜껑이 덮인 채 죽음보다 깊이 잠들었다가 어느 날 펄펄 끓는 간장처럼 새롭게 살아나는 사람이다.

높은 열로 펄펄 끓은 뒤엔 관념의 찌꺼기는 걷어내고 해묵은 맛으로 우러나는 간장, 그것은 사랑을 위하여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사람을 상징적으로 암시한다. 이는 사랑을 위해서 기꺼이 죽는 인생이요, 사랑을 위해서 다시 사는 재생이다.

간장이 모든 음식물에 들어가서 맛을 내듯이, 간장처럼 맛이 깊은 사랑의 소유자는 그가 처해있는 가정과 사회와 국가, 더 나아가서는 이 세상 사람들의 기쁨과 행복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고 봉사하는 사람이다.

간장, 그렇다. 우리는 썩은 메주가 소금물 속에서 오랫동안 참고 견디듯이 인내로 기다려야 하고, 간장이 펄펄 끓듯 끓어야 하며, 간장이 모든 음식에 들어가 맛을 내듯이, 이 세상 구석구석에 들어가 기쁨과 행복의 맛을 내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의 간장사상이다. 장독은 사시장철 고난의 과정을 거쳐 오면서도 때로는 뚜껑을 열고 푸른 하늘 드높이 우러러 기도하는 자세를 취한다. 갈등을 일으키는 요소들을 너그럽게 포용하는 사랑의 자세를 취한다.

장독은 잘 익은 간장이 모든 음식에 들어가서 맛을 내는 동안에 빈 가슴이 된다. 온전한 빈 가슴이 되어 하늘을 모시고 산다. 넓고 둥근 가슴이 되어 안으로 안으로 그리움만 배부르게 된다.

사랑이 맛들도록 맛깔스럽게.

빈 마음에

해와 달과

구름이 한 점……

 

 

은밀한 방

 

전화는 은밀한 방이다. 그 은밀한 방에 한 사람만 있을 때에 한해서만 문이 열린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사람이 문을 열어 주고 손님이 방으로 들어가게 되면 문은 자동적으로 잠긴다. 그리하여 전화에 있어서의 대화는 아무도 간섭할 수 없는 밀폐된 방에서 1대 1로만 이루어진다.

전화는 두 사람만이 들어가 이야기할 수 있는 완벽한 독방이기 때문에, 그 방안에서 이야기하는 두 사람이야 자유스럽겠지만, 밖에서 공중전화 상자에 동전 두 닢을 넣고 다이얼을 돌리는 사람의 경우에는 여간 낭패가 아닐 수 없다.

마치 등산광이 히말라야 산을 오르다가 굴러 떨어지는 것처럼, 통화 중일 때는 동전 두 닢이 여지없이 굴러 떨어지고 만다. 두 사람의 통화가 30분도 좋고 한 시간도 좋다는 식으로 길어질 때의 공중전화 동전은 처참하고 처절하게 된다. 여기에 동전 두 닢의 슬픔, 동전 두 닢의 비극이 있다.

전화의 문이 잠겨버린 안방에서 대화가 계속되는 동안엔 밖에서 으스스 떨며 도전하던 동전은 수없이 굴러 떨어지고 만다. 밖에서 아무리 문을 두드려 보아야 열릴 줄 모르는 전화의 문밖에서 초라하게 떠는 동전, 그 가난한 동전 두 닢은 춥고 배고프다. 그러나 이 춥고 배고픈 동전을 언제까지나 문밖에 버려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잘못 걸린 전화는 남의 방으로 잘못 찾아든 사람처럼, 말 몇 마디에 방문이 금방 열리고 닫힌다. 제발 안방까지 들여보내지도 않거니와 이 불청객도 방안을 기웃거리며 몇 마디 물어보다가는 머리를 굽실거리며 나가게 된다.

그런데 용무가 있는 사람의 경우에는 이와 달리 응접실까지 안내되어 대접을 받는다. 그러나 이것은 일상적인 것, 평범한 것이기 때문에 용무가 끝나면 금방 나가게 된다. 용무를 마쳤으면 더 이상 머무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마치 전기나 수도 검침원처럼, 용무를 마치면 곧 나가기 때문에 그러한 시간에는 밖에서 동전 두 닢을 가지고 공중전화를 건다고 하여도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통화중이라 할지라도 오래지 않아서 이내 걸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용무가 애매모호한 사람이 전화로 방문했을 때 문제가 된다. 용무가 있다고 하여도 그 용무를 마치고도 나가려 하지 않고 머무적거리는 사람이 전화를 길게 끌기 마련이다.

전화라고 하는 은밀한 방안에 두 남녀가 함께 있다고 가정해 보자. 처음에는 대화가 서먹서먹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방에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아지게 되면 많아질수록 정이 들어서 대화는 무르익어간다. 대화가 무르익어 갈수록 상대방이 현실적으로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관념적인 상상의 날개를 파닥이며 환상의 세계로 꽃피어 가게 된다.

전화라고 하는 둘만의 내실에 이야기가 무르익어가게 되면, 그 상상의 날개는 제멋대로 날아다니며 상대방의 목소리를 통해서 표정 하나하나를 그려가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 상상의 날개는 미의식으로 파닥이며 관념의 감주를 들이키게 된다.

그리하여 은밀한 방에서 대화가 무르익어 가면 그 둘은 하나가 된다. 약간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앉아서 얘기하던 사람들이 점점 가까이 다가가서는 하나의 꽃방석에 앉아서 이야기를 깊여 간다.

그런데 그 꽃방석에 수가 놓아진 아주 작은 꽃무늬처럼, 그들의 이야기는 달콤하면서도 잘아서 결국에 가서는 잘아진 언어의 늪 속에 갇혀버리는 신세가 되고 만다.

이야기가 깊게 깊게 무르익어 갈수록 둘은 점점 하나가 되어 어둠 속을 더듬거리게 된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그 관념의 프리즘은 마치 촉각이 예민한 장님처럼, 무지개를 꿈꾸게 된다.

전선줄을 타고 쉴 새 없이 흐르는 말과 말은 마치 설해목(雪害木)처럼, 정으로 쌓이고 쌓여 마침내는 소나무 가지를 우지끈 분질러 놓고야 만다. 이것은 전화라고 하는 문명이 이기(利器)가 가져다주는 모순이다.

이 문명의 이기는 때때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긴급한 환자가 발생했을 때 전화는 죽어가는 사람도 살려내는 고마운 존재가 된다. 그러나 통화가 길어지면 시시껄렁한 잔소리가 되고, 그 잔소리들은 차원 높은 순수 시어(詩語)를 질식시켜 죽이기도 한다.

 

전화는 은밀한 방이다.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은 채

시를 교살(絞殺)한 방이다.

밀어(密語)가 무성한 암실에

둘만의 포옹을 누리는

갇힌 바람의 밤하늘이다.

푸른 바탕에 보석들 수놓은

밤하늘에 잠기다가 깔깔거리는

유성(流星)의 사정(射精)이다.

정사현장이다.

밖에서 문을 두드릴 때

홀로 있을 때만 문이 열리는

一陰一陽之謂道

陰陽不則之謂神

신기(神奇)한 자동문이다.

하나의 방에서

하나의 꽃방석을

둘이 함께 깔고 사는 꿈의 오두막이다.

굴뚝엔 실연기 더듬거리며 피어오르고

구들도 더듬더듬, 내실엔 입술

은하수가 안개처럼 밀려다닌다.

오오, 그러나

꽃방석의 무늬는 너무 잘아

잔소리의 포식(飽食)으로 죽어간다.

자기도 모르게 죽어간다.

꽃 속에 갇혀 죽는 벌이 되어

잔소리 잉잉거리며 죽어간다.

도시의 전화는 여우 떠는 굴

시를 살려 보내지 않는 무서운 방이다.

시를 교살한 중죄수의 독방이다.

한밤 중

오므라든 꽃 속에

갇혀 죽는 벌의 방이다.

시를 달달 볶아 죽인 잔소리의 방이다.

-「시를 교살한 방」-

 

은밀한 그 통화의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럴 듯해 보이던 전화의 대화들은 정말 시시껄렁한 잔소리에 불과하다.

때로는 은밀한 방에서 비밀리에 속삭이고 음모하는 범죄를 탐색하기 위해서 도청(盜聽)이라고 하는 새로운 범죄가 자행되기도 한다.

전화, 그 은밀한 방은 이제 비밀이 아니다. 이 세상 어느 곳에서 무슨 말을 해도 이제는 모두 도청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아내가 누구와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오래 하는지 잘은 모르지만 대강은 알고 있다. 참새처럼 재잘거리고 짹짹거리는 동창생이 아니면, 옛날의 애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하루에 한 번씩은 집으로 전화를 거는 데, 또 길게 통화중일 때는 속으로 하는 말이 있다.

이 철딱서니 없는 아내여! 제발 시시껄렁한 전화 좀 빨리 끊어다오.

 

 

사랑의 원리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반드시 주체와 대상으로 관계되어 있다. 이 두 관계, 즉 주체와 대상으로 되어 있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무엇이 존재한다고 할 때에는 반드시 그가 존재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하는데 그 있음의 힘, 즉 존재하기 위한 힘이란 독자적으로는 생겨날 수가 없고 반드시 주체와 대상 사이에 잘 주고받을 수 있어야 만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말은 바로 사랑한다는 뜻과도 같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존재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어떤 대상을 사랑해야 하고, 사랑하게 되면 존재하게 된다는 여기에 위대한 진리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본질적으로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나 이외의 누군가를 위해서 따뜻이 사랑해야 하거니와 그 대상으로부터 사랑을 받음으로써 영원히 주고받아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이란 이러한 기본 원리에서부터 풀어 나가야 하는 성질의 것이라 할 수 있다.

본질적인 사랑, 참된 사랑이란 언제나 나와 관계된 대상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오늘날 나타나고 있는 현상을 보게 되면 일반적으로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대상을 구하는 데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무한히 주게 되면 무한히 오게 되어 있는 게 사랑이다. 상대에게서 10만큼 받았으면 11이나 12로서 더 보태어 주고 싶은 게 사랑이다. 상대로부터 10만큼 받은 사람이 11이나 12로 보태어 돌려주고 저쪽에서는 다시 13이나 14로 보태어서 보내어 오게 되면 그 사랑은 더욱 깊어지고 확대될 뿐 아니라 영속하게 된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10을 받은 사람이 그 상대에게 9나 8만큼 주고, 또 저쪽에서도 다시 7이나 6만큼 돌려준다면 결국에 가서는 제로(0)나 마이너스(-)상태가 되어서 중단되고 말게 된다.

그러므로 자기가 진실하고 가치 있게 존재하기 위해서는 자기와 인연되어 있는 대상에게서 받은 것보다도 더 보태어서 돌려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주고 또 주고 계속 위해 주어도 별로 주지 못한 것처럼 느끼는 게 진실한 사랑, 끝없는 사랑이다.

그래서 어머니들은 자식에게 평생토록 희생 봉사해 오면서도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한 것으로 생각하고 미안해하게 된다.

사랑에는 어떠한 폭이 있다. 넓이와 깊이가 있다. 개인적인 사랑, 가정적인 사랑, 민족적인 사랑, 세계적인 사랑 등등 그 범주가 얼마든지 확대되기도 하고 축소되기도 한다.

상대방을 아끼고 위하는 따뜻한 마음은 누구든지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상대가 자기에게 잘할 때에 한해서는 이런 마음을 가지면서도 상대방으로부터 증오와 배신을 당하면서까지 사랑의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에서 사랑의 폭과 깊이를 생각하게 된다. 쨀쨀쨀 찔찔찔 흐르는 논고랑 물도 있고,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도 있으며, 도도히 흐르는 강물도 있는 것과 같이, 사항에도 그 폭과 깊이가 있으며 천태만상의 조화가 굴절한다.

성인들의 인류에 대한 사랑, 그 박애, 그 자비, 그 구원의 마음은 강물 같은 것으로 생각 할 수 있다. 옛날 말에 수심강정(水深江靜)이라는 말이 있다. 물이 깊은 강은 고요하다는 뜻이다. 그 깊은 강물처럼 성인들은 오늘날까지도 깊은 말씀을 고요하게 들려주고 있다.

변함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그 사랑은 넓고 깊어서 오늘날까지도 온 인류가 숭앙해 오고 있다. 그들은 무한히 주어왔기 때문이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었는가 하면, 십자가에 달리면서 까지도 인류를 위해 복을 빌어 주었다. 그 넓은 사랑에 인류는 감동했던 것이다.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베풀어야 한다. 받을 것을 전제로 계산하고 베풀 게 아니라 조건 없이 베풀어야 한다. 그래야만이 사랑이 깊어지게 된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인류 역사 이래 수많은 사람이 즐겨 다루어 온 이 감동적인 주제는 무엇인가. 사랑이라는 이 명사, 이 주제는 시나 소설 등의 문학작품에서 뿐만 아니라 음악, 미술, 연극, 영화 등 모든 예술의 중심 주제가 되어 왔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도 그랬거니와 앞으로도 영원한 중요과제로써 관심의 대상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이 영원한 수수께끼로서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감동적인 주제는 도대체 어떠한 성질의 것인가. 사랑, 그것은 주체가 대상에게 주는 정적(情的)인 힘이라고 한다. 그리고 미(美)라고 하는 것은 대상이 주체에게 돌려주는 정(靜)적인 요소를 말한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는 부모에게 아름다움을 돌려드리게 된다.

그런데, 이 사랑의 질서가 깨어진 게 타락이다. 부모와 자식이, 남편과 아내가, 형과 아우가, 국가와 국가가 각기 개인이나 가정으로부터 국가에 이르기까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서로 움켜쥐려는 데에서 사랑은 파괴되고 투쟁의 역사가 이어져 나온 것이다.

여기에 아가페와 에로스가 그 차원을 달리 한다. 기독교의 이념을 바탕으로 하는 아가페의 사랑은 보다 높고 넓은 사랑으로 작용한다. 그것은 절대적인 사랑의 존재가 죄인인 인간에 대하여 자기를 희생하면서까지 긍휼히 여기는 사랑을 말한다.

여기에 반하여 에로스의 사랑은 인간적이며 상대적이다. 아가페의 사랑이 보다 절대적인 사랑이라면, 에로스의 사랑은 상대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아가페의 사랑이 종적(縱的)이라면 에로스의 사랑은 횡적(橫的)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하나의 피조물로서 불완전하기 때문에 신적인 절대 요소도 인간적인 상대 요소도 모두 다 필요하다. 신을 망각한 자기(인간) 본위의 삶도, 인간을 무시한 신(神) 본위의 삶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가장 바람직한 삶, 가장 바람직한 사랑은 아가페와 에로스를 동시에 수용하는 데에서 가능하다. 왜냐하면 이 양면의 조화로운 수용은 사랑의 성숙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성경에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하였다. 자기를 희생하면서까지 헌신적인 사랑을 서슴지 않는 아가페 사랑의 소유자는 그 사랑을 확대시키면서 오래도록 지속시키는데 비하여, 자기 위주로 살아가는 에로스의 사랑의 소유자는 우선 그 사랑이 변하기 쉽고 축소될 뿐만 아니라 지속성을 잃기가 쉽다.

흔한 예로써 자기들끼리 좋아서 만나고 결혼해 사는 사람들은 살다가 싫어지면 쉽게 이혼해 버리게 된다. 이것은 삶의 기준이나 사랑의 기준이 자기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웃을 위해 살다가 아가페의 절대자 앞에 결혼을 약속한 부부는 살다가 싫어진다고 해서 함부로 이혼을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들에게는 삶의 기준이라든지 기쁨의 관심사가 자기에게 먼저 있기 보다는 절대자 하나님과 이웃에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원래 종(縱)과 횡(橫), 아가페와 에로스라고 하는 입체적 조화에서 이뤄져야 할 성질의 것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가페의 요소를 망각한 채 인간적인 에로스의 사랑의 한계상황 안에서 갈등을 겪고 있는 형편이다.

누구든지 대접을 받으려거든 먼저 대접하라는 이 성경구절에는 존재의 논리와 함께 사랑의 원리가 들어 있다. 사랑을 받고 싶거든 먼저 사랑하라. 먼저 무한히 위해 주어라. 주고 주고 또 주고 또 주면서 이웃을 내 몸같이 위해 주게 될 때 그 사람은 자연히 사랑을 받게 될 것이며, 갈등을 느끼거나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쉽사리 이룰 수 없는 문제 중의 문제로서 인류의 중심과제로 남아져 왔던 것이다. 누구든지 사랑에 주리거나 목마르지 않으려거든 먼저 무한히 주고 영원히 사랑하라.

 

 

사랑의 묘미

 

사랑이란 1차선에 의한 일방통행이 아니라 2차선에 의한 왕복통행이요, 잘 주고 잘 받는 수수(授受)의 회로(回路)이다.

에로스의 사랑을 가리켜 받는 사랑이라 한다면, 아가페의 사랑은 주는 사랑이라 할 수 있다. 서로 잘 주고받을 때 그 사랑은 영원성을 유지하게 된다.

그런데 사랑을 주고받는데 있어서 보통 세속적인 사람들은 먼저 받으려 하고 종교 세계에 있어서의 성스러운 사람들은 먼저 주려고 한다.

성경에는 먼저 주어라고 기록되어 있다.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먼저 대접하라고 하였다. 이처럼 주고받는 원리에서 사랑은 천태만상의 조화로운 아름다움으로 파장을 일으키면서 굴절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횡적이며 평면적으로 주고받는 사랑은 자기중심적이기 쉽고 이기적인 욕심쟁이가 되기 쉽다. 상대편이 자기에게 잘해 줄 때에는 마음을 주게 되지만, 그 상대가 잘못했다든가 배신했을 때에는 그 사랑을 계속 유지하지 못하고 거두어들이며 끝장을 내는 것이 인간 사회에서 흔히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다.

여기에 비하여 신(神)이 개입된 사랑, 신(하나님)의 실존을 인정하는 가운데 그 신에게 향하는 기쁨, 신과 함께 누리려고 하는 아가페 사랑은 종적(縱的)이며 입체적이다. 이러한 사랑은 자기 개인이 중심이 아니라 인류가 중심이요, 자기 위주가 아니라 상대방 위주가 된다.

즉, 자기의 기쁨, 자기의 행복이 자기 자신의 이익에 우선적으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기쁨이나 행복을 통해서 비로소 맛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이처럼 주는 사랑(아가페)은 받는 사랑(에로스)보다 그 차원을 달리 한다.

꽃이 완력으로 마음을 끄는 게 아니라 고운 빛깔과 부드러운 향기로 마음을 끌듯이 사랑이란 따뜻한 부드러움으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성질을 지닌다.

아무리 신체가 거대하고 힘이 센 씨름 선수나 레슬링 선수라 할지라도 아주 작고 귀여운 아가씨에게 끌려 다니는 것은 사랑 때문이다. 사랑의 힘 때문이다. 천하에 없는 사람도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만사를 제쳐두고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어 한다.

아무리 키가 작고 연약한 여인이라 할지라도 사랑하는 사람은 그녀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그녀에게 달려가는가 하면 원하는 대로 들어 주려고 힘쓰게 마련이다.

사랑에는 하늘 같이 높은 사랑이 있고 바다같이 깊은 사랑이 있다고 한다. 이 외에도 달콤한 사랑이니 싱거운 사랑이니 하는 형용들이 있는데 이러한 형용은 주로 남녀 간의 성정인 사랑이라든지 가정이나 조국을 생각하는 사회적 사랑 내지는 진리 지식 도덕 또는 아름다움이나 선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성격의 것들이다.

여기에서 얘기하고 싶은 것은 보다 가치 있는 본질적 사랑에의 접근이다. 어떤 사랑이 본질적으로 가치 있는 사랑인가. 그것은 단적으로 말해서 신을 중심한 아가페의 사랑과 인간을 중심한 에로스의 사랑이 균형 있게 조화되는 사랑이 아닌가 한다. 상대편을 먼저 사랑하는 아가페의 사랑과 자기가 사랑받고 싶어 하는 에로스의 사랑이 조화되는 사랑이 아닌가 한다.

봄 여름 가을 할 것 없이 모진 비바람에도 끄떡하지 않던 나무들이 겨울철이면 우지직 꺾이고 마는 경우를 보게 된다. 사철 푸르기만 하던 소나무들까지도 눈이 내려 덮이면 여지없이 꺾이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그처럼 강한 의지로 뭉쳐진 소나무들이 무엇 때문에 꺾이고 마는 것일까.

그것은 나뭇가지 끝에 한 닢 두 닢 사뿐히 내려 쌓이는 그 하얀 눈에 꺾이게 되는 것이다. 레슬링 선수들처럼 근육으로 꼬여 있는 정정한 나무들이 부드러운 눈잎에 부러져 나가는 그 의미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송두리째 사로잡는 것은 권력도 아니고 금력도 아니다. 그것은 아주 작으면서도 부드러운 눈꽃과도 같은 것이다. 한 송이 두 송이 내려 쌓이는 눈이 마침내는 엄청난 무게가 되어 소나무 가지를 부러뜨리듯 잠깐씩 만날 때마다 쌓이게 되는 상냥한 말씨라든가 사소한 정성들이 나중에 가서는 엄청난 무게를 지니게 된다.

겨울에 나무가 얼어 있을수록 눈더미의 무게에 부러져 나가기 쉽듯이 사랑에 목말라 하며 춥게 지내는 사람일수록 훈훈한 사랑 앞에서는 유순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제대로 사랑하며 사랑의 묘미를 살려내기 위해서는 먼저 사랑할 줄 알아야 하거니와 눈꽃이 내려 쌓이듯 순수한 사랑을 정성으로 쌓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의 집적(集積), 정성의 집적으로 그 언어와 행동이 생활 속으로 쌓여가야 한다. 아름다운 말씨, 부드러운 말씨, 상냥한 말씨, 친절한 말씨, 편안함을 주는 한 마디 한 마디의 말씨가 상대방의 마음을 나뭇가지에 눈꽃 쌓이듯 쌓이게 될 때 그 상대는 그러한 언어의 소유자를 떠나 살 수가 없게 된다.

이러한 언어의 소유자로부터 떠나 산다 할지라도 그러한 언어는 그 마음 속 깊은 곳에 살아남아서 녹음기 틀어놓듯 계속 울리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의 관심에서 떠나지 않는 길이란 바로 눈꽃이 내려 쌓이듯 사랑과 정성을 시나브로 쌓아가는 길이다.

또한 생활을 통해서 상대방의 향상 발전을 위해서 희생적으로 도와주어야 한다. 상대방의 향상을 위해 희생 봉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 할 수 없다.

상대편의 향상을 위해 주려면 우선 자기가 희생적이어야 한다. 자기가 헌신하는 자세가 없이 욕심을 채우려 든다면 상대방의 향상은커녕 오히려 도탄에 빠뜨리게 된다.

그러므로 상대편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싶거든 먼저 사랑하라. 사랑을 많이 받고 싶거든 조건 없이 무한히 사랑하라. 영원히 사랑받고 싶거든 변함없이 사랑하라. 설령 상대방에게 잘못이 있다 할지라도 언제까지나 변함없이 사랑하라. 그렇게 하면 상대는 자석에 끌리듯 돌아오게 될 것이다.

사랑의 묘미, 그것은 유(柔)로 강(强)을 포유하는 슬기로운 프리즘이다. 그것은 그야말로 깨를 볶는 재미다. 이러한 재미를 누가 외면할 것인가.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와 같은 사랑의 묘미를 누리지 못하는 것은 우선 마음 바탕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의 바탕, 그것은 물레의 가락(물레로 실을 날 대 실이 감기는 쇠꼬챙이)과도 같아서 비틀어지게 되면 덜덜거리거나 털털거리며 떠는 소리를 요란하게 내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부드러운 마음의 눈꽃, 사랑의 눈꽃을 사랑하는 이의 마음속에 쌓으려면 자기 마음의 가락부터 바로 잡아서 부드러운 소리가 나도록 해야 한다.

바닷가 조약돌들이 바둑알처럼 그토록 매끈하게 다듬어지는 것은 아주 오랜 세월을 두고 부드럽게 어루만져 온 물결로 인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은 진리이다. 이러한 진리를 깨닫고 실천하는 사람에게는 사랑의 묘리가 살아나게 될 것이다.

 

 

사랑의 기술

 

사람들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어 하고 사랑받고 싶어 한다. 누군가를 사랑함으로써 존재하기 때문에 어쩌면 제대로 존재하기 위해서 사랑받고 싶어 하는 지도 모른다.

그런데 자기의 마음에 드는 사람을 사랑하고 싶다거나 그로부터 사랑을 받고 싶다고 해서 그게 마음대로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여기에 청춘남녀들의 고민이 있다. 사랑을 주고 싶고 받고 싶은 그 사랑의 대상을 움켜쥐고 싶지만 자기의 손 안으로 들어오지 않을 때 그는 사랑에 목마르게 된다.

여기에 피할 수 없는 고민이 있다. 그 고민을 해결하지 않고는 아무 일도 되지 않는다. 일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거니와 손에 잡히지도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먼저 사랑하는 마음이 되어야 하고 그 다음으로는 사랑의 기술을 익혀야 한다. 여기서 '기술'이라는 표현이 적합할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사랑을 슬기롭게 할 수 있는 방법으로써의 기술이 필요하다.

사랑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맹목적이기보다는 슬기로운 어떤 방법이 필요하겠는데 그 방법을 여기에서는 편의상 기술이라는 말로 대칭해서 사용한다.

무엇보다도 요구되는 것은 우선 자기부터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이 되어야 한다. 먼저 자기의 인격이 도야되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의 마음속에서 사랑이 샘솟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가 멋있는 사람, 고상한 인품을 지닌 사람이 되지 않고는 그러한 인물, 그러한 대상을 만날 수도 없거니와 만난다 하더라도 조화를 이룰 수도 없다. 대개는 자기와 버금가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자기를 먼저 사람다운 사람이 되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

사람다운 사람, 멋있는 사람, 매력 있는 사람이란 꽃으로 말하면 향기를 풍기는 꽃과도 같다. 향기 있는 꽃에는 별과 나비가 날아들 듯, 개성이 완성되어진 고상한 인품의 소유자에게는 그에게 버금가는 사람들이 모여들게 된다.

사랑이란 주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물론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서로 받으려고 하기 보다는 서로 주려고 하는 데에 영속성이 있다는 점이다. 두 사람이 서로 주려고 하게 될 때 그 사랑은 영속하지만 서로 받으려고만 할 때 그 사랑은 얼마 못가서 시들해 버리고 말게 된다. 그러므로 사랑은 헌신적이요 희생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성경에 의하면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했다. 상대방을 위하려면 오래 참을 줄도 알아야 한다. 자기중심적인 사랑이란 지속이 될 수가 없다. 자기를 생각하기 전에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고 참을 줄도 알아야 오래 지속이 되고 커지며 깊어진다. 그리고 발전하게 된다.

성경에는 사랑이란 온유하며 투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는다고 했다. 사랑을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은 상대방에게 편안함을 주게 된다. 누구든지 불편한 관계는 청산하려고 하며 편안한 관계는 유지하려고 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상대방에게 끝없이 편안함을 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온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온유한 사람, 상대에게 편안함을 주는 사람은 투기할 수가 없다. 투기라고 하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욕망이 충족되지 않았을 때 분노를 일으키는 불순한 마음이다.

그것은 강새암으로써 상대의 이성(異性)이 다른 이성을 좋아하는 것을 미워하는 새암, 즉 질투심을 말한다. 이러한 질투심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한 상대에게 편안함을 주지 못한다.

또한 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하고 무례히 행치도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했다. 자식이 부모에게 왜 공경하는가. 그것은 물론 자기를 낳아 준 혈육의 정에서도 연유되겠지만 부모란 자식에게 헌신적이다. 헌신적인 부모는 자식에게 교만할 리도 없고, 무례하지도 않으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자식은 병신 부모라 할지라도 공경하게 된다.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고 악한 것을 생각지도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딘다고 했다.

