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숭례문 무너지는 소리
황 송 문
국보 제1호 숭례문에 불을 질러 전소시킨 방화범에게 징역 10년의 중형이 선고됐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4부(이경춘 부장판사)는 25일 문화재보호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된 채모(70)씨에게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숭례문은 600년 넘게 유지돼온 조상의 얼이 담긴 유산 중의 유산으로 도심 한가운데 위치해 과거와 현재가 조화된 서울을 상징하고 국가를 대표하는 문화재였다”며 “귀중한 숭례문이 불타 국민들에게 큰 정신적 피해를 입힌 점, 국민과 국가의 위신을 손상케 한 점, 완전한 복원이 불가능하고 국민의 상처가 쉽게 회복될 수 없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중형을 면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한편, 숭례문 방화범에 대하여 사형이나 무기징역형을 선고하지 않았다고 불만을 품은 대학교수가 스스로 몸에 신나를 끼얹고 분신자살을 시도한 사건이 알려져 세인을 안타깝게 했다. 이 소설은 문예신 교수의 뒤를 따른 S대 국문과 4학년생 박명숙(23) 양의 책가방 속에서 발견된 유서 같은 작품을 세상에 공개하기로 했다. 한 편의 시와 소설을 공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학생들에게
말의 씨가 먹히지 않을 때는
씨가 먹히는 씨 있는 말을 하고 싶다.
말로 해서 듣지 않을 때는
아무리 말을 해도 듣지 않는 이에게
진정으로 말다운 말을 할 터이니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나의 말다운 말을
듣고 보고 행하라고
씨가 있는 말을 하고자 한다.
수업 시간에
사람다운 사람이 되라는 말,
그 한 마디를 아끼면서
가부좌를 한 자세 그대로
온몸에 신나를 들어부은 다음
라이터 불을 확 붙여서는
내 몸이 활활 타들어갈 때
대불처럼 미동도 하지 않으리라.
내가 불탈 때
기겁을 하고 놀라는 그 순간,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자성하게 되면
내 불의 말은 씨알이 영글어
자자손손 씨가 있는 참말이 꽃피리.
- 문예신의 시 「씨가 있는 말」-
누군가 나의 책가방을 열어보는 사람은 나의 글을 공개하여 주기 바란다. 사는 동안에 진솔하게 적은 나의 유서 같은 생활 기록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몸을 씻고 씻어도 말끔히 씻겨 지지 않는 원죄의식을 어떻게 태워버릴 수는 없을까 하고 궁리하였으나 별 뾰족한 수가 없기 때문에 나는 교수님의 뒤를 따르기로 했다. 그동안 나는 몰랐었는데, 교수님의 놀라운 사건을 겪고부터는 나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구멍이 파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B29 비행기가 떨어뜨린 폭탄에 강변에 구덩이가 파인 듯한 그런 공허함이었다. 나는 그 무엇으로도 그 공허를 메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불에 놀랐다. 교수님의 불에 놀랐고, 숭례문의 불에 놀랐다. 불은 입의 막대기라고 성경은 말했었다. 나를 놀라게 한 문예신 교수님을 만나게 된 것은 대학 1학년 신입생 때였다. 첫 대면이라는 면접 때 교수님은 만일 입학을 하게 되면 대학신문사 기자로 활동하는 게 바람직하겠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래서 나는 입학 후 기자 시험에 응시했고, 신문사 주간을 맡고 계신 문예신 교수님을 자주 뵐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몰랐었는데, 학년이 올라갈수록 교수님께서 많은 고민을 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학신문 편집회의를 할 때 교수님은 우리 모국어를 제대로 부려 쓸 수 있어야 영어도 잘 하고 컴퓨터도 잘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학생들의 작문 실력이 형편없다는 것을 말로 표현하지는 않으셔도 탄식하는 소리를 나는 느낌으로 들을 수 있었다.