그렇다. 사랑은 성내지 않는 것이다. 성을 낸다는 것은 벌써 자기중심적일 때 성을 내게 된다. 상대방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없을 때 성을 내게 된다. 상대방을 믿어 주고 이해하여 주는 마음이 없을 때, 그리고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위주의 사고방식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고 불만족스러울 때 성을 내게 된다.

그러므로 사랑의 조화로운 영속성을 위해서는 상대방에게 의심스러운 구속이 느껴진다 할지라도 너그럽고 온유한 마음으로 믿어주고 이해하여 주게 될 때 그 관계는 영속된다. 그러나 이러한 일을 해내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것은 어려운 일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일에 속한다.

이것은 마치 이기려고 치는 탁구가 아니라 친선으로 하는 탁구경기와도 같은 것이다. 만일 부부간이나 부모 자식 간에 탁구를 한다면, 그것은 서로 이기려는 탁구라기보다는 즐기려는 탁구일 것이다. 즐기려는 탁구는 탁구공이 오래 가기를 바라면서 치게 된다. 이 때 잘못 들어온 공을 잘 받아내는 사람, 탁구대에 잘못 맞고 땅에 떨어져 끝장이 날 것 같은 탁구공을 잘 살려내어 받아치기 좋은 자리에다 보내어 주는 사람은 탁구를 잘하는 사람이다.

금방 바닥으로 떨어져 버릴 수밖에 없는 공을 교묘히 살려내어 받아치기 좋은 자리에 보내어 주듯이 이내 끝장이 날 수밖에 없는 사랑을 온유 겸손한 마음으로 잘 참고 견디면서 교묘히 살려내는 사람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으로서 누구에게든지 사랑하게 하는 사람, 사랑받게 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은 이성(異性)의 상대로부터 '당신은 사랑받게 해요'소리를 듣게 된다. 이것이 사랑의 기술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탁구공을 교묘히 살려내듯 신경질을 낸다든지 왈칵 화풀이나 하고서 끝장을 내어버릴 것 같은 사랑을 참고 기다리면서 슬기롭게 잘 살려내는 사람 앞에서는 천하에 없는 사람도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사랑의 역설

 

누구든지 사랑에 빠지게 되면 그 사람의 성격 내지는 개성이라든지 인품에 따라서 그의 언어는 천태만별로 표현되어 나온다.

인간은 개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상대기준이 조성되는 사람에게는 끌리게 되어 있다. 그래서 남녀 간의 관계는 신비로운 영역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 신비로운 영역에 있어서의 매력은 용모에 있기도 하고 목소리에 있기도 하며 인생에 대한 태도 같은 데에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성에게서 최초로 매력을 느끼는 첫사랑의 경우는 대개 짝사랑으로 끝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짝사랑은 일종의 꿈과도 같이 비현실적인 세계에서 머무는 경우가 허다하다.

오로지 한 사람만을 생각하기 시작하는 공상의 날개는 둥둥 떠다니면서 신비와 황홀경의 집을 짓는다. 그러한 관념은 그 나름대로의 공상의 집을 짓고 우상의 모형을 만든다.

상대방을 한없이 미화시키면서 신비의 베일을 드리우기도 한다. 상대방을 얼마든지 마음대로 상상하고 미화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관념의 세계에 있어서는 짝사랑을 할 때가 가장 안타까우면서도 아름다운 영상을 지닌다. 그것은 마치 구름같이 떠 있는 저만치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것은 거리를 두고 관조해야 하는 저만치의 세계이다. 그것은 쉽사리 잡히지 않는 저만치의 세계이기 때문에 더욱 아름다운 영상으로 남는지도 모른다.

짝사랑이라든지 성숙되지 못한 사랑은 실연으로 끝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실연의 상처는 아프고 쓰린 것이지만 상대를 아름다운 대상으로서 일생 동안 추억 속에 남아 있게 한다. 그러나 때로는 역설적인 표현을 시도하는 경우도 보게 된다. 소월(金素月)의 시에는 이 패러독스가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이다. 보낼 수 없다는 뜻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시이다. 보기가 역겨워 떠나가는 임에게 잘 가라고 꽃잎까지 뿌려주는 것은 정말 역설적인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보기에도 역겹다고 떠나는 임에게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면서 그 임이 가시는 길에 진달래꽃을 뿌려주면서 사뿐히 즈려밟고 가기를 바라는 그 마음 세계가 얼마나 고운가를 느끼게 된다.

물론 이러한 심리의 저변에는 원망스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원망과 분노를 직접적으로 쏟아버리기보다는 이를 여과해서 조금도 껄끄럽지 않고 편안한 시어(詩語)로 승화시켰다는 데에서 시의 예술적 가치가 살아나게 된다.

임이 자기를 버리고 떠난다 할지라도 자기는 임에게 앙탈을 부리거나 원망하지 않고 고이 보내드리면서 죽어도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는 표현은 죽도록 울 수밖에 없는 심정을 더욱 고조시키면서 역설적으로 뒤집어 강조한 표현이라 하겠다.

서울 밝은 달에/ 밤 들도록 놀다가 들어가 잠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어라/ 둘은 내 아내 다리고/ 둘은 뉘 다리인고./ 본시 내 아내지만/ 빼앗긴 걸 어찌하리요.

이 글은 신라시대의 처용가(處容歌)이다. 처용이 아내가 다른 사내와 간음을 하는 광경을 보고 춤을 추면서 부른 노래이다. 마음이 오죽이나 쓰리고 아프겠는가. 그러나 그는 원망과 분노를 눌러 끄면서 춤과 노래로 승화시켰다.

서부활극영화 같으면 총으로 쏘아 죽이고 끝장을 내었을 것이다. 그러나 처용은 역설적으로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불렀다. 이러한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이러한 역설은 넓은 도량을 느끼게 하는 역설이다. 비록 역설적인 표현이라 할지라도 이처럼 넓은 도량에는 머리가 숙여진다.

이와 같이 슬기로운 역설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킨다. 분풀이를 실컷 해도 시원치 않을 일을 춤과 노래로 승화한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남자가 이렇게 나오면 여자는 더욱 몸 둘 바를 모를 것이다. 적어도 이러한 경우 있어서 마음의 세계란 남자가 바다라면 여자는 그 바다에 떠있는 조각배에 불과하다.

패러독스를 동원해서라도 이처럼 도량이 넓을 수 있다면 그것은 해볼 만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성숙된 사랑을 보여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숙한 사랑을 제대로 하기로 들면 성낼 수 없고 증오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사랑의 정서가 넘치고 넘쳐 역설적인 어휘를 사용하게 된다.

본래는 자기의 아내였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겠느냐고 춤을 너울너울 추면서 노래를 불렀다는 처용의 경우는 이만저만한 사랑의 역설이 아니다.

더러는 처용의 행위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쓸개 없는 바보로 취급하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인격적인 요소는 동물적인 수심(獸心)이 제거된 상태를 말한다. 인간을 가리켜 반신반인(半神半人)이라고 하고 반인반수(半人半獸)라고도 한다. 즉 인간에게는 본능적인 욕구와 함께 이성적인 욕구가 있다. 이것은 인간은 신과 짐승의 중간 위치에 있다는 얘기도 된다.

사람은 우선 살아야 한다고 하는 그 생리적인 면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가 없거니와 보다 보람 있고 가치 있게 잘 살아야 한다고 하는 인격적인 면을 떠나서도 존재할 수가 없다.

생리적인 면을 가리켜 육체적이라면 인격적인 면은 정신적이다. 사랑에는 정신적인 사랑과 육체적인 사랑이 다 요구되지만 그 선후의 문제에 있어서는 정신적인 사랑이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 게 순서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정신적인 면보다는 육체적인 면, 인격적인 면 보다는 생리적인 욕구에 흐르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이것은 정상적인 순서가 아니다.

마음의 명령, 신경계통의 명령에 의해서 사지백체가 움직이듯 본질적으로 사랑의 질서는 정신이 우선하거나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정신과 육체, 마음과 몸이 조화와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그 가운데 사랑의 역설적 표현은 멋과 생기를 주게 된다.

그것은 스스로 잡다한 수심(獸心)의 찌꺼기를 불살라 버리고 새로운 차원으로 높여서 역설적으로 표현해 내는 눈물겨운 미소를 보여 주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의 그 역설적인 표현 뒤에 숨겨져 있는 애틋한 사랑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하는……

 

 

사랑의 진실

 

우리 집에서 약 50미터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상점의 옥상에서 여중생이 4명의 불량배들에게 강간당한 사건이 발생했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그 불량배들은 경찰에 연행되었으며, 그 여중생은 종적을 감추어 버리고 말았다.

배움의 길을 포기하고 집을 나간 그녀는 다방으로 술집으로 옮겨 다니면서 타락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되었다.

나는 어떤 허구적인 얘기가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를 왜 새삼스럽게 끄집어내고 있는 것일까. 아무래도 그러한 면에 대해서 하고 싶은 얘기가 너무도 많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바뀐다고 해서 모든 게 다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과학이라든지 의학 같은 것은 눈부신 속도로 발전해 오고 있지만, 윤리라든지 도덕 같은 것도 무조건 발전만 하는 것은 아니다. 향상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악화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만 보더라도 과학은 발전해 왔지만 윤리적인 면에서는 오히려 퇴보하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산업이 발달되고 경제가 성장되어 의식주가 향상되었는데도 사람들은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 않게 되었다.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욕구, 가령 소유욕 같은 것을 줄이는 데에 있다고 보는데, 오늘날의 청소년들은 자기의 소유욕을 줄인다고 하는 지혜를 터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돈을 많이 갖고 싶다거나 미모의 여성과 멋진 연애도 하고 또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려고 하는 자기 아집에 빠져 있는 것이다

자기의 욕심대로 돈을 거머쥐기가 그렇게 쉬운 일도 안다. 어떻게 해서 그것을 손에 넣었다면 과연 만족하고 행복하게 될까.

유감스럽게도 욕망이라고 하는 마음의 보자기는 채우면 채울수록 더욱 한없이 커지기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물질적인 욕망을 채우려고만 한다면 그 사람은 그 물질의 노예가 되어 일평생을 허덕이게 되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아귀가 바로 여기에 해당된다.

아귀들의 세계, 그 곳은 항상 굶주리고 늘 배고파하는 곳이라고 한다. 먹지 못해서 배고픈 게 아니라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배고픔에 허덕인다는 것이다. 이것은 욕망이 끝이 없는 사람들의 세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이라 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행복하게 보이는 데에도 정작 본인으로서는 늘 배고파하면서 허덕이게 되는 것이다. 재산이 많은 사람이 더 많은 돈을 탐하다가 빚에 쪼들리는 경우를 보게도 된다.

이 욕망이라고 하는 보자기는 돈 같은 것에만 커지는 것은 아니다. 남녀 간의 애정문제에서도 치열하게 일어나게 된다. 그것은 돈의 경우보다도 오히려 더욱 치열하게 일어나는 성질의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세상에서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자기 사람을 만든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길을 가다가도 보게 되는 멋진 사람, 텔레비전에 나오는 그 화려한 사람들……. 나비처럼 춤추며 꾀꼬리 같이 노래하는 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움켜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잠자리채로 나비를 채어 잡듯이, 그렇게 마음에 드는 사람을 나꾸어 채었다고 하더라도 뜻대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나의 느낌으로는 요즈음 청소년들이 사랑이라는 말을 너무도 흔하게 자주 쓰는데, 실제로는 사랑의 본질이라든지 그 가치를 모르는 것 같다. 앞에서 이미 나비 채는 얘기를 했지만, 잠자리채로 나비를 챌 때처럼 그렇게 개인주의적으로 자기의 욕구 충족만을 위해서 상대편의 마음은 아랑곳없이 자기 멋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데, 이것은 사랑의 기본도 모르는 처사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식의 결과가 바로 변심한 애인에게 앙갚음을 하려고 다방 같은 데에서 인질극을 벌이다가 자폭(自爆)하는 경우이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일어난 사건이지만, 그 이전부터 이미 이러한 결과의 가능성을 안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대부분 소녀시절에 잠자리채를 휘두르던 기억을 지니고 있다. 때로는 망에 걸려든 나비가 파닥거릴 때 떨어져 나가는 날갯죽지를 보고 안쓰러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을 갖고 싶은 욕심 때문에 놓아주지는 않고 가지고 놀다가 결국엔 죽게 만드는 것이었다.

인간의 문제를 곤충에 비길 수는 없지만, 자기의 욕심만을 채우다가 나비를 죽이는 것처럼, 개인주의 이기주의로 사람 잡는 경우를 보게 된다.

진정으로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언제나 상대방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주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리하여 상대방에게 편안함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다. 그러나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건 우정을 나누는 친구이건 간에 편안함을 주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남에게 편안함을 주기 위해서는 자기가 더 수고해야 하고 불편을 겪어야 하며 더 아파해야 하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약점이라든지 상대방의 아픈 부분을 콕콕 찌르는 사람은 사랑이 무엇인지조차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다. 사랑이 무엇인지조차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자기 자신보다도 남을 위해 주고, 그 상대방에게 언제나 편안함을 주려고 하다 보니까 사랑은 온유하고 오래 참는 것이요,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성내지 않고 너그러이 용서하는 것이라고 하는 주장이 타당하게 되는 것이다.

좀 더 쉽게 말해서 진정한 사랑이란 가령 아무것도 내어놓을 수 없는 토끼가 불 속으로 뛰어들면서 내가 구워지거든 잡수시라고 하는 그 우화의 교훈과 같이 자기희생이 따르는 갸륵한 마음 세계를 말한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거나, 잃고자 하는 자는 얻고 얻고자 하는 자는 잃는다는 여기에 무소유(無所有)의 소유(所有)로서, 작은 것을 버릴 줄 아는 사람만이 큰 것을 소유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을 지닌 사랑의 소유자에게 있어서는 남녀 간의 사랑은 물론이요 모든 관계에 있어서 천지가 녹아나는 법이다.

 

 

내 가슴 속에는

 

내 가슴 속에는 한 알의 능금이 있습니다. 능금 빛 소녀들의 능금 볼이 있습니다. 소녀의 능금 볼이 빨갛게 타오르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해가 저물도록 정신없이 소꿉놀이를 하던 화자(花子)라는 계집아이의 달아오르는 능금 볼엔 보조개 웃음마저도 상상의 세계에서 지워져가고 없습니다. 뜬구름 같은 세월의 아쉬움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망월(望月)마다 쥐불을 놓던 언덕에는 봄볕이 고입니다. 노고지리 우짖는 하늘 아래에서 나물을 캐던 춘자(春子)도 있습니다. 아지랑이 건너가는 언덕이 있습니다. 청라언덕을 달려가던 명자(明子)도 있습니다. 진주알이 구르는 그녀의 목소리가 있습니다. 꿈길에서 만나는 그녀의 그림자가 있습니다.

삐비를 뽑던 언덕에서 볼을 붉히던 첫사랑의 무지개 빛깔이 있습니다. 고추잠자리 떼를 지어 몰려오는 노스탤지어의 노을빛이 있습니다. 참꽃을 따 먹던 계집아이가 있습니다. 꽃잎을 먹으면 먹을수록 어지럽고 배가 고프기만 하던 그 가난한 어린 날의 꽃 대궐이 있습니다.

추억의 감주에 취한 채 꿈을 먹고 사는 나의 공주가 있습니다. 관(冠)이 없는 제왕(帝王)의 첫사랑이 있습니다. 나 어릴 적 추억의 보금자리에는 언제나 꿈의 궁전이 있습니다. 관이 향기로운 꽃사슴의 사랑얘기 속에는 부끄러움을 잘 타던 눈망울이 있습니다.

내 가슴 속에는 한 마리의 작은 파랑새가 있습니다. 그리움에 파닥이는 날갯짓이 있습니다. 죽순을 뽑던 아이들이 있습니다. 청명한 이슬을 털면서 대밭 속을 뛰어다니는 비비새 소리가 있습니다. 청명한 하늘을 찰랑찰랑 물동이를 이고 오시는 어머니가 있습니다. 어머니 숨결이 가쁜 부엌 바닥에는 꼬막 껍질이 박혀 있습니다.

따꿍총 소리와 함께 힘없이 고꾸라진 여인이 있습니다. 아궁이 속으로 도르르 구르는 피가 엉겨 붙고 있습니다. 하늘을 얼싸안은 물동이는 식물성 바가지의 물장구 소리가 있습니다.

살강에는 입이 큰 경천(敬天)의 사기그릇이 있습니다. 조상들의 때가 묻은 사발이 있습니다. 산나물이 담겨 있는 종발이 있습니다. 솥에는 구수한 숭늉이 있습니다. 시래깃국과 무밥이 따뜻하게 들어 있습니다.

부뚜막엔 입맛을 다시는 계집애가 있습니다. 검정치마 흰 저고리의 계집애가 있습니다. 벌써부터 애기 어머니 되었다던 옥분이의 물기서린 눈망울이 있습니다.

내 가슴 속에는 샛별같이 잠이 없는 눈망울이 있습니다. 시냇가 맑은 물에서 뛰어 노는 물고기가 있습니다. 물고기를 몰아 잡아서 천렵을 하던 서늘한 숲 그늘 속의 눈망울이 있습니다.

내 가슴 속에는 기왓장 조각이 있습니다. 쟁기 삽에 걸려 나온 수류탄 쪼가리도 있습니다. 떨어져 나간 역사의 파편이 있습니다. 치유를 기다리는 이의 슬픔이 있습니다. 속아 사는 이의 슬픔이 있습니다. 가난한 자가 찾아간 천국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고무신짝에 혈육의 살점을 주워 담던 노파의 눈물이 있습니다. 토란잎에 반짝이는 물방울이 있습니다. 물방울에 빛나는 햇살이 있습니다. 도시락에 가재를 잡아 담던 산협(山峽)이 있습니다. 우렁이를 잡던 점동이가 있습니다. 겨울바람에 찢기는 홑옷이 있습니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의 물결이 있습니다.

내 가슴 속에는 뻗쳐오르는 아침 햇살이 있습니다. 푸드득 솟아오르는 꿩의 눈가루 무지개가 있습니다. 밤마다 울던 부엉이 소리가 있습니다. 문풍지 소리에 흔들리는 등잔불 그림자가 있습니다. 낮은 소리로 우는 물레 소리가 있습니다. 벽으로 천정으로 날아다니는 물레 그림자가 있습니다. 그림자를 밟으며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소녀가 있습니다. 연필을 곱게 깎아 주던 소녀가 있습니다. 허리춤의 책보 속에서 달그락거리는 연필 소리가 있습니다.

내 가슴 속에는 아름드리 정자나무가 있습니다. 서늘한 그늘 밑에서 장기를 두는 촌로들의 구수한 얘기가 있습니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아라비안나이트가 있습니다. 옹달샘 가에서 물을 긷다가 눈 깜박 조는 사이에 천년이 갔다는 뜬구름 세월의 무상담이 있습니다.

내 가슴 속에는 순후한 이웃들의 고향 냄새가 있습니다. 순하디 순한 사람들의 사랑방 굴뚝 연기가 있습니다. 구들 목 온기로 살아가는 백의민족(白衣民族)의 마늘 냄새가 있습니다. 해질녘 고샅길을 꼬불꼬불 지나가노라면 구수하게 풍겨 나오던 시래깃국 냄새가 있습니다.

내 가슴 속에는, 눈밭에 찍힌 산토끼의 발자국이 있습니다. 어미 소를 찾는 목매기 울음 소리가 있습니다. 은비늘로 올라오는 은어 떼가 있습니다. 노고지리 우짖는 자운영 꽃밭이 있습니다. 논물에 담가 두었던 땡감이 있습니다. 아슬아슬한 천막 서커스단의 소녀가 있습니다. 무너진 성터와 봉화 둑이 있습니다.

아아, 내 가슴 속에는 송아지의 게으른 울음과 싱싱한 은어 떼, 환장한 자운영(紫雲英), 철모르던 땡감, 죽음의 줄 아슬아슬한 소녀, 주인 없는 성터와 봉화 둑에서 가물거리는 이들의 이름들이 있습니다. 깨어진 징 조각처럼 소리 없이 흩어진 그 소리 없는 여운이 언제까지나 울려 나오고 있습니다.

 

 

노을 연서戀書

 

노을이 물드는 강냉이 밭으로 떼를 지어 날아오는 고추잠자리를 보았다. 노을과 고추잠자리라고 하는 붉은 색채가 푸른 하늘 푸른 들녘으로 내려오면서 황홀한 보카시 효과를 나타내고 있었다. 푸른 하늘과 붉은 노을, 푸른 강냉이 밭과 붉은 고추잠자리의 대조저인 색채감각에서 나는 애상에 젖는 나를 돌아보았다.

수염들이 곱게 달린 강냉이 밭 위로 물드는 노을 속으로 몰려드는 고추잠자리 떼를 바라보노라면, 나는 내 인생의 봉화 둑에서 연기를 피워 올리는 마지막 불꽃의 절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날렵하면서도 투명한 고추잠자리의 날개와도 같이, 나의 인생은 투명해야 한다는 자각 같은 것을 갖게 된다. 멋있게 살아야 하지만 더럽게 살수는 없다는 자각이 밀려들게 되면 나는 목이 시린 하늘을 본다.

고추잠자리의 날렵하고 투명한 날개를 닮은 농부의 모시옷에서 나는 선풍(禪風)을 느낀다. 그 수백 수천의 날개가 강냉이 밭 위로 선회하면서 하늘을 온통 노을빛으로 물들일 때, 그리고 그 고추잠자리 떼가 난무하는 강냉이 밭 위로 노을이 내려올 때 나는 내 인생의 불꽃을 생각했다.

나는 불꽃처럼 그렇게 활활 타보았는가. 나는 얼마나 순수하게 참여하면서 청춘의 정열을 쏟아 나를 아낌없이 태웠는가. 타다가 남은 희나리, 그런 깜부기는 아닌가.

미친 듯이 얽혀 돌아가는 고추잠자리 떼의 절정, 그것은 차라리 한을 승화시킨 슬픔이요 아픔으로 보였다.

하늘이 푸르면 푸를수록 초침같이 시간을 야금거리는 목이 시리고, 노을이 붉으면 붉을수록 노스탤지어의 손을 흔들 때처럼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은 웬일일까. 목이 시리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계절에 어쩌자고 고추잠자리는 떼로 몰려와서 천방지축 쏘다니는 것일까. 술 취한 몸짓으로 노을 속에 빨려드는 고추잠자리 떼의 군무(群舞), 그것은 정한(情恨)을 안으로 삼켜 삭이고 춤으로 승화시킨 우리 겨레의 안쓰러움 같은 것이다.

 

노을은 戀書다.

산불로 오시는 님에게

송두리째 바쳐 드리는

수박 속 발그레한 귓속말이다.

그 빛깔

홀로 보기 아까워

은근한 항아리에 은밀히 재워둔

꽃 자주 빛,

잘 익은 포도주다.

눈웃음 해실해실

한 모금의 희열로 사근거리는

순연(純然)한 귓속말.

둘이 마시다 하나 잠들어도 모를

입술 속 연연(戀戀)한 불기운이다.

-「노을」-

 

노을 속으로 빨려드는 고추잠자리의 몸짓, 그것은 언젠가는 내가 이 세상을 하직하고 떠날 때 그 동안의 인연들에 인사하고 돌아서는 거릿제(路祭)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저 새장에 새가 날듯, 내 영혼이 이 육신을 벗고 저승으로 떠나게 될 때, 속진(俗塵)은 다 빠져나가고 해맑은 영혼으로 승화되어 오르는 그 슬픔과 희열의 하모니를 보는 것만 같다.

주여, 내가 당신께로 가게 될 때에는, 푸른 하늘을 열어 주시고, 그 한 자락은 노을로 물들게 하소서.

주여, 내가 당신께로 가게 될 때에는, 노을 지는 들녘을 열어 주시고, 고추잠자리 같은 영혼으로, 푸른 하늘과 푸른 들 사이를 붉게 붉게 달려가게 하소서.

 

 

 

추억의 오솔길

 

내 추억의 오솔길에는 축음기 소리가 있다. 축음기의 태엽이 더디게 풀어지다가 빨리 풀어지면서 울려나오는 완급의 목소리가 있다.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오오오히야아앙-'하고 울려나오다가 갑자기 빨라지면서 '언덕 위에 초가삼간 그립습니 초가삼간 그립습니 초가삼간 그립습니'하고 반복되는 그 숨넘어가는 고갯마루가 있다.

태엽을 감을 때의 그 삐거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울려오는 '초가삼간 그립습니' 소리는 향수의 손을 흔들면서 눈물로 마중을 나온다.

어른들은 호기심 팽팽한 눈으로 지켜보는 나에게 축음기 속의 목소리 고운 소녀가 물을 마시지 못해서 딸꾹질을 하는 거라고 했었지……. 나는 아무리 키가 작은 소녀라 할지라도 그 상자 속에서 노래를 부르려면 아무래도 몹시 답답할 거라는 생각을 했었지…….

그 때, '초가삼간 그립습니 초가삼간 그립습니' 하고 바늘 밑에서 돌던 축음기판은 같은 코스를 몇 번이고 되풀이했었지만, 우리들 인생이란 그렇게 몇 번씩이고 다시금 반복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인생이란 아무래도 일회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생의 나그네는 한번 지나친 길을 다시 밟을 수가 없다. 인생의 행로란 고장 난 축음기판처럼 몇 번이고 되풀이할 수가 없다. 다만 할 수 있는 길은 회상의 축음기를 틀어놓고 추억하는 길 뿐일 것이다.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인생이란 한 번 가면 다시 못 오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할 수만 있다면 과거로 되돌아가서 잘못 된 인생을 새로이 시작해 보고자 한다. 소년시절이나 청년시절로, 아니면 10년 전이나 20년 전으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허송세월하지 않고 보람 있게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인생길이란 그 누구도 되돌아가서 다시 걸을 수는 없다. 다만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러한 자각이 들었을 때부터 10년 전 혹은 20년 전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는 기분으로 사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

내 추억의 오솔길에 재생적 상상의 향연이 열린다. 재생적 상상, 그것은 내 인생의 토막 난 필름들이다. 나는 재생적 상상을 통하여 내 심층심리 어딘가에 깔려있는 필름들을 엮어서 비춰보게 된다. 조각난 필름들을 다시 비춰보는 시간이야말로 내가 가장 아름답게 누리는 산책의 시간이다.

추억의 오솔길을 거니는 산책의 시간이란, 지나온 나의 인생노정을 되돌아보는 시간이다. 흘러온 여울목을 거슬러 보는 회억(回憶)의 길, 그것은 결국 자아성찰의 길이요 자기 확인의 길이다.

어떠한 배역으로서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정리하는 길이다. 그것은 칭찬받을 일과 비난받을 일의 상쇄작용을 통하여 결국엔 무엇이 남을 것인가를 호젓이 생각하게 하는 길이다.

내 추억의 오솔길엔 감주를 제공하는 주막이 있다. 몰인정에 목이 타는 나에게 갈증을 풀어주는 생명의 감주가 있다. 추억하는 감주에 취해 사는 내 의식세계엔 이야기의 필름 조각도 많다.

나는 아무렇게나 버려졌던 기억의 필름조각들을 주워 모아 회생시키기를 좋아한다. 그 회생은 일회적인 인생을 그 이상의 인생으로 성숙시켜 주는 마력을 지니기 때문이리라.

 

눈꽃이 나를 흔드네.

이러지 말고

정말 이러지를 말고

시골로 내려가라고

날 흔들어대네.

이러지 말고

정말 이러지를 말고

청국장 끓는 고향으로

내려가라네.

장독대와 초가지붕과

배추밭 고랑 위로

수만리 꿈을 물어 온

눈꽃이 날 흔들어 깨우네.

-「눈잎」-

 

추억의 오솔길, 그것은 내 마음의 고향에 떠오르는 그 호젓한 산책길과도 같은 것이다. 내가 항상 그리워하는 마음의 고향, 그 호젓한 길은 인생의 나그네가 쉬어가는 주막이 있는 곳이다.

주막의 술독에서 술이 괴는 것처럼, 내 인생이 익어가는 곳이다. 누룩이 썩는 아픔을 다스리면서 내 인생이 곱게 익어가는 곳이다. 내 인생이 익어가는 주막에서 호롱불이 깜박일 때, 마음 밭엔 벌써부터 별떨기가 반짝반짝 모여들기 시작한다.

보석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그것은 내 가슴에 온갖 수를 놓으면서 편안한 곳으로 안내해 준다. 이렇게 되면 내 가슴 속에서는 벌써부터 축음기 소리가 난다. 태엽이 더디게 풀어지다가 빠르게 풀어지면서 울려 나오는 완급의 목소리, 그 앳된 목소리가 풀려 나온다.

'서산 너머 햇님이 수움바아꼬옥지이일 하알때애며어언 수풀 속의 새집에는 촛불 하나 수풀 속의 새집에는 촛불 하나 수풀 속의 새집에는 촛불 하나' 하고 반복되어 나온다.

 

여행용 시계의 태엽을 감다가

풀어지는 목숨을 감고 싶어지는

아이스크림 같은 시간을 핥아 보다가

천 년 같은

나의 하루를 야금거리다가

문득문득 올려보는

목이 시린 밤하늘에는

아직도 젊은 별이 반짝이는데

스쳐간 청춘의 바람 한 자락

발에 밟히는 가랑잎 소리……

포도주를 나팔 불다 비틀거리는

마지막 지는 노을 같이

목숨의 벼랑 가물가물

바람 따라 흩어지는 가랑잎 소리……

가슴에 바스러지는 가랑잎 소리는

하늘 한 자락 오려 타고

이쪽과 저쪽을 넘나드는 소리……

-「가랑잎 소리」-

 

내 목숨의 태엽이 완전히 풀어지기 전까지는 아무래도 나는 추억의 나래를 펴고 몇 번이고 오솔길을 찾게 될 것이다. 태엽을 감는 생활이 아무리 삐걱거린다 할지라도, 나는 이 목숨이 다 풀어지는 그 날까지 추억의 감주에 취하여 노을 같은 그리움으로 살아갈 것이다. 노스탤지어의 손을 흔들며 몇 번이고 되풀이하는 축음기의 반복음처럼…….

 

고향이 그리운 날 밤엔

호롱에 불이라도 켜 보자.

말 못하는 호롱인들

그리움에 얼마나 속으로 울까.

빈 가슴에

석유를 가득 채우고

성냥불을 붙여 주자.

사무치게 피어오르는 향수의 불꽃

입에 물고

안으로 괸 울음 밖으로 울리니

창호지에 새어드는 문풍지 바람

밤새우는 물레소리 그리워 그리워

졸아드는 기름 소리에

달빛도 찾아와 쉬어 가리니……

-「그리움」-

 

 

자운영 환상

 

누가 나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빛깔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없이 자운영(紫雲英) 꽃빛을 말할 것이다. 그가 나에게 그 이유를 묻는다면, 나는 나도 모르게 어쩐지 좋아서 무조건 사랑하게 되었노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가 나의 이 '어쩐지' 좋다는 말에 코웃음을 치고 돌아선다고 해도 하는 수 없는 일이다. '왜'와 '어쩐지'의 세계, 그것은 객관과 주관의 성질로서 과학과 예술을 단적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어쩐지'의 영상에는 간단히 설명할 수 없는 심오한 예술이 있고 철학이 있다. 그것을 간단히 설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설명하려 할 때는 이미 그가 지닌 바의 생명을 잃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흔히들 꽃 속의 향기는 생각하면서도, 꽃 속의 철학이나 꽃 속의 사상은 감지하지 못한다. 대개 사상 하면 어떠한 이데올로기나 체제의 사상만을 생각한다.

그러나 사상이란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는 어디에나 다 깃들어 있기 마련이다. 꽃에는 꽃의 사상이 있고, 숲에는 숲의 사상이 있다. 더욱이 이러한 사상이야말로 인간의 본질과도 깊은 관계의 것임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따라서 나는 자운영이라는 사물을 통해서 그와 관계되어진 나를 확인하고 싶고, 나 속에 내재되어 있는 자운영 사상을 끌어냄으로써 현대 도시의 메커니즘에 끌려가는 비본질적인 나를 본질적인 순수의 나로 회귀(回歸)시키고 싶은 것이다.

자운영은 노스탤지어의 꽃이다. 어릴 적 시골길 양쪽 논배미 가득가득 화사하게 어우러진 자운영 꽃밭을 연상하게 되면, 나는 지금도 향수에 미친다.

얼근히 취한 저녁의 노을 밭을 정신없이 바라볼 때처럼, 나는 지금까지도 잊지 못한 채 못 견디게 그 피어나던 자운영 밭을 향수 사무치는 그리움의 눈으로 바라볼 때가 있다.

나의 신비로운 환상의 세계, 그것은 절정으로 타오르는 화신(花神)의 빛깔이었다. 프리즘의 빛살로 굴절하는 환상적인 꽃잎의 사상에서 인생을 배운다. 정겹게 피었다가 꽃답게 썩어가야 하는 내 인생의 꽃빛 술맛을 배운다.

그날, 우리들은 그 벌떼 잉잉대는 자운영 밭에 파묻혀서 그 꽃빛만큼이나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여기에서의 '우리'라는 복수(複數)는 초등학교 시절의 같은 반 아이들, 가시내와 머슴아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꿀벌들이 잉잉거리는 자운영 꽃밭에서 나는 화자라는 이름의 계집애의 손목에 자운영 꽃시계를 만들어 채워 주었으며, 그녀는 꽃목걸이를 만들어서 나의 목에 걸어주던 그 황홀하고 부끄럽던 추억을 나는 지금까지 간직해 왔다.

어느덧 옛날이 되어버린 그 시절이 그립다. 자운영이 그리워지는 만큼 그녀가 그립고, 그녀가 그리워지는 만큼 자운영이 그립다. 모래알같이 많은 사람들, 별떨기 같이 많은 사람들, 그 속 어디에선가 그녀는 살아있을 것이다.

별이 반짝이듯이 그녀는 반짝반짝 모래알 같은 이야기를 남기면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추억은 아름답다고 하는 말을 진부한 말이라고 넘겨 버리기에는 뭔가 아쉬움과 함께 여운이 남는다.

자운영, 그것은 콩과의 2년초 식물로서 봄에 홍자색(紅紫色) 꽃을 피우며, 녹비용(綠肥用)으로 많이 재배했었던 20년 전을 기억할 수 있는 30, 40대 이상 되는 연령층의 사람들에게는 향수심을 안겨 주는 꽃임에 틀림이 없다.

자운영이라는 말을 듣게 되는 순간, 사람들은 나름대로 추상(追想)의 날개를 펼치게 될 것이다. 못자리를 밟을 때라든지, 모를 심기 위해 써레질을 할 때부터 논배미에 밟혀 썩어지는 자운영 꽃의 사상에서 나의 영혼, 나의 인생, 나의 시는 더욱 화사한 빛깔로 향토정서의 향기를 장만한다.

 

나는 그녀에게 꽃시계를 채워 주었고

그녀는 나에게 꽃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꿀벌들은 환상의 소리 잉잉거리며

우리들의 부끄러움을 축복해 주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만남은 이별,

보자기로 구름잡는 꿈길이었다.

세월이 가고

늙음이 왔다.

어느 저승에서라도 만나고 싶어도

동그라미밖에 더 그릴 수가 없다.

이제는 자운영을 볼 수 없는 것처럼

그녀의 풍문조차 들을 수가 없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나의 추억 속에 살아 있는

그녀의 미소,

눈빛과 입술이다.

나는 그녀에게 사랑을 바쳤고

그녀는 나에게 시를 잉태해 주었다.

-「자운영」-

 

옛날에는 그렇게 많던 자운영이 지금에 와서는 볼 수가 없다. 그 씨앗마저 어디로 사라졌는지 흔적도 없다. 다만 상상으로 그려보는 나의 정신세계에서만 피어있을 뿐이다.

자연의 풍류를 즐길 줄 알던 사람들이 인공의 상가에 눈이 밝아진지 이미 오래다. 요즈음 세상은 원두막에서 참외를 헤아리던 사람의 순박한 눈빛 같은 것은 찾아볼 수도 없게 되었다. 그 대신 주판알 같은 계산의 눈을 반짝이는 모양을 흔히 보게 된다.

목장 같은 1차 산업보다는 우유공장 같은 2차 산업이 수익성이 높고, 그것 보다는 분배되고 소비하는 곳의 3차 산업이 수익성이 더 높기 때문에 전방연관효과(前方聯關效果) 후방연관효과를 생각하게 되고, 경제적이나 합리적이라는 등의 무슨 적적(的的)이 판을 치게 되었다.

삶의 목적과 수단, 이 목적과 수단이 전도(顚倒)된 생활에서 현대 지성인들의 심령에는 불안과 공포의 압박감이 짙어가고 있다.

2차 산업이나 3차 산업의 효과로서 비료가 쏟아져 나오니까 자운영으로 거름을 하는 식의 전근대적인 불편을 외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불편을 선택할 사람은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많은 사람은 예의 편리를 쫓다가 더 많은 심령의 불편을 겪게 되었다.

자운영을 썩힌 거름이라든지, 퇴비를 외면한 채 화학비료만을 좇다가 농토는 산성화되고 메말라져서 토질을 개량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악화되었다. 화학비료만을 즐겨 쓰다가 그 좋은 맛을 잃어버린 게 얼마나 많은가. 서늘한 원두막에서 단맛을 즐기던 그 개구리참외의 맛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여호와의 신과 돈의 신, 이 중에서 돈의 신을 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돈이란 태양의 직사광선을 외며하고, 비닐하우스로 대량생산을 꾀해야 벌 수 있다고 하는 돈의 신을 신봉하게 되었다.

비닐하우스로 시간을 단축하여 대량생산을 시도하여 재미를 보는 동안에 사람들은 날로 심약해지게 되었다. 그래서 창백한 도시는 역시 창백한 약국의 형광등 불빛 아래서 기침을 콜록이는 것이었다. 그가 기침을 콜록이면 콜록일수록 건강하던 과거가 더욱 그리워지는 것이다.

늙기도 전에 벌써부터 시들시들 겉늙어 가는 도시를 바라볼 때마다 나는 싱싱하고 화사하게 젊기만 하던 지난날의 그 아름답던 자운영 피던 계절이 더욱 그리워지는 것이다.

자운영의 계절,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꿈이요 생명이었다. 짧은 여름밤의 꿈일수록 못내 아쉬워지듯이 꿈을 꾸다가 못다 꾼 꿈일수록 더욱 그리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숙명인지도 모른다.

자운영 꽃빛으로 수놓아진 나의 소년시절은 너무도 빨리 흘러가 버렸다. 언젠가 내 늘그막이 되어 고향에 가게 될 때에는 그 자운영 꽃을 볼 수 이었으면 좋겠다.

 

 

연날리기

 

나의 연은 하늘높이 날았다. 내가 날을 수 없는 하늘을 나의 연은 숫한 바람을 타고 잘도 날았다.

나는 연이 하늘 저 멀리 날을 수 있도록 연줄을 느슨하게 늦추어 주곤 하였다. 그러면서도 연줄을 가끔씩 잡아당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연줄을 당겨주지 않으면 그 연은 하늘 높이 솟지 못하고 아래로 처져서 냇물로 떨어지지 않으면 나뭇가지에 걸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연을 하늘 높이 띄우기 위해서는, 연줄을 느슨하게 풀어주다가도 다시금 팽팽하게 감아 주고, 잡아당기면서 감았다가는 다시금 풀어 주어야 했다.

나의 연이 나에게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하늘 높이 솟아오르면 솟아오를수록 그 연은 점점 더 거세어지는 바람을 만나게 되었다. 한 곳에서만 부는 바람이 아니었다. 주변 여기 저기에서 불어오는 역풍은 나의 연을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먹이를 물고 끄는 물고기들처럼 창공을 유영(遊泳)하는 연을 괴롭혔다. 바람은 연을 끌어올리기도 하고 끌어내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바람에 걸릴 때마다 나의 연은 마치 약 먹은 피라미처럼 뱅뱅 맴돌기도 하고 곤두바질을 치기도 하는 것이었다.

이럴 때마다 나는 간이 콩알 만해져서 연줄을 조심조심 늦춰주곤 하였다. 내가 줄을 늦춰줄 때 연은 한걸음 물러서면서 자세를 가다듬게 되었다.

나의 연은 하늘 높이 오를수록 나에게서 멀리 떨어지고 싶어 하였다. 역풍(逆風)에 곤두박질을 치면서도 자꾸만 멀리 날아가고자 했다. 이것은 연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인지도 모른다.

멀리 날아가고자 하는 연과 그 연을 붙들고 있는 나와의 관계는 아주 가는 줄이 매개하고 있었다. 그 가는 연줄을 쥔 나의 손놀림에 의해서 절묘하게 움직여지고 있는 연은 바로 나의 전부였다. 나의 꿈, 나의 소망, 나의 사랑이었다. 그러한 까닭에 사랑으로 연결시켜 주는 연줄은 바로 나의 핏줄과도 같은 성질의 것이었다. 나의 온몸의 피가 한 가닥의 줄을 통해서 연에게 수혈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의 연이 학처럼 비상할 때 나도 함께 비상한다. 연의 하늘은 바로 나의 하늘이요, 연의 비상은 바로 나의 비상이었다. 연은 곧 내 삶의 의미가 되어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연은 바람의 숙명이었다. 연에게 있어서 바람은 삶이면서 죽음이기도 했다. 연은 바람을 타고 날았고, 그 바람에 구겨졌다.

동네 아이들은 연싸움을 걸어왔다. 아이들의 연줄에는 풀을 먹인 유리가루가 묻어있었지만,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두 개의 연은 서로 목을 감고 상대편의 연줄을 끊으려고 엉클어졌다.

어느 한 순간, 나의 연줄은 끊어지고, 연은 멀리멀리 날았다. 비로소 자유를 찾은 나의 연은 원이 없이 날았다. 나는 나의 곁을 떠나고 싶어 하던 그 풍연(風鳶)의 자유를 보았다.

마을 아이들이 연을 잡으려고 논두렁 밭고랑 할 것 없이 허겁지겁 뛰어가고 있었지만, 나는 그 연을 잡을 생각도 없이 바람에 날려가는 연을 망연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연의 자유, 그것은 나와의 단절이었다. 마지막 줄이 끊겨진 그 순간부터 우리의 인연은 끝났다. 그것은 날아가는 순간의 삶이면서 그 이후의 죽음이었다.

줄이 끊겨진 연, 날아가는 연, 달아나는 연, 그것은 환희이면서 절망이요, 시작이면서 끝이었다. 그것은 순간과 영원의 숨바꼭질과도 같은 것이었다.

세상을 살다 보면, 대추나무 연걸리듯 묘한 인연으로 얽히고 설킬 때가 있다. 때로는 기쁨으로 얼키다가도 때로는 슬픔으로 얽히는 것이었다.

때로는, 연을 그렇게 날렵내듯, 얽혔던 인연을 자르고 멀리멀리 떠나보낼 때가 있다. 나의 연이 하늘 높이 날아오르기를 바라듯, 행복을 빌면서 떠나보낼 때가 있다.

그러나 풍편에 들리는 소리는 나를 슬프게 했다. 떠난 이의 뒤에서 헛웃음을 치며 잔을 기울여야 했다. 아픈 가슴을 짜깁기하며 잔을 기울여야 했다. 구멍 뚫린 가슴에 울며울며 쐐기를 질러야 했다. 망각의 술을 기다림의 잔으로 들이켜야 했다.

 

내가 바라볼 때 너는 피어났고

내가 외면할 때 너는 시들었다.

나의 눈길에 너는 불이 붙었고,

나의 손길에 너는 악기처럼 소리를 내어

꿀벌들을 불러 모았다.

네가 잉잉거리는 벌떼들을 불러들일 때

별은 빛나고,

내가 너의 꿀물에 젖을 때

달은 부끄러워했다.

네가 피어날 때 나는 살고

네가 시들 때 나는 죽었다.

-「꽃잎」-

 

나의 연이 하늘 높이 날기를 바랐는데, 하늘 멀리 날아가고 싶어 하는 대로 제발 멀리 날기를 바랐는데 연은 한계가 있었다. 연은 자유가 구속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는 이미 망가져 있었다. 다시는 날아오를 수 없는 연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늘 저 멀리 나는 연을 따라가던 아이들이 돌아왔을 때 나는 형편없이 망가져버린 나의 연을 보았다. 아이의 손에 들리어진 나의 연, 나뭇가지에 걸려 찢겨지고 부러진 나의 연, 물에 젖은 나의 연은 나를 아프게 하였다.

나의 관심은 연에 있었고, 연의 관심은 하늘에 있었다. 그러나 연은 언제까지 하늘에서 유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연의 꿈은 하늘에 있었지만, 그가 어김없이 돌아온 곳은 땅이었다.

하늘을 꿈꾸며 비상하다가 망가져 돌아온 나의 연, 그것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처절한 비극의 상징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은 연의 줄과도 같은 심정의 인연을 사랑의 끈으로 생각하지만, 싫어하는 사람은 그것을 구속의 사슬로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 연의 줄이 자기의 향상을 위해 보호해 주고 육성해 주는 따뜻한 손길로 느끼지만, 미워하는 사람은 그것이 오히려 자기를 구속하고 억압한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그는 그로부터 멀리 떠나게 되지만 결국은 자유가 구속임을 깨닫게 된다. 어느 누구로부터 간섭받지 않는 자유가 좋을 것 같지만 그것이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보호받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공기나 햇빛의 고마움을 모르는 것처럼, 가장 가까운 이의 손길에 대한 고마움을 알지 못한다. 자유롭기 위해 그 손길을 벗어난다 해도 그것으로 행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다시 되돌아보게 된다.

망각의 술을 마시기도하며 기다림의 잔을 기울이기도 한다. 인간이란 인간과의 관계를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 그 만남을 떠나서는 사랑의 기쁨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망향의 노래

 

나의 아버지는 내 나이 16세 되던 해에 돌아가셨다. 그리고 그 이듬해엔 누이동생이 폐렴으로 죽었다. 연거푸 두 죽음을 보게 된 나는 허탈에 빠질 겨를도 없이 중학생의 몸으로 아버지 대신 가정을 책임져야 했다. 다 늙으신 할머니와 그저 순하기만 하신 어머니, 그리고 철모르는 어린 동생들을 책임지지 않을 수 없는 몸이 되고 말았다. 정말 하루아침에 엄청난 무게의 십자가를 지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나는 이때부터 어린 나이에 돈을 벌어야 했고, 가정 살림을 꾸려가면서 고학을 해야 했다. 새벽부터 일어나 신문배달을 했고, 학교에 다녀온 후에는 나무장사를 하였다. 그 당시 내 고장에서의 나무장사란 산판에서 실어온 원목의 껍질을 벗겨 파는 일이었다.

그때, 나의 고민은 그런 일들이 어린 몸에 몹시 힘들어서라기보다는 인생과 우주에 관한 실존적인 고민이었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할 거신가. 꿈속에서 자주 뵙게 되는 나의 아버지는 과연 저승에 계시는 것일까. 아니면 혼비백산(魂飛魄散)하고 만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생계를 이어가는 것만으로 만족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나는 무엇인가 할 일이 있어서 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으로 여겨졌다.

언젠가는 한 밤 중에 아름드리 원목을 퍼 내리기 위해서 군용 트럭에 올라간 일이 있었다. 나는 그 원목더미 위에서 피곤한 몸을 쉬는 동안에 가까운 숲속에서 울려오는 새소리를 듣게 되었는데, 신비로운 그 소리는 나로 하여금 사색하게 하고 고민하게 하였다.

그 밤새 소리를 듣는 동안에 나는 "저 새들도 저렇게 아름다운 소리로 노래하는데, 나는 도대체 뭔가" 하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잇달아 일어났다. 그것은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새만도 못한대서야 되겠느냐는 생각이었다.

이때부터 나의 실존적인 고민은 더욱 심화되어 갔다. 나는 너무 조숙(早熟)했다. 어찌 보면 조달(早達)했고 조로(早老)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세상이 싫어졌다. 살기 좋은 곳으로 이사를 가서 살고 싶었지만, 이 인간들의 세상 말고 다른 세상이란 있을 수 없었다. 나는 염세를 느낀 나머지 방황하게 되었다. 소월(金素月)처럼 아름다운 시를 남기고 죽어야겠다는 허무적 센티멘털에 사로잡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책임을 물려받은 나로서는 죽고 싶지만 죽을 수도 없었다.

나는 삶과 죽음의 문제, 사랑과 미움의 문제로 종교와 철학과 문학의 세계를 넘나들면서 섭렵하였고, 학업을 계속하여 외국으로 유학의 길을 떠났으며, 문단에 데뷔한 이래 30권의 저서를 갖기에 이르렀다.

나는 시인이 되기 위해서 시를 쓴 일은 없다. 무엇인가 얘기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그 무엇, 그 어떤 무엇이 나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하였다. 나는 내 마음 속에서 나로 하여금 노래하게 하는 그 무엇이 있다고 보는데, 그 정체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깊은 밤 숲속에서 새들로 하여금 지저귀게 하던 그 어떤 존재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고향의 밤 새 소리를 잊을 수가 없다. 추운 겨울이면 아침마다 솔가리불로 밥을 짓는 아궁이에 돌을 구워 가지고 헝겊에 싸주시던 어머니, 눈에 눈물이 글썽해 가지고 어이구 내 새끼 춥것네 어쩌고 하시며 등을 톡톡 두들겨 주시던 어머니가 그립다.

내가 유학을 떠나던 날 비행기 속에서 먹으라고 차시루떡과 송편을 싸주시던 그 시골 어머니가 불현듯이 그리워지는 까닭은 웬일일까.

 

어매여, 시골 울엄매여!

어매 솜씨에 장맛이 달아

시래깃국 잘도 끓여 주던 어매여!

어매 청춘 품앗이로 보내 들녘

가르마 트인 논두렁길을

내 늘그막엔 밟아 볼라요!

동짓(冬至)날 팥죽을 먹다가

문득, 걸리던 어매여!

새알심이 걸려 넘기지를 못하고

그리버 그리버, 울엄매 그리버서

빌딩 달 하염없이 바라보며

속울음 꺼익 꺼익 울었지러!

앵두나무 우물 가로 시집 오던 울엄매!

새벽마다 맑은 물 길어 와서는

정화수 축수축수 치성을 드리더니

동백기름에 윤기 자르르한 머리카락은

뜬구름 세월에 파뿌리 되었지러!

아들이 유학을 간다고

송편을 쪄가지고 달려오던 어매여!

구만리장천에 월매나 시장허꼬!

비행기 속에서 먹어라, 잉!

점드락 갈라먼 월매나 시장허꼬!

아이구 내 새끼, 내 새끼야!

돌아서며 눈물을 감추시던 울엄매!

어매 뜨거운 심정이 살아

모성의 피되어 가슴 절절 흐르네!

어매여, 시골 울엄매여!

어매 잠든 고향 땅을

내 늘그막엔 밟아 볼라요!

지나는 기러기도 부르던 어매처럼

나도 워리 워리 목청껏 불러들여

인정이 넘치게 살아 볼라요!

자운영(紫雲英) 환장할 노을진 들녘을

미친듯이 미친듯이 밟아 볼라요!

-「망향가」-

 

서울에 살면서도 내가 항상 그리워하는 마음의 고향에는 새벽마다 물동이에 물을 이고 오시는 어머니가 있다. 어머니께서 하늘에 기원하시던 경천(敬天)의 정화수가 있다. 산나물이 담겨 있는 종발이 있고, 솥에는 구수한 숭늉이 있다.

시래깃국을 잘도 끓여 주시던 어머니께서는 내가 밤새도록 지지껍질(소나무 껍질, 땔감)을 벗기고 있으면 밤참을 해내오곤 하셨는데, 그 고생스러웠던 시절이 지금엔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눈에 선해 온다.

나의 어머니는, 나의 고향은, 내가 금의환향(錦衣還鄕)하는 게 아니라 빈털터리로 간다 할지라도 업신여기는 법이 없다. 잘났건 못났건, 출세를 했건 하품(下品)에 머물건, 참된 사람이 되어 돌아오건 죄인이 되어 돌아오건 간에 선별하여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폭넓은 아량으로 무조건 따뜻이 받아들인다.

내가 성공으로 흥기(興起)할 때나 실패로 좌절할 때나, 어느 경우에나 언제든지 받아들이는 고향에는 추억의 필름 조각들이 얼마든지 널려 있어서 가는 곳마다 빛을 발하는 것이었다.

자운영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자운영 밭에서 꽃목걸이를 엮어서 걸어 주던 그 소녀의 능금 볼이 아련히 떠오른다.

나는 꽃시계를 만들어 그녀의 손목에 채워 주었었는데, 부끄럼 타던 그녀의 능금 볼 같이 빨갛게 타오르는 보조개 웃음이 아슴푸레 피어난다.

고향에 가게 되면 나는 그 웃음꽃을 떠올리기도 하고, 풀벌레 소리를 발길로 차면서 쓸쓸히 거닐기도 한다. 고향은 어머니와 같지만 인생은 뜬구름 같은 것이기에……

 

 

보리밭 밟기

 

조훈(早春)이 오면 보리밭을 밟게 된다. 겨우내 얼어서 흙과 함께 떨어져 있는 보리의 뿌리를 흙과 함께 다져지게 하기 위해서 밟아 주는 것이다.

보리는 밟아 줘야 산다고 하는 역설적(逆說的)인 이야기가 철학적 사색을 끌어 온다. 농촌에서 보리밭을 밟는 이야기를 생각하면 인생의 깊은 의미가 느껴져 온다. 겨울이 추우면 추울수록 뿌리를 더욱 견고하게 다져주지 않으면 안 된다.

어릴 때의 생각과 어른이 되어서 어린아이를 거느리게 될 때의 생각은 전혀 달라지기 마련이다. 어린 시절에는 선생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월사금인가 사친회비를 내놓으라고 부모님의 애간장을 태웠다. 주어야할 돈을 빨리 주지 않으면 금방 숨이라도 넘어갈 듯이 자지러지게 졸라대어서 어김없이 가져다가 바치던 때가 있었다.

그러다가 조금 더 지나서 후원회비인가 기성회비인가를 내던 시절에는 미리 알아서 주기만을 바랄 뿐 여간해서 돈 타령 같은 것을 하지 않았다. 어쩌면 할 수도 없게 된다고 해야 옳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심정적 성장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홍시처럼 아름답게 익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자녀의 사랑, 이 세 사랑을 체휼함으로써 전인적인 인격으로 도야(陶冶)되어 가는 것이리라.

퇴근길에 골목으로 접어들면서 아이들에게 줄 과자를 산다거나, 잠든 어린 것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불을 덮어주는 행위 등을 유발시키는 경건한 심경은 체질적으로 익어가는 인격을 의미한다.

 

보리를 밟으면서

언 뿌리를 생각한다.

아이들이 아비에게 대들 때처럼

시린 가슴으로

아픔을 밟는 아픔으로

해동(解凍)을 생각한다.

뿌리를 위하여

씨알이 썩는 것처럼,

사랑할수록 무능해지는 것을

나는 안다.

내 아이들이 대어들 듯,

어릴 적 내가 대어들면

말을 못하시고

눈을 감으시던 아버지처럼

나 또한 눈을 감은 채

보리를 밟는다.

잠 든 어린 것 옆에

이불을 덮어 주며

눈을 감는 것처럼,

나는 그렇게 눈을 감은 채

온종일 보리를 밟는다.