대학의 총장님과도 사이가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우리 대학에서는 원래 대학국어와 대학작문이 1학년 교양필수과목으로 있었으나 이공계의 커리큘럼에 밀려서 찬밥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 과목이 얼마 동안은 교양필수에서 선태과목으로 밀리다가 결국은 선택과목에서마저 빠져서 제로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영어와 컴퓨터는 100% 필수과목인데 비하여 국어와 작문은 제로(0) 상태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 결과 우리 대학에서는 고등학교 졸업 때의 작문 실력 상태로 대학을 졸업하게 되므로 품위 있는 작문이나 언어생활은 고사하고 주관식 시험답안마저 제대로 쓰지 못하고 서술 도중에 마침표를 찍고야 마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되었다. 언젠가 교수님은 강의를 하시다가 이런 말씀도 하셨다.
“내가 삼십년 전에 일본 유학을 했었는데, 그때 한 가지 배운 게 있다. 그들은 자국어를 매우 귀하게 여긴다. 그래서 철저하게 가르치고 배운다. 우리 국어에 비하면 에프나 티 발음 등 가나가 부족해서 택시를 다꾸시라 하고, 커피를 고히라고 하는 문자인 데도 아주 애지중지하는데, 우리는 세계적으로도 우수한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문자를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았는데에도 스스로 천대하고 있으니 한심한 일이다. 나는 일본에 한 달 늦게 도착하였으며 그 부족일수를 채워야 한다고 해서 여름방학 동안에 수업일수를 채운 일도 있다. 나 혼자서 수업을 받은 것이었다. 내가 배운 게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문예신 교수님의 말씀은 마치 골짝물이 흘러가듯이 일사천리로 흐르는 청산유수 같았다. 학생 기자들이 밤늦게까지 편집회의를 하고 귀가할 때는 차가 끊기고 없기 때문에 교수님께서 6-7명의 학생들을 자가용차에 태우고 순회하듯 내려주시는 것이었다. 교통법규 위반인 줄 알면서도 학생기자들을 위해서 배려하곤 하셨다.
내가 2학년으로 올라가면서는 대학신문사의 문화부를 맡게 되었다. 그리고 수업시간 외에 틈틈이 소설작품을 보여 첨삭지도를 받기도 하였다. 나는 그 덕에 소설을 응모한 게 뽑혀서 상금과 상패를 받기도 하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교수님께서는 면접 때 벌써 나의 싹수를 알고 대학언론사에서 일하도록 종용하신 것 같다.
어느 날 대학 선배인 대학언론사 간사와 편집장이 합세하여 기자들에게 기합을 주는 일이 벌어졌었다. 기합은 보통 기합이 아니었다. 신문뭉치를 몽둥이처럼 말아가지고 기자들을 엎드려뻗치게 해놓고 히프를 마구 패대기치는 것이었다. 몰매를 맞은 기자들이 반발하자 간사와 편집장이 기자들의 사표를 받는 사건이 벌어졌다.
문예신 교수님은 수습하기 위해서 일을 저지른 두 사람에게 기자들에게 사과하고 불러 모아 원상회복하라고 지시하셨지만 그 두 사람은 듣지 않았다. 문예신 교수님은 두 사람의 사표를 받았다. 그때부터 두 사람은 문예신 교수님을 모함하기 시작했다. 편집교육을 시킬 때 문사철(文史哲)을 강조한 얘기에 침소봉대해서 이공계 출신 총장을 비난했다고 투서까지 낸 것이었다.
그 사건에서 적당히 타협하지 않는 문예신 교수님은 자의반타의반으로 신문사 주간 자리에서 그만두게 되었다. 그 일이 있은 후로 문 교수님은 더욱 말수가 적어지셨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들에게는 교수님이 저술한 책들을 나눠주시는 등 정성을 다하지만, 공부와는 담을 쌓는 학생이 걸리게 되면 심하게 닥달을 하는 것이었다.
언젠가는 국문학과 조교의 연락을 받고 교수님의 연구실을 찾은 일이 있었다. 거기에는 나 말고도 세 사람의 남녀 학생들이 와있었다. 문예신 교수님께서는 리포트 용지를 내어놓으면서 “누가 누구의 리포트를 베낀 거야?” 하고 물으셨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나는 교수님의 얼굴을 살피면서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째서 이 둘과 이 둘이 똑같으냔 말야!”
“…… …… …… …… …… …… …… ”
교수실에 불려온 네 명의 학생들이 마치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이 없자 교수님은 다시 입을 여셨다.
“두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은 복사하거나 베꼈을 게 아니야?”
“죄송합니다.”
한 남학생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왜 죄송해? 죄송하다는 말의 존재근거가 있을 게 아니야?”
“도서관 책상에 있는 것을 제가 좀……”
“좀이 어떻다는 거야?!”
“자리에 아무도 없기에 제가 복사해서……”
문예신 교수님은 어이가 없다는 듯 약간의 씁쓰름한 미소 같은 표정이 한번 스치고 지난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다음 순간 눈을 감으신 채 한동안 말이 없으셨다. 몹시 곤혹스러워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 한 순간 눈을 뜨신 교수님께서는 누구는 누구의 리포트를 글자 하나 안 틀리고 완전히 베껴먹었는가 하면, 누구는 누구의 리포트를 생쥐가 마른 떡 갉아먹듯이 여기 집적 저기 집적, 집적거리며 짜깁기를 교묘하게 해냈다고 지적하면서 그렇게 공부가 하기 싫으냐고 탄식을 하시는 것이었다.
교수님은 맥이 풀리시는지 남의 리포트를 베껴낸 남녀 두 학생에게 A4용지로 6매씩 써내도록 지시하시고는 어서 나가 작성하라고 손사래를 치셨다. A4용지로 3매씩 써내게 되어 있는데, 그 두 학생에게는 벌칙으로 배가되었다. 그러니까 보다 과중된 탕감조건을 부과한 셈이다. 이런 일 저런 일들로 하여 문예신 교수님의 수강문제는 확연하게 판이 갈라지게 되었다.
향학열이 불타서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들은 문예신 교수님의 과목을 듣는데 반하여, 공부에 별 뜻이 없는 학생들은 점수 잘 주는 강사들의 강의를 선호하기 때문에 교수님의 강의를 필수과목 외에는 회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학생들을 수업 시간에 접하게 되는 경우에는 교수님 특유의 작전이 개시된다.
가령 교수님께서 강의를 하시는데 뒤쪽에 나란히 앉은 남녀 학생이 강의는 듣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면 한동안은 모른 체 강의를 계속하지만, 그게 도가 지나치다고 여겨지는 순간, 그 남녀 학생을 불러내어 이제까지의 강의 소감을 말하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그 두 학생은 강의를 제대로 듣지 않았으니 말을 할 수가 없어서 그냥 서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교수님은 그런 학생에게 벌칙을 가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 대신 자리에 들어가라 해놓고 은근히 뜨거운 말씀으로 우리를 불 지지는 것이었다.
“나는 여러분에게 언제나 경어를 쓰고 있다. 내가 수업을 통해서 성공하기 위해서다. 여러분이 훌륭한 인재로 향상 발전하게 될 때 나는 성공하게 된다. 여러분이 성공하지 못하면 나는 실패하는 거다. 지금 내가 강의하는 이 시간은 문예신이라는 연탄이 나의 위에 얹혀있는 여러 학생들 연탄에 불을 붙여주는 시간이다. 여러분이 나의 이 화력을 힘입어서 잘 타게 될 때, 그리고 여러분은 나처럼 여러분 위에 얹혀있는 연탄에게 불을 붙여주게 될 때 재만 남은 이 문예신이라는 연탄은 절대자 하나님이 꺼내어 가게 된다. 내가 아낌없이 타지 않으면 덜 탄 연탄재는 까맣게 가스가 남아있는 흉물 덩어리가 된다. 요즈음 나의 관심사는 여기에 있다. 인생의 마지막 날 하나님께서 나를 꺼내어 가실 때 나는 빙판길에 뿌려도 눈처럼 하얗게 된 연탄재인가, 아니면 검정이 거뭇거뭇 남아있는 흉물 덩어리로 남겠는……”
이때 교수님의 말씀이 갑자기 뚝 그쳤다. 학생들 쪽에서 휴대전화 소리가 크게 울렸기 때문이다. 휴대전화기를 만지작거리던 여학생이 재빠르게 껐으므로 그것을 문제 삼지 않고 말씀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아까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말씀이었다.