-「보리를 밟으면서」-

 

사랑 중에서 가장 진한 사랑은 부모의 사랑이요, 심정 중에서 가장 뜨거운 심정은 역시 부모의 심정이다. 부모의 사랑, 부모의 심정은 펠리칸과 같은 사랑이요 심정이다. 펠리칸의 전설, 그것은 죽음으로 새끼들을 살린 어미새의 이야기다.

옛날 어느 해는 기근이 들어 펠리칸 새들이 굶어 죽게 되었다고 한다. 어미 펠리칸은 바다 위를 헤매며 먹이를 구하려 했으나 먹이는 끝내 구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새끼들이 입을 벌리며 배고파 아우성치는 것을 보게 된 어미 펠리칸은 자기의 배를 가르고 창자를 끄집어내어서 새끼들에게 잘라 먹이고는 숨을 거두었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사랑이 우리들 가정이나 사회에서 오가게 될 때에는 희망이 있다고 본다. 이러한 사랑이나 심정의 가치기준을 중심으로 보게 될 때 그 나라의 지도자는 나라의 아버지요, 도의 지도자는 도의 아버지요, 군의 지도자는 군의 아버지요, 면이나 리의 지도자는 역시 면이나 리의 아버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보게 될 때 학교의 지도자 역시 그 학교의 아버지라 함은 말할 나위도 없이 당연한 논리인 것이다. 본질적으로 아버지의 심정이란 무엇인가. 어릴 적의 아버지는 흠모의 대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설날이나 추석 같은 명일이 돌아오면 그 분들은 잘 입지 못해도 자녀들에게만은 값비싼 새옷을 해주려 하고, 자기들은 못 먹어도 자녀들에게만은 잘 먹이고 싶어 하는 것이 바로 부모의 심정이다.

마을의 잔칫집에라도 초대되어 가시는 경우에 맛있는 음식이 나오면 그게 자식들 생각에 목에 걸려 넘기지를 못하고 안타까워하시는 게 부모의 심정이다. 이러한 심정은 인간 본연의 것이기 때문에 그 영원한 가치의 진리성과 함께 이를 발전적으로 확산해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시급히 요청되는 것은 이러한 심정적 유대이다. 이러한 만고불변의 진리, 이러한 생활원리에 스스로를 비춰보고 재점검하며 각성해야 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라고 보아진다.

선생이 학생을 때리되 눈물을 머금고 때리는 부모의 심정으로 때리면 된다. 먼저 깨달은 자가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운 자들을 나무라되 형제의 입장에서 공격할 게 아니라 부모의 심정으로 그를 사랑하면서 고발해야 한다.

상관이 부하의 밥줄을 자르는 경우, 부모가 자식을 질책할 때처럼 그가 상처 받을까, 실족할까 염려해 주는 마음과 아파하는 부모의 심정으로 부조리한 부분을 자르게 될 때 그 부하는 돌아서면서도 미워하지 못하는 법이다.

모진 삭풍에 얼어붙어서 아파하는 보리를 그 이상을 아파하는 마음으로 밟아 주어야 한다. 앞으로의 미래에 잘 살기를 비는 심정으로 눈물을 뿌리면서 보리를 밟아 줘야 한다고 하는 역설적인 비논리의 논리가 우리들을 구원하는 정신적 에너지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의 원리, 심정의 원리에 입각하여 살아가는 지도자는 과연 얼마나 되는 것일까. 이러한 사람이 우리들 속에 많다고 보는가 적다고 보는가. 많으면 문제가 적은 것이며, 적다면 문제가 많은 게 사실이기 때문에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역사적인 안목에서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살펴보게 될 때 모든 지도자들은 항상 울어야 하고 뛰어야 한다. 자기의 책임 안에 들어있는 자녀들을 위하여 밥숟갈을 들다가도 울어야 하고, 신문을 보다가도 울어야 한다. 길을 가다가도 울어야 하고, 잠을 자다가도 울어야 한다.

도지사는 자기의 도민 걱정에 울어야 하고, 군수는 군민들 걱정에 울어야 한다. 가령 어느 군민 가운데 굶주리는 사람이 있을 경우, 그 군을 다스리는 지도자는 배부를 수 없고, 배불러서도 안 된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자기의 아들딸이 굶주리는데, 떨고 있는데, 배우지 못하고 있는데, 이러한 사정을 알지 못하면 그는 가짜이다. 그것을 심정적으로 느끼지 못해도 가짜이다. 아무개는 먹을 게 없어서 굶주리고 있다지! 아무개는 집이 없어서 떨고 있다지! 아무개는 시험에 합격을 했으나 등록금을 대지 못해서 약을 먹었다지! 하고 심정적으로 느끼면서 그 해결을 위해서 고심하는 군수 서장은 얼마이며, 동장 리장은 얼마나 되는가!

우리들의 사회를 돌아보게 될 때 아직도 지도자는 울어야 한다. 마음 편할 날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마음이 편할 수 있는 날이란 신문의 정치면 사회면 경제면이 온통 미담과 칭찬으로만 채워지는 날일 것이다.

밥을 뜨다가도 밥숟갈이 목에 거려 넘기지를 못하고 눈물을 삼키는 지도자, 잠을 자다가도 깨어 일어나 민정을 살피는 지도자, 이러한 지도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나라는 희망이 있는 국가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방정식이야말로 보리를 밟으면서 생각할 수 있는 진리로서 철학적 사상성을 지닌다.

아이들이 잠을 자면서 제멋대로 차 던지는 이불을 덮어 주고 그러한 마음으로 우리들 주변의 얼어붙은 냉기를 녹여낼 수 있는 훈훈한 심정을 지녀야 할 것이다.

 

 

사당동 귀뚜라미

 

죽은 귀뚜라미 한 마리가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는 것을 보았다. 지난 밤, 지하실에서 연탄을 갈아 넣을 때 화덕으로 뛰어들었던 그 귀뚜라미가 쓸려나온 모양이었다. 죽은 귀뚜라미를 보는 순간, 시골에서 상경한 서민들이 생각나기도 했다. 살기가 어려워 고향산천을 떠나온 이들의 슬픔이 황량한 내 가슴에 밀물처럼 밀려온다.

뽕나무밭이 변하여 바다가 되듯이, 뽕나무밭이 변하여 도시가 된 이곳 사당동은 원래 사당리였었다. 뽕나무밭 아래로는 논밭이 생기고, 초가집들이 옹기종이 들어서면서 실비단 하늘에 밥을 짓는 연기도 피어오르게 되었다.

사당동의 봄은 눈속에서부터 왔다. 관악산 소나무들이 철겨운 눈송이를 이고 함박꽃을 피워 보이는 그 속에서 봄은 일어났다. 한강에서 찡-하고 얼음 갈라지는 소리와 파닥이는 물오리 숨결에서부터 봄은 쉬엄쉬엄 오고 있었다.

그리고, 물오른 뽕나무 가지의 오디에서 여름은 매달려 오고, 밤새도록 울어대는 귀뚜라미에서 단장의 가을은 왔다.

귀뚜라미의 고향이라 할까 본적지란 원래 동(洞)자 달린 도회지가 아니라 리(里)자 붙은 시골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귀뚜라미 우는 소리를 들으면 시골을 떠올리게 되고, 못내 잊지 못하게 된다.

푸른 달빛이 창호지에 고요히 흘러넘치는 밤이면 누구나 고향을 생각하게 되고, 귀뚜라미 소리를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손쉽게 떠오르는 추억에 실눈을 가늘게 뜨고, 귀뚤귀뚤 귀뚜라미가 아니면, 기럭기럭 기러기 등등의 반복적 음향의식에 사로잡히게도 된다. 우리 또래의 아이들은 흔히들 새를 보았다. 새를 쫓을 때는 우여어 우여어 하고 목청껏 외치면서 열십자 대막대기로 흙을 집어 던졌다. 그런데 이 보다는 뙈(태)기질이 좋았다. 재미있고도 신명나는 일이었다. 머리 위로 비잉빙 서너 바퀴 돌리다가 갑자기 논두렁을 내려치게 되면 포탄 터지는 광음이 울렸고, 나락(벼) 뜨물을 빨던 참새들이 혼비백산하여 꽁지야 날 살려라 하고 날아가는 것이었다.

새를 보게 되면 속이 쉬이 출출해지는지라, 해는 길고 배는 등짝에 붙기 마련이었다. 논물에 담가두었던 땡감을 꺼내 먹는가 하면, 둔덕에다 깡통 솥을 걸어놓고 콩이나 고구마를 삶아 먹고 나면 살포시 졸음이 오게 된다. 서늘한 새막 위에서 깨소금 같이 꼬순 잠을 한잠 늘어지게 자고 나면 해는 서산마루에 기울고, 몽달귀신이 산다는 건넌산 잔솔밭에서는 자꾸만 도깨비불이 보이는 것 같고, 휘파람소리가 나는 것만 같이 쭈뼛쭈뼛 무서움을 타기도 했다.

제법 우렁차게 들리는 귀뚜라미 소리를 발길로 차면서 돌아올 무렵에는 그 밥을 짓느라 저녁연기 얕게 피어 깔린 초가 마을에서 부르시던 어머니의 목소리도 꿈결처럼 들려온다.

 

서산 너머 햇님이

숨바꼭질할 때면

수풀 속의 새집에는

촛불 하나 켜 놓았죠

 

나는 지금도 꿈속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하얀 연기 얕게 깔리는 그 꿈속의 마을, 부르면 부를수록 청국장 냄새가 구수하게 풍겨나는 동경의 고향을 꿈에서 본다. 그리고 듣는다. 소천양반 사랑방 모퉁이 그을린 굴뚝 앞을 지나노라면, 깻대 내음이 풍겨났었고, 엉골댁 흙담 벽을 돌아갈 때는 멸치 넣고 끓임직한 시래깃국 냄새가 구수하게 났었지…….

나는 지금도 해마다 피던 개나리 울타리도, 초등학교 교재원 개구멍도, 도둑 굿을 보던 창고극장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다.

그런데 사당리가 사당동으로 바뀌면서부터 나의 시골은 도시의 끝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새를 보던 그 자리에 서게 되면 나는 후회를 하게 된다. 벼 향기 무르익던 족제비다랭이도, 할매 어매랑 미영(목화)따던 새터 밭도, 정든 초가집도, 환상적인 저녁연기도, 아슴푸레한 기억 속의 부르는 소리도, 노을 속 환장할 자운영(紫雲英) 밭도, 목욕하는 여인들의 샘도랑도, 개구리 울던 미나리깡도, 벼슬 고운 뜸부기 소리도 약속이라도 한 듯이 맹랑하게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리하여 촌놈인 내가 어느새 서울 사람이 되어 버린 것처럼, 시골의 그 귀뚜라미 역시 도시로 변해버린 사당동에서 적응하려고 애를 쓰게 되었다. 도시 변두리의 떠돌이 근로자의 슬픔이 여기에 있다. 풀잎도 이슬도 없는, 모래와 시멘트와 연탄과 플라스틱과 철제로 견고해진 현대사회에서 적응해 보려고 애들을 쓰는 게 안쓰럽다.

사당동 귀뚜라미, 그것은 도시의 아스팔트를 쓸면 빨리 망가져 버리는 시골의 싸리비와도 같은 성격의 구로공단 공원이나 버스 안내양 같은 변두리 서민들로 상징지어진다.

환경이 변해 버렸어도, 그 변한 환경에 적응하려고 삶의 대열에 참여하면서도, 본래의 소리를 잃지 않고 살아가는 귀뚜라미처럼, 시골서 올라와 사는 변두리 서민들은 메마른 생활의 아픔마저도 가난한 인정끼리 목을 적시며 살아간다.

하루의 행진이 흩어질 무렵이면 사당동 산번지(山番地) 부근의 서민들은 어린 것들의 튀김과자를 사들고 골목길을 오르다가 포장집에 들러 잔을 기울이며 아픈 신경을 짜깁기하기도 한다. 싸구려 포장집에서도 외상술로 아픔을 달래는 착한 백성들은 그래도 야심이 남아 있는 귀뚜라미들이다.

그 귀뚜라미가 저만치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을 흔들어 보이면서 나로 하여금 페이소스에 젖게 한다.

그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참여의 시를 쓰게 한다. 순수한 소리를 게워내는 귀뚜라미는 참여의식이 강하기 때문에 더욱 안쓰럽게 보이는지도 모른다. 곤충으로서의 귀뚜라미는 별것이 아니겠지만, 소리로서의 귀뚜라미는 순수한 소리를 변함없이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까지나 센티멘털이 살아있어서 좋다.

 

도시문명에

참여해 온 귀뚜라미에도

순수한 소리는 고여 흐른다.

부황 든 몸뚱이는 볼품이 없어도

진실한 시음(詩吟)은 목숨보다 진하다.

한 방울의 이슬 속에

숨쉬는 것은

아득한 풀잎의 꿈나라……

부음(訃音)이 오던 날

고향을 목 놓아 울다 잠들던

지하실 연탄아궁이 속에서도

더듬던 아득한 풀잎의 꿈나라……

빌딩에 잔월(殘月)이 걸리는 밤이면

쓰러진 술병 옆에서

가슴을 물어 소리를 내는

날이 선 절규,

참여의식이 순수로 고여 흐른다.

-「사당동 귀뚜라미」-

 

출근과 퇴근의 되풀이 속에서, 비정의 철제 속을 수없이 드나들면서 인정이 메마른 세태 속에서 추억하는 나 역시 하나의 귀뚜라미가 아닌가. 꽃과 풀잎의 노래로 하여금 식물성정신(植物性精神)으로 살지 못하고 플라스틱 꽃 속에서 말을 잃어가는 나 역시 사당동의 귀뚜라미가 아닌가.

 

 

고추잠자리의 향수

 

가을은 초로(初老)의 계절이다. 파랗게 갠 하늘에 빨갛게 익어가는 홍시(紅柿)를 올려보고 있노라면 마음은 까닭 없이 서글퍼져서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뭐든지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계절이다.

싱싱한 계절이 지나 잘 익은 계절, 신고(辛苦)의 계절을 지나 떫은 기는 다 가시고 단맛만이 우러나는 홍시의 계절이다.

홍시처럼 익기 시작하는 초로의 연령은 아마도 사십 오세에서 오십 세쯤이 될 것이다.

이 나이가 되면 사물을 그윽한 눈으로 보게 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그윽한 눈이라는 것은 지붕 위의 빨간 고추나 언덕바지의 목화송이, 혹은 밭이랑의 참깨를 말리는 초가을 햇볕과도 같은 것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시켜 마지막 단 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여 달라고 읊었는데, 포도주를 맛이 들게 할 수 있는 그러한 햇빛과도 같은 시선이다.

이러한 시선을 사랑이라든지 자애 같은 언어로 표현이 될 수는 없다.

나는 이러한 낱말 보다는 차라리 곱게 늙은 농부의 얼굴 모습과 그 눈빛에서 얻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든다.

그 농부의 머리엔 물론 밀짚모자가 얹혀져 있어야 한다. 전쟁과 가난 등의 만고풍상을 겪어오면서도 조금도 구겨지지 않은 마음으로 엽초(葉草)를 말아 피우는 농부의 모습에서 나는 가을을 느낀다.

내가 생각하는 그 고상한 체취의 농부는 모시옷이나 삼베옷을 입고 있는 모습이다. 그 모시옷이나 삼베옷은 고추잠자리의 날개처럼 날렵하고 가볍고 투명하다.

그 투명한 수백 수천의 날개가 강냉이 밭 위로 선회하면서 하늘을 온통 노을빛으로 물들인다. 푸른 하늘을 떼 지어 나는 고추잠자리의 군무(群舞)는 차라리 반공중에 흐르는 노을이었다.

 

고추잠자리가 몰려 오네

하늘에 빨간 수(繡)를 놓으며

한데 어울려 날아오네.

어느 고향에서 보내오기에

저리도 빨갛게

상기되어 오는가.

저렇게 찾아왔던

그 해는

참으로 건강한 여름이었지

그대 불꽃같은

우리들의 강냉이 밭에는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지

잔모래로 이를 닦으시던 할아버지의

상투 끝에 맴돌던 잠자리 같이

강냉이 이빨을 흉내 내며

단물을 빨던 나의 눈앞에

떼지어 오는 고추잠자리는

누가 보낸 전령인가.

어디서 오는 전령이기에

노스탤지어의 손을 흔들며

저리도 붉게

가슴 이리 저리 맴돌며 오는가.

-「향수」-

 

노을은 환장하게 미쳐버린 입술들의 절정이었다. 미쳐버린 고추잠자리 떼의 절정, 그것은 차라리 한(恨)을 승화시킨 눈물이요 아픔이었다. 그래서 가을은 절정으로 타오르다가도 페이소스에 잠기는 노을의 애상인지도 모른다.

누구든지 시들어가는 풀밭에 누워서 파랗게 갠 하늘을 우러러보라. 그 하늘에 눈물이 핑그르르 도는 것은 부질없는 센티멘털이 아니다. 그것은 너무도 가까운 가슴 속에서부터 계절의 잔열(殘熱)이 인생의 여운으로 저려오기 때문이리라.

 

모두들

종점(終點) 가는 길에

차를 내려

벤치에 앉아 쉬어 간다.

나도

벤치에 앉아

계절이 지나가는 나뭇잎 사이로

열린 조각하늘을 보며

추억 하나 만지작거린다.

내가 만지작거리는

추억의 껍질은

속을 비우라고 말한다.

뜬구름 떠돌다 사라지듯이

잠시 머물다 가는

인생은 나그네라고 말한다.

벤치에서

여름에 만난 사람은

가을에 보내야 한다고……

꽃이 필 때 만나면

잎이 찔 땐 보내야 한다고……

보내면서 보내면서

나는 다듬어진 조약돌 하나 주었고,

떠나면서 떠나면서

그녀는 조개껍질에 빈 바람을 남겼다.

나는

빈 바람 남기고 가는 그녀에게

꽉 찬 돌 하나 주었다.

그러나,

나의 돌은 채워주지 못한 채

가슴에

금이 갔다.

깊은 밤

초침 뛰는 소리에도

가랑잎에 금이 갔다.

금 간

가슴에 내리는 가랑잎 소리는

봄 여름 가을……

벤치에 앉아 쉼표를 찍다가

마침표를 찍으러

종점으로 떠난다.

-「쉼표와 마침표」-

 

인생의 여운으로 저려오는 것, 그것은 저만치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을 흔드는 젊음과 늙음의 간격이다. 마음은 여전히 젊은데 몸은 속절없이 늙는다고 하는 그 간격이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인생이라는 열차는 산모퉁이로 자취를 감추게 된다는 서글픔을 풀벌레 소리가 함께 한다.

그렇게 때문에 가을은 정겨운 계절이기도 하다. 떠나는 이나 보내는 이나 모두가 슬픔에 사무쳐 짙푸른 하늘로, 잘 익은 홍시로, 불타는 노을로, 술 취한 고추잠자리 떼가 되어 천방지축 쏘다니는 절정의 계절이다. 이 절정의 계절, 초로의 계절에 옛 사람은 풍류 인생을 멋지게 살았었지만, 오늘의 나는 참으로 멋없는 세상을 멋없이 살아가고 있으니 언제 홍시처럼 익을 것인가.

 

 

까치밥

 

늦가을, 감나무 가지 맨 끝에 한두 개 남겨 두는 홍시(紅柿)를 가리켜 까치밥이라고 한다. 말랑말랑하면서도 먹음직스러운 그 까치밥을 유심히 살펴보면 가느다란 상처가 나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도 떫은 기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까치밥, 단맛만이 울어난 까치밥에도 보일듯 말듯한 상처는 있는 법이다. 다만 그 상처가 홍시로 익은 그 아름다움에 묻혀서 보이지 않을 따름이다.

홍시, 까치밥으로 남아지기 위해서는 풋풋한 계절, 덜 익은 연륜도 넘겨야 한다. 봄이면 감꽃을 피우지만, 비라도 내리게 되면 그 감꽃은 수도 없이 떨어지고 만다.

그래도 감나무에 붙어 있는 감꽃들은 좌절하는 일이 없이 열매를 준비한다. 이 감나무 열매에 떫은 기가 사라지고 단맛만이 울어나기 위해서는 여름의 질풍노도시대를 지나 가을의 햇살을 받아야 한다.

가을날의 그 자애로운 햇살을 자기 몸속으로 받아들여 진실한 잉태를 서둘러야 하겠기 때문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노래했다. "…마지막 과실들을 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시켜,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십시오"라고.

진실로 그러하다. 남국의 햇살에 포도주가 익듯, 대자연의 순리 앞에 겸허한 옷깃을 여미게 될 때는 우리가 곱게 익어가는 때이다. 따라서 우리는 한나절의 햇살에서도 인생과 우주를 관조하면서 감사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지식이 분필가루로 날려 소멸되어서는 안 된다. 세상을 저 잘난 맛으로 산다고 하지만 그렇게 목에 힘줄 것 까지는 없다.

인간이면 누구를 막론하고 세월 따라 한줌 흙으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남을 깔아뭉개고 올라갔던 사람도 결국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남을 거꾸러뜨리고 거머쥔 승소판결문도, 핏대를 세우면서 받아낸 등기권리증도 한 줌의 재, 한 줌의 흙과 함께 사라지게 된다. 그것은 익어 보지도 못한 채 떫은 땡감으로 떨어지는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나는 까치밥을 바라볼 때마다 곱게 늙은 농부를 떠올리게 된다. 만고풍상을 다 겪어 오면서도 고진으로 견디어 온 농부가 더없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내가 관심하는 농부는 바로 게오르규에게 하나님을 보여준 그 농부를 가리킨다. 25시의 작가 게오르규 그는 까치밥처럼 곱게 늙은 농부의 얼굴에서 하나님을 보았던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사랑은 아픔이요 희생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아름답고, 아름다운 사람은 아파한다. 아무도 몰래 조용히 혼자서 아파한다.

 

우리 죽어 살아요.

떨어지진 말고 죽은 듯이 살아요.

꽃샘바람에도 떨어지지 않는 꽃잎처럼

어지러운 세상에서 떨어지지 말아요.

우리 곱게곱게 익기로 해요.

여름날의 모진 비바람을 견디어내고

금싸라기 가을볕에 단맛이 스미는

그런 성숙의 연륜대로 익기로 해요.

우리 죽은 듯이 죽어 살아요.

메주가 썩어서 장맛이 들고

떫은 감도 서리 맞은 뒤에 맛들듯이

우리 고난 받은 뒤에 단맛을 익혀요.

정겹고 꽃답게 인생을 익혀요.

목이 시린 하늘 드높이

홍시(紅柿)로 익어 지내다가

새소식 가지고 오시는 까치에게

쭈구렁 바가지로 쪼아 먹히고

이듬해 새봄에 속잎이 필 때

흙속에 묻혔다가 싹이 나는 섭리(攝理)

그렇게 물 흐르듯 순애(殉愛)하며 살아요.

-「까치밥」-

 

까치밥처럼 아름다운 것이 이 세상 말고 어디에 또 있을까. 늦가을, 아니 초겨울, 쪼아 먹는 까치들에 의해서 상처투성이로 쭈그러든 까치밥은 차가운 겨울, 땅 위 어딘가에 떨어져서 새로운 질서를 위하여 조용히 자취를 감출 것이기 때문이다.

 

 

목욕하는 여인들

 

이 세상에서 여자의 몸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고 신비로운 것은 없다. 여자의 몸에는 이 세상 삼라만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소성, 그 형상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름난 명화 중에는 미와 사랑의 여신을 그린 고대 나체화로서, 1942년에 완성된 산드로 봇티첼리(1444-1510)의 <비너스의 탄생>이 돋보인다. 여기에는 맑고 밝은 생명의 힘이 생생하게 일렁이고, 완전한 나체인 데에도 수치심 같은 게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청순한 아름다움이 살아난다.

이 세상에는 여성을 대상으로 한 그림과 음악과 문학작품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바 있는 파블로 네루다는 「여자의 몸」을 노래했었다.

그는, "여자의 몸 하얀 언덕, 하얀 다리, 몸을 맡기는 당신은 대지를 닮아 투박한 농부, 나의 육체가 당신을 파고, 그리고 대지의 밑바닥에서 어린애를 낳게 한다."고 하면서 마지막엔 "아아, 가슴의 컵! 딴전을 부리는 그 눈길! 아아, 은밀한 장미여! 아아, 느리고 슬피 울리는 당신의 목소리여! 그리운 몸이여, 나는 당신의 매력을 되씹으리. 나의 목마름, 끝없는 나의 소원, 희미한 나의 길이여! 영원한 목마름이 이어지고, 그리고 끝없는 아픔이 이어지는 어두운 하상"이라 노래했다.

그것은 은밀한 장미요 희미한 길이라 할 수 있다. 저만치의 거리에서 목욕하는 여인들, 그것은 영원한 신비의 수수께끼였다. 알 수 없는 은밀한 방이었다.

나의 기억 속에 살아 있는 여인들 중에는 시골의 생울타리가 휘돌아 쳐진 우물가 수채도랑에서 목욕하는 여인들이 있다.

여름밤이면 여인들이 그 샘도랑으로 나온다. 낮에 땀흘리며 밭을 매던 여인들이 샘도랑에 나와 목욕을 하게 되는데, 나는 그 여인들의 몸, 그 은밀한 장미를 어렴풋이 보게 되었다.

그해 여름, 나는 동무들과 함께 반딧불을 잡으러 쏘다녔다. 나는 반딧불을 병안에 잡아 넣고는 돌아오는 길에 아슴푸레한 달빛 속에서 목욕하는 그녀들을 보게 되었다. 물소리가 떨어질 때마다 간지러운지 키들거리는 처녀들의 웃음소리가 건너편 과수원에서 불어오는 수밀도 향기와 함께 날아오고 있었다.

그야말로 원시적인 생명력이 약동하는 곡선과 곡선이 펼쳐지고 있었다. 구름 속에서 구르던 달이 부끄러운 얼굴을 넌지시 드러낼 때면 그 곡선의 시야는 보다 선명한 윤곽을 드러냈다. 그러다가 그 달이 구름 속으로 숨어들면, 그녀들은 다시 은밀한 장미가 되고, 희미한 길이 되곤 했다.

이러한 상념이 자리한 나의 관념 속에서는 언제부턴가 한 편의 시가 살아서 꿈틀거리게 되었다. 현대 문명사회의 약아빠진 지식인과 대조되는 인물을 설정하여 순수한 세계를 추구하게 되었다.

 

가까이 가지도 않았습니다.

탐욕의 불을 켜고

바라본 일도 없습니다.

전설 속의 나무꾼처럼

옷을 숨기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그저

달님도 부끄러워

구름 속으로 숨는 밤

물소리를 들었을 뿐입니다.

죄가 있다면

그 소리 훔쳐 들은 죄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그 소리는 꽃잎이 되고 향기가 되었습니다.

껍질 벗는

수밀도(水蜜桃)의 향기……

밤하늘엔 여인의 비눗물이 흘러갑니다.

아씨가 선녀로 목욕하는 밤이면

수채도랑은 온통 별밭이 되어

가슴은 은화로 출렁이었습니다.

손목 한번 잡은 일도 없습니다.

얘기 한번 나눈 적도 없습니다.

다만 아슴푸레한 어둠 저편에서

떨어지는 물소리에

정신을 빼앗겼던 탓이올시다.

시원(始原)의 유두(乳頭)같은

물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머리카락으로 목덜미로 유방으로 허리로

그리고 또……

곡선의 시야 굼틀굼틀

어루만져 보고 껴안아 보던

그 달콤한 상상의 감주(甘酒),

죄가 있다면 이것이 죄올시다.

전설 속의 나무꾼처럼

옷 하나 감추지도 못한 주제에

죄가 있다면

물소리에 끌려간 죄밖에 없습니다.