“…여러분 부모님들은 자기 자식이 열심히 공부하는 줄로 알고 계실 것이다. 어렵게 등록금을 마련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나는 졸업생을 배출할 때마다 마치 라면 하나 제대로 끓여먹지 못하는 딸을 시집보내는 기분이다.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은 채 놀기만 좋아하는 반거들충이가 생존경쟁이 치열한 사회에서 어떻게 존경받고 사랑을 받은 수 있을 것인지 걱정이 태산 같단 말이다!”
교수님께서는 말씀을 이쯤에서 그치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주어진 과목을 정확히 마치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교수님은 건강한 줄로만 알았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날로 쇠약해지시는 것이었다. 몸이 극도로 쇠약해지니까 대상포진까지 발생하여 고통을 힘들게 견디시는 모양이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교수님의 불을 내뿜는 듯한 열강은 식을 줄 몰랐고, 신문이나 잡지에 기고하는 글들은 마치 장작을 빠개듯이 명료하기 이를 데 없었다. 며칠 전에 읽은 일간신문의 칼럼만 보아도 선비정신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것이었다. 그 글을 여기에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요즘 실용주의가 만병통치약처럼 각광을 받고 있다. 대학도 예외가 아니다. 실용주의의 범람으로 상아탑은 이미 멍든 지 오래다. 역대 정권들이 교육이라는 화롯불을 저마다 정치논리나 경제논리로 쑤석거리다가 학문의 불씨를 꺼뜨리기에 이르렀다. 상다리 내 개 중 하나가 좀 커보여서 자르고 또 균형이 맞지 않아 자꾸 자르다 보면 결국 쓸모없게 된다. 우리 대학이 꼭 그 꼴이다. 교육부장관이 바뀔 때마다 상다리 하나씩 자르곤 한 게 이제는 잘린 부분들이 균형을 잃어서 대학인지 취업학원인지 분간하기 힘든 몰골이 되고 말았다.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 해도 대학은 엄연히 학문하는 곳이다. 학문의 목적은 진리탐구에 있고, 그 본질은 합리성과 실증성에 있다. 이를 위해 대학은 교육하고 연구하며 사회에 기여한다. 이러한 기능이 균형 있게 조화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오늘의 대학은 심각한 쏠림현상으로 대학다움을 잃어가고 있다. 실용을 지나치게 내세우다 보니 문사철(文史哲:문학 역사 철학)로 대변되는 인문학은 소임을 다하지 못하는, 시대에 뒤떨어진 학문 으로 치부되고 있다.
돈에 약한 대학은 소신을 잃은 채 치사해지고 비굴해지게 되었다. 소신껏 학생을 뽑을 수 없고, 수준미달의 학생을 졸업시키지 않을 수도 없다. 정부의 지원은 미미하고, 학생 등록금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대학으로선 수준이 떨어지는 학생도 감지덕지해야 하는 현실이다. 하기야 교수들이 신입생을 끌어 모으기 위해 ‘모집전선’에 투입되는 처지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한국 땅이니 대학에서 우리말인 국어가 영어보다 중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순진한 교수는 아직 주위에서 보지 못했다. 국어보다 영어를 더 잘 가르쳐야 한다거나 국사보다 컴퓨터를 더 잘 해야 한다고 고집하는 교수도 물론 없다. 취업이 최고의 덕목이요, 실용이 대학의 이념으로 부상한 시대이니 말이다. 아무리 그렇다손 치더라도 영어와 컴퓨터가 100% 필수과목인데 비해 국어나 작문이 선택과목에서까지 ‘전멸’이 되고 있는 현실에는 솔직히 비애감이 든다.
이렇듯 실용주의는 막강한 불도저 같은 막강한 힘으로 인문정신을 대학에서 밀어냈다. 일전에 강의를 하다 우리나라의 탄신일이 언제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아는 학생은 한 사람도 없었다. 우리나라 생일은 단군기원으로 올해가 4341년째가 된다. 단기에 서기를 병기해 써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대한민국엔 아버지다운 아버지가 없다. 아버지가 없으므로 뿌리가 있을 턱이 만무하다. 뿌리가 없으니 나라 생일인들 관심이 있겠는가. 당연히 민족의 정체성이 흔들릴 밖에. 물론 대학을 졸업해도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이태백’ 시대에 대학의 본연의 업무인 진리탐구만 강조할 수 없을 것이다. 청년 백수들이 늘고 있는 상황에서 학생들이 인문학 강좌에 관심이 없는 것도 당연할지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취직이 중요하고 실용이 시대적 가치라 하더라도 대학이 그 본분인 진리탐구를 내팽개칠 수 있는가.
진리 탐구와 실용이 균형을 이뤄야 한다는 얘기다. 쇠고기가 좋다고 해서 육류로만 밥상을 차려서야 되겠는가. 지금 우리 대학의 현실을 보면 아이들과 사회가 좋아하는 고기반찬으로만 상을 차린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편식을 하면 아이들의 체질이 약해지고 병에 대한 내성도 떨어져 신체적인 각종 부작용을 일으킨다. 이런 병폐는 비단 음식에만 국한되는 일이 아닐 것이다. 아마 정신적인 편식이 훨씬 더 위험하지 않을까. 실용을 앞세운 대학의 학문 편식이 자라나는 학생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걱정이 앞선다.
문예신 교수님의 「실용에 멍든 상아탑」이라는 시사 칼럼을 읽고 났을 때는 가슴이 서늘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심한 아픔이 되어 뭔가가 가슴을 후벼 파는 것만 같았다. 평소에는 이렇게까지 내색이 없으셨는데, 이처럼 치열한 생각을 하고 계시다는 것을 칼럼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고지식하고 꼼꼼하기에 이를 데 없는 교수님께서 학생들의 일로 스트레스를 받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내가 아는 것만 해도 부지기수였다. 선배들이 졸업생 사은회라고 해서 교수님들을 모시고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서였다. 우리들까지 다 알게 되었지만, 그 날 졸업을 하기에는 점수가 모자란 맹란(추맹란) 언니가 교수님 곁에 않아서 음식 서빙을 하는 모양새를 이상하게 여겼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이튿날 문제가 발생했다.
이침부터 교수님 연구실을 찾은 맹란 언니가 교수님을 괴롭히는 것이었다. 처음엔 교수님께서 조용조용히 말씀하신 모양이었다.
“자네는, 자네도 알다시피 결석도 많이 했고, 기말고사 점수도 없고 그래서 학점을 줄만한 근거가 없단 말이다.”
“…그래도 다른 교수님들은 점수를 다 주셨는데요?”
“그건 모르는 일이야.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니?”
“그래도 다른 교수님들은 졸업반이라고 학점을 다 주셨는데, 교수님만 에프학점 처리해서 졸업을 못하게 생겼단 말이에요!”
추맹란 언니는 이때 눈물을 쏟았다.
“그러니까 내가 뭐라고 했어?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라고 하지 않았어? 자네가 가뭄에 콩나듯 어쩌다가 출석을 했을 때 내가 칠판에 글씨까지 써가면서 주의를 주었는데 생각나지 않니?”
“…………………………………………”
“소년이로학난성(少年易老學難成) 일촌광음불가경(一寸光陰不可輕)이라고 판서까지 하면서 말했잖아?”
이때였다. 연구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한 마리의 벌이 천정을 맴돌고 있었기 때문에 교수님의 말씀이 뚝 그쳤다. 그 벌은 다시 테이블 위의 등잔 주변을 맴돌다가 창문에 부딪치기도 하고, 책상 위에 떨어졌다가는 다시 창문께를 배회하고 있었다. 잘못 들어온 벌은 창밖으로 나가려 하나 들어온 틈서리를 찾지 못한 채 온갖 발광을 다 떠는 것이었다.
교수님이 창문을 활짝 열자 창가에 맴돌던 벌은 어느 결에 연구실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교수님은 생각난 듯이 추맹란 학생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모든 교수님들이 학점을 다 주었는데 나만 주지 않아서 졸업을 못한다고?”