-「샘도랑집 바우」-

 

시골 여인들이 선녀들처럼 목욕하던 그 샘도랑은 온통 별밭이 되어 은하로 출렁이고 있었다. 어둠의 달빛 속 곡선의 시야로 떨어져 내리는 그 물소리, 그 물소리에 끌려간 사내의 순수한 발성을 통해서 나는 너무도 까지고 비열해진 현대 문명인들을 비판한 셈이 되었다.

사랑은 가슴으로 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오늘날엔 그러지 못한 것 같다. 전화 다이얼을 돌리고, 다방에서 만나면 경양식집으로 룸살롱으로 호텔로 전전하면서 몸으로 부딪치는 요지경, 거짓 연애가 판을 치는 세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심리적 반동으로 인해서 순수한 세계를 추구하는 지도 모른다. 지식이 없더라도 마음씨 고운사람, 목욕하는 여인들의 그 물소리를 들은 것만으로도 죄라도 지은 것으로 부끄러워하는 사람의 그 마음 세계가 그리운 것이다.

전설 속의 나무꾼 얘기는 우리들에게 인생의 멋스러운 면을 상기하게 한다. 사내들은 선녀의 옷을 감추고 싶어 한다. 그리하여 자기 곁에 붙들어 놓고 오래오래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선녀란 어떠한 여인을 사랑하며 미화했을 경우라야 살아나게 된다. 사랑이 식어져서 미의식이 차단되는 경우에는 그 영상이 안개처럼 사라지게 된다.

그러므로 선녀의 옷을 감추고 싶어 하는 남성들은,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을 선녀로 미화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하늘로 사라지지 못하도록 옷을 숨기되 너무 가까이에 있지만 말고 신비로움이 유지될 수 있는 거리에서 가슴으로 사랑해야 할 것이다.

목욕하는 여인들… 그것은 나의 영상 속에 살아있는 한 폭의 그림이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시원스러운 그 샘도랑 물은 앵두나무 울타리 밑으로 흘러내렸다. 앵두나무 그늘 밑에서 모래알을 들먹이며 용솟음쳐 오르는 그 샘도랑은 신(神)의 신비로운 자궁이었다.

거기, 우물에서 비롯된 샘물줄기가 도랑을 타고 흘러 내렸다. 밭고랑 타고 가며 김을 매던 여인들이 나와서 목욕들을 하는 밤이면, 그 샘도랑은 온통 과즙이 풍부한 귓속말들로 소곤거리고 깔깔거리는 밤의 축제가 열렸다. 자궁 속의 자궁들의 축제였다.

 

예술가와 돈

 

지난여름, 청년미술관에 들러서 '조각전'을 관람한 일이 있다. 그때 나는 하나의 조각 앞에서 움직일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 조각품이 너무도 감동을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조각품들이 어떻기에 나에게 감동을 주었을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무언가 알듯 하면서도 모르겠고, 모르겠다고 지나쳐 버리기에는 분명히 뭔가 있는 것 같은 그 아리송한 게 여간 매력이 아니었다.

어쩌면 내가 그 조각품에서 느꼈던 감상을 얘기한다는 게 부질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속에만 가둬두고 나 홀로 음미하고 젖어본들 그게 그렇게 대수로울 것도 없지 않은가.

그날 나의 관심을 사로잡은 작품은 한두 점이 아니지만, 굳이 두어 점 추리기로 한다면, 커다란 알(계란이라 해도 무방함)의 깨어진 부분에서 흘러나오는 액체였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액체라 표현했지만 그 재료는 모두가 동(銅)이었다. 깨어진 계란에서 흰자가 는틀는틀 흘러나오는 그 유연한 형체 그대로 쇳덩이로 나타냈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보다도 더 크게 사고 싶은 것은 조각품이 힘의 덩어리로 얘기하고 있는 그 메시지에 있다.

그것은 여러 암유(暗喩)를 한꺼번에 얘기하고 있었다. 우선 손쉽게 받아들여진 것은 깨어져 흐르는 그 파격과 유출에 있다. 계란 같은 타원의 형태 일부분이 깨뜨려져서 그 사이로 흐르는 것을 보는 내 마음이 왜 즐거워지고 감동이 되는 것일까. 그것을 알려면 아무래도 나 자신의 심리를 파악해야 할 것 같다.

나의 주관적인 얘기로 흐를 위험이 없지 않지만, 아무튼 나대로의 상상의 날개를 펴보기로 한다면, 계란이란 병아리가 되거나 깨어져 흐르거나 둘 중의 하나로 되어야지 언제까지 제자리에 그대로만 있다면 곪아 터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깨어진 계란의 흐름에서 새로운 생명체를 보게 된다. 새로운 생명체, 그것은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어느 사회이건 그 사회가 정체되지 않기 위해서는 흘러야 한다. 흐르지 못하고 머물러 있는 경락(經絡)은 침을 찔러서 피가 돌게 해야 한다.

우리 사회의 거죽에 나타난 그 경락의 자리를 나는 너무도 많이 보아왔기 때문에 거죽이 터져서 흐르는 사물에서 기막힌 기쁨을 느끼게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가슴에 와 닿는 것은 동굴 속에서 흘러나오는 액체였다. 이 조각품 역시 철제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것이었는데, 쇠붙이로 느껴지지 않는 것이었다. 쇠가 쇠로 느껴지지 않고 바위나 계란, 살갗 등으로 느껴지는 것은 웬일일까.

돌고드름이 내려온 동굴 같은 곳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에서 나는 원시적인 생명감을 느꼈다. 그것은 천지창조 당시 수억만 개의 정충 같은 별떨기를 만들어 내는 원시의 자궁을 연상케 했다.

나는 여기에서 용암이 분출하는 파격의 경지 같은 것을 느꼈고, 동굴이 무너져 내릴 때 범람하면서 내지르는 파열음을 들었다. 그것은 지글지글 타면서 흘러내리는 열과 빛에 의한 환희의 소리였다.

그 다음, 나는 그 조각을 통해서 작가의 정신세계를 읽을 수 있었다. 조각가 노교수.

그는 우선 선이 굵고 웅대하게 여겨졌다. 그리고 또한 안으로 속 깊이 정열적이면서도 고집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내 생각이 그렇게 옳다면 그는 고독한 조각가임에 틀림이 없다. 충실한 언어의 직공이 되기 위해 진력해온 나로서는, 험난한 예술의 길을 외롭게 걸어왔을 한 사람의 조각가에게 무슨 말이라도 좀 해서 위로가 되게 하고 싶어졌다.

나는 조각가 노재승 교수에게 다가갔다. 처음 보는 얼굴인 데에도 어디서 본 듯한 인상이었다.

나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했고 우리는 서로 통성명을 했다. 사인북에 내 이름자도 적어 넣었다. 그리고 되는 대로 몇 마디 했다. 그 분의 제자들로 보이는 여대생들이 나의 말에 수긍하고 있었다.

내가 조각전을 관람하던 그 날은 전시회 마지막 날이었다. 나는 돌아올 무렵에 내가 좋아하던 그 두 점의 조각품이 밖으로 실려 나가는 것을 보았다. 대부분의 조각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직도 정신 춘궁기에 허덕이는 우리 사회에 있어서 사이비 예술인은 돈과 정비례하지만 진정한 예술가는 돈과 반비례한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기도 했다.

나는 돌아오는 길에 이런 생각을 했다. 돈을 좀 벌어가지고 <유출>이라는 조각품을 사고 싶은데, 막상 돈을 벌어 보려고 아등바등하다 보면 그게 눈에 띄지도 않을 것이라고……

 

 

시인詩人 공화국共和國

 

시가 없는 사회는 멋이 없는 사회요 정서가 메마른 사회이다. 정서가 메마른 사회는 인정이 없는 사회요 살맛이 나지 않는 사회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시인들은 살맛이 나지 않는 사회를 재미있는 사회로 만들 수는 없을까 하고 고심하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에 있어서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그 본연의 순수 자아를 찾지 않고서는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詩)라고 하는 언어문자는 말씀 언(言)변에 절 사(寺)를 더한 자이다. 이 문자가 말해 주고 있는 바와 같이, 그것은 종교적인 언어의 차원으로서의 내용을 담고 있다. 종교적인 언어라고 하는 것은 차원이 높은 언어이다. 따라서 시 작품 속에는 종교적 내용성과 예술적 형식성이 내포되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는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편안하게 한다.

시는 어떠한 정치나 경제와는 전혀 다른 성질을 지닌다. 정치라고 하는 것은 병든 사회를 치유하기 위해서 과감하게 메스를 가하기 마련이다. 잘못 되어진 환부를 도려내고 새 살이 차오르기를 기다리는 것을 흔히 보게 된다. 그 썩어가는 환부를 도려내게 될 때 그 사회, 그 환자는 죽는다고 발버둥을 치며 소란을 피우게 된다. 그리하여 세상은 언제나 소란스러워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시라고 하는 것, 예술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기름지게 하기 때문에 부조리한 사건에서 초래되는 환자를 감소시킨다. 그리고 병실의 환자에게 메스를 가하지 않고 커튼과 화병으로 마음을 즐겁게 한다. 시는 소망적인 언어로 아픈 이를 치유하는 마력을 지닌다.

시인은 부조리를 증오하기 전에 먼저 사랑을 베풀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과연 부조리를 사랑할 수 있을까. 부조리를 용납한다거나 묵인한다는 말과 그것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차원이 전혀 다르다. 부조리를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모른다. 이는 부모가 죄지은 자식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심정을 체휼하지 못하고는 이해할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부조리한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것으로 믿는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불태워 버리듯, 부조리한 것을 불태워 멸하고 싶으시겠지만 오늘날까지 용서하면서 참아 오셨던 것으로 여긴다. 나는 이러한 심정을 가리켜 부조리를 사랑해 오셨다고 역설적인 표현을 사용하게 된 셈이다.

오늘의 현대인은 원초적으로, 또는 본질적으로 잃어버린 것이 너무도 많다. 우리들은 여름밤의 반딧불을 잊은 지가 오래이다. 멀리 있는 벗에게 긴 편지를 쓰던 밤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에서나 떠올릴 정도로 망각의 상태에 있다.

원시적인 생명의 싹을 틔워 주던 흙은 콘크리트로 변하였고, 호롱불은 형광등으로 바뀌었다. 물질문명은 인간에게 육체적인 편리와 정신적인 불편을 한꺼번에 주었다.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편리를 누리는 인간은 더욱 더 유치해지고 왜소해지며 교활해지는 것이었다.

인간의 가치기준이 재화의 유무로 결정지어지고, 지위의 고하로 규정되는 시대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은 인간이 시를 잃어버린 채 돈의 노예로, 혹은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해 버렸기 때문이다. 상급학교에 진학을 하기 위해서 공부를 하고, 취직을 하기 위해서 또는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을 배필로 삼기 위해서 고등교육을 받는다는 말을 공공연히 듣게도 되는데, 이는 어떠한 목적이라든지 본질을 위해서 사는 삶이 아니라 수단과 방법을 위해서 사는 삶이 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들 이런 얘기를 한다. 취직을 해서 살아가는 사람이나, 개인 사업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나 간에 얼마쯤 살다가 문득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될 때 공허함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왜 공허함을 느낄까. 왜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채 살아온 듯한 공허를 느끼는 것일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의 인생을 자기가 능동적으로 살아온 게 아니고 피동적으로 살아온 느낌을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앞으로 어느 곳에서 무슨 일을 하던지 간에 자기의 개성을 살리면서 자기의 순수한 얘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이 서울에서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할 때가 가끔 있다. 귀뚜라미는 순수하다. 풀밭에서 울던 옛날의 시골 귀뚜라미와 아파트 창틈에서 우는 오늘의 도시 귀뚜라미는 한결 같이 귀뚜라미 소리를 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귀뚜라미라고 하는 순수 사물은 물질문명의 팽배로 인하여 환경이 변하였는데에도 변함이 없는 소리를 들려주고 있다는 점이다.

귀뚜라미는 순수할 뿐만 아니라 참여의식도 강하다. 서재, 목욕탕, 부엌, 화장실, 구공탄 창고 할 것 없이 어디에서나 서식하면서도 그 소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우리는 변함이 없어야 한다. 시대와 환경에 따라서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

권력에 눈이 어두워서 하루아침에 상아탑을 떠난 학자가 있는가 하면, 돈에 맛을 들인 나머지 붓을 버리고 떠나간 언론인도 있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변하는 사람과 변하지 않는 사람으로 가름해 보게 될 때, 시인이나 종교인들은 비교적 변하지 않는 편에 속한다. 물론 여기에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아무튼 이 세상은 시인이라든지, 예술인 종교인들에 의해서 맑아지고 밝아져야 한다고 나는 생각해 왔다. 이 세상이 살기 좋아지려면 적어도 시인이 질식하는 풍토가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

국가고시에는 반드시 시작 과목을 두어서 전인적인 인격자를 뽑아야 한다. 적어도 시를 감상할 줄 알고, 평가할 줄 알며, 쓸 줄 아는 사람들이 세상을 치리하게 될 때는 오늘날과 같이 이렇게 비정한 사회는 되지 않을 것이다. 시의 아름다운 마음씨를 지닌 사람이 어떻게 토막 살인을 할 것이며, 양민을 무차별 학살할 수 있겠는가.

시가 없는 시대, 혹은 시가 살아남지 못하는 시대에 들려오는 노래는 기껏해야 '새벽종이 울렸네……초가집도 없애고……'였다. 돈을 많이 벌어서 잘 살아보자고 하는 경제일변도 정책이 정서의 숨이 막히게 했고 시를 질식시켰다.

기계가 사는 세상에는 초가집이 필요치 않을지 모라도 인간이 사는 세상에는 초가집도 필요한 것이다. 초가지붕에 피어 있는 박꽃과 주렁주렁 열린 박도 보아 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풍토, 물질적인 것으로 모든 것을 측정하는 풍토를 없애기 위해서 지성인은 시를 옹호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선 학생들은 좋은 시를 술술 외울 수 있어야 한다.

대통령이건 장관이건 국회의원이건 간에 연설을 한다거나 대화를 할 때는 좋은 시와 함께 이뤄져야 할 것이다. 구두닦이 소년까지도 명시를 줄줄 외우면서 구두를 닦을 수 있는 그러한 호시절을 누리는 '시인공화국'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적어도 국민의 수준이 높아져야 한다. 청소년들의 생각부터가 고상해져야 한다. 생각이 고상하기 위해서는 독서를 많이 해야 한다. 독서량이 부족하면 정신적인 영양결핍증에 걸리기 마련이다. 정신적으로 영양이 결핍된 자가 어떻게 고상한 인격의 소유자로서 시의 세계에서 살 수 있겠는가.

따라서 적어도 명시를 줄줄 외우는 학생이 되고, 시의 멋을 아는 사회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낙엽삼생落葉三生

 

낙엽은 세 번 산다. 나무에 매달려 있을 때라든지, 떨어지는 순간의 그 반공중에서 한 번 살고, 땅에 떨어져서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면서 또 한 번 산다. 그리고 흙속에 묻히게 되면서부터는 동면으로 들어간다. 낙엽이 흙속에 묻히게 되면 모든 것을 잊고 긴 겨울잠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낙엽에 떨어질 때는 그렇게 곱고 아름다울 수가 없다. 노란 은행나무 잎도 붉은 단풍나무 잎도 어디에 비길 데 없이 아름답다.

낙엽은 서럽다. 목이 시릴 정도로 파랗게 개인 가을 하늘 가에 소리 없이 져 내리는 낙엽은 아름다움이 넘치고 넘쳐서 서럽기까지 하다.

낙엽은 왜 서러울까. 왜 쓸쓸할까. 아무래도 이별의 서러움을 나타내기 때문인 것 같다. 이별, 그렇다. 세상을 살다 보면 만남과 헤어짐을 거듭하게 된다. 여기에 기쁨과 슬픔이 있다. 속잎 피어나는 청춘의 오전, 그 일출의 희망이 있고, 낙엽이 져 내리는 일몰의 애상이 있다.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 신(神)과 인간과의 관계, 주체와 대상과의 관계가 바로 그것이다.

여러 갈래의 인간관계는 서로 얽히고설키어 웃음의 꽃을 만들고 눈물의 씨앗을 만든다. 저만치의 거리에서 반짝이는 아름다움에 이끌리어 달려가 만난 사람과 이만치에서 살다 보면 실망하게 되고 더러는 헤어지게도 되는데, 이것은 착각을 꾸며내는 프리즘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사흘만 함께 살다 죽어도 원이 없겠다고 결사적으로 만난 사람도 몇 년 못가서 싫증을 내고 독배 같은 이별의 잔을 기울이게 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보게 된다.

헤어지면 그립고 만나게 되면 시들한 게 인간의 상정이다. 천 년 만 년 살 것처럼 만났다가도 얼마를 못가서 시들해지는 사람은 행복할 수가 없다. 보기에도 역겹다고 헤어지는 사람… 보내는 사람과 떠나는 사람의 계절은 가을이요, 그 심신은 낙엽이 된다. 그리하여 이별의 쓴 잔을 마신 사람들은 가을이면 보낸 것을 후회하게 된다.

이별을 할 때에는 낙엽과도 같이 그렇게 보내고 떠나야 한다. 가을날 은행잎이 떨어져 내리듯, 그렇게 아름답게 조용히 보내고 떠나야 한다. 낙엽이 그렇게 져 내리듯, 꽃답고 정겹고 순하게 져내려야 한다.

낙엽이 빈손으로 져 내리듯, 아무 욕심이 없이 순수한 자연 그대로 져내려야 한다. 온유하고 겸손하게 져내려야 한다. 자기가 아무리 아프다 할지라도 상대방에게는 최대한으로 편안하게 해주어야 한다.

소월처럼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한다거나,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려드릴 테니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할지언정 앙탈을 부린다거나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나거라 하고 저주한다거나 독설을 퍼부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언어는 낙엽같이 고운 빛깔이 아니다. 노란 은행잎이나 붉은 단풍잎 같은 빛깔이 아니다. 우리는 자기를 여과하고 다스려서 낙엽처럼 곱게 져야 할 것이다.

미국의 여류시인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 1830~1886」은 "내가 만일 상한 가슴을 건질 수 있다면 내 삶은 헛되지 않으리. 내가 만일 병든 생명을 고칠 수 있다면, 또한 할딱이는 새 한 마리라도 도와서 그 보금자리로 돌려보낼 수 있다면 내 삶은 결코 헛되지 않으리." 라고 읊었는데 그녀는 어찌하여 이런 시를 쓰게 되었을까.

실연의 상처를 안고 낙엽처럼 떨어져 나온 그녀는 고독하고 정밀(靜謐)한 일생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은 아름답고, 속아 사는 사람은 아름다운 법이다.

낙엽이 땅에 떨어지면 사람들의 발에 밟히게 된다. 그 때마다 낙엽은 바스락 소리를 낸다. 떨어질 때는 물론이고, 밟히면서까지 싫지 않은 소리를 내는 낙엽, 그 안쓰러운 존재는 마음이 맑은 시인에게서 사랑을 독차지하게 된다. 그러다가 세월이 가면 바람에 불리어 흙속에 묻히게 되는 낙엽은 수목의 비료가 되어 줄 뿐, 침묵으로 일관하게 된다. 이 낙엽의 침묵은 세월 따라 인생을 여물게 한다.

 

단풍(丹楓)은 투피스,

때가 되면 가식(假飾)을 벗어 던진다.

절반은 벗은 채

절반은 걸친 채

얼근한 하늘을 환장하게 좋아하는

골짜기의 물소리를 안주 삼아

우리 한잔 하는 게 어때.

인생길이 가파르면

쉬엄쉬엄 쉬어서 가고,

일락서산(日落西山) 해 떨어지면

병풍 같은 산허리에 천막을 치고,

삼겹살이라도 볶아놓고

둘러앉아서

우리 한잔 하는 게 어때.

세상살이가 어지러우면

청류(靑流)에 발을 담그기도 하고,

구름처럼 초연히 털고 일어나

반나(半裸)의 수림 사이사이로

바람같이 속 편하게 정좌수(鄭座首)랑 불러놓고

우리 한잔 하는 게 어때.

-「가을 등산」-

 

가식이나 엄살이 없는 낙엽이 좋아서 산을 찾을 때가 있다. 세상에서 상처받고 실망한 사람일수록 더욱 산을 찾게 되는데, 이는 거짓 없는 자연에서 위로받기 때문이다. 자연은 타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짓도 죄도 시기도 질투도 있을 수 없다. 산을 찾는 소이는 바로 여기에 있다.

세상이 싫어질 때, 세상에서 염증을 느낄 때 산을 찾는다. 낙엽이 떨어지기도 하고 소복하게 쌓이기도 하는 산허리나 계곡에서 삼겹살이라도 볶아 놓고 한잔 기울이는 것은 사내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 같은 것이다.

사내들은 아픔을 이런 식으로 달랜다. 소탈하게 한잔 하면서 한바탕 웃고 마는 것이다. 인생이란 그런 거지 뭐. 인생은 나그네지, 나그네야.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거지 뭐 별거 있나 어쩌고 하면서 한바탕 화끈하게 웃어버리고 소리를 지르다 내려가면 그때부터 낙엽은 흙속에 묻혀 침묵을 지키며 밑거름이 되어주게 된다.

결국은 낙엽이란 떨어지는 것, 밟히는 것, 침묵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떨어질 때는 고운 몸짓으로 꽃답게 져야 한다. 밟힐 때는 비명이 아니 순애(殉愛)의 소리를 내어야 하며, 침묵할 때는 모름지기 비료가 되어 주어야 한다. 이러한 순애의 낙엽에서 우리들은 사색하고 철학하는 가을을 배우게 된다.

우리는 낙엽에서 가을의 겸허함을 배워야 한다. 가을이라는 계절을 받아들이며 신의 섭리대로 순응하는 그 겸허한 몸짓을 배워야 한다.

우리도 언젠가는 낙엽처럼 떨어지기 마련이다. 사랑했던 사람과 영원히 갈라지는 것도 떨어지는 것이요, 이 세상을 하직하는 것도 떨어지는 것이다.

떨어질 때는 낙엽처럼 아름답게 져내려야 한다. 자기와 인연되었던 모든 사람에게 희생적으로 봉사하면서 져내려야 한다. 이것이 순리다. 땅에 떨어진 낙엽이 밟히기도 하고 바람에 날리기도 하듯, 우리는 우주의 질서에 순응해야 한다.

낙엽이 땅에 묻히면 침묵으로 일관하듯, 수심강정(水深江靜)의 이치를 터득해야 한다. 낙엽삼생, 그것은 가을 길 걷는 나그네의 순애보(殉愛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의 빨래

 

좋은 시를 쓰려면 우선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문학을 하기 전에 먼저 사람다운 사람, 시인다운 시인이 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사람다운 사람, 시인다운 시인이 되지 않고는 좋은 시가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문학작품이란 그 사람의 마음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글이란 바로 그 사람이라는 말도 있다. 이는 글쓴이의 마음 상태를 두고 하는 말이다. 마음이 비단결 같은 사람은 글 또한 비단결 같거니와 마음이 거지발싸개 같으면 글 또한 거지 발싸개 같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마음부터 깨끗하게 맑히고 바르게 닦는 청정심(淸淨心)이 요구된다.

여기에 멋있는 사람, 매력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개성적 인간으로서 도야(陶冶)된 인격이 요구된다. 잘 다듬어진 제목이 훌륭한 건축물에 쓰이듯, 잘 다듬어진 마음 바탕이 좋은 문장을 형성한다. 글을 쓰는데 있어서는 이러한 기본 문제를 도외시할 수가 없다.

글을 쓰는 사람들 중에는 흔히 재미있는 소재(素材)를 찾아 헤맨다거나, 문장을 요리조리 교묘하게 짜 맞추는 기교(技巧)에 많은 관심을 쏟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앞에서 말한 마음의 문제로서의 작자의 생각, 즉 주제의식으로서의 중심사상을 도외시하고서는 명문(名文)이 될 수가 없다.

글을 쓰는데 있어서는 무엇을 보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보느냐가 더욱 중요하다. 무엇을 보느냐는 문제는 사물에 대한 관심이지만, 어떻게 보느냐는 문제는 작가의 주체적 사고방식과 기교까지를 포함해서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좋은 시를 쓰고 싶어 하는 나의 관심사는 나의 마음을 비단결 같은 마음으로 직조(織造)하는 수심(修心)에 두게 되고, 이러한 인격의 도야나 개성의 완성을 위해서 고심하다 보니 어느덧 '돌'과 '물'이라는 사물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불속에서 한 천년 달구어지다가

산적이 되어 한 천녀 숨어 살다가

칼날 같은 소슬바람에 염주(念珠)를 집어 들고

물속에서 한 천년 원없이 구르다가

영겁(永劫)의 돌이 되어 돌돌돌 구르다가

매촐한 목소리 가다듬고 일어나

신선봉 화담(花潭)선생 바둑알이 되어서

한 천년 운무(雲霧)속에 잠겨 살다가

잡놈들 들끓는 속계(俗界)에 내려와

좋은 시 한 편만 남기고 죽으리.

-「돌」-

 

이 시에 나오는 돌은 바로 나 자신을 의미한다. 내가 돌이 되어 불속에서 한 천년 달구어지게 되면, 나에게 다닥다닥 붙어있던 온갖 몹쓸 욕망의 부스러기들은 모조리 타서 없어지게 될 것이다. 온갖 백팔번뇌를 일으키는 탐진치(貪嗔侈)는 말끔히 사라질 것이며, 타락성 근성 같은 때가 벗겨지고 오로지 동해에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는 저 석굴암 대불같은 표정의 돌덩이로 남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게 되면 탐욕도 없고 집착도 없기 때문에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산적이 되어 한 천년 숨어 산다 하여도 죄와는 상관없이 살게 될 것이다.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더라도 굶어 죽지는 않을 것이다. 주민등록증도 등기권리증도 필요 없는 산적이 되어 숲속에서 자유를 만끽하다가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지나친 자유가 구속이라는 것을.

보다 완전한 개성완성 인격완성을 위해서는 돌이 물속에서 오랜 동안 굴러야 한다. 그리하여 모서리가 그 부드러운 물에 씻기어져서 매촐하게 다듬어져야 한다. 그리하여 매촐한 조약돌로 둥글게 둥글게 원(圓)이 되는 상태, 이게 바로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원만한 인격의 표상(表象)이다.

이렇게 되면 저 유명한 송도삼절(松都三絶)의 절세 여인, 황진이가 프로포즈했다가 사모하게 된 화담선생과도 같은 품격을 갖게 될 것이다. 안개구름 자욱한 신선봉 바위 위에서 서화담과 황진이가 바둑을 두듯, 높은 품격의 소유자가 되어 유유자적하게 마음 편히 살 수 있을 것이다.

 

안개로 허리 두른 산허리

교교한 암자(庵子)에서

스님과 나는 바둑을 둔다.

해탈(解脫)한 스님은 백을 거느리고

범속한 나는 흑을 거느리고……

스님의 장삼(長衫)은 구름으로 떠 있고

나의 흑발(黑髮)은 번뇌(煩惱)로 얽혀있다.

『패(覇)를 받으시렵니까?』

『남무아미타불……』

『받지 않으시렵니까?』

『관세음보살……』

고진(古眞)한 백은 고진해서 좋고

천진(天眞)한 흑은 천진해서 좋고

장생(長生)의 노송(老松)에 걸려 흐르는

이백의 하늘은 대류무성(大流無聲)……

법열(法悅)의 구름은 발아래 떠 있고

변상(變相)의 바둑은 구름으로 떠 있다.

-「선풍(禪風)Ⅱ」-

 

나의 관심사는 좋은 시를 남기는 데 있다. 어떻게 하면 좋은 시를 쓸 수 있을까. 여기에서 말하는 좋은 시란 물론 높은 차원으로서의 예술적 가치가 있는 시를 가리킬 뿐 아니라, 영원히 남을 수 있는 시를 말한다. 영원히 남을 수 있는 시란 영원한 불변의 진리에 뿌리내린 예술적 가치의 것을 말한다.