“네……”
추맹란이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겨우 대답을 했다. 교수님은 책장에서 『예술철학』하권을 뽑아서 맹란에게 건네주면서 말한다.
“시간이 없어. 사일간의 시간을 줄 테니까 이 책을 읽고 에이포 용지 열장에 요약 정리해서 제출해봐. 제대로 읽고 나서 학점을 줄 것인지 결정할 테니까. 팔백 쪽이 넘은 책이라 젓먹던 힘까지 다 쏟아야 할 게야”
“네…감사합니다.”
“가봐.”
“수고하세요.”
“뭐? 수고하세요?”
“네에?”
“수고하라는 말은 손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는 말이야. 자네가 나의 윗사람인가?”
“?……”
맹란언니가 두 눈을 멀뚱히 뜬 채 말이 없자 문교수님은 조용히 타이르는 것이었다.
“자네가 나에게 할 수 있는 말은, 고맙습니다나 안녕히 계세요, 또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정도야. 그러니 제발 수고하라는 말은 하지 말게. 이젠 나가도 돼.”
추맹란 학생이 연구실을 벗어나자 실내는 금세 조용해졌다. 요란을 떨던 벌도 나가고, 훌쩍거리던 추맹란 언니도 나가고 연구실이 조용해지자 나는 벼르고 별렀던 얘기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교수님.”
“왜?”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으세요?”
“긴요한 얘기니?”
“네……”
나는 연구실 바닥에 눈을 내리깔면서 겨우 대답했다.
“시간이 걸리는 얘기니?”
“네, 선생님께서 카운슬러가 돼주셔야 돼요.”
“그렇다면 나가서 얘기하자.”
나는 교수님의 차를 탔고, ‘시인과 산적’이라는 찻집 마당에서 내렸다. 노송이 우거진 숲속에 아름다운 서구식 전물이 우리를 반겼다. 넓은 창밖에는 소나무 가지 사이로 옥같은 하늘이 고여 있었다.
한동안 창밖을 응시하던 교수님께서는 탁자 위에 커피가 놓이자 천천히 입을 여셨다.
“무슨 얘긴데?”
“좀 어려워요.”
“말해봐.”
“부모님께도, 친한 친구에게도, 아무에게도 말 못할 얘기예요.”
“무슨 얘긴데 그렇게 뜸을 들이니? 그렇게 아무에게도 말 못할 얘기를 왜 나에게는 하려고 하는 게야?”
“믿음이 생겼거든요.”
“어떤 믿음?”
“편하게 말씀 드려도 되겠다는 믿음……”
“내가 뭔데…아무튼 고맙다. 나를 그렇게 인정해 줘서.”
“실은요, 제게는요, 사귀는 사람이 있거든요.”
“우리 학교 학생이니?”
“네……”
“사귀는 게 뭐 잘못이니?”
“그게 아니라…”
“선을 넘었니?”
“네……”
“그럼 결혼하면 되잖아?”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니?”
“………………”
“시간을 내달라고 해놓고 왜 꿀먹은 벙어리처럼 말을 못하니?”
“결혼은 생각해 본 일이 없는데, 그냥 그렇게 되고 말았어요.”
“그래, 앞으로 어떻게 할 거니? 결혼할 사람이 아니라면 빨리 끊어야지.”
“그게요……”
“그게 어떻단 말이니?”
“원룸에서 살고 있어요.”
나의 이 말에 교수님께서는 하도 어이가 없다는 듯이 창밖을 뚫어져라 응시하다가 눈을 감아버리셨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교수님이 눈을 뜨자마자 무거운 입을 여셨다.
“원룸에서 남녀 학생들이 산다는 얘기는 들어 알고 있었지만, 자네가 그 장본인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세상에…어찌 그런 일이……”
“엠티 갔을 때 술 마시고 어쩌다 그리된 후로 그 오빠 하자는 대로 끌려간 것 같아요.”
“끌려간 것 같아요가 다 뭐니.”
“제 몸을 제 맘대로 못 한 것 같아요.”
“부모님은 알고 계시니?”
“아직은 몰라요. 알면 전 맞아죽어요!”
“맞아죽을 짓을 왜 해?”
“……………………”
“너 바둑 아니?”
“몰라요.”
“바둑에 축이라는 게 있다. 바둑에서 축에 몰리면 둘수록 더욱 죽을 수밖에 없게 된다. 너는 지금 그 축에 몰린 게야.”
“그럼 전 어떡해요?”
“한시바삐 손을 떼는 거다.”
“………………”
“그럴 땐 육체가 악마야. 교회건 성당이건, 절이건 조용한 곳에서 금식을 하면서 육체를 쳐야 돼. 그걸 못하면 죽게 돼. 아니, 자네는 벌써 죽었어. 육체에 깃든 사탄 마귀의 밥이 되어있는 게야”
“마귀의 밥요?”
“그래, 마귀의 밥!. 이건 비밀로 할 테니 자네 스스로 빠져나와야 돼. 이건 자네의 책임이야. 자네가 지른 불을 자네 스스로 꺼야 돼”
“노력하면 구원 받을 수 있을까요?”
“그것도 자네에게 달렸어. 자네는 자네가 자신을 제일 사랑할 게 아닌가?”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 순간 부끄러움인가 뜨거운 게 얼굴로 확 끼쳐왔다.
“끊어!”
교수님께서는 이 한 마디를 끝으로 입을 굳게 다무셨다. 학교로 돌아올 때까지도 일체 말이 없으셨다. 상심이 크신 모양이었다.
그 날 이후로 교수님은 말이 부쩍 줄어든 것 같았는데, 숭례문이 불탄 후로는 그게 더욱 심해지는 것이었다. 교수님 연구실 테이블 한쪽 모서리를 차지하고 있는 등잔을 정성껏 닦았고, 거기에 얹혀있는 호롱에 석유를 채우고 불을 켠 다음 기도하며 우시는가 하면, 일주일이나 금식을 하며 시를 쓰시는 등 엉뚱한 일로 간담이 서늘케 했다.
고향이 그리운 날 밤엔
호롱에 불이라도 켜보자
말 못하는 호롱인들
그리움에 얼마나 속으로 울까
빈 가슴에 석유를 가득 채우고
성냥불을 붙여주자
조교 언니가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교수님이 힘드신가봐. 요즘은 그저 기진맥진이야. 교수님 아파트엔 치매에 걸린 노모가 계신가 봐.”
“사모님은?”
“글세, 그건 나도 잘 몰라. 아무튼 좋지는 않은가봐.”
우리들의 이야기는 이 정도에서 맴을 돌았다. 우리 과에서 이미라가 결혼을 한다고 인사하니까 문예신 교수님께서는 대뜸 하시는 말씀이 “남편에게서 사랑받고 싶거든 시부모에게 잘해야 돼”였다. 그 말의 존재근거를 찾아 들어가면 교수님의 외적 세계와 내적 세계를 눈치챌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유머가 풍부한 교수님은 비유의 천재였다. 이것은 우리 대학에서 뿐 아니라 학계나 예술계에서도 정평이 나있었다. 그러던 교수님께서는 최근 강의도중에 이런 말씀도 하셨다.
“국보 제일호 숭례문이 전소될만하다. 숭례문을 태운 사람은 채씨 한 사람이 아니다. 나와 여러분도 공범이다. 숭례문은 타살인 동시에 자살이다. 누가 왜 자살하게 만들었겠는가. 우리 모두가 그렇게 만들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우리들은 또 다른 숭례문을 불지르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이 공부를 하지 않을 때는 나도 숭례문처럼 죽고 싶었다. 그러나 인생은 일회적이라 죽지 못한다. 죽음도 연습이 가능하다면 당장에 실행하고 싶다. 그러나 인생은 한 번 뿐이다. 내가 저 숭례문처럼 불타면 여러분은 각성할 게 아닌가?”