나의 시에는 도교적인 요소와 불교적인 요소도 있지만 기독교적인 요소가 치열하게 작용하고 있다 하겠다. 나의 마음 세계가 신선처럼 운무 속에 잠겨 살 수 있는 어느 경지에 이르렀다고 해서 안일하게 자신의 안존만을 꾀하는 차원이 아니다. 천상에 계신 하나님이 지상에 내려와서 우리 겨레를 구원하듯, 온갖 잡놈들이 들끓는 속세에 내려와서 깨달음을 줄 수 있는 좋은 시를 남기고 가야겠다는 사고방식이다.

여기에 내 삶의 나침반이 있다. 나의 문학세계, 내 시는 결국 나의 개성완성, 인격완성의 바탕에서 꽃피워내는 예술적 가치의 것으로서, 인류구원에 있다 하겠다.

그러므로 이것은 종교적 차원에 버금간다. 시가 종교적인 차원으로 성스럽게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그리하여 속(俗)을 성(聖)으로 끌어 올리면 끌어 올릴수록 결국 시성(詩聖)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믿음이 나에게는 있어 왔다.

이러한 연유로 해서, 강한 돌이 부드러운 물결에 씻기며 굴러 다듬어지듯, 나는 세파에서 구르고 구르면서 조금씩 다듬어져 가는 시를 써나가게 된다.

결국 나의 시작과정(詩作過程). 시의 퇴고(推敲)와 교정(校正)은 나를 다듬어 가는 성질의 것으로서, 나를 깨끗하게 하는 내 삶의 빨래요, 나의 생활을 곱게 펴나가는 내 인생의 숯불 다리미질인 것이다.

 

 

등잔불 환타지아

 

달달달달 다르륵-

달달달달 다르륵-

등잔불이 가물거리는 가운데 할머니는 밤새도록 물레를 돌리셨다. 나는 그 물레소리를 들으면서 꾸벅 꾸벅 졸았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곤 했었다. 나는 잠속에서도 꿈속에서도 물레소리를 듣곤 했는데, 눈을 떠보면 할머니는 영락없이 물레를 돌리고 계셨다.

나는 어린 마음에도 할머니가 불쌍해 보였다. 남편을 잃고 자식을 잃고 홀로 되신 할머니는 물레를 돌리시다가도 문득 손을 멈추고 죽창문(竹窓門) 밖으로 귀를 기울이는 것이었다.

나도 할머니처럼 창밖으로 귀를 기울여 보면 대나무 이파리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우리 집 대나무는 뒤란에 있었지만 앞집의 대나무는 그 집 뒤란 울타리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문만 열어도 마주 보였다.

대나무를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소리……. 그것은 어쩌면 할머니를 찾아온 혼령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그래서 무섭기도 하였다. 뱀이 풀숲을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처럼 대나무 이파리는 사른사른 사른거렸다.

할머니로서는 남편과 자식이지만, 나로서는 할아버지가 되고 아버지가 되는 그 분들이 떠나간 세상은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아득하여 이승에 다시 돌아올 리 만무지만 할머니는 행여나 하고 착각 속에서 기다려 보는 것만 같았다.

그러한 연유로 해서 할머니는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자리에서 일어나 물레를 돌리시기 일쑤였다.

무엇을 그렇게 확인하고 싶어 하시는지 할머니는 그랬다. 귀를 창밖으로 모으시다가도 그게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아니고 대 이파리를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소리라는 것을 알게 되면 다시금 긴 한숨을 내리쉬고는 물레를 돌리시는 것이었다.

달달달달 다르륵-

달달달달 다르륵-

바른손으로 물레를 돌리면서 왼손으로는 실을 늘여 가락에 감으셨다. 왼손을 뒤쪽으로 빼면서 실을 뽑아 올릴 때 물레는 달달달달 소리를 내며 울었고, 뽑아 늘였던 실을 앞으로 내려밀면서 가락에 감을 때 물레는 다르륵- 소리를 내며 울었다.

그러니까 이 달달달달과 다르륵이 합하여서 내는 소리는 한이 맺힌 조선 여인의 울음 같은 것으로서 울음조차도 목이 메어 제대로 나와 주지 않는 목질(木質)의 떨림이었고 아픔이었다.

그것은 전쟁에서 죽은 자식을 뼛가루로 받아 들고 돌아오다 까물친 조선 여인의 넋두리 같은 울음이었다. 풀이 우거진 언덕에서 해가 기울도록 풀잎을 쥐어뜯으며 가슴을 쥐어뜯으며 울어대던 할머니의 목쉰 소리였다. 울음조차도 제대로 나와 주지 않아 꺽꺽 막혀버리곤 하는 다르륵 소리였다.

 

목화다방에

한 틀의 물레가 놓여 있었다.

수십 년 만에 햇볕을 받는

할머니의 뼈다귀처럼

물레는 앙상하게 낡아 있었다.

도시의 시가 타살되던 날 밤

다방으로 피신해 온 나는

물레 소리에 미쳐들고 있었다.

할머니의 진언처럼

사른사른 살아나는 물레 소리가.

너무너무 좋아서

나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청죽 같은 자식을

전쟁에 보내놓고

사방팔방 치성을 드리던

할머니의 물레소리가

내 가슴 드르륵 물어 감고 있었다.

보기도 아까운 그 얼굴,

한줌의 재 되어 온 자식을 끌안다가

까물치던 할머니의 목쉰 소리 다르륵,

숨이 막혀 울지도 못하고

낮은 음자리 돌아 감기는

한의 물레 소리

가락에 시름을 감으며

지렁이 울음을 게워내고 있었다.

달 지는 밤이면

비언한 창호지 마주 앉아

남편 생각 자식 생각에

손을 멈추다가도

꺼지는 한숨 달달달달 다르륵

시름을 감아 돌리고 있었다.

-「물레」-

 

할머니가 바른손으로 물레를 돌리실 때 그 그림자는 벽으로 천정으로 날아다녔다. 할머니가 왼손으로 실을 뽑아 감을 때 그 그림자는 가물거리는 등잔불 주변에서 박쥐처럼 날아다녔다.

『할매, 졸립다. 그냥 자자.』

『건넌방에 가서 어미한테 자그라.』

『할매랑 잘란다.』

『늙은 할미 젖도 쭈글쭈글헌디 머가 좋아서 그러냐?』

밤이 깊어도 물레소리는 낮은 울음으로 돌아 감기면서 울고 있었다. 한이 많은 할머니가 가락에 시름을 감으면서, 그리고 벽으로 천정으로 사방 육면으로 그림자를 날려 띄우고 허쳐 뿌리면서 내는 그 은밀한 낮은 음을 들으면서 나는 잠에서 깨어났고, 또 다시 잠이 들곤 하였었다.

등잔불이 밤새도록 가물거리는 가운데 울려나는 물레소리에 잠을 설치게 되면 그 이튿날 나는 영락없이 늦잠이 들곤 하였다.

어머니는 해가 똥구멍에까지 내려왔다고 야단을 치시면서 일어나라고 했지만, 할머니는 나를 깨우는 방법이 달랐다.

할머니는 그 까칠까칠한 손으로 나의 꼬치를 만져보면서 노루처럼 캑캑 웃었다. 그리고는 어이구 내 새끼 내 새끼야 뿌렁구가 실혀서 씨를 많이 받것네 어쩌고 하게 되면 나는 그 껄끄라운 손을 피하여 자리에서 발딱 일어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할머니는 독신으로 죽은 아버지를 생각해서 그러는지 아들 삼형제는 낳아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나는 그대로 해드리지 못한 채 아들은 하나로 마감하고 있는 터였다.

어쩌다가 꿈에 떡 얻어먹듯 그렇게 고향에 가게 되면 나는 내가 살던 집에 들르게 된다. 집은 팔지 않은 채 선산을 봐줄 사람에게 빌려주고 있지만 왠지 내 집 같지가 않다.

뒤란의 대나무 숲은 여전히 푸르고, 내가 심은 은행나무가 놀랍게 자랐지만 분위기가 옛날 같지 않고 어쩐지 생소한 느낌이 들었다.

개나리 생울타리는 새마을운동에 밀려나 시멘트 담장으로 변해버렸고, 길을 넓힌다고 해서 마당은 반쪽이 되어 있었다.

우리 집 마당 절반을 떼어내어 넓힌 그 길로 지금까지 자동차 한번 들어온 일이 없다고 하니 죄 없는 마당만 없어진 셈이다.

대나무들도 대바람 소리를 데리고 오면서 알은체를 하는 것 같았지만 왠지 가슴이 썰렁하여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다.

나는 마당 이리 저리 서성거리다가 그 집을 나오고야 말았다. 선산에 묻히신 할머니 생각이 나면서 어디선가 물레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할머니의 손 그림자가 벽으로 천정으로 날아다니는 가운데 목쉰 소리로 다르륵 감겨 울던 그 물레소리가…….

달달달달 다르륵-

달달달달 다르륵-

 

 

팔싸리

 

화투 노름에 팔싸리라는 것이 있다. 팔싸리는 흑싸리 넉 장과 홍싸리 넉 장을 합한 여덟 장의 제구를 말한다. 그런데 이 여덟 장을 차지하지 못하는 경우, 마흔여덟 장으로 된 노름 제구 가운데 가장 매력 없는 것이 바로 흑싸리와 홍싸리이다.

무엇보다도 우선 구미가 당기는 것은 한 장에 스무 끗이 계산되는 광(光)과 칠십 약이 되는 칠띠, 그리고 석장씩 모으면 삼십 약이 되는 청단과 홍단이다. 그 다음으로 이십 약을 하는 비약과 풍약과 초약이다.

여기에 비하면 흑싸리와 홍사리는 오띠와 열 끗씩밖에 계산되지 않기 때문에 가장 인기가 없는 제구에 해당된다. 물론 흑싸리 넉 장과 홍싸리 넉 장을 합한 여덟 장의 팔싸리를 하게 되면 팔십 약이 되지만, 이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애당초부터 기대하는 법이 없다. 그래서 대개의 사람들은 따 먹어갈 게 없을 때는 이 별 볼일 없는 흑싸리와 홍싸리 껄짝(껍질)부터 바닥에 내어던지게 된다.

나에게는 팔싸리에 얽힌 얘기로서 잊혀 지지 않는 기억이 하나 있다. 그게 벌써 언제적 일인가. 삼십 년 전의 일이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시골 아이들은 모이기만 하면 어른들 몰래 화투 노름을 곧잘 하였다. 아이들이 화투 노름에 거는 것은 주로 성냥꼴이었다. 그 성냥꼴 하나라도 더 따려고 안간힘을 쓰던 아이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어쩌다가 한 번은 나에게 흑싸리 껍질 두 장과 홍싸리 두 장이 들어왔었다. 잘못 들어온 화투짝을 집어 들게 된 나는 하기 싫은 화투 노름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른 아이들은 솔광 비광을 먹어가는가 하면, 단약을 먹어 가는데 나는 아무것도 물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다른 아이들 앞에는 눈을 끄는 것들이 수북이 싸여 가는데, 나의 앞에는 싸리 껍질만 초라하게 놓여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나는 이미 시작된 그 화투 노름을 단념할 수도 포기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초라할 수가 없는 싸리 껍질을 불끈 쥔 채 바닥에서 제발 일어나 주기를 은근히 기다리고 있었다. 이 기다리는 마음을 천지신명께서 굽어 살피셨던지 거짓말같이 바닥표가 일어나서 팔싸리를 하게 되었다.

팔싸리를 하기 위해서는 때로 알짝을 내어던지는 경우도 생기게 된다. 황금 같은 비광을 떨어 버린다는 것은 여간한 모험이 아니다. 화투표가 잘못 들어와서 팔싸리밖에 다른 것을 기대할 수 없게 되는 경우에는 정말 물어다 놓은 화투란 보잘 것이 없게 마련이다.

송동월(松桐月) 알짝 광을 움켜쥐듯, 욕심 많은 친구들은 돈도 벌고 출세들을 해서 의기양양 거들먹거리며 앞서 가는데, 나는 이제까지 싸리 껍질만 쥐고 있는가 싶어 서글픈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때로는 승산이 없을 것 같은 싸리 껍질을 내어던져 버리고도 싶지만, 인생이란 화투 노름처럼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내 인생은

민화투 놀음의 팔싸리.

아무리 기다려도 기다려도

좀처럼 오지 않는 행운.

바닥에서 알짝이 일어날 때까지

싸리 껍질만 불끈 쥐고 살아온 시업(詩業).

아내가 움켜쥐고 싶어 하는

돈이나 권세

송동월 광도 떨어버리고

흑싸리 껍질만 홍싸리 껍질만

그저 빈 껍질만 불끈 쥐고 살아온 가난 속에

청빈의 물소리 쪼르륵 들리나니,

가난해야 넉넉한

내 시의 산술법……

마음을 열면

뜰의 달빛……

보자기로 구름 잡는

내 인생은

무능한 無無明亦無無明盡無老死팔싸리……

고집으로 걸어온 내 시도(詩道)는

화투놀음에서 그야말로

끝내주는 팔싸리.

-「팔싸리」-

 

나는 이날까지 돈이 되지 않는 시를 붙들고 살아왔다. 나의 시, 그것은 화려한 송동월 광이 아니다. 그것은 버리고 싶은 흑싸리 껍질에 불과하다. 나는 어찌하여 다른 것을 다 내어주어 가면서 싸리 껍질만을 움켜쥐고 살아온 것일까. 그것은 아무래도 가장 초라하게 보이면서도 가장 값진 것이 바로 팔싸리라고 믿어왔기 때문이리라.

팔싸리, 그것은 나의 시다. 나의 시는 바로 팔싸리다. 고집스럽게도 팔싸리의 기대를 버리지 못한 채 흑싸리 홍싸리 껍질을 쥐고 있는 나에 대해서 아내는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아내는 송동월 광 같은 돈이나 단약 같은 실속을 요구한다.

여기에 나의 고민이 있다. 끝내 단념하지 못하는 내 시의 고민이다. 싹수가 노란 것은 빨리 떨어 버리고 새 길을 찾는 게 상책이지만, 그러지를 못한 채 살아온 게 내 인생이다.

나의 시는

생활의 이빨에 물려 죽었다.

오랜만에

하나

시궁창에서 건져낸 시가

세탁기의 비누거품에 소멸되었다.

불도저에

풀잎이 깔리듯

존재도 없이 사라져 간

내 시를 찾아

호주머니를 뒤지면

아아, 떨어져 나간

내 시의 살점들.

도륙당한 혈육을 찾듯

떨리는 손으로 더듬어 찾으면

가슴에 피가 고인다.

삭아 내린 뼈를 접골하듯

시 조각을 맞춰 보면

가슴에 피가 고인다.

-「시의 죽음」-

 

나는 1982년에 문학상을 받은 일이 있다. 시상식은 그 해 12월에 실시되었는데 나는 상패를 받고 아내는 상금을 받았다. 나는 좀 더 고상하고 품위 있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주변머리 없게도 엉뚱한 팔싸리 얘기가 튀어나오게 되었다.

세상살이가 어려워질 때마다 살기 좋은 곳으로 이사를 가고 싶지만, 이 인간들의 세상 말고는 갈만한 곳이 없는 까닭에 하는 수 없이 시와 더불어 살아온 나에게 있어서 팔싸리는 나의 하나밖에 없는 마지막 보루인 셈이다.

 

 

바둑을 두면서

 

나는 바둑을 두면서 인생을 생각한다. 인생이란 마치 바둑과도 같은 성질의 것이라고……. 과연 그렇다. 인생이란 바둑과도 같은 성질의 것이다. 바둑이란 처음 한 점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처럼, 인생이란 처음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된다.

바둑을 처음부터 잘 두어야 하듯이, 사람이란 우선 태어날 때 잘 태어나야 한다. 여기에서 잘 태어나야 한다는 말은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야 한다는 한 가지 뜻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제대로 싹이 트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생장과정의 적합한 환경이 요구된다는 뜻이다.

이것을 바둑에서는 정석(定石)이라고 말한다. 돌을 놓아야할 자리에 제대로 놓는 것이 바로 정석이다. 모든 사물은 적재적소에 두어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어울려서 조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돈이 많은 가정에 태어났다고 해서 모두가 다 잘 되는 것은 아니다. 우선 가정의 분위기가 좋아야 한다. 대밭이나 삼밭에서 자란 쑥대는 꼿꼿하게 위로 올라가지만, 들판에서 자란 쑥대는 이리저리 옆으로만 뻗어나가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환경이 중요시된다.

바둑을 살펴서 두어야 하듯, 인생이란 잘 살펴서 살아가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눈치 보라는 얘기도 아니요 눈치껏 살라는 얘기도 아니다. 자기 소신껏 살아가되 실수 없이 허송세월로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살아가야 한다는 얘기다.

그러므로 인생이란 정석을 놓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정석이란 바로 인간으로서 마땅히 가야할 길을 놓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행복하게 살다가 죽는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다만 자기의 마음을 다스려서 욕심을 줄이게 될 때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행복한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욕심을 줄여서 적은 것에 만족을 느낄 줄 아는 안심입명(安心立命)의 경지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짚방석 내지마라 낙엽엔들 못 앉으랴

솔불 켜지마라 어제 진 달 돋아온다

아이야 박주산채(薄酒山菜)일망정 없다 말고 내어라

이러한 산유가(山遊歌)를 누릴 수 있는 경지에서 겸손의 옷을 입고 살아야 한다. 무소유(無所有)와 무집착(無執着)으로 세속적인 번뇌에서 벗어나게 될 때 멀리 바라보고 여유를 갖게 되어 정석을 놓아갈 수 있게 된다. 욕심이 앞을 가리면 판단이 흐려져서 정석을 놓아가지 못하게 된다.

바둑을 두다 보면 잘못 두는 경우가 생기게 된다. 뜻하지 않은 실수를 저지르게도 되고,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과오를 범하게도 된다. 이와 같이 우리들의 삶이라는 것도 묘한 것이어서 본의 아니게 시행착오를 거듭하게도 된다.

바둑을 두다 보면 축(逐)으로 몰릴 때도 있게 되는데, 이러한 경우에는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다. 살릴만한 바둑이 있고, 살릴 수 없는 바둑이 있다. 축에 몰리기 전에 미리부터 조심하고 경거망동한 행동을 하지 말았어야 했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서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정신으로 앞을 내다보고 대처해야만 했었다.

바둑에 있어서 축에 몰릴 때는 손을 떼어야 한다. 단념해야 한다. 마음을 비운 채 단념하고서 다른 빈 곳을 개척해야 한다. 그런데 감정이 앞서는 사람, 욕심에 눈이 어두운 사람은 축에 몰려도 죽는 게 아까워서 쉬이 단념하지 못하고 계속 살려보려고 집착하다가 완전히 몰살하게 된다. 너무 욕심을 부리게 되면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된다.

축에 몰리는 바둑은 단념해야 하듯이 죽음의 수렁으로 빠져드는 인간관계는 한시 바삐 청산해야 한다. 자기의 그 많은 바둑돌을, 그 금싸라기 같은 시간과 공간을 오살(誤殺)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바둑이란 무엇입니까?

인생을 살펴 가는 것이다.

인생이란 무엇입니까?

정석을 놓아 가는 것이다.

정석이란 무엇입니까?

인지당행지도(人之當行之道)니라.

도란 무엇입니까?

시와 같은 것이다.

시란 무엇입니까?

죽은 수를 찾는 것이다.

바둑은 어떻게 두어야 합니까?

잘못 둔 인연은 단념해야 한다.

왜 단념해야 합니까?

인정에 이끌리면 갇히어 죽는다.

죽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無)다.

무는 무엇입니까?

유(有)다.

유와 무는 무엇입니까?

있다가도 없어지는 바둑판이다.

바둑판은 무엇입니까?

인생이다.

인생이란 무엇입니까?

정석을 놓아가는 것이다.

-「기원(棋院)」에서-

 

바둑을 두다 보면 앞일을 내다보지 못하고 그릇 판단한 나머지 실수하여 이기지도 못하고 집도 짓지 못하여 패가(敗家)하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우리들의 인생이라는 것도 이와 흡사하다.

축으로 몰리는 경우엔 빨리 손을 떼고 단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붙들리면 몰려 죽는다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감정의 불이 이성의 물보다 더 승하기 때문이다.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축에 몰린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은 그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에게서 한시 바삐 손을 떼고 사랑해도 좋을 사람을 찾아 나서야 한다. 이것은 축에 몰리는 바둑판에서 떠나 다른 빈 곳을 개척하는 길이다.

바둑이란 잘 두거나 못 두거나 간에 일단 다 둔 바둑은 계산을 하게 된다. 이 인생의 계산은 정직하게 해야 한다. 남은 돌로 빈 곳을 메우면서 계산을 하듯이 일생 동안 삶에 대한 잘잘못을 계산하게 된다.

인생의 계산, 이 계산이 끝나면 바둑알이 통속으로 들어가듯이 무덤으로 들어간다. 하얀 바둑알과 검정 바둑알이 따로따로 나뉘어져 담겨지듯이, 영혼과 육신은 분리되어 사라지게 된다. 이것이 죽음이요 부활이다.

한 알의 바둑알로 시작하여 바둑판 가득히 메워 가다가 통속으로 들어가듯이, 한 마디 울음으로 시작된 인간의 역사가 마지막엔 잘잘못을 계산해 보면서 사라져가는 것이다.

하늘의 뜬구름처럼, 바둑판 위에서 있다가도 없어지는 바둑알처럼 있다가도 없어지는 인생, 우리들 인생이 바둑판의 이치에도 미치지 못한대서야 되겠는가.

 

 

스파링 파트너

 

나는 내 아들아이의 권투 대타자가 되어 주곤 했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아들아이가 권투 선수라도 되는 것은 아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부터 나를 샌드백 두드리듯 두들겨 왔으니 나는 그 아이의 샌드백 겸 스파링 파트너가 되어 준 셈이다.

봄 송아지 뿔 날 때처럼, 내 아들아이는 불끈불끈 솟는 힘을 주체할 길이 없어서 나에게 주먹질을 해대는 모양이었다.

송아지의 머리빡에 뿔이 올라올 때 보면 제법 불끈불끈 치솟는 힘을 내쏟느라고, 미처 나오지도 않은 속 뿔로 말뚝 같은 것을 마구 비비적거리며 떠받느라고 역사하는 것을 보게 된다.

내 아들아이 역시 이 아빠의 팔뚝이며 옆구리 여기저기를 툭툭 치는 폼이 마치 뿔 돋는 송아지를 연상케 하여 내심으로 마음 든든히 여기곤 하였다.

그러니까 4~5년 전만 하더라도 나는 아들아이로부터 얻어맞는 것을 자랑으로 여길 뿐만 아니라 일종의 보람이랄까 위안으로 여겨 왔었다. 내 아들아이의 주먹이 강해져서 얻어맞는 부분이 아프면 아플수록 으스러지도록 아픈 그 아픔을 통해서 나는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희열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랬었는데, 요즈음에 와서는 아이가 글러브를 끼고 치는 데에도 몇 대 얻어맞고 나면 뼈다귀가 으스러지는 것만 같고, 욱씬욱씬 욱씬거리고 쑤시는 게 여간 힘들지 않았다. 그래서 요즈음 와서는 아이에게 더 이상 맞아줄 수 없겠다고 선언을 했는데도, 예고 없이 달려들어 주먹을 휘두르는 바람에 영락없이 맞아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아이에게 맞아 주고 싶어서 맞아 줄 때가 있는가 하면, 맞아 주기 싫어도 억지로 맞아 줄 수밖에 없는 때도 있다.

레슬링을 잘 하려면 우선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낙법부터 배워야 하듯,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가려면 맞는 법부터 배워야 하는지도 모른다. 스파링 파트너가 선수의 시합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 맞는 것을 감수하듯, 나는 아들을 위해서 맞아주는 것을 감수해 온 셈이 된다.

나를 두들겨대는 것은 아들아이만이 아니다. 가정과 사회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인내하고 여과해야 했다.

직장에서는 상사에게 굽실거려야만 모든 일이 잘 풀리는데, 나는 그러지를 못하는 게 흠이라면 흠이다. 상사에게 나의 정당한 주장을 굽히지 않다가 결재 서류가 날아온 일이 있었다. 상사가 그것을 내동댕이쳤기 때문이었다. 나는 바닥에 흩어진 서류를 챙겨서는 다시금 내밀었다.

『결재하여 주십시오.』

나는 윗사람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결국 결재는 받게 되었지만 나는 상사의 비위에 맞는 스파링 파트너가 되어 주지 못하고 딱 한 번 손을 내민 실점으로 그 곳을 그만두게 되었다.

맞아 주고도 견딜 수 있는 능력만 있다면야 백 번이라도 맞아 주는 게 좋다. 맞아 주는 게 속이 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의 경우, 날아드는 주먹이 너무도 아프기 때문에 언제까지나 맞아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내 아들아이의 작은 주먹도 맞아 주기에 힘이 드는데, 매정스런 남들의 주먹까지 어떻게 다 받아 줄 수 있겠는가.

세상을 살다 보면 맞아 주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래서 바보처럼 맞아주다 보면 무능하게 보인다. 언젠가는 문학을 지망하다가 낙방을 거듭했다는 청년이 나와 합석을 하게 되었는데, 그 친구 술이 과했는지 자기주장만을 앞세우는 것이었다.

자기 멋대로 징치고 북치고 결론을 내리는 그의 얘기가 너무도 떫기 때문에 듣다듣다 듣기 거북해서 그런 재단 비평은 위험하다고 했더니 주먹부터 날아오는 것이었다. 순간, 만취되어 있는 그를 쥐어박으려다가 문득 학창 시절의 그 놀랍던 광경을 떠올리면서 주먹을 거두고 말았다.

학창 시절엔 얄밉게 구는 H를 운동장에서 집어던져 팔을 부러뜨린 일이 있었는데, 그때처럼 집어던진다든지 메어치면 팔다리가 부러지거나 갈비뼈 같은 게 부러져 나갈 테니 참자참자 하고 그저 맞아 주기만 했다. 그러자니 속에서는 불이 났다. 그로부터 얼마쯤인가 세월이 흘러간 후 분노의 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다음과 같은 시가 나와 주었다.

 

물안개 피어오르는 욕실(浴室)에서

거울 앞에 서면

보이는 게 주름살이다.

뜬구름으로 주름 잡힌 내 회한(悔恨)을

쓰다듬으면

생각나는 게 미숫가루다.

맹물에 타 마시던 미숫가루는

나의 세포 어디쯤 살아 있을까.

목욕을 하고 몸무게를 다는데,

아이는 무게가 올라가고

나는 무게가 내려간다.

아이의 무게는 나이와 정비례하고

나의 무게는 나이와 반비례한다.

정비례와 반비례 사이에는

일출(日出)과 일몰(日沒)의 거리가 있다.

그것은 여명(黎明)의 찬란함과

노을의 애상(哀傷)이다.

가벼워지는 나의 슬픔을

무거워지는 아이가 상쇄시키는

내 인생의 계산법이다.

나의 산술(算術)로는

아이의 정비례가 대견스럽기만 하다.

샌드백 두드리듯

이 아비를 두들겨대는

아이의 주먹이 아프면 아플수록

가슴속 스멀스멀 기쁨이 일렁이고……

뼈마디가 으스러지게 아프면 아플수록

얻어맞는 내 인생은 여물어 가나니……

계절이 지나가는 창밖의 별빛,

목이 시린 세월의 별빛,

여무는 내 주름살 아랑곳없이

아이는 나의 아픔을 즐거워하고

나는 아이의 즐거움을 즐거워한다.

-「사랑의 기쁨」-

 

나는 결국 아들아이의 스파링 파트너가 되어 줌으로 인해서 존재하는 가치의 보람으로 삼는다. 나 자신이 가정과 사회라고 하는 연탄에게 불을 붙여 주다가 재가 될 무렵이면 새로이 피어오르는 아이들의 열기를 위안으로 삼을 것이다.

연탄이 타고 나면 가벼워지는 것처럼, 가벼워지는 나의 슬픔을 무거워지는 아이에게서 상쇄작용(相殺作用)을 일으켜 오히려 큰 보람으로 삼을 것이다. 내가 가벼워질수록 아이는 무거워지고, 나의 화력이 약해질수록 아이의 열기는 강해지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불길을 필요로 하는 연탄에게 불을 붙이면서 살아가는 셈이 된다. 내가 강의를 하는 시간, 글을 쓰는 시간, 기도를 드리는 시간은 나의 불기가 나와 인연된 연탄에 옮겨 붙는 시간이라고 생각하게 될 때 비로소 내 삶의 존재 가치로서의 희열을 맛보게 된다.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나는 자다가 꿈속에서 고향을 볼 때가 있다. 꿈에 떡 얻어먹듯 그렇게 어쩌다가 고향 꿈을 꾸면서 흐느껴 울 때가 있다. 그 꿈속에서 뜸부기 소리를 들을 때가 있다.

뜸북 뜸북 뜸뜸뜸뜸……

낮에 듣지 못하는 뜸부기 소리를 잠자리에서 꿈에 듣는다. 낮에는 수돗물을 받아먹고 사는 도시 생활에 시달리다가도 밤에는 시골의 그 논배미에서 물을 물고 하늘을 보는 뜸부기 소리를 듣기도 한다.

수돗물 소리는 도시의 소리요 뜸부기 소리는 시골의 소리다. 수돗물 소리는 인공적으로 가공된 현실세계의 소리요 뜸부기 소리는 자연 그대로의 이상세계의 소리다.

나는 밤낮으로 이뤄지는 이 양면의 소리를 관념속에서 꼬무락거릴 때가 있다. 수돗물 받던 날 밤 꿈에 울던 그 뜸부기 소리에 푸른 하늘이 가슴에 드는 논배미마다 자운영 우려낸 물이 남실거렸다. 그 모포기 가득한 논배미에서 모포기 물어뜯으며 뜸부기가 울고 있었다.

내 가슴 가득히 실려 있는 그 논배미의 모포기를 물어뜯으며, 물을 물고 하늘 보는 뜸부기는 바로 내 향수심의 대변자였다. 나로 하여금 향수의 눈물을 자아내게 하는 뜸부기가 낮엔 나타나지는 못하고 잠자리의 꿈속에서 울고 있었다.

뜸부기 울던 나의 고향은 어머니의 가슴처럼 따뜻하고 편안하였다. 어머니의 품속은 아늑한 보금자리였다. 어릴 적 어머니의 등에 업혀갈 때의 그 아늑함과 편안함은 천국으로 가는 듯한 파라다이스였다.

나의 고향은 언제나 어머니처럼 그렇게 따뜻이 받아주는 너그러움이 있었다. 나는 고향의 그 너그러운 포용력에 끌리게 되고 고향을 찾게 된다. 고향은 내가 세상일에 실패했을 때에도, 풀이 죽어 귀향할 때에도 언제나 말없이 받아 주었다. 고향은 내가 남루한 차림으로 찾아 가더라도 업신여기는 법이 없이 언제나 변함없이 대하여 주었다.

 

마음 편한 식물성 바가지 같은 시

단기(檀紀)를 쓰던 달밤 교교한 음력의 시

사랑방 천정에선 메주가 뜨던

그 퀘퀘한 토속의 시를 쓰고 싶다.

인정이 많은 이웃들의 모닥불 같은 시

해질녘 초가지붕의 박꽃 같은 시

마당의 멍석 가에 모깃불 피던

그 포르스름한 실연기 같은 시를 쓰고 싶다.

겨울엔 춥고 여름엔 머리 빗겨지는

빨강 페인트의 슬레이트 지붕은 말고

나일론 끝에 목을 맨 플라스틱 바가지는 말고

뚝배기의 숭늉 내음 안개로 피는

정겨운 시, 푸짐한 시, 편안한 시,

더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고구마 한 소쿠리씩의 시를 쓰고 싶다.

고추잠자리 노을 속으로 빨려드는 시

저녁연기 얕게 깔리는 꿈속의 시

어스름 토담 고샅길 돌아갈 때의

멸치 넣고 끓임직한 은근한 시

그 시래깃국 냄새 나는 시를 쓰고 싶다.

-「시론(詩論)Ⅲ」-

 

제법 서늘해진 날씨 탓인지 우연히 떠오른 시다. 날씨가 추워지면 구들 목 생각이 간절해지듯, 세상이 추우면 추울수록 고향의 어머니를 떠올리게 되고, 향수의 안테나를 뽑아 올려 토속의 시어(詩語)로 교신하게 된다.

요즈음은 샘물 바가지에 버들잎을 띄워주고 살짝 돌아서며 볼을 붉히는 그런 소심(素心)의 순수언어를 찾아볼 길이 없다.

여름날 나그네에게 샘물 한 바가지 떠 주는 인정이 그리워진다. 행여 체할세라 버들잎을 띄워서 건네주는 마음이 그리워진다. 과수원에서 불어오는 그 시원한 바람같은 말씀이 그리워진다.

깊은 산속을 찾아 약수를 마시려 해도 거기엔 흥부 얘기에 나오는 식물성 바가지는 없고, 나일론 끈에 목을 맨 플라스틱 바가지가 기다리고 있기 마련이다.

나는 숨을 쉬지 않는 플라스틱 제품에 반발하고, 이러한 물질문명에 반동한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를 거슬러 원시인이 되자는 것은 아니다. 번뇌의 넥타이를 풀어 버린다거나 가식의 양복을 벗어 버리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잃어가는 원시적 생명감을 찾고 싶을 따름이다.

단기를 쓰고 음력을 쓰던 시절의 그 오순도순한 인정이 그리운 것이다. 물질문명, 과학문명이 발달한 오늘날보다도, 기능주의 배금주의가 득세하는 오늘날보다도 오히려 사람 사는 것 같았던 그 시절로의 심정적인 복귀를 원하는 것이다.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시골 사람들은 가난해도 넉넉했고 여유가 있어 보였다. 그저 사람과 사람이 만나게 되면 정겨웠고 푸짐했고 편안했다. 무엇이든지 서로 주기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돈이 필요하기는 해도 오늘날처럼 이렇게까지 돈돈돈 하지도 않았다. 텔레비전이나 냉장고가 없어도 불편한 줄을 모르고 살았다. 선풍기가 없어도, 아이스크림이 없어도 짜증을 낼 줄 몰랐다.

고추잠자리 떼가 노을 속으로 빨려드는 그 강냉이 밭은 지금 생각만 해보아도 현란하기 그지없다. 환장하게 타오르는 강냉이 밭 고추잠자리 떼의 노을 속에 잠자리를 잡아다가 옥수숫대 껍질을 물어뜯어 벗겨내고 단물을 빨았었다. 초콜릿이나 누가바를 모르던 그때는 그것으로 만족했다.

그 병아리 시절이 그립다. 발톱과 부리가 날카로워지거나 말거나 거름자리 후비며 정신없이 살다가 제정신이 돌아와 문득 올려보는 하늘, 저 하늘 아래 산 너머 남촌이 왜 이리도 그리워지는 것일까.

초가집들이 의좋게 옹기종기 모여 있는 그 저녁 어스름 위로 밥 짓는 연기가 얕게 깔릴 무렵이면 그 꿈속같이 아련한 마을 동구 밖에서 어머니의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어머니에게서는 청국장 냄새가 났었다. 멸치 넣고 끓임직한 시래깃국 냄새가 나는가 하면, 때로는 들깻묵 냄새도 나는 것이었다.

우리들의 식탁을 기름지게 하기 위하여 밭에서 거둔 소출로 참기름, 들기름을 짜시던 어머니의 그 박꽃 같은 소심(素心)이 나로 하여금 어쩌면 은근한 시, 편안한 시, 인정이 많은 이웃들의 모닥불 같은 시를 잉태케 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도 어머니의 그 치마폭에 휩싸이던 추억을 만지작거릴 때가 있다. 그 아늑한 어머니의 체온, 그 훈김은 사랑의 안개요, 고향의 시냇가 잔잔한 물비늘이다. 그 물비늘은 피곤한 내 영혼을 잠재우고 쉬게 하며 맑은 물로 씻어 내린다.

산 꿩이 푸드렁 솟아오를 때 산길 걷던 모자는 깜짝 놀라 풀숲에 엎어졌고, 어머니의 방어본능에 의해 치마폭 속에 감싸인 소년은 아늑한 그 속에서 푸른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르는 장끼를 올려보고 있었지……

그 고소한 깻묵 냄새가 서늘한 바람을 타고 코끝으로 솔솔 풀려나오던 그 전설 같은 분위기를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어머니는 결국 나에게 깻묵 냄새를 남겼고, 나는 그 깻묵 냄새가 나는 시를 남기게 되었다. 깻묵 냄새가 나는 나의 시, 그것은 나의 체질이다. 누가 뭐라 해도 나는 깻묵 냄새를 좋아한다. 그것은 가을날 투명한 하늘에서 부서져 내리는 햇살을 받으며 깨알들이 녹아내리는 희생의 상징 시어(詩語)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시들어가는 풀밭에서 파랗게 개인 가을 하늘을 고요히 우러러보다가 주인에게 털리어 떨어지면서도 웃음을 선사하는 참깨에서 순애(殉愛)를 느낀다. 그리고 모든 음식에 들어가 맛을 내는 진액으로 남기 위해 기꺼이 짜이어지는 깨에서 모성(母性)을 만나게 된다.

 

 

작은 시냇물 위에

 

작은 시냇물 위에 작은 배를 띄웠다. 하얀 종이배도 접어서 띄우고, 소나무 껍질을 칼로 파서 만든 지지껍질도 띄웠다.

나는 나의 배를 띄울 때마다 작은 기를 달았는데, 그 깃발에는 「송문호」라 써놓고 그 한 면에는 나의 이름을 써넣었다. 진수식을 할 것도 없이 띄우는 나의 작은 배는 띄울 때마다 두리둥실 잘도 떠가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 얼마 동안은 배가 가는대로 따라가다가 나중에는 먼빛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나는 나의 배가 이향(異鄕)의 나라로 멀리멀리 가주기를 바랬다. 누군가가 나의 배를 발견하고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기를 바랐었다.

이러한 막연한 기대는 나의 소박한 동심에서 오는 꿈이었다. 나의 꿈을 실은 배가 어느 바다, 어느 나라에 닿을지 알 수는 없어도 나는 날마다 배를 띄웠다. 내가 가보지 못한 머나먼 나라, 그 미지의 세계에 나의 배를 보내면서 꿈을 키워나갔던 것이다.

종이배, 나무껍질 배를 즐겨 띄우던 그 무렵에 나는 예배당의 유년주일학교엘 다니고 있었다. 주일학교의 우리 반은 젊은 남자 선생이 지도하셨는데, 키는 껀정하고 몸은 야윈 편이었다.

그 반사 선생님의 많은 이야기 중에서도 돌멩이 하나로 골리앗 장군을 쓰러뜨린 다윗 소년의 이야기와 젊은 선교사 이야기가 지금도 기억에 선명하다.

젊은 선교사가 배를 타고 선교의 길을 떠났는데, 그 배에 구멍이 나서 물이 새기 시작했지만 모두들 갑판 위로 올라갈 뿐 누구 하나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그때 그 젊은 선교사는 자기의 몸으로 배 밑바닥의 물이 새어드는 부분을 틀어막아서, 배가 무사히 항구에 닿아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으나 그 선교사는 차오른 물속에 잠긴 채 숨져있었다는 얘기였다.

어린 마음에도 나는 그 이야기에 감동을 받게 되었고, 나도 그 선교사처럼 남을 위하여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지, 하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수돗물 받던 날 밤

꿈에

뜸부기가 울데.

자운영(紫雲英) 우린 물 남실남실

가슴에 드는

하늘.

물 물고 구름 보고

모포기 물어뜯으며

뜸부기 울데.

-「수돗물 받던 날 밤」-

 

세월이 물같이 흘러간 후, 나는 나의 작은 배가 떠나간 강을 건너고 바다를 건너게 되었다.

태평양으로 대서양으로 인도양으로 그 머나먼 이향의 나라를 돌아다녔으나 이미 흘러간 시간을 만날 수 없듯이, 나의 배는 만날 수가 없었다.

다만 만나게 된 것은 내 어릴 때처럼 작은 시냇물 위에 작은 배를 띄우는 아이들, 그 새로 태어난 아이들, 미래의 꿈을 먹고 커가는 아이들이었다.

 

 

맷방석과 밤하늘

 

소금을 뿌려놓은 듯한 밤하늘의 은하수와 별떨기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그런 여름밤이었다.

아버지는 마당가에 맷방석을 펴고, 할아버지는 그 곁에 모깃불을 피웠다. 소복이 쌓아놓은 보릿대에 불을 붙인 다음, 쑥 풀을 한 다발 얹어놓으면 포르스름한 실연기가 쑥 풀 특유의 냄새를 풍기면서 피어오르다가 옆으로 퍼져나갔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옥수수와 감자를 쪄 내오셨다. 아버지는 이웃집 농부들과 더불어 얘기를 깊여가고,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운 나는 밤하늘의 별을 헤아리다가 잠이 들곤 하였다.

잠결에 간간이 깨어보면, 할머니는 염불을 하시면서 부채 끝으로 나의 팔이나 다리 부분 여기저기를 톡톡 치면서, 매운 쑥 연기 사이로 날아드는 모기를 쫓곤 하였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별을 보았다. 아득하게 멀리 올라가다가도 눈앞으로 확 달려드는 별, 나는 그 별에서 막연한 동경 같은 그리움에 젖곤 하였다. 그것은 아스라한 그리움 같은 것이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밤하늘의 그 별들을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약 2천억 개로 추산되는 그 많은 별들을 내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우주의 끝가지는 고사하고, 하나의 은하의 지름만을 통과하는 데에도 10만 광년이 걸린다니, 상상만 해보아도 미칠 것만 같았다.

별이 아슬히 멀리 있듯이, 그리운 사람들은 먼 곳에 있다. 모깃불을 피우시던 할아버지도, 시래깃국을 잘 끓여 주시던 할머니도 저승으로 떠나시고 별들만 총총 떠서 아스라이 반짝인다.

맷방석에 누운 채 맷방석만한 하늘을 올려보다가 할머니 무릎에서 잠이 들었는데, 아침 뻐꾸기 소리에 깨어보면 나의 몸은 영락없이 마루 위의 모기장 속에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아버지가 근육으로 꼬인 그 팔, 그 손으로 나를 안아 옮겼으리라 하고. 그 아버지도 밤하늘의 별처럼 아스라이 멀리에 있다. 멀고 먼 곳에 아스라이 떠있는 별이 아름답게 보이듯이, 멀리 떨어져간 그리움의 대상들, 그 인연들은 아름답다. 보내고 떠나는 슬픔, 안타까운 이별은 아름답다.

나의 추억 속에 살아있는 그 맷방석 위에 그 맷방석만한 둘레로 떠있는 밤하늘은 전기 문명으로부터 말살 당했다. 원시적인 생명은 현대의 문명사회로부터 총살당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종교는 많아도 사랑은 찾기 힘들게 되었고, 미움은 들끓어도 사랑할 줄 모르며, 불평은 많아도 감사할 줄 모르는 그런 정신적인 보릿고개를 맞게 된 나로서는, 그 맷방석 위의 밤하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고, 그 소박한 꿈을 먹고 살지 않을 수가 없다.

 

마음 편한 식물성 바가지 같은 시

단기(檀紀)를 쓰던 달밤 교교한 음력(陰曆)의 시

사랑방 천정에선 메주가 뜨던

그 퀘퀘한 토속(土俗)의 시를 쓰고 싶다.

인정이 많은 이웃들의 모닥불 같은 시

해질녘 초가지붕의 박꽃 같은 시

마당의 멍석 가에 모깃불 피던

그 포르스름한 실연기 같은 시를 쓰고 싶다.

겨울엔 춥고 여름엔 머리 벗겨지는

빨강 페인트의 슬레이트 지붕은 말고,

나일론 끈에 목을 맨 플라스틱 바가지는 말고,

뚝배기의 숭늉 내음 안개로 피는

정겨운 시, 푸짐한 시, 편안한 시,

더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고구마 한 소쿠리씩의 시를 쓰고 싶다.

고추잠자리 노을 속으로 빨려드는 시,

저녁연기 얕게 깔리는 꿈속의 시,

어스름 토담 고샅길 돌아갈 때의

멸치 넣고 끓임직한 은근한 시,

그 시래깃국 냄새 나는 시를 쓰고 싶다.

-「시론(詩論)」Ⅲ-

 

 

꽃 알레르기

 

꽃은 언제나 저만치가 좋다. 저만치의 거리를 두고 바라볼 때가 좋다. 저만치의 거리, 그것은 소월이 일찍이 「산유화(山有花)」에서 설파한대로,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홀로 피어 있는 신비의 영상이다.

영화는 적당한 거리에서 보아야 제대로 보이듯이, 꽃도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관조할 때 제대로 보이게 된다. 일정한 거리에서 오는 저만치의 신비의식이 살아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쩌면 꽃의 속성이요 본질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은 저만치의 거리에 있는 꽃을 먼빛으로 관조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될 수만 있으면 그 아름다운 꽃에게로 접근하고자 한다. 꽃의 매력은 그럴 때마다 다시 저만치의 거리를 두는 점에 있다. 그리하여 영원한 신비를 간직하는 데에 있다.

산이 잠옷 같은 안개를 허리에 휘감은 채 전라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것처럼 영원한 신비를 위해 수수께끼를 간직하는 데에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꽃들은 도망치거나 숨지 못한 채 이만치에서 꺾이고 만다. 이것은 어쩌면 꽃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꽃은 신비를 잃게 되어 느슨하게 풀어져 버리고 만다. 이것이 벌레 먹힌 꽃이요 시드는 꽃이다. 아름다움을 상실한 꽃이다. 이렇게 되면 꽃에게 접근하던 사람은 실망하게 되어 돌아서고 만다. 이 또한 꽃을 탐하는 인간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한계 상황 속에서의 이쪽과 저쪽, 그것은 영원한 오리무중이다.

무지개를 멀리서 바라보듯, 꽃은 저만치의 거리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저만치의 거리, 그것은 신비롭고도 달콤한 관념의 감주를 제공한다. 관념의 감주에 취하여 실눈을 뜨고 누리는 한 모금의 희열을 위하여 예술인들은 저만치의 거리에서 관조를 시도한다. 저만치의 거리에서 무지갯빛으로 내뿜는 신비의 아름다움, 그것은 붙들려고 할 때 사라지고 관조할 때 살아나는 칠면조의 날갯짓이다.

나는 찔레꽃을 좋아한다. 시골의 보리밭 언덕에 다소곳이 미소 짓는 꽃, 나는 그 꽃을 은근히 좋아한다. 물론 찔레꽃도 약간의 거리를 두고 바라보아야 한다. 가까이 가면 가시를 보게 되고, 자칫 잘못하다간 찔림을 당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찔레꽃은 자주고름 입에 물고 잘근잘근 씹으면서 눈물을 감추는 그런 시골 처녀 같은 꽃이다. 풋보리 내음이 싱그러운 들녘에 다소곳이 피어있는 찔레꽃은 때가 묻지 않은 시골 여인 같으면서도 꽃빛 정열이 안으로 다소곳이 간직되어 있는 것 같아서 좋다. 그러면서도 가시가 매력적이다. 그 가시가 중국요리의 톡 쏘는 겨자처럼, 끈적끈적 매달리는 몰상식을 제거하는데 있어서 맺고 끊는 게 분명한 매력이 있다.

그 유연한 줄기와 가지는 여간해서 꺾이지 않는다. 낭창낭창 휘어지기는 해도 꺾이지는 않는다. 그러한 까닭에 무엇 모르고 꺾으러드는 사람은 영락없이 피를 흘리며 돌아서야 한다. 돌아 선 뒤에야 저만치 먼빛으로 관조해야 한다는 이치를 터득하게 된다.

서울에도 찔레꽃은 있다. 그러나 양옥집 담장에 드리워진 그 꽃은 장미꽃에 가깝다. 꽃은 찔레꽃 모습 그대로를 빼박았지만, 찔레는 아니다. 삶의 방식이 다르고 생활 습성이 다르다. 그 꽃은 불행하게도 흙먼지를 뒤집어쓰기도 하고, 공해에 시달리기도 한다. 행인들이 툭툭 치며 지나칠 때마다 술집 미희(美姬)처럼 웃음을 흩뿌리기도 한다.

어느 날, 나는 보았다. 장미로 둔갑한 그 꽃줄기에 수없이 많은 벌레가 죽어 있는 것을. 벌레 썩은 줄기에서는 진디물이 흐르고 악취가 풍겼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날리는 꽃가루는 향기를 잃은 꽃분이었다. 사랑도 생명도 없는 꽃가루였다. 가식으로 치장한 거짓 꽃가루, 진실을 모르는 허영의 꽃가루를 날렸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날리는 꽃가루는 향기를 잃은 꽃분이었다. 사랑도 생명도 없는 꽃가루였다. 가식으로 치장한 거짓 꽃가루, 진실을 모르는 허영의 꽃가루를 날렸다.

해마다 꽃피는 계절이면 우리 집 라일락도, 이웃집 넝쿨장미도 어김없이 나를 괴롭혔다. 그리하여 꽃 알레르기를 앓게 된 나는 꽃에 대한 불감증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꽃을 사랑하던 내가 꽃병에 걸려 재채기를 해야 했고, 콧물 눈물을 흘려야 했다. 봄 가을이면 어김없이 꽃병을 앓게 되었다. 스테로이드 호르몬요법이 있지만 소용이 없었다. 앤티히스타민제를 써서 알레르기 반응을 방지하려 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나의 시는

상상의 감주

한 모금의 희열이다.

누룩을 썩혀 온

토속의 항아리에

괴어 떠낸 밀주다.

아무도 몰래

떠 마시는

달콤한 언어의 감주,

바람맞은 놈들이

쥐불을 지르다

헤쳐 뿌리는 불꽃이다.

여왕벌을 쫓는 숫기로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르다가

합궁 끝에 떨어지는 찬란한 비명이다.

꽃 속에 갇힌 벌이

나래 떨며 울듯

황홀한 죽음의 절정으로

찰찰 넘치게 마셔대는

불 머금은 화덕이다.

번개바람 벼락 치는 사랑 끝에

저녁놀이 타듯,

자운영 꿀벌 잉잉거리며

소지처럼 타오르다가

사위어가는 목숨의 끄트머리

정겹게 피어오르는

한 아름의 열꽃이다.

-「열꽃」」-

 

단절된 꽃과 나 사이에 세월이 흘렀다. 꽃은 저만치에서 나를 본다. 나도 이만치에서 꽃을 바라본다. 그리하여 언제까지나 산에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홀로 피어 있게 되는 것이다.

 

 

원두막과 반야심경

 

원두막은 네 개의 다리로 선 채 언제나 하늘을 이어 모시고 있었다. 뭉게구름이 피어오르는 날짐승들이 날게 하는 그 푸른 하늘, 지극히 높고 너그러운 하늘을 머리에 이고 있는 원두막은 볏짚하며 소나무 기둥 등 모든 게 식물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버지가 처음 원두막을 세울 때 못 하나 박지 않고 새끼줄로 동여매어 세웠기 때문에 그것은 원초적인 식물성 그대로였다.

어린 시절 나의 꿈은 식물성 정신으로 가득한 그 원두막에서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사다리 서너 마디를 딛고 그 원두막에 오르게 되면 동서남북과 하늘땅이 한눈에 보였다.

우리 집에서는 해마다 참외며 수박 등의 원두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나는 할머니와 함께 그 원두막에서 여름방학 내내 살다시피 하면서 세계문학전집을 읽어 내려갔었다.

독서는 나만 하는 게 아니었다. 글을 모르시는 할머니는 할머니대로 나를 통해서 하셨다. 총기 밝으신 할머니는 나에게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이라든지, 「천수경(千手經)」에 나오는 진언을 물으시고, 나는 그 불경의 한자를 살펴보면서 염불을 알려드리곤 하였다.

그 당시 초등학생인 나로서는 불경에 모르는 한자가 많았기 때문에 여간 힘든 일이 아이었지만, 할머니의 신심(信心)이 대단했기 때문에 나는 성심을 다해서 알려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손자인 내가 먼저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행심반야바라밀다시(行深般若波羅蜜多時)하고 선창을 하면, 할머니는 그 뒤를 따라서 후창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하고 선창했을 때나 심무과애(心無罫礙) 무과애고(無罫礙故)하고 선창했을 때에는 할머니의 발음이란 말이 아니었다. 할머니는 이가 빠져서 발음이 새기 때문에 연신 헛바람이 나고, 혀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은 얄궂은 발음을 힘들여서 내기 때문에 같은 말을 자꾸만 되풀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산그늘 내리는 원두막에서

할머니와 나는 염불(念佛)을 한다.

내가 선창(先唱)을 하면

할머니는 복창(復唱)을 하고……

할머니가 되물으면

나는 또 되풀이하고……

총기(聰氣) 밝은 할머니와

눈이 밝은 손자(孫子)의

인과(因果)와

응보(應報)와

끝없는 문답의 윤회(輪回)는

색즉시색(色卽是空)……

無主空山에 달이 밝아

공즉시색(空卽是色)……

………………

………………

-「선풍(禪風)Ⅲ」-

 

그 어려운 염불을 알려드리는 것은 손자요, 배우는 이는 할머니임에 틀림이 없지만, 여기에서는 오히려 알려드리는 손자가 할머니의 신심을 배우고, 배우는 할머니가 그 믿음의 정신을 가르친다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할머니는 그 원두막에서 배워 익히신 반야심경이나 천수경 등을 얼마나 유용하게 외우시며 사셨는지 모른다.

이제는 그 원두막도 할머니도 뜬구름처럼 사라지고 없지만, 그 서늘한 원두막에서 염불을 외우시던 할머니의 정신은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가슴 속에 선명하게 살아있다.

뜬구름은 사라져도 하늘은 여전히 있듯이……

 

 

개구리참외의 향수

 

냉장고가 있을 리 없는 1960년대까지도 시골에서는 우물 속이 냉장고나 다름없게 쓰였다. 머리 벗겨지게 더운 여름일수록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우물 속은 생각만 해보아도 서늘한 기운이 감돌 정도로 냉기가 솟구쳐 흘렀다.

할아버지가 웃몰 밭에서 참외를 꼴망태에 따 담아 오시면, 할머니는 그것을 깨끗이 씻어서 우물 속에 넣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신작로나 뒷골목을 걷다가도 문득 참외를 파는 가게 앞을 지나치게 되면 나는 그때마다 어린 시절 내 고향에서 냇가나 원두막에 질펀히 앉아서 개구리참외를 즐기던 일을 생각하곤 한다.

지금 도시에선 노랑 참외뿐이어서 어린 아이들도 참외라면 그것은 으레 노랑색의 과일로 단정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참외라면 검푸른 바탕에 흰줄무늬가 나있는 개구리참외가 정말 맛있는 참외였다. 큰 것은 어린아이 머리통만한 게 여간 군침이 도는 게 아니었다.

껍질을 두껍게 깎아내면 속이 벌갰다. 그것을 통째로 들고 먹게 되면 영락없이 코끝에 외씨가 붙기 마련이다.

할머니는 그것을 좋은 것으로 골라가지고, 삼(麻)으로 꼬아 만든 망태에 담아서 줄을 길게 늘여 우물 속에 드리워 두었다가 몹시 더울 때면 하나 둘 꺼내어 우리들에게 깎아 주곤 했었다.