나는 교수님의 눈에서 심상치 않게 번쩍이는 빛을 보았다. 정신을 꼼짝 못하게 흔들어 깨우는 듯한 힘이 있는 그런 빛이었다. 마치 작두를 타고 춤을 추는 무녀처럼 한번 말씀 삼매경에 이르면 부력에 뜨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교수님의 강의에 홀린 나는 소설이 다 써지면 국화꽃 한 다발과 함께 숭례문에 바쳐야겠다는 생각을 굴리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교수님이 숭례문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적군도 아닌 백성의 손에 불타죽은 숭례문의 슬픔과 치매로 밤낮을 헤매는 노모를 손수 부양해야 하는 교수님의 슬픔, 그리고 인접국들로부터 수없이 물려 뜯겨온 우리 겨레의 슬픔, 초등학교 교정에서 목이 잘린 단군 할아버지의 슬픔, 훈민정음 총살당한 채 한국은행 전속모델로 전락한 세종대왕의 슬픔이 한데 녹아내려서 쏴아 하니 썰물로 빠져나가는 듯한 슬픔을 어쩌지 못할 바에는 불타죽은 숭례문에 꽃이라도 바치고 말겠다는 생각, 바로 그런 기분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또 엉뚱한 데서 터졌다. 중학교 2학년생인 교수님의 따님(문미라)이 행방물명이 되어서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신문에도 방송에도 문예신 교수님의 행방이 묘연한 따님의 기사로 소란했다. 학교에서 1킬로미터 쯤 떨어진 곳에서 책가방이 발견된 것 말고는 행방이 묘연한 채 안타까운 시간이 흘렀다.
그런 가운데서도 교수님께서는 수업 시간에 꼬박꼬박 강의를 하셨으나 결국 지치고 기진맥진이 되어서 강의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다른 교수님들이 강의를 대신 해야 하는 형편에 이르렀다. 그래도 가끔씩 학교에 나오실 때도 있는데,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그 퀭한 눈이라든지, 남루해진 와이셔츠의 깃을 보다가 왈칵 눈물을 쏟을 뻔한 적도 있었다.
조교 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축제기간에 문예진 교수님의 특강이 있으니 우리 과 학생 전원이 참석하라는 내용이었다. 우리 국문과 학생들 이외에도 어떻게 소문을 들었는지 다른 과 학생들도 일찌감치 와서 자리를 잡고 앉아있는 학생도 있었다. 오후 3시부터 인문대학 강당에서 교수님의 특강이 있다고 했는데, 2시 반부터 북적거리더니 3시경에는 강당이 초만원을 이루었다.
나도 교탁 앞 중앙에 자리 잡고 있었다. 교수님은 정확히 정각 세시에 나오셨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는 피어 떨어질 것 같은 가죽 책가방을 들고 다니셨는데 그 책가방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을 주욱 훑어보신 교수님께서는 종이뭉치를 학생들의 앞줄 책상위에 놓으시고는 짤막하게 말씀하셨다.
“내 얘기가 끝난 뒤에 이 용지 한 장씩 가지고 가서 꼭 읽어주기 바래요.”
교수님께서는 책가방 대신 들고 들어온 것은 그 종이뭉치와 석유기름통이었다. 이번에는 그 기름통을 교탁 위로 올려놓기가 무섭게 날랜 동작으로 그 위로 올라가자마자 신나통을 거꾸로 들어 올리셨다. 그리고는 이내 꿀꺽꿀꺽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적시기가 무섭게 라이터 불을 확 켜는 것이었다.
불이 확 붙자 불길이 삽시간에 전신으로 퍼졌다. 참으로 전광석화처럼 짧은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우리들이 미쳐 손 쓸 겨를도 없이, 교수님이 왜 저러신다냐 하고 의아해하는 순간에 참으로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나는 뜨끔했다. 교수님이 나 때문에 죽는다는 생각, 더렵혀진 내 몸과 마음에도 불이 확 붙는다고 생각했다. 여기저기서 경악을 금치 못하는 소리, 찢어지는 비명이 들리는 가운데 교수님은 벌써 가부좌를 하신 자세 그대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신나 불에 활활 타오르고 계셨다. 교수님은 등신불처럼 숭례문처럼 우리들이 놀라 기절하는 가운데 활활 타고 계셨다.