초가집 마루에 앉아서 먹게 되는 개구리참외 맛은 일품일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겨울엔 몸서리치게 춥고 여름엔 찜통 속같이 머리 벗겨지게 더운 슬레이트집과는 달리, 초가는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엔 서늘했다.

초가지붕과 흙벽과 앞뒷문이 마당과 뒤란으로 맞뚫려져서 통풍되는 그 한란(寒暖)의 조화로운 건축양식 속에서, 요즈음 도시 사람들처럼 그렇게 쩨쩨하게 잘게 썰어서 씨는 발라내고 포크로 찍어 먹는 게 아니고, 서늘한 바람을 등허리로 받으면서 통째로 들고 먹는 그 맛은 마치 이 세상을 들고 먹기라도 하는 듯한 그런 기분이었다.

 

고향이 그리운 날 밤엔

호롱에 불이라도 켜 보자.

말 못하는 호롱인들

그리움에 얼마나 속으로 울까.

빈 가슴에 석유를 가득 채우고

성냥불을 붙여 주자.

사무치게 피어오르는 향수의 불꽃

입에 물고

안으로 괸 울음 밖으로 울리니

창호지에 새어드는 문풍지 바람

밤새우는 물레소리 그리워 그리워

졸아드는 기름 소리에

달빛도 찾아와 쉬어 가리니……

-「그리움2」-

 

수많은 세월이 강물처럼 그렇게 속절없이 흘러가버린 지금, 나에게는 그 시골의 초가집도, 개구리참외를 따오시던 할아버지도, 그것을 주변 있게 알뜰히 간수해 두었다가 챙겨주시던 할머니도, 그리고 또다시 그분들의 바통을 이어받아 나에게 그런 추억을 이어 주시던 아버지도 없다.

다만 있는 것은 아스라한 기억 속에 반짝이며 살아있는 추억, 그 추억하는 생각의 부스러기라고 하는 관념의 사금(砂金)들 뿐이다.

 

 

모기장 속의 반딧불

 

어머니는 대청마루에 모기장을 치고 나는 그 안에 반딧불을 잡아넣었다. 모기장 속 어머니 곁에 누우면 밤하늘 별밤이 아스라이 내렸다.

모기장은 하나의 우주였고 반딧불은 그 우주 공간의 별나라를 떠도는 아기별이었다. 한동안은 말이 소용없었다. 그저 아늑하고 편안하기만한 그 공간 속에서 밤하늘의 별나라를 날아다니는 반딧불에 눈을 주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엄마, 좋지?」」

「그래, 참 좋구나!」

우리들의 대화는 간결하면서도 느렸다. 급할 것이 없었다. 서둘 필요가 없었다.

한동안은 그렇게 잠자코 있다가 그 우주 공간을 날아다니던 반딧불들이 움직임을 멈춘 채 여기 저기서 별처럼 반짝이게 되면 어머니는 그제야 천천히 이야기를 꺼내시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으레 옛날옛날 아주 아득한 옛날,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에 어쩌고 하시면서 얘기를 깊여 가셨었는데, 지금도 기억에 삼삼하여 그 시절로 돌아갈 것만 같다.

어머니의 옛날 얘기는 내 가슴 속에서 별처럼 반짝였다. 그 얘기들은 별밤을 떠도는 반딧불 같은 신비를 머금은 채 살아 숨 쉬는 것이었다.

지금까지도 잊혀 지지 않은 이야기, 구전으로 내려온 그 많은 이야기 중에서도 어느 선비에 대한 이야기는 세상을 살아오는 동안에 새로운 깨달음을 주었다.

한양 천리 과거 보러 가던 선비가 날은 저물고 잘 곳이 없어서 깊은 산중을 헤매다가 마침 건너편에 깜박거리는 불빛을 보고 찾아가니 아주 아름다운 처녀가 나와서 홀딱 반해버렸다는데 까지가 손에 땀을 쥐면서 귀를 기울이게 하는 서스펜스에 속한다.

그 선비는 과거 볼 것도 잊어버린 채 그녀와 함께 살았는데, 결국은 알고 보니 그 절세의 미녀는 백년 묵은 여우였다는 이야기였다. 어머니는 이야기 끝에, 그러니 여자를 조심해야 한다고 사족을 달았다. 여자란 얼굴 보다는 마음씨가 고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유리 조각을 본다.

시멘트 바닥 위에 깨어져 나간

내 상처 같은 거……

산산이 부서진 관념의

창 밖에 흩어진

색종이를 바라본다.

빛이 소용없는 잔상(殘像)에서

사라진 나의 꿈을 본다.

나의 꿈은

색종이에 불과했다.

꺾인 빛이 꽃피우는

유리 대롱 속처럼

착각의 순간은 황홀했다.

꽃 속의 벌이

꿀을 빨 때처럼,

공상의 날개는 찬란했다.

-「프리즘」-

 

세월의 흐름에 따라 여자란 정말 여우의 속성을 지녔다는 것을 터득하게 되었다. 아무리 이상적인 여성이라 할지라도 함께 살다 보면 결점이 노출되어 실망하게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인간의 삶이라고 하는 것, 꿈이라고 하는 것은 모기장 속의 반딧불 같은 것이었다. 별들이 총총 박힌 여름 별밤에 그처럼 모기장 속의 공간을 신비의 극치를 이루던 반딧불도 이튿날, 날이 새고 해가 뜨게 되면 보잘 것 없는 개똥벌레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내 기억 속에 살아있는 모기장 속의 반딧불, 그것은 내 가슴 속에 반짝이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꿈이 아니겠는가.

 

 

미루나무 그늘 아래서

 

나의 집 뒤로는 대밭과 연결된 산이 있고, 앞으로는 사철 냇물이 흘렀다. 북으로는 북부산이 우뚝 서있고, 동으로는 앞 냇물이 흘렀으며, 서로는 뒷 냇물이 흘렀다. 남으로는 양쪽 물이 합쳐 흐르는 곳에 합수정이 있었다.

앞 냇물에는 모래가 많아서 법수(어항)로 고기잡이에 좋았고, 뒷 냇물에서는 돌멩이가 많은 대신 물살이 빨라서 열낚시 하기에 좋았다. 남쪽의 합수정께로는 탁한 물의 흐름이 완만하여 독대로 양수래미를 몰아잡기에 좋았다.

나는 여름방학이 되면 동무들과 잠뱅이 하나로만 홀홀 벗어버리고 냇가에 나가 물고기를 몰아 잡아 가지고 서늘한 미루나무 숲 그늘에서 천렵놀이를 하는 게 일이었다. 마른 나무를 주워 모아 불을 지피고, 물고기의 배를 따서 찌개를 끓인다. 밥을 짓는다 하고 야단법석을 떨면서 천렵(川獵)을 즐기는 것이었다.

앞 냇물의 경우, 물고기를 잡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었다. 남비에 밥을 안치고, 마른나무 삭정이로 밥을 짓는 동안에 가끔씩 어항을 떠보면 되는 것이었다.

유리 어항(법수) 속에 들어간 물고기들이 오락가락 노니는 것을 보고 접근하여 들어 올리게 되면, 그 어항속의 피라미들은 굴절하는 햇살에 찬란히도 반짝이는 것이었다.

그곳을 지나가던 어른(농부)들 중에는 조숙한 우리들이 기특하게 보였던지 '어디 보자'하고 고기가 담긴 다래끼를 열어 보더니 그중 큰 것으로 서너 마리 골라잡아 배를 뚝 따서는 개울물에 헤적헤적 헹구어 가지고 한 마리씩 머리 부분부터 입에 물고 우적우적 씹어 먹었는데, 그럴 때마다 그 피라미는 꼬리를 바르르 떠는 것이었다.

밀짚모자를 눌러쓴 그 농부는 빙그레 웃으면서 '그 참 들큰허다!'어쩌고 하면서 멀어져 갔었는데, 그때 내가 바라본 하늘에는 키대로 자란 미루나무 잎들이 그 원시적인 생명감 넘치는 농부에게 일제히 손을 흔들어주는 것만 같았다.

우리들은 그 미루나무 숲 그늘에서 싱싱한 피라미의 배를 뚝뚝 따서는 초장에 찍어 먹기도 하고, 비벼먹기도 하면서 제법 어른들의 흉내도 곧잘 내게 되었는데, 정말 꿈같은 시절의 꿈같은 얘기였다.

 

그해 여름은

햇살에 비늘이 찬란했다.

그물을 들어 올릴 때마다

함성이 폭포처럼 떨어지고

눈썹이 검은 농부는

물고기를 생식(生食)했다.

그놈 맛 주우컸다!

그물 밑이 묵근하도록

물고기를 몰아 잡을 때마다

길 가던 농부는 어디 보자 어디 보자

배를 뚝 딴 피라미를

개울물에 헤적여서

한 입 물고 머릴 들면

바르르 떠는 은비늘에 햇살이 꽂혔다.

그놈 들크은허다!

찬란한 비늘에 햇살이 눈부셨던

그해 여름은

수천 억 만 톤의 햇살이

무료로 제공되었다.

-「그해 여름은」-

 

 

박덩굴과 호박덩굴

 

박덩굴은 초가지붕 용마루의 용마름께를 타고 오르고 넘나들면서 뻗어나가고, 호박덩굴은 토담 위의 그 짚으로 틀어서 지네 모양으로 엮은 이엉이라고 하는 용마름을 타고 뻗어나가고 있었다.

초가를 덮어 나가는 박덩굴이나 토담의 용마름을 타고 뻗어나가는 호박덩굴이나 다 마찬가지로, 처음 뻗어나갈 적만 같아서는 온 세상을 다 뒤덮을 것 같더니만, 결국은 초가삼간의 지붕이라든지, 담장의 용마름을 다 덮지 못한 채 잎도 줄기도 오그라붙기 마련이었다.

우리들 인생도 이와 같아서 처음 시작되는 청춘의 오전에는 호박처럼 박처럼 아들 딸 줄줄이 낳아서 온 세상을 내 것처럼 휩쓸 것만 같았지만 살다보면 그게 그렇게 마음대로 되어지는 게 아니었다.

박덩굴은 그래도 호박덩굴 보다는 상전 같은 귀족에 속한다. 박덩굴은 초가를 온 세상을 덮기라도 하듯이 그렇게 뻗어나갈 뿐만 아니라, 깨끗한 박꽃으로 소복단장하여 감히 함부로 범접치 못하게 하는 고아한 품격이 있었다.

 

박넝쿨이 에헤이요 벋을 적만 같아선

온세상을 얼사쿠나 다 뒤덮는 것 같더니

하드니만 에헤이요 에헤이요 에헤야

초가집 삼간을 못 덮었네, 에헤이요 못 덮었네.

복숭아꽃이 에헤이요 피일 적만 같아선

봄동산을 얼사쿠나 도맡아 놀 것 같더니

하드니만 에헤이요 에헤이요 에헤야

나비 한 마리도 못 붙잡데, 에헤이요 못붙잡데.

박넝쿨이 에헤이요 벋을 적만 같아선

가을 올 줄을 얼사쿠나 아는 이가 적드니

얼사쿠나 에헤이요 하룻밤 서리에, 에헤요

잎도 줄기도 노그라 붙고 둥근 박만 달렸네.

-김소월 「박넝쿨 타령」-

 

해가 서산마루에 기울고 어둠이 내리면 그 소복 차림의 박꽃은 홍살문이라도 세워줘야 할 청상과부처럼 말없이 마중 나올 뿐 허튼 수작을 부리는 법이 없다.

여기에 비하여 호박덩굴은 한수 아래가 아니라 한참 아래라 할 수 있다. 잘나지도 못한 주제에 짙은 화장으로 꽃가루를 처발라서 주변머리 없게도 벌을 끌어들여 새끼들만 많이 거느리고 사는 속물이다.

그는 언제나 헤픈 웃음으로 벌을 끌어들인다. 호박꽃 속에서 정신없이 꿀을 빨던 벌이 해지는 줄도 모르고 있으면 영락없이 갇히어 죽게 된다. 호박꽃은 해가 지게 되면 시나브로 오므라들기 때문이다.

일단 오므라지는 호박꽃 속에 갇히게 되면 그런 벌은 아무리 발광하는 소리를 내지르면서 맴돌아도 소용이 없는 일이다.

이 세상에는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자도 많지 않은가.

인공수정을 해본다, 제왕절개 수술을 한다, 인큐베이터로 키운다 하여 노심초사하고 야단법석인데, 잠만 잤다 하면 떡두꺼비 같은 아들딸을 마치 장마철에 호박 열리듯 쏘옥 쏙 뽑아내니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이래저래 세상은 공평한가 보다. 아기를 잘 가지는 호박덩굴도 품위를 잃지 않는 박덩굴도, 초가지붕에서 흙담장의 용마름께로, 흙담장 용마름에서 초가지붕께로 뻗어나가면서 사이좋게들 지낸다. 그들에게는 계급이 없기 때문이다.

박덩굴과 호박덩굴이 의좋게 지내듯, 사람들 모두가 의좋게 지내는 세상이 오면 좋겠다. 온 세상을 다 뒤덮을 것처럼 뻗어나가다가 초가삼간도 못 덮으면서도 화사하게 웃기만 하는 박꽃처럼 호박꽃처럼……

 

 

바다의 메타포

 

시냇가 맑은 물에 피라미 잡던 시절을 생각하면서 바다를 떠올린다.

엇! 붕어, 붕어! 엇! 피리, 피리! 하며 그물 밑이 묵근하도록 물고기를 몰아 잡아 서늘한 숲 그늘에서 천렵놀이를 하던 기억을 더듬으면서 알래스카 코디악의 빙하(氷河)를 떠올린다.

냇가를 지나던 시골 농부는 '어디 구경 좀 하자'고 하면서 우리가 잡은 물고기 그릇을 열어 보고는 그중 가장 큰 것으로 두어 마리 골라잡아 꺼내드는 것이었다.

그는 파닥이는 피라미의 배를 손톱으로 뚝 따서 시냇물에 휘적휘적 흔들어 씻어가지고 입에 물고는 우적우적 씹어 먹었는데, 그때 그 농부의 입에 물린 피라미가 비늘을 반짝이며 꼬리를 바르르 떠는 게 지금도 눈에 선하다.

세월이 흘러간 후, 그때의 그 불청(不請)의 침입자가 왜 그렇게도 매력적인 사내로 보이는지 모른다. 그 농부의 입에 물린 채 꼬리를 바르르 떨던 그 피라미를 생각하면서 태양을 떠올렸다.

알래스카 앵커리지에서 다시 경비행기로 1시간, 코디악 섬에서 다시 모터보트로 빙산이 녹아내리는 빙하 위를 달리기 2시간, 곰이 앞발로 물고기를 때려 잡아먹고, 에스키모가 그 곰을 잡아먹고 살던 그곳을 떠올렸다.

어린아이 팔뚝만한 정어리와 문어를 미끼로 낚시에 꿰어서 바다에 드리웠던 나는 천지신명께서 도우셨던지 운이 좋게도 나보다도 더 큰 할리벝이라는 물고기를 두 마리나 낚아 올렸다. 그리고도 그 새끼를 다섯 마리 더 낚았었는데, 그 중 한 마리를 회쳐서 다섯이 실컷 먹고도 남게 되었다.

나는 회를 고추장에 찍으려다가 갑자기 날아드는 수 백 수천의 갈매기를 보았다. 갈매기들은 물고기의 내장을 물고 날았는데, 마악 물고 뜨는 갈매기를 채어 가지고 날아가는 독수리도 보았다. 그 순간을 카메라로 포착했더라면 재미있는 작품이 될 텐데 하고 얼마나 아쉬워했는지 모른다. 지금도 생각하게 되면 아쉬움이 남는다.

 

알래스카의 하늘과 산과 바다는

물음표로 가득했다.

물어도 물어도 끝이 없는

물음표와 물음표……

알래스카의 구름과 눈과 파도는

느낌표로 가득했다.

느껴도 느껴도 끝이 없는

느낌표와 느낌표……

밤이 없는 알래스카의 여름은

불타는 태양으로 가면을 벗긴다.

가식의 옷을 벗고

구릿빛 등살을 드러낸다.

곰이 앞발로 물고기를 건져먹듯

시원(始原)을 건져 먹는

내 의식(意識)의 어망(魚網)……

알래스카는

내가 잡은 물고기의 싱싱한 회다.

관념의 껍질을 벗기고

고추장을 찍을 때

일제히 몰려온 물음표 느낌표가

만선(滿船)으로 가득했다.

-「알래스카」-

 

한여름인데도 빙하 주변의 산에는 눈이 하얗게 쌓여 있었다. 밤 시간에 잠에서 깨어 밖으로 나와 보면 번하게 밝은 대낮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밤이 없는 백야(白夜)의 북극에서 싱싱한 회를 먹던 그 원시적 생명감이 넘치던 바다는 끝없는 물음표와 느낌표로 가득했다.

나는 그 원시적 생명감이 넘치는 바다가 너무너무 좋아서 바닷가에 서면 마음에 푸른 물이 들 때까지 바라보게 된다. 온몸으로 말하는 그 언어를 귀담아 들으면서 그 영혼을 찾아 다니게 된다.

세상 사람들의 언어 대신에 손짓 발짓으로, 머리카락으로 어깨로 가슴으로 온몸으로 뒹굴고 처박히며 솟구치다가 어스러져 내리는 벙어리 바다, 언제까지나 늙지 않는 벙어리 바다는 건강했다.

그가 푸른 목숨으로 조약돌을 다듬으며 침묵으로 말해오기를 수백억년! 아아, 나는 감히 그 앞에 바로 설 수가 없다. 눈부신 태양을 머금은 바다를 바로 볼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죄수처럼 옷깃을 여미고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보는지도 모른다.

바다는 영원한 메타포였다. 그 속에서는 사랑과 미움이 영원히 살고 죽는 은유가 있다.

누워있는 해변은 사내들의 바람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건강한 소금물로 하얗게 달려오는 백마 떼 물비늘, 그 원시의 땀 속으로 침몰하던 여인들이 다시 깨어나고 있었다.

죽었다가도 다시금 깨어나는 바다는 소금의 입방체(立方體)였다. 그것은 연인들의 몸짓이었다. 불타는 남녀의 몸짓이었다. 건강한 연인들, 불타는 남녀의 몸짓이었다.

바다는 끝없는 수수께끼였다. 미궁에서 꿈을 꾸는 그것은 영원한 미지수였다. 시를 썼다는 마릴린 먼로의 바다는 온몸으로 말하면서 까무러치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낮과 밤같이 알 수 없는 신비의 베일 저쪽에 있었다. 푸른 하늘과 바다가 입술을 포개는 그 사이로 혀같이 붉은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바다는 언제나 한 몸이 되어 살아있었고, 죽을 때는 절정에서 어스러져 내렸다. 최고의 절정에서 바위를 물어뜯는 파도의 이빨이 바람을 먹을 때 죽을 듯이 아우성을 치는 바다는 언제나 다시금 깨어나고 있었다.

 

우리 살아요, 함께 살아요.

언제나 언제까지나 함께 살아요.

당신 속에 내가 살고

내 속에 당신이 살듯

그렇게 한 몸 되어 영원히 살아요.

우리 죽어요, 함께 죽어요.

순간 순간도 함께 죽어요.

죽을 때는 속시원히

어스러져 내리는 목숨으로

우리 한 몸으로 구비치며 죽어요.

죽을 때는 사는 것처럼 죽어요.

살아날 때는 죽는 것처럼 살아요.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당신을 위해서

천만 번 죽어도 다시 살아나듯이

우리 하루에도 천 년을 살아요.

우리가 살고 죽는 것이

바람의 탓만은 아니예요.

일어나고 까물치는 정사(情事)도

바람의 탓만은 아니예요.

젊은 날의 불장난 같은

온몸으로 타오르는 몸짓도

아낌없이 투신하는 사랑도

바람의 기교가 아니예요.

조약돌을 정교하게 다듬어내는

그 능수능란한 성애(性愛)도

모닥불을 질러놓고 광란하는

가수 밀바도, 인디안 처녀도

그 소리도, 그 몸짓도

숫기의 바람 탓이 아니에요.

그것은

짭조름한 소금물

변하지 않는 진실

당신은 그 어쩐지

내 속에 살아있는 눈물……

우리 끝없는 수수께끼……

우리 무궁무진한 메타포를 위하여

우리 순간순간 한 몸 되어 죽고

우리 한 몸 되어 영원히 살아요.

-「바다」-

 

신비로운 물비늘을 뿜어내면서 정사(情死)하고 다시 깨어나는 바다는 젊은 날의 불장난 같은 것이 아니다. 끝없이 애무하고 아낌없이 투신하며 자기를 쑤셔 박는 그 능수능란한 몸짓에서 바다의 절묘한 필법을 배운다.

은유와 상징으로 말하는 바다, 죄와 벌이 소용없는 선량한 범죄자에게서 사랑의 알 수 없는 순간과 영원을 느낀다.

이 세상을 살맛나게 살고 싶은 나는 그 바다에 의식(意識)의 세포로 짠 어망(漁網)을 드리우고 원시적인 생명력이 만선(滿船)으로 가득히 채워오기를 기대하며 산다.

은비늘을 반짝이며 파닥이던 피라미를 입에 물고 질겅질겅 씹어 먹던 그 농부처럼…….

 

 

망각의 술, 기다림의 잔

 

「선생님, 저 소원이 있어요.」

「뭔데?」

「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거죠?」

「뭔데 그러니?」

「약속해 주시는 거죠?」

「그래, 어서 말해봐.」

「꼭요, 꼭……」

「말해 보라니까」

「선생님!」

「?」

「선생니임……」

선뜻 말을 못하고 글라스만을 만지작거리는 그녀의 총명한 눈망울 같은 별들이 밤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스카이라운지에서 내려다보이는 도시는 불빛으로 찬란했다. 맥주 컵마다 출렁이는 은하수를 들이마시고 있었다. 투명한 글라스 속에서 은하수가 출렁거리고 별들이 흔들렸다.

나는 그녀와의 거리를 항상 유지했다. 그를 아끼기 때문에 언제나 가야할 때 가도록 보내주어야 했다. 손을 흔들어 주면서 그렇게 보내야 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이성이라는 물로 감성이라는 불을 꺼야 했다.

여기에는 진정한 사랑과 인내가 요구되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의 향상을 바라게 된다. 상대방의 향상 발전과 행복을 위해서는 자기 이성의 물로 감성의 불을 꺼야 한다. 자기 스스로 이성과 감성의 균형 있는 조화로서의 다스림으로 모든 것을 참으며 기다리게 될 때 비로소 저만치 거리에서 손을 흔드는 그리움이 아름다움으로 자리하게 된다.

이러한 경우의 아름다움이란 진정한 사랑의 아름다움이 된다.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그러한 집착에서 떠난 무집착 무소유의 경지로 가는 아름다움이다. 욕망이 덕지덕지 붙어있지 않는 너그러움과 용서로 감싸주며 보내주는 순수한 사랑의 아름다움이다.

 

보내놓고 돌아와

틀어박는 쐐기는 아름답다.

쐐기의 미학으로

눈물을 감추면서

피어내는 웃음꽃은 아름답다.

기다림에 주름 잡힌 얼굴로

쏟아져 내리는

햇살의 만남은 아름답다.

태양의 미소와

바람의 애무

눈짓하는 나무는 아름답고

지저귀는 새는 아름답다.

아름다운 것은

눈짓하는 나무와

지저귀는 새,

떠난 이의 뒤에서 헛웃음 치는 아픔이다.

보내놓고 돌아와

짜깁는 신경의 잔을 기울이며

하루를 천년같이 기다리는 노을이다.

노을 담긴 그리움이

한(恨)으로 괴이어

떠낸 시의 잔(盞)에 넘치는 술의 입술이다.

아름다운 것은

산불로 타오르던 나무

뚫린 가슴에

울며 울며 쐐기를 지르는

망각의 술, 기다림의 잔이다.

-「아름다운 것」-

 

쐐기라고 하는 것은, 벌어진 틈서리와 틈서리 사이에 끼워 물리는 나무나 돌 같은 것을 말하는데, 여기에서는 그러한 마음의 상태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가까이에 있던 인생의 길동무가 멀리 떠나게 되면, 그의 마음엔 구멍이 뚫리고 찬바람이 일기 마련이다. 구멍 뚫린 고목(古木)처럼 휑하니 뚫린 가슴으로 쓸쓸한 찬바람이 지나가고 가랑잎이 휘날리게 마련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스스로 그 구멍을 메우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빈 곳을 틀어막는 쐐기질이다.

자기의 구멍 뚫린 마음, 아픈 상처에 스스로 쐐기질을 하면서도 눈물을 감추어야 하고, 웃음꽃을 보여 주어야 한다. 상대방의 향상, 상대방의 행복을 위해 곱게 떠나보내면서 웃음꽃을 선사하는 마음, 그리고 보내놓고 돌아서서 눈물을 감추는 마음은 아름다운 마음이요, 사랑스러운 마음이다.

정겨운 사람을 애틋하게 보내면 보낼수록, 보내는 그 시간부터 하루, 이틀, 사흘……. 일년, 이년, 삼년……. 십년, 이십년, 삼십년……. 그리움은 여물어가고 기다림은 절실해 진다. 그리하여 기다림에 주름 잡힌 얼굴은 슬픔과 아름다움으로 곱게 익어서 맛이 드는 과일과도 같은 결정체를 이룬다.

인간 사회에서 혐오를 느끼는 사람은 자연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염세를 느낀 사람은 자연에서 위로를 받고자 한다. 때로는 어떠한 종교의 진리, 그 진여(眞如)의 깨달음을 얻어 안심입명(安心立命)의 경지에서 조용히 살아가려고 하기도 한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게 되면 비로소 대자연의 사물들이 제대로 보이게 된다. 태양의 미소와 바람의 애무를 눈치 채게 된다. 눈짓하는 나무와 지저귀는 새들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오게 된다. 눈짓하는 나무와 지저귀는 새처럼, 떠난 이의 뒤에서 사랑으로 보내면서 쓸쓸이 헛웃음을 치는 그 아픔은 아름다움이요, 사랑스러움이다.

사랑으로 보내면 보낼수록 그 보내는 이의 가슴에 남는 상처는 쓰리고 아프기 마련이다. 보내놓고 돌아오는 길에는 포장마차에라도 들려서 잔을 기울인다. 아픈 신경을 짜깁기하기 위해서도 잔을 기울이게 된다.

술은 망각을 위해서 있고, 잔은 기다림을 위해서 있는지도 모른다. 차라리 잊어버리자 잊어버리자 하고 수없이 다짐을 하면서 잔을 기울이지만, 결국에 가서 잔은 빈 잔이 되고, 그 빈 잔은 다시 채워질 날을 기다리듯이, 하루, 이틀, 사흘……. 일년, 이년, 삼년……. 십년, 이십년, 삼십년을 기다리게 된다.

하루를 천 년같이 기다리고, 천 년을 하루같이 기다리면서 그리움의 노을빛으로 사는 사람은 아름답다. 잊어버리자고 망각의 술을 들이키지만, 결국은 기다림의 잔으로 남게 된다. 입을 크게 벌리고 누구를 크게 부르는 듯한 기다림의 잔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아름다운 것은 결국 웃음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삼동(三冬) 가시나무 웃음꽃과 같은 것이다. 아픔을 참는 가시나무의 그 슬픔과 아픔에서 피어올린 웃음꽃이다. 평생을 하루같이 기다리며 침묵하는 웃음꽃이다.

찔린 상처가 아물지 않아도 치유를 기다리며 생각하는 겨울 가시나무로 서서 먼 하늘 우러르는 눈빛이다. 아름다운 것은 평생을 하루같이 기다리며 속울음 삼키는 사람의 얼굴에 내리는 햇살이다.

아름다운 것, 그것은 웃음꽃을 피워 보낸 뒤에 울며울며 아픈 상처에 쐐기를 지르면서 신경을 짜깁기하는 망각의 꽃빛 술이요, 기다림의 노을빛 